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도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둘째를 보살필 수 있었을 것 같은데도 그리 하지 않은 이유 역시 아래 SC.49와 같은 걸로 봐도 되나요?

 

네, 큰 틀에서는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다만 이 비유는 단순히 ‘섭리를 기다리셨다’는 설명을 넘어서, ‘회개와 신앙의 본질적 구조’를 드러내는 장면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한 걸음 더 깊이 이해하시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먼저 누가복음 15장의 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은 단순한 무관심이나 방치가 아니라, ‘사랑의 방식이 ‘강제’가 아니라 ‘자유’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아들의 삶을 관리하거나 도왔다면, 아들은 여전히 자기 욕망 속에서 살면서도 고통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이야기에서는 ‘이에 스스로 돌이켜’(눅15:17)라는 결정적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외부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변화가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난 자발적 각성’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적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거듭남은 반드시 ‘자유와 이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선을 주시고 이끄시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도록, 즉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개입하여 억지로 끌어당기는 방식은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이 너무 깊어서, 아들이 진짜로 ‘돌아오도록’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요셉 이야기에서 말씀드린 ‘재회보다 먼저 변화’라는 질서와 정확히 같은 결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고통의 역할입니다. 탕자는 돼지 치는 자리까지 내려가고, 배를 채우지 못하는 궁핍을 겪습니다. 이 과정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뒤에서 계속 돌봐주었다면, 그는 ‘멀리 떠난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어느 정도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회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아버지가 개입하지 않은 것은 방치가 아니라,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환경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 이야기에서 형제들이 기근을 겪도록 허락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 이야기에는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에서는 ‘섭리의 역사’가 중심이라면, 탕자 비유에서는 ‘아버지의 마음’이 더 전면에 드러납니다. 아버지는 보내지 않지만, 대신 ‘아직도 거리가 먼데 측은히 여겨 달려가’ 맞이합니다. 즉, ‘기다림과 환대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보내지 않는 것은 사랑의 부재가 아니라, 돌아올 때 완전히 받아주기 위한 준비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면 개입하고 싶고, 도와주고 싶고,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때로 우리 생각과 다르게 나타납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 살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돌아오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도와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깊은 방식으로 돕고 계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탕자의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이유도 요셉 이야기와 같은 맥락, 곧 ‘변화를 먼저 이루시는 주님의 질서’로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덧붙이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기다림은 차가운 방관이 아니라,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된 사랑의 기다림’이라는 점입니다.

 

 

 

SC.51, 스베덴보리가 사람을 만났던 기준

스베덴보리의 소명 이후 하루하루는, 아니 시간 시간은 그 쓰임새와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겠구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랬나요? 혹시 어떤 기준이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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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49, ‘요셉이 사사로이 가나안 혈육들을 챙기지 않은 이유’

요셉은 총리가 된 이후 얼마든지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가나안 아버지를 돌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요? 이 질문은 단순한 가족사 문제가 아니라, ‘요셉 이야기 전체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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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 심화

1. ‘스베덴보리는 AC 초기부터 어떻게 여러 말씀의 속뜻을 알 수 있었을까?’

 

