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20)

 

AC.144

이름으로 부르는 (call by name) 성질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까닭은, 고대인들이 이름(name) 어떤 것의 본질로 이해했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는 (seeing and calling by name) 성질을 아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까닭은 그들이 의미되는 것들에 따라 아들과 딸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름에는 이름에 고유한 어떤 것이 들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그들은 자녀들의 기원과 성질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저작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게 살펴보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들이 이름으로 지칭되는 것들의 근원과 성질을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으로 부르는 (calling by name)으로 다른 어떤 것도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들 사이에서 관습적으로 사용되던 말하는 방식이었지만,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러한 것들이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길 있습니다. That tocall by namesignifies to know the quality, is because the ancients by thenameunderstood the essence of a thing, and byseeing and calling by namethey understood to know the quality. The reason was that they gave names to their sons and daughters according to the things which were signified, for every name had something peculiar in it, from which, and by which, they might know the origin and the nature of their children, as will be seen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when,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come to treat of the twelve sons of Jacob. As therefore the names implied the source and quality of the things named, nothing else was understood bycalling by name. This was the customary mode of speaking among them, but one who does not understand this may wonder that such things should be signified.

 

해설

AC.144AC.142에서 사람이 짐승들과 새들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이 왜 그들의 성질을 알았다는 뜻이 되는지를 직접 설명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름은 대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지칭하는 명칭으로 먼저 이해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름(name)을 어떤 것의 본질과 관련하여 이해했고, 그래서 보고 이름으로 부르는 (seeing and calling by name)을 그 대상의 성질을 아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고대인들의 실제 이름 짓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들과 딸들에게 임의로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에 따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따라서 이름에는 그 사람에게 고유한 어떤 것이 담겨 있었고, 그 이름을 통하여 자녀의 기원과 성질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지금 모두 설명하지 않고, 앞으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룰 때 자세히 살펴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독자는 우선 고대인의 이름은 사람의 기원과 성질을 드러내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정도를 붙들면 충분합니다.

 

이 설명은 AC.142의 창2:19-20 해석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짐승들과 새들을 사람에게로 이끌어 그가 무엇이라 하는지를 보셨고, 사람이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단순히 최초의 인간이 동물들의 명칭을 정했다는 장면만을 속뜻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의 성질을 알게 하셨고, 사람이 그것들의 성질을 알았다는 것이 이름을 주는 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AC.144는 바로 이 해석의 언어적·고대적 배경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름’, ‘본질’, ‘근원’, ‘성질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어떤 것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지 그것을 가리키는 소리를 기억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며 어떤 성질을 가진 것인지를 아는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이름이 중요하게 사용될 때에는 오늘날의 명칭 개념만 가지고 읽기보다, 그 이름이 그 대상에 관하여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름은 하나의 고정된 뜻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기계적인 규칙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144가 말하는 핵심은 이름이 본질과 근원과 성질을 함축한다는 것이지, 이름 하나마다 문맥과 관계없이 언제나 동일한 한 가지 의미만 적용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말씀의 표현은 현재 다루는 주제와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름의 의미를 살필 때에도 그 이름이 누구에게 주어졌는지, 어떤 사건 가운데 등장하는지, 그리고 말씀에서 무엇을 드러내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AC.143AC.144를 나란히 놓으면 고대인들의 언어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AC.143에서는 고대인들이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었기 때문에 동물들을 말하면서 인간 안의 애정들을 의미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4에서는 그들이 이름을 통하여 사물과 사람의 본질과 성질을 이해했다고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대상과 그 이름이 단순히 외적인 사물과 호칭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성질을 드러내는 언어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독자에게는 낯설지만, 고대인들에게는 관습적인 말하는 방식이었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따라서 AC.144는 창2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짓는 장면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직접적인 해설인 동시에, 앞으로 말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명과 지명을 읽는 데 필요한 하나의 기본 원리를 제공합니다. ‘이름으로 부르는 은 그저 명칭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성질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AC.142에서 사람은 주님께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의 성질을 알고 있었다고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proprium으로 기울었다는 사실은 더욱 의미심장해집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proprium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성질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던 것입니다. (AC.144)

 

 

 

AC.145, 창2:19-20, ‘말씀에서 이름은 본질과 성질을 의미하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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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3, 창2:19-20, ‘짐승들이 애정을 의미하는 이유 - 천국적인 관념과 영계의 표상’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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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20)

 

