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8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볼 수 있도록 감각적인 것들을 통하여, 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나는 믿지 않겠다.’ 그리고 그는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모순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기 입장을 확증합니다. 이와 같이 그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에 관하여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합니다. 그가 이러한 수단으로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는 더욱 자기 눈을 멀게 하며, 마침내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어 영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조차 믿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그가 전제로 삼은 원리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이며, 누구든지 그것을 더 많이 먹을수록 더욱 죽은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주님을 믿어야 한다고, 곧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신 것들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질서 지웁니다. 그는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을 통하여 자신을 확증하며, 확증하지 않는 것들은 제쳐 둡니다.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says in his heart, If I am not instructed concerning the faith, and everything relating to it,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so that I may see, or by means of those of the memory [scientifica], so that I may understand, I will not believe; and he confirms himself in this by the consideration that natural things cannot be contrary to spiritual. Thus he is desirous of being instructed from things of sense in what is celestial and Divine, which is as impossible as it is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for the more he desires to grow wise by such means, the more he blinds himself, till at length he believes nothing, not even that there is anything spiritual, or that there is eternal life. This comes from the principle which he assumes. And this is to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of which the more anyone eats, the more dead he becomes. But he who would be wise from the Lord, and not from the world, says in his heart that the Lord must be believed, that is, the things which the Lord has spoken in the Word, because they are truths; and according to this principle he regulates his thoughts. He confirms himself by things of reason, of knowledge, of the senses, and of nature [per rationalia, scientifica, sensualia et naturalia], and those which are not confirmatory he casts aside.
해설
AC.128은 앞에서 설명한 두 가지 질서를 각각 한 사람의 마음속 말처럼 펼쳐 보여 줍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내가 감각으로 볼 수 있고 기억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신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믿고, 그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질서 지웁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차이는 한쪽은 생각하고 다른 쪽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출발점으로 삼아 생각하느냐가 다릅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출발점은 감각과 기억지식입니다. 그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조차 먼저 자연적인 차원에서 확인되어야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모순될 수 없다’는 생각 자체만 떼어 놓으면 그럴듯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연적인 것을 영적인 것의 심판자로 세운다는 데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고, 자기가 가진 기억지식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원리를 먼저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때 가장 바깥에 있어야 할 것이 가장 위에 올라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불가능하다고 표현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감각적인 것은 자연계에 나타나는 것을 받아들이고, 기억지식은 그렇게 받아들인 것들을 기억에 간직합니다. 그것들은 자기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천적이고 신적인 것의 근원을 발견하여 그 진위를 판정하려 한다면, 아래에 있는 것으로 위에 있는 것의 근원을 만들어 내려는 셈이 됩니다. AC.121에서 제시된 천적 질서는 정반대였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과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받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려는 질서의 전도를 의미합니다. 그런 까닭에 더 많이 먹을수록 더 많은 정보를 얻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죽은 상태’가 됩니다. 사람이 감각과 기억지식을 최종 기준으로 삼을수록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내적인 길이 닫히고, 마침내 영적인 실재와 영원한 생명 자체도 믿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128의 후반부는 이 대목을 반지성주의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 역시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사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통하여 자신을 확증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금지되는 것은 이성적 사고나 지식의 사용이 아니라 그것들을 신앙의 최초 원리로 삼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성과 기억지식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신 것들을 믿는다’는 것도 생각을 중단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그 오해를 막습니다. 그는 ‘이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질서 지웁니다.’ 즉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인 뒤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진리를 중심으로 자신의 사고 전체를 질서 있게 세웁니다. 그리고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 가운데 그 진리를 확증하는 것들을 사용합니다. 신앙과 사고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고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확증하지 않는 것들은 제쳐 둔다’는 표현은 문맥 안에서 신중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자신이 믿고 싶은 것과 맞지 않는 사실은 무조건 무시해도 된다는 일반적인 지적 태도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것은 천적이고 신적인 것을 무엇으로부터 배우며 무엇을 최초 원리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맥에서 핵심은 자연적인 지식이 신적인 진리 위에 서서 그것을 재판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현대적인 의미의 사실 회피나 무비판적인 확증 편향을 정당화하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AC.128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문제를 ‘지식 대 무지’의 대립이 아니라 ‘질서 대 질서의 전도’로 보여 줍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도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을 사용하고,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는 사람도 그것들을 사용합니다. 차이는 그것들이 주인의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섬기는 자리에 있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에까지 내려가는 것이 생명의 질서라면,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시작하여 그것으로 신적인 것을 판단하려는 것은 그 질서를 거꾸로 세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의 핵심입니다. (AC.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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