AC.28을 처음 읽으면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이 생깁니다. 이제 겨우 창1을 설명하는 AC.28인데,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학개, 스가랴, 시편 등 말씀의 여러 곳을 자유롭게 오가며 그 구절들을 겉뜻이 아니라 속뜻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차례로 해설하면서 그때그때 처음 속뜻을 알아 간 것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혹시 글을 쓰는 동안 주님께서 필요한 성경 구절을 하나씩 생각나게 하시고 그 뜻까지 알려 주셨던 것일까요?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글 번호 순서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순서를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28이 창세기 주석의 스물여덟 번째 글이라는 사실은 독자인 우리가 설명을 스물여덟 번째 단계까지 읽었다는 뜻이지, 스베덴보리가 그때 비로소 스물여덟 번째 속뜻을 발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그가 이미 열렸다고 말하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펼쳐 보이는 저술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자신의 학문적 연구나 추론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곳곳에서 그는 이전에는 누구의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말씀의 아르카나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렸다고 말하며, 자신에게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허락된 것들을 기록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기 이해를 존중해서 말한다면, 그는 자신이 독창적인 상징 해석법을 만들어 성경에 적용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열어 보여 주신 말씀의 내적 의미를 기록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글을 쓰고 있으면 주님께서 곁에서 다음에 인용할 성경 구절을 하나씩 불러 주셨다’는 식으로 구체적인 장면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28은 자신의 집필 과정이 그런 방식이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계시와 조명 아래 기록했다는 것과, 매 문장과 인용 구절을 받아쓰기처럼 직접 전달받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그 과정을 세밀하게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AC.28에서 여러 예언서와 시편을 한꺼번에 인용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말씀의 속뜻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이해가 있습니다. 속뜻은 창세기에만 따로 존재하는 암호 같은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같은 대상과 표현이 말씀 안에서 같은 영적 실재와 연결되는 상응의 질서가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물’을 설명하면서 이사야의 물, 스가랴의 물, 시편의 물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AC.28이 바로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물’이 여러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한 뒤 사11:9, 사19:5-6, 학2:6-7, 슥14:7-8, 시69:33-34 등을 차례로 인용합니다. 그리고 ‘땅’이 그릇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슥12:1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구절을 독립적으로 길게 주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성경책에 등장하는 동일하거나 관련된 표현들이 하나의 영적 의미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독법을 알려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어떤 단어를 설명하면서 이사야, 예레미야, 시편, 복음서 등의 여러 구절을 인용할 때, 그것들을 단순한 ‘참고 성구’ 정도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그 인용들을 통하여 말씀의 한 부분에서 발견되는 영적 의미가 다른 부분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AC를 계속 읽다 보면 하나의 표현에 대한 설명이 여러 성경책을 가로질러 점점 풍성해지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의 상응을 알면 말씀의 모든 구절을 기계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물은 지식이다’라는 공식을 외운 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물에 무조건 같은 한 단어를 대입하면 속뜻이 자동으로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과 연결되는 다른 표현들, 다루어지는 주제와 상태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상응은 사람이 임의로 만든 상징표가 아니라 말씀 전체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되는 영적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주석이 아직 AC.28인데 어떻게 다른 성경의 속뜻까지 알고 있었을까?’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AC의 글 번호는 스베덴보리가 속뜻을 발견해 간 시간 순서가 아닙니다. 그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자신에게 열렸다고 증언하며,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는 그것을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를 따라 펼쳐 보입니다. 그리고 말씀 전체가 하나의 상응적 질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한 표현을 설명하면서 다른 성경책의 관련 구절들을 함께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 순간 주님께서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그 구절을 생각나게 하셨는가?’라는 질문에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답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모든 내적 의미의 근원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돌렸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실제 집필 순간마다 주님의 조명이 어떤 심리적·의식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우리가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의 증언을 더 정확하게 존중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보면 AC.28의 수많은 성경 인용은 오히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우리는 창세기 한 권의 숨은 뜻만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의 한 표현을 통하여 말씀의 여러 부분이 어떻게 하나의 내적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지를 조금씩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AC.28 심화 1)

 

 

 

AC.28, 창1:10, ‘물과 바다와 땅 : 지식이 모이고, 생명을 받아들일 거듭남의 그릇’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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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총리가 된 이후 얼마든지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가나안 아버지를 돌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요?

 

이 질문은 단순한 가족사 문제가 아니라, ‘요셉 이야기 전체의 영적 구조와 주님의 섭리’를 어떻게 보느냐와 깊이 연결된 질문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왜 안 그랬을까?’라는 아쉬움이 들지만, 속뜻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았구나’ 쪽이 더 중심이 됩니다.

 

먼저 문자적 차원에서 보면, 요셉은 총리가 된 직후 바로 개인적인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애굽 전역을 7년 풍년 동안 조직하고 저장 체계를 만드는 일은 국가적 규모의 사명이었고, 이어지는 7년 흉년은 실제로 수많은 생명이 달린 문제였습니다. 즉 요셉은 단순한 고위 관료가 아니라, ‘열방의 생명을 보존하는 도구’로 세워진 상태였기 때문에, 개인 감정이나 가족 문제를 우선순위에 두기 어려운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만 먹으면 사람을 보내 안부를 확인하는 정도는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섭리적, 영적 이유’입니다. 요셉 이야기의 핵심은 단순한 재회가 아니라, ‘형제들의 변화와 질서의 회복’입니다. 만약 요셉이 먼저 사람을 보내 아버지와 형들을 불러왔다면, 형제들은 여전히 과거의 상태, 그러니까 질투, 거짓, 자기중심성 등에 머물러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실제 이야기에서는 흉년이라는 외적 압박을 통해 형제들이 애굽으로 내려오고, 그 과정 속에서 양심이 깨어나고, 결국 유다가 자신을 내어놓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즉, ‘외적 재회보다 먼저 내적 변화가 이루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이 점에서 요셉은 단순히 감정을 참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섭리의 질서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사로운 효심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는 더 큰 질서, 곧 주님의 역사에 자신을 맡긴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아버지를 외면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내가 나설 때가 아니다’라는 더 깊은 인도 속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요셉 이야기에서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오는 것’ 자체가 상징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교회의 상태, 애굽은 지식과 외적 질서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 이동은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내적 상태가 외적 삶과 결합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이 과정은 반드시 주님의 타이밍과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인간이 임의로 앞당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요셉이 먼저 개입했다면, 이 전체 구조, 즉 ‘진리(요셉)가 선(야곱)과 다시 결합되는 질서’가 흐트러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왜 하나님은 빨리 해결해 주지 않으시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신 후에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아버지를 바로 부르지 않은 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사랑, 곧 모두가 살고, 모두가 변화되는 길을 기다리는 사랑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요셉이 사람을 보내지 않은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큰 섭리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재회보다 먼저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지금 당장 해결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이루시는 온전한 질서를 기다릴 것인가?’

