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2:19, 20)
AC.145
말씀에서도 ‘이름’(name)은 어떤 것의 본질을 의미하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seeing and calling by name)은 그 성질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In the Word also by “name” is signified the essence of a thing, and by “seeing and calling by name” is signified to know the quality. As in Isaiah:
3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사45:3, 4) I will give thee the treasures of darkness, and hidden riches of secret places, that thou mayest know that I, Jehovah, who call thee by thy name, am the God of Israel. For Jacob my servant’s sake, and Israel my chosen, I have even called thee by thy name, I have surnamed thee, and thou hast not known me. (Isa. 45:3–4)
이 구절에서 ‘이름으로 부르는 것’(call by name)과 ‘칭호를 주는 것’(surname)은 그 성질을 미리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In this passage, to “call by name” and to “surname” signifies to foreknow the quality. Again: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사62:2) Thou shalt be called by a new name, which the mouth of Jehovah shall declare, (Isa. 62:2)
라고 하는데, 앞뒤 구절에서 분명한 것처럼 이것은 다른 성질을 지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signifying to become of another character, as appears from the preceding and subsequent verses. Again: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1) Fear not, O Israel, for I have redeemed thee, I have called thee by thy name; thou art mine, (Isa. 43:1)
라고 하는데, 이는 그들의 성질을 아셨음을 뜻합니다. 같은 선지서의 또 다른 곳에서는, denoting that he knew their quality. Again in the same prophet: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사40:26) Lift up your eyes on high, and behold who hath created these things, that bringeth out their army by number. He will call them all by name, (Isa. 40:26)
라고 하는데, 이는 그들 모두를 아셨음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meaning that he knew them all. In the Revelation: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4, 5) Thou hast a few names even in Sardis who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 he that overcometh, the same shall be clothed in white raiment, and I will not blot out his name out of the book of life, but I will confess his name before my Father, and before his angels. (Rev. 3:4–5)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13:8)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lamb’s book of life. (Rev. 13:8)
라고 합니다. 이 구절들에서 ‘이름들’(names)은 결코 이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질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천국에서는 누구의 이름도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질이 알려집니다. By “names” in these passages are by no means meant names, but qualities; nor is the name of anyone ever known in heaven, but his quality.
해설
AC.145는 AC.144에서 설명한 ‘이름’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로 확증합니다. AC.144에서는 고대인들이 이름을 어떤 것의 본질과 관련하여 이해했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그 성질을 아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5에서는 이것이 단지 고대인의 언어 습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에 연이어 인용되는 이사야와 요한계시록의 구절들은 모두 ‘이름’이 단순한 호칭을 넘어 그 사람이나 사물의 본질과 성질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됩니다.
먼저 사45:3-4에서 여호와께서는 고레스를 ‘네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하시고, 그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그의 이름을 불러 칭호를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름으로 부르는 것’과 ‘칭호를 주는 것’이 그 성질을 미리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어떤 개인의 고유명사를 알고 계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성질과 그가 맡게 될 쓰임을 이미 알고 계신다는 의미가 이름을 부르는 표현 안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사62:2의 ‘새 이름’은 이 의미를 한층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다른 성질을 지니게 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름이 단순한 명칭이라면 새 이름은 호칭의 변경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름이 성질을 함축한다면 새 이름은 상태와 성질의 변화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의미는 앞뒤 구절에서 분명하다고 덧붙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름의 의미를 단어 하나에서 임의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구절이 놓인 문맥을 통해 확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43:1과 사40:26도 같은 원리를 확인합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에서 이름으로 부르시는 것은 그들의 성질을 아시는 것을 의미하고, 하늘의 만상을 수효대로 이끌어 내시며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신다’는 말씀 역시 그 모두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하나님께서 무수한 존재들의 명칭을 기억하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각 존재가 어떠한지를 온전히 아신다는 의미가 ‘이름을 부르다’라는 말씀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인용에서는 이 원리가 더욱 깊어집니다. 사데 교회 가운데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명’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단순히 천국의 명부에 사람들의 지상 이름이 적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들에서 ‘이름들’(names)은 결코 이름 자체가 아니라 성질들을 의미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생명책에 이름이 있다는 표현 역시 사람의 외적인 신분이나 명칭보다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떠한 상태와 성질 가운데 있는가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인용들을 거친 뒤 나오는 마지막 문장은 AC.145 전체의 결론입니다. ‘천국에서는 누구의 이름도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질이 알려집니다.’ 이것은 이름의 상응을 설명하기 위한 매우 강한 진술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이름을 통해 사람을 식별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설명하는 천국의 관점에서는 사람을 규정하는 핵심이 지상에서 사용하던 이름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성질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이름’이 본질과 성질을 나타내는 것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외적인 명칭보다 내적인 상태가 본질적인 영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것을 다시 창2:19-20으로 가져오면 AC.142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짐승들과 새들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단지 각각의 동물에게 명칭을 붙였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이 어떠한 성질을 지니는지를 그가 알았다는 뜻입니다. AC.144가 고대인의 이름 짓는 관습을 통해 이것을 설명했다면, AC.145는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같은 원리를 확증합니다. 따라서 AC.142-145는 하나의 연속된 설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설명은 결국 다시 proprium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단지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성질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AC.142가 말하듯 그는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련의 이름에 관한 설명은 흥미로운 성경 상징 하나를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상당히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느껴지는 삶을 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바로 그 상태에서 이제 갈빗대와 여자의 의미에 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AC.145)
AC.146, 창2:19-20, ‘선과 진리를 알고도 proprium으로 기울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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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4, 창2:19-20, ‘이름으로 부르다 - 그 본질과 성질을 알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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