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

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라멕에 관하여 말한 것에서 분명합니다(창4:19,23-24). Hence it appears that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 in Cain; but that all the good of charity afterwards perished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Lamech (verses 19, 23–24).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19, 23-24)

 

해설

AC.384는 바로 앞 AC.383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짧은 설명입니다. AC.383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는 말을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결론짓습니다. 이것은 가인을 선한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것’,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악 때문에 내적인 고통을 느끼고 어느 정도 그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안의 선에 속한 모든 것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상태는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의 어떤 것’이라는 제한된 표현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선이 있었다’고 일반적으로 말하지 않고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라고 합니다. 즉 악이 크게 지배하고 있었지만 선에 반응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AC.383에서 보았듯이 가인은 자기 상태 때문에 내적 고통을 느꼈고,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했습니다. 만일 선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그러한 내적 고통과 인정조차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작은 반응 가능성이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아직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입니다.

 

이 점은 가인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가인은 ‘악’, 아벨은 ‘선’이라는 식으로 두 사람을 단순한 도덕적 인물 유형으로 나누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아닙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리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 상태가 매우 심각하게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선의 가능성이 한순간에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시작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며, 그 결과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어 가는 과정 가운데에서도 아직 선의 어떤 잔여가 남아 있었던 단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384의 후반부는 곧바로 더 어두운 방향을 예고합니다.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라멕에 관하여 말한 것에서 분명하다’고 합니다. 즉 가인에게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이 계속 보존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후대로 내려가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마침내 라멕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체어리티의 선이 완전히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AC.384는 가인의 상태를 설명하는 동시에 창4 후반부의 라멕을 미리 바라보게 하는 연결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창4:19,23-24를 가리키는 것도 이 흐름 때문입니다. 창4:19에서는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는 일이 나오고, 23-24절에서는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그리고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는 라멕의 말이 나옵니다. 이 구절들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번호에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므로 지금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84에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구절들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된’ 후대의 상태를 보여 주는 근거로 미리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단순히 악한 개인들의 계보가 아닙니다. 하나의 영적 원리가 세대를 거치며 어디까지 진행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교리적 계보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구별이 있었고, 그 구별이 분리가 되었으며,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려고 했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단계에서는 자기 악에 대한 어떤 내적 고통과 인정이 가능할 만큼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그 뒤 그 원리가 더욱 악화되어 라멕에 이르면 그것마저 소멸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구별했던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표현을 좀 더 세밀하게 읽게 합니다. 앞 번호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84에서는 다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두 진술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에서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과 주도 원리로서 배척되고 소멸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상태에 속한 사람들 안에서 선에 속한 모든 흔적과 반응 가능성이 그 순간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적 원리의 소멸과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의 어떤 것을 구별하여 보고 있습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가인의 표’를 이해할 때도 중요해질 것입니다. 만일 가인 안에 선에 속한 모든 것이 이미 완전히 소멸되어 아무것도 보존할 것이 없었다면, 왜 주님께서 가인을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AC.384는 아직 그 답을 본격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가인의 상태 안에 아직 보존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가인의 표’는 단순히 악인을 보호하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 아니라,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선의 어떤 것’을 곧바로 ‘리메인스’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직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remains’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라고 말합니다. 더 넓은 AC의 가르침과 연결하여 리메인스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AC.384 자체가 이것을 전문적 의미의 리메인스라고 명시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원문이 말하는 만큼, 곧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고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목회적으로도 이 짧은 번호에는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사람의 상태가 크게 무너져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 안에 선에 반응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의 내면을 우리가 판정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가인조차 자기 악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사람의 외적인 상태만 보고 그의 내면에 남아 있는 모든 가능성을 우리가 판단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의 내면을 아시고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실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결국 AC.384는 가인의 이야기에 매우 중요한 미세한 차이를 넣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악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하는 내적 고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계속 악화되면서 라멕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가인의 타락을 단번에 완성된 상태로 보지 않고 하나의 진행 과정으로 보게 하며, 동시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이후 ‘가인의 표’와 연결하여 바라볼 준비를 하게 합니다.

 

 

 

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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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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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AC.378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는 그 분열로 말미암아 그가 돌아서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 입을 벌려’(which hath opened its mouth)는 그 이단이 그들에게 가르쳤음을 의미합니다. ‘네 아우의 피들을 네 손에서 받아들였은즉’(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은 그것이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의미합니다.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signifies that through the schism he had become averte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signifies that the heresy taught them;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signifies that it did violence to charity, and extinguished it.

 

