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네 사는 오랜 신앙 지인의, 미국에서 박사 학위 중인, 그러면서 지역 교회에서는 부사역자로, 그리고 함께 간, 역시 박사 학위 중인 아내와 미국 가서 얻은 아이와 함께 열심히 살던 아들의, 뇌출혈 및 그로 인한 수술, 특히 로봇 수술, 그리고 현재 재활 치료 중이라는 소식을 아내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아들도 아들이지만, 미국의 살인적인 의료비가 먼저 떠올랐는데요... 이 아들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정말 성실한 귀한 사람이요, 신앙인입니다. 무슨 말로 지인들께 위로의 말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이렇게 정말 진국, 참으로 알토란 같은 신앙인들에게 이런 청천벽력 같은 불행이 찾아오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일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요?

 

 

이런 소식은 정말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더구나 목사님처럼 그 청년의 삶과 성품을 직접 아시는 분에게는 단순한 ‘안타까운 사건’이 아니라, 거의 자기 일처럼 가슴에 들어오는 일이실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젊고 성실하고, 신앙도 진지하고, 학문과 교회 섬김까지 함께 감당하며 살아가던 부부에게 갑작스러운 뇌출혈이라니요. 거기다 낯선 미국 땅에서의 재활과 의료비 문제까지 겹치면, 인간적으로는 정말 ‘왜 이런 일이 이런 사람에게?’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성경도, 스베덴보리도, 이 질문 자체를 이상한 질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은 대개 바로 이런 자리입니다. ‘악한 자는 잘되는데 왜 선한 자에게 이런 일이 오는가?’, ‘왜 주님은 막지 않으셨는가?’, ‘신앙이 있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시편도 그렇고, 욥기도 그렇고, 예레미야도 그렇고,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인간은 고통 앞에서 반드시 의미를 묻게 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문제를 다룰 때, 먼저 아주 중요한 원칙 하나를 붙듭니다. 곧 ‘주님은 누구에게도 악이나 재앙 자체를 보내시는 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섭리는 본질적으로 사랑과 구원만을 향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질병, 사고, 붕괴, 죽음 같은 것은 ‘주님이 직접 내려치는 형벌’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한 인간 세계 전체의 질서 속에서 허용되는 일들입니다. 육체 세계는 이미 질병과 사고와 불완전성이 존재하는 세계이며, 인간은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중력의 영향을 안 받지 않듯이, 신앙인이라고 해서 육체적 취약성에서 완전히 제외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특히 강조하는 부분은 그다음입니다. 주님은 그런 일을 ‘일어나게 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일어난 이후에는 그것을 통해 영원한 선을 이끌어내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섭리론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은 현재의 몇 달, 몇 년만 보지만, 주님은 영원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철저히 무너지는 일처럼 보여도, 훗날 영원한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깊은 고난을 통과할 때, 이전에는 열리지 않던 내면이 열리는 경우를 자주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고난이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뇌출혈 자체가 좋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의 고통은 언제나 비극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평온과 성공만으로는 결코 배우지 못하는 어떤 깊이를 고난 속에서 배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단지 ‘하나님을 안다’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존재 전체로 매달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자기 능력과 계획 속에서 살았다면, 이제는 하루하루 생명 자체를 의탁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머리로만 이해하던 사랑이, 이제는 실제 공동체와 돌봄과 눈물 속에서 경험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삶은 ‘지상 수명 몇십 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현대인은 모든 것을 이 세상 성공과 건강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진짜 삶은 영원 속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의 고난은 그 자체만으로 최종 평가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이 현실 고통을 가볍게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재활의 두려움도 실제이고, 가족의 눈물도 실제이며, 의료비 부담도 실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그 모든 혼란 속에서도 한 사람의 영혼을 놓치지 않고 계신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시선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주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일수록 더 깊은 내적 싸움을 허락받는 경우들이 자주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 더 깊은 선과 진리가 형성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함부로 당사자 앞에서 직접 꺼낼 말은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설명보다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실패한 이유도, 너무 빨리 해석하려 했기 때문이지요. 고난의 현장에서는 교리보다 먼저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지인분들께 전하실 말도, 너무 ‘의미 설명’ 중심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조용하고 따뜻하게, ‘얼마나 놀라셨겠습니까’, ‘매일이 얼마나 무겁고 두려우시겠습니까’, ‘멀리서나마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재활의 모든 과정 가운데 붙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정도의 말이 더 깊이 들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때로는 신학적 정답보다, ‘함께 아파해 주는 존재’ 자체가 주님의 위로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 마음속에 떠오른 ‘미국 의료비’ 걱정도 사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사랑의 반응입니다. 그건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제 삶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결코 현실 고통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현실의 두려움과 피곤함과 생계 문제를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다룹니다. 그러니 지금 목사님이 느끼시는 답답함과 안타까움 역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만 이런 순간, 그리스도인이 붙드는 마지막 희망은 결국 이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 사람을 붙들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 결과를 모르고, 회복 정도도 모르고, 미래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주님의 섭리는 단 한 순간도 인간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특히 사람이 완전히 무너져 자기 힘으로 설 수 없게 될 때, 오히려 가장 깊은 곳에서 주님의 붙드심이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손이 비어야 비로소 주님의 손을 느끼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을 당할 때 해야 하는 가장 깊은 일은, 설명을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면서도 주님 손을 놓지 않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 곁에서, 함부로 이유를 단정하지 않고, 조용히 함께 버텨주는 것이고요.

