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
인간의 proprium에 관해서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그것이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 영적 인간에게서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 그리고 천적 인간에게서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를 설명하면서 무수히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는 그의 proprium이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신의 proprium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proprium을 잃으면 자기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인간에게도 그의 proprium은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지혜와 이해를 주시고,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러한 앎은 마음으로 믿는 것이라기보다 입술로 고백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분별합니다.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proprium을 주시는데, 그것은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모든 퍼셉션 및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이러한 proprium 안에 있으며, 동시에 가장 높은 평화와 평온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proprium을 다스리시며, 곧 그들의 proprium을 통하여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이 proprium이야말로 가장 참된 천적인 것 자체이며, 반면 육체적 인간의 proprium은 지옥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proprium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말하겠습니다. Innumerable things might be said about man’s own in describing its nature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with the spiritual man, and with the celestial man.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his own is his all, he knows of nothing else than his own, and imagines, as before said, that if he were to lose this own he would perish. With the spiritual man also his own has a similar appearance, for although he know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consequently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yet this knowledge is rather the profession of his lips than the belief of his heart. But the celestial man discern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for he perceives that it is really so. He never desires his own, nevertheless an own is given him by the Lord, which is conjoined with all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with all happiness. The angels are in such an own, and are at the same time in 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for in their own are those things which are the Lord’s, who governs their own, or them by means of their own. This own is the veriest celestial itself, whereas that of the corporeal man is infernal. But concerning this own more hereafter.
해설
AC.141은 지금까지 이어진 proprium의 설명 가운데 매우 중요한 번호입니다. 앞에서는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고 그것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인다고 했지만, 이제 스베덴보리는 proprium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성질을 가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에게서 proprium이 각각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구별하며, 마지막에는 천사들의 상태까지 연결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proprium’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악한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먼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는 proprium이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기 proprium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 자신이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AC.123에서 이미 설명된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가 멸망할 것처럼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인간이 자기의 삶을 자기의 것으로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proprium을 자기 존재와 생명의 전부로 여기고 그 너머에 있는 생명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이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지혜와 이해를 주시고,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까지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의 한계도 매우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아직 ‘마음으로 믿는 것’보다 ‘입술로 고백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이 위선적으로 말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알고 고백하는 진리가 아직 천적 인간의 퍼셉션처럼 그의 생명 전체에서 직접 지각되는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AC.123에서 천적 인간은 퍼셉션으로 인정하고 영적 인간은 말씀에서 배워 인정한다고 구별했던 내용이 여기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도 주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단지 배워서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AC.139와의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주님께 인도받는 천적 상태로 ‘혼자 거하기’를 원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었지만, 참된 천적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이 proprium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는데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proprium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proprium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퍼셉션 및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proprium을 원하지 않는 것’과 ‘proprium을 전혀 갖지 않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서 나온 독립적인 proprium을 추구하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proprium을 주십니다. AC.132부터 반복되어 온 ‘허락된 proprium’이라는 표현이 이제 훨씬 구체적인 내용을 갖기 시작합니다.
천사들에 대한 설명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천사들도 이러한 proprium 안에 있으면서 가장 높은 평화와 평온을 누립니다. 그 까닭은 그들의 proprium 안에 ‘주님의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표현입니다. 천사에게 proprium이 없다고 하지 않고, 천사의 proprium 안에 주님의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proprium을 없애고 천사를 대신하여 생각하고 행동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proprium을 다스리시며 그 proprium을 통하여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인도와 인간 또는 천사의 고유한 삶은 서로를 제거하는 관계가 아니라, 주님의 것이 proprium 안에 있으면서 그 proprium을 통하여 삶이 이루어지는 관계로 묘사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proprium을 ‘가장 참된 천적인 것 자체’라고까지 말합니다. 반면 육체적 인간의 proprium은 지옥적이라고 합니다. 이 대조를 보면 ‘proprium’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그것을 언제나 악이나 자기 사랑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proprium이 누구의 지배 아래 있으며 그 안에 무엇이 있는가입니다. 육체적 인간에게서는 proprium이 자기 존재의 전부가 되어 지옥적인 성질을 띠지만, 천적 인간과 천사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주님께서 그것을 다스리십니다. 같은 ‘propriu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그 성질은 정반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AC.141은 그래서 지금까지 열어 두었던 질문에 상당한 답을 줍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님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지만, 그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으며 주님께서 그 proprium을 통하여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인간과 천사에게 자기 자신의 삶처럼 경험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자신이 마지막에 이 proprium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말하겠다고 했으므로, 여기서 자유와 생명의 유입에 관한 교리 전체를 미리 완성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독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proprium이 있느냐 없느냐’보다 ‘그 proprium 안에 무엇이 있으며 누가 그것을 다스리는가’라는 구별입니다. (AC.141)
AC.142, 창2:19-20, ‘짐승과 하늘의 새 - 선의 애정과 진리의 앎을 알게 하시다’ (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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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0, 창2:18, ‘돕는 배필 -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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