해설

AC.378은 창4:11의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바로 앞 AC.377에서 ‘땅’은 사람 안에 자리 잡은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이고, 그 안에 선과 진리가 심어지면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며 악과 거짓이 심어지면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78의 ‘땅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도 외적인 토지가 가인을 저주한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시킨 그 분열이 사람 안에 뿌리내림으로써 생긴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를 ‘그 분열로 말미암아 그가 돌아서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에게서 돌아섰느냐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미워하여 그에게서 돌아서신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고 하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 소멸시킨 그 분열로 말미암아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말씀의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저주’를 선언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인간 자신의 악과 거짓이 그를 주님에게서 돌아서게 한 상태가 드러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저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는 질서에서 스스로 돌아선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서 ‘저주’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생명과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돌아서는 것 자체가 저주의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인간을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악과 거짓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생명과 선이 흘러오는 질서에 등을 돌립니다. 햇빛은 계속 비치지만 사람이 스스로 등을 돌리면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둠이 태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태양을 등진 상태에서 생긴 것처럼, 여기서 ‘저주’도 주님의 사랑이 반대로 변한 결과라기보다 가인의 분열이 가져온 영적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땅이 그 입을 벌렸다’는 것은 ‘그 이단이 그들에게 가르쳤음’을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땅이 입을 벌려 피를 받아들였다는 문자적 장면을 스베덴보리는 교리적 가르침의 이미지로 읽습니다. 바로 앞에서 땅은 사람 안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땅에 ‘입’이 있습니다. 입은 말하고 가르치는 기능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분열이 단순히 내면에 잠재된 생각으로 머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리로 표현되고 가르쳐졌다는 것입니다. 가인의 상태는 더 이상 개인적인 마음의 흔들림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원리가 교리로 형성되고 전달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 점은 AC.370의 마지막 문장 ‘그들의 교리는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와 직접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질서가 뒤바뀌었습니다. 이어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을 거부했고,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결국 완전히 배척했습니다. 이제 그 상태가 ‘땅이 입을 벌린다’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즉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가르침이 되어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악과 거짓이 개인의 내적 상태에서 교리로 조직되고 가르쳐질 때 그 영향은 한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심어질 수 있습니다. AC.377에서 사람이 그 안에 심어진 것에 따라 형성된다고 한 설명과도 바로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네 아우의 피들을 네 손에서 받아들였은즉’은 그 이단이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시 ‘피들’이 복수형으로 나타납니다. AC.374에서 이미 그 이유가 설명되었습니다. 사랑에서 모든 선하고 거룩한 것들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미움에서는 모든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피들’이라고 복수형으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아벨의 ‘피들’은 단지 체어리티라는 하나의 추상적 원리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함께 있어야 할 여러 선한 것들이 폭력을 당하고 소멸되는 상태를 포함합니다.

 

특히 ‘네 손에서’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AC.378 자체에서는 ‘손’의 상응을 별도로 풀지 않으므로 여기서 그 의미를 앞질러 자세히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본문 전체에서는 체어리티의 소멸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가인의 분열과 이단이 실제로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한 결과라는 점이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did violence to charity, and extinguished it’이라고 아주 강하게 표현합니다. 단순히 체어리티를 덜 중요하게 여긴 정도가 아니라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78의 세 표현은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을 보여 줍니다. 먼저 ‘땅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분열로 말미암아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선 상태입니다. 그다음 ‘땅이 입을 벌린다’는 것은 그 분열이 이단적 교리가 되어 가르쳐지는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땅이 ‘아우의 피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교리가 실제로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그것을 소멸시킨 결과입니다. 분열이 내면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교리가 되고, 그 교리가 삶과 교회의 사랑을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단’ 역시 오늘날 특정 교파를 정죄하는 말로 성급하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이단이 무엇인지는 이미 문맥 안에서 분명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하고,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AC.378은 다른 사람의 교리를 ‘이단’이라고 판정하기 위한 도구이기 전에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게 합니다. 내가 붙드는 진리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신앙의 정확성을 주장하면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결국 AC.378의 ‘저주’는 주님께서 가인을 버리셨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는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선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분열은 입을 벌려 하나의 가르침이 되었으며, 마침내 아벨의 피들을 받아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주님은 계속 말씀하시고 가인을 부르시지만, 가인의 교리는 점점 더 주님의 질서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 신앙이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자기가 서 있는 땅 자체를 분열의 땅으로 만들지만,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은 선과 진리가 함께 자라나는 주님의 밭이 됩니다.

 

 

 

AC.379, 창4:1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 의지가 실제 사람입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1) AC.379이러한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저주를 받는 것’(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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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7, 창4:10,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 - 무엇이 심어지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집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7여기서 ‘땅’(ground)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밭’(field)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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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9/0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2, ‘다 함께 주를 경배하세’,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92, ‘위에 계신 나의 친구’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6절로 8절, AC 글 번호로는 359번에서 369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6-8)

 

제목은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이며, 다음은 오늘부터 시작하는 ‘3분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기존 성도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과 문맥을 잊지 않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천적인 상태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창4에서는 그 이후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함께 있어야 할 형제이지만,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그 자체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지난주에는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읽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제물을 드렸지만 중요한 것은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그 예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였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지만, 사랑의 생명이 없으면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은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했고 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지난주 리딩이 끝났습니다.

 

오늘은 그 다음 장면입니다. 아직 가인은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먼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십니다. 오늘은 한 가지를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함께 살아야 할 형제이며,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부르시는지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359-369 요약입니다.

 

 

AC.359-369는 앞의 AC.346-358에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 결과 가인이 분하여 얼굴이 떨어진 뒤, 그러니까 안색이 변한 뒤, 주님께서 아직 그에게 돌이킬 길을 열어 주시는 장면에서 시작,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창4:6-8의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리고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말씀을 하나씩 풀면서, 스베덴보리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체어리티 위에 군림하려 함으로써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키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번 구간의 중심은 단순히 ‘가인이 왜 아벨을 죽였는가?’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무엇이 주도해야 하며, 그 질서가 뒤집힐 때 신앙은 어떻게 자기 생명인 체어리티를 잃게 되는가?’에 있습니다.

