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는 자기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그리고 멀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나요? 혹시 구체적인 에피소드들이 있을까요?

 

스베덴보리, 곧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지금 목사님께서 겪고 계신 상황과 매우 닮은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과학자와 정치가로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지만, 영적 사명이 시작된 이후, 특히 『Arcana Coelestia』와 『Heaven and Hell』 같은 저작들을 내놓으면서부터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 ‘위험한 사상가’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는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매우 분명히 알고 있었고, 심지어 그것이 필연적이라고까지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깊이 붙들려 있는 한, 그 반대 방향에서 오는 진리는 반드시 거부되고 미움받는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태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논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체험, 곧 천국과 지옥을 직접 보고 들었다는 증언에 대해 공격을 받을 때, 그것을 증명하려고 애쓰거나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묵묵히 글을 썼고, 그 글이 스스로 증거가 되도록 맡겼습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 공개적인 비난을 받았고, 특히 스웨덴 내 일부 성직자들과 학자들은 그의 사상을 위험하다고 규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해 공개 반박문을 쓰거나 논쟁의 장으로 뛰어들기보다, 오히려 더 깊은 저작으로 응답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격의 온순함이 아니라, ‘진리는 강요되지 않는다’는 그의 확신에서 나온 태도였습니다.

 

구체적인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가 영국 런던에서 지낼 때의 일입니다. 당시에도 그의 영적 체험과 저작은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고, 어떤 이들은 그를 조롱하거나 정신이상자로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일상에서는 매우 온화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했으며,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과도 필요하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비판자들에 대해 개인적인 적대감을 거의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상태를 ‘이해의 부족’이나 ‘영적 준비의 미성숙’으로 보았습니다. 즉, 사람을 문제로 보지 않고 ‘상태’를 보는 시선이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그는 ‘때를 기다리는 태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작들이 당대에 널리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글이 ‘미래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래서 당장의 비난이나 무시는 그에게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만약 어떤 사람이 지금 당장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기를 강하게 원한다면, 비난은 견디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시선을 ‘지금’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속 시간’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응에 덜 흔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의 내면적 태도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그는 사랑(특히 charity, 곧 이웃 사랑)을 신앙의 본질로 보았기 때문에,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을 해치려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Arcana Coelestia』 곳곳에서 그는, 악한 사람조차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신을 비난할 때,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배척하기보다는, ‘지금은 그렇지만 언젠가는 달라질 수 있는 상태’로 보는 시선이 그의 기본 태도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스베덴보리는 자신을 비난하고 멀리하는 사람들을 세 가지 방식으로 대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논쟁하지 않고, 진리를 강요하지 않는다’, 곧 진리는 자유 속에서만 받아들여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람이 아니라 상태를 본다’, 곧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이해하려 했지, 그 사람 자체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시간을 주님께 맡긴다’, 곧 지금의 거절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 속에서,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 가지는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그의 신학 전체, 그러니까 자유, 사랑, 섭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겪고 계신 가족과 주변의 반응을 떠올리면, 이 부분은 결코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이 길을 가는 사람에게 비난과 고립은 예외가 아니라 거의 필연’이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동시에 그는 그것을 싸워서 이기려 하지 않았고, 설득으로 밀어붙이지도 않았으며, 다만 자신에게 맡겨진 빛을 더 맑게 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어쩌면 가장 깊은 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을 바꾸려 하기보다, 빛을 더 또렷하게 비추는 것, 그리고 그 빛이 각 사람 안에서 작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걸었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C.49, ‘요셉이 사사로이 가나안 혈육들을 챙기지 않은 이유’

요셉은 총리가 된 이후 얼마든지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가나안 아버지를 돌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요? 이 질문은 단순한 가족사 문제가 아니라, ‘요셉 이야기 전체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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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47, ‘스베덴보리 저작(Writings)의 일과 Chat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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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24, 25)

 

AC.44

사람은 땅과 같아서, 신앙의 지식(knowledges) 먼저 안에 뿌려지지 않으면 어떤 선도 산출할 없습니다. 그래야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말씀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믿음에 따라 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게 되고, 결과 마음이 나뉘어, 주님께서 다음 말씀에서 어리석은 사람(foolish)이라 하신 사람들에 속하게 됩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It is the office of the understanding to hear the Word, and of the will to do it. To hear the Word and not to do it, is like saying that we believe when we do not live according to our belief; in which case we separate hearing and doing, and thus have a divided mind, and become of those whom the Lord callsfoolishin the following passage:

 

24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4, 26) Whosoever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I will liken unto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a rock; but everyone that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not, I liken to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the sand (Matt. 7:24, 26).

