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2
‘지키는자’(keeper)가된다는것은섬기는것을의미합니다.유대교회에서‘문지기들’(doorkeepers)과‘문을지키는자들’(porters),곧문지방을지키는자들이그러했습니다.신앙이체어리티의‘지키는자’라고불리는것은신앙이체어리티를섬겨야하기때문입니다.그러나‘가인’이라하는교리의원리에따르면신앙이지배해야했으며,이는7절에서설명한바와같습니다. To be a“keeper”signifies to serve, like“doorkeepers”and“porters”(that is, the keepers of the threshold) in the Jewish church.Faith is called the“keeper”of charity, from the fact that it ought to serve it, but it wa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the doctrine called“Cain”that faith should rule, as was said in verse 7.
해설
AC.372는 창4:9에서 가인이 한 말 가운데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의 ‘지키는자’(keeper)를 설명합니다. 바로 앞 AC.370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대답이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거부했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72에서는 왜 ‘지키는자’라는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나타내는지를 설명합니다. 결론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이체어리티의지키는자라고불리는것은신앙이체어리티를섬겨야하기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질문은 단순히 ‘내가동생을보호할책임이있습니까?’라는 책임 회피를 넘어, 속뜻에서는 ‘왜신앙이체어리티를섬겨야합니까?’라는 영적 질서에 대한 거부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지키는자’가 ‘섬기는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유대교회의 문지기들을 예로 듭니다. 문지기는 문이나 문지방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집이나 성전 자체의 주인이 아니라 그곳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역할은 자신이 지키는 것을 대신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온전히 기능하도록 섬기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이미지가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적용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의 ‘지키는자’입니다. 신앙의 진리들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어떤 악을 죄로 여겨 피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체어리티를 보호하고 인도하며 체어리티가 삶에서 올바르게 나타나도록 섬깁니다.
여기서 ‘신앙은체어리티를섬긴다’는 말을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지기가 집을 섬긴다고 해서 문지기의 역할이 불필요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진리가 없으면 인간은 자기가 선이라고 느끼는 것을 곧바로 참된 선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선한 의도만으로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를 언제나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사랑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해서 진리가 불필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문제는 둘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의 창4:7, 특히 AC.361-365에서 살펴본 ‘주도권’의 문제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372마지막에서 ‘이는7절에서설명한바와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바로 그 논의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AC.372를 이해하려면 ‘신앙과체어리티가운데어느것이먼저생기는가?’라는 시간적 순서보다 ‘둘이결합된뒤무엇이무엇을위해존재하는가?’라는 목적과 주도권의 질서를 보아야 합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에서는 진리를 먼저 배우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과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최종적인 질서에서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며,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깁니다.
이 점은 방금 AC.371에서 살펴본 ‘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가주어졌다’는 말과도 잘 연결됩니다. 홍수 후 영적 인간에게서는 먼저 말씀과 계시된 진리를 배우고, 그것으로 양심이 형성되며,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질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신앙을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진다고 해서 신앙이 체어리티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와 모든 선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신앙은 주님께서 인간을 체어리티로 이끄시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긴다는 AC.372의 설명과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진다는 AC.371의 설명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께 읽을 때 영적 인간의 질서가 더 선명해집니다. 진리가 먼저 의식에 들어올 수 있지만, 그 진리가 궁극적으로 섬기는 것은 선이며, 신앙이 살아 있게 되는 것은 체어리티 안에서입니다.
반대로 ‘가인’이라 하는 교리는 이 질서를 뒤집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의교리의원리에따르면신앙이지배해야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가인의 문제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다음에는 사랑과 분리하며, 나중에는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 결과 아벨, 곧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그리고 아벨을 죽인 뒤에는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말합니다. 결국 ‘나는체어리티를섬기지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신앙이 자신의 올바른 기능을 거부하고 오히려 주인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할 때 체어리티가 소멸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면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어떤 교리를 정확히 고백하는가, 어떤 진리를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이해하는가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진리가 사람을 사랑과 쓰임으로 인도하기보다 자기의 의로움과 우월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진리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용하는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졌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그것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게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키는자’라는 표현에는 단순한 보호 이상의 아름다운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도록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키고, 좋은 의도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도록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킵니다. 또한 감정적인 호의만을 체어리티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무엇이 이웃의 참된 선인지를 말씀의 진리가 밝혀 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키는 목적은 진리가 왕좌에 앉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더 순수하고 지혜롭게 쓰임을 행하도록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체어리티의 ‘문지기’와 같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 교회와 개인의 신앙을 살피는 데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교리가 정확하고 성경 지식이 많으며 신앙고백이 분명한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을 더 겸손하게 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고,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도록 섬기지 않는다면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강조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가볍게 여기는 것도 올바른 질서는 아닙니다. 문지기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문지기가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며, 선과 진리 모두의 근원과 주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결국 AC.372는 가인의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는 질문에 속뜻으로 매우 분명한 대답을 줍니다. ‘그렇다.신앙은체어리티의지키는자가되어야한다.’ 그러나 가인의 교리는 그 질서를 거부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지배하려 했으며, 그 결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따라서 이 짧은 번호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 전체의 핵심을 다시 압축합니다. 참된 신앙의 위대함은 체어리티 위에 군림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로 체어리티를 지키고 섬기며,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데 있습니다.
※오늘(2026/09/06)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2, ‘다함께주를경배하세’, 찬230, ‘우리의참되신구주시니’, 찬92, ‘위에계신나의친구’입니다.