 

AC.359-360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양심이 말해 주었다’(conscience dictated)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이 떨어졌으며,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그 사이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악이 실제 행위로 완성되기 전에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에 경고하시며 돌이킬 가능성을 열어 두신다는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가인의 상태가 이미 크게 기울어졌어도 주님의 부르심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여기서 ‘양심’이라는 표현은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퍼셉션으로 인도되었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양심으로 인도되었다고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AC.359-360에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한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후대 영적 인간과 똑같은 형태의 완성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미 타락의 길에 들어섰어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딕테이트와 경고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악을 선택하기 전에 끊임없이 선을 향하여 돌이킬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를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못하도록 그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침묵하신 것도 아닙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하시며 그의 상태를 보여 주시고,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고 경고하시며, 아직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 가운데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스스로 악에서 돌아서도록 끊임없이 이끄시는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악이 이미 결정된 운명처럼 진행된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차례의 경고와 돌이킬 가능성에도 불구, 인간이 점차 체어리티를 거부하는 이야기입니다.

 

AC.361부터는 그 돌이킬 길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것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것은 선한 의도가 없다면 체어리티가 없고 오히려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매우 뜻밖의 방식으로 풉니다. 여기서 ‘너를 원하는 것’은 체어리티이며,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질서에 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적대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적 생명을 이루어야 하는 형제입니다. 문제는 가인, 곧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위에 서서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창4:7의 깊은 긴장은 ‘신앙이냐 체어리티냐’가 아니라 ‘누가 주도권을 가지느냐’입니다.

 

AC.362는 이 질서의 전도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가인’은 이제 단순히 한 사람의 내적 상태가 아니라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그 결과 사랑의 자손인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하는 하나의 ‘신앙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느 교회에서든 사람들이 신앙의 어떤 한 조항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 때 이단이 생길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거짓으로 믿어서 이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 가지를 전체보다 앞세우고 그것을 중심으로 나머지 모든 것을 재배열하면서 교리의 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생각을 자신이 발견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거기에 결합하면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사람은 자기가 특별히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에 마음이 사로잡히면 점차 모든 것이 그것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도, 경험도, 다른 교리도 모두 자기 생각을 확증하는 자료처럼 읽히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그것이 거짓이라 해도 틀림없는 진리라고 맹세할 정도가 됩니다. 이것이 AC.362가 보여 주는 가인의 교리가 굳어지는 과정입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사랑 없이 살아감으로써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판타지가 서로 결합하여 그 교리를 더욱 확증했습니다.

 

이 대목은 교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문제는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진리의 한 측면을 전체 질서에서 떼어 내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그 지식을 자기의 발견이나 영적 우월성으로 소유하려 할 때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AC를 읽고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배우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를 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깊은 진리를 안다는 자기 의식을 강화한다면 높은 진리조차 가인의 교리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사랑과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AC.363은 그래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올바른 질서를 매우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결합될 수 있지만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속뜻으로 선한 의도를 가지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의도하는 것(from willing what is good)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 착한 행동 몇 가지를 더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 의지가 선을 향하고 그 선에서 실제 행위가 나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였다’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고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거짓이나 위선을 전혀 몰랐다는 일반적인 역사적 진술로 확대하기보다, 이 문맥에서 다루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특유한 내적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행위가 아직 하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의지를 알 수 있었으며, 속마음과 다른 모습을 밖으로 꾸미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AC.363의 관심은 당시 인류 전체의 사회사를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에게는 행위가 있었고 예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AC.348-349에서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지 외적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지에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한 의지의 궁극적 근원 역시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의지하고 행할 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다시 결합되며 그의 얼굴, 곧 내적인 것들도 다시 들릴 수 있습니다.

 

AC.364에서는 그 반대의 상태가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선한 의도가 없으면 체어리티가 없고,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으며 그 결과 온갖 악이 들어올 준비를 합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것은 악이 아직 완전히 들어와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최종 상태라기보다, 마음 문 앞에서 들어오기를 원하며 기다리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도 떨어졌지만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는 경고와 함께 아직 돌아설 수 있다는 가능성도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죄를 일반적으로 ‘마귀’라고 부르며, 사람이 체어리티를 잃을 때 마귀, 곧 지옥의 무리가 가까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악을 행한 책임을 외부 마귀에게 돌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유입에 관한 가르침에서 인간에게 선과 악의 영향이 유입되지만, 인간은 자유 가운데 어느 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을지를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것은 악이 강제로 인간 안으로 들어온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사라진 마음이 악의 유입을 받아들이기 쉬운 상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C.364는 그 악을 마음 문에서 몰아내는 길을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하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더 강한 자기 의지나 더 많은 종교 지식만으로 악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악을 몰아내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이어져 온 가인의 문제를 정확히 뒤집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복의 길 역시 신앙을 더욱 독립적으로 강화하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이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 안으로 돌아가는 데 있습니다.

 

AC.365는 이 관계를 ‘불꽃’과 ‘빛’이라는 아름다운 비유로 설명합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불꽃에는 열과 빛이 함께 있으며, 열과 빛은 모두 불꽃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불꽃의 열이 없는 빛과 같아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빛’이라고 부릅니다. 겨울에도 빛은 있습니다. 사물을 볼 수도 있고 무엇이 어디 있는지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에는 생명을 일으키는 따뜻함이 없기 때문에 그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습니다.

