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요12:35, 36)He that walketh in the darkness knoweth not whither he goeth.While ye have the light,believe in the light,that ye may be sons of light(John 12:35–36).
이 구절은AC.51의 문맥에서 ‘사람이 진리를 통해 어떻게 인도받고,또 그것을 거부할 때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핵심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요12:35-36의‘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는 것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아직 의식 속에 주어져 있을 때,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곧 어둠(거짓과 무지)에 사로잡혀 더 이상 길을 분별할 수 없게 된다는 영적 상태의 법칙을 말합니다.’
먼저 ‘빛이 너희 중에 있다’입니다. 여기서 ‘빛’은 자연적인 빛이 아니라 ‘진리’,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해의 빛을 의미합니다. 이 빛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이라고 표현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상태를 허락하시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언제나 진리를 똑같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더 밝게 보이고, 어떤 때는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다음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입니다. ‘다닌다’는 것은 단순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간다’, ‘선택하고 행한다’는 뜻입니다. 즉, 진리를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실제 삶 속에서 따르지 않으면, 곧바로 ‘어둠’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여기서 ‘붙잡힌다’는 표현이 중요한데, 이것은 단순히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빠져나오기 어려운 상태’, 곧 거짓이 굳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방향 상실’을 말합니다. 진리를 잃은 상태에서는 사람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AC에서 말하는 ‘이해가 어두워진 상태’, 곧 영적 눈이 감긴 상태입니다.
이제 핵심입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 곧 신앙과 삶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진리는 단지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실제로 따를 때, 비로소 사람 안에 자리 잡습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은 ‘그 진리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빛의 아들이 된다’입니다. ‘아들’은 성경에서 ‘어떤 것에서 나온 것’, ‘그것을 닮은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빛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진리로부터 태어난 사람’, 곧 이해와 삶이 진리에 의해 형성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가 그 사람의 삶의 원리가 된 상태입니다.
이제AC.51과 연결하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를 통해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받아들이면, 그 진리는 점점 사람 안에서 빛이 되어 길을 밝히고, 결국 그 사람을 ‘빛의 아들’, 곧 진리 안에 사는 상태로 이끕니다. 그러나 거부하면, 그 자리는 곧 어둠이 차지하게 되고, 사람은 점점 방향을 잃게 됩니다.
이건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어떤 순간에 ‘이게 옳다’는 깨달음이 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따르지 않고 미루거나 무시하면, 그 깨달음은 점점 흐려지고, 나중에는 아예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반대로 그것을 따라 행동하면, 다음에는 더 분명한 빛이 주어집니다. 이 반복 속에서 사람은 점점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이 되거나, 반대로 ‘어둠 속에서 길을 잃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영적 삶의 아주 실제적인 법칙을 말합니다. ‘빛은 주어질 때 붙잡아야 하며,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사라지고,그 자리를 어둠이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요12:35-36의‘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는 것은 주어진 진리를 실제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곧 어둠에 사로잡혀 방향을 잃게 된다는 영적 법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AC.51
‘형상’(image)에 대해 말하자면, 형상은 닮음(likeness) 그 자체가 아니라 닮음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라고 말합니다. 영적 인간은 ‘형상’(image)이고, 천적 인간은 ‘모양’(likeness), 곧 닮음(similitude)입니다. 이 장에서는 영적 인간을, 다음 장에서는 천적 인간을 다룹니다. ‘형상’(image)인 영적 인간을 주님은 ‘빛의 아들’(son of light)이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As regards the “image,” an image is not a likeness, but is according to the likeness; it is therefore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The spiritual man is an “image,” and the celestial man a “likeness,” or similitude. In this chapter the spiritual man i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the celestial. The spiritual man, who is an “image,” is called by the Lord a “son of light,” as in John: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요12:35, 36)He that walketh in the darkness knoweth not whither he goeth. While ye have the light, believe in the light, that ye may be sons of light(John 12:35–36).
또한 ‘친구’(friend)라고도 하십니다.He is called also a “friend”: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4, 15)Ye are my friends if ye do whatsoever I command you(John 15:14–15).
