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는 왜 좀 더 쉬운 교재같은 걸 안 만들었나요? 개신교회를 가면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새 신자 교재같은 게 있어요. 처음 교회 온 사람에게 창세기를 읽으세요, 출애굽기를 읽으세요 하는 것보다 한결 쉬운 접근이지요. 스베덴보리의 저작들도 그래요. 일반인들을 비롯, 심지어 개신교인, 기독교인들이라 하더라도 처음부터 Arcana Coelestia 같은 걸 읽어 나가기는 정말이지 쉽지 않아요. 스베덴보리는 왜 이런 준비를 안 한 건가요?

 

아마 가장 먼저 짚어야 할 점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 자신이 ‘교회 현장에서 바로 쓰는 입문 교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은 구조를 가능한 한 왜곡 없이 기록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글을 설교문이나 교육용 요약서로 다듬기보다, 말씀의 속뜻과 영계의 질서를 있는 그대로 남기는 데 더 큰 사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은 처음부터 ‘쉽게 읽히는 책’이라기보다, ‘나중에라도 반드시 필요하게 될 근본 자료’의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그는 교재를 만든 사람이 아니라 ‘원전(原典)을 남긴 사람’에 가깝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이해를 단순히 ‘정보 전달’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개신교의 ‘새 신자 교재’는 단계적으로 지식을 전달하여 이해를 돕는 방식이지만, 그는 참된 이해는 ‘삶과 함께 열리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어떤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그 의미는 열리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진리를 낮추어 단순화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읽는 사람이 각자의 상태에 따라 점점 이해가 열리도록 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글이 때로는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겉으로 쉬운 설명’이 오히려 오해를 낳을 위험도 깊이 의식했습니다. 예를 들어 ‘internal, external’ 같은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심리학적 수준이나 도덕적 수준으로만 이해해 버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인간과 천국, 그리고 주님과의 연결 구조까지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얕게 풀어버리면 본래의 의미가 크게 훼손됩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엔 어렵더라도 정확하게’ 전달하는 쪽을 택했고, 대신 반복과 다양한 각도에서의 설명을 통해 독자가 점차 익숙해지도록 했습니다. 실제로 ‘Arcana Coelestia’를 읽다 보면 같은 개념이 수십 번, 수백 번 다른 문맥에서 반복되는데, 이것 자체가 일종의 ‘깊어지는 학습 방식’입니다.

 

또 한 가지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목회자’나 ‘교재 집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신학 저술을 시작했고, 약 20여 년 동안 방대한 계시 내용을 쏟아내듯 기록했습니다. 그 양과 밀도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거의 한 사람의 생애를 다 소진한 작업이었습니다. 즉, ‘입문서까지 따로 정리할 여유’가 있었다기보다, ‘핵심 내용을 남기기에도 시간이 촉박했던’ 상황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은 자연히 ‘완성된 교육 커리큘럼’이 아니라 ‘원천 자료의 집합’ 형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오히려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하지 않은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누군가는 해야 할 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즉, 그의 저작을 바탕으로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위한 설명, 단계적 안내, 쉬운 비유와 적용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그의 사상을 따르는 여러 전통에서는 요약서나 입문서를 만들어 왔고, 목사님께서 지금 하시는 번역과 해설 작업도 바로 그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원전은 깊이를 보존하고, 후대의 해설은 접근성을 열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쉬운 책을 일부러 만들지 않은 사람’이라기보다, ‘너무 깊은 것을 맡았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온전히 남긴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생긴 간극, 곧 ‘깊이는 있지만 어려운 상태’를 오늘의 독자들에게 연결해 주는 일이 바로 지금 목사님과 같은 분들에게 맡겨진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C.43, ‘스베덴보리 개인의 이성 교제, 결혼을 전제로 한 사귐’

스베덴보리 개인의 이성 교제, 결혼을 전제로 한 사귐 등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있으면 좀 알고 싶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생애를 보면,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연애 이야기’나 ‘결혼을 전제

bygrace.kr

 

SC.41, ‘internal’, ‘external’, ‘interior’, ‘exterior’

