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5.심화

1. 태고 시대

 

AC.45에는 태고 시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이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석기 시대, 동굴 생활, 돌도구, 사냥과 채집 같은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곧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게 원시적인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와 의지의 상태를 동물로 표현할 만큼 깊은 영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태고 시대와 현대의 역사학·고고학에서 사용하는 시대 구분을 그대로 같은 것으로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의 선사시대 구분은 주로 도구, 생활 방식, 유물과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반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태고 시대를 말할 때 스베덴보리의 주된 관심은 그러한 기술사적 분류가 아니라 태고교회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 사람들은 영적으로 깊었다는 말을 석기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높은 영적 상태에 있었다는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AC.45도 그런 역사학적 주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표현 방식입니다. 이 둘을 구별해 두면 현대 고고학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불필요하게 정면충돌시키지 않고 그의 글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특별히 돌리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퍼셉션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이 무엇이 선하고 참인지 교리와 지식을 통해 배우고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방식과는 다른 내적인 지각을 가리킵니다. AC를 계속 읽으면 태고교회와 퍼셉션의 관계가 훨씬 자세하게 설명됩니다. 따라서 AC.45 태고 시대 사람들이라는 표현도 그러한 전체 문맥 안에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동물들을 가지고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을 표현했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AC.45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고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상징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며, 그와 같은 표현이 이후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 전체에도 계속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들의 구체적인 언어생활이나 의사소통 방식을 상상하여 복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추상어가 없어서 동물 그림으로 말했던 원시인들이라는 뜻도 아니고, 반대로 모든 태고교회 사람이 오늘날의 신학자보다 더 많은 교리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영적 상태의 깊이를 같은 척도로 재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자연과학, 역사, 언어, 기술에 관해 과거 사람이 알지 못했던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현대인이 그만큼 더 깊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의 높은 영적 상태를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현대 과학과 기술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두 종류의 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AC를 읽는 데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류의 역사를 단순히 옛날에는 무지했고 오늘날은 발전했다는 한 방향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지식과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것과, 인간의 내적 상태가 주님을 향해 얼마나 열려 있는가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저술에서 태고교회가 높은 상태로 묘사되는 것을 현대의 기술 발전에 대한 부정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태고교회를 낭만적인 완전무결한 황금시대로 만드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이하와 AC의 설명을 따라가면 바로 그 태고교회 안에서도 인간의 proprium이 강해지고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모든 사람이 완전했던 시대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이후의 설명과 맞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특별히 태고교회의 초기 상태와 그들에게 있었던 천적인 성질과 퍼셉션이지, 아주 먼 옛날이라는 시간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AC.45에서 태고 시대를 만났을 때 석기 시대와 어떻게 맞지?라는 질문에 너무 오래 붙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이렇게 구별하면 충분합니다. 현대 역사학의 시대 구분은 인간의 외적인 생활과 물질문화를 중심으로 하고,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태고 시대는 태고교회와 관련된 인간의 영적 상태를 중심으로 합니다. 두 설명은 애초에 같은 질문에 답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AC.45의 문장도 훨씬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원시인들이 놀랍게도 고등 신학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인간의 이해와 의지에 속한 내적인 것들을 동물들을 통해 표현했으며, 그러한 상징적 표현이 이후 말씀에도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자연의 형상과 인간의 내적 상태 사이의 관계를 오늘날과는 다르게 지각했던 태고교회의 영적 상태가 놓여 있습니다.

 

 

 

AC.45, 창1:24-25, ‘짐승으로 드러나는 마음 : 애정과 욕정의 질서화’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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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심화

1.  AC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 말하는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  책은 처음부터 계속 선과 진리 이야기인가?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그리고 이제 AC.44에서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까지 비슷한 구도가 계속 나타납니다. 창세기에는 빛과 어둠, 물과 땅, 풀과 나무, 해와 달, 물고기와 새, 짐승이 나오는데,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다시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이야기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질문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질문을 잘 이해하면 앞으로 AC를 읽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수많은 교리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두 주제로 골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생명과 거듭남을 설명할 때 이 둘의 관계가 매우 근본적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인간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람에게는 무엇인가를 알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면이 있고,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원하며 행하는 면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크게 이해와 의지로 구별합니다. 진리는 이해와 특별히 관계되고 선은 의지와 특별히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진리 = 이해,  = 의지라는 기계적인 공식으로만 외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좋아하고 원하여 실제로 행하는 것이 하나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AC.44가 바로 그 문제를 매우 실제적인 언어로 보여 줍니다. 말씀을 듣는 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것을 행하는 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사람은 들으면서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참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신앙을 말하면서도 그 신앙에 따라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문제는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라 내가 아는 진리가 내가 사랑하고 행하는 선과 하나가 되어 있는가?라는 삶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창세기 1장을 설명하면서 이 문제가 계속 나타날까요? 지금 스베덴보리가 창조 이야기를 한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속뜻으로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비치고, 서로 다른 것들이 구별되고, 지식이 생기고, 그 지식들이 살아나며, 마침내 이해에 속한 것뿐 아니라 의지에 속한 것들도 새롭게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날들이 진행될수록 선과 진리의 관계도 같은 모습으로 단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다른 단계에서 나타납니다.

