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도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둘째를 보살필 수 있었을 것 같은데도 그리 하지 않은 이유 역시 아래 SC.49와 같은 걸로 봐도 되나요?

 

네, 큰 틀에서는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다만 이 비유는 단순히 ‘섭리를 기다리셨다’는 설명을 넘어서, ‘회개와 신앙의 본질적 구조’를 드러내는 장면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한 걸음 더 깊이 이해하시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먼저 누가복음 15장의 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은 단순한 무관심이나 방치가 아니라, ‘사랑의 방식이 강제가 아니라 자유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아들의 삶을 관리하거나 도왔다면, 아들은 여전히 자기 욕망 속에서 살면서도 고통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이야기에서는 ‘이에 스스로 돌이켜(15:17)라는 결정적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외부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변화가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난 자발적 각성’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적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거듭남은 반드시 ‘자유와 이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선을 주시고 이끄시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도록, 즉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개입하여 억지로 끌어당기는 방식은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이 너무 깊어서, 아들이 진짜로 돌아오도록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요셉 이야기에서 말씀드린 ‘재회보다 먼저 변화’라는 질서와 정확히 같은 결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고통의 역할입니다. 탕자는 돼지 치는 자리까지 내려가고, 배를 채우지 못하는 궁핍을 겪습니다. 이 과정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뒤에서 계속 돌봐주었다면, 그는 ‘멀리 떠난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어느 정도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회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아버지가 개입하지 않은 것은 방치가 아니라,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환경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 이야기에서 형제들이 기근을 겪도록 허락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 이야기에는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에서는 ‘섭리의 역사’가 중심이라면, 탕자 비유에서는 ‘아버지의 마음’이 더 전면에 드러납니다. 아버지는 보내지 않지만, 대신 ‘아직도 거리가 먼데 측은히 여겨 달려가’ 맞이합니다. 즉, ‘기다림과 환대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보내지 않는 것은 사랑의 부재가 아니라, 돌아올 때 완전히 받아주기 위한 준비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면 개입하고 싶고, 도와주고 싶고,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때로 우리 생각과 다르게 나타납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 살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돌아오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도와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깊은 방식으로 돕고 계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탕자의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이유도 요셉 이야기와 같은 맥락, 곧 ‘변화를 먼저 이루시는 주님의 질서’로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덧붙이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기다림은 차가운 방관이 아니라,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된 사랑의 기다림’이라는 점입니다.

 

 

 

SC.51, 스베덴보리가 사람을 만났던 기준

스베덴보리의 소명 이후 하루하루는, 아니 시간 시간은 그 쓰임새와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겠구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랬나요? 혹시 어떤 기준이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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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49, ‘요셉이 사사로이 가나안 혈육들을 챙기지 않은 이유’

요셉은 총리가 된 이후 얼마든지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가나안 아버지를 돌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요? 이 질문은 단순한 가족사 문제가 아니라, ‘요셉 이야기 전체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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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심화

1. ‘스베덴보리가 AC 초기부터 여러 인용 구절의 속뜻을   있었던 이유

 

