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작업 중인 이 AC본문 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라는 작업에 무슨 근본적인 문제가 있나요?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제가 이 작업을 해서 나온 1, AC.1-66 ChatGPT라는 결과물을 저의 몇 안 되는 스베덴보리하시는 중요 리더십들에게 보내드렸지만, 기대와는 달리 좀 냉담한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은 한 분 한 분 모두 스베덴보리 관련, 굵직굵직한 분들이십니다. 모두 수십 년 스베덴보리를 하신 분들이며, 어떤 한 사람이 새로 스베덴보리를 하게 되었다면 무척 기뻐하며 환영하시는 분들이지요. 저에게도 그러셨으며, 그래서 더욱 좀 충격입니다. 살짝 느껴지는 바로는, 이런 작업은 퍼셉션으로 해야지 무슨 AI로 하는가 하는 반감이 있으신가 합니다. 제 작업의 패턴, 샘플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AC.66입니다.

 

 

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 표상에서 역사, 예언과 시편까지 이어지는 계시의 구조'

AC.66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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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작업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작업의 성격과 전달 방식, 그리고 신학적 긴장 지점’이 겹치면서 ‘받는 분들 입장에서 불편하거나 경계되는 요소’가 동시에 작동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지금 느끼신 그 냉담함은 단순히 ‘AI를 썼기 때문’ 하나로 설명되기보다, 몇 가지 더 구조적인 이유가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먼저, 목사님 작업을 객관적으로 보면 굉장히 잘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위 AC.66을 보면 ‘번역 해설 심화’라는 구조가 명확하고, 내용도 일관성이 있으며, 특히 ‘문자 의미와 내적 의미의 층위 차이’를 풀어내는 방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단순 번역이 아니라 ‘신학적 적용까지 확장된 주석 작업’에 가깝습니다. 이건 분명 장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동시에 ‘긴장’이 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를 오래 하신 분들일수록 ‘아르카나(Arcana)는 설명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퍼셉션으로 열리는 것’이라는 전제를 매우 강하게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전제는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일종의 ‘영적 질서에 대한 신학적 확신’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작업은 구조상 ‘설명으로 아르카나를 전달하려는 형태’를 띱니다. 그것도 상당히 명료하게, 단계적으로, 거의 교재처럼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게 초심자에게는 엄청난 장점이지만, 기존 리더십에게는 ‘이건 너무 쉽게 만들어진 것 아닌가’, 혹은 ‘이건 퍼셉션이 아니라 이해 중심으로 끌어내리는 것 아닌가’라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두 번째 요소가 겹칩니다. ‘AI 사용’입니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민감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분들 입장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주님으로부터의 인플럭스를 통해 열리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물이 ‘ChatGPT와 함께 작업된 것’이라는 표시를 갖고 오면,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연결됩니다. ‘이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인간 지성과 기계의 산물인가.’ 이 질문이 생기는 순간, 내용의 좋고 나쁨과 상관없이 ‘영적 출처에 대한 의심’이 먼저 작동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점잖게 반응하지만, 내적으로는 거리를 두게 됩니다.

 

세 번째는 ‘’입니다. 목사님의 글은 상당히 ‘결론 지향적’이고 ‘정리형’입니다. 예를 들어 심화 부분에서도 ‘결론부터 말씀드리면’으로 시작해서 명확하게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건 일반 독자에게는 매우 좋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전통 안에서는 ‘너무 빠르게 결론을 주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은 ‘각 사람이 자기 상태에서 스스로 보게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명이 지나치게 명확하면 오히려 ‘닫힌 해석’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해설의 확장 범위’입니다. 목사님의 작업은 단순 해설을 넘어서 ‘적용, 신학적 통합, 설교적 연결’까지 갑니다. 예를 들어 창1을 ‘주님의 부활’과 연결하는 부분은 굉장히 깊고 의미 있는 시도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전통적인 스베덴보리 연구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건 본문에서 직접 나온 것인가, 아니면 해석자의 신학적 확장인가.’ 이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 학문적, 신학적 엄밀성을 중시하는 분들은 조심스러워집니다.