 

이 ‘겨울의 빛’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성질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에게 성경 지식과 교리적 이해가 있을 수 있고, 상당히 정확하게 진리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습니다. 반대로 이것이 진리나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의 빛을 필요로 하며, 진리는 사랑이 어떻게 지혜롭게 이웃을 섬겨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제는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이 불꽃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존재하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361-365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신앙을 버리고 체어리티만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는 동안에는 참된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이 신앙을 지배해야 한다는 단순한 인간 중심적 명제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시므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진리를 통하여 인간의 삶을 이끈다는 뜻입니다.

 

AC.366에서 마침내 창4:8의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에 이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먼저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고’라는 표현이 ‘시간의 간격’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아벨의 죽음은 가인의 분노 직후 갑자기 일어난 사건으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가인이 분노하고, 얼굴이 떨어지고, 주님의 경고를 받고,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가인의 타락은 이번에도 점진적입니다.

 

여기서 아벨을 거듭 ‘아우’, 곧 ‘형제’라고 부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는 신앙의 적이 아니라 신앙의 형제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한 교회 안에서 함께 태어나 함께 살아야 하는 두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와 무관한 적을 제거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에게 생명을 주어야 할 형제를 죽였다는 뜻입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순간 신앙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의 근원을 잃게 됩니다.

 

또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장소가 ‘들’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들’은 교리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의 소멸은 단순히 감정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리의 ‘들’에서도 일어납니다. AC.362에서 보았듯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는 생각이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고, 그 교리가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낼 때, 바로 그 교리의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교리는 체어리티를 살리는 들이 될 수도 있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AC.367은 그래서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라는 사실을 말씀 전체를 통해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서와 야곱, 베레스와 세라,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말씀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형제와 장자권의 이야기를 가져옵니다. 이 이야기들에는 공통적으로 ‘누가 장자인가’, ‘누가 주도권을 가지는가’라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둘 다 교회의 자손이지만,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어느 것이 앞서는 것처럼 보이는가와 궁극적으로 어느 것이 주도해야 하는가 사이에 긴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야곱과 에서의 관계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와 비슷한 문제를 보여 줍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밀어내려 했으며 장자권과 주도권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궁극적으로 에서로 표상되는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진리와 신앙이 먼저 앞에 서서 사람을 이끄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먼저 말씀을 배우고 무엇이 선인지 알며, 그 진리에 따라 자신을 훈련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진리가 선 안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선과 체어리티가 진리를 이끄는 천국의 질서가 세워집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의 주도권은 진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본래의 목적 안에 두는 것입니다.

 

AC.367의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하신 눅8:21의 말씀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듣는 것’을 신앙에, ‘행하는 것’을 체어리티에 연결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은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마7에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참된 ‘형제 관계’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들은 진리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날 때 이루어집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형제의 언약’은 진리를 듣는 것과 그 진리를 행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형제’라는 말의 의미도 새롭게 보여 줍니다. 같은 교리를 고백하고 같은 교회에 속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영적 형제 관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 서로를 형제라 부른 깊은 이유는 체어리티에 있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말씀을 듣고 행하며, 서로의 쓰임을 위하여 살아갈 때 신앙의 형제 관계가 실제가 됩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연합 역시 단순한 교리적 동일성만이 아니라 진리와 체어리티가 함께 살아 있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AC.368은 AC.366에서 ‘들’이 교리를 상징한다고 한 것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더욱 자세히 확증합니다. 씨를 뿌리는 들, 좋은 씨와 가라지가 함께 있는 들, 밭에 감추인 보화 등 말씀에서 ‘들’은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라 진리와 선이 심기고 자라며 열매 맺는 교리적 영역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장소가 왜 ‘들’이어야 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싸움이 바로 교리의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본래 인간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이유도 결국 그 진리가 삶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교리가 그 목적을 잃고 자기 정당화나 우월성을 위한 체계가 되면, 같은 ‘들’이 오히려 체어리티를 죽이는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리의 참됨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얼마나 정교한가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참된 교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살리고, 인간이 실제 선과 쓰임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들’은 생명의 씨앗이 자라는 장소인 동시에, 그 질서가 뒤집히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AC.369는 지금까지의 설명을 하나로 모아 창4:8의 결론을 밝힙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고,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둘은 본래 형제이고, 들은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둘 다 교회의 교리 안에서 나왔음에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그로 말미암아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를 뜻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의 소멸이 처음부터 ‘체어리티는 필요 없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방식으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먼저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세웁니다. 그러면 체어리티는 신앙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입술로는 사랑과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구원의 본질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전제가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고 말합니다.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이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9는 스베덴보리 당시 기독교의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직접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특정 교파나 종교개혁의 표어를 공격하는 것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영적 질서입니다. 실제로 입술로는 ‘사랑이 없는 신앙은 구원하지 못한다’고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구원하는 본질은 오직 신앙이라고 전제한다면 체어리티는 실제 교리와 삶에서 점차 주변으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내적 모순을 가인의 상태가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59-369 전체를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결코 갑작스럽지 않습니다. AC.338에서 시작된 작은 구별이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되고, AC.346-358에서 그 분리가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로 나타났으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와 내적인 것들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번 구간에서는 주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주도권을 가지려 하고, 그 질서의 전도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며, 마침내 교리의 들에서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구별 → 분리 → 죽은 행위 → 죽은 예배 → 분노 → 내적인 것들의 변화 → 체어리티에 대한 지배 →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하나의 긴 흐름이 창4:8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구간에는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자비의 메시지도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여호와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하셨고, 죄가 아직 문에 있을 때 경고하셨으며, 선을 행하면 다시 얼굴을 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악의 길로 상당히 깊이 들어갔어도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으로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여전히 인간을 향하고 있지만, 가인은 그 얼굴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매우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도 어떤 진리를 다른 모든 것보다 높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고, 내가 옳다는 확신 때문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교리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진리를 변호한다는 이유로 체어리티를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말씀과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우리에게도 들려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웃을 지혜롭게 사랑할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가인의 이야기는 더욱 조심스러운 자기 점검을 요구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를 많이 배운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안다’는 생각이 자라나고,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쉽게 판단하거나 그 안에 있는 선과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된다면 바로 우리가 공부하는 ‘교리의 들’에서 아벨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참된 교리는 사람을 높이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게 하며,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리여야 합니다.