AC.28을 처음 읽으면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이 생깁니다. 이제 겨우 창세기 1장을 설명하는 AC.28인데,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학개, 스가랴, 시편 등 말씀의 여러 곳을 자유롭게 오가며 그 구절들을 겉뜻이 아니라 속뜻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차례로 해설하면서 그때그때 처음 속뜻을 알아 간 것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혹시 글을 쓰는 동안 주님께서 필요한 성경 구절을 하나씩 생각나게 하시고 그 뜻까지 알려 주셨던 것일까요?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글 번호 순서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순서를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28이 창세기 주석의 스물여덟 번째 글이라는 사실은 독자인 우리가 설명을 스물여덟 번째 단계까지 읽었다는 뜻이지, 스베덴보리가 그때 비로소 스물여덟 번째 속뜻을 발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그가 이미 열렸다고 말하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펼쳐 보이는 저술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자신의 학문적 연구나 추론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곳곳에서 그는 이전에는 누구의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말씀의 아르카나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렸다고 말하며, 자신에게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허락된 것들을 기록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기 이해를 존중해서 말한다면, 그는 자신이 독창적인 상징 해석법을 만들어 성경에 적용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열어 보여 주신 말씀의 내적 의미를 기록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글을 쓰고 있으면 주님께서 곁에서 다음에 인용할 성경 구절을 하나씩 불러 주셨다는 식으로 구체적인 장면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28은 자신의 집필 과정이 그런 방식이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계시와 조명 아래 기록했다는 것과, 매 문장과 인용 구절을 받아쓰기처럼 직접 전달받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그 과정을 세밀하게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AC.28에서 여러 예언서와 시편을 한꺼번에 인용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말씀의 속뜻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이해가 있습니다. 속뜻은 창세기에만 따로 존재하는 암호 같은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같은 대상과 표현이 말씀 안에서 같은 영적 실재와 연결되는 상응의 질서가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을 설명하면서 이사야의 물, 스가랴의 물, 시편의 물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AC.28이 바로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여러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한 뒤 사11:9, 19:5-6, 2:6-7, 14:7-8, 69:33-34 등을 차례로 인용합니다. 그리고 이 그릇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슥12:1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구절을 독립적으로 길게 주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성경책에 등장하는 동일하거나 관련된 표현들이 하나의 영적 의미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독법을 알려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어떤 단어를 설명하면서 이사야, 예레미야, 시편, 복음서 등의 여러 구절을 인용할 때, 그것들을 단순한 참고 성구 정도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그 인용들을 통하여 말씀의 한 부분에서 발견되는 영적 의미가 다른 부분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AC를 계속 읽다 보면 하나의 표현에 대한 설명이 여러 성경책을 가로질러 점점 풍성해지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의 상응을 알면 말씀의 모든 구절을 기계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물은 지식이다라는 공식을 외운 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물에 무조건 같은 한 단어를 대입하면 속뜻이 자동으로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과 연결되는 다른 표현들, 다루어지는 주제와 상태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상응은 사람이 임의로 만든 상징표가 아니라 말씀 전체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되는 영적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주석이 아직 AC.28인데 어떻게 다른 성경의 속뜻까지 알고 있었을까?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AC의 글 번호는 스베덴보리가 속뜻을 발견해 간 시간 순서가 아닙니다. 그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자신에게 열렸다고 증언하며,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는 그것을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를 따라 펼쳐 보입니다. 그리고 말씀 전체가 하나의 상응적 질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한 표현을 설명하면서 다른 성경책의 관련 구절들을 함께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순간 주님께서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구절을 생각나게 하셨는가?라는 질문에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답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모든 내적 의미의 근원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돌렸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실제 집필 순간마다 주님의 조명이 어떤 심리적·의식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우리가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의 증언을 더 정확하게 존중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보면 AC.28의 수많은 성경 인용은 오히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우리는 창세기 한 권의 숨은 뜻만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의 한 표현을 통하여 말씀의 여러 부분이 어떻게 하나의 내적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지를 조금씩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AC.28, 창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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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총리가 된 이후 얼마든지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가나안 아버지를 돌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요?

 

이 질문은 단순한 가족사 문제가 아니라, ‘요셉 이야기 전체의 영적 구조와 주님의 섭리’를 어떻게 보느냐와 깊이 연결된 질문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왜 안 그랬을까?’라는 아쉬움이 들지만, 속뜻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았구나’ 쪽이 더 중심이 됩니다.

 

