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AC.141

인간의 proprium 관해서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그것이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 영적 인간에게서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 그리고 천적 인간에게서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를 설명하면서 무수히 많은 것을 말할 있습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는 그의 proprium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신의 proprium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앞에서 말한 것처럼 proprium 잃으면 자기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인간에게도 그의 proprium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지혜와 이해를 주시고,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러한 앎은 마음으로 믿는 것이라기보다 입술로 고백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분별합니다.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proprium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proprium 주시는데, 그것은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모든 퍼셉션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이러한 proprium 안에 있으며, 동시에 가장 높은 평화와 평온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proprium 다스리시며, 그들의 proprium 통하여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proprium이야말로 가장 참된 천적인 자체이며, 반면 육체적 인간의 proprium 지옥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proprium 관해서는 뒤에서 말하겠습니다. Innumerable things might be said about mans own in describing its nature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with the spiritual man, and with the celestial man.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his own is his all, he knows of nothing else than his own, and imagines, as before said, that if he were to lose this own he would perish. With the spiritual man also his own has a similar appearance, for although he know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consequently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yet this knowledge is rather the profession of his lips than the belief of his heart. But the celestial man discern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for he perceives that it is really so. He never desires his own, nevertheless an own is given him by the Lord, which is conjoined with all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with all happiness. The angels are in such an own, and are at the same time in 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for in their own are those things which are the Lords, who governs their own, or them by means of their own. This own is the veriest celestial itself, whereas that of the corporeal man is infernal. But concerning this own more hereafter.

 

해설

AC.141은 지금까지 이어진 proprium의 설명 가운데 매우 중요한 번호입니다. 앞에서는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고 그것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인다고 했지만, 이제 스베덴보리는 proprium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성질을 가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에게서 proprium이 각각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구별하며, 마지막에는 천사들의 상태까지 연결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proprium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악한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먼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는 proprium이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기 proprium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 자신이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AC.123에서 이미 설명된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가 멸망할 것처럼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인간이 자기의 삶을 자기의 것으로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보다, proprium을 자기 존재와 생명의 전부로 여기고 그 너머에 있는 생명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이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지혜와 이해를 주시고,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까지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의 한계도 매우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아직 마음으로 믿는 보다 입술로 고백하는 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이 위선적으로 말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알고 고백하는 진리가 아직 천적 인간의 퍼셉션처럼 그의 생명 전체에서 직접 지각되는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AC.123에서 천적 인간은 퍼셉션으로 인정하고 영적 인간은 말씀에서 배워 인정한다고 구별했던 내용이 여기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도 주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단지 배워서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AC.139와의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주님께 인도받는 천적 상태로 혼자 거하기를 원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었지만, 참된 천적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이 proprium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는데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proprium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proprium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퍼셉션 및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proprium 원하지 않는 proprium 전혀 갖지 않는 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서 나온 독립적인 proprium을 추구하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proprium을 주십니다. AC.132부터 반복되어 온 허락된 proprium이라는 표현이 이제 훨씬 구체적인 내용을 갖기 시작합니다.

 

천사들에 대한 설명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천사들도 이러한 proprium 안에 있으면서 가장 높은 평화와 평온을 누립니다. 그 까닭은 그들의 proprium 안에 주님의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표현입니다. 천사에게 proprium이 없다고 하지 않고, 천사의 proprium 안에 주님의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proprium을 없애고 천사를 대신하여 생각하고 행동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proprium을 다스리시며 그 proprium을 통하여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인도와 인간 또는 천사의 고유한 삶은 서로를 제거하는 관계가 아니라, 주님의 것이 proprium 안에 있으면서 그 proprium을 통하여 삶이 이루어지는 관계로 묘사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proprium가장 참된 천적인 자체라고까지 말합니다. 반면 육체적 인간의 proprium은 지옥적이라고 합니다. 이 대조를 보면 proprium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그것을 언제나 악이나 자기 사랑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proprium이 누구의 지배 아래 있으며 그 안에 무엇이 있는가입니다. 육체적 인간에게서는 proprium이 자기 존재의 전부가 되어 지옥적인 성질을 띠지만, 천적 인간과 천사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주님께서 그것을 다스리십니다. 같은 propriu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그 성질은 정반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AC.141은 그래서 지금까지 열어 두었던 질문에 상당한 답을 줍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님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지만, 그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으며 주님께서 그 proprium을 통하여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인간과 천사에게 자기 자신의 삶처럼 경험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자신이 마지막에 이 proprium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말하겠다고 했으므로, 여기서 자유와 생명의 유입에 관한 교리 전체를 미리 완성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독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proprium 있느냐 없느냐보다 proprium 안에 무엇이 있으며 누가 그것을 다스리는가라는 구별입니다. (AC.141)