오늘은창4절별 주석 그 세 번째, 6절로 8절, AC글 번호로는 359번에서 369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4:6-8)
제목은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이며, 다음은오늘부터 시작하는 ‘3분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기존 성도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과 문맥을 잊지 않기 위한 시간입니다.
이두경우뿐아니라이와비슷한다른경우들에서도장자권과그에따른주도권을둘러싼다툼이있습니다.신앙과체어리티는둘다교회의자손이기때문입니다.신앙은이장1절의가인처럼‘사람’(man)이라하고,체어리티는사19:2,렘13:14및다른곳들에서처럼‘형제’(brother)라합니다. and in both of these, as well as in other similar cases, there is a dispute about the primogeniture and the consequent dominion.For both faith and charity are the offspring of the church.Faith is called a “man,” as was Cain, in verse 1 of this chapter, and charity is called a “brother,” as in Isa. 19:2; Jer. 13:14; and other places.
앞에서말한것처럼야곱과에서가상징하는것도가인과아벨이상징하는것과비슷했습니다.야곱역시자기형에서를밀어내려했는데,이는호세아에서도분명합니다. Similar to the signification of Cain and Abel was that of Jacob and Esau, as just said; in that Jacob also was desirous of supplanting his brother Esau, as is evident also in Hosea:
그러나에서,곧에서로표상된체어리티가마침내주도권을가지게될것이라는사실은그들의아버지이삭의예언에서나타납니다. But that Esau, or the charity represented by Esau, should nevertheless at length have the dominion, appears from the prophetic prediction of their father Isaac:
AC.367은 직전 AC.366에서 아벨을 거듭 ‘가인의아우’, 곧 ‘형제’라고 부른 이유를 말씀 전체의 표상을 통해 확증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하지만,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적대하는 두 원리가 아닙니다. 둘은 모두 ‘교회의자손’이며 서로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와 아무 관계도 없는 어떤 것을 제거했다는 뜻이 아니라, 본래 자기와 하나를 이루어야 할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형제’라는 표현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형제 관계가 가인과 아벨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반복된다고 설명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에서와 야곱입니다. 두 사람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이지만 장자권을 둘러싸고 다툽니다.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을 얻으려 하고 결국 아버지 이삭의 축복까지 대신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이야기를 단순한 가족 간의 재산이나 상속 문제로만 보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무엇이 먼저이며 무엇이 주도권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영적 질서의 문제로 읽습니다.
이 때문에 AC.367은 에서와 야곱뿐 아니라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은 베레스와 세라,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까지 언급합니다. 이 이야기들에서도 누가 먼저 태어나며 누가 장자의 위치와 축복을 얻는가 하는 문제가 반복됩니다. 자연적인 관점에서는 단지 가족 계보에서 벌어진 특이한 사건들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에서 반복되는 ‘장자권’과 ‘주도권’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질서와 깊이 연결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교회의 자손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장자의 자리에 있으며 어느 것이 다른 것을 이끄느냐 하는 문제가 이렇게 여러 형제 이야기를 통해 표상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시간적인 순서로 이해하여 ‘체어리티가먼저생기고그다음신앙이생긴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사람이 먼저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경험상 진리와 신앙이 먼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선이며, 신앙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체어리티입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진리는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하고, 마침내 선이 진리를 이끄는 질서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장자권과 주도권은 단순히 ‘무엇이시간적으로먼저나타났는가?’보다 ‘무엇이궁극적으로다른것에생명을주고그것을이끄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367은 바로 앞 AC.365의 설명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를 불꽃에, 신앙을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에 비유했습니다. 불꽃에서 열과 빛이 나오듯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나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기가 주도권을 가지려 하면 그것은 불꽃의 열이 없는 ‘겨울의빛’과 같아집니다. 빛은 있으나 생명을 살리는 따뜻함이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습니다. AC.367에서 반복되는 장자권의 다툼도 결국 이와 같은 질서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야곱과 에서가 가인과 아벨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야곱 역시 자기 형 에서를 밀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호12:2-3을 인용하여 야곱이 모태에서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말씀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야곱이 영원히 에서를 지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삭의 예언에는 에서가 마침내 그 멍에를 자기 목에서 떨쳐버릴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에서로 표상되는 체어리티가 마침내 주도권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읽습니다. 신앙이 먼저 앞에 서고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려 할 수 있지만, 주님의 질서에서는 결국 체어리티가 신앙을 이끄는 위치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에서를 ‘이방인의교회,곧새교회’, 야곱을 ‘유대교회’와 연결합니다. 이것 역시 단순히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이방인들은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표상하는 경우가 있고, 유대교회는 진리와 교회의 외적인 것들을 맡아 보존한 교회를 표상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형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들이 나오며, 초대교회에서도 사람들을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형제’라 불렀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교회의 참된 형제 관계는 단순히 같은 조직에 속하거나 같은 교리 문장을 말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 안에서 서로 결합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AC.367의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등장하면서 이 모든 설명이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로 들어옵니다. 주님께서는 ‘내어머니와내동생들은곧하나님의말씀을듣고행하는이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눅8:21).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듣는것’을 신앙과, ‘행하는것’을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말씀을 듣고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들은 말씀이 삶으로 들어가 행함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형제가 된다는 것은 바로 진리를 듣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7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행위로 신앙의 공로를 보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63에서 이미 보았듯이 참된 ‘행함’은 단순한 외적 행동이 아니라 선을 의도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선의 궁극적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행한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가 체어리티가 되어 의지와 삶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형제’라는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아벨은 가인의 경쟁자가 아니었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의 AC.361과 AC.365에서 보았듯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도 체어리티도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둘이 결합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와 함께 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그 위에 서서 주도권을 가지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질서가 끝까지 진행되었을 때 가인은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AC.367은 단순히 성경에 나오는 여러 형제 이야기를 설명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베레스와 세라,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내안에서신앙과체어리티는형제로함께살고있는가,아니면신앙이체어리티를밀어내고그위에서려하는가?’ 많은 진리를 알고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신앙은 자기 형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의 인도를 받아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형제’라 하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AC.367의 중심입니다.
