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의 퀄러티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The quality of the church “Enoch”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s.
해설
이 문장은 새로운 내용을 제시하기보다, ‘독자의 시선을 앞으로 이끄는 표지판’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는 이름들을 통해 교회의 연속과 단계만을 간략히 언급해 왔다면, 여기서부터는 ‘에녹’의 교회가 지닌 고유한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즉, 단순한 나열에서 벗어나 ‘질적인 설명’으로 전환된다는 신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굳이 이 문장을 따로 적어 둔 것은, ‘에녹’이 태고교회의 흐름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앞선 교회들은 비교적 자연스러운 쇠퇴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었지만, 에녹의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어떤 것을 ‘보존하시는 섭리’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는 성급히 설명하지 않고, 다음 절들에서 차분히 그 성격을 풀어 갈 준비를 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문장은 말씀을 읽는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어떤 대목에서는 서둘러 결론을 내리기보다, 이어질 설명을 기다리며 흐름을 따라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에녹의 교회는 그렇게 ‘기다리며 읽어야 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517은 태고교회의 이야기 속에서 ‘에녹이라는 전환점이 시작됨을 알리는 예고’입니다. 다음 절들에서 퍼셉션이 어떻게 보존되고, 교회의 생명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게 되는지가 본격적으로 밝혀질 것을 준비시키는 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창5:21)
AC.516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By “Enoc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seventh church; and by “Methuselah” an eighth.
해설
이 글은 짧지만, 창세기 5장 전체를 꿰는 매우 중요한 분기점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에녹’과 ‘므두셀라’를 단순히 앞선 이름들과 같은 선상에 두지 않고, 명확하게 ‘교회의 단계’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에녹을 ‘일곱 번째 교회’로 지칭하는 것은, 그가 이전의 흐름과 질적으로 다른 상태임을 분명히 하는 선언입니다.
앞선 여섯 단계, 즉 아담에서 야렛까지의 흐름은 하나의 큰 방향성을 공유합니다. 그것은 ‘퍼셉션이 점점 외적이 되어 가는, 그러니까 흐릿해져 가는 과정’입니다. 주님과 직접 연결된 내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점차 인간의 자의식, 외적 지식, 형식적 경건, 외적 생활 중심의 신앙으로 이동해 가는 과정이지요. 이 흐름은 쇠퇴이지만, 동시에 섭리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쇠퇴 자체를 막으시기보다,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보존하십니다.
그 보존의 결정적 형태가 바로 ‘에녹’입니다. 그래서 에녹은 단순히 ‘야렛 다음에 나온 또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앞선 여섯 단계 전체를 수렴하고 정리하는 ‘별도의 교회’로 불립니다. 에녹은 ‘퍼셉션의 상태’라기보다, ‘퍼셉션이 사라진 시대 속에서 진리가 의식적으로 보존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사람들 전체가 직관적으로 주님을 아는 시대는 아니지만, 그 대신 진리가 정리되고, 저장되고, 훗날을 위해 보관되는 단계입니다.
이 점에서 에녹은 이전 교회들과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앞선 단계들은 모두 ‘살았고 죽었더라’로 끝납니다. 이는 그 상태들이 더 이상 살아 있는 교회로 지속되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에녹은 이후 본문에서 ‘죽었더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에녹이 ‘종결된 교회’가 아니라, ‘보존된 교회’임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것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므두셀라’를 여덟 번째 교회로 연결합니다. 이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에녹을 특별한 예외처럼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에녹에서 끝내지 않습니다. 에녹은 목적지가 아니라, 연결 고리입니다. 에녹이 진리를 ‘보존하는 교회’라면, 므두셀라는 그 보존된 진리가 실제 역사 속에서 ‘연장되고 지속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므두셀라가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로 기록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물학적 장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된 진리가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었다’는 상응적 표현입니다. 즉, 에녹을 통해 저장된 진리의 ‘씨앗’이, 므두셀라라는 단계에서 장기간 인류 안에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진리의 연장은 결국 노아의 교회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AC.516은 단순한 주석 문장이 아닙니다. 이 문장은 창세기 5장이 ‘쇠퇴의 기록’이 아니라, ‘보존의 역사’임을 선언하는 열쇠 문장입니다. 인간의 퍼셉션은 사라질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직접 아는 교회가 끝날 때, 기억하는 교회를 일으키시고, 기억하는 교회가 위태로워질 때, 기록되고 보존되는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말하면, 에녹과 므두셀라는 오늘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인 위로를 줍니다. 우리가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주님을 ‘자연스럽게’ 느끼지 못해도, 우리의 신앙이 형식적이고 외적으로 느껴져도, 주님께서는 그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진리를 보존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에녹의 상태라면, 우리는 ‘느끼지는 못해도 지키기는 하는 신앙’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고, 므두셀라의 상태라면 ‘그 진리를 오래 견디며 다음 시대까지 넘겨주는 신앙’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he died.(창5:19, 20)
AC.515