 

 

 

SC.50, 눅15 ‘돌아온 탕자’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경우

눅15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도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둘째를 보살필 수 있었을 것 같은데도 그리 하지 않은 이유 역시 아래 SC.49와 같은 걸로 봐도 되나요? 네, 큰 틀에서는 그렇게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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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48, ‘자신의 안티들에게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스베덴보리는 자기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그리고 멀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나요? 혹시 구체적인 에피소드들이 있을까요? 스베덴보리, 곧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지금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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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 심화

1.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에는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것들은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천적인 것이든 모두 그곳에 ‘기억 지식’(scientifica)으로 머물며,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표현은 짧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배우고 기억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단지 기억 속에 쌓여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거듭남의 과정에서 주님에 의해 사용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거기에서’라는 말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장의 흐름상 ‘거기’는 속 사람 안에 있는 어떤 별도의 영적 저장소가 아니라 바로 앞에서 말한 ‘겉 사람의 기억’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뿐 아니라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라도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가면 그곳에서는 기억 지식으로 머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어린 시절에 들었던 말씀이나 부모와 교사에게 배운 선한 가르침, 훗날 읽고 배운 성경의 진리들이 오랫동안 기억 속에 머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했거나 실제 삶과 연결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훗날 삶의 어떤 상황에서 그 말씀이 다시 떠오르고, 이전에는 단순한 지식이었던 것이 자신의 삶을 비추는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AC.27의 표현을 실제 삶에 적용해 본다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특정한 기억이 떠오르는 모든 현상을 곧바로 ‘주님께서 불러내셨다’고 판정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억 지식’ 자체가 곧 영적 생명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많이 기억하며, 선과 진리에 관한 말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사람이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AC.27은 오히려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조차 겉 사람의 기억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그곳에서 기억 지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기억 속에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와 그것이 실제로 사람의 의지와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가는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억 지식이 하찮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외적으로 배우고 기억해 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이후 거듭남 가운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읽고 배우고 기억하는 일, 선과 진리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들이 기억 속에 들어갈 당시에는 단순한 지식처럼 보일 수 있지만, AC.27은 그것들이 그곳에 머물다가 나중에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기억은 거듭남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 안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은 주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데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이 표현을 리메인스(remains)와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및 그와 관련된 상태들을 가리키며, 인간의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AC.27에서 직접 말하는 것은 ‘속 사람의 리메인스 저장소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의 기억에 저장되어 기억 지식이 된 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는’ 것입니다. 두 주제 사이에 더 넓은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AC.27 한 문장만으로 둘을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이것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불러내시는 것일까요? 천사나 선한 영들을 통해서인지, 퍼셉션이나 양심을 통해서인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인간이 영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천사와 영들의 매개가 있다는 사실, 또한 퍼셉션과 양심의 서로 다른 상태들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러나 AC.27은 여기서 그 작동 방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 문장을 근거로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기억 지식을 꺼내신다’거나 ‘양심을 통하여 리메인스를 활성화하신다’는 식의 일정한 메커니즘을 확정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설명이 됩니다.