AC.361-365를 따라오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단순히‘신앙과체어리티가운데어느것이더중요한가?’라는 비교가 아니라, ‘둘이어떤질서로결합되어야하는가?’라는 문제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집니다.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합니다.그러므로 체어리티는 신앙을 밀어내지 않습니다.오히려 신앙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문제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AC.365는 이를 아주 단호하게 정리합니다. ‘신앙이주도권을가지려하는동안에는신앙이아니며,체어리티가주도할때비로소신앙이된다.’이 말은 스베덴보리의 신앙 이해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왜 그렇습니까?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명제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지적 동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신앙은 진리에 속한 것이고,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진리가 선에서 떨어져 독립하려 하면 그것은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옵니다.다시 말해 신앙은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습니다.그래서 체어리티는 신앙의 곁에 붙어 있는 부수적인 덕목이 아니라,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생명입니다.
이 점을AC.365는 불꽃과 빛의 비유로 설명합니다.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불꽃에는 열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열은 사랑에,빛은 진리에 해당합니다.불꽃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사랑에서 진리가 생명을 얻습니다.그리고 열과 빛이 함께 있을 때 생명이 자랍니다.봄과 여름의 햇빛이 그러합니다.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함이 함께 있기 때문에 씨앗이 싹트고,나무가 자라고,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불꽃에서 열을 제거하고 빛만 남기면 어떻게 될까요?스베덴보리는 그것을‘겨울의빛’이라고 합니다.겨울에도 분명 빛은 있습니다.오히려 맑은 겨울날의 빛은 아주 선명할 수 있습니다.사물의 윤곽도 또렷하게 보입니다.그러나 생명을 일으키는 열이 없습니다.그래서 땅은 굳고,나무는 얼며,생명 활동은 멈춥니다.바로 이것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모습입니다.진리에 관한 지식은 있을 수 있고,교리를 매우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있으며,논리적으로는 빈틈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참된신앙’을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다시 묻게 합니다.흔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지,교리를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하는지,성경을 얼마나 바르게 해석하는지를 신앙의 중요한 척도로 생각합니다.물론 그것들은 중요합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은‘그진리가나를어떤사랑으로이끌고있는가?’입니다.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고,이웃을 더 선하게 대하며,자기 사랑을 내려놓고,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의 열을 가진 살아 있는 빛입니다.반대로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자기 우월감이 커지고,다른 사람을 판단하고,자기 교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한다면 그 빛은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가인은 신앙을 버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오히려 신앙을 너무 높였습니다.AC.362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그 순간 질서가 뒤집혔습니다.본래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를 섬겨야 했지만,오히려 사랑과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했습니다.그래서AC.361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신앙이 그것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AC.363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한다고 했고,이제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에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체어리티가주도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할까요?이것을‘사랑이중요하니교리는별로중요하지않다’거나‘착하게살기만하면무엇을믿든상관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그것은 스베덴보리의 뜻과 거리가 멉니다.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기 때문입니다.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무엇이 참된 선인지,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어떤 것이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진리 없는 사랑은 쉽게 맹목적인 애정이나 자기 방식의 친절로 흐를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신앙과 체어리티는 반드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 결합에서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는 분명해야 합니다.진리는 선을 위해 있고,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있습니다.우리는 진리를 알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진리를 통하여 선을 사랑하고 행하기 위해 삽니다.교리는 그 자체로 최종 목적이 아니라 삶을 주님의 질서에 맞추도록 인도하는 수단입니다.그래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길 때,신앙은 자기 자리를 찾습니다.반대로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올라서려 할 때,수단이 목적을 지배하는 질서의 전도가 일어납니다.