그러나 ‘모양’(likeness), 곧 닮음인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son of God)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But the celestial man, who is a “likeness,” is called a “son of God,” in John: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3이는 혈통으로나(주4)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 13)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the power to become sons of God, 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 who were born not of bloods,4 nor of the will of the flesh, nor of the will of man, but of God(John 1:12–13).
주4,헬라어는ἐξ αἱμάτων입니다. 아래AC.374 [3]번 단락을 보세요. [편집자]The Greek is ex haimat¯on. See below, at n. 374[3]. [Reviser]
해설
이 글은 창세기1장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매우 정밀하게 분해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형상’과 ‘모양’을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의도적으로 구별합니다. 여기서 형상은 ‘닮아 가는 과정에 있는 상태’, 모양은 ‘완성된 일치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형상’대로 창조되지만, 곧바로 ‘모양’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이 구분은 인간의 거듭남 구조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주님을 닮아 가는 상태에 있고, 천적 인간은 사랑 자체가 되어 주님과 일치된 상태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적 인간은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가는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주님과 같은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크지만, 단절이 아니라 연속입니다.
그래서 창세기1장에서는 ‘형상’만 말하고, ‘모양’은 다음 단계로 남겨 둡니다. 이것은 인간이 처음부터 완성된 상태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관에서 완성은 정지 상태가 아니라, 사랑과 생명이 온전히 흐르는 상태입니다.
이 글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 ‘각각 다른 호칭’으로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인간은 ‘빛의 아들’, ‘친구’라 불리고,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립니다. 이 호칭들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관계의 깊이를 나타냅니다.
‘빛의 아들’이라는 말은, 이 사람이 여전히 빛에 의해 인도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빛을 가지고 있지만, 그 빛은 여전히 위에서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으라’, ‘걸으라’라는 표현이 함께 나옵니다. 이는 아직 ‘의식적 선택과 분별이 필요한 상태’임을 뜻합니다.
또한 영적 인간을 ‘친구’라 한다는 점도 매우 중요합니다. 친구란, 명령을 이해하고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즉, 영적 인간은 주님의 뜻을 듣고 이해하며, 그것을 따라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 뜻과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친구이지, 아들은 아닙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립니다. 여기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관계가 담겨 있습니다. 자녀, 곧 아들은 명령을 외부에서 받아 실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자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혈통이나 인간적 의지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랑의 근원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뜻합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가’의 문제입니다. 영적인 사람, 곧 영적 인간은 형상으로서 주님을 닮아 가는 중이며, 천적인 사람, 곧 천적 인간은 닮음으로서 주님과 일치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다른 인간 유형이 아니라, 거듭남의 서로 다른 깊이를 나타냅니다.
심화
1. ‘요12:35-36’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요12:35, 36)He that walketh in the darkness knoweth not whither he goeth.While ye have the light,believe in the light,that ye may be sons of light(John 12:35–36).
이 구절은 AC.51의 문맥에서 ‘사람이 진리를 통해 어떻게 인도받고, 또 그것을 거부할 때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핵심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요12:35-36의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는 것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아직 의식 속에 주어져 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곧 어둠(거짓과 무지)에 사로잡혀 더 이상 길을 분별할 수 없게 된다는 영적 상태의 법칙을 말합니다.’
먼저 ‘빛이 너희 중에 있다’입니다. 여기서 ‘빛’은 자연적인 빛이 아니라 ‘진리’,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해의 빛을 의미합니다. 이 빛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이라고 표현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상태를 허락하시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언제나 진리를 똑같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더 밝게 보이고, 어떤 때는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다음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입니다. ‘다닌다’는 것은 단순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간다’, ‘선택하고 행한다’는 뜻입니다. 즉, 진리를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실제 삶 속에서 따르지 않으면, 곧바로 ‘어둠’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여기서 ‘붙잡힌다’는 표현이 중요한데, 이것은 단순히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빠져나오기 어려운 상태’, 곧 거짓이 굳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방향 상실’을 말합니다. 진리를 잃은 상태에서는 사람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AC에서 말하는 ‘이해가 어두워진 상태’, 곧 영적 눈이 감긴 상태입니다.