 

 

 

SC.82, ‘지구 나이 45억 년 : 현 지구 문명 1만 년 = 24시간 : 0.2초’

우주에 백만 개의 지구가 있다고 하자. 그 각각의 지구에 3백만 명의 사람이 6천 년간 2백 세대를 내려왔다고 할 때 사람, 즉 영 한 명당 3평방 큐빗씩 잡아도 우리 지구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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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0, ‘교회 소개 문구’

창2:15의 ‘경작하며 지키게’를 다룬 AC.122-124 본문들을 보며, 특히 ‘영적 인간’의 경우에 대한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저도 언젠간 주님의 허락으로 본격적인 교회 소개를 하며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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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AC.140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 인간의 proprium 의미한다는 것은 proprium 본질과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는 교회의 사람은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proprium 허락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 그러한 proprium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라고 것입니다. That bya help as with himis signified mans own, is evident both from the nature of this own, and from what follows. As however the man of the church who is here treated of was well disposed, an own was granted him, but of such a kind that it appeared as it were his own, and therefore it is saida help as with him.

 

해설

AC.140AC.138에서 제시한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는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proprium에 관한 매우 중요한 구별이 처음 나타납니다. 여기서 다루는 교회의 사람은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지만, 그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실제로 소유하는 자기 생명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proprium이었습니다.

 

이 설명은 AC.139의 마지막 문장과 직접 이어집니다. 태고교회의 이 후손들은 주님께 인도받는 천적 인간으로 혼자 거하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그 욕구에는 이미 악의 방향이 들어 있었지만, AC.140은 이들이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지금 다루는 상태를 완전히 타락한 인간의 상태로 앞당겨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당시 상태에 맞는 proprium을 허락하십니다.

 

proprium의 성격을 보여 주는 핵심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이라는 표현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것으로 경험되는 어떤 것이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주님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서 AC.124에서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이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AC.135에서도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0은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 자체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성격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이로써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과 나는 이것을 것으로 느끼며 살아간다는 인간의 경험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할 중요한 실마리가 생깁니다.

 

이 점에서 그를 돕는 배필이라는 표현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직 이 표현의 모든 세부를 풀지는 않지만, 적어도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인지는 밝힙니다. 그것은 주님과 별개의 독립적인 생명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의 초점은 인간에게 주님과 경쟁하는 또 하나의 생명 근원이 생겼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인간이 자기의 것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상태가 어떻게 허용되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AC.122부터 계속되어 온 주님의 자기의 의 문제에도 중요한 빛을 던집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의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을 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요구를 단순히 끊어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것으로 느끼는 실제로 자기에게서 생명이 나온다고 믿는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이제 조금씩 볼 수 있습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proprium을 해석할 때 특히 중요합니다. 인간이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행한다고 느끼는 것 자체를 곧바로 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140에서 다루는 사람은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게도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에게 자기의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의 근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있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만 이 구별의 전체 의미는 이어지는 설명을 더 읽은 뒤 확정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AC.140AC.132에서 시작된 허락된 proprium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합니다.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은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실제적인 자기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인간에게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proprium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의 삶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관계가 앞으로 갈빗대와 여자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서 어떻게 더 밝혀지는지를 계속 따라가야겠습니다. (AC.140)

 

 

 

