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81 심화

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처음에는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설령 그의 삶에 사랑이 부족하더라도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는 더 잘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적인 차원에서는 많은 진리를 알고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AC.379-381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앎’은 단순히 교리 내용을 기억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AC.37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하게 하는 ‘결속’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진리가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교리를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랑과 선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그 진리는 사람 안에서 생명을 얻지 못하고 기억과 이해성 안에 머물게 됩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가 자기 삶에서 ‘참인 것을 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베덴보리에게서 진리의 목적은 선입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게 하고, 그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배우면서 실제로 선을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할 때, 그 진리는 점차 그의 의지와 삶에 결합됩니다. 그때 그는 단순히 ‘이것이 옳다고 배웠다’고 말하는 데서 더 나아가 왜 그것이 옳은지를 삶을 통해 알게 됩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배우면서도 그것을 자기 삶의 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리와 그의 실제 애정 사이에 틈이 생깁니다.

 

이것이 AC.380의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가인은 계속 ‘땅’을 갈 수 있습니다. 곧 신앙에 관한 지식을 계속 연구하고 배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가 소멸한 상태에서는 그 땅이 더 이상 결실하지 않습니다. 지식은 늘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선한 삶이라는 열매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결과를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진리를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하나의 살아 있는 중심에서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 점은 ‘체어리티가 있으면 교리를 몰라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살아 있게 합니다. 눈이 있어야 길을 볼 수 있지만 실제로 걸어야 목적지에 이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보는 것과 걷는 것을 서로 경쟁시키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진 것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마침내 그것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게 한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는 말은 교리적 정확성을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묻는 말입니다. 진리를 연구할수록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고,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고 그것을 버리며, 실제 쓰임의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 진리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진리를 연구할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만 많아지고 자기의 지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지식은 증가해도 그 지식이 자라야 할 ‘땅’은 점차 효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에 대한 영적인 분별은 지식의 양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을 행하려는 삶 안에서 진리는 서로 연결되고 질서를 얻습니다. 체어리티는 진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살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 있을 때 사람은 진리를 단지 기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체어리티를 잃은 가인이 마침내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이유이며, 동시에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AC.381 심화 1)

 

 

 

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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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means as before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해설

AC.388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 ‘앞에서와 같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짧게 확인합니다. 여기서 ‘앞에서와 같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이미 AC.380에서 처음 제시되었고, AC.382에서는 예레미야애가,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의 여러 구절을 통해 자세히 확증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같은 설명을 반복하지 않고 그 의미를 창4:14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바로 앞의 AC.386-387과 함께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AC.386에서는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이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라고 했고, AC.387에서는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88에서는 그 결과를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진리에서 분리되고 선에서 분리되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할 방향 자체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지식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신앙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교리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체어리티를 잃으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 무엇이 참된 진리이고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인 ‘유리함’입니다.

 

따라서 ‘피하며 유리한다’는 것은 단순한 방황이 아니라 영적 중심과 방향을 잃은 상태입니다. AC.382에서 물을 찾아 이 성읍에서 저 성읍으로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이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계속 진리를 찾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진리가 지향해야 할 선을 잃었기 때문에 어디에서 참된 만족을 얻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AC.388이 이 설명을 길게 반복하지 않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충분히 확증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결과를 전체 흐름 속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됨’, ‘사랑의 신앙의 선에서 분리됨’,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함’은 서로 별개의 세 가지 형벌이 아닙니다. 하나의 영적 붕괴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는 연속된 상태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결과 신앙이 더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진리 모두를 잃고 방향 없이 유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의 핵심은 짧지만 분명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의 결합 안에서만 선과 진리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형태를 얻습니다. 이 둘의 결합이 깨어지면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영적으로는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유리함은 바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결국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AC.389,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체어리티를 잃으면 왜 악과 거짓에 맡겨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그를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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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7, 창4:14,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신앙의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주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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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창4:14)

 

AC.385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은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hid from thy faces)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be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to be “hid from thy faces”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faith of love;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signifies that all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해설

AC.385는 창4:14의 네 표현을 차례로 해석하면서 가인이 처한 영적 상태가 얼마나 위태로워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은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며,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뜻입니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떨어진 상응들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붕괴가 진행되는 순서를 보여 줍니다.