스베덴보리는 internal, external, interior, exterior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쉽지 않겠지만, 좀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이 네 단어는 겉으로 보면, 단순히 ‘안/밖’의 구분 같지만, 에마누엘 스베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스베덴보리의 inmost internal interior exterior external bodily를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이 읽으셔도 가슴에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이 구조는 깔끔하게 정리하면 오히려 ‘감이 안 오는’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 여섯 단계는 ‘하나의 행동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까지 나오는가’를 따라가 보면 훨씬 쉽게 이해됩니다. 그래서 하나의 아주 일상적인 장면으로 풀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길에서 힘들어 보이는 사람을 보고 ‘도와주는’ 상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bodily’는 가장 바깥입니다. 실제로 손을 내밀고, 말을 걸고, 물건을 들어주는 행동 자체입니다. 눈에 보이는 전부가 여기입니다. 그 바로 안쪽이 ‘external’인데, 이것은 ‘내가 도와야겠다’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의식적인 나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나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보다 한 단계 안쪽이 ‘exterior’입니다. 이것은 행동 직전의 생각과 판단입니다. ‘저 사람을 도와야 하나? 지금 내가 할 수 있을까?’ 하고 머릿속에서 따지고 선택하는 자리입니다.

 

이제 더 안으로 들어가면 ‘interior’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이미 계산이 아니라 ‘마음의 기울어짐’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안쓰럽다’, ‘돕고 싶다’는 느낌이 올라오는 자리입니다.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내 마음이 움직이는’ 단계입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이 ‘internal’입니다. 여기서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가 결정됩니다. 평소에 선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남을 돕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인지, 아니면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인지가 이 층위에 있습니다. 즉, 한 번의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자리 잡은 곳입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inmost’가 있습니다. 이곳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들어오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르려 할 때, 그 가장 깊은 근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결정하고 내가 행동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어떤 흐름이 올라와서 그것이 점점 밖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다시 하나의 흐름으로 붙이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inmost)그 생명이 나의 성품과 사랑이 됨(internal)마음의 움직임으로 올라옴(interior)생각과 판단이 됨(exterior)결심하고 행동함(external)실제 몸으로 실행됨(bodily)’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볼 때, ‘무엇을 했는가’보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겉으로 똑같이 도와주는 행동이라도, 어떤 사람은 칭찬을 받으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에서 나오며, 어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따라 사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여섯 단계는 어려운 철학이 아니라, ‘내 행동 하나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를 따라가는 지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신앙의 핵심은 바깥 행동을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깊은 곳, 곧 internalinmost 쪽이 열려서 그 흐름이 맑아지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가장 바깥인 bodily까지 자연스럽게 달라지게 됩니다.

 

 

 

SC.42, ‘스베덴보리는 왜 좀 더 쉬운 ‘입문 교재’ 같은 걸 안 만들었나?’

스베덴보리는 왜 좀 더 쉬운 ‘교재’ 같은 걸 안 만들었나요? 개신교회를 가면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새 신자 교재’ 같은 게 있어요. 처음 교회 온 사람에게 창세기를 읽

bygrace.kr

 