 

이 점에서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 ‘행함과 들음을 완전히 같은 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며 사용되는 문맥도 다릅니다. 그러나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진리와 관계되고 사랑은 선과 관계되며,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계되고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그래서 AC를 읽다 보면 서로 다른 용어들이 계속 선과 진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연결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천국을 설명할 때도 선과 진리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생명은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 상태도 아니고, 막연히 좋은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태도 아닙니다. 천사들의 생명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들이 결합된 삶과 관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도 결국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 설명에서 계속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말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다룬다고 봅니다. 따라서 말씀 속의 수많은 자연물과 사건이 속뜻에서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의 여러 상태와 관계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모든 단어를 이것은 , 저것은 진리라는 두 칸짜리 표에 넣어 해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응은 훨씬 다양하고 문맥에 따라 세밀하게 달라집니다. 다만 그 다양한 상응들이 결국 사람의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의 상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선과 진리는   어느 것이  중요한가?라는 경쟁 구도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만 착하면 진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무엇이 선인지 알기 위해 진리가 필요하고, 알게 된 진리는 실제 선한 삶을 향해야 합니다. AC.44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 사람 안에 심겨야 한다고 한 뒤 곧바로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결합을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AC에서 선과 진리가 계속 등장하는 것을  같은 이야기라고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번에는 선과 진리의 관계가 거듭남의 어느 단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라고 물으며 읽으면 좋습니다. 창조 첫째 날의 빛에서 말하는 진리와 여섯째 날의 이해와 의지의 관계는 똑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됨에 따라 같은 근본 문제가 점점 더 깊은 차원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계속 말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람의 영적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과 깊이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를 읽을 때 선과 진리가 또 나왔다고 생각하기보다, ‘이번에는  둘이 어떻게 만나고 있으며, 아직 무엇이 분리되어 있고, 거듭남이 그것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어 가는가?라고 살펴보면 글의 흐름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끝까지 , 진리 이야기만 한다는 첫인상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같은 두 단어를 되풀이하는 책이라기보다, 인간의 내면이 주님에 의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지를 선과 진리의 관계를 통해 아주 오랫동안, 여러 각도와 여러 단계에서 추적하는 책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AC.44, 창1:24-25, ‘지식에서 생명으로 : 이해와 의지가 하나 될 때 나타나는 참된 신앙’(AC.44-48)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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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심화

1.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가?

 