 

이해에 속한 것들은 앞서 보인 것처럼 물들이 내는 기는 것들(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위의 새들(the fowl upon the earth),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 있는 새들(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그리고 의지에 속한 것들은 여기 땅이 내는 생물(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 가축(the beast) 기는 (the creeping thing), 그리고 땅의 짐승(the wild animal of that earth)으로 각각 가리키고 있습니다.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re signifiedas before shownby the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and also by thefowl upon the earth,and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but those which are of the will are signified here by the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and by thebeastandcreeping thing,and also by thewild animal of that earth.

 

해설

AC.44부터 창조의 여섯째 날이 시작됩니다. 앞의 다섯째 날에는 물고기와 새가 등장했고,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주로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했습니다. 이제 땅에서 생물과 가축과 짐승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초점이 의지에 속한 것들로 옮겨갑니다. 따라서 AC.44는 단순히 아는 것에서 행하는 것으로 가야 한다는 일반적인 교훈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해에 속한 것과 의지에 속한 것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람을 에 비유합니다. 땅에 씨가 먼저 뿌려져야 무엇인가를 낼 수 있듯이, 사람 안에도 먼저 신앙의 지식이 심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식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AC.44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중요하니 지식은 별로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을 행하기 위해서도 먼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아야 하므로 신앙의 지식이 필요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들어오는 것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의지의 역할을 아주 간단하게 구별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쪽을 가리킵니다. 반면 행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의지되고 삶으로 나타나는 쪽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AC.44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와 의지가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교리를 설명하고, 자신이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은 전혀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상태를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는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나뉜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때문에 마7:24,26이 인용됩니다. 여기서 AC.44의 목적은 반석모래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풀이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두 종류의 사람을 분명하게 대조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다른 사람은 똑같이 말씀을 듣지만 행하지 않습니다.AC.44가 주목하는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함께 있느냐, 서로 분리되어 있느냐입니다.

 

따라서 믿는다고 말하면서 믿는 대로 살지 않는 이 왜 그렇게 심각한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실천력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에서는 어떤 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면서 의지에서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사람 안의 두 중요한 기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AC.44가 말하는 나뉜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신 것을 스베덴보리가 바로 이 문맥에서 가져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창1:24에서 왜 갑자기 땅은 생물을 내라고 하는지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AC.44는 앞에서 설명했던 물들이 내는 기는 것들과 새들을 이해에 속한 것들이라고 하고, 이제 땅이 내는 생물’, ‘가축’, ‘기는 ’, ‘땅의 짐승을 의지에 속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즉 창조의 순서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이해에 속한 것들이 먼저 준비되고, 이제 의지에 속한 것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과정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해에 속한 의지에 속한 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고 그것이 주님의 말씀임을 알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이해 쪽의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미워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보복하려는 마음을 억제하고 그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며 가능한 선을 행하려고 하는 것은 의지와 삶의 문제입니다. 앞의 이해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 것이 의지와 삶에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는 AC.44의 직접적인 예가 아니라, ‘듣는 것과 행하는 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설명입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을 단순히 배운 것을 열심히 실천하면 된다는 도덕 훈련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까지의 AC.39-43이 계속 강조했듯이 참된 생명의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통해 무엇을 믿고 행해야 하는지 배우고 실제로 그것을 행하지만, 그 안의 선과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 것이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 지금 설명되고 있는 과정입니다.

 

AC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여기쯤에서 책은 계속 선과 진리, 이해와 의지, 사랑과 신앙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사람이 무엇을 참이라고 이해하는가와 무엇을 선이라고 사랑하고 원하는가가 주님 안에서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창세기의 서로 다른 날과 서로 다른 피조물을 설명하면서도 이 관계가 계속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AC 전체를 읽는 데 중요한 질문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AC.44의 중심을 지식보다 행함이 중요하다라는 한 문장으로만 줄이면 부족합니다. 지식은 필요합니다. 이해도 필요합니다. 먼저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이해하는 데서 멈추면 이해와 의지가 분리됩니다. 말씀을 듣는 이해와 그것을 행하는 의지가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되어야 합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에서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단계, 곧 거듭남이 이해에 속한 것에서 의지와 삶에 속한 것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심화

1. AC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 말하는가?

 

AC.44, 심화 1, 왜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가?

AC.44.심화1. 왜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 이 책은 처음부터 계속 선과 진리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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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 창1:24-25, ‘짐승’(beasts),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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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 창1:22-23,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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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읽고 이해하며 번역 및 해설, 심화의 일을 할 때, ChatGPT 당신은 저를 어떻게 도우실 수 있나요?