이제 핵심입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 곧 신앙과 삶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진리는 단지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실제로 따를 때, 비로소 사람 안에 자리 잡습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은 ‘그 진리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빛의 아들이 된다’입니다. ‘아들’은 성경에서 ‘어떤 것에서 나온 것’, ‘그것을 닮은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빛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진리로부터 태어난 사람’, 곧 이해와 삶이 진리에 의해 형성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가 그 사람의 삶의 원리가 된 상태입니다.
이제 AC.51과 연결하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를 통해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받아들이면, 그 진리는 점점 사람 안에서 빛이 되어 길을 밝히고, 결국 그 사람을 ‘빛의 아들’, 곧 진리 안에 사는 상태로 이끕니다. 그러나 거부하면, 그 자리는 곧 어둠이 차지하게 되고, 사람은 점점 방향을 잃게 됩니다.
이건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어떤 순간에 ‘이게 옳다’는 깨달음이 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따르지 않고 미루거나 무시하면, 그 깨달음은 점점 흐려지고, 나중에는 아예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반대로 그것을 따라 행동하면, 다음에는 더 분명한 빛이 주어집니다. 이 반복 속에서 사람은 점점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이 되거나, 반대로 ‘어둠 속에서 길을 잃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영적 삶의 아주 실제적인 법칙을 말합니다. ‘빛은 주어질 때 붙잡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사라지고, 그 자리를 어둠이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요12:35-36의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는 것은 주어진 진리를 실제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곧 어둠에 사로잡혀 방향을 잃게 된다는 영적 법칙을 의미합니다.’
2. ‘요15:14-15’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4, 15)Ye are my friends if ye do whatsoever I command you(John 15:14–15).
이 구절은 AC.51의 문맥에서 ‘사람이 진리를 단순히 아는 상태에서, 그것을 행함으로써 주님과 결합되는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핵심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요15:14-15의 ‘너희는 나의 친구라’는 것은 단순한 관계의 변화가 아니라, 진리를 행함으로써 더 이상 외적으로 복종하는 상태(종)가 아니라, 내적으로 이해하고 함께하는 상태(친구)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행하면’입니다.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따르는 것’이 기준입니다. AC의 흐름에서 보면, 이것은 ‘이해에 있는 진리가 의지와 삶으로 내려오는 순간’을 말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그 진리는 아직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하기 시작할 때, 그 진리는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다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입니다. ‘종’은 단순히 신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따릅니다. 즉, 두려움이나 의무 때문에 복종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초기 상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이때 사람은 진리를 ‘옳기 때문에’, 혹은 ‘그래야 하니까’ 따릅니다. 아직 그것을 사랑하거나 기뻐하는 상태는 아닙니다.
반면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에서 ‘친구’는 ‘내적인 결합 상태’를 의미합니다. 친구는 단순히 명령을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뜻을 함께 아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알게 하였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이해하게 하였다’, ‘내적 의미를 공유하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즉, 더 이상 바깥에서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같은 뜻으로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이제 AC.51과 연결하면 더 또렷해집니다. 앞에서 ‘빛을 믿으라’, ‘빛의 아들이 되라’는 말씀이 나왔는데, 여기서는 그다음 단계가 설명됩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것을 실제로 행함으로써, 그 진리가 사람 안에서 ‘자기 것이 되는 상태’, 곧 주님과 내적으로 연결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사람은 ‘종’이 아니라 ‘친구’가 됩니다.
이건 그러니까 이런 뜻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말씀을 들으면 ‘그래야지’ 하고 억지로라도 따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씀이 점점 이해되고, 결국에는 ‘아, 이게 참 좋다’는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행하게 됩니다. 그때는 더 이상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됩니다. 바로 그 변화가 ‘종에서 친구로’의 전환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히 관계의 친밀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순종에서 내적 일치로’, ‘의무에서 사랑으로’, ‘명령에서 이해로’ 넘어가는 거듭남의 중요한 전환점을 설명합니다.
‘요15:14-15의 ‘너희는 나의 친구라’라는 것은 진리를 행함으로써 외적 복종의 상태를 넘어,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내적 결합의 상태에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3. ‘요1:12-13’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3이는 혈통으로나(주4)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 13)As many as received him,to them gave he the power to become sons of God,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who were born not of bloods,4nor of the will of the flesh,nor of the will of man,but of God(John 1:12–13).