먼저 문자적 차원에서 보면, 요셉은 총리가 된 직후 바로 개인적인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애굽 전역을 7년 풍년 동안 조직하고 저장 체계를 만드는 일은 국가적 규모의 사명이었고, 이어지는 7년 흉년은 실제로 수많은 생명이 달린 문제였습니다. 즉 요셉은 단순한 고위 관료가 아니라, ‘열방의 생명을 보존하는 도구’로 세워진 상태였기 때문에, 개인 감정이나 가족 문제를 우선순위에 두기 어려운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만 먹으면 사람을 보내 안부를 확인하는 정도는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섭리적, 영적 이유’입니다. 요셉 이야기의 핵심은 단순한 재회가 아니라, ‘형제들의 변화와 질서의 회복’입니다. 만약 요셉이 먼저 사람을 보내 아버지와 형들을 불러왔다면, 형제들은 여전히 과거의 상태, 그러니까 질투, 거짓, 자기중심성 등에 머물러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실제 이야기에서는 흉년이라는 외적 압박을 통해 형제들이 애굽으로 내려오고, 그 과정 속에서 양심이 깨어나고, 결국 유다가 자신을 내어놓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즉, ‘외적 재회보다 먼저 내적 변화가 이루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이 점에서 요셉은 단순히 감정을 참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섭리의 질서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사로운 효심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는 더 큰 질서, 곧 주님의 역사에 자신을 맡긴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아버지를 외면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내가 나설 때가 아니다’라는 더 깊은 인도 속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요셉 이야기에서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오는 것’ 자체가 상징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교회의 상태, 애굽은 지식과 외적 질서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 이동은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내적 상태가 외적 삶과 결합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이 과정은 반드시 주님의 타이밍과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인간이 임의로 앞당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요셉이 먼저 개입했다면, 이 전체 구조, 즉 ‘진리(요셉)가 선(야곱)과 다시 결합되는 질서’가 흐트러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왜 하나님은 빨리 해결해 주지 않으시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신 후에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아버지를 바로 부르지 않은 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사랑, 곧 모두가 살고, 모두가 변화되는 길을 기다리는 사랑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요셉이 사람을 보내지 않은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큰 섭리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재회보다 먼저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지금 당장 해결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이루시는 온전한 질서를 기다릴 것인가?’

 

 

 

SC.50, 눅15 ‘돌아온 탕자’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경우

눅15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도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둘째를 보살필 수 있었을 것 같은데도 그리 하지 않은 이유 역시 아래 SC.49와 같은 걸로 봐도 되나요? 네, 큰 틀에서는 그렇게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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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48, ‘자신의 안티들에게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스베덴보리는 자기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그리고 멀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나요? 혹시 구체적인 에피소드들이 있을까요? 스베덴보리, 곧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지금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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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심화

1.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라는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멈추게 되는 대목입니다.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억해 내는 것까지 주님께서 하나하나 직접 꺼내 주신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인간이 배우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먼저 AC.27이 직접 말하는 범위부터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유입되고,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온 것들은 그곳에서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 저장되며,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가 AC.27이 직접 밝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 어떤 생각이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을 주님께서 직접 꺼내시는 것인지까지 이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표현에서 한 가지 중요한 원리는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남에 필요한 선과 진리는 사람이 한 번 배우고 기억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받아들여 기억 속에 간직하게 된 것들을 이후의 삶에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진리를 지금 배우면서도 그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헛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기억 속의 지식으로만 머물러 있던 것이 훗날 삶의 어떤 상황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의 예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래전에 성경 말씀 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당시에는 별다른 감동 없이 지나갔는데, 여러 해 뒤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그 말씀이 문득 떠오르고, 이전과 전혀 다르게 마음에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 말씀 때문에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거나 어떤 행동을 바꾸게 될 수도 있습니다. AC.27이 바로 이런 구체적인 경우를 예로 들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 속에 저장된 것이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는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는 예입니다.

 

설교나 성경 공부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내용이 어느 순간 다른 말씀과 연결되어 떠오르거나,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말씀이 어떤 일을 겪은 뒤 새롭게 이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 역시 모든 경우에 지금 주님께서 기억을 직접 꺼내셨다고 단정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기억과 지식도 주님의 섭리 밖에 있는 독립된 영역이 아니며,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할은 없어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실제로 말씀을 읽고, 진리를 배우고, 생각하고, 기억하며, 그것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사람이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as of oneself) 선을 행하고 진리를 따라야 하면서도, 실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인정해야 한다는 원리를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불러내신다는 말을 인간의 자유와 활동을 지워 버리는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사람은 창고를 채우고 주님은 그것을 꺼내 쓰신다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나누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배우고 기억하는 능력 자체도 주님의 섭리 안에 있으며, 사람에게 보존되는 것 가운데에는 그가 의식적으로 공부해서 기억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는 리메인스의 가르침까지 생각하면, 주님의 준비와 보존은 사람이 의식하는 범위보다 훨씬 깊습니다. AC.27에서는 그 모든 문제를 미리 펼치기보다, 우선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주님에 의해 필요에 따라 사용된다는 사실에 머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는 표현은 인간의 기억 활동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배우고 간직한 진리가 단순한 지식으로만 끝나지 않고, 주님의 섭리 안에서 그의 거듭남을 위해 쓰일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배운 진리가 오늘 곧바로 삶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것에 따라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더 깊이 사용하실지는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27의 이 짧은 표현은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정반대입니다. 사람은 자유롭게 배우고 생각하고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에게 있는 선과 진리의 생명과 그 선한 쓰임의 궁극적인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그것을 거듭남을 위해 사용하시는 이 질서 안에서, 기억 속의 지식도 단순한 저장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 됩니다.