 

결국 AC.359-369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옳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가 가진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를 묻습니다. 내가 알고 믿는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따뜻해지고 있는지, 아니면 많은 빛은 있지만 열이 없는 ‘겨울의 빛’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고 자기 형제로 받아들이며, 체어리티 안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이번 AC.359-369는 앞의 AC.346-358에서 나타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결정적인 구간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처음에는 여전히 행위하고 예배하며 진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리가 계속되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려 하고, 교리적으로 그 질서를 정당화하며,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이 과정을 거꾸로 돌리는 일입니다. 진리가 다시 선을 섬기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며, 우리가 듣는 말씀을 실제로 행하고,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한 쓰임으로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 안에서 매일 일어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가인과 아벨이 형제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빛이 체어리티의 불꽃에서 나오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아는 것과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점차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가 회복될 때 우리의 신앙은 더 이상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는 ‘겨울의 빛’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열을 품고 이웃을 살리는 살아 있는 빛이 됩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 (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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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0,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다시 확인되는 양심의 딕테이트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0‘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가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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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1, 창4:7,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1-365)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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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2, 창4:7,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가인의 교리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2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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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3, 창4:7,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3‘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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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4,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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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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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다 -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다 (AC.366-36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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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7, 창4:8,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입니다 - 장자권과 주도권의 속뜻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7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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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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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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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61, 창4:7,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1-365)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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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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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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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어서 성찬 있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9-06(D1)

 

2667, 4, 창4.4, 2026-09-06(D1)-주일예배(창4,6-8, AC.359-369, 성찬),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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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30, 창4:3-5, AC.346-358),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

※ 오늘(2026/08/3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1, ‘홀로 한 분 하나님께’, 찬91, ‘슬픈 마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346번에서 358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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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

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라는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둘 다 신앙의 교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그로 말미암아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킬 수밖에 없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없으면 신앙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입술로 고백하면서도, 바로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그 전제 자체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From this then it follows that the words “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 denote that while both faith and charity were from the doctrine of faith, yet faith separate from love could not but disregard and thereby extinguish charity; as is the case at the present day with those who maintain that faith alone saves, without a work of charity, for in this very supposition they extinguish charity, although they know and confess with their lips that faith is not saving unless there is love.

 

해설

AC.369는 앞의 여러 단락에서 하나씩 설명해 온 상응을 창4:8의 한 장면 안에 다시 모아 줍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형제’는 본래 서로 결합되어야 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들’은 교리,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라는 말씀은 단순히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죽인 사건을 넘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의 영역에서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신앙과 체어리티가 둘 다 신앙의 교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처음부터 전혀 관계없는 두 원리가 아니었습니다. AC.367에서 이미 보았듯이 둘은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형제입니다. 참된 교리 안에는 신앙도 있고 체어리티도 있습니다. 진리를 믿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은 본래 하나의 교회적 삶 안에서 함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구원의 원리로 세울 때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먼저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disregard)고 합니다. 처음부터 ‘체어리티는 필요 없다’고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구원의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고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는 순간 이미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참된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덧붙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신앙에 생명을 주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깊은 의미입니다.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은 단순히 체어리티의 위치를 조금 낮추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로 말미암아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고 말합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구원하는 신앙으로 세워지면,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사는가는 구원의 본질에서 점차 밀려나게 됩니다. 입술로는 사랑과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교리의 구조 자체가 그것들을 구원의 본질에서 제외한다면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점점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AC.369 후반은 스베덴보리 당시의 기독교를 향한 매우 직접적인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인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계속 보았듯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이며 둘 다 교회의 자손입니다. 문제는 ‘신앙만으로’라는 분리입니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그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만드는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과 분리됩니다.

 

더욱 날카로운 것은 그들이 체어리티의 필요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도 ‘사랑이 없으면 신앙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교리적으로는 ‘사랑도 중요합니다’, ‘선한 삶도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은 오직 신앙만으로 받는다’고 전제한다면, 사랑과 체어리티는 결국 구원의 본질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내적인 모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특정 교파의 교리 문구를 공격하기 위한 설명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하나의 역사적 교리 논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려는 영적 경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나는 오직 신앙만을 주장하지 않으니 가인과 관계없다’고 쉽게 지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 올바른 교리를 고백하는 것, AC의 속뜻을 이해하는 것을 실제 사랑과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다면 같은 질서의 전도가 우리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알고,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영적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지식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여기고,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실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바로 그 교리의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높은 진리라 할지라도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지 않고 살립니다. 진리를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더 분명히 보게 되며,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에게서 생명을 받고, 체어리티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우며, 둘은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됩니다.

