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이야기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다음은 지난 2월 14일, 함께 나눈 내용입니다.

 

... 최근 창세기 1장 24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와, 이에 대한 AC.44번 내용 중에,

 

사람은, 땅처럼, 먼저 자기 안에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심어 무얼 믿고 무얼 행해야 하는지를 모르고서는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습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하는 문장에 눈길이 갔더랬습니다. 특별히 땅을 사람의 마음으로 연결하는 표현에 말이지요.

 

특별히 세계테마기행 최근 편 가운데 ‘벼랑 끝을 걷다, 협곡 기행’인 시리즈를 보는 중, 오... 정말 지구 상 어마어마한 협곡들을 소개하는데, 비록 영상으로지만,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인도양 프랑스령 레위니옹 살라지 협곡, 실라오스 협곡, 그리고 중국의 시링협곡, 언스대협곡,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블라이드리버캐니언 등입니다.

 

이 장엄, 광대, 광활한 장면들을 또 드론으로 말미암아 기가 막힌 영상으로 보여주는데요, 정말 엄청났습니다. 그렇게 계속 감탄에 감탄을 계속하다가...

 

오, 할렐루야! 이 모든 광경, 곧 땅의 모습 이 모든 장관이 주님 보시기에 사람의 마음이겠구나 싶은 겁니다. 주님이 우리 인간의 마음을 보실 때, 저렇게 보이시는가 보다 싶은 순간, 엄청난 전율이 일며, 말할 수 없는 큰 감동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반짝이는 말씀 구절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대하16:9)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8:36)

 

주님이 내 안에 조성하신 마음의 어떠함에 대해 조금, 아주 조금, 그러나 엄청난 무슨 발견을 한 것 같은 아주 흥분된 순간이었습니다...

 

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의 모판입니다. 모형이요, 모델하우스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오직 사람을 위함이며, 오직 사람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럴 듯한 무엇이라 해도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일체의 것은 천국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며, 아무리 사람을 그럴 듯하게 여긴다 해도 사람의 구원, 곧, 천국으로 인도함이 아니면 여전히 천국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 말씀(The Word) 전체가 단 한 가지 목적, 곧,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것이며, 그래서 창세기도, 그리고 창세기 1장도 결국은 한 사람의 거듭남의 전 과정을 아름다운 천지창조 이야기로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첫 단계부터 여섯 번째 단계 가운데 있는 사람, 즉, 아직 거듭남 중에 있는 영적(靈的, spiritual) 인간한테는 주님은 아직 ‘하나님’이셔서 창세기 1장엔 ‘하나님’으로, 그리고 드디어 일곱 번째 단계인 일곱째 날 안식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 즉,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한테는 주님은 비로소 ‘여호와’이셔서 창세기 2장에서는 ‘여호와’로 각각 호칭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자연계 모든 만물은 사람의 거듭남에 관련되며, 구원에 기여할 때에만 무슨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바로 그때가 그 사람한테는 ‘태초’(太初, the beginning)가 되는 것입니다.

 

천지’(天地, the heavens and the earth)는 사람 안의 속 사람, 겉 사람을 말합니다. 이 속 사람, 겉 사람 이야기는 앞으로 대하(大河)처럼 계속 됩니다.

 

말씀에 나오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거듭남을 가리킵니다. (cf. 사43:7)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할렐루야!

 

2021-11-29(D2)-창세기이야기(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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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79. 9절,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Verse 9.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Separate, I pray, from me;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and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모든 선을,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signifies all good.

 

나를 떠나가라’, 그 선은 하나 되지 못하는 것들(what is discordant), 함께 할 수 없는 것들,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이 전부 사라지지 않는 한, 나타날 수 없음을,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분리(separation), 헤어짐을 각각 의미합니다. Separate, I pray, from me,” signifies that the good cannot appear unless what is discordant is made none;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and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signifies separation.

 

 

1580.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이 표현의 의미가 모든 선(all good)이라는 것은 ‘’(land)이 가지는 어떤 좋은 뜻(a good sense)과, 여기서는 가나안 땅의 의미, 곧, 천적이며, 그래서 또한 선한, 그런 의미임을 볼 때 분명히 그렇습니다. (※ 관련 글은 저 위 566, 620, 636, 662번 글 참조) That this signifies all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land” in a good sense, and here of the land of Canaan, which is the celestial, and therefore also good (concerning which see above, n. 566, 620, 636, 662).

 

※ ‘가나안 땅’은 좋은 뜻으로는 천적인 것, 선, 천국과 교회, 더 나아가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 말씀(the Word)에서는 하나의 용어가 완전히 정반대의 의미를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좋은 뜻으로는’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은 겉 사람, 특히 겉 사람 안에 있는, 하나 되지 못하는 것들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자기 안에 좀 털어버렸으면 하는 무슨 악이 있음을 지각할 때나 시험(temptations) 중, 혹은 갈등(combats) 중일 때 보이는 경향과 같지요. The internal man here addresses the external, but those things in the external man which disagree; as a man is wont to do when he perceives some evil in himself from which he desires to be separated, as is the case in temptations and combats.

 

이런 것은 시험 또는 갈등 가운데 있어 본 적이 있는 사람들, 자기 안에 하나 되지 못하는 것들이 있음을 지각하는 사람들은 다 아는 얘깁니다. 사람들이 이런 영적 갈등, 전투(combats) 중에 있는 한은, 비록 그런 것들로부터 분리될 수는 없지만, 여전히 분리되길 원하며, 종종 그 악에 대하여 분노, 아주 쫓아내 버리길 원하는 정도까지 가기 때문입니다. For it is known to those who have been in temptations and combats, that they perceive in themselves things which disagree; from which, so long as there is combat, they cannot be separated; but still they desire separation, and sometimes to such a degree that they are angry with the evil, and desire to expel it.