 

오히려 AC.27에서 확실하게 붙들어야 할 것은 더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사실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은 그곳에 기억 지식으로 머물며, 그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기억과 생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거듭남의 생명과 질서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과 진리를 배우고 기억하는 일은 그 자체가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일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받아들여 기억 속에 간직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라는 표현의 중심은 기억의 세부적인 작동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27의 중심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기억 지식으로 모여 ‘바다’를 이루고, 그곳에 머물러 있던 것들이 이후 주님에 의해 사용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사람이 배운 지식 자체를 영적 생명으로 착각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주님께서 그 지식들을 거듭남 가운데 쓰실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기억 지식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며,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AC.27 심화 1)

 

 

 

AC.27, 창1:9, ‘물이 모이고 땅이 드러남 : 기억 속에 모인 진리와 겉 사람의 준비’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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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 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사42:3)

 

AC.25에서 스베덴보리는 사42:3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를 인용하면서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원리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 각각에 별도의 세밀한 상응을 붙이는 것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의 오류를 ‘꺾지’ 않으시고 욕정을 ‘끄지’ 않으시며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굽히신다’는 AC.25 자체의 설명입니다. 이 표현은 주님께서 아직 불완전한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거듭나게 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거듭남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순수한 선과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면서도 자기 생각을 고집할 수 있고, 선을 행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을 수 있으며, 주님을 찾으면서도 자기에게 돌아올 유익을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생각과 의도에는 감각에서 오는 착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정, 이미 굳어진 습관과 잘못된 판단들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그런 것들이 있다는 이유로 사람의 현재 상태 전체를 한꺼번에 부수고 전혀 다른 상태를 강제로 만들어 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AC.25가 말하는 ‘굽히심’은 바로 여기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그를 이끄십니다. 아직 낮은 동기가 섞여 있는 상태에서도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시며, 그 과정에서 점차 무엇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고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인지를 분별하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자기 유익 때문에 선을 행하던 사람이 차츰 이웃의 유익을 생각하게 되고, 처음에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진리를 말하던 사람이 차츰 진리 자체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말하게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사람의 현재 상태에서 시작하시되 그 상태에 그대로 머물게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굽힌다’는 말을 ‘오류 자체가 점차 진리가 되고 욕정 자체가 점차 선한 사랑으로 변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을 잘 다듬으면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사랑을 정화하면 그대로 천국적 사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오류와 욕정의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도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자유와 수용 능력에 따라 점차 거짓에서 진리로, 악한 사랑의 지배에서 선한 사랑의 질서로 방향을 바꾸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굽힘’은 악을 선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을 선과 진리 쪽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섭리적 역사입니다.

 

이 점에서 AC.24와 AC.25는 매우 긴밀하게 이어집니다. AC.24에서는 사람이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과 같은 자기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아르카나가 제시되었습니다. AC.25에서는 사42:3을 통하여 바로 그 원리가 말씀 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이미 완전해진 뒤에야 그를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자기 자신의 것들 속에 있는 바로 그 상태에서부터 그를 붙드시고 거듭남을 진행하십니다.

 

따라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는 말씀을 단순히 ‘주님은 온유하시다’는 위로의 말씀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AC.25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실제 거듭남의 방식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시며, 아직 혼합되고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질서 안에서 이끄십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현재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는 데 있지 않고, 마침내 사람 자신의 것에서 나온 것으로 여겼던 삶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질서 아래 놓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AC.25에서 말하는 ‘꺾고 끄는 대신 굽히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입니다. (AC.25 심화 1)

 

 

 

AC.25, 창1:6-7, ‘하늘과 땅을 펴심 : 파괴가 아니라 굽힘으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땅을 펼치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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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 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이라는 표현은 처음 접하면 조금 낯설지만, AC를 읽으면서 자주 만나게 되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AC.24의 영어 번역에서 Potts는 라틴어 scientifica를 ‘memory-knowledges’라고 옮깁니다. 여기 붙은 개정자의 주(Reviser)는 이것을 ‘외적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들로, 신학적인 것이든 그 밖의 것이든 온갖 종류가 대량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기억 지식’은 특별히 신비하거나 영적인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읽어 외적 기억에 축적한 수많은 지식과 정보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역사적 사실이나 지리 정보, 과학 지식, 언어와 직업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성경에 관하여 배운 사실들도 기억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이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도 그 내용이 성경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곧 속 사람의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외적 기억에 저장되어 내가 필요할 때 떠올리고 말할 수 있는 지식으로 있는 한, 그것은 기억 지식의 차원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scientifica의 핵심은 단순히 ‘세속적인 지식’이라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이 사람의 외적 기억에 속해 있다는 데 있습니다.