이 점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어떤 교회는 교리의 정확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어떤 교회는 성경 해석의 정통성을,어떤 교회는 특정 신앙고백이나 교단적 전통을,어떤 교회는 성령의 은사나 종말론이나 예배 형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문제는 그 하나가 전체보다 앞서고,그것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기 시작할 때입니다.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입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진리를 가르치는 목적이 이웃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기는 것이 되면 이미 겨울의 빛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상응을 알고,말씀의 속뜻을 이해하고,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설명하고,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정확히 말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그런 지식이‘나는남들이모르는것을안다’는 자기 사랑과 결합하면,진리의 빛은 점점 차갑게 변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가신앙의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체어리티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이것이 가인의 위험이 얼마나 미묘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AC.365는 신앙의‘내용’만이 아니라 신앙의‘온도’를 묻게 합니다.빛은 있는데 열이 있는가?진리는 있는데 사랑이 있는가?교리는 있는데 체어리티가 있는가?성경을 많이 아는데 그 지식이 나를 더 온유하게 만드는가?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커질수록 다른 사람을 더 살리게 되는가,아니면 더 쉽게 정죄하게 되는가?이런 질문이 신앙의 생명을 점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합니다.체어리티가 주도한다고 해서 인간의 자연적 친절이나 감정적 따뜻함이 신앙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입니다.그것은 단순히‘사람을좋아하는마음’이나‘좋은사람이되고싶은마음’이 아닙니다.주님의 진리를 받아 그것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는 영적 사랑입니다.따라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입니다.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선이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선이 인간 안에서 받아들여져 이웃을 향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AC.364와AC.365는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AC.364에서는 체어리티가 없으면 무자비함과 증오와 악이 들어오고,그 악을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유일한 수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했습니다.그리고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라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즉 체어리티는 단지 신앙을 따뜻하게 만드는 장식이 아니라,악을 물리치고 신앙에 생명을 주는 실제적인 영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체어리티가주도해야한다’는 것은 결국‘주님이주도하셔야한다’는 말과도 연결됩니다.체어리티의 근원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내가 체어리티를 만들어 내서 신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이 내 안에 받아들여지고,그 선이 신앙과 진리를 질서 있게 사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이렇게 보면 체어리티의 주도권은 인간의 선행이 신앙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주님의 선이 인간의 진리를 살아 있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질서와도 맞닿습니다.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먼저 진리를 배웁니다.무엇이 선이고 악인지,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에서 배웁니다.이 단계에서는 진리가 앞에서 인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진리는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됩니다.처음에는‘옳기때문에’행하던 것을 나중에는‘사랑하기때문에’행하게 됩니다.이때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선 안에서 살아납니다.마치 빛이 불꽃에서 나오는 것처럼 됩니다.결국 진리와 선,신앙과 체어리티가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체어리티가주도한다’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반드시‘먼저사랑하고나중에믿는다’는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신앙의 최종적인 생명과 목적이 체어리티에 있다는 뜻입니다.자연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진리를 먼저 배우는 경우가 많지만,그 진리가 결국 선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직 완성된 신앙이 아닙니다.진리는 선을 향해 가야 하고,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겨울의빛’이라는 비유가 더욱 깊어집니다.겨울의 빛도 빛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보고‘나는잘보고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바로 이것이 위험합니다.전혀 어둡다면 오히려 자신의 상태를 알기 쉽습니다.그러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고 교리적으로 밝다고 생각하면,그 빛에 열이 없다는 사실을 놓치기 쉽습니다.가인 역시 자기 신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오히려AC.362에서 보았듯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환상이 자신의 교리를 계속 확증했습니다.그래서 모든 것이 자기 생각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빛은 점점 강해지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더 추워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리적 확신과 영적 생명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확신이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어떤 사람은 자기 교리에 매우 확신하면서도 체어리티를 잃을 수 있습니다.반대로 참된 신앙은 진리를 굳게 붙들면서도 그 진리가 사랑과 선을 향하게 합니다.참된 빛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 살립니다.그래서 진리가 참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결국 체어리티와 결합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문제는 가인이 아벨과 함께 있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아벨 위에 서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신앙이 체어리티의 형제가 아니라 주인이 되려고 했습니다.그래서 둘의 결합이 깨졌습니다.그리고 이 지배욕이 결국 다음 단계에서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나아갑니다.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했던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비극은 단순히‘사랑이부족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질서가 뒤집혔다는 데 있습니다.신앙이 목적이 되고,체어리티가 수단이 되었습니다.진리가 선 위에 올라섰습니다.교리가 삶보다 앞섰습니다.그리고 그 질서의 전도가 지속되자,결국 사랑 없는 신앙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여 체어리티를 파괴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무엇을믿는가?’는 중요합니다.그러나 그와 함께 반드시‘그믿음은나를어떤사랑으로이끌고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진리를알고있는가?’와 함께‘그진리가내안에서선이되고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옳은교리를가지고있는가?’와 함께‘그교리가내이웃을더사랑하게하고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 질문 앞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경쟁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서로 제자리를 찾습니다.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을 주고,신앙은 체어리티에 빛을 줍니다.사랑은 진리를 따뜻하게 하고,진리는 사랑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밝혀 줍니다.불꽃과 열과 빛이 하나를 이루듯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도 하나입니다.인간 안에서 그 둘이 다시 하나가 될 때 신앙도 살아 있고,체어리티도 지혜롭게 됩니다.