 

먼저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은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땅’은 문맥에 따라 사람 자신, 교리, 그리고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이 자리 잡은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표현을 교회의 진리와의 단절로 해석합니다. 가인은 신앙을 높이려 했지만, 체어리티에서 신앙을 분리함으로써 결국 교회의 진리 자체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2에서 보았던 역설과 같습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그 결과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진리의 상실에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단지 무엇이 참인지 알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의 선과도 분리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얼굴’은 단순한 외적 형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자비, 선의 현존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얼굴에서 숨겨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보다, 사람이 악과 거짓 때문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저주’와도 같은 원리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미워하시고 그에게서 선과 진리를 빼앗으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배척함으로써 스스로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가 변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표현은 주님의 부재라기보다 인간 쪽에서 일어난 수용 능력의 상실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세 번째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AC.380과 AC.382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번 번호에서 이 표현이 다시 나오는 것은 앞의 두 상태가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에서 분리되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할 방향을 잃습니다.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많은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지식을 선을 위해 사용할 생명의 중심을 잃으면 무엇이 실제로 선이며 무엇이 실제로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마지막입니다.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이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상태가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파괴될 위험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자연적인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영적인 것을 소멸시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384가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자기 악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어느 정도 고백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85의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킨다’는 말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존재가 다시 멸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의 상태 안에 아직 보존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소멸될 위험을 말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이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가인의 표’가 왜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도 AC.384의 ‘선의 어떤 것’을 곧바로 전문적인 의미의 ‘리메인스’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직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에게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으며, 이제 악과 거짓이 그것마저 파괴할 위험이 있었다는 정도입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가인의 표와 보존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본 뒤 리메인스와의 관계를 판단하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이렇게 보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가인의 두려움은 단순한 자기보존의 공포 이상으로 읽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뒤에도 신앙에 속한 어떤 지식과 선에 반응할 가능성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악과 거짓에 완전히 삼켜지면 그것마저 없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섭리는 단지 완전한 사람이나 온전한 교회만을 보존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에서도 아직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시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여기서 앞으로 나올 ‘가인의 표’의 의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자인 가인을 왜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지가 매우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속뜻에서 가인은 한 개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리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 상태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거기에 남아 있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까지 즉시 소멸되도록 허용하시는 것이 주님의 목적은 아닙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에서도 아직 보존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이 점은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킨다’는 표현을 이해할 때도 중요합니다. 악과 거짓은 주님에게서 오는 어떤 독립된 형벌의 도구가 아닙니다. 악은 선을 파괴하고 거짓은 진리를 왜곡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확증할수록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밀어냅니다. 따라서 악과 거짓에 의한 멸망은 외부에서 임의적으로 부과되는 형벌이라기보다 사람이 악과 거짓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적 생명을 스스로 파괴하는 과정입니다.

 

AC.385의 네 표현을 다시 연결하면 흐름이 매우 분명합니다. 먼저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됩니다. 이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에서 분리됩니다. 그러자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악과 거짓이 아직 남아 있는 것마저 완전히 파괴할 위험에 이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단순한 교리상의 작은 차이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결합을 깨뜨리면 결국 둘 모두를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가장 위태로운 지점에서 창4의 이야기는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가인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말한 뒤 주님은 그를 즉시 멸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어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따라서 AC.385는 단지 가인의 멸망을 선언하는 번호가 아니라, 왜 그에게 보존이 필요했는지를 보여 주는 번호이기도 합니다.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고, 모든 악과 거짓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가인의 표’에서는 잘못된 상태를 승인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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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4, 창4:13, ‘가인에게도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 라멕에 이르러 소멸되는 체어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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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2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유리하는 것’(wandering)과 ‘피하여 달아나는 것’(fleeing away)의 의미로부터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That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signifies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andering” and “fleeing away” in the Word. As in Jeremiah:

 

13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14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수 없도다 (애4:13, 14) The prophets and priests wander blind in the streets, they have been polluted in blood; the things they cannot do they touch with garments, (Lam. 4:13–14)

 

여기서 ‘선지자들’(prophets)은 가르치는 자들을, ‘제사장들’(priests)은 그에 따라 사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하는 것’(wander blind in the streets)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where “prophets” are those who teach, and “priests,” those who live accordingly; to “wander blind in the streets” 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2] 아모스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Amos:

 

7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8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하게 마시지 못하였으나 (암4:7, 8) A part of the field was rained upon, and the part of the field whereupon it rained not withered; so two or three cities shall wander unto one city to drink waters, and shall not be satisfied, (Amos 4:7–8)

 

여기서 ‘비가 내린 밭의 부분’(part of the field on which it rained)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하고, ‘비가 내리지 않은 밭의 부분’(part or piece of the field on which it did not rain)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합니다. ‘물을 마시려고 유리하는 것’(wander to drink the waters) 역시 진리를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by the “part of the field on which it rained” is signified the doctrine of faith from charity; and by the “part” or “piece” “of the field on which it did not rain,” the doctrine of faith without charity. To “wander to drink the waters” likewise denotes to seek after truth.