AC.42를 처음 읽으면 놀라운 장면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겔29:3의 바로와 큰 악어, 32:2의 바다와 강을 휘젓는 악어, 27:1의 리워야단과 바다의 용, 51:34의 삼키는 큰 뱀을 차례로 인용하면서 그것들이 기억 지식과 그 일반 원리, 그리고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는 상태와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속뜻을 단순한 개인적 성경 연구의 결과라고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저작 전체의 전제 자체가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 안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내적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주님의 자비로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말씀의 내적 의미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고 이해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러면 주님이나 천사가 옆에서  문장씩 불러 주었고 스베덴보리는 받아 적었는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저술에는 영들과 천사들과의 대화,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 어떤 것의 의미를 지각하거나 알도록 허락받았다는 진술 등이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모두 하나의 방식으로 묶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천사가 구술한 책이다라고 말하면 그의 저술 방식 자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반대로 성경을 펼치면 속뜻이 화면처럼 눈앞에 자동으로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실제로 보고 들었다고 기록한 경험과, 말씀의 내적 의미를 해설하는 작업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지만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어떤 한 절의 속뜻을 알게 되는 모든 순간에 정확히 어떤 인식 과정이 일어났는지를 우리가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일관된 상응의 연결입니다. 예를 들어 AC.42에서 큰 물고기가 기억 지식의 일반적인 것을 뜻한다고 한 뒤, 스베덴보리는 그 뜻을 한 구절에만 기대지 않습니다. 여러 선지서의 서로 다른 구절을 가져와 같은 상징이 문맥에 따라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으로 AC를 계속 읽으면 물, , , 나무, , , 짐승, 애굽, 앗수르, 바벨론 같은 표현들이 한 번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서 서로 연결되어 해석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속뜻을 단어마다 비밀 암호 하나가 붙어 있는 처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물고기=기억 지식’, ‘=이성적인 이라는 대응표를 외운 뒤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같은 표현도 문맥과 그것이 놓인 관계, 긍정적 또는 부정적 의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AC.42에서  바다짐승이 좋은 창조의 일부로 등장하면서도, 선지서에서는 인간 자신의 지혜와 결합된 부정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내는 비유적 해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의 설명에서 상응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그에게 속뜻은  구절을 오늘  삶에 이렇게 적용해   있겠다는 설교적 적용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는 그의 해석에 동의할 것인지 검토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성경에 재미있는 상징적 의미를 덧붙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스베덴보리의 속뜻 설명을 읽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가 계시를 받았다고 했으니 아무것도 묻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한 구절만 떼어 놓고 문자만 보면 이런 뜻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며 즉시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AC를 계속 읽으면서 그가 같은 상징을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서로 다른 구절의 해석이 일관되는지, 앞뒤의 교리적 맥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42의 겔32:2가 좋은 사례입니다. 그 한 절만 처음 보면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라는 해석은 매우 갑작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AC.40-42에서 물고기와 큰 물고기, 기억 지식과 그 일반적인 것, 인간의 지혜와 지성이라는 연결을 차례로 읽고 나면 적어도 스베덴보리가 어떤 구조 안에서 그 구절을 읽고 있는지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AC 전체를 더 읽을수록 그 연결이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는지 검토할 수 있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가?라는 질문에는 두 층의 답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말씀의 내적 의미는 인간의 독창적인 추론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시가 매 구절마다 정확히 어떤 심리적·지각적 과정으로 전달되었는지를 우리가 하나의 공식으로 재구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의 저작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영계와의 열린 교통을 주장했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님으로부터 밝혀졌다고 증언했으며, 그것을 방대한 성경 구절과 상응의 연결 속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어떻게 이런 뜻이 나오지?라는 어리둥절함을 그대로 가지고 읽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 질문을 가지고 계속 읽는 것이 좋습니다. 한두 구절에서 모든 것을 납득하려 하기보다 AC 전체를 따라가면서 같은 상응이 어떻게 되풀이되고, 문맥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며, 전체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것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검토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 기억 지식을 묶는 일반 원리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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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심화

1. 천사적 

 

AC.41 천사적 (angelic spirit)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 읽으면 조금 낯섭니다. ‘천사라는 것인지 이라는 것인지, 혹은 천사와 영 사이에 또 다른 종류의 존재가 있다는 뜻인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천사적 을 단순히 천사를 다른 관점에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의 존재들을 설명하면서 영들(spirits),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 ‘천사들(angels)이라는 표현을 문맥에 따라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따라서 angelic spirit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것을 곧바로 angel과 완전히 같은 말로 바꾸어 읽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천사적 을 천사와 영 사이에 존재하는 완전히 별개의 제3종족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생물학적 종과 같은 구별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후의 인간을 ’, ‘천사적 ’, ‘천사 등으로 말할 때에는 그 존재의 상태와 그가 속한 사회, 그리고 설명하고 있는 문맥이 함께 고려됩니다. 따라서 천사적 이라는 표현에는 적어도 일반적인 보다 천사적인 상태와 성질에 가까운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AC.41에서는 왜 굳이 천사적 을 언급했을까요?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사실 천사적 영이 정확히 어느 계층에 속하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글의 중심은 생명입니다. 사람의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 생명이 없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그 실제적인 예로 천사적 영의 말과 생각을 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적 영의 말 하나하나와 생각 하나하나, 심지어 생각의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그 가장 작은 것 안에도 주님에게서 나오는 애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대목을 읽을 때 우리의 관심도 천사적 영은 천사인가 영인가?라는 존재 분류에만 머물기보다, ‘ 그의 생각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살아 있다고 하는가?라는 AC.41의 본래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AC.41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독법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글에는 사후세계의 여러 존재와 상태를 가리키는 낯선 명칭들이 등장합니다. 그런 표현의 정확한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필요하지만, 한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곧바로 완성된 영계의 계층표를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그 글이 지금 말하려는 중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AC.41에서 천사적 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천사적  천사와 완전히 같은 존재를 달리 부르는 이라고 고정하지도 않고, ‘천사와  사이의 별도 종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선은 천사적인 상태와 성질을 가진 영적 존재를 가리키는 스베덴보리의 표현 정도로 이해하면서, AC.41의 핵심인 주님에게서 오는 애정이 생각과 말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살아 있게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면 충분합니다. 이후 AC를 계속 읽으면서 스베덴보리가 ’, ‘천사적 ’, ‘천사를 실제로 어떤 문맥에서 구별하여 사용하는지를 차츰 더 정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AC.41, 창1:20, ‘참된 생명의 근원 : 주님에게서 오는 것만이 살아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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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심화

1. 지적인 것들은  사람에 속한다 이성적인 것은  사람에 속할까?