AC.143

고대에 짐승들(beasts) 동물들(animals) 인간 안의 애정들과 그와 같은 것들을 의미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보일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 사람들은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었고, 그러한 것들이 영계에서는 동물들로, 실제로는 그것들과 닮은 그러한 동물들로 표상되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식으로 말할 때에는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에서도 짐승들이 일반적으로 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곳에서는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언서 전체가 그러한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각각의 짐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말씀이 속뜻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짐승들은 종류가 있는데, 악하거나 해로운 짐승들과 선하거나 해롭지 않은 짐승들입니다.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양과 어린양과 비둘기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천적 인간, 천적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으므로 이러한 짐승들을 의미합니다. 짐승들(beasts) 일반적으로 애정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의 몇몇 구절들을 통해 확증한 있으므로(AC.45-46), 여기서는 이상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That bybeastsandanimalswere anciently signified affections and like things in man, may appear strange at the present day; but as the men of those times were in a celestial idea, and as such things are represented in the world of spirits by animals, and in fact by such animals as they are like, therefore when they spoke in that way they meant nothing else. Nor is anything else meant in the Word in those places where beasts are mentioned either generally or specifically. The whole prophetic Word is full of such things, and therefore one who does not know what each beast specifically signifies, cannot possibly understand what the Word contains in the internal sense. But, as before observed, beasts are of two kindsevil or noxious beasts, and good or harmless onesand by the good beasts are signified good affections, as for instance by sheep, lambs, and doves; and 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 who is treated of, such are here meant. Thatbeastsin general signify affections may be seen above, confirmed by some passages in the Word (n. 4546), so that there is no need of further confirmation.

 

해설

AC.143AC.142에서 짐승들(beasts)이 천적 애정들을, ‘하늘의 새들이 영적 애정들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설명합니다. 오늘날 독자에게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의미하는가?라는 해석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바로 그 점을 인정하면서 설명을 시작합니다. 고대에 짐승들(beasts)동물들(animals)이 인간 안의 애정들과 그와 같은 것들을 의미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 시대 사람들이 천국적인 관념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108에서 고대인들의 말하는 방식에 관하여 설명한 내용과 연결됩니다. 그들에게 자연계의 사물과 인간 안의 영적인 상태를 연결하여 말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는 비유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적인 것들을 보면서 그것과 관련된 영적인 것을 함께 생각할 수 있었고, 그러한 관념 속에서 말했습니다. 따라서 동물을 말하면서 인간의 애정을 의미하는 표현도 그들에게는 낯선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더욱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애정과 같은 것들이 영계에서 실제로 동물들로 표상되며, 그것도 그 애정의 성질과 닮은 동물들로 표상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짐승과 애정의 관계는 단순히 고대인이 동물의 성격을 관찰하고 양은 온순하니 선한 마음을 상징한다고 하자는 식으로 만들어 낸 비유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 안에서는 영적인 상태와 그것을 표상하는 형상 사이에 실제적인 질서가 있고, 고대인들은 천국적인 관념 안에서 그 관계에 따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동물들이 속뜻을 담을 수 있는 배경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나오는 짐승들도 같은 원리로 읽습니다. 짐승이 일반적으로 언급되든 특정한 종류가 언급되든 그 안에는 인간의 애정과 관련된 속뜻이 있으며, 특히 예언서에는 이러한 표현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짐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면 예언서의 속뜻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17에서 역사적인 말씀에도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했던 설명과 함께, 스베덴보리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읽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말씀의 자연적인 표현 안에는 인간의 내적 상태와 천국적인 실재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동물은 애정이라는 하나의 공식만 만들어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43 자체가 이미 짐승들을 악하거나 해로운 것과 선하거나 해롭지 않은 것으로 구별합니다.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을 의미하며, 그 예로 양과 어린양과 비둘기를 듭니다. 반대로 악하거나 해로운 짐승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다른 성질의 애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동물이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하나의 의미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동물의 성질과 그것이 놓인 말씀의 문맥, 그리고 현재 다루는 주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142의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의미합니다. 지금 다루고 있는 사람은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며,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시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 등장하는 짐승들의 의미도 현재 다루는 인간의 상태에 맞추어 이해됩니다. AC.103에서 어떤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놓인 주제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고 했던 원리가 여기서 다시 실제로 적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짐승들(beasts)이 일반적으로 애정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미 AC.45-46에서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인했으므로 여기서 다시 증명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인용은 단순한 참고 번호가 아닙니다. 1에서 동물들을 다룰 때 제시했던 상응의 원리가 이제 창2의 짐승들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창1과 창2의 해설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같은 말씀의 속뜻 안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해 줍니다.

 

따라서 AC.143의 핵심은 짐승은 애정을 뜻한다는 대응 하나를 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그러한 의미가 가능한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천국적인 관념 안에서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함께 보았고, 영계에서도 인간의 애정은 그 성질에 상응하는 동물의 형상으로 표상됩니다. 말씀의 동물 표상도 이러한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응은 사람이 성경의 사물에 임의로 영적 의미를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적인 표현과 영적인 실재 사이의 관계를 말씀 안에서 읽어 내는 방식이라는 점이 AC.143에서 한층 분명해집니다. (AC.143)

 

 

 

AC.144, 창2:19-20, ‘이름으로 부르다 - 그 본질과 성질을 알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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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 창2:19-20, ‘짐승과 하늘의 새 - 선의 애정과 진리의 앎을 알게 하시다’ (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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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2:19-20)