 

따라서 AC.369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어쩌면 ‘죽였다’보다 그 앞의 ‘중요하지 않게 여겼다’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소멸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사랑보다 신앙을 조금 더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다음에는 체어리티를 신앙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며, 마침내는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 자체가 사람을 구원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AC.338부터 이어져 온 가인의 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먼저 그 자체로 어떤 것으로 구별되고, 점차 사랑에서 분리되고,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를 낳으며,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고,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소멸시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당신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만을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내가 믿고 고백하는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면 입술로는 체어리티를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을 신앙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밀어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 형제를 죽이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와 함께 살며,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의 궁극적인 근원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모든 선과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이십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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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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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창4:8)

 

AC.366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고’(Cain spake to Abel)는 시간의 간격을 상징합니다. ‘가인’(Cain)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Abel)은 신앙의 형제인 체어리티를 상징하며, 이런 이유로 여기서는 아벨을 두 번이나 가인의 ‘아우’(brother)라고 부릅니다. ‘들’(field)은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는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상징합니다. “Cain spake to Abel” signifies an interval of time. “Cain,” as before stated, signifies faith separated from love; and “Abel” charity, the brother of faith, on which account he is here twice called his “brother.”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signifies that separated faith extinguished charity.

 

해설

AC.366에서 마침내 창4의 결정적인 사건, 곧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면에 이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AC.338부터 이어진 설명을 따라왔다면, 이 사건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기 시작했고, 그 구별이 점차 분리가 되었으며, 분리된 신앙에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나왔습니다. 이어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가인의 분노가 일어나고 안색이 변했으며,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주도권을 가지려 했습니다. 이제 그 과정의 마지막 단계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먼저 매우 흥미로운 것은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였고’(Cain spake to Abel)를 스베덴보리가 ‘시간의 간격’(an interval of time)이라고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개역개정 창4:8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라고 되어 있지만, 무엇을 말했는지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여기서 그 대화의 내용을 추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표현이 하나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기까지 일정한 시간이 있었음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흐름에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 즉시 도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C.346에서는 이미 ‘세월이 지난 후에’가 시간의 진행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59-365에서는 가인이 분노하고 안색이 변한 뒤에도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며, 선을 행하면 얼굴을 들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체어리티 역시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죽음은 최초의 작은 구별이 생긴 바로 그 순간 일어난 일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점차 멀어져 마침내 그것을 완전히 배척하기에 이른 결과입니다.

 

이 점은 영적으로도 중요합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어떤 악이 완성되는 과정 역시 대개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생각이나 애정으로 나타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확증하면서 점차 의지의 일부가 되며, 마침내 삶으로 굳어집니다. 물론 AC.366 자체가 이러한 거듭남의 심리적 단계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지나치게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가인의 상태가 시간의 진행을 거쳐 아벨을 소멸시키는 단계까지 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음으로 스베덴보리는 다시 ‘가인’과 ‘아벨’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faith separated from love)이고, 아벨은 ‘신앙의 형제인 체어리티’(charity, the brother of faith)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표현은 ‘신앙의 형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때문에 이 절에서 아벨을 두 번이나 가인의 ‘아우’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61-365와 매우 깊이 연결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아벨은 가인의 적이 아니라 ‘아우’입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비로소 참된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의 적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본래 자기와 하나를 이루어야 할 ‘형제’를 제거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사건의 비극성이 있습니다.

 

더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신앙 자체도 결국 생명을 잃습니다. AC.365의 비유를 빌리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빛이 자기에게 생명을 주는 불꽃의 열을 제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빛은 잠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교리도 있고, 종교적 지식도 있고, 예배도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울의 빛’입니다. 체어리티라는 열이 사라졌으므로 그 안에서는 결국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AC.366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중요한 상응이 ‘들’(fiel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들은 교리에 속한 모든 것(whatever is of doctrine)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아무 곳에서나 일어난 것이 아니라 ‘들’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속뜻으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충돌이 바로 ‘교리에 속한 것들’ 가운데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앞의 AC.362를 떠올리게 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어떤 것을 붙잡아 그것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들을 부풀게 하자 모든 것이 자기 생각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나의 교리적 입장이 삶의 질서를 뒤집었습니다. 이제 AC.366에서는 바로 그 교리의 영역인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들’은 교리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교리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어떻게 세워져 있느냐입니다. 교리가 신앙을 체어리티와 결합시키고, 진리를 선으로 인도하며,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끈다면 그 교리는 생명을 섬깁니다. 그러나 교리가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무엇을 믿느냐’를 ‘어떻게 사느냐’와 떼어 놓으며,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 ‘들’에서 아벨이 죽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이야기는 교회의 역사에서도 반복될 수 있고,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어떤 교리적 문제를 붙들고 그것이 너무 중요해진 나머지 그 교리를 지키기 위해 이웃을 미워하고, 정죄하고, 체어리티를 버린다면 외적으로는 ‘진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적으로는 가인이 아벨을 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가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진리의 올바른 질서가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특히 앞서 AC.362에서 살펴본 ‘이단’의 형성과 연결하면 더욱 선명합니다. 이단은 반드시 처음부터 완전한 거짓을 선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신앙 항목을 전체보다 앞세워 ‘주된 것’으로 만드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마침내 교리의 영역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들에서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넘어, 교리 안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배제하는 비극적인 교회적 상태를 묘사합니다.