 

AC.24가 이 용어를 특별히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을 cognitiones라 하고,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scientifica라 합니다. 개정자의 주는 cognitiones를 우리가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것을 안다’고 할 때의 앎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 구별을 ‘scientifica는 죽은 지식이고 cognitiones는 살아 있는 지혜다’라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AC.24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이 둘이 속하는 층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기억 지식 자체가 나쁘거나 거듭남에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사람이 외적 세계에서 습득하고 기억해 둔 수많은 것들을 사용하여 그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AC.24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아직 자신이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여기지만, 주님께서는 그가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것들을 통해서도 그를 선과 진리로 이끄십니다. 따라서 겉 사람과 그 안의 기억 지식은 없애 버려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속 사람과 올바른 질서 안에서 연결되어 주님께 쓰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경 지식도 좋은 예가 됩니다. 사람이 말씀의 내용을 많이 기억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주님께서 사람을 가르치시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전에 외워 두었던 한 구절이 어느 순간 자신의 악을 보게 하거나,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게 하거나,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깨닫게 하는 데 쓰일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기억 지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높은 질서 아래 놓이고 올바른 쓰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 지식’은 쉽게 말하면 ‘외적 기억에 축적되어 있는 지식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것을 단순히 머릿속에 있다는 이유로 경시할 필요도 없고,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곧 영적 지혜라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AC.24가 보여 주는 거듭남의 질서는 이러한 겉 사람의 기억 지식과 속 사람 안의 것들이 처음에는 혼란스럽게 섞여 있다가, 주님께서 그 둘을 구별하시고 각각 제자리에 놓으시는 과정입니다. 바로 그 구별을 나타내는 것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입니다. (AC.24 심화 1)

 

 

 

AC.24, 창1:6-7(AC.24-25), ‘궁창의 구별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때’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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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 심화

1. ‘왜 스베덴보리는 단8:14, 26의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를 처음 읽을 때 가장 어리둥절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단8:14, 26의 인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라고 설명한 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때는 신앙이 없었으므로 ‘저녁’이며 주님의 오심 자체는 ‘아침’이라고 말하면서 다니엘서를 인용합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다니엘서에도 ‘저녁’과 ‘아침’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가져온 것일까요? 그렇게 보기에는 스베덴보리의 논지가 너무 깊습니다.

 

먼저 개역개정만 읽으면 이 연결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단8:14은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에는 ‘저녁’과 ‘아침’에 해당하는 말이 실제로 들어 있으며, Potts 번역도 AC.22에서 이를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이라는 형태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저녁-아침’이라는 표현 자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단어가 같다는 사실만으로 인용 이유가 모두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단8의 문맥입니다. 단8에서는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며, 진리가 땅에 던져지는 황폐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일정한 ‘저녁-아침’ 후에 성소가 정결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이 구절에는 단순한 하루의 반복만이 아니라 거룩한 것들이 훼손된 상태와 그 뒤의 정결 및 회복이라는 구조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AC.22에서 말하는 ‘저녁’과 ‘아침’의 영적 의미와 만납니다.

 

AC.22에서 ‘저녁’은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이며, 일반적으로는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상태입니다. ‘아침’은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이며 주님께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니엘에서 성소와 진리가 황폐해진 상태는 AC.22의 언어로 보면 ‘저녁’의 성격을 가지며, 성소가 다시 정결하게 되는 것은 ‘아침’의 성격과 연결됩니다. 이것은 단8의 문자적 역사 의미를 지워 버리고 다른 뜻을 임의로 덧씌운다는 뜻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문자적 사건 안에서 동시에 영적 상태를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께서 오시는 때는 저녁이고, 주님의 오심은 아침이다’라는 다소 역설적인 표현도 이해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야 할 만큼 신앙이 쇠퇴하고 교회가 황폐해진 상태는 ‘저녁’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저녁 가운데 주님께서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되기 때문에 주님의 오심은 ‘아침’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시점에 저녁과 아침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기 전의 영적 상태와 그분의 오심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상태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8:14, 26은 AC.22에서 매우 적절한 인용이 됩니다. ‘저녁-아침’이라는 표현뿐 아니라 황폐에서 정결로 나아가는 문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이천삼백’이라는 숫자의 구체적인 속뜻까지 AC.22에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락에서 그 숫자를 해설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저녁’과 ‘아침’이 시간의 이름을 넘어 영적 상태의 변화를 나타낸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이것을 ‘창세기에서 저녁은 언제나 무조건 A, 아침은 언제나 무조건 B라고 정의되었으므로 말씀 어디에서나 기계적으로 같은 뜻을 대입하면 된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를 사전처럼 치환하는 방식이 아니라 문맥과 연결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AC.22에서 단8의 인용이 설득력을 갖는 것도 단지 같은 단어가 있어서가 아니라, 신앙과 거룩한 것들의 황폐 그리고 그 뒤의 회복이라는 문맥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단8:14, 26을 인용하는 이유는 ‘저녁과 아침’이라는 두 단어의 일치보다 더 깊습니다. ‘신앙이 없는 저녁의 상태 가운데 주님이 오심으로 아침이 시작된다’는 AC.22의 영적 질서가 다니엘의 ‘황폐와 정결’이라는 구조 속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8의 인용은 창1의 저녁과 아침을 단순한 자연의 하루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으로 일어나는 새로운 창조의 상태로 이해하게 해 주는 중요한 보조 본문이 됩니다. (AC.22 심화 1)