 

AC.40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걸리는 문장이 있습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이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영문은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입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지적인 것들이  사람에 속한다면, 앞의 이성적인 것들은  사람에 속한다는 뜻인가?

 

먼저 문장 자체가 무엇을 분명하게 말하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라는 두 가지를 말한 뒤 the latter’,  후자가 속 사람에 속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후자 intellectual things’,  지적인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AC.40이 직접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적인 것들은  사람에 속한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반대편 명제까지 만들어 그러므로 이성적인 것들은  사람에 속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40은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짧은 문장이지만 AC를 읽을 때 상당히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빈자리를 대칭적으로 채워 넣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새들이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특별히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고 덧붙였을까요?

 

AC.40의 문맥에서 먼저 분명한 것은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새들 사이의 차이입니다. 물에서 번성하는 것들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뜻합니다. 반면 새들은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물고기와 새의 차이를 통해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과, 그것을 넘어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인간의 더 높은 능력이 구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구절 하나를 외우고 있다는 것과 그 구절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앞의 것은 기억 지식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뒤의 것은 이성적·지적인 활동과 관계됩니다. 물론 이것은 AC.40의 대응을 이해하기 위한 쉬운 예이지, rational intellectual을 각각 이렇게 정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 지적인 것들은  사람에 속한다는 말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참된 영적 이해는 단순히 외부에서 정보를 많이 축적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필요하지만,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 속 사람의 지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40은 적어도 이 둘의 층위가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rational intellectual의 차이를 현대 심리학의 두 가지 사고 기능처럼 간단히 정의하려고 하면 오히려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rational 논리적으로 계산하는 능력이고 intellectual 마음 깊이 진리를 직관하는 능력이다라고 고정하면 이해하기는 쉬워 보이지만, AC.40은 그런 정의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rational  사람과  사람 사이의 중간 영역이다라고 이번 한 문장만으로 확정하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여러 글에서 인간의 rational intellectual,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훨씬 더 세밀하게 다룹니다. 그 전체 설명을 따라가야 두 용어의 관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40에서는 먼저 본문이 말하는 만큼을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고기는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나타냅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가 왜 물고기와 함께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지도 조금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 안에는 단순히 기억에 저장된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더 높은 차원의 활동도 있습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인간의 여러 능력도 살아 있는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 문장은 앞으로 AC를 계속 읽게 만드는 작은 예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성적인 것은 정확히 어디에 속하는가?’, ‘이성적인 것과 지적인 것은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에 AC.40 한 문장으로 성급하게 답을 만들어 넣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인간의 내적 구조를 더 펼쳐 보일 때까지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간단합니다.

 

지적인 것들이  사람에 속한다고 했으므로 이성적인 것들은   사람에 속한다는 뜻인가?

 

AC.40만 놓고 보면 그렇게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명시적으로 말하는 것은 후자,  지적인 것들이  사람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성적인 것의 정확한 위치와 역할은 더 넓은 AC의 설명 속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본문이 말하는 것과 우리가 거기서 추론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AC를 오래 읽어 가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때로는 조금 덜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말한 것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이 됩니다.

 

 

 

AC.40, 창1:20, ‘지식과 지성이 살아나는 순간 : 물고기와 새로 나타나는 거듭난 생명’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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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심화

1.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 생각하도록 허락하실까?

 

AC.39에서 특히 마음에 오래 남는 문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허락하십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으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분명히 알게 하지 않으실까요? 왜 사람이 내가 선을 행한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허락하실까요?