SC.40, ‘homo’와 ‘vir’의 차이

라틴어에서 ‘homo’와 ‘vir’는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면 흔히 ‘사람’ 또는 ‘남자’로 번역될 수 있지만, 원래 의미와 뉘앙스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특히 스베덴보리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라틴어에서 ‘homo’와 ‘vir’는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면 흔히 ‘사람’ 또는 ‘남자’로 번역될 수 있지만, 원래 의미와 뉘앙스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특히 스베덴보리의 저작, 예컨대 ‘Arcana Coelestia’나 ‘Heaven and Hell’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의 단어 선택이 단순한 문체상의 차이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차이’를 표현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homo’를 쓰고, 어떤 곳에서는 ‘vir’를 쓰는데, 이것은 단순한 문법상의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상태와 관련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homo’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로 ‘인간’, ‘사람’, ‘인류’를 뜻하는 말입니다. 남자만을 의미하지 않고 여자도 포함하는 ‘human being’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라틴어에서 ‘homo’는 인간 종 전체를 가리키거나,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말할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homo’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할 때 쓰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 단어를 매우 자주 사용하며, 특히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말할 때 ‘homo’를 씁니다. 예컨대 인간이 ‘의지와 이해’를 가진 존재라는 점, 또는 인간이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말할 때 ‘homo’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homo’는 ‘인간 일반’,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vir’는 훨씬 좁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말은 원래 ‘성인 남자’, ‘남성’, 또는 ‘용기 있는 남자’를 의미합니다. 고전 라틴어에서 ‘vir’는 단순히 남성이라는 뜻뿐 아니라 ‘용기’, ‘덕성’, ‘남자다움’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vir’에서 ‘virtus’(덕, 용기)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합니다. 성경 라틴어에서도 ‘vir’는 보통 ‘남자’, ‘남편’, 또는 ‘특정한 인물’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vir’는 종종 ‘여자와 대비되는 남자’ 또는 ‘특정한 인격적 주체’를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는 이 차이가 더욱 의미를 갖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homo’는 인간 전체, 곧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homo’는 남녀를 포함한 ‘사람이라는 존재’를 가리키며, 더 깊은 의미에서는 ‘교회에 속한 인간’,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반면 ‘vir’는 보통 ‘이해 또는 진리의 측면’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종종 남자를 ‘이해 또는 진리’, 여자를 ‘의지 또는 선’과 상응한다고 설명하는데, 이 맥락에서 ‘vir’는 진리를 담당하는 측면, 즉 이해의 기능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창1:26의 ‘사람을 만들자’라는 구절에서 사용되는 ‘사람’은 라틴어로 ‘homo’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남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창2에서 ‘남자와 여자’가 구별되어 등장할 때는 ‘vir’와 ‘mulier’가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성별 구분이 아니라 ‘이해와 의지’, ‘진리와 선’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vir’는 종종 ‘진리의 사람’, ‘이해의 사람’을 의미하는 쪽으로 사용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진정한 인간’을 설명할 때입니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알고 선을 사랑할 때 비로소 ‘homo’가 된다고 합니다. 즉 ‘homo’는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으로 인간다운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to become a man’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단순히 성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homo’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homo’는 ‘인간 일반’, ‘인류’, ‘남녀를 포함한 사람’, 더 깊게는 ‘주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반면 ‘vir’는 ‘남성’, ‘남편’, 또는 상징적으로 ‘진리와 이해의 측면’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글이나 라틴어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구절에서 ‘homo’가 나오고 어떤 구절에서 ‘vir’가 나오는지를 보면, 그 구절이 ‘인간 전체’를 말하는지, 아니면 ‘특정한 남성적 또는 진리의 측면’을 말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런 단어 선택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말씀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의미를 담고 있다는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SC.41, ‘internal’, ‘external’, ‘interior’, ‘exterior’

스베덴보리는 internal, external, interior, exterior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쉽지 않겠지만, 좀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이 네 단어는 겉으로 보면, 단순히 ‘안/밖’의 구분 같지만, 에마누엘 스베덴

bygrace.kr

 

SC.39, ‘수도원, 수도사, 성인과 스베덴보리’