결국AC.365가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의신앙에는빛이있는가?’가 아닙니다. ‘그빛에열이있는가?’입니다.그리고 그 열은 자기 열심이나 감정적 뜨거움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곧 체어리티입니다.그 열이 함께할 때 신앙의 빛은 생명을 살립니다.그러나 그 열이 사라지면 아무리 밝은 빛이라도 겨울의 빛이 되어 모든 것을 굳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입니다.진리가 선을 섬기고,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지며,믿는 것이 삶이 되는 신앙입니다.그리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고,그 체어리티 안에서 진리의 빛이 살아날 때,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겨울의 빛이 아니라 생명을 키우는 따뜻한 빛이 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AC.365
셋째로,‘죄가너를원하나너는죄를다스릴지니라’(Untotheeishisdesire, andthourulestoverhim)고하였는데,이는체어리티가신앙과함께있기를원하지만신앙이체어리티를지배하려하기때문에그렇게할수없음을뜻하며,이것은질서에어긋나는것입니다.신앙이주도권을가지려하는동안에는신앙이아니며,체어리티가주도할때비로소신앙이됩니다.체어리티는신앙의본질적인것(theprincipaloffaith)이기때문인데,이는위에서설명한바와같습니다.체어리티는불꽃에비유할수있습니다.불꽃은열과빛의본질적인것으로,열과빛은불꽃에서나오기때문입니다.그리고분리된상태의신앙은불꽃의열이없는빛에비유할수있습니다.실제로빛은있지만그것은겨울의빛이며,그안에서는모든것이굳어지고죽게됩니다.In the third place it is said, “Untotheeishisdesire,andthourulestoverhim,” by which is signified that charity is desirous to abide with faith, but cannot do so because faith wishes to rule over it, which is contrary to order.So long as faith seeks to have the dominion, it is not faith, and only becomes faith when charity rules; for charity is the principal of faith, as was shown above.Charity may be compared to flame, which is the essential of heat and light, for heat and light are from it; and faith in a state of separation may be compared to light that is without the heat of flame, when indeed there is light, but it is the light of winter in which everything becomes torpid and dies.
해설
AC.365는 창4:7의 마지막 말씀, ‘죄가너를원하나너는죄를다스릴지니라’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신앙과체어리티’의 관계를 매우 선명하게 결론짓습니다. 앞의 AC.361에서는 이 말씀이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개괄했고, AC.363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이주도권을가지려하는동안에는신앙이아니며,체어리티가주도할때비로소신앙이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먼저 ‘그의소원은네게있으나’에 해당하는 ‘Untotheeishisdesire’를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관한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아벨, 곧 체어리티는 가인, 곧 신앙을 밀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도 않고 신앙과 경쟁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분리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가르치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삶으로 행하게 합니다. 둘은 한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문제는 가인이 그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너는그를다스릴지니라’는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는 상태로 읽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근본적인 질서 전도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 자체가 필요 없다고 처음부터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인정하되 그것을 신앙 아래에 두려고 합니다. 신앙을 첫째로 세우고, 사랑과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질서에어긋난다’(contrary to order)고 단언합니다.
이 ‘질서’가 무엇인지는 앞의 글들을 통해 이미 드러났습니다. 사랑에서 체어리티가 나오고, 체어리티 안에서 신앙이 생명을 얻습니다. AC.362에서는 체어리티를 ‘사랑의자손’(the offspring of love)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질서는 ‘사랑→체어리티→살아있는신앙’입니다. 신앙이 이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첫째가 되려 하면 그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길입니다.
그래서 AC.365의 ‘신앙이주도권을가지려하는동안에는신앙이아니다’라는 표현은 매우 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신앙은조금부족한신앙이다’라거나 ‘불완전한신앙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아니다’(it is not faith)라고 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주도할때비로소신앙이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정체성이 단순히 어떤 교리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체어리티를 섬기는 진리라야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신앙의본질적인것(theprincipaloffaith)’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principal’을 단순히 ‘중요한요소’ 정도로 이해하면 약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부가되는 여러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중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제거하고도 신앙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인의 오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이름은 신앙일 수 있어도 그 안에 신앙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추상적인 설명을 스베덴보리는 아주 아름다운 자연의 비유로 풀어냅니다. ‘체어리티는불꽃에비유할수있습니다.’ 불꽃에서 열과 빛이 나옵니다. 여기서 불꽃은 근원이며, 열과 빛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불꽃에서 열을 떼어내고 빛만 남긴다면 겉으로는 여전히 밝아 보일 수 있지만, 생명을 살리는 따뜻함은 사라집니다.
이 비유에서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참된 신앙에는 빛이 있습니다. 진리를 보고 이해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빛이 살아 있는 빛이 되려면 불꽃의 열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곧 진리를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불꽃의열이없는빛’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상태에도 ‘실제로빛은있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서 아무런 진리도 없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알 수도 있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있으며, 매우 논리적인 신학 체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빛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빛에 열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빛’(the light of winter)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가인의 신앙을 설명하는 데 대단히 적절합니다. 겨울에도 태양은 빛납니다. 사물을 볼 수도 있고 길을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에는 생명을 일으키는 따뜻함이 없습니다. 땅은 얼어 있고 나무는 굳어 있으며 씨앗은 싹트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안에서는모든것이굳어지고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48-349와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는 ‘죽은행위’였고,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는 ‘죽은예배’였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왜 그것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지를 ‘겨울의빛’으로 보여 줍니다. 빛은 있는데 열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지식과 교리는 있는데 체어리티의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니 행위에도 생명이 없고 예배에도 생명이 없습니다.
이 비유를 조금 더 깊이 보면 ‘빛을없애야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해집니다. 겨울의 문제는 빛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이 없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나 진리, 교리를 낮추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본래의 생명을 되찾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면 겨울의 빛은 생명을 살리는 빛이 됩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고,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며, 아는 것이 삶과 결합될 때 신앙은 비로소 본래의 기능을 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가주도한다’는 말도 ‘사랑만있으면진리는중요하지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와 함께 있습니다. 선은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고, 진리는 선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문제는 둘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체어리티가신앙과함께있기를원한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AC.362의 이단에 관한 설명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참된 것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참된 것을 질서 밖으로 끌어내어 첫째 자리에 놓자, 그 진리 자체가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되었습니다. 빛을 붙잡았지만, 불꽃에서 떼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환상이 그 빛을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밝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추운 겨울의 빛이 되어 갔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빛’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교리를 공부하고, AC를 읽고, 상응과 속뜻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 때문에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판단하고 낮추며,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밝아 보여도 그것은 ‘겨울의빛’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진리를 적게 알고 대충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이 진리를 배우되 ‘이진리가나를어떻게주님사랑과이웃사랑으로이끄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것입니다. AC를 읽는 목적도 AC에 관한 지식을 많이 축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며, 실제 삶에서 더 선한 쓰임을 행하게 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진리의 빛에는 체어리티의 열이 함께 있게 됩니다.