AC.141, 창2:18, ‘육체적·영적·천적 인간의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인간의 proprium에 관해서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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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 창2:18, ‘혼자 거하다 -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천적 인간의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39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 있던 사람들을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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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AC.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 있던 사람들을 혼자 거하는(dwell alone)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에게 시달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대교회에서도 그들이 이방 민족들을 몰아낸 혼자 거하는 것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말씀에서는 때때로 주님의 교회가 혼자(alone) 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에서는, In ancient times those were said todwell alonewho were under the Lords guidance as celestial men, because such were no longer infested by evils, or evil spirits. This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also by their dwelling alone when they had driven out the nations. On this account it is sometimes said of the Lords church, in the Word, that she isalone,as in Jeremiah: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49:31) Arise, get you up to a quiet nation that dwelleth confidently, saith the Lord, which hath neither gates nor bar; they dwell alone. (Jer. 49:31)

 

신명기에서는, In the prophecy of Moses: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33:28) Israel hath dwelt confidently alone. (Deut. 33:28)

 

그리고 발람의 예언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And still more clearly in the prophecy of Balaam: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백성은 홀로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23:9) Lo, the people dwelleth alone, and shall not be reckoned among the nations, (Num. 23:9)

 

라고 합니다. 여기서 민족들(nations) 악들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혼자 거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천적 인간이 되거나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를 받기를 원하지 않고, 유대교회처럼 여러 민족 가운데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을 원했기 때문에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라고 것입니다. 원하는 사람은 이미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그가 원하는 것이 그에게 허락됩니다. wherenationssignify evils.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disposed to dwell alone, that is, to be a celestial man, or to be led by the Lord as a celestial man, but, like the Jewish church, desired to be among the nations. And because they desired this, it i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for he who desires is already in evil, and it is granted him.

 

해설

AC.139AC.138에서 설명한 혼자(alone)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분명해지는 것은 혼자가 본래 부정적인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사람들을 혼자 거하는사람들이라 했습니다. 그들이 혼자 거한다는 것은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고립되어 산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된 천적 인간의 상태와도 잘 연결됩니다. AC.84에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면 싸움이 그친다고 했고, AC.87에서는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39에서 말하는 혼자 거함은 외적인 고독이 아니라 악의 침입과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께 인도받는 내적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는 오히려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던 가장 번성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가 유대교회에서도 표상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을 몰아내고 혼자 거하는 모습은 주님의 교회가 악으로부터 분리되어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서는 홀로 사는 국민을 말하고,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는 모습을 말하며, 민수기의 발람의 예언에서는 백성은 홀로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들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이나 지리적 고립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거함이 주님의 교회가 악으로부터 구별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인용합니다.

 

특히 민23:9민족들(nations)이 여기서는 악들을 의미한다는 설명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민족 자체를 악하게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절의 속뜻에서 민족들이 악들을 나타내므로, ‘홀로 산다는 것은 악들과 뒤섞여 그 지배를 받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현실의 특정 민족이나 종교 집단과의 분리를 정당화하는 말씀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것은 교회의 내적 상태입니다.

 

이제 이 설명을 창2:18에 적용하면 매우 중요한 반전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문자만 읽으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말씀에서 혼자가 좋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139에 따르면 본래 혼자 거하는 은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를 받는 좋은 상태였습니다. 문제는 그 상태 자체가 좋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더 이상 그 상태를 원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인도받는 천적 인간으로 혼자 거하기보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천적 상태 자체를 좋지 않다고 판정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139은 그들이 이미 다른 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AC.132의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다시 말해 혼자가 나빠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더 이상 혼자 거하는천적 상태를 원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의 원하는 사람은 이미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그가 원하는 것이 그에게 허락됩니다라는 문장은 이 변화의 심각성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넣어 주신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인간 쪽에서 주님의 인도만을 원하지 않는 욕구가 생겼고, 그 욕구 자체가 이미 악의 방향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인간이 원하는 것을 강제로 없애어 천적 상태에 붙들어 두시는 대신 그것이 허락되는 가운데 인간을 계속 이끌어 가십니다. 바로 그 과정에서 앞서 말한 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AC.139는 창2:18혼자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번호입니다. ‘혼자는 고독이나 결핍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본래 주님의 인도 아래 악으로부터 구별되어 있던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그 상태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창2:18의 전환점은 혼자 있는 인간에게 무엇이 부족했는가?가 아니라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를 이상 원하지 않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서 찾아야 합니다. (AC.139)

 

 

 

AC.140, 창2:18, ‘돕는 배필 -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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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8, 창2:18, ‘혼자와 돕는 배필 - 인간이 원하는 proprium’ (AC.138-141)

창2:18-25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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