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11.심화

 

3. ‘예지와 섭리, 그리고 계시의 제한

 

바로 위 심화 2 답변 중 주님은 미래를 예지하시지만, 그 예지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미리 제한하지 않으십니다.’라는 부분 말인데요, 하지만 주님은 유대인의 퀄리티를 미리 아시고, 그들에겐 아르카나를 열지 않으셨는데... 그럼 이건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의 미래를 모두 예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타락할 것을 아셨다면 왜 처음부터 홍수 이후와 같은 인간 구조를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반대로 유대교회 사람들의 성향을 아셨다면 왜 그들에게는 말씀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열어 주지 않으셨을까요? 겉으로 보면 하나는 자유를 그대로 허락하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계시를 제한하신 것이므로 서로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두 경우를 서로 다른 차원의 섭리로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경우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창조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가장 완전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다.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과 지혜가 하나였으며, 선을 사랑하면 곧 진리를 지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질서가 인간 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할 가능성까지 예지하셨지만, 그 가능성 때문에 처음부터 더 낮은 상태로 창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유와 최고의 사랑의 가능성을 미리 제한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유대교회의 경우는 ‘이미 타락 이후의 인류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실제 영적 상태와 성향을 완전히 아셨습니다. 이런 그들의 실제 영적 상태와 성향에도 불구, 만일 그들에게 말씀의 가장 깊은 속뜻까지 충분히 열어 주신다면,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알고도 거부하거나 자기 목적에 이용, 돌이킬 수 없는 모독(profanation)에 빠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자유를 빼앗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진리를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컷터칼을 손에 들려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것은 벌이 아니라 보호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제한하신 것은 ‘자유’가 아니라 ‘계시의 정도’였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유롭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었고, 주님을 사랑할 수도, 자신을 사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 자유가 더 깊은 진리를 모독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도록, 주님께서는 자비 가운데 계시의 문을 조절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의 그룹과 두루 도는 불 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킨 것도 바로 이러한 섭리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생명으로부터 영원히 막으신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진리를 알고도 거부, 회복이 더욱 어려워지는 일을 막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미래를 예지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미리 제한하지 않으신다’는 말과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아르카나를 열어 주지 않으셨다’는 말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첫 번째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원리이고, 두 번째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섭리의 원리입니다. 하나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가능성을 존중하시는 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그 가능성이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자비입니다. 실제로도 비록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살아생전에 선을 사랑하며 살았다면, 비록 지상에서는 말씀의 깊은 아르카나를 알지 못했더라도, 사후 영들의 세계에서는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점차 그것들을 배우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는 주님께서 지상에서 아르카나를 감추신 목적이 영원한 배제가 아니라 모독으로부터의 보호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후에는 지상의 민족적 소속이나 교회의 역사적 역할보다 각 사람이 생전에 어떠한 사랑 가운데 살았는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며,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필요한 만큼의 빛을 다시 열어 주십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 예지는 운명을 미리 정해 놓는 결정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미래를 아시지만, 그 예지를 이유로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유를 끝까지 보존하시면서도, 각 사람과 각 시대가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진리와 빛을 허락하십니다. 때로는 더 많은 계시를 주시는 것이 자비이고, 때로는 더 적은 계시를 허락하시는 것이 자비입니다. 이 두 경우 모두 목적은 하나입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모독을 피하고, 결국에는 주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AC.311의 마지막 문장인 ‘주님께서는 신적 자비로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 다른 상태들을 마련하셨다’는 말씀도 같은 원리를 드러냅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높은 질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대신 새로운 영적 구조를 마련하셨습니다. 또한 이후의 교회들에서도 사람들의 실제 상태에 맞추어 계시의 정도를 조절하셨습니다. 결국 창조에서나 섭리에서나 변하지 않는 원리는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그 자유가 영원한 파멸로 끝나지 않도록 가장 자비로운 길을 마련하신다’는 것입니다.

 

 

 

AC.311, 창3:24,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1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는 이와 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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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1, 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AC.311.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바로 그 질문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이 더욱 깊어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예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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