 

 

 

AC.22, 창1:5(AC.22-23), ‘저녁에서 아침으로 : 사람의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나아가는 첫 날의 질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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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 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의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현실적인 인간 경험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거듭남 이전에 악을 언제나 악처럼 느끼고 거짓을 언제나 거짓처럼 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에게서 나오는 어떤 생각과 행동을 선하고 옳은 것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악이 선처럼 보이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실제 삶에서 ‘빛처럼 보였던 어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다음 사례들은 AC.21의 상태를 판정하는 공식이 아니라, 그 표현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먼저 ‘자기 의로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성실하게 살고 교회생활도 충실히 하며 큰 잘못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삶을 근거로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 ‘나는 적어도 저런 사람과는 다르다’는 마음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본인에게는 이것이 바른 삶에 대한 확신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빛 가운데 자신을 보기 시작하면서, 선하게 살았다는 자기평가 안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빛처럼 보였던 것이 더 큰 빛 가운데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섞인 선행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봉사하고 헌신하며 다른 사람을 실제로 돕습니다. 그 행동의 외적 쓰임 자체를 무조건 악하다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 또한 인간의 동기는 거듭남 과정에서 여러 요소가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인정과 칭찬을 얻는 것이 점점 그 행동의 지배적인 목적이 되는 경우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선행 자체를 후회하거나, 다른 사람이 칭찬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면 ‘나는 이웃을 위해서 했다’고 생각했던 일 안에 자기 사랑이 얼마나 깊이 섞여 있었는지를 보게 될 수 있습니다. AC.21의 빛은 바로 이런 분별을 가능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신앙적인 열심입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교리를 소중히 여기며 진리를 전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는 진리를 알고 있고 저 사람들은 모른다’, ‘내 신앙이 더 높다’는 마음이 중심을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진리 자체보다 ‘진리를 가진 나’가 중요해집니다. 이런 상태는 당사자에게 오히려 매우 밝은 신앙의 열심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빛이 비칠 때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 진리를 이용하여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 같은 것이 아님을 조금씩 보게 됩니다.

 

네 번째는 이른바 ‘의로운 분노’입니다. 불의한 일을 보고 분노하는 것 자체를 모두 자기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악과 불의를 보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거나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일어난 분노를 ‘나는 진리를 위해 화내는 것이다’라고 포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자기 상처와 진리에 대한 열심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이후 더 밝은 빛 가운데 들어가면서 ‘내가 정말 진리를 위해 분노한 것인가, 아니면 내 proprium이 상처받았기 때문인가?’라고 묻게 됩니다. 바로 이런 질문 자체가 이전에는 하나로 보였던 빛과 어둠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섯 번째로 목회나 신앙적 봉사에서도 같은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세우고 말씀을 전하려는 열망은 선한 목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이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지나친 분노와 좌절이 일어난다면, ‘주님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안에 ‘내가 이루어야 할 일’이라는 자기 소유의 마음이 섞여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역 자체가 어둠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proprium에서 나오는지를 구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사례들을 이해할 때 ‘proprium’을 인간의 개성이나 인격 전체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의 문제는 사람이 가진 고유한 성격이나 재능 자체가 아니라,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매우 종교적이고 도덕적으로 보이는 일 안에서도 proprium은 작용할 수 있고, 반대로 자연적인 재능과 개성은 주님의 질서 아래에서 좋은 쓰임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 안에서 혼합된 동기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한 모든 선은 가짜였다’고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AC.21은 사람에게서 나온 모든 행동을 분석하여 자기혐오에 빠지게 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신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전에는 서로 뒤섞여 하나처럼 보였던 것을 이제 구별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구별이 가능해져야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붙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처럼 보였던 어둠’을 발견하는 것은 단순히 ‘내가 생각보다 나쁜 사람이구나’를 깨닫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님에게서 왔고 무엇이 아직 내 proprium에서 나오는가’를 분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20에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했다면, AC.21에서는 그 첫 빛 안에서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것과 참된 빛이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빛과 어둠의 분별입니다. (AC.21 심화 1)

