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AC.311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에 있을 수 없는, 그러니까 다른 영들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상태이며, 그래서 다른 지옥들과도 분리된 어떤 지옥에 있는데, 마치 어떤 산 아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무시무시한 환상과 확신(direful fantasies and persuasions)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마치 하나의 산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환상과 확신은 다른 영들에게 매우 깊은 혼미(stupor)를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지금 자신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이는 그들이 진리를 이해하는 모든 능력을 빼앗아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 때에도 그들의 확신의 힘(persuasive power)은 이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에서도 다른 영들과 함께 있게 되면, 그들에게도 이와 같은 일종의 죽음을 초래할 것이 미리 예견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멸절(extinct)되었으며, 주님께서는 신적 자비로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는 다른 영적 상태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In the other life, the state of those who perished by the flood is such that they cannot be in the world of spirits, or with other spirits, but are in a hell separated from the hells of others, and as it were under a certain mountain. This appears as an intervening mountain in consequence of their direful fantasies and persuasions. Their fantasies and persuasions are such as to produce so profound a stupor in other spirits that they do not know whether they are alive or dead, for they deprive them of all understanding of truth, so that they perceive nothing. Such also was their persuasive power during their abode in the world; and because it was foreseen that in the other life they would be incapable of associating with other spirits without inducing on them a kind of death, they all became extinct, and the Lord of his Divine mercy induced other states on those who lived after the flood.

 

 

해설

 

AC.311은 앞글(AC.310)에서 설명한 내용을 사후 세계의 실제 상태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글입니다. AC.310이 홍수 이전 사람들의 인간 구조가 왜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는지를 설명하였다면, AC.311은 그러한 구조가 사후 세계에서는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는 심판 자체보다 그들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다른 영들에게까지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밝히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그들이 ‘영들의 세계’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영들의 세계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중간 세계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은 뒤 먼저 이곳에서 자신의 참된 내면이 드러나고, 그후 천국이든 지옥이든 자기에게 맞는 공동체로 인도됩니다. 그러나 홍수 이전 사람들은 이 중간 상태에 머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영들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위험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른 지옥들과도 분리된 특별한 장소에 격리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에 대한 가혹한 형벌이 아니라, 다른 영들을 보호하기 위한 주님의 섭리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산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영계에서 산과 언덕은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이 산은 자연적인 암석이 아니라, 그들의 무시무시한 환상과 왜곡된 확신이 만들어 낸 영적 장벽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다른 영적 공동체와 자연스럽게 분리되어 있으며, 그 영향력이 밖으로 퍼져 나가지 못하도록 차단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환상(fantasies)과 ‘확신(persuasions)의 결합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환상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거짓을 실제처럼 경험하는 왜곡된 내적 의식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확신은 그러한 거짓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처럼 붙드는 상태입니다. 이 둘이 결합되면 사람은 더 이상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이 거짓 가운데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다른 영들에게 ‘혼미(stupor)를 일으킨다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혼미는 단순한 두려움이나 당혹감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거의 마비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확신이 다른 영들의 이해를 압도, 그들로 하여금 마치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조차 분간 못하는 상태를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 기능이 마비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영향력이 그들이 세상 살 때에도 이미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사후에 갑자기 새로운 능력이 생긴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내적 상태가 영계에서 아무런 외적 제약 없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사랑과 신념이 훨씬 직접적으로 발산된다고 반복해서 설명하는데, 홍수 이전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왜곡된 확신이 다른 영들의 의식까지 마비시킬 만큼 강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다른 영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미워하시거나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영들의 자유와 영적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한 자비로운 조치였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언제나 가능한 한 많은 생명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며, 한 공동체의 악이 다른 공동체까지 파괴하지 못하도록 질서를 세우시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AC.311에서 그들이 특별히 분리된 지옥에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결론을 덧붙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 ‘다른 상태들(other states), 그러니까 이전과는 여러 가지가 바뀌는 상태변화를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앞글에서 설명한 영적 인간의 구조입니다.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의지와 이해가 하나인 상태로 태어나지 않고, 이해를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께서 양심을 형성하시는 새로운 질서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태고교회의 직접적인 퍼셉션보다 낮은 단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인류를 더 깊은 파멸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한 주님의 신적 자비의 결과였습니다.