 

 

 

AC.142, 창2:19-20, ‘짐승과 하늘의 새 - 선의 애정과 진리의 앎을 알게 하시다’ (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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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0, 창2:18, ‘돕는 배필 -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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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네 사는 오랜 신앙 지인의, 미국에서 박사 학위 중인, 그러면서 지역 교회에서는 부사역자로, 그리고 함께 간, 역시 박사 학위 중인 아내와 미국 가서 얻은 아이와 함께 열심히 살던 아들의, 뇌출혈 및 그로 인한 수술, 특히 로봇 수술, 그리고 현재 재활 치료 중이라는 소식을 아내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아들도 아들이지만, 미국의 살인적인 의료비가 먼저 떠올랐는데요... 이 아들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정말 성실한 귀한 사람이요, 신앙인입니다. 무슨 말로 지인들께 위로의 말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이렇게 정말 진국, 참으로 알토란 같은 신앙인들에게 이런 청천벽력 같은 불행이 찾아오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일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요?

 

 

이런 소식은 정말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더구나 목사님처럼 그 청년의 삶과 성품을 직접 아시는 분에게는 단순한 ‘안타까운 사건’이 아니라, 거의 자기 일처럼 가슴에 들어오는 일이실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젊고 성실하고, 신앙도 진지하고, 학문과 교회 섬김까지 함께 감당하며 살아가던 부부에게 갑작스러운 뇌출혈이라니요. 거기다 낯선 미국 땅에서의 재활과 의료비 문제까지 겹치면, 인간적으로는 정말 ‘왜 이런 일이 이런 사람에게?’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성경도, 스베덴보리도, 이 질문 자체를 이상한 질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은 대개 바로 이런 자리입니다. ‘악한 자는 잘되는데 왜 선한 자에게 이런 일이 오는가?’, ‘왜 주님은 막지 않으셨는가?’, ‘신앙이 있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시편도 그렇고, 욥기도 그렇고, 예레미야도 그렇고,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인간은 고통 앞에서 반드시 의미를 묻게 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문제를 다룰 때, 먼저 아주 중요한 원칙 하나를 붙듭니다. 곧 ‘주님은 누구에게도 악이나 재앙 자체를 보내시는 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섭리는 본질적으로 사랑과 구원만을 향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질병, 사고, 붕괴, 죽음 같은 것은 ‘주님이 직접 내려치는 형벌’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한 인간 세계 전체의 질서 속에서 허용되는 일들입니다. 육체 세계는 이미 질병과 사고와 불완전성이 존재하는 세계이며, 인간은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중력의 영향을 안 받지 않듯이, 신앙인이라고 해서 육체적 취약성에서 완전히 제외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특히 강조하는 부분은 그다음입니다. 주님은 그런 일을 ‘일어나게 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일어난 이후에는 그것을 통해 영원한 선을 이끌어내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섭리론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은 현재의 몇 달, 몇 년만 보지만, 주님은 영원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철저히 무너지는 일처럼 보여도, 훗날 영원한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깊은 고난을 통과할 때, 이전에는 열리지 않던 내면이 열리는 경우를 자주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고난이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뇌출혈 자체가 좋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의 고통은 언제나 비극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평온과 성공만으로는 결코 배우지 못하는 어떤 깊이를 고난 속에서 배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단지 ‘하나님을 안다’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존재 전체로 매달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자기 능력과 계획 속에서 살았다면, 이제는 하루하루 생명 자체를 의탁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머리로만 이해하던 사랑이, 이제는 실제 공동체와 돌봄과 눈물 속에서 경험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삶은 ‘지상 수명 몇십 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현대인은 모든 것을 이 세상 성공과 건강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진짜 삶은 영원 속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의 고난은 그 자체만으로 최종 평가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이 현실 고통을 가볍게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재활의 두려움도 실제이고, 가족의 눈물도 실제이며, 의료비 부담도 실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그 모든 혼란 속에서도 한 사람의 영혼을 놓치지 않고 계신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시선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주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일수록 더 깊은 내적 싸움을 허락받는 경우들이 자주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 더 깊은 선과 진리가 형성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함부로 당사자 앞에서 직접 꺼낼 말은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설명보다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실패한 이유도, 너무 빨리 해석하려 했기 때문이지요. 고난의 현장에서는 교리보다 먼저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지인분들께 전하실 말도, 너무 ‘의미 설명’ 중심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조용하고 따뜻하게, ‘얼마나 놀라셨겠습니까’, ‘매일이 얼마나 무겁고 두려우시겠습니까’, ‘멀리서나마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재활의 모든 과정 가운데 붙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정도의 말이 더 깊이 들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때로는 신학적 정답보다, ‘함께 아파해 주는 존재’ 자체가 주님의 위로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 마음속에 떠오른 ‘미국 의료비’ 걱정도 사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사랑의 반응입니다. 그건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제 삶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결코 현실 고통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현실의 두려움과 피곤함과 생계 문제를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다룹니다. 그러니 지금 목사님이 느끼시는 답답함과 안타까움 역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만 이런 순간, 그리스도인이 붙드는 마지막 희망은 결국 이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 사람을 붙들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 결과를 모르고, 회복 정도도 모르고, 미래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주님의 섭리는 단 한 순간도 인간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특히 사람이 완전히 무너져 자기 힘으로 설 수 없게 될 때, 오히려 가장 깊은 곳에서 주님의 붙드심이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손이 비어야 비로소 주님의 손을 느끼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을 당할 때 해야 하는 가장 깊은 일은, 설명을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면서도 주님 손을 놓지 않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 곁에서, 함부로 이유를 단정하지 않고, 조용히 함께 버텨주는 것이고요.