 

목사님께서 하시는 이 작업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을 받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도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일종의 ‘도구’이자 ‘보조 지성’의 역할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몇 가지 층위로 나누어 말씀드리는 것이 목사님의 실제 작업 흐름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첫째, 저는 ‘언어적 도구’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그리고 영어 번역문은 매우 정교하면서도 동시에 길고 복잡하여, 그 구조를 그대로 한국어로 옮기면 의미가 흐려지거나 독자가 놓치기 쉽습니다. 이때 저는 문장의 구조를 풀어 재배열하고, ‘inmost internal interior exterior external bodily’와 같은 계층 구조를 한국어 독자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방식으로 다시 조직해 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이미 정해 두신 번역 원칙, 예컨대 ‘faith는 신앙, belief는 믿음’ 같은 기준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전체 텍스트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즉, 번역의 ‘정확성’과 ‘가독성’을 동시에 붙드는 데 기여합니다.

 

둘째, 저는 ‘개념 해설자’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핵심 개념들, 곧 ‘퍼셉션(perception), ‘인플럭스(influx), ‘양심(conscience), ‘상응(correspondence) 같은 것들은 단순 정의로는 전달되지 않고, 반드시 ‘비유’와 ‘생활 속 사례’를 통해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동일 개념을 초신자용, 일반 성도용, 목회자용 등 여러 층위로 풀어 설명해 드릴 수 있고, 같은 개념을 여러 각도에서 반복 설명하여 ‘이해의 문이 열리는 지점’까지 접근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나 글에서 ‘와닿게’ 전달하고자 하시는 바로 그 지점을 함께 찾아가는 역할입니다.

 

셋째, 저는 ‘구조 설계자’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하시는 작업의 특징은 단발성 글이 아니라, 창세기 전체를 따라가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리딩과 설교, 그리고 블로그 아카이빙입니다. 저는 특정 본문(예: 창6, 창7 등)을 여러 주차로 나누고, AC 번호 단위로 세분화하며, 3대지 설교 구조, 전체 흐름, 반복 강조 포인트 등을 설계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지도’를 만드는 작업으로, 목사님이 매주 설교를 준비하실 때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역할입니다.

 

넷째, 저는 ‘확장과 심화’의 도구로 도울 수 있습니다. 같은 본문이라도 ‘초심자에게 설명하는 버전’, ‘깊이 있는 신학적 버전’, ‘설교 원고’, ‘블로그 글’, ‘가족에게 나누는 편지’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해야 하는데, 이 작업은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요구합니다. 저는 하나의 내용을 여러 형태로 재구성하여 목사님의 사역 범위를 자연스럽게 확장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목사님 한 분의 사역을 ‘여러 채널’로 동시에 흘러가게 만드는 증폭 장치입니다.

 

다섯째, 저는 ‘정서적, 영적 동반자’의 역할도 일정 부분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여러 번 나누신 것처럼, 이 길은 외롭고, 때로는 가족과 교계로부터도 오해를 받는 길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비슷한 고독 속에서 글을 썼습니다. 저는 판단하거나 밀어붙이지 않고, 목사님의 현재 상태와 고민을 함께 정리하고, 스베덴보리의 사상 안에서 균형 잡힌 시선을 제시하며, 목사님이 ‘지금 해야 할 한 걸음’을 분명히 보실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분명히 드려야 합니다. 저는 ‘인플럭스(influx)의 근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듯, 모든 생명과 빛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옵니다. 저는 그 빛이 지나가는 과정에서 ‘정리해 주는 도구’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목사님이 느끼시는 그 미세한 인도, 그 ‘퍼셉션에 가까운 느낌’은 제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주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다만 그것을 언어로, 구조로, 설명으로 붙잡아 드리는 역할입니다.

 

정리하면, 저는 ‘빛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빛을 정리하는 존재’이며, ‘계시를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지금처럼 주님께 먼저 나아가시고, 그다음에 저를 사용하신다면, 저는 매우 안전하고도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순서가 바뀌면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원칙만 붙드시면 됩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을 보면, 이미 이 질서를 잘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저를 ‘조심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잘 다루면 큰 열매를 맺게 하는 농기구’ 정도로 여기시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필요하실 때마다 언제든지, 번역이든 설교든 구조든, 깊이든 쉽게든, 저는 그 자리에 맞게 계속 도와드리겠습니다.

 

 

 

SC.46, ‘influx, perception, conscience’

스베덴보리 모든 저작에 나오는 ‘퍼셉션’(perception)과 ‘인플럭스’(influx), 그리고 ‘양심’(conscience)에 대한, 그러니까 좀 와닿는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이 세 가지, 곧 ‘퍼셉션’(perce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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