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 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창4:25)

 

 

434. 여기 ‘아담’(남자, 사람, man)와 그의 ‘아내’는 위 ‘아다와 씰라’로 상징된 새 교회를 뜻하며, 그녀의 ‘아들’, 셋은 체어리티를 얻게 될 새 신앙을 상징합니다.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and by her “son,” whose name was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ight be obtained.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가인이 분리 및 소멸시켰던 체어리티가 이제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 교회에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 By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is signified that charity, which Cain had separated and extinguished, was now given by the Lord to this church.

 

 

435. ‘아담’과 그의 ‘아내’는 위 ‘아다와 씰라’로 상징된 새 교회를 뜻한다는 사실은, 겉뜻으로는 아무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지금까지는 태고 교회와 그 후손을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실이 속뜻으로는, 그리고 더불어 다음과 같은 사실로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장인 5장 1절로 4절에, 아담과 그의 아내, 그리고 그들이 낳은 셋이 다시 언급되는데, 여기서는 오늘 본문과 전혀 다른 말로 언급됩니다. 이 경우는, 태고 교회의 첫 번째 후손을 상징합니다. That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no one could know or infer from the literal sense, because the “man and his wife” had previously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nd its posterity; but it is very evident from the internal sens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mmediately afterwards, in the following chapter (verses 1–4), the man and his wife, and their begetting Seth, are again mentioned, but in entirely different words, and in this case there is signified the first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1-4)

 

지금 보고 있는 이 구절에, 이것 말고는 다른 아무 상징도 없다면, 여기서 굳이 같은 걸 말할 필요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비슷한 예를 하나 들면, 1장에서 보면, 거기 사람, 땅의 열매들, 그리고 짐승들의 창조를 다루더니, 얼핏 보면 같은 내용을 2장에서 또 다룹니다. 그 이유는, 이미 말씀드렸지만, 1장에서는 영적 인간의 창조를, 반면, 2장에서는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If nothing else were signified in the passage before us, there would be no need to say the same thing here: in like manner as in the first chapter the creation of man, and of the fruits of the earth, and of the beasts, is treated of, and then in the second chapter they are treated of again, for the reason, as has been said, that in the first chapter it is the creation of the spiritual man that is treated of, whereas in the second chapter the subject is the creation of the celestial man.

 

하나를 언급하고, 다른 데서 또 같은 사람이나 사물을 언급하는 이런 반복이 있는 곳마다 항상 어떤 다른 상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속뜻으로 말고는 아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Whenever there is such a repetition in the mention of one and the same person or thing, it is always with a difference of signification, but what it is that is signified cannot possibly be known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컨넥션이 있다는 자체가 그 안에 이미 어떤 상징이 주어졌음을 확실히 알 수 있고요,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부가적인 것은, ‘아담(homo)과 아내’라는 표현은 지금 보고 있는 교회의 부모 교회를 상징하는 관용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Here, the connection itself confirms the signification that has been given, and there is the additional consideration that man [homo] and wife are general terms which signify the parent church that is in question.

 

 

436. 셋이라 이름한 그녀의 ‘아들’은 새 신앙을 상징합니다. 이 신앙으로 체어리티가 재개될 건데요, 이런 사실은, 앞서 서술한 내용으로, 그리고 뿐만 아니라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신 가인 관련 말씀(cf. 392)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That by her “son,” whom she named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ay be attai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tated, as well as from its being related of Cain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

 

이런 일련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For the subject as it stands in a series is as follows: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가인’으로, 체어리티는 ‘아벨’로, 그리고 분리된 상태의 신앙 때문에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을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으로 각각 상징했습니다.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signified by “Cain”; charity, by “Abel”; and that faith in its separated state extinguished charity was signified by Cain slaying Abel.

 

여기서, 주께서 신앙을 보존하시는 것을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로 상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체어리티를 심으시기 위함이지요. The preservation of faith in order that charity might be thereby implanted by the Lord was signified by Jehovah’s setting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lay him.

 

그 후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 말미암은 선, 즉 천적인 것이 주님에 의해 신앙을 통해 주어지는데 이걸 아다가 낳은 야발로, 그리고 신앙의 영적인 것 또한 주어지는데 그걸 야발의 아우 유발로, 그리고 이들로 말미암은 자연적 선과 진리를 씰라가 낳은 두발가인으로 각각 상징했습니다. That afterwards the holy of love and the good thence derived were given by the Lord through faith was signified by Jabal whom Adah bare; and that the spiritual of faith was given, was signified by his brother Jubal; and that from these there came natural good and truth was signified by Tubal-Cain whom Zillah bare.