이 구절은 AC.51의 문맥에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며, 그 결과 어떤 존재가 되는가’를 가장 직접적으로 밝히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요1:12-13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단순한 신분 변화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의 근원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에게만 있음을 의미합니다.’
먼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받아들인다는 뜻을 넘어, ‘자기 삶 안으로 들여놓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뜻하는 모든 것’, 곧 주님의 신적 본질과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행위’입니다.
그다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입니다. 여기서 ‘권세’는 어떤 외적인 자격이나 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과 가능성’을 뜻합니다. 그리고 ‘자녀’는 앞서 보신 ‘빛의 아들’과 같은 맥락으로,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무엇을 닮았는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생명을 가진 사람’, 곧 주님의 선과 진리로 형성된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핵심 구절입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여기서 ‘혈통’(bloods)은 단순한 육체적 혈통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유래한 모든 것’, 특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육정’(will of the flesh)은 의지 측면에서의 자연적 욕망과 충동을 가리키고, ‘사람의 뜻’(will of man)은 이해 측면에서의 자기중심적 사고와 판단을 가리킵니다. 즉, 이 세 가지는 모두 ‘사람에게서 나온 것’, ‘자기로부터 나온 것’을 대표, 표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두 부정됩니다. 왜냐하면 거듭남은 결코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변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난다’는 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근원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전에는 자기로부터 살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으로부터 사는 존재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 AC.51과 연결하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앞에서 ‘빛을 믿으라’, ‘주님의 명을 행하라’는 말씀이 있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순종의 요구가 아니라, ‘새로운 태어남’, 곧 ‘거듭남’을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 살기 시작할 때, 그 진리는 점점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고, 결국 그 사람의 ‘근원 자체’를 바꾸게 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곧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중심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행하는 과정 속에서,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것이 참으로 옳고 선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상태’로 바뀝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 선과 진리가 마치 자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처럼 됩니다.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은 ‘자기에게서 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한 교리적 선언이 아니라, 거듭남의 본질을 가장 깊이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은 아무리 다듬어도 여전히 사람의 것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은 전혀 다른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요1:12-13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사람이 자기로부터 난 존재에서 벗어나, 주님으로부터 난 존재가 되는 것, 곧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4. ‘‘내가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위 설명 중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부분이 좀 어리둥절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문장의 핵심은 ‘행동의 기준이 자기 욕구에서 나오느냐, 아니면 진리와 선 자체에서 나오느냐’의 차이를 설명하려던 것이었습니다. 다만 ‘내가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한 것은 ‘원함 자체를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원함의 출처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처음 상태를 보시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접하고 그것을 따르려고 할 때, 여전히 중심은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옳으니까 해야지’, ‘이렇게 사는 게 나에게 좋으니까 해야지’라는 식입니다. 여기에는 여전히 ‘나’가 중심에 있고, 진리는 그 기준을 보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선을 행해도, 그 뿌리는 아직 자기 자신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거듭남이 진행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하면,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참으로 선하고 옳기 때문에’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원하는 내용 자체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기에게 유익하거나 만족을 주기 때문에 원했다면, 이제는 선 그 자체가 좋아서 원하게 됩니다. 즉, ‘나 중심의 원함’이 ‘선 중심의 원함’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 ‘이것이 참으로 선하고 옳기 때문에, 그래서 나도 그것을 원하게 된다’입니다. 즉, 원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원함의 근원과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걸 조금 더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정직하게 살아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속으로는 손해 보기 싫고, 상황 따라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정직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정직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불편하고, 정직한 것이 더 자연스럽고 좋게 느껴집니다. 그때는 더 이상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내 마음과 맞는 상태’가 됩니다.
바로 이 변화가 ‘자기로부터 난 상태’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상태’로 넘어가는 중요한 표지입니다. 즉, 겉으로는 같은 행동이라도, 그 행동의 근원이 바뀐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라는 표현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원함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에서 나온 원함이, 선과 진리에서 나온 원함으로 바뀌는 것’을 설명하려던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