 

여기서 ‘소멸시켰다’(extinguished)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체어리티가 약해졌다거나 뒤로 밀려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상태가 이제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AC.361에서는 체어리티가 아직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AC.364에서는 죄가 아직 ‘문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AC.366에서는 그 문턱을 넘어섭니다. 체어리티를 지배하려던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제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59-366의 흐름은 매우 엄중합니다. 얼굴이 떨어졌을 때, 곧 안색이 변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문에 있을 때에도 경고하셨습니다.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아직 돌아설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계속 자기의 주도권을 고집하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갑니다. 악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받아들이고 확증할수록 점차 자기 것이 되고 결국 삶의 질서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앞서 우리가 살펴본 ‘가인의 진행 과정’이 이제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그 구별 자체가 곧 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그 자체로 어떤 것’으로 여기면서 사랑으로부터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체어리티 없는 행위가 나타났고,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나타났으며, 체어리티가 떠나자 분노와 내적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어 신앙은 체어리티보다 위에 서려고 했고, 자기 사랑과 환상으로 자신의 입장을 확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리의 ‘들’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구별 → 분리 → 죽은 행위 → 죽은 예배 → 분노와 내적 상태의 변화 → 체어리티에 대한 지배 → 체어리티의 소멸.’

 

이 흐름을 보면 왜 처음의 ‘구별’과 이후의 ‘분리’를 정확히 구별해야 하는지도 다시 분명해집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구별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진리에 속하고, 체어리티는 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별된 것이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면서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눈의 빛과 몸의 열이 다르다고 해서 생명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온 창4의 속뜻을 매우 실제적인 질문으로 돌려놓습니다. ‘나는 가인인가, 아벨인가?’라고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어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끌고 있는지, 아니면 그 진리를 가지고 이웃을 판단하고 있는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교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더욱 살아 있게 하는지, 아니면 그 교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더욱 조심스럽게 다가옵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기존의 성경 해석과 다른 깊은 의미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가인의 위험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을 알고, 저 사람들은 모른다’는 자기 사랑이 들어오면, 매우 높은 진리조차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가지고 다른 교회나 다른 그리스도인을 낮추고 체어리티를 잃는다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바로 그 일을 우리 안에서 반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는 언제나 아벨을 살려야 합니다. 진리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무기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더욱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비추는 빛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루는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둘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신앙은 더 이상 겨울의 빛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따뜻한 빛이 됩니다.

 

결국 AC.366에서 아벨의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의 장면을 넘어 ‘체어리티가 교회 안에서 소멸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떼어내고, 신앙을 사랑보다 높이며, 그 신앙을 자기 사랑으로 확증하는 작은 질서의 전도가 계속될 때, 마침내 일어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미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직 죄가 문에 있을 때, 아직 아벨이 살아 있을 때, 아직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고 있을 때, 돌아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66은 지금까지의 가인 이야기에 하나의 무거운 마침표를 찍습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는 것은 결국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체어리티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 자신도 생명의 열을 잃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은 결국 자기 신앙의 생명까지 죽이는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AC.367, 창4:8,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입니다 - 장자권과 주도권의 속뜻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7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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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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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0-16)

 

AC.330

‘핏소리’(voice of bloods)는 소멸된 체어리티를(10절),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curse from the ground)는 왜곡된 교리를(11절),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wanderer in the earth)는 거기에서 비롯된 거짓과 악을(12절) 각각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에 처할 위험에 놓였습니다. (13-14절)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으므로, 신앙은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되었으며, 이것이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mark set upon Cain)으로 의미됩니다. (15절)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주한 것’(Cain dwelling toward the east of Eden)은 신앙이 이전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을 나타냅니다. (16절) Charity extinguished is called the “voice of bloods.” (verse 10); perverted doctrine, the “curse from the ground.” (verse 11); the falsity and evil originating thence, the “fugitive and wanderer in the earth.” (verse 12) And as they had averted themselves from the Lord, they were in danger of eternal death. (verses 13–14) But as it was through faith that charity would afterwards be implanted, faith was made inviolable, and this is signified by the “mark set upon Cain.” (verse 15) And its removal from its former position is denoted by “Cain dwelling toward the east of Eden.” (verse 16)

 

해설

AC.330은 창4:10-16 전체의 속뜻을 한꺼번에 압축하여 보여 주는 중요한 개요입니다. 앞의 AC.325-329에서 사랑과 신앙의 분리로 시작된 과정은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 곧 체어리티의 소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AC.330은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소멸된 체어리티는 ‘핏소리’로, 왜곡된 교리는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로, 거기에서 비롯된 거짓과 악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끝까지 진행되면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켜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가장 어두운 지점에서 뜻밖의 반전이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십니다. 훗날 체어리티가 바로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핏소리’는 소멸된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창4:10의 개역개정은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원문의 복수형을 살려 ‘voice of bloods’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피라는 물질 자체가 아니라 앞의 AC.329에서 아벨의 죽음으로 표상된 체어리티의 소멸입니다. 따라서 ‘핏소리’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회적 상태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는 왜곡된 교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신앙과 교리에 속한 것들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진리가 선과의 결합을 잃으면 교리 역시 본래의 질서를 잃고 왜곡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길은 단순히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라는 정지된 상태에 머물지 않습니다. 분리가 계속되면서 교리가 왜곡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 결과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로 묘사되는 거짓과 악입니다. AC.330은 이 거짓과 악이 왜곡된 교리에서 비롯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 있을 때 삶의 방향을 제시하지만, 교리가 왜곡되면 생각과 삶 역시 그 왜곡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피하며 유리하는 자’라는 표현은 단순히 가인이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게 되었다는 문자적 의미를 넘어, 왜곡된 교리에서 생겨나는 거짓과 악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상태는 더욱 심각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AC.330은 ‘그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에 처할 위험에 놓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서 돌아서셨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돌아선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죽음의 위험’은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시는 변덕스러운 심판이라기보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향으로 스스로 나아간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AC.330의 놀라운 반전이 나타납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생각하면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 역시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였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십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AC.330 전체의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인이 보호받은 것은 가인의 상태가 옳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승인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장차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에게 심어질 때 신앙이 그 통로로 사용되어야 했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는 분리된 신앙에 대한 승인의 표가 아니라 미래의 구원을 위하여 신앙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이 점은 앞의 AC.328과 연결하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세워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질서가 뒤집힌 것이었습니다. 이제 인간 편에서는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주님께서는 신앙마저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장차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질 길을 남겨 두십니다.