 

창세기 4장을 결론짓는 이들 두 구절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의 결론 및 요약을 다음과 같이 내릴 수 있는데요, 그것은, ‘아담과 그의 아내’는 전에 아다와 씰라로 불린 새 교회를, ‘’은 체어리티가 심기는 신앙을 각각 나타낸다는 것과, 다음 이어지는 구절의 ‘에노스’는 신앙을 통해 심긴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In these two concluding verses of Genesis 4 we have the conclusion, and thus the summary, of all these matters, to this effect, that by the “man and his wife” is signified that new church which before was called Adah and Zillah, and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harity is implanted; and in the verse which now follows, by “Enosh” is signified the charity that is implanted through faith.

 

 

437. 여기 ‘’은 새 신앙을 상징합니다. 체어리티가 나오는 신앙입니다. 이 사실은 그의 이름으로 설명되는데요, 이르시기를,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하신 이름입니다. That “Seth” here signifies a new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is explained by his name, which it is said was given him because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하나님이 ‘다른 씨를 주셨다’는 것은, 주께서 또다른 신앙을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씨’는 체어리티를 낳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That God “appointed another seed” means that the Lord gave another faith; for “another seed” is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가 신앙인 것은 위(cf. 255)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That “seed” signifies faith may be seen above (n. 255).

2021-06-20(D1)-주일예배(AC.434-437, 창4,25), '아담과 그의 아내, 셋, 다른 씨'.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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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7VBACTfiUZ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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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432. 이 말씀은, 신앙적 폭행에 관한 신성한 금지가 있었음에도, 그들은 ‘가인’으로 불리는 (분리된) 신앙을 끝장냈고, 동시에 (가인의) 신앙을 통해 나오게 되어 있었던 체어리티 또한 끝장냈음을, 이 경우는 더욱 심각한 신성모독인데, 그래서 이런 이유로, 이 말씀은 지옥, 곧, ‘칠십칠 배의 벌’로 표현된 지옥과도 같은 결과를 맞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y had extinguished the faith meant by “Cain,” to do violence to which was sacrilege, and at the same time had extinguished the charity which should be born through faith, a far greater sacrilege, and that for this there was condemnation, that is, a “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

 

 

433. 가인의 경우, ‘벌이 칠 배’라는 것은, 이미 15절에서 보여드린 대로, ‘가인’으로 상징되는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신성모독이었음을 상징합니다. That Cain’s being “avenged sevenfold” signifies that it was sacrilege to do violence to that separated faith which is meant by “Cain,” has been already shown at verse 15.

 

칠십칠 배의 벌’은 아주 끔찍한 신성모독을 상징하며, 그 결과는 지옥입니다. 이것은 ‘칠십칠’(77)이 상징하는 바를 보면 분명합니다. And that by a “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 is signified a far greater sacrilege, the consequence of which is damna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seventy and sevenfold.

 

’(7)이라는 숫자는 거룩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유래하는데요,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 천적 교회, 천적 나라, 그리고 가장 높은 뜻으로 바로 주님 자신을 상징한다는 사실입니다. That the number “seven” is holy originates in the fact that the “seventh day” signifies the celestial man, the celestial church, the celestial kingdom, and, in the highest sense, the Lord himself.

 

그래서 ‘’이라는 숫자는 말씀 가운데 나올 때마다 거룩한 것, 혹은 가장 신성한 것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거룩함과 신성함은 그 본문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들로 서술되거나, 따릅니다. Hence the number “seven,” wherever it occurs in the Word, signifies what is holy, or most sacred; and this holiness and sanctity is predicated of, or according to, the things that are being treated of.

 

숫자 ‘칠십’(70)의 상징은 여기에서 오는데요, 일곱 때(age)로 구성됩니다. 말씀에서, 한 때는 십 년입니다. From this comes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seventy,” which comprises seven ages; for an age, in the Word, is ten years.

 

정말 거룩하거나 신성한 것을 표현해야 할 때, ‘칠십 배’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그의 형제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그가 죄를 얼마나 짓든지 끝없이, 혹은 영원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When anything most holy or sacred was to be expressed, it was said “seventy-sevenfold,” as when the Lord said that a man should forgive his brother not until seven times, but until seventy times seven (Matt. 18:22), by which is meant that they should forgive as many times as he sins, so that the forgiving should be without end, or should be eternal, which is holy.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18:22)

 

그리고 여기, 라멕의 말,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의 의미는 지옥입니다. 가장 신성한 것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And here, that Lamech should “be avenged seventy and sevenfold” means damnation, because of the violation of that which is most sacred.

2021-06-19(D7)-토요예배(AC.432-433, 창4,24), '칠 배, 칠십칠 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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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XK4vcs_r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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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창4:23)

 

 

429. 라멕은 체어리티 또한 파괴했습니다. 라멕이 말하는 ‘어린이’ 혹은 ‘소년’이 바로 체어리티입니다. 이런 사실이 바로 뒤이어 나오는 이유는, 신앙을 부인하거나 죽이는 사람은 체어리티 또한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서 나옵니다. That he had also extinguished charity, here called a “little one,” or a “little child,” follows, for he who denies and murders faith, at the same time also denies and murders the charity that is born from faith.