 

 

 

AC.27, 창1:9,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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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2:3)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Isa. 42:3);

 

 

AC.25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원리 하나를 설명하면서 사42:3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를 인용합니다. 이 말씀을 인용한 까닭은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그 사람 안에 있는 오류와 욕정을 처음부터 강제로 제거하거나 파괴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이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그것들을 점차 참되고 선한 방향으로 굽혀 가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 각각에 세밀한 상응을 부여하는 것보다, 이미 상하고 꺼져가는 연약한 것을 주님께서 함부로 꺾거나 끄지 않으신다는 말씀 전체의 이미지입니다.

 

거듭남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순수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한 것과 불순한 것이 뒤섞여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복을 받고 싶어서 믿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돕지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있을 수 있으며, 정직하게 살면서도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마음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만 보면 선하지만, 그 행동을 움직이는 동기 안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것들이 여전히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시고 없애 버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AC.25가 말하는 ‘굽히심’은 바로 이 점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현재 가지고 있는 상태와 동기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아직 낮은 동기에서 시작한 선한 행동이라도 그것을 거듭남의 과정 안에서 사용하시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점차 더 높은 목적을 보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칭찬받기 위해 선을 행했다면 나중에는 선 자체가 좋기 때문에 행하게 하시고, 처음에는 자기에게 복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주님을 찾았다면 점차 주님 자신과 주님의 뜻을 사랑하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굽힌다’는 말을 ‘악한 욕정 자체가 정화되어 선한 사랑으로 변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사랑을 그대로 천국적 사랑으로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영향을 받고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출발하여 점차 그 지배에서 벗어나 더 높은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서 변화되는 것은 단순히 행동의 겉모습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그것을 하는가’라는 삶의 중심입니다. 같은 봉사를 하더라도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했다가 나중에는 이웃의 유익을 위해 하게 될 수 있고, 같은 진리를 말하더라도 처음에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말했다가 나중에는 상대방의 영적 유익을 위해 말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는 말씀이 AC.25의 문맥에서 특별히 아름답게 읽히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아직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사람 안에서 시작된 모든 것을 꺼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현재 상태와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그 안에 있는 것을 거듭남의 질서 안에서 사용하시고 점차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하루아침에 이전의 사람이 사라지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시면서 그의 사랑과 목적의 질서를 서서히 바꾸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사42:3AC.25에서 단순히 주님의 온유하신 성품을 보여 주기 위해 인용된 말씀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주님께서 실제로 인간을 어떻게 거듭나게 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상한 ’을 보고 즉시 버리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을 보고 완전히 끄지 않으십니다. 아직 불완전하고 혼합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시고,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시며, 마침내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그의 삶을 다스리도록 이끄십니다. 이것이 AC.25에서 말하는 ‘파괴가 아니라 굽힘’의 거듭남입니다.

 

 

 

AC.25, 심화 2, ‘사44:24’