이 말씀의 의미 또한 앞서 나온 유사한 말씀들의 의미와 같습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의 연령이 야렛의 경우 구백육십이(962) 년, 므두셀라의 경우 구백육십구(969) 년과 같이 그렇게까지 길었을 리 없다는 점은 누구에게나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다음 장 셋째 절에서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는 대목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더 말씀드릴 내용들로부터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해(years)의 숫자는 어떤 개인의 나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때와 상태들(times and states)을 의미합니다.The signification of these words also is similar to that of the like words above. That the ages of the antediluvians were not so great, as that of Jared nine hundred and sixty-two years, and that of Methuselah nine hundred and sixty-nine years, must appear to everyone, especially from w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said at verse 3 of the next chapter, where we read, “Their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so that the number of the years does not signify the age of any particular man, but the times and states of the church.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6:3)
해설
이 글은 다시 한번 창세기 5장의 연령 기록을 ‘문자 그대로 읽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짚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논쟁적으로 말하지 않고, 상식에 호소합니다. 야렛이 구백육십이(962) 년을 살았고, 므두셀라가 구백육십구(969) 년을 살았다고 이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는 이 점을 굳이 길게 변증하지 않습니다. 이미 앞에서 제시된 해석 원리가 충분히 작동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음 장에서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창6:3)라는 말씀이 나온다는 점을 미리 언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해요. 이것은 성경 자체가 문자적 연령 해석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만약 앞선 연령들이 실제 나이를 뜻한다면, 이 말씀은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연령을 교회의 상태와 때로 읽으면, 오히려 두 본문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여기서 다시 확인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해들의 숫자는 한 사람의 생물학적 수명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이 지속된 상태의 길이와 성격’을 말합니다. 오래 살았다는 표현은 생명이 오래 유지되었다는 뜻이지, 육체가 오래 버텼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야렛이나 므두셀라의 ‘장수’(長壽)는 교회의 어떤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선하든, 점차 쇠퇴하든, 중요한 것은 그 상태가 한동안 유지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숫자는 그 상태의 질과 지속성을 나타내는 언어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우리는 종종 ‘얼마나 오래’라는 질문으로 신앙을 가늠하려 합니다. 신앙 연수가 길면 더 성숙할 것이라 기대하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 시간 동안 어떤 상태가 유지되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같은 백 년이라도, 퍼셉션이 살아 있는 상태로 지낸 백 년과, 이미 생명이 약화된 상태로 지낸 백 년은 전혀 다릅니다. 창세기 5장의 숫자들은 바로 이 차이를 말하고자 합니다.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시간 속에 어떤 생명이 있었는가’가 본질입니다.
또한 이 글은 성경을 읽을 때 생기는 불필요한 논쟁을 조용히 정리해 줍니다. 연령의 역사적 정확성을 따지는 데 에너지를 쏟기보다, 그 연령이 가리키는 교회의 상태를 읽는 데 마음을 두라는 초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성경을 더 깊이 존중하는 방식으로 봅니다.
결국 AC.515는 앞서 반복해 온 원리를 다시 한번 단단히 고정합니다. 창세기 5장의 해와 연령들은 개인의 전기가 아니라, 교회의 생명사를 기록한 언어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이 장은 더 이상 낯선 숫자의 나열이 아니라, 퍼셉션과 사랑의 생명이 어떻게 이어지고 약화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깊은 기록으로 읽히게 됩니다.
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be used to denote time itself. As in Isaiah: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사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사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날’(day)이 시간을 뜻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또한 그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예레미야에 보면,As “day” is used to denote time, it is also used to denote the state of that time, as in Jeremiah: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렘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렘3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33:20, also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날’(day)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얼마나 폭넓고 깊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날’은 시간의 단위이지만, 말씀에서는 그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날’이 단순히 하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사야에서 반복되는 ‘여호와의 날’은 특정한 24시간을 뜻하지 않고, 주님의 심판과 섭리가 작동하는 한 시대 전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날’은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 아래 놓인 기간’을 뜻합니다.