 

 

 

AC.21, 창1:4-5, ‘빛과 어둠의 분별 : 주님에게서 난 것은 낮,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밤’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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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심화

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의 설명을 실제 인간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것을 선과 진리라고 여기다가, 새로 잉태되면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고, 더 빛 안으로 들어가면서 주님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아간다는 이런 내적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것이 단순한 성경 해석에서 나온 것인지, 영계에서 관찰한 것인지, 아니면 스베덴보리 자신이 실제로 겪은 과정인지 궁금해집니다.

 

먼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AC.20의 각 단계를 곧바로 스베덴보리 자신의 자서전으로 읽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깊은 내적 변화와 영적 위기를 경험했다는 사실과, 그가 자신의 생각과 정서와 꿈을 세밀하게 관찰했다는 사실은 그의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학 저술기로 넘어가기 전후의 개인 기록은 그가 자기 사랑, 명예욕, 지적 자부심, 주님에 대한 의존 같은 문제를 매우 깊이 씨름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그에게 거듭남이 순전히 책상 위의 추상적인 주제만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므로 AC.20은 스베덴보리가 자기에게서 직접 겪은 단계를 기록한 것이다’라고 단정하면 한 걸음 너무 나갑니다. AC.20 자체는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창1:3의 속뜻을 해설하면서 거듭나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반적인 첫 상태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그의 개인적 영적 경험이 이런 설명을 이해하는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과, AC.20의 교리를 그의 자전적 경험과 동일시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감각이 열린 뒤 오랜 기간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했다고 반복해서 증언한다는 사실입니다. AC 자체에서도 그는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과 사후 인간의 상태, 천국과 지옥, 영들의 성질에 관한 경험을 매우 자주 기록합니다. 이것은 그의 신학을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인간의 생각과 정서가 영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해 흘러들고 악과 거짓은 지옥적 영향과 연결된다는 거대한 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AC.20의 여섯 날의 각 단계는 영계에서 여러 사람을 관찰하여 통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계 경험을 교리의 중요한 확증으로 제시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창세기 1장의 거듭남 해석 자체는 무엇보다 말씀의 속뜻에 대한 해설로 제시됩니다. 따라서 ‘영계에서 보았기 때문에 창1을 그렇게 해석했다’고 한 방향으로만 설명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이며 가장 직접적인 층위가 바로 말씀입니다. AC는 처음부터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밝히는 저작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인간이 임의로 상징을 붙여 해석하는 문서가 아니라, 문자적 의미 안에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이 담겨 있으며 천국과 결합되어 있는 신적 말씀입니다. 따라서 창1의 빛, 낮과 밤, 물, 땅, 식물, 광명체, 동물, 사람은 서로 흩어진 비유가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의 나라에 관한 하나의 내적 질서를 이룹니다. AC.20의 첫 빛 역시 이 말씀의 속뜻 안에서 설명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개인 경험, 영계 경험, 말씀의 속뜻이라는 세 가지를 어떻게 관계 지어야 할까요? 셋을 완전히 분리할 필요는 없지만, 모두 똑같은 무게의 ‘세 가지 자료원’이라고 기계적으로 병렬시키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AC에서 중심에 놓이는 것은 말씀과 그 속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경험은 그가 설명하는 영적 세계와 인간의 내적 구조를 이해하고 확증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며, 그의 개인적 경험은 그가 이런 문제를 단순한 관념으로만 다루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AC.20의 교리적 근거를 최종적으로 그의 개인 체험에 두는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에 부여한 위치와도 맞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는 AC.20의 문장은 스베덴보리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특수한 심리 경험이 아니라 그의 거듭남 교리 전체와 연결됩니다. 선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며, 사람이 거듭날수록 자기가 선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은 이후 AC 전체에서 계속 깊어지는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문장을 스베덴보리 자신의 어느 특정한 위기나 회심 사건과 일대일로 대응시키기보다, 말씀의 속뜻 안에서 제시된 거듭남의 보편적인 질서로 읽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그렇다고 그의 생애가 이 설명과 전혀 관계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개인 기록을 읽어 보면, 훗날 그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해지는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것’, 자기 지성과 공로, 주님께 대한 의존 같은 문제들이 그에게도 실제적인 문제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러한 거듭남의 문제와 무관한 관찰자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디까지가 그의 개인적 체험이고 어디서부터가 말씀의 계시적 해설인지를 우리가 임의로 확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라는 질문에 가장 안전하게 답한다면 이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의 허락으로 영계가 열린 상태에서 오랫동안 영적 세계를 경험했다고 증언했고, 자신의 내적 삶에서도 깊은 변화를 겪었으며, 무엇보다 말씀의 속뜻이 열려 그 안에서 인간 거듭남의 질서를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배경을 함께 고려할 수 있지만, AC.20 자체는 스베덴보리 개인의 체험담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 대한 해설로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의 개인적 경험을 지나치게 확대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왜 인간의 내적 변화에 이토록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설명했는지를 함께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20 심화 2)