 

[3] 호세아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Hosea:

 

16에브라임은 매를 맞아 그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17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 (호9:16, 17) Ephraim is smitten, their root is dried up, they shall bear no fruit; my God will cast them away, because they did not hearken unto him; and they shall be wanderers among the nations. (Hos. 9:16, 17)

 

여기서 ‘에브라임’(Ephraim)은 진리에 대한 이해, 곧 신앙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가 요셉의 장자였기 때문입니다. ‘말라 버린 뿌리’(root which was dried up)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떠도는 자들’(wanderers among the nations)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Ephraim” here denotes the understanding of truth, or faith, because he was the firstborn of Joseph; the “root which was dried up” denotes charity that cannot bear fruit; “wanderers among the nations” are those who do not know what is true and good.

 

[4]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Jeremiah:

 

28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공격을 받은 게달과 하솔 나라들에 대한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일어나 게달로 올라가서 동방 자손들을 황폐하게 하라, 30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솔 주민아 도망하라 멀리 가서 깊은 곳에 살라 이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너를 칠 모략과 너를 칠 계책을 세웠음이라 (렘49:28, 30) Go ye up against Arabia, and devastate the sons of the east. Flee, wander ye exceedingly; the inhabitants of Hazor have 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 for a habitation. (Jer. 49:28, 30)

 

‘아라비아’(Arabia)와 ‘동방의 아들들’(sons of the east)은 천적인 부요함, 곧 사랑에 속한 것들을 소유함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이 황폐해질 때 그들은 ‘피하고’(flee) ‘유리한다’(wander)고, 곧 선한 것을 전혀 행하지 않을 때 ‘피하며 유리하는 자들’(fugitives and wanderers)이 된다고 말합니다. ‘하솔 주민들’(inhabitants of Hazor), 곧 영적인 부요함인 신앙에 속한 것들을 소유한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고 하는데, 이는 그들이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Arabia” and the “sons of the east,” signify the possession of celestial riches, or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which, when vastated, are said to “flee,” and “wander,” that is, to be “fugitives and wanderers,” when they do nought of what is good. Of the “inhabitants of Hazor,” or those who possess spiritual riches, which are those of faith, it is said that they “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 that is, they perish.

 

[5]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사22:3) All thy foremost ones wander together, they are bound before the bow, they have fled from far, (Isa. 22:3)

 

이는 ‘환상의 골짜기’(valley of vision), 곧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로부터 뒤의 한 절에서 그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고백하는 자를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곧 선과 진리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라고 말한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speaking of the “valley of vision,” or the fantasy that faith is possible without charity. Hence appears the reason why it is said, in a subsequent verse (Isa. 22:14), that he who professes faith that is apart from charity is a “fugitive and a wanderer,” that is, knows nothing of good and truth.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22:14)

 

해설

AC.382는 AC.380에서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리한다’는 것을 단순히 장소를 옮겨 다니는 것으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레미야애가,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를 차례로 인용하면서 말씀에서 ‘유리함’과 ‘피하여 달아남’이 영적으로 방향을 잃은 상태, 특히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인용은 가인의 문제, 곧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결과와 연결됩니다.

 

첫 번째 인용인 애4:13-14에서는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을 가르치는 자들로, ‘제사장들’을 그 가르침에 따라 사는 자들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가르침과 삶을 대표하는 두 부류가 모두 맹인처럼 거리를 방황한다는 것은 단순히 길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거리’는 사람들이 오가는 길인데, 영적으로 방향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그 거리에서 방황한다는 이미지는 진리와 선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이것이 가인이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두 번째 암4:7-8은 이번 번호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한 밭에는 비가 내리고 다른 밭에는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비가 내린 밭을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신앙의 교리’로, 비가 내리지 않은 밭을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교리’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신앙이 아주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후자는 비를 받지 못한 밭처럼 말라 버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물을 마시려고 이 성읍 저 성읍으로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합니다. 물은 여기서 그들이 찾고 있는 진리와 연결됩니다. 즉 체어리티를 잃은 신앙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계속 진리를 찾아 헤매며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은 AC.379-381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 줍니다. AC.379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라고 했고, AC.380에서는 그런 신앙이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고 했으며, AC.381에서는 그 땅이 결실하지 못하는 이유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암4장의 ‘물을 마시려고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상태를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은 신앙은 지식을 계속 더할 수는 있어도 그 지식이 생명으로 이어지지 않으므로 참된 영적 만족에 이르지 못합니다.