 

AC.39은 그 이유를 직접 말합니다. 그 단계의 사람은 달리 생각할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는 나중에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마침내 퍼셉션하도록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사람을 일부러 속여 네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고 가르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문이 사용하는 말은 허락하신다(permit)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듭남의 처음부터 자기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을 깊이 알고 살아갈 수 있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가 현재 생각할 수 있는 상태에서부터 출발하도록 허락하시고, 거기서부터 점차 더 깊은 인식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은 AC.39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영적 상태를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서부터 거듭남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사람은 실제로 내가 공부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선을 행한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AC.39은 그런 인간의 활동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실제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는 가운데, 그 근원에 대한 인식이 점차 달라지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내가 행하는  선의 근원은 정말  자신인가?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을 먼저 믿게 됩니다. AC.39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중에는 그것을 퍼셉션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완전한 퍼셉션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고 믿는 상태를 지나, 마침내 그것을 더욱 내적으로 퍼셉션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AC.39은 바로 이 과정을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끄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선은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9의 관심은 인간의 행동을 없애는 데 있지 않고, 그 행동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 그것을 자기 고유의 선으로 여기지 않는 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점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AC.39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노력해서 선한 사람이 되었다고 모든 것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도 AC.39이 향하는 방향과 다릅니다. 사람은 실제로 배우고 선택하고 행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안에 있는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글들에서는 이것이 나중에 마치 자기로부터인 것처럼 행한다는 중요한 원리와 더욱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AC.39 자체에서는 아직 그 전체 교리를 펼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먼저 주님께서 사람의 현재 상태를 허락하시고,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퍼셉션하는 데까지 이끄신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허락하신다는 한 단어가 참 깊게 다가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처음부터 완성된 영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듭남을 시작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자기에게서 생각하고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여기는 바로 그 상태에서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씩 이끌어, 마침내 선과 진리의 참된 근원을 알아보게 하십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그때는 정말 내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안에서도 주님께서 나를 이끌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라는 감사가 생길 수 있습니다. 다만 개별 사건 하나하나에 대해 이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이다라고 우리가 섣불리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9이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은 더 근본적인 사실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을 시작하시고,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에게서 찾던 상태에서 그것을 주님에게서 인정하는 상태로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AC.39의 이 짧은 문장은 인간의 미숙함을 정죄하는 말이라기보다, 그 미숙함 속에서부터 사람을 이끄시는 주님의 자비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이 아직 내가 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단계에서도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은 자기가 선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선을 행하고, 자기가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내가 한다는 자기 공로에서 주님으로부터 받는다는 인정으로 옮겨 가는 것, AC.39이 보여 주는 살아남의 과정에는 바로 이러한 깊은 변화가 들어 있습니다.

 

 

 

AC.39, 창1:20, ‘비로소 살아나는 신앙 : 주님이 행하심을 알 때 시작되는 생명’(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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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안에서 ‘몸의 부활’에 대한 입장은 생각보다 다양하지만, 큰 틀에서는 대부분의 전통 교회들이 ‘최종적인 몸의 부활’ 자체는 믿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몸이 어떤 몸인가, 현재 죽은 자들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그리고 부활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에 따라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러나 흔히 오해하듯이 ‘지금의 육체가 그대로 복원된다’고 단순하게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죽은 뒤 영혼이 먼저 하느님 앞에 가며, 마지막 심판 때 ‘영화된 몸’과 다시 결합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몸은 현재의 육체와 연속성은 있지만, 썩지 않고 죽지 않으며 제한을 받지 않는 상태입니다. 가톨릭의 대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도 부활체를 ‘동일한 인격의 몸이지만 변화되고 완성된 몸’으로 설명했습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다만 법적 구원론보다는 ‘신화(神化, Theosis)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인간 전체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이므로, 영혼만이 아니라 몸도 구원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최후에 몸이 부활한다는 점에서는 가톨릭과 비슷하지만, 이를 더 신비적이고 존재론적인 변화로 이해합니다. 정교회 신학자들은 종종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이나 부활 후의 영광스러운 몸을 예로 듭니다.

 

루터교, 개혁교회, 장로교, 감리교 등 전통 개신교 역시 기본적으로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다만 현대에 올수록 ‘현재의 원자와 세포가 그대로 재조립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신학자는 많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존 칼빈은 부활체가 현재 몸과 동일 인격의 몸이지만, 전혀 새로운 영광의 상태를 입는다고 설명했습니다. 많은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도 고린도전서 15장의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을 구분하며, 부활체를 변형된 존재로 이해합니다.