 

 

 

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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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 심화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문장으로 읽으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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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문장으로 읽으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실제 목회 현장에서 이런 변화를 분명하게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이 옳고 자신이 선하다는 확신은 오히려 더 강해질 수 있고, 봉사와 헌신까지 자기 의를 강화하는 재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AC.20이 말하는 첫 빛은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들은 AC.20의 상태를 판정하는 공식이 아니라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가장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열심히 봉사하는 신앙인의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을 돕습니다. 자신도 그것을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봉사가 인정받지 못했을 때 예상보다 훨씬 큰 섭섭함과 분노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다른 사람이 칭찬받으면 질투하고, ‘나는 이렇게까지 했는데’라는 생각이 반복됩니다. 이때 그 사람이 단순히 ‘나도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이라고 생각했던 이 일 안에도 나를 높이고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있었구나’라고 보기 시작한다면, AC.20의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는 말씀을 이해하는 데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을 매우 정직하고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자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번 실수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 ‘나는 원래 선한 사람인데 이번에만 잘못했다’는 자기상을 지키는 대신,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자기 사랑이 훨씬 깊게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 역시 자기 자신을 선의 기준으로 삼던 확신에 처음 빛이 비치는 모습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용서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신앙인이니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용서하려 애씁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인정하기를 기다리고, 자신이 용서하는 사람이라는 도덕적 우월감까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 힘으로는 이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없구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기 시작합니다. 훗날 마음에 실제 변화가 생겼을 때 그것을 자기 의지력이나 인격의 성취로 돌리기보다 ‘이것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라고 느끼게 된다면, 자기 선에서 주님의 선으로 시선이 옮겨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목회자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설교하고 가르치고 상담하며 사람을 돕는 일은 그 자체로 선한 쓰임입니다. 그러나 사역의 열매가 보이지 않거나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지나치게 낙심하고 분노한다면, 그 안에 ‘내가 사람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자기 소유의 마음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나는 주님의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문제다’라고 끝내지 않고, 선한 사역조차 자기 공로와 자기 성취로 붙들 수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면 이것도 AC.20을 이해하는 실제적인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례를 보고 ‘자기 동기가 불순함을 발견했으니 이 사람은 AC.20의 첫 상태에 들어갔다’고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심리학적인 자기성찰만으로도 사람은 자기 모순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20의 빛에는 방향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할 뿐 아니라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아갑니다. 따라서 단순한 자기비판이나 낮은 자존감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선의 근원을 찾던 데서 주님에게로 방향이 옮겨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AC.20은 사람이 자기 안에서 악을 많이 발견하여 점점 자신을 혐오하게 되는 과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선의 허상을 보는 목적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절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선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에게서 나온 선의 한계를 볼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립니다. 이것이 ‘빛 안으로 더 들어간다’는 방향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이런 변화가 드물게 보인다는 느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에 겉으로 나타난 변화만으로 거듭남의 정도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작은 깨달음처럼 보이는 것이 내적으로 중요한 시작일 수도 있고, 반대로 매우 극적인 회심의 말이 실제 삶의 지배적인 사랑을 아직 바꾸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영적 단계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빛을 가능한 한 분명하게 제시하고,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바라보도록 돕는 것입니다.

 

결국 AC.20의 실제 사례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나는 생각보다 덜 선한 사람이구나’라는 자기평가 자체가 아닙니다. 더 본질적인 변화는 ‘참된 선의 근원은 내가 아니구나’라는 방향 전환입니다. 자기에게서 선을 찾던 사람이 자기의 선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그 의심이 단순한 자기비난으로 끝나지 않고 주님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아가는 데까지 이어질 때, 우리는 창1:3의 ‘빛이 있으라’가 인간의 삶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20 심화 1)

 

 

 

AC.20 심화 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 심화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의 설명을 실제 인간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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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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