 

 

 

SC.82, ‘지구 나이 45억 년 : 현 지구 문명 1만 년 = 24시간 : 0.2초’

우주에 백만 개의 지구가 있다고 하자. 그 각각의 지구에 3백만 명의 사람이 6천 년간 2백 세대를 내려왔다고 할 때 사람, 즉 영 한 명당 3평방 큐빗씩 잡아도 우리 지구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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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0, ‘교회 소개 문구’

창2:15의 ‘경작하며 지키게’를 다룬 AC.122-124 본문들을 보며, 특히 ‘영적 인간’의 경우에 대한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저도 언젠간 주님의 허락으로 본격적인 교회 소개를 하며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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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AC.140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 인간의 proprium 의미한다는 것은 proprium 본질과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는 교회의 사람은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proprium 허락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 그러한 proprium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라고 것입니다. That bya help as with himis signified mans own, is evident both from the nature of this own, and from what follows. As however the man of the church who is here treated of was well disposed, an own was granted him, but of such a kind that it appeared as it were his own, and therefore it is saida help as with him.

 

해설

AC.140AC.138에서 제시한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는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proprium에 관한 매우 중요한 구별이 처음 나타납니다. 여기서 다루는 교회의 사람은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지만, 그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실제로 소유하는 자기 생명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proprium이었습니다.

 

이 설명은 AC.139의 마지막 문장과 직접 이어집니다. 태고교회의 이 후손들은 주님께 인도받는 천적 인간으로 혼자 거하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그 욕구에는 이미 악의 방향이 들어 있었지만, AC.140은 이들이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지금 다루는 상태를 완전히 타락한 인간의 상태로 앞당겨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당시 상태에 맞는 proprium을 허락하십니다.

 

proprium의 성격을 보여 주는 핵심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이라는 표현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것으로 경험되는 어떤 것이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주님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서 AC.124에서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이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AC.135에서도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0은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 자체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성격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이로써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과 나는 이것을 것으로 느끼며 살아간다는 인간의 경험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할 중요한 실마리가 생깁니다.

 

이 점에서 그를 돕는 배필이라는 표현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직 이 표현의 모든 세부를 풀지는 않지만, 적어도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인지는 밝힙니다. 그것은 주님과 별개의 독립적인 생명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의 초점은 인간에게 주님과 경쟁하는 또 하나의 생명 근원이 생겼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인간이 자기의 것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상태가 어떻게 허용되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AC.122부터 계속되어 온 주님의 자기의 의 문제에도 중요한 빛을 던집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의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을 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요구를 단순히 끊어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것으로 느끼는 실제로 자기에게서 생명이 나온다고 믿는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이제 조금씩 볼 수 있습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proprium을 해석할 때 특히 중요합니다. 인간이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행한다고 느끼는 것 자체를 곧바로 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140에서 다루는 사람은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게도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에게 자기의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의 근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있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만 이 구별의 전체 의미는 이어지는 설명을 더 읽은 뒤 확정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AC.140AC.132에서 시작된 허락된 proprium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합니다.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은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실제적인 자기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인간에게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proprium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의 삶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관계가 앞으로 갈빗대와 여자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서 어떻게 더 밝혀지는지를 계속 따라가야겠습니다. (AC.140)

 

 

 

AC.141, 창2:18, ‘육체적·영적·천적 인간의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인간의 proprium에 관해서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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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 창2:18, ‘혼자 거하다 -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천적 인간의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39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 있던 사람들을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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