 

성공회는 전통 신조를 유지하면서도 해석의 폭이 비교적 넓습니다. 몸의 부활을 고백하지만, 그것을 물질적 복원으로 이해할지 영광스러운 존재의 변형으로 이해할지는 신학자들마다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반면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몸의 부활을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그들에게 부활은 ‘하나님 안에서 인격이 보존된다’거나 ‘그리스도의 생명이 공동체 안에서 계속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가톨릭, 정교회, 보수 개신교 모두로부터 전통적 신앙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실제로는 전통 교회들 사이에도 스베덴보리와 부분적으로 만나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톨릭과 정교회도 사람이 죽은 뒤 의식 없는 상태로 수천 년을 기다린다고 보지 않습니다. 죽는 즉시 영혼이 살아 있다고 봅니다. 또한 부활체가 현재의 육체와 전혀 동일한 물질 구조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죽은 뒤 곧바로 영적 상태로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어느 정도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여기 있습니다. 전통 교회들은 ‘죽은 뒤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과 ‘마지막 때 몸도 다시 부활한다’는 것을 둘 다 믿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이 이미 완전한 인간 형상을 가진 영적 몸으로 부활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추가적인 육체 부활은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가톨릭, 정교회, 전통 개신교는 ‘죽은 뒤 영혼은 살아 있으며, 마지막 때 몸도 부활한다’고 믿고, 스베덴보리는 ‘죽은 뒤 즉시 영적 몸으로 부활하며, 그것이 이미 완전한 부활이다’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자연적 육체 자체가 신성으로 영화되어 부활했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 점이 스베덴보리의 부활론이 기독교 역사 전체에서 가장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입니다.

 

 

 

SC.88, ‘식사 초대를 받을 때’

자신의 글이나 생각, 사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거리를 두지는 않으시는 분의 식사 초대가 있을 시,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했나요? 스베덴보리의 생애 기록을 보면, 그는 자신의 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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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6, ‘몸의 부활은 오직 주님 한 분한테만’

개신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 곧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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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4:16, 17)

 

이나 고전15, 5:28-29 등을 근거로 자신들의 몸의 부활을 강력하게 믿고 있습니다만, 제가 스베덴보리 어느 글에선가 그런 부활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가능하며,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본 것 같습니다. 아래는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입니다.

 

 

이 문제는 사실 스베덴보리 신학과 전통 개신교 신학이 가장 크게 갈라지는 지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살전4:16-17, 고전15, 요5:28-29 등을 근거로 하여 장차 세상 끝날에 무덤 속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은 직후 이미 영적인 몸으로 깨어난다고 보며, 따라서 수천 년 전에 흙으로 돌아간 육체가 다시 모여 부활한다는 생각은 성경의 문자에만 머문 이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천국과 지옥(HH.445-452)과 ‘최후의 심판(LJ)에서 이 문제를 매우 강하게 다룹니다. 그는 자신이 수십 년 동안 영계에서 수많은 영혼들을 만나 보았는데, 그 누구도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곧바로 영적 인간으로 살아나며, 자신이 여전히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얼굴도 있고, 몸도 있고, 감각도 있고, 생각도 있고, 기억도 있습니다. 다만 물질 몸이 아니라 영적 몸일 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부활은 죽은 지 사흘 후도 아니고, 수천 년 후도 아니며,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기억하신 ‘오직 주님만 육체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내용은 아마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와 관련된 가르침일 가능성이 큽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자연적 육체를 가지고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는 세상에 속한 가장 바깥 그릇이며, 죽음과 함께 해체되어 자연계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만 가지고 영계로 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어떤 인간과도 다르게 자신의 인성 전체를 신성으로 영화하셨습니다. 그래서 무덤에 묻힌 육체까지도 신성화되었고, 그 결과 무덤이 비어 있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역사상 유일한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육체 자체가 부활한 분은 주님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영으로 부활하지만, 주님은 몸까지 영화되어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1:25)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죽은 사람들을 다시 살려 내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부활의 근원이 주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영계에 들어가는 모든 영혼은 자기 힘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끊임없이 생명을 흘려보내시기 때문에 살아 있습니다. 즉 사람은 부활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 부활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핵심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살전4:16-17은 어떻게 이해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상응의 원리를 적용합니다. ‘주님의 강림’은 문자 그대로 구름을 타고 대기권에 내려오는 사건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리는 것을 뜻합니다.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은 진리가 크게 선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어 있던 사람들이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인 ‘구름’을 통하여 더 높은 진리의 상태로 들어가 주님과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공동묘지의 시신들이 일제히 일어나는 장면이 아니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됩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만약 육체 부활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여러 모순이 생긴다고 지적합니다.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의 몸은 이미 흙이 되었고, 어떤 원자는 수없이 다른 생물과 사람들의 몸을 거쳤습니다. 또한 팔을 잃고 죽은 사람, 화장된 사람, 바다에서 사라진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몸의 부활을 이해하면 이런 문제는 사라집니다. 사람의 진정한 형상은 육체가 아니라 영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개신교가 믿는 ‘육체의 부활’은 사실 주님께만 완전하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주님처럼 육체까지 영화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부활은 육체의 재조립이 아니라 영적 인간의 각성입니다. 반면 주님은 무덤에 남겨진 육체까지 신성으로 변화시키셨기에, 참된 의미에서 ‘몸의 부활’은 오직 주님에게만 일어난 유일무이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주님으로부터 모든 인간의 부활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부활의 중심은 ‘무덤에서 몸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주님이 생명이시며, 모든 영혼은 그분으로 인해 살아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전통적 육체 부활론과 스베덴보리의 영적 부활론을 가르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SC.87, ‘몸의 부활’에 대한, 가톨릭, 정교회, 전통 개신교의 입장