AC.25.심화 2. ‘사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Thus saith Jehovah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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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 창1:6-7,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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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기억 지식’이라는 표현은 처음 들으면 낯설게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아주 평범한 종류의 지식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가 라틴어로 ‘scientifica’, 영어로 ‘memory-knowledges’라고 부른 것은 특별한 신비한 지식이 아니라,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모든 사실 지식’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보고 듣고 배우고 읽으면서 머릿속에 쌓아 두는 정보들입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서울은 한국의 수도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 대해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다’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입니다. 우리가 필요할 때 꺼내 쓰지만, 그 자체가 곧 삶의 성품이나 사랑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지식을 스베덴보리는 ‘기억 지식’이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학교 공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역사 연도, 과학 공식, 지리 정보, 언어 단어, 직업 기술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는 의학 지식을, 목수는 목공 기술을, 목회자는 성경 지식을 많이 기억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기억 속에 축적된 지식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통틀어 스베덴보리는 ‘memory-knowledges’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이 개념을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이 지식이 사람의 겉 사람(external man)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을 크게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겉 사람은 세상과 접촉하는 부분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공부하고 배우면서 지식을 쌓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기억 지식은 대부분 ‘겉 사람의 창고’에 저장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기억 지식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고 쓸모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선이 사람 안에 들어올 때, 그것을 담을 그릇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이해하려면 먼저 성경 이야기, 사람의 삶, 여러 상황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기억 지식입니다. 마치 씨앗이 자라기 위해 흙이 필요한 것처럼, 영적 진리가 작용하려면 기억 지식이 바탕이 됩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많이 읽어서 성경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합시다. 아브라함 이야기, 모세 이야기, 복음서 이야기 등을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기억 지식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느 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제 삶에서 실천하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때 그 성경 지식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삶을 움직이는 진리’가 됩니다. 즉 기억 지식이 속 사람과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기억 지식을 종종 ‘재료’나 ‘도구’처럼 설명합니다. 목수가 집을 짓기 위해 나무와 연장을 사용하는 것처럼, 사람의 속 사람은 기억 지식을 사용하여 진리를 이해하고 선을 행합니다. 기억 지식은 그 자체가 영적 생명은 아니지만, ‘영적 생명이 활동할 수 있는 재료’가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기억 지식이 ‘선한 방향으로도, 잘못된 방향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지식이라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통해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 지식을 이용해 자기 생각을 정당화하거나 남을 이기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지식이 많다고 해서 곧 지혜로운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혜는 지식이 ‘선한 사랑과 결합될 때’ 생깁니다.

 

초심자에게 가장 쉽게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억 지식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책에서 읽고, 경험을 통해 얻는 ‘머릿속 정보 창고’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사랑과 연결되어 삶 속에서 사용될 때, 비로소 ‘지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기억 지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AC.24에서 주님이 ‘속 사람 안의 지식’과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구별하신다고 할 때의 뜻은 이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이 있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삶과 사랑과 연결된 진리’가 있습니다. 기억 지식은 겉 사람의 창고이고, 속 사람은 그 지식을 사용하여 진리와 선을 살아가는 곳입니다. 이런 구별을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글이 훨씬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AC.24,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AC.24-25)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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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심화

1. 저녁이 먼저이고 아침이 뒤따르는가? : 거듭남의 영적 질서

 