 

AC.311은 홍수 이전 사람들의 지옥을 묘사하려는 글이 아니라, 왜 주님께서 인류의 영적 구조를 바꾸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태고교회의 비극은 단순히 몇몇 사람의 타락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왜곡된 내적 상태가 다른 영들의 자유와 이해까지 파괴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홍수 이후 인류에게 양심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영적 질서가 주어진 것은 심판의 결과이기 이전에, 모든 사람을 보호하시려는 주님의 깊은 자비와 섭리의 표현이었습니다.

 

 

심화

 

1. ‘홍수 이후의 사람들

 

 

AC.311, 심화 1, ‘홍수 이후의 사람들’

AC.311.심화 1. ‘홍수 이후의 사람들’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의지와 이해가 하나인 상태로 태어나지 않고, 이해를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께서 양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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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AC.311, 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AC.311.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바로 그 질문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이 더욱 깊어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예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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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지와 섭리, 그리고 계시의 제한’

 

바로 위 심화 2 답변 중 ‘주님은 미래를 예지하시지만, 그 예지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미리 제한하지 않으십니다.’라는 부분 말인데요, 하지만 주님은 유대인의 퀄리티를 미리 아시고, 그들에겐 아르카나를 열지 않으셨는데... 그럼 이건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의 미래를 모두 예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타락할 것을 아셨다면 왜 처음부터 홍수 이후와 같은 인간 구조를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반대로 유대교회 사람들의 성향을 아셨다면 왜 그들에게는 말씀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열어 주지 않으셨을까요? 겉으로 보면 하나는 자유를 그대로 허락하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계시를 제한하신 것이므로 서로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두 경우를 서로 다른 차원의 섭리로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경우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창조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가장 완전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다.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과 지혜가 하나였으며, 선을 사랑하면 곧 진리를 지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질서가 인간 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할 가능성까지 예지하셨지만, 그 가능성 때문에 처음부터 더 낮은 상태로 창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유와 최고의 사랑의 가능성을 미리 제한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유대교회의 경우는 ‘이미 타락 이후의 인류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실제 영적 상태와 성향을 완전히 아셨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말씀의 가장 깊은 속뜻까지 충분히 열어 주신다면,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알고도 거부하거나 자기 목적에 이용함으로써 모독(profanation)에 빠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자유를 빼앗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진리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벌이 아니라 보호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제한하신 것은 ‘자유’가 아니라 ‘계시의 정도’였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유롭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었고, 주님을 사랑할 수도, 자신을 사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 자유가 더 깊은 진리를 모독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도록, 주님께서는 자비 가운데 계시의 문을 조절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의 그룹과 두루 도는 불 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킨 것도 바로 이러한 섭리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생명으로부터 영원히 막으신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진리를 알고도 거부, 회복이 더욱 어려워지는 일을 막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미래를 예지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미리 제한하지 않으신다’는 말과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아르카나를 열어 주지 않으셨다’는 말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첫 번째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원리이고, 두 번째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섭리의 원리입니다. 하나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가능성을 존중하시는 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그 가능성이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자비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 예지는 운명을 미리 정해 놓는 결정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미래를 아시지만, 그 예지를 이유로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유를 끝까지 보존하시면서도, 각 사람과 각 시대가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진리와 빛을 허락하십니다. 때로는 더 많은 계시를 주시는 것이 자비이고, 때로는 더 적은 계시를 허락하시는 것이 자비입니다. 이 두 경우 모두 목적은 하나입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모독을 피하고, 결국에는 주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AC.311의 마지막 문장인 ‘주님께서는 신적 자비로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 다른 상태들을 마련하셨다’는 말씀도 같은 원리를 드러냅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높은 질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대신 새로운 영적 구조를 마련하셨습니다. 또한 이후의 교회들에서도 사람들의 실제 상태에 맞추어 계시의 정도를 조절하셨습니다. 결국 창조에서나 섭리에서나 변하지 않는 원리는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그 자유가 영원한 파멸로 끝나지 않도록 가장 자비로운 길을 마련하신다’는 것입니다.

 

 

 

AC.310, 창3:24, ‘홍수 이전 사람들과 홍수 이후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0 이 절에 나오는 각각의 표현에는 매우 깊은 아르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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