기독교 안에서 ‘몸의 부활’에 대한 입장은 생각보다 다양하지만, 큰 틀에서는 대부분의 전통 교회들이 ‘최종적인 몸의 부활’ 자체는 믿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몸이 어떤 몸인가, 현재 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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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5, ‘BTS와 그들의 ARMY에 대하여’

BTS와 그들의 ARMY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는 무슨 말을 할까요? 그들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 노래하며, 그 노래를 통해 치유 받은 전 세계 아미들은 전 세계 곳곳에서 선행을 펼치고 있거든요... BTS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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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심화

1. 넷째  요약, 정리

 

1:14-19의 넷째 날에 해당하는 AC.30-38을 여기까지 읽고 나면 여러 내용이 한꺼번에 등장해서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순종, 교대와 다양함, 낮과 밤, 빛과 어둠이 연이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넷째 날이 끝나는 이 지점에서 전체 흐름을 한 번 묶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넷째 날은 빛이 처음 생기는 이라고 이해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빛은 이미 첫째 날에 등장했습니다. 넷째 날에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광명체들입니다. 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랑과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빛을 비추고 삶을 이끌게 되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이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AC.31-34를 지나면서 이 점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영적 생명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를 말하면서 사랑을 더 큰 것으로 두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사랑에서 옵니다.

 

이것은 사랑만 있으면 진리나 신앙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다만 그 질서에서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넷째 날의 해와 달은 바로 이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많이 알고 말하는 것만으로 영적 생명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삶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별들도 등장합니다. 별은 신앙에 속한 여러 지식과 진리들을 나타냅니다. 해와 달과 별을 함께 보면 넷째 날의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사람 안에 단지 하나의 막연한 종교적 느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과 그것에 속한 여러 진리가 서로 관계를 이루면서 영적 삶을 비추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33에서는 이 빛의 근원이 더욱 깊이 설명됩니다. 사람의 생각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 하나가 아니라 인간 생명의 중심과 관계된 것입니다. 넷째 날에 큰 광명체인 사랑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도 이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4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다시 강조됩니다. 사랑 없는 신앙, 곧 삶과 분리된 신앙은 참된 의미의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넷째 날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분명해집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머릿속에 많이 저장하는 과정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AC.35에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인간의 두 능력인 의지 이해가 등장합니다. 사람은 의지하고 이해하는 존재이며, 이 두 능력은 본래 하나의 생명을 이루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의지와 이해의 관계가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주님의 자비로 사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보존되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악한 의지가 원하는 것과 다른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거듭남의 길이 열립니다.

 

이 대목은 넷째 날의 사랑과 신앙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다는 말을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옳다고 믿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처음부터 선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사람을 가르치시고, 사람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며 점차 의지와 삶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참된 결합은 악한 의지와 거짓된 생각의 일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AC.36은 그래서 신앙을 순종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단순히 무엇을 알고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특별히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중심에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둡니다. 여기서도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신앙한다고 말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어떤 사랑과 삶으로 나타나는가가 중요합니다.

 