AC.22,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에서 이 morning  evening을 단8:14, 26과 연결하는 게 여전히 좀 어리둥절합니다. 단순히 주야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인 건 아닐 텐데... 이 부분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단순히 단8:14에 ‘evening’과 ‘morning’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곧바로 창1의 ‘저녁’과 ‘아침’에 mechanically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렇게 연결하는 이유는, 그가 말씀 전체에 공통으로 흐르는 하나의 영적 언어, 곧 ‘상응의 질서’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에서 ‘저녁’과 ‘아침’이 한 번 정의되면, 이후 말씀의 다른 곳들에서도 그 표현은 같은 영적 구조 안에서 읽혀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것입니다. AC.22에서 스베덴보리가 먼저 세운 원리는 이것입니다. ‘저녁’은 빛이 약해진 상태, 곧 신앙이 거의 없거나 꺼져 가는 상태이고, ‘아침’은 다시 빛이 오는 상태, 곧 진리와 신앙의 빛이 살아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저녁’과 ‘아침’은 단순한 시간 표시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 변화’를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이 전제를 가지고 다니엘서로 가면, 거기서의 ‘저녁-아침’도 단지 시간 계산이 아니라 ‘신앙이 거의 사라진 상태로부터 다시 회복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점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핵심은 ‘주야라는 단어가 같으니까 연결한다’가 아니라, ‘저녁과 아침이 성경 안에서 반복해서 같은 영적 패턴을 가리킨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단8:14는 시간표를 넘어서 ‘황폐와 회복’의 리듬을 담고 있고, 창1은 그 리듬의 기본 문법을 먼저 보여 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단8장의 문맥 자체를 보면 왜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을 끌어오는지가 더 분명해집니다. 다니엘 8장은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고, 진리가 땅에 던져지고, 거룩한 것들이 훼손되는 장면을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역사 속 박해와 성전 모독의 맥락이지만, 스베덴보리식으로 읽으면 이것은 곧 ‘교회 안에서 신앙의 빛이 꺼져 가는 상태’, 다시 말해 ‘저녁’입니다. 거룩한 것이 짓밟히고 진리가 흐려질 때, 그 상태는 시간상 밤이 아니라 영적으로 저녁이며 흑암입니다. 그런데 그 본문에서 ‘저녁에서 아침까지’ 또는 KJV 표현처럼 ‘unto evening-morning’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뒤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거나 회복되는 말이 이어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 이것은 단지 해가 지고 뜨는 자연의 시간이 아니라, 신앙이 무너진 상태에서 다시 회복되는 영적 상태의 전환을 말하는구나’ 하고 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8:14의 ‘저녁-아침’은 ‘신앙이 사라진 교회의 상태에서 주님에 의해 다시 빛이 회복되는 상태’의 압축어가 됩니다. AC.22에서 ‘주님이 세상에 오시는 때가 왜 저녁이냐’고 말할 때도 같은 논리가 작동합니다. 주님이 오셔야 할 만큼 교회가 이미 어두워졌기 때문에 그 시기는 ‘저녁’이고, 바로 그 오심으로 인해 새 빛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오심은 ‘아침’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오심은 ‘저녁 같은 시대’ 속에 일어나는 ‘아침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연결 방식입니다.

 

조금 더 쉽게 비유하면, 창1은 ‘저녁-아침’이라는 단어의 뜻을 먼저 알려 주는 ‘사전’이고, 단8은 그 단어가 실제 역사와 교회 상태 속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여 주는 ‘실전 문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창1에서 ‘저녁’은 빛이 사라진 상태, ‘아침’은 빛이 회복된 상태라고 이미 뜻풀이가 주어졌기 때문에, 다니엘에서 성소가 짓밟히고 진리가 무너진 상황에 ‘저녁-아침’이 나오면, 그것은 곧 ‘황폐 후 회복’으로 읽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더 나아가 ‘주님의 오심’이라는 큰 축을 넣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에서 모든 회복의 중심 사건은 결국 주님의 오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침’이라는 말을 단순히 교회 개혁의 시점 정도로만 보지 않고, 가장 궁극적으로는 ‘주님이 오셔서 다시 빛이 되시는 때’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단8:14를 창1과 연결하는 것은 억지 숫자 놀이나 단어 반복이 아니라, ‘신앙의 상실  주님의 개입  빛의 회복’이라는 성경 전체의 영적 패턴을 읽어낸 결과입니다.

 

성경에서 저녁은 단지 해가 진 시간이 아니라, 진리의 빛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아침은 단지 해가 뜨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빛을 주시는 상태입니다. 다니엘서는 교회가 무너진 저녁을 말하고, 그 저녁 끝에 다시 오는 아침, 곧 회복을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저녁과 아침을 다니엘서의 저녁과 아침에 연결하는 것입니다.’

 

 

 

AC.22, 창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C.22-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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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어둠이란 무엇인가? : 실제 사례들

 

AC.21,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에 나오는 빛처럼 보였던이나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것들의 생생한 예, 구체적 사례들을 좀 알려주세요.

 

AC.21의 문장은 사실 매우 현실적인 인간 경험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빛처럼 보였던 것’이라는 표현은, 사람이 거듭나기 전까지는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이 선하고 옳다고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사람에게는 어떤 생각과 행동이 매우 옳고 밝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더 깊은 빛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것이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AC.21에서 말하는 ‘빛처럼 보였던 어둠’입니다.