 

※ 자기한테서 수시로 나타나거나 끈질기게 안 고쳐지는 어떤 악한 습관, 반복된 언행, 태도, 부정적인 사고 등에 대해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걸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겉 사람에 있는 것들이며, 그 중에서도 속 사람과 같이 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게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These are the things that are here signified.

 

 

1581. 나를 떠나가라 Separate, I pray, from me.

 

이 표현은, 선은 자기와 어울리지 못하는 것(what is discordant)이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지(quiescence) 않는 한, 나타날 수 없다는 의미인데요, 이는 방금까지 말씀드린 내용, 곧, 속 사람은 겉 사람 안에 있는, 속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자신한테서 분리되기를 원한다는, 왜냐하면, 그것이 완전히 분리되기 전까지는, 속 사람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선은 결코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내용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good cannot appear unless what is discordant is made null is evident from what has just been said; namely, that the internal man desires that which disagrees, in the external man, should separate itself; for until it has been separated, the good which continually flows in from the internal man, that is, from the Lord through the internal man, cannot appear.

 

그러나 이 분리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분리가 아닌,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알려진 것입니다. But as regards this separation, it is to be known that it is not separation, but quiescence.

 

주님 말고 그 어느 누구도 겉 사람 안에 있는 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With no one, except the Lord, can the evil that is in the external man be separated.

 

사람은 일단 한번 접한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의 안에 남습니다. 단지 그게 쥐죽은 듯 조용히 있을 때는 마치 그게 분리된 것처럼 여겨지는데, 그것은 그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가만히 있기 때문입니다. Whatever a man has once acquired, remains; but it seems to be separated when it is quiescent, for thus it appears to be none.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쥐죽은 듯이 있는 상태가 되는 것도,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그런 상태가 되면, 비로소 주님으로부터 선이 흘러들어오며, 이 선이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Neither does it become quiescent so as to appear as none, except from the Lord; and when it does thus become quiescent, then for the first time do goods flow in from the Lord, and affect the external man.

 

이런 상태가 천사들의 상태입니다. 그들이 아는 건 그저 악이 자기들한테서 분리되어 왔다는 것뿐입니다. 사실은 악으로부터 일종의 보류 상태, 그래서 악이 아무 활동도 안 하는 상태에 있을 뿐이고, 그래서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인데 말이지요.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겉으로 보이는 양상, 곧 겉으로 볼 땐, 마치 악과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천사들이 곰곰 생각하면 아는 것입니다. Such is the state of the angels; nor do they know otherwise than that evil has been separated from them; whereas there is only a withholding from the evil, thus a quiescence, so that it appears as none; consequently this is an appearance, as also the angels know when they reflect.

 

 

1582.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and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이 표현이 분리를 의미함은 ‘’(右, the right)와 ‘’(左, the left)의 의미에서 옵니다. That this signifies separa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right” and “the left.

 

우와 좌는 그저 상대적인 용어들입니다. Right and left are merely relative terms.

 

이 용어들은 어떤 고정된 방위나 어떤 장소를 콕집어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서와 동, 북과 남, 어느 쪽도 사람이 어디를 바라보고 서 있느냐에 따라 우 또는 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They do not designate a fixed quarter, or a definite place;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east as well as the west, the south as well as the north, may be on the right or on the left, according to the way in which one is looking.

 

이건 장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The same is true also of place.

 

가나안 땅을 가리켜 오른쪽이다, 왼쪽이다 할 수 없습니다.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The land of Canaan could not be said to be on the right or on the left, except relatively.

 

주님이 계신 곳, 그곳이 어디이든 거기가 중심입니다. 오른쪽, 왼쪽은 거기를 중심으로 해서 정해집니다. Wherever the Lord is, there is the center; and the right and the left are determined from that.

 

그래서 주님을 표상하는 아브람이 이쪽 혹은 저쪽, 어느 쪽으로 물러나든 그는 여전히 주님을 표상하며, 그렇게 또한 땅(land)도 표상합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 안에 있든 어디 다른 데 있든 마찬가지, 같은 것, 곧, 아브람은 주님을 표상합니다. 식탁에 계신 분이 가장 높은 위엄을 가지신 분인 것처럼, 가장 높은 자리는 그 분이 앉는 자리요, 오른쪽, 왼쪽은 그때 정해지는 것입니다. Thus whether Abram, by whom the Lord was represented, withdrew this way or that way, still the representation was with him, and so also was the land; so that it was the same thing whether Abram was in the land of Canaan, or was elsewhere; just as it is with the one at table who is of the highest dignity, the highest place is wherever he sits, and the places to the right and the left are reckoned from that.

 

그래서 우냐 좌냐 하는 것은 선택하라는 한 형태요, 그래서 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To go to the right or the left, was therefore a form of offering the choice by which there was signified separation.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9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속뜻)

주님의 모든 선은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가는데, 이때 겉 사람 안에 이 흐름을 막는 일체의 것, 곧, 주님의 선과 함께 할 수 없는 악이 있으면, 즉, 활동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선이 내 생활 속에 나타나게 하고 싶으면 나는 악에서 물러나야 하며, 악이 내 안에서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게 해야 합니다.

 

※ 주님 말고는 그 어떤 사람도 자기 안에 한번 자리한 악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천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 악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게 할 수는 있습니다. 내가 그때마다 꾹꾹 누르거나 그때마다 물러나 악이 내 안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이 내 삶에 나타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1-28(D1)-주일예배(2243, AC.1579-1582, 창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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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DA76AAMY4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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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8(D1)-제9권48호통431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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