이제 AC.361-365전체를 돌아보면 흐름이 아주 선명해졌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합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고, 자기 사랑으로 그것을 확증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체어리티가 주도하는 본래의 질서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악이 마음의 문 앞에 있게 되지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악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이제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에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결론짓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의 문제는 결국 ‘신앙이냐체어리티냐’의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신앙과체어리티가어떤질서로결합되어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 위에 서려고 할 때 둘의 결합은 깨집니다. 그리고 그 결합이 깨지면 신앙은 불꽃에서 떨어져 나온 겨울의 빛처럼 되어, 결국 그 안의 모든 것을 굳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AC.365의 겨울빛 비유는 창4의 가인 이야기를 아주 간결하게 압축합니다. ‘빛이있는가?’만 물어서는 안 됩니다. ‘그빛에열이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진리를알고있는가?’만이 아니라 ‘그진리가내안에서주님사랑과이웃사랑의따뜻함으로살아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체어리티의 불꽃에서 나오는 빛이라야 살아 있는 신앙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AC.363
‘가인’(Cain)이라불린신앙의교리가어떤성질의것이었는지는이절에대한설명에서알수있습니다.여기서드러나는것은체어리티가신앙과결합될수는있었으나,신앙이아니라체어리티가주도권을가져야했다는것입니다.이런이유로먼저‘네가선을행하면어찌낯을들지못하겠느냐’(Ifthoudoestwellartthounotuplifted)라고말씀하셨는데,이는‘네가선한의도를가지고있다면체어리티가함께있을수있다’는뜻입니다.‘선을행한다’(dowell)는것은속뜻으로‘선한의도를가지는것’을뜻하는데,선을행하는것은선을의도하는데서(fromwillingwhatisgood)나오기때문입니다.고대에는행위와의지가하나를이루었습니다.사람들은행위를보고그의지를알았는데,당시에는위선이알려져있지않았기때문입니다.‘낯을듦’(uplifting)이체어리티가함께있음을뜻한다는것은앞에서얼굴에관하여설명한것으로분명합니다.곧‘얼굴을든다’(liftuptheface)는것은체어리티를가지는것이며,‘얼굴이떨어진다’(facetofall)는것은그반대입니다. The natur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was called “Cain” is seen from the description of it in this verse, from which it appears that charity was capable of being joined to faith, but so that 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On this account it is first said, “Ifthoudoestwellartthounotuplifted?” signifying, If thou art well disposed, charity may be present; for to “dowell” signifies, in the internal sense, to be well disposed, since doing what is good comes from willing what is good.In ancient times action and will made a one; from the action they saw the will, dissimulation being then unknown.That an “uplifting” signifies that charity is present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aid about the face, that to “liftuptheface” is to have charity, and that for the “facetofall” is the contrary.
해설
AC.363은 앞의 AC.361-362에서 제시된 가인의 문제를 한층 더 정확하게 밝혀 줍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글 첫머리에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결합될수있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함께 있느냐 없느냐만이 아니라, 둘이 함께 있을 때 ‘어느것이주도권을가지느냐’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 그대로라면 ‘신앙이아니라체어리티가주도권을가져야’(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했습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을 억누르거나 무가치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결합되어야 하지만, 그 결합 안에서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로 인도해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과 방향을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62의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사랑보다더본질적인것’으로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자,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는 체어리티에서도 분리되었고, 결국 사랑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AC.361에서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가인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3은 그 반대의 정상적인 질서를 명시합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은 결합되어야 하되,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합니다. 바로 이 질서가 뒤집힌 것이 가인의 교리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먼저 하신 말씀이 ‘네가선을행하면어찌낯을들지못하겠느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너는이미신앙을사랑에서분리했으므로끝났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직 체어리티가 다시 신앙과 결합할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가인이 다시 선을 향한다면 체어리티가 그와 함께 있을 수 있고, 떨어졌던 얼굴도 다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4:7은 단순한 책망이나 심판의 선언이라기보다 가인에게 주어진 회복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선을행한다’(to do well)는 것을 단순히 외적으로 선한 행동을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속뜻으로는 ‘선한의도를가지는것’(to be well disposed)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선을행하는것은선을의도하는것에서(fromwillingwhatisgood)나오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외적 모양보다 그 행위가 흘러나오는 내적 의지입니다. 선한 행위가 참으로 선하려면 그 안에 선을 향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그 소산으로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겉으로 보면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AC.348-34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죽은행위’로,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를 ‘죽은예배’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인에게 ‘선을행하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이번에는더좋은행동을하라’거나 ‘더합당한제물을드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외적 행위의 근원이 되는 내적 의지가 먼저 선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에는행위와의지가하나를이루었다’고 말합니다. 당시에는 사람의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의지를 알 수 있었는데, 그 이유를 ‘위선(dissimulation)이알려져있지않았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마음속으로 원하는 것과 밖으로 행하는 것이 오늘날처럼 쉽게 서로 갈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의지에 있는 것이 행위로 나타났고, 행위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선을행한다’는 것과 ‘선을의도한다’는 것이 서로 분리된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의 상태를 안과 밖에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고대에는’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고대사 전체에 대한 진술이라기보다, 이 문맥에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특유한 내적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곧 ‘고대에살았던모든사람이역사적으로거짓말이나위선을전혀몰랐다’는 뜻으로 확대하기보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행위가 아직 하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의지를 알 수 있었으며, 속마음을 감추고 그와 다른 모습을 밖으로 꾸미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AC.363의 관심은 고대 인류 전체의 사회사를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앞의 AC.358에서 살펴본 ‘얼굴’의 의미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얼굴은 인간의 ‘내적인것들’을 상징합니다. 특히 태고교회와 관련해서는 내적인 애정과 상태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기 때문에 얼굴이 그 사람의 내면을 표상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얼굴이떨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화가 나서 표정이 어두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반대가 바로 AC.363의 ‘낯을듦’(an uplifting)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얼굴을든다’는 것을 체어리티가 함께 있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그러므로 창4:6-7에는 매우 선명한 대조가 있습니다. 가인의 얼굴은 떨어졌습니다. 체어리티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네가선을행하면어찌낯을들지못하겠느냐’ 하십니다. 다시 말해 가인이 선을 의도하고, 체어리티가 다시 그와 함께 있게 된다면, 변해 버린 그의 내적인 것들도 다시 올바른 질서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굴을듦’은 곧 체어리티의 회복이며, 그에 따른 내적인 것들의 회복입니다.