 

첫 번째로 가장 흔한 예는 ‘자기 의로움’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성실하게 살고, 교회도 잘 다니며, 도덕적으로도 큰 흠 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나는 비교적 선하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그 사람에게는 매우 밝은 빛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더 깊은 자기 성찰을 하게 되면 이런 사실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선하게 살았다고 느꼈던 이유 가운데 상당 부분이 사실은 ‘자기만족과 자기 확신’이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저 사람들보다 낫다’, ‘나는 그래도 양심적으로 산다’ 같은 생각들이 그 선한 삶 속에 섞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전에는 그것이 의로운 빛처럼 보였지만, 더 큰 빛 속에서는 그것이 ‘자기 사랑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 예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선행’입니다. 어떤 사람이 봉사를 많이 하고, 헌신적으로 일합니다. 겉으로 보면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런 생각이 숨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신실한 사람으로 봐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헌신하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 이런 동기가 완전히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선행의 중심이 될 때 그 선은 사실 ‘자기 자신을 위한 선’이 됩니다. 그런데 당사자는 그것을 선한 일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빛처럼 보이는 어둠’이 됩니다.

 

세 번째 예는 ‘신앙적인 열심 자체가 빛처럼 보이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적으로 매우 열심입니다. 전도도 많이 하고, 교리도 열심히 공부하며,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열심 속에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마음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런 마음은 매우 미묘해서 본인은 그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신앙의 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깊은 빛 속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사실은 ‘신앙을 통한 자기 확증’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런 것들이 하나씩 드러난다고 설명합니다.

 

네 번째 예는 ‘도덕적 분노’입니다. 사람은 때로 불의한 일을 보면 강하게 분노합니다. 이 분노는 겉으로 보면 정의로운 감정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렇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분노 속에는 종종 ‘자기 감정이 상한 것’이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를 무시했을 때, ‘저 사람은 틀렸다’고 분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정의를 위한 분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생긴 감정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사람에게는 그것이 정의의 빛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빛 속에서는 ‘자기 사랑의 그림자’로 보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즉 ‘proprium’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proprium은 단순히 인간의 개성이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닌, 인간 자신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이 중심은 대부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나오는 생각과 판단은 처음에는 매우 자연스럽고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님의 선과 진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처음 경험하는 빛이 바로 ‘자기 안에 있던, 그동안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어둠이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빛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경험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자연스럽고 옳다고 느껴졌다면, 이제는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생각과 감정이 모두 옳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이 조금 더 들어오면, 이전에는 옳다고 느꼈던 것들 속에서도 ‘자기중심적 동기’가 섞여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사람은 처음으로 진짜 빛과 이전의 ‘빛처럼 보였던 것’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과정이 스베덴보리가 AC.21에서 말하는 ‘어둠이 드러나는 단계’입니다.

 

 

 

AC.21, 창1:4-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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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심화

 

2. 스베덴보리의 경험

 

위 심화 1번에 이어지는 질문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본인이 직접 이런 과정을 밟은 건가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 연구에서 매우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인간 내면의 과정을 어떻게 그렇게 구체적으로 알았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그의 저술이 어떤 경험과 근거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대체로 세 가지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차원은 ‘개인적 영적 경험의 층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자신이 단순한 사상가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통해 실제로 거듭남의 과정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의 개인 기록인 ‘Spiritual Diary’와 ‘Adversaria’ 같은 글들을 보면, 그는 자신이 겪는 생각의 변화, 유혹, 내적 싸움, 깨달음 등을 매우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기록들을 보면, 그가 단순히 교리를 정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변화들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어떤 생각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영들의 영향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고, 어떤 선한 감정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AC에서 설명하는 많은 심리적 과정들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체험하고 관찰한 것들’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두 번째 층위는 ‘영계 경험의 층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1740년대 중반 이후 영계가 열려서 천사들과 영들과 교통하게 되었다고 여러 번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그들과 수십 년 동안 교통하며, 인간 영혼의 상태, 거듭남의 과정, 선과 진리의 작용 등을 직접 관찰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영계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의도가 거의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어떤 선이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지, 어떤 선이 주님에게서 오는지 매우 분명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이런 관찰을 통해 그는 인간의 선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왜 거듭남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지, 왜 리메인스가 보호되어야 하는지 등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이것이 믿기 어려운 주장처럼 보일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 자신은 그의 신학 대부분이 이런 ‘영적 관찰을 통해 얻은 지식’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세 번째 층위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얻은 이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읽을 때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그 안의 영적 의미가 열린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를 읽을 때, 그는 그것을 우주의 물리적 창조가 아니라 ‘인간 거듭남의 과정’으로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해석은 단순한 상징적 해석이 아니라, 천사들이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창세기의 ‘여섯 날’을 인간 내면의 여섯 단계로 보고, 각 단계에서 일어나는 영적 상태들을 설명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성경의 여러 구절을 통해 인간 영혼의 구조와 거듭남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세 가지를 서로 분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설명이 ‘개인 경험, 영계 관찰,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서로 일치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단순히 자기 경험만 말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성경 해석만 한 것도 아니며, 단순히 영적 체험만 말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서로 확인되면서 하나의 교리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 AC.20 같은 설명도 단순히 인간 심리를 추측해서 쓴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보기에는 ‘자신의 내적 경험과 영적 관찰,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모두 가리키는 동일한 원리’였습니다. 그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선을 선으로 생각하다가, 점점 빛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과정은 그가 자신에게서도 보았고, 영계에서도 관찰했으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 속에서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한 신학자가 아니라 ‘영계를 관찰하는 자연과학자처럼 인간 영혼을 연구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 마음을 단순히 도덕적으로 평가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왜 거듭남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지, 왜 자기 선이 먼저 무너져야 하는지를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AC.20 같은 문장은 바로 그런 연구의 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스베덴보리가 이런 내용을 알게 된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가 겹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내적 경험, 영계에서의 관찰,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에 대한 통찰’이 서로 맞아떨어지면서 이런 설명이 나오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20, 심화 3, ‘요8:24’