AC.37에서는 창1:14 징조와 계절과 날과 로부터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이라는 중요한 원리를 설명합니다. 자연계에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이 있고,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있듯이 영적 생명에도 서로 다른 상태들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이 획일적이 되어 생명이 없게 되고, 선과 진리도 분별되거나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것을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침체와 혼란과 악을 경험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7이 말하는 것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와 다양함입니다. 따라서 모든 영적 후퇴나 악한 상태를 주님께서 성장시키기 위해 주신 필수적인 계절이라고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이 변화 없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을 가진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AC.38에서는 넷째 날을 마무리하면서 네 가지 대응을 매우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은 선, ‘은 악, ‘은 진리, ‘어둠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들은 낮의 ’, 악한 것들은 밤의 이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요3:19, 21을 인용하여 빛과 어둠이 인간이 받아들이는 진리와 거짓, 그리고 그의 삶과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AC.37  AC.38 을 기계적으로 똑같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37에서는 하루의 변화 전체가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지만, AC.38에서는 낮과 밤의 대조를 통해 선과 악을 나타냅니다. 말씀의 상응은 단어 하나에 언제나 하나의 뜻만 붙여 놓은 고정된 암호표가 아니라, 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이렇게 AC.30-38을 한 흐름으로 놓고 보면 넷째 날의 중심이 보입니다. 앞선 과정에서 사람이 선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였다면, 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광명체처럼 세워지고 영적 삶을 비추며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된 두 생명이 아니라 하나를 이루어야 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고 순종과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을 단순히 해와 달과 별의 창조라고만 읽으면 그 속뜻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이 날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점차 살아 있는 빛으로 자리 잡고,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더욱 분명히 구별되며, 영적 생명이 그 빛 아래서 질서를 이루어 가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넷째 날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광명체처럼 세워져 영적 삶을 비추고 다스리며,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살아 있는 질서를 이루어 가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AC.38, 창1:18-19, ‘낮과 밤의 분별 : 행위로 드러나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기준’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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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2.심화

 

2. ‘나도 나중에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몹시 불편하면 어떻게 하지?’

 

제가 나중에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몹시 불편한 인생이 될까 봐 걱정됩니다. 아니, 영적 천사들하고도 그렇게 될까 봐, 그리고 그럴 경우는 정말 비참할 것 같습니다...

 

 

그 걱정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특히 AC.182를 읽다 보면, 마치 죽은 뒤 어떤 천사들과 함께 있다가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떠나게 되는 장면이 매우 실제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사후 세계를 전체적으로 보면, 목사님이 상상하시는 것처럼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괴로워 비참해지는 상태’가 갑자기 닥치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강제’가 아니라 ‘상응’입니다. 사람은 죽은 뒤 자신이 평생 사랑해 온 것, 진실로 원했던 것, 기뻐했던 것에 맞는 공동체로 점차 인도됩니다.

 

AC.182에서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을 수 없게 되는 사람은, 천적 천사들이 싫어서라기보다 그들의 사랑의 분위기가 자기 삶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마치 강한 햇빛이 나쁜 것이 아니지만, 오랫동안 어둠에 익숙한 눈에는 견디기 어려운 것과 비슷합니다. 문제는 햇빛이 아니라 눈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저는 오히려 반대의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목사님은 지난 수년 동안 거의 매일 같이 AC를 읽고 번역하고 해설해 오셨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지적 연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천국을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시면서 말입니다. 또한 반복해서 ‘천적 인간’, ‘사랑의 퍼셉션’, ‘own의 포기’, ‘주님으로부터 삶을 받음’ 같은 주제에 마음을 기울여 오셨습니다.

 

물론 목사님도 스스로 잘 아시겠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사랑도 있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고, 세상 염려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인간 안에는 그런 요소들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런 요소가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어디를 향하느냐입니다.

 

오히려 AC.182를 읽고 ‘나는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할까 봐 걱정된다’고 말하는 마음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정말 자기 사랑에만 빠진 사람은 그런 걱정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는 천국의 상태와 자기 상태가 맞는지 고민하기보다, 자기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오히려 ‘혹시 내가 그 사랑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고 염려하고 계십니다. 그 염려 속에는 적어도 천적 상태를 가치 있게 여기고, 그것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사후 세계는 시험장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천사들은 사람을 탈락시키거나 평가하려고 다가오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AC.182에서도 천적 천사들은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사람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오래 보호하고, 가능한 한 평안하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어떤 사람이 천적 천국이 아니라 영적 천국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패나 열등함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천국 역시 완전한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그곳의 천사들도 주님 안에서 행복하며, 자신에게 맞는 기쁨 속에서 살아갑니다. 천적 천국의 기쁨과 영적 천국의 기쁨은 다를 뿐, 우열 관계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의 질문을 읽으며, ‘나는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보다 ‘나는 지금도 그들의 분위기를 사랑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사후의 자리는 죽은 뒤 갑자기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에서 형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수년 동안 하루하루 AC를 번역하고 해설하며, 천국의 상태와 사랑의 질서를 배우고 가르치기 위해 애써 오신 분이 ‘혹시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할까 봐 걱정된다’고 말하는 모습에서는, 천적 상태에 대한 두려움보다 오히려 그 상태를 향한 깊은 갈망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그 갈망 자체를 가볍게 보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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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2.심화 1. ‘빛을 사용하는 능력’ 그러나 그 영혼의 성질이 더 이상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상태라면, 그는 그들로부터 떠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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