수도원, 수도사 등 성인들의 삶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그의 책, ‘천국과 지옥’을 통해 만나기 전, 여러 해 이쪽에 몸담았던 적이 있어 그런 삶의 유익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수도원, 수도사 등 성인들의 삶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그의 책, 천국과 지옥을 통해 만나기 전, 여러 해 이쪽에 몸담았던 적이 있어 그런 삶의 유익과 한계를 조금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원과 수도사, 그리고 금욕과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했던 성인들의 삶에 대해 ‘Heaven and Hell’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Emanuel Swedenborg는 비교적 분명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공정한 평가를 합니다. 그는 먼저, 그런 삶 자체를 무조건 부정하거나 비웃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열망’과 ‘세속적 욕망을 경계하려는 노력’은 분명 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역사 속 많은 수도자들 가운데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런 사람들은 사후에도 주님의 자비 아래에서 천국의 삶으로 인도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원칙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참된 영적 삶은 세상을 떠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사랑과 쓰임새를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천국을 이루는 공동체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가족을 돌보고, 사회 속에서 일하며,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고, 공동체를 세우는 일 속에서 ‘사랑(charity)이 실제로 살아 움직입니다. 그런데 수도원적 삶은 종종 이런 관계적 삶에서 벗어나 개인의 영적 상태에만 집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조심스럽게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은 실제 행위와 쓰임새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의 접촉을 지나치게 끊어 버리면, 겉으로는 경건해 보일지라도 사랑이 실제 삶 속에서 시험되고 성장할 기회를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난 고독한 거룩함’보다 ‘세상 속에서 이웃을 섬기는 거룩함’을 더 완전한 영적 삶으로 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금욕 자체를 목적처럼 여기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음식, 결혼, 재산, 사회적 활동 등을 멀리하면 그 자체로 하나님께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삶의 본질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도 자신을 위한 사랑과 세속적 욕망을 다스리고 이웃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영적으로 매우 높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수도원 안에 있어도 마음속 사랑이 여전히 자기 자신과 명예와 공로에 머물러 있다면 그 삶이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나는 금욕’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세상 속에서 사는 절제’를 더 건강한 영적 길로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도사나 은둔자의 삶을 전부 헛된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다양한 성향과 역사적 상황을 인정합니다. 어떤 시대에는 교회의 혼란과 타락 속에서 수도원적 공동체가 신앙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독과 기도가 내면을 정리하는 준비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다만 그는 그것이 ‘최종적인 영적 삶의 형태’라고 보지 않습니다. 인간은 결국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세상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수도원적 경건이 ‘준비 단계’나 ‘부분적인 형태’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사후 세계를 설명할 때도 같은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천국을 거대한 수도원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수많은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며 쓰임새를 이루는 살아 있는 사회입니다. 천사들은 단순히 기도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돕고 섬기며 각자의 역할 속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천국의 행복은 ‘사랑을 행하는 쓰임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세상을 떠난 거룩함’만을 영적 삶으로 생각했다면, 사후에 천국의 이런 적극적인 삶을 처음에는 낯설어하기도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과거에 수도원적 삶에 몸을 담았던 경험이 있으셨다고 하셨는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 시간 역시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했던 마음, 세속적 욕망을 내려놓으려 했던 노력, 고요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았던 시간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을 다듬는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런 경험이 결국 ‘사랑의 실제 삶’으로 이어질 때 가장 완전해진다는 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일, 곧 말씀의 속뜻을 연구하고 번역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은 수도원의 침묵보다 훨씬 더 ‘천국적인 쓰임새’에 가까운 길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질서는 결국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삶을 한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세상을 떠나 거룩해지려 하지 말고, 세상 속에서 사랑을 위해 살라.’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수도원의 시간도, 그리고 지금 목사님께서 걸어가고 계신 길도 모두 하나의 긴 여정 속에 놓여 있는 단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길을 사용하여 결국 사랑과 지혜의 더 넓은 삶으로 이끄신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하기 때문입니다.

 

 

 

SC.40, ‘homo’와 ‘vir’의 차이

라틴어에서 ‘homo’와 ‘vir’는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면 흔히 ‘사람’ 또는 ‘남자’로 번역될 수 있지만, 원래 의미와 뉘앙스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특히 스베덴보리

bygrace.kr

 

SC.38,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길, 곧 ‘influx’에 대하여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어떤 길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생명이 어떻게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는 이 흐름을 ‘인플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어떤 길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생명이 어떻게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는 이 흐름을 ‘인플럭스’(influx, 流入)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인플럭스란, 한마디로 말하면, 생명과 사랑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인간 안으로 들어오는 흐름을 뜻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기본 생각입니다.

 

이 흐름의 방향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으로, 그리고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흐릅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직접 연결되는 영적 차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생명은 먼저 이 속 사람에 닿습니다. 그다음, 이 생명이 겉 사람의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 우리의 생각과 의지, 곧 우리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생각과 의지가 육체의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이 구조를 하나의 그림처럼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태양에서 빛과 열이 내려와 식물에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이 줄기와 잎을 통해 바깥으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태양