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0.심화
1. ‘두 영과 두 천사’는 누구이며, 왜 둘씩 있는가?
AC.50을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 가운데 하나가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두 영은 악한 영을 말하는가?’, ‘두 천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수호천사인가?’, ‘거듭난 사람에게는 악한 영들이 없어지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왜 하필 둘씩인가?’
AC.50 자체에서는 이 모든 질문을 상세히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뒤쪽으로 가면 스베덴보리가 같은 문제를 다시 다루며 훨씬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따라서 이번 심화에서는 AC.50이 직접 말하는 것과 뒤의 AC에서 보충되는 내용을 구별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AC.50은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소통하며, 천사들을 통해 천국과 소통한다고 합니다. 이어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이 그와 함께 있다’고 하고, 거듭난 상태에서는 천사들이 다스린다고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AC.50의 ‘영들’은 천사들과 대비되어 영들의 세계와 사람을 연결하는 존재들이며, 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는 영들은 악한 영들로 묘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AC.5848-5849에서 훨씬 명시적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천사들과 영들이 있으며, ‘천사들은 천국에서, 영들은 지옥에서’ 온다고 말하고, 모든 사람에게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다시 설명합니다. 그리고 두 영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옥과 소통하게 하고, 두 천사는 천국과 소통하게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50의 ‘두 영’을 단순히 선악이 정해지지 않은 일반적인 영 둘이라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뒤의 설명까지 함께 볼 때 지옥 쪽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영들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고 ‘사람 옆에 지옥에서 올라온 악한 영 둘과 천국의 천사 둘이 몸으로 서서 늘 따라다닌다’는 식으로 자연계의 공간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함께 있음’은 영적 결합과 소통의 문제입니다. 그가 실제 영계의 공간과 가까움에 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별도의 큰 주제이므로, AC.50의 ‘함께 있다’를 자연계의 몇 미터 거리처럼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에게는 악한 영들이 완전히 없어지고 천사들만 남는가?’ AC.50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2]에서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은 그 지배를 막는다고 하며, [3]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면 천사들이 다스린다고 합니다. 즉 AC.50이 직접 대비하는 것은 ‘천사와 악한 영의 존재 여부’라기보다 어느 쪽의 작용이 지배적인가 하는 상태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만으로 ‘거듭난 뒤에도 정확히 같은 영들이 같은 방식으로 계속 머문다’거나 ‘악한 영들은 일정 거리 밖으로 물러난다’는 세부까지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왜 둘인가?’라는 질문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것은 AC.50에는 답이 없지만, 뒤의 AC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설명합니다. AC.5977-5978에서는 인간에게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이 있으며, 천국에는 이에 대응하는 두 종류의 천사들이 있고 지옥에도 이에 반대되는 두 종류의 영들이 있기 때문에 둘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천사 가운데 한 종류는 사람의 의지에 속한 것들에 작용하고, 다른 종류는 이해에 속한 것들에 작용합니다. 의지에 작용하는 천사들은 사람의 사랑과 목적, 따라서 선에 속한 것들과 관계되고, 이해에 작용하는 천사들은 신앙과 원리, 따라서 진리에 속한 것들과 관계됩니다. 그는 앞의 천사들을 천적 천사, 뒤의 천사들을 영적 천사라고 부릅니다.
지옥 쪽에도 이에 반대되는 두 종류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한 종류는 의지에 속한 것들에 작용하고, 다른 종류는 이해에 속한 것들에 작용합니다. 따라서 ‘두 영과 두 천사’라는 숫자는 단순히 네 명이라는 기이한 숫자 정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본 기능에 대응하는 영적 소통의 질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 안의 모든 생각 하나에는 ‘이해 담당 천사 한 명’, 모든 애정 하나에는 ‘의지 담당 천사 한 명’이 기계적으로 붙어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것은 인간의 두 기본 기능과 천국·지옥의 두 종류 사이의 상응 관계입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조직도나 신경회로처럼 지나치게 세밀한 기계 구조로 바꾸면 오히려 그의 설명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또 ‘두 천사와 두 영이 있으므로 내 마음속에서 좋은 생각 하나와 나쁜 생각 하나가 항상 동시에 들려온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AC.50과 뒤의 관련 글들은 인간이 천국과 지옥 양쪽과 소통한다는 큰 구조를 설명하지만, 개별적인 생각과 느낌 하나하나를 우리가 어느 영의 직접 발언으로 판별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식의 영적 존재 판별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 점은 인간의 책임 문제에서도 중요합니다. ‘악한 생각은 악한 영에게서 왔으니 내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악을 남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유입되는가만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AC.50에서는 그 자유의 전체 메커니즘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더 자세히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영들이 영향을 주므로 인간에게 책임이 없다’는 결론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면 두 천사와 두 영은 각각 독립적으로 자기 힘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존재일까요? 이것 역시 AC.50이 단호하게 막습니다. 천사들은 ‘사역자들’일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입니다. 천사들도 자기들에게 어떤 능력도 없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일한다고 고백한다고 합니다. 지옥 쪽의 영들이 작용하는 경우에도 인간의 존재와 생명 전체가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AC.50의 ‘두 영과 두 천사’를 읽는 중심은 신비한 호위 존재 넷에 대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이라는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 역시 그 영적 질서 안에서 작용하며, 그 모든 것 위에서 주님 한 분이 섭리 가운데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고 거듭남을 이루신다는 것이 더 중요한 핵심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AC.50은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말하며, 뒤의 AC.5848-5849는 두 영을 지옥과의 소통, 두 천사를 천국과의 소통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AC.5977-5978은 그들이 왜 둘씩인지에 대해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에 각각 대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두 영과 두 천사’는 임의적인 숫자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 그리고 천국과 지옥과의 영적 소통이라는 더 큰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50, 창1:26, ‘우리의 형상대로’ : 천사와 영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는 주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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