 

세 번째 호9:16-17에서는 ‘에브라임’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브라임을 ‘진리에 대한 이해, 곧 신앙’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이것은 앞의 ‘땅이 그 효력을 내지 않는다’는 설명과 거의 같은 구조입니다. 뿌리가 마르면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서 체어리티라는 생명이 사라지면 신앙도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떠도는 자’가 됩니다. 다시 말해 신앙은 남아 있다고 주장하지만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렘49장의 ‘아라비아’와 ‘동방의 아들들’은 조금 더 깊은 층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을 ‘천적인 부요함’, 곧 사랑에 속한 것들을 소유한 상태와 연결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황폐해지면 ‘피하고 유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선한 것을 전혀 행하지 않는 것’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상태가 단순한 지적 혼란이 아니라 삶의 선이 사라진 상태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선을 행하는 삶과 분리된 신앙은 결국 무엇이 선인지도 제대로 알 수 없게 됩니다. ‘하솔 주민들’이 가진 영적인 부요함, 곧 신앙에 속한 것들 역시 결국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즉 멸망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영적 지식은 스스로 생명을 보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사22장의 ‘환상의 골짜기’는 이 모든 설명을 가인의 핵심 문제에 직접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가능하다는 환상’이라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fantasy’라는 말이 매우 강합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떼어 놓고도 그것이 여전히 살아 있는 신앙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영적인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교리가 걸어온 길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는 데서 시작하여 둘을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 위에 놓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신앙이 더 순수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피하며 유리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역설이 드러납니다. 가인은 신앙을 지키려다가 신앙의 방향을 잃었습니다. 체어리티를 제거하면 진리만 더욱 순수하게 남을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분별할 능력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선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은 선이며, 신앙에 생명을 주는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목적을 잃은 진리는 지식으로는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살아 있는 진리로 기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물을 찾아 이리저리 다니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길을 걷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가 있으면 교리적 진리를 몰라도 된다’는 반대 극단으로 가서도 안 됩니다. AC.382의 결론은 진리를 버리고 선만 붙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 분별하려면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진리는 체어리티를 필요로 합니다. 진리가 무엇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체어리티가 그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이 둘을 구별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한 데 있었습니다.

 

이번 번호의 여러 성경 인용을 하나씩 별개의 교리로 떼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다섯 인용을 가져온 목적은 하나입니다. 말씀에서 ‘방황하고’, ‘유리하고’, ‘피하여 달아나는’ 이미지들이 영적인 방향 상실과 연결되며, 그 방향 상실은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애가에서는 맹인처럼 방황하고, 아모스에서는 물을 찾아 유리하며, 호세아에서는 열매 없는 에브라임이 여러 나라 가운데 떠돌고, 예레미야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부요함을 잃은 자들이 피하고 유리하며, 이사야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라는 ‘환상’ 속에서 사람들이 도망합니다. 서로 다른 장면이지만 모두 하나의 영적 상태를 비춥니다.

 

따라서 창4:12의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은 단순히 가인에게 내려진 외적인 유랑 형벌이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이 결국 자기 안에서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게 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교리가 맞이한 가장 깊은 비극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앙만을 높이려 했는데 결국 신앙 자체가 무엇이 참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버릴 때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으며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올바른 방향을 얻게 됩니다.