 

 

430. 말씀에 나오는 ‘어린이’ 혹은 ‘소년’은 이노센스를 상징하며, 체어리티 또한 상징합니다. 참된 이노센스는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체어리티 역시 이노센스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A “little one,” or “little child,” in the Word, signifies innocence, and also charity, for true innocence cannot exist without charity, nor true charity without innocence.

 

이노센스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말씀에서 각각 ‘젖먹이’, (걸음마 배우는) ‘아이’ 및 ‘소년’으로 구분합니다. 참 사랑과 체어리티 없이 참된 이노센스는 없기 때문에, ‘젖먹이’, ‘아이’ 및 ‘소년’은 또한 사랑의 세 단계를 상징합니다. 즉, 엄마 혹은 유모를 향한 젖먹이의 사랑 같은 다정한 사랑, 엄마 아빠를 향한 아이의 사랑 같은 사랑, 선생님을 향한 소년의 상냥한 사랑과 유사한 체어리티입니다. There are three degrees of innocence, distinguished in the Word by the terms “sucklings,” “infants,” and “little children”; and as there is no true innocence without true love and charity, therefore also by “sucklings,” “infants,” and “little children” are signified the three degrees of love: namely, tender love, like that of a suckling toward its mother or nurse; love like that of an infant toward its parents; and charity, similar to that of a little child toward its instructor.

 

이사야에 한 가지 예가 있습니다. Thus it is said in Isaiah: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The wolf shall dwell with the lamb, and the leopard shall lie down with the kid; and the calf, and the young lion, and the fatling together, and a little child shall lead them. (사11:6)

 

여기 ‘양’, ‘염소’, ‘송아지’는 이노센스와 사랑의 세 단계를 상징합니다. ‘이리’, ‘표범’ 및 ‘어린 사자’는 그 반대를, 그리고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Here a “lamb,” a “kid,” and a “calf” signify the three degrees of innocence and love; a “wolf,” a “leopard,” and a “young lion,” their opposites; and a “little child,” charity.

 

예레미야에 In Jeremiah: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어찌하여 큰 악을 행하여 자기 영혼을 해하며 유다 가운데에서 너희의 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젖 먹는 자를 멸절하여 남은 자가 없게 하려느냐 Ye commit this great evil against your souls, to cut off from you man and wife, infant and suckling, out of the midst of Judah, to leave you no remains. (렘44:7)

 

‘남자와 여자’는 진리에 관한 지적 속성들과 선에 관한 의지 지향적인 속성들을 상징합니다. ‘아이와 젖 먹는 자’는 사랑의 첫 번째 단계들을 상징합니다. “Man and wife” denot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will, or of truth and of good; and “infant and suckling,” the first degrees of love.

 

‘아이’와 ‘어린이’로 이노센스와 체어리티를 식별하는 것은 누가복음에 주님 하신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an “infant” and a “little child” denote innocence and charity is very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in Luke: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They brought unto him little children that he should touch them. And Jesus said, Suffer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shall in no wise enter therein. (눅18:15, 17)

 

주님 자신 ‘아기’, ‘아들’로 불리십니다. 주님은 이노센스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은 구절에서, 주님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일컬음 받으십니다. The Lord himself is called a “little one,” or “child” (사9:6), because he is innocence itself and love itself, and in the same passage he is spoken of as “wonderful, counselor, God, hero, father of eternity, prince of peace.”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9:6)

 

 

431. ‘상처’와 ‘상함’은 더 이상 건전한 것이 없음을 상징하는데, 여기서 ‘상처’는 특별히 신앙이 버림을 받아 주님을 신앙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음을, ‘상함’은 체어리티가 마치 물청소를 한 것처럼 깨끗이 씻겨 내려갔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람은 ‘상처’와, 소년은 ‘상함’과 각각 연관된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That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soundness no longer,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and by a “bruise” that charity was devastat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wound” is predicated of a “man,” and “bruise” of a “little one.”

 

신앙의 황량함 및 체어리티의 황폐함을 이사야는 같은 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The desolation of faith and the vastation of charity are described in the same terms in Isaiah: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From the sole of the foot even unto the head there is no soundness in it; but wound and bruise and a fresh sore they have not been pressed out, neither bound up, neither mollified with oil. (사1:6)

 

이 구절에서, ‘상한 것’은 황량해진 신앙으로, ‘터진 것’은 황폐해진 체어리티로, ‘새로 맞은’은 둘 다로 각각 서술되고 있습니다. In this passage “wound” is predicated of faith desolated, “bruise” of charity devastated, and “sore” of both.

2021-06-18(D6)-매일예배(AC.429-431, 창4,23), '소년, 체어리티(charity), 이노센스(innocence)'.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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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JprLbkVl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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