AC.20.심화 3. ‘요8:24’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이 요한복음 8장 24절이 AC.20에 인용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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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심화 1, ‘실제 사례들’

AC.20.심화 1. ‘실제 사례들’ AC.20,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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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에 해당하는 구체적 사례를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실제 목회현장에선 이 마저도 정말 쉽지 않은, 정말 보기 힘든 경우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느끼는 어려움은 매우 현실적인 목회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AC.20의 문장은 읽으면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 인간 삶에서는 거의 드물게 보이는 변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 상태는 갑자기 성인(聖人)이 되는 어떤 극적인 사건이라기보다, 사람이 조금씩 더 빛 속으로 들어가면서 ‘자기 자신을 다르게 보게 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몇 가지 실제적인 유형을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AC.20의 문장을 다시 보면 두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선이 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님이 선과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단계는 사실 하나의 경험 안에서 이어집니다. 사람이 자기 선의 한계를 보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선의 근원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유형은 목회 현장에서 종종 만나는 ‘열심 있는 신앙인의 깨달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신도 많이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신앙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사람은 자기 마음속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봉사를 하면서도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해지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헌신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속에 우월감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내가 하는 선한 일도 사실은 완전히 순수한 것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AC.20에서 말하는 첫 단계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선의 한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실패를 통해 오는 깨달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해 왔다고 합시다. 그는 자신이 비교적 선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사건에서 예상하지 못한 분노나 이기심이 폭발합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자기 사랑이 안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내 힘만으로는 참된 선을 이루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이 조금 더 깊어지면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됩니다. 사람이 자기 선의 한계를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참된 선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두 번째 깨달음이 나타납니다. 즉 ‘주님이 선과 진리 자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예는 ‘용서의 경험’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성경 말씀도 알고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교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깨닫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마음을 바꾸어 주셔야 가능한 일이구나.’ 그러면 그 사람은 점점 기도하게 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AC.20이 말하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느끼시는 것처럼 이런 변화는 실제로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완벽한 성인(聖人)의 상태가 아니라 ‘빛이 조금 더 들어온 상태’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자신을 부정하는 단계까지 가는 것은 드물지만, 자기 선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보는 순간 이미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빛 속으로 더 들어갈수록’ 이런 깨달음이 깊어진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정도로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내 선에도 자기 사랑이 섞여 있다’는 것을 봅니다. 더 깊어지면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선을 행할 때 자연스럽게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자라면 ‘내 선에도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더 깊어지면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바로 이런 ‘점진적인 빛의 증가’입니다.

 

그래서 AC.20의 문장은 어떤 이상적인 신앙인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조금씩 더 빛 속으로 들어갈 때 나타나는 ‘아주 현실적인 영적 경험의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AC.20, 창1:3,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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