 

AC.142

짐승들(beasts) 천적 애정들을 의미하고, 하늘의 새들(fowls of the heavens) 영적 애정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짐승들(beasts) 의지에 속한 것들을, 새들(fowls) 이해에 속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을 사람에게로 이끌어 그가 무엇이라 부르는지를 보시는 (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그로 하여금 그것들의 성질을 알게 하시는 것이며, 그가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는 (giving them names) 그가 성질을 알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의 성질을 알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으며, 이것은 앞에서와 같은 , 그를 돕는 배필을 찾지 못했다(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것으로 표현됩니다. By beasts are signified celestial affections, and by fowls of the heavens, spiritual affections; that is to say, by beasts are signified things of the will, and by fowls things of the understanding. To 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is to enable him to know their quality, and his giving them names signifies that he knew it. But notwithstanding that he knew the quality of the affections of good and of the knowledges of truth that were given him by the Lord, still he inclined to his own, which is expressed in the same terms as beforethat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해설

AC.142AC.133에서 미리 요약했던 창2:19-20의 속뜻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AC.133에서는 주님께서 먼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부여하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시지만, 그럼에도 사람이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어진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2는 창2:19-20의 짐승들과 하늘의 새들, 그것들을 사람에게로 이끄시는 일, 그리고 사람이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는 일이 바로 그 과정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짐승들(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하늘의 새들(fowls of the heavens)은 영적 애정들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다시 더 분명하게 풀어 짐승들은 의지에 속한 것들을, ‘새들은 이해에 속한 것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앞에서 이미 살펴본 인간 마음의 두 능력과 연결됩니다. AC.116에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을 이루면서도 서로 구별된다고 했고, 첫째 강과 둘째 강의 의미도 각각 의지와 이해에 연결했습니다. 이제 창2:19-20에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애정들이 다시 의지와 이해라는 두 영역 안에서 나타납니다.

 

여기서 천적 애정과 영적 애정을 막연히 같은 종류의 좋은 감정으로 묶어서는 안 됩니다. AC.142가 직접 설명하듯 천적 애정은 의지에 속한 것들과 연결되고, 영적 애정은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됩니다. 앞에서 사랑과 선은 의지의 영역에, 신앙과 진리는 이해의 영역에 연결되어 설명되어 온 흐름과도 잘 맞습니다. 다만 이 한 문장만으로 천적 애정과 영적 애정의 모든 차이를 완성하여 정의하기보다, 현재 본문이 직접 제시하는 의지에 속한 것들이해에 속한 것들이라는 구별을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어 주님께서 짐승들과 새들을 사람에게로 이끌어 그가 무엇이라 하는지를 보시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들의 성질을 알게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성경의 이름 짓기는 단순히 대상에 임의의 명칭을 붙이는 행위로 해석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그가 그것들의 성질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거나 그 의미를 결정하는 장면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들의 성질을 인간으로 하여금 알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이 점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이라는 뒤의 표현 때문에 더욱 분명합니다. 사람이 그 성질을 아는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은 처음부터 인간의 독립적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것들을 주셨고, 또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 성질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이 이름을 준다는 사실을 인간이 스스로 진리와 선의 주인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AC.122-125에서 계속 설명된 것처럼, 인간 안에 있고 인간이 실제로 누리고 사용하는 것이라 해도 그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AC.142의 핵심적인 긴장은 바로 그 다음에 있습니다. 사람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이 어떤 성질을 지녔는지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에게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은 선과 진리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주님께 받은 선의 애정과 진리의 앎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느끼며 살아갈 어떤 것을 원했습니다. AC.133에서 간략히 제시했던 이 사실이 이제 창2:19-20의 각 표현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마지막의 그를 돕는 배필을 찾지 못했다는 표현은 바로 이 상태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미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주시고 그 성질까지 알게 하셨지만, 그는 그것들만으로 자신의 proprium에 대한 기울어짐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알맞은 상대를 찾으려고 여러 피조물을 시험해 보셨으나 실패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인간이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고 있었다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제 그 상태에서 갈빗대와 여자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AC.142는 따라서 창2:19-20을 창2:1821-23 사이에 놓인 단순한 동물 명명 장면으로 지나치지 않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proprium으로 기울자 먼저 그에게 이미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십니다. 인간은 그것들의 성질을 알지만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기 전에 주님께서 무엇을 먼저 하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proprium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에게 고유한 것으로 느껴지는 삶을 원했습니다. 바로 이 상태가 다음에 이어지는 갈빗대여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배경이 됩니다. (AC.142)

 

 

 

AC.143, 창2:19-20, ‘짐승들이 애정을 의미하는 이유 - 천국적인 관념과 영계의 표상’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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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 창2:18, ‘육체적·영적·천적 인간의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인간의 proprium에 관해서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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