여기서 AC.358심화에서 살펴본 ‘여호와의얼굴’까지 연결해 보면 더욱 깊은 그림이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주님께서 그 얼굴을 들어 사람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그 자비가 사람에게 유입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얼굴이 다시 들리는 것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개선하여 얻는 결과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자비를 받아 그것이 사람 안에서 체어리티가 될 때, 떨어졌던 인간의 얼굴, 곧 그의 내적인 것들이 다시 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언제나 자비로 우리를 향하고 있으며, 문제는 인간이 그 자비를 받아 체어리티 안으로 돌아오느냐에 있습니다.
AC.363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의지’입니다. 참된 선은 단순히 행동의 외적 모양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선을 향하는 의지에서 선한 행위가 나와야 합니다. 다만 이 태고교회의 상태를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 영적 인간의 질서에서는 의지 자체가 처음부터 선을 직접 지각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에서 선과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성(understanding)안에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바로 앞 AC.359-360에서 우리가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조심스럽게 살펴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마음이 아직 충분히 원하지 않더라도 ‘이것이주님께서말씀하시는선이기때문에행해야한다’고 진리와 양심에 따라 순종하는 단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점차 의지 안에 심으십니다. 처음에는 ‘해야하기때문에’ 행하던 선을 나중에는 ‘선을사랑하기때문에’ 행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진리가 선과 결합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며, 아는 것과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점차 하나를 향하게 됩니다. 태고교회의 ‘행위와의지가하나였다’는 상태를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듭남을 통하여 속과 겉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점차 하나가 되어 간다는 원리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길은 거듭남의 방향과 정확히 반대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사랑에서 구별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 구별을 분리로 만들었고, 분리된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위에 세웠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했습니다. 그러면서 외적인 행위와 예배는 남아 있었지만, 그 안의 생명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네가선을행하면어찌낯을들지못하겠느냐’ 말씀하십니다.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체어리티와 결합시키며, 외적 행위가 선을 향한 내적 의지에서 흘러나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63의 핵심은 ‘신앙과체어리티가운데어느하나를선택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둘은 반드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 결합에는 주님의 질서가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며,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면 가인의 질서가 되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과 방향을 주면 신앙은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굴을듦’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떨어진 얼굴을 다시 들게 하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이나 더 강한 교리적 확신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 체어리티가 다시 신앙과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가인은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직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네가선을행하면어찌낯을들지못하겠느냐’는 말씀은 책망인 동시에 자비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체어리티에서 떠나 얼굴이 떨어진 가인에게도 여전히 돌아올 길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창4:7)
AC.361
‘네가선을행하면어찌낯을들지못하겠느냐’(Ifthoudoestwell, anuplifting)에서‘낯을듦’은네가선한의도를가지고있다면체어리티가네게있음을상징합니다.‘선을행하지아니하면죄가문에엎드려있느니라’(ifthoudoestnotwell, sinliethatthedoor)는네가선한의도를가지고있지않다면체어리티가없고,오히려악이있음을상징합니다.‘죄가너를원하나너는죄를다스릴지니라’(Totheeishisdesire, andthourulestoverhim)는체어리티가너와함께있기를원하지만,네가체어리티를지배하려하기때문에함께있을수없음을상징합니다. “Ifthoudoestwell,anuplifting” signifies that if thou art well disposed, thou hast charity; “ifthoudoestnotwell,sinliethatthedoor” signifies that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ou hast no charity, but evil.“Totheeishisdesire,andthourulestoverhim” signifies that charity is desirous to be with thee, but cannot because thou desirest to rule over it.