 

 

 

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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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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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창4:12)

 

AC.380

‘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은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이 다시는 네게 그 효력을 내지 아니할 것이요’(it shall not yield unto thee its strength)는 그것이 결실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till the ground” signifies to cultivate this schism or heresy; “it shall not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signifies that it is barren.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is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해설

AC.380은 창4:12의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의 속뜻을 세 부분으로 압축하여 제시합니다. 바로 앞 AC.377-379에서 ‘땅’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고, 그 분열로 말미암아 사람이 선에서 돌아서며, 체어리티가 소멸될 때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80에서는 그러한 분열을 계속 붙들고 발전시킬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보여 줍니다. 아무리 그 땅을 갈아도 결실이 없으며, 마침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한 채 피하며 유리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먼저 ‘땅을 간다’는 것은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땅을 간다는 것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얻기 위해 토지를 경작하는 긍정적인 이미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의 의미는 언제나 문맥 안에서 결정됩니다. 여기서 ‘땅’은 이미 AC.377에서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땅을 간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배양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그 분열된 교리를 더욱 발전시키고 확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원리도 사람이 계속 생각하고 논증하고 뒷받침하면 점점 더 정교한 하나의 체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계가 정교해졌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참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가인의 진행 과정과도 잘 맞습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가 되었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AC.378에서는 그 분열이 ‘입을 벌려’, 곧 하나의 이단적 교리로 가르쳐졌다고 했습니다. 이제 ‘땅을 간다’는 것은 그렇게 형성된 교리를 계속 배양하는 단계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의 중요한 경고가 있습니다. 거짓은 반드시 조잡한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출발점을 붙들고 오랫동안 연구하고 논증하면 매우 정교하고 일관성 있어 보이는 교리 체계도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살아 있는 결합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많이 경작해도 그 땅은 참된 영적 열매를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곧이어 ‘땅이 다시는 네게 그 효력을 내지 아니할 것이요’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간단히 ‘그것이 결실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strength’는 땅이 가지고 있는 생산력, 곧 열매를 내는 힘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교리를 아무리 발전시키고 확증해도 거기에서는 살아 있는 신앙의 열매가 나오지 않습니다. 앞의 AC.379에서 그 이유가 이미 설명되었습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며, 우리를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체어리티, 곧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신앙에 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경작해도 그 지식 자체에서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나오는 생명이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결실이 없다’는 것을 외적인 활동이나 종교적 성과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37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 없는 사람도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경건한 열심처럼 보이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외적으로는 설교도 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많은 종교 활동을 하며, 상당한 성과를 이루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그러한 외적 성과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되어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는 영적 결실입니다. 바로 그 결실을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스스로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AC.380에서 가장 중요한 결론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더 순수하게 보존하려고 체어리티와 구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완전히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배척하면 역설적으로 신앙 자체도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잃게 됩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선과 결합할 때 살아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라는 목적을 잃어버린 신앙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지식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 무엇이 실제로 선이며 무엇이 실제로 진리인지에 관하여 방향을 잃고 ‘피하며 유리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 점은 앞의 AC.379와 매우 깊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지옥의 무리들조차 신앙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진리에 관한 문장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이 참된 교리다’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악한 목적에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진리를 생명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선과 결합되지 않은 진리는 사람 안에서 방향을 잃습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를 제거하고 나면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한다’는 상태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부족이라기보다 영적 분별의 상실에 가깝습니다.

 

‘피하는 자’와 ‘유리하는 자’라는 두 표현 역시 지금 번호에서는 하나하나 별도의 상응으로 세분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전체 의미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AC.380은 둘을 합쳐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피하는 자는 이것, 유리하는 자는 저것’이라고 미리 나누어 의미를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뒤의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두 표현을 더 구체적으로 구별한다면 그때 따라가면 됩니다. 현재로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방향을 잃고 안정된 영적 토대를 갖지 못하는 상태 전체를 나타낸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매우 실제적인 경고가 됩니다. 신학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과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영적으로 분별하는 것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신앙의 정확성을 매우 강조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들을 자기 사랑이나 정죄나 지배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진리를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그 진리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땅을 열심히 갈고 있지만 그 땅이 ‘그 효력’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방향을 얻습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 보여 주고, 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듭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보호하며,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이 둘이 주님 안에서 결합될 때 사람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점점 더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 자신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함께 받아들일 때 생기는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유리함’과 반대되는 상태는 단순히 교리적 확신이 강한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삶의 방향이 분명해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380은 가인의 분열이 어디에 도달하는지를 세 단계로 보여 줍니다. 먼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을 계속 ‘경작’합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는 영적인 열매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여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를 버리고 신앙만을 지키려 했던 교리가 결국 신앙 자체의 방향까지 잃어버리는 역설입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제거함으로써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향하여 올바른 방향을 갖게 됩니다.

 

 

 

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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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9, 창4:1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 의지가 실제 사람입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1) AC.379이러한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저주를 받는 것’(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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