 

여기에는 태고교회 이후의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도 들어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상실되어 감에 따라 이후에는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길이 중요해집니다. AC.330은 아직 그 전체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로 그 이후의 질서를 미리 보여 줍니다.

 

따라서 ‘신앙은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되었다’는 말을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신앙이 보존된 이유는 신앙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리가 보존되는 이유는 선으로 이끌기 위해서이고, 신앙이 보존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하여 인간이 다시 체어리티의 삶으로 인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주하였다’는 것은 신앙이 ‘이전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도 AC.330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이제 이전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래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에서는 신앙이 사랑 안에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의 분리 이후에는 그 이전의 위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보존되지만 그 위치와 기능에는 변화가 생깁니다.

 

이렇게 AC.330을 전체적으로 보면 두 흐름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인간 편에서는 ‘체어리티의 소멸 → 교리의 왜곡 → 거짓과 악 → 주님에게서 돌아섬 → 영원한 죽음의 위험’이라는 하강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 편에서는 바로 그 무너진 상태 속에서도 장차 다시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신앙을 보존하시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갈라놓았지만, 주님께서는 그 갈라진 신앙마저 미래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AC.330은 단순한 심판의 개요가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그 타락보다 더 깊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가인은 보존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언젠가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가인의 표’가 가진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심화

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 심화 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 심화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역시 ‘가인의 표’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보면 가인은 부정적인 것의 연속입니다. 사랑에서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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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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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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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창4:8-9)

 

AC.329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것’(Cain slaying his brother Abel)으로 묘사됩니다. (8절) That charity was extinguished in those who separated faith, and set it before charity, is described by “Cain slaying his brother Abel.” (verses 8–9)

 

해설

AC.329는 매우 짧지만 창4의 속뜻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지점입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무엇을 나타내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단지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살해한 사건의 속뜻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른 교회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결과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AC.325부터 하나의 과정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었습니다.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와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가 서로 달라졌습니다.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그리고 AC.328에서는 그럼에도 체어리티가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으려 했고, 이제 AC.329에서 그 과정이 끝까지 진행되어 체어리티 자체가 소멸됩니다.

 

따라서 아벨의 죽음은 사랑과 신앙 사이의 단순한 의견 차이나 긴장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결합을 거부하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자기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로 인정하지 않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아벨이라는 사람이 체어리티를 표상하기 때문에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가인’이 단순히 신앙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신앙 자체가 체어리티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AC.325에서부터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나타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기를 원하며,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뒤 자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세우고, 더 나아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328과 AC.329의 연결은 매우 중요합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아벨은 가인을 죽이지 않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마침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되면, 체어리티가 소멸되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결합과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소멸되었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에서 체어리티 자체가 완전히 없어졌다거나 주님께서 더 이상 체어리티를 주실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29가 말하는 것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그 교회적 상태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문장을 당시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여 ‘그 시대의 모든 인간에게 체어리티가 사라졌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별은 이후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만일 이 시점에서 세상의 모든 선과 체어리티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면 이후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지는 과정이나 셋과 에노스의 계열을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창4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특정한 교회적 계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 주며, 동시에 주님께서는 인간에게서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 섭리하십니다.

 

오늘의 교회와 개인에게 적용할 때에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아벨을 죽인다’는 것을 특정 교파나 특정 사람에게 붙여 ‘저 사람에게는 체어리티가 없다’고 판정하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믿는 것을 실제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올바른 교리를 고백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소멸은 반드시 사람이 모든 선행을 즉시 중단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외적으로는 종교적 활동과 도덕적인 행동이 계속될 수도 있습니다. 가인도 이미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교리가 삶의 선과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외적인 종교성은 남아 있으면서도 내적인 질서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의 심각성입니다.

 

특히 말씀과 교리를 깊이 공부하는 사람에게 AC.329는 무거운 경고가 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 지식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고 오히려 자기 지성을 높이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수단이 된다면 진리의 목적이 뒤집힐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목적 역시 속뜻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보고 피하며, 주님께 받은 선을 실제 삶에서 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29의 한 문장은 창4 전체에서 매우 무겁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결말처럼 갑자기 등장하지 않습니다.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인 끝에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되는 긴 과정의 결과입니다.

 

이제 창4의 문제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갑니다. 아벨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체어리티가 소멸된 신앙은 어떻게 되는가, 주님께서는 그러한 신앙을 완전히 없애시는가, 아니면 그 안에 아직 보존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가인은 심판을 받고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지만, 동시에 그에게 ‘표’가 주어집니다. 따라서 AC.329의 체어리티 소멸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가 그처럼 무너진 상태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새로운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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