 

이제 핵심을 아주 정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의 작업은 ‘초심자와 일반 신자를 위한 교재로서는 매우 탁월한 방향’인데, ‘오랜 리더십에게는 오히려 낯설고 경계되는 방식’입니다. 즉, 대상이 약간 어긋난 것입니다. 이분들은 ‘환영’은 하지만, ‘이 방식이 맞다’고 쉽게 동의하기는 어려운 위치에 계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을 이렇게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내 작업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이 작업이 겨냥하는 독자와, 실제로 보낸 독자가 달랐다.’ 그리고 여기에 ‘AI라는 새로운 요소’가 신학적 긴장을 더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방향은 어떻게 잡으셔야 하냐면, 두 가지를 분리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는 ‘작업 자체의 가치’, 또 하나는 ‘전달 전략’입니다. 작업 자체는 계속 가셔도 됩니다. 오히려 지금처럼 체계화된 작업은 한국에서는 거의 없는 수준입니다. 다만 전달할 때는 ‘이것은 퍼셉션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퍼셉션으로 들어가기 위한 안내 자료입니다’라는 톤을 분명히 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AI 언급’을 전면에 두지 않고, ‘보조 도구’로 낮추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께 조금 단단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하시는 작업은 ‘스베덴보리 내부 리더십을 설득하는 작업’이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길을 내는 작업’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지금 그 첫 열매를 ‘가장 보수적인 독자층’에게 먼저 보여주신 셈입니다. 반응이 차가운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문제가 있다기보다, 이 작업은 기존 리더십보다 새로운 독자를 향해 있고, AI와 설명 중심 구조가 그들과의 신학적 긴장을 만들어냈다’입니다.

 

 

 

SC.78,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

아, 그렇군요. 네, 맞습니다. 사실 저는 이 작업을, 말씀하신 대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7년간 주변 신앙의 지인들께 이 AC를 권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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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6, ‘지상의 부부와는 다른, 스베덴보리가 본 천국의 부부’

천국에서의 결혼 생활은 실제로 어떤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목격한 ‘천국 부부의 삶’ 스베덴보리가 영계를 왕래하면서 가장 경외심을 느꼈던 장면 중 하나는 천국에서 부부가 살아가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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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2:16)

 

AC.125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eat of every tree) 퍼셉션으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무(tree) 퍼셉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인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기억에 간직되어 있는 것을 숙고할 그것이 참되고 선한지를 즉시 지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거짓된 것이 나타나면 그것을 피했을 아니라 심지어 혐오하기까지 했습니다. 천사들의 상태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이러한 퍼셉션을 대신하여 후에는 이미 계시된 것으로부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cognitio) 이어졌고, 뒤에는 말씀에 계시된 것으로부터 그것을 아는 (cognitio) 이어졌습니다. Toeat of every treeis to know from perception what is good and true; for, as before observed, atreesignifies perception. They had from the Lord continual perception, so that when they reflected on what was treasured up in the memory they instantly perceived whether it was true and good, insomuch that when anything false presented itself, they not only avoided it but even regarded it with horror: such also is the state of the angels. In place of this perce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owever, there afterwards succeeded the knowledge [cognitio] of what is true and good from what had been previously revealed, and afterwards from what was revealed in the Word.

 

해설

AC.125는 창2:16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말씀에서 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은 퍼셉션으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입니다. 앞의 AC.102-104에서 천적 인간을 다루는 문맥에서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는 것과 퍼셉션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가에 관한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25는 그것을 먹는다는 표현과 연결하여, 천적 인간이 그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아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인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기억이 필요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들이 기억에 간직되어 있는 을 숙고했다고 명시합니다. 즉 그들의 기억 안에도 여러 내용이 저장되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다만 무엇이 참되고 선한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근거가 기억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기억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을 생각하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그것이 참되고 선한지를 즉시 지각했습니다.

 

이 점은 AC.80 이후 계속 따라온 기억지식의 문제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감각과 기억에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AC.121에서는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 것이 천적 질서라고 했습니다. AC.125에서도 태고교회 사람들은 기억에 간직된 것을 실제로 숙고합니다. 그러나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참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기억 속의 것을 퍼셉션의 빛 아래에서 살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문제는 기억의 존재가 아니라 무엇이 무엇을 판단하고 지배하는가 하는 질서입니다.