해설
AC.361은 창4:7의 속뜻을 한 문장 안에 압축하여 제시하는 개요입니다. 그런데 이 절은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상당히 익숙합니다. ‘선을행하면낯을들것이고,선을행하지않으면죄가문에엎드려있으며,죄가너를원하지만너는죄를다스려야한다’는 일종의 도덕적 권면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가인과 아벨, 곧 ‘체어리티에서분리된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관한 말씀으로 읽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그의소원은네게있으나너는그를다스릴지니라’를 죄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체어리티가신앙과함께있기를원하지만,신앙이체어리티를지배하려하기때문에함께할수없는상태’로 해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네가선을행하면’에 해당하는 ‘ifthoudoestwell’을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외적으로 착한 일을 한다는 뜻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은 ‘ifthouartwelldisposed’, 곧 ‘네가선한의도를가지고있다면’, 더 정확하게는 내적 성향과 애정이 선을 향하고 있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시 앞의 AC.346-358과 연결됩니다. 가인도 행위가 있었고, 제물도 드렸습니다. 문제는 외적 행위의 유무가 아니라 그 행위가 어떤 내적인 것에서 나오는가였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라야 살아 있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을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으로 옳은 행동을 하는 것보다 그 행위의 내적 근원인 체어리티가 그 사람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anuplifting’, 곧 ‘들어올림’은 바로 앞의 ‘얼굴이떨어졌다’와 정반대입니다. AC.358에서 가인의 ‘얼굴이떨어짐’은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을 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들어올림’은 그 반대 상태입니다. 선한 애정이 있고, 체어리티가 있다면 얼굴이 다시 들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떳떳하게고개를들수있다’는 심리적 표현을 넘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다시 올바른 질서에 놓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창4:6-7에는 아주 아름다운 대조가 있습니다. 가인의 ‘얼굴이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가선을행하면들어올림이있지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떨어진 얼굴도 다시 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직 돌이킬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로 돌아온다면 그의 내적인 것들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한 책망이 아니라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 두시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네가선을행하지아니하면죄가문에엎드려있느니라’는 체어리티가 없으면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선과 악의 기준을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자리를 중립 상태가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차지합니다. 이것은 가인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그는 ‘신앙이있기때문에체어리티는없어도된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러한 중간지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서도 신앙만으로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자리는 없습니다. 체어리티를 배제하면, 결국 악이 ‘문에’ 놓이게 됩니다.
‘문’이라는 표현도 이후 AC에서 더 자세히 풀리겠지만, 이 개요만 보더라도 아직 악이 완전히 실행된 상태라기보다 바로 들어오려는 경계에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실제 이야기에서도 가인은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분노가 일어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지만, 체어리티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행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악이 ‘문에’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AC.359-361은 주님께서 악이 완전히 행위가 되기 전에 인간에게 경고하시고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AC.361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마지막입니다. 개역개정의 ‘죄가너를원하나너는죄를다스릴지니라’를 우리는 자연스럽게 ‘죄가너를지배하려하지만네가죄를이겨야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전혀 다른 장면을 봅니다. 여기서 ‘그’는 체어리티를 가리키며, ‘그의소원은네게있다’는 것은 ‘체어리티가너와함께있기를원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의 아벨과 가인의 관계를 생각하면 매우 깊은 뜻이 됩니다. 아벨, 곧 체어리티는 가인, 곧 신앙을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배척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은 본래 함께 있어야 하는 ‘형제’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통하여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무엇이 선인지 알고 행합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질서에서는 둘이 서로 분리될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어지는 ‘너는그를다스릴지니라’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네가체어리티를지배하려하기때문에체어리티가너와함께있을수없다’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너’, 곧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합니다. ‘신앙이먼저이고,체어리티는그신앙에종속되어야한다’, ‘교리를올바르게믿는것이본질이고,사랑과삶은그다음이다’라는 질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단순한 ‘분리’보다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를 완전히 없애기 전에 먼저 그것을 ‘지배’하려 합니다.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놓고 신앙이 주인이 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질서의 전도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가 앞서 AC.342-344에서 보았듯이 신앙의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지배해야지 수단이 목적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AC.361은 앞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아벨 살해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구별됩니다. 그다음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됩니다. 이어서 분리된 신앙에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생깁니다.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고 자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합니다. 그리고 이제 체어리티가 자신과 함께 있기를 원함에도 그것을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합니다. 그 지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다음 단계에서 마침내 아벨을 죽입니다. 즉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소원은네게있으나’라는 말씀은 생각보다 매우 애틋한 표현입니다. 아벨은 아직 가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도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문제는 가인이 체어리티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위에’ 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둘러싼 창4전체의 비극이 응축됩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도 이 말씀은 매우 직접적입니다. 우리는 체어리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가인의 질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도중요하지요.선행도해야지요.그러나가장중요한것은내가믿는교리가옳다는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사랑과 삶을 교리 아래의 부속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질서는 그 반대입니다. 진리는 선을 위하여 있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하여 있으며, 우리가 아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AC.361의 핵심은 ‘선을행하라’는 단순한 도덕 명령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본래의 질서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애정을 회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있게 하라. 그러면 떨어진 얼굴이 들릴 것이다.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니 그것을 지배하려 하지 말라.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려 하지 말고, 다시 체어리티와 하나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가인에게 주어진 마지막 회복의 초대처럼 읽힙니다. 아직 아벨은 살아 있습니다. 아직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아직 죄는 ‘문에’ 있을 뿐입니다. 아직 떨어진 얼굴은 다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이후의 비극을 알고 있는 우리는 그래서 이 구절을 더욱 무겁게 읽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이미 그에게 체어리티로 돌아갈 길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