이사야의 인용에서 ‘그의 때(Her time)가 가까우며 그의 날(her days)이 오래지 아니하리라’라는 표현은, ‘날’이 곧 ‘때’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는 말씀에서 시간이 물리적 길이로 측정되지 않고, 상태와 목적에 따라 규정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한 시대의 날들은 주님의 뜻이 성취되면 끝나고, 성취되지 않으면 연장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날’은 시계의 문제가 아니라 ‘섭리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날’이 시간뿐 아니라 그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예레미야의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라는 표현은, 하루가 끝나감을 말하는 동시에, 영적 상태가 어두워졌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날의 기울어짐은 빛의 감소이며, 이는 곧 진리의 빛이 사라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저녁의 그림자들이 길어진다는 표현은, 거짓과 혼합이 점점 지배적인 상태가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예레미야 33장에서 말하는 ‘낮의 언약’과 ‘밤의 언약’ 역시 시간의 반복 질서를 넘어서, ‘영적 질서의 불변성’을 가리킵니다. 낮과 밤이 제때에 있는 것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과 진리, 그리고 인간의 상태 변화를 질서 있게 다스리고 계신다는 표지입니다. 만일 낮과 밤의 언약이 깨진다면, 그것은 곧 주님의 질서가 무너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거듭남의 질서 또한 주님의 언약 안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날들’은 단순한 과거의 시간들이 아니라, ‘과거의 영적 상태’, 곧 주님과 더 가까웠던 상태를 뜻합니다. 이 기도는 시간의 회귀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의 회복을 구하는 간구입니다. 이는 AC.16에서 말한 ‘태고의 날들’과도 연결되며, 거듭남이란 언제나 ‘옛날’의 상태, 곧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로 돌아가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날’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해석 원리를 제공합니다. 만일 ‘날’을 문자적 시간으로만 이해한다면, 창조 이야기는 과거의 연대기적 기록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날’을 시간과 상태를 함께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인간 거듭남의 여섯 상태로 자연스럽게 읽히게 됩니다. 이는 이미 AC.6에서 제시된 원리를,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다시 확증하는 작업입니다.
결국 AC.23은 말씀의 언어가 시간 중심이 아니라 ‘상태 중심’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시계를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상태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오늘’, ‘그날’, ‘여호와의 날’, ‘옛날’이라는 표현들은 모두, 주님 앞에서의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인식을 가지고 말씀을 읽을 때, 성경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상태를 비추는 살아 있는 거울이 됩니다.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5:4-20)
이 본문을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인 오늘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한, 어떤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을 어떻게 아나요? 보통은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 금식을 하거나 안수를 받거나, 아니면 여러 날 산에 올라 소위 산기도를 하거나 합니다. 성경 읽기도 하고,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을 하거나 무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라는 책도 보고, 유튜브 등을 찾아보는 등 사안의 중요성이나 심각성에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걸 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것들이지요, 보통 결혼에 대하여, 직장, 직업에 대하여, 거주지에 대하여 등 말입니다. 비슷한 노력을 비기독교인들은 점집을 찾거나 사주를 보는 등 저마다 자기들의 방식으로 애들을 씁니다. 왜들 이럴까요? 잘 모르겠어서이지요 주님의 뜻을 잘 모르겠어서 그러는 겁니다. 비기독교인들의 경우는 신의 뜻을 잘 모르겠어서라고 하겠네요. 이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독교인인데 왜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분의 뜻을 잘 모르는 걸까요?
한편으로, 그런데 여러분, 좀 우스갯소리일 수도 있지만, 그럼 천국 천사들도 주님 뜻 알기 위해 우리처럼 금식기도 하고 그럴까요? 이건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하지요? 네, 맞습니다. 천사들은 지상에 사는 우리가 하는 이런 거 안 할 거 같아요. 아니, 안 합니다. 왜죠? 천사들은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또렷이 알기 때문입니다. 안 그러면 그건 천사가 아니지 않을까요? 네, 맞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우리처럼 이런 거 안 합니다. 안 하고도 늘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또렷이 압니다. 그리고 우리와는 다르게 그들은 알게 된 그 주님의 뜻을 마음을 다해 즉시 기쁘고 즐겁게 실행에 옮깁니다. 그들이 주님의 뜻을 순종, 즉시 실행에 옮길수록 그만큼 더 그들은 더욱더 주님의 뜻을 더 잘 알게 됩니다. 그들은 100% 주님 뜻대로만 삽니다. 그것도 기쁘고 즐겁게 자원하여 삽니다. 천사들과 주님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쌍방은 내 것이 모두 네 것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천사들의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즉 천사들은 즉시 아는데 우리는 왜 모를까요?