 

거짓된 것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피했을 뿐 아니라 혐오했다는 설명은 퍼셉션이 단순한 지적 판별 능력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참과 거짓을 머리로 구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거짓에 대한 정서적인 거부도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상태도 이와 같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은 현대적인 직감이나 순간적인 느낌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대한 내적 지각이며, 사랑과 삶의 상태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AC.125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영적 변화를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계속 유지된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이미 계시된 것으로부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cognitio)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고, 다시 그 뒤에는 말씀에 계시된 것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아는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사람에게 선과 진리를 알려 주시는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이 그것을 받아 아는 방식에는 변화가 생깁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으로 알았지만, 후대에는 주님께서 이미 계시하신 것을 통하여 알게 되고, 마침내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AC.123에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을 구별한 설명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거기서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기 때문에인정하지만, 영적 인간은 그것을 말씀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에인정한다고 했습니다. AC.125는 그 차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진 뒤 인간에게 계시와 말씀이 주어졌고, 사람은 이제 말씀에 계시된 선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으로부터 배우는 상태를 퍼셉션보다 못한 단순한 지식 상태로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퍼셉션을 잃은 후의 인간에게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알려 주시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자기 판단대로 무엇이든 취한다는 뜻과 정반대입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 안에서 선과 진리를 알고 받아들입니다. 기억에 있는 것조차 그 퍼셉션 아래에서 판단합니다. 그리고 퍼셉션이 사라진 후에는 이미 주어진 계시와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알게 됩니다. 이처럼 AC.125는 퍼셉션과 기억과 계시와 말씀의 관계를 한 문단 안에 압축하면서, 인간이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태에 따라 주님께서 주시는 방식으로 받아 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125)

 

 

 

AC.126, 창2:17,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탐구해서는 안 되는 이유’ (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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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4, 창2:15,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4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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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2:15)

 

AC.124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으로부터 매우 분명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자신을 포도원을 만들고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농부들에게 세로 집주인에 비유하셨습니다. (21:33) That wisdom, intelligence, reason, and knowledge [scientia] are not of man, but of the Lord, is very evident from all that the Lord taught; as in Matthew, where the Lord compares himself to a householder who planted a vineyard, and hedged it round, and let it out to husbandmen (21:33);

 

다른 비유를 들으라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1:33)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and in John: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영광을 나타내리니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6:13, 14) The Spirit of truth shall guide you into all truth; for he shall not speak of himself, but what things soever he shall hear, he shall speak; he shall glorify me, for he shall receive of mine, and shall declare it unto you (John 16:1314).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없느니라 (3:27) A man can receive nothing except it be given him from heaven (John 3:27).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은 천국의 아르카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That this is really so is known to everyone who is acquainted with even a few of the arcana of heaven.

 

해설

AC.124는 앞의 AC.121-123에서 설명한 천적 질서의 근거를 주님의 말씀에서 확인합니다. AC.121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어 AC.122AC.123에서는 천적 인간이 이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24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이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말씀에서도 분명하다고 합니다.

 

먼저 마21:33의 포도원 비유가 인용됩니다. 집주인은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른 뒤 그것을 농부들에게 맡깁니다. 이 인용에서 중요한 것은 농부들이 포도원의 주인이 아니라 맡아 경작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바로 AC.122의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는 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주님께서 주신 것들을 실제로 받아 사용하고 돌보지만, 그것들의 최초 소유자는 아닙니다. 포도원을 맡은 농부가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주장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자기 안에 있는 지혜와 지성과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16:13-14진리의 성령에 관한 말씀은 이 원리를 더욱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는 표현에서 강조되는 것은 진리의 근원입니다. 진리는 독립적으로 자기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것을 받아 전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의 참된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님의 말씀으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3:27만일 하늘에서 주신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없느니라는 말씀은 AC.124의 논지를 가장 간결하게 압축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람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대신 아무것도 받을 없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무기력한 존재로 만드는 설명이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받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가 받는 참된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122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된다는 말의 뜻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AC.124에서 말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사람에게 실제 지혜나 지성이나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21은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질서 있게 작용한다고 분명히 설명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사람 안에 실제로 있으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자기의 것으로 느끼며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과, 그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이 점은 AC.123의 세 종류의 인간에 관한 설명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영적 인간은 말씀으로부터 그것을 배워 인정하며,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깁니다. AC.124의 세 성경 인용은 그 가운데 영적 인간이 말씀을 통하여 배우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실제로 제시하는 셈입니다. 주님의 말씀 자체가 포도원의 주인이 누구인지, 진리가 어디에서 오는지, 사람이 가진 것이 어디에서 주어지는지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아르카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이것이 실제로 그러함을 안다고 말합니다. 이는 AC.123에서 천적 인간이 퍼셉션으로 아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결국 AC.121부터 AC.124까지의 흐름은 매우 일관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들어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에 이르고, 사람은 그것을 받아 실제로 누리고 사용하지만,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의 삶은 주님께 받은 것을 잃어버리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충만히 받아 사용하면서도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내적으로 인정하는 삶입니다. (AC.124)

 

 

 

AC.125, 창2:16,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다 -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알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창2:16) AC.125‘모든 나무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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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3, 창2:15,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3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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