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차이입니다. ‘퍼셉션’(perception)이란, 어떤 일과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 곧 그 일, 그 상황에 대한 그분의 선과 진리를 아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알게 된 주님의 선과 진리를 실천, 거기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 안에 머무르는 능력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주님의 뜻을 안다는 건, 그 일을 주님의 진리 안에서 실천하여 주님의 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주님이 기뻐하실까? 내가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일까? 를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주님의 이 마태복음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퍼셉션 능력입니다. 우리와 천사의 차이가 바로 이 차이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능력은 각 사람의 ‘착한 행실’만큼 생깁니다. 그리고 이 ‘착한 행실’은 세상 속에서,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즉, 세상을 향해 주님의 빛을 비추며, 세상에 필요한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우리가 감당하면 할수록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뜻을 천사들처럼 쉽게 알게 하십니다. 퍼셉션이 또렷해지는 것이지요. 우리와 천사들의 퍼셉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주님 뜻을 알면 즉시 순종하는 반면, 우리는 그러지 않거든요. 저들은 주님 뜻 실천하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거나 망설임이 없는데 우리는 안 그러거든요. 그래서 저들은 또렷하지만 우리는 희미하며, 저들은 생생하지만 우리는 흐릿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퍼셉션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저 이름들의 순서는 바로 이 퍼셉션이 또렷한가, 흐릿한가의 순서입니다. 저 이름들, 그러니까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이라는 이름은, 그리고 뒤에 더 나오는 므두셀라, 라멕, 그리고 노아까지, 이 이름들은 사실은 어느 한 개인들의 이름이 아니라 해당 시대를 관통하던 퍼셉션의 이름들입니다. 즉 첫 사람 아담 시대를 이끌던 퍼셉션을 일컬어 ‘아담’(Adam, 사람)이라 이름한 것이며, 이런 퍼셉션으로 살던 사람들을 가리켜 ‘아담’ 교회라고 하는 것이지요. ‘셋’(Seth), ‘에노스’(Enosh)도... 등등,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첫 교회인 아담의 퍼셉션만 제일 온전했고, 이후 갈수록 점점 더 모호하고 흐릿해져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으로 갈수록 퍼셉션은 온전하여 어떤 일에 대한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분명하게 알은 반면, 반대로 에녹, 므두셀라를 거쳐 라멕에 이르러서는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지요. 이 중 이 에녹은 특별한데, 이 에녹 이야기는 다음 주에 다룰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이런 퍼셉션의 온도차는 비유하자면, 한 가운데 씨앗이 있는 과일과도 같고, 방 한가운데 전구가 환하게 켜져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과일의 중심으로 갈수록 근원이지만, 반대로 바깥 껍질 쪽으로 갈수록 근원에서 멀어지는 것과 같고, 방 한가운데로 갈수록 빛이 환하지만, 반대로 멀어질수록 빛이 흐릿해지는 것과도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천적 인간이요, 안식일이고, 일곱째 날이었던 아담으로 갈수록 퍼셉션은 온전한 반면, 반대로, 즉 후손, 후대로 갈수록 흐릿해진 이유는, 아담으로 갈수록 선과 진리는 하나, 곧 앎은 삶을 섬겼던 반면, 그 반대 순서로 갈수록 진리는 선에서 분리되어 앎이 삶을 누르고 머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faith)이 체어리티(charity)의 머리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원래대로라면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 체어리티가 입고 다니는 옷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신앙은 단지 그릇일 뿐이고, 정작 중요한 건 거기 담긴 내용인 체어리티여야 하는데 말입니다.
세상 종말은 다른 게 아닙니다. 세상을 떠받치는 건 창조주이신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인데 이것이 남김없이 다 사라진 상태, 그래서 더 이상 퍼셉션이 없는, 완전히 끊긴 상태가 바로 끝, 곧 종말이요, 최후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주님은 항상 각 교회 시대든, 한 국가, 한 개인이든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무슨 새로운 걸 시작하시지 않습니다. 완전히 황폐해져야, 그래서 완전히 자기를 비워내야 그 빈 그릇에 주님의 새것을 담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누가복음 둘째 아들 이야기는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13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15:13-20)
우리는 우리의 무슨 신앙 연수와 상관없이 갈수록 주님의 선과 진리를 즉시, 그리고 생생하게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굳이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깨닫지 말고 웬만하면 그런 무슨 조짐이 보이면 얼른 돌이켜 그 무한 루프, 그 끝없이 되풀이되는 그 악한 패턴에서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탈출이란, 위 누가복음 본문 맨 마지막 말씀처럼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 곧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선택 등 내가 끌어다 쓸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바닥난 후, 드디어 주님을 찾는 것이지요. 이때 반드시 위 둘째 아들처럼 ‘스스로 돌이키는’ 시간, 곧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는 시간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저는 오늘 설교로 여러분께 드리고 있지만, 사실은 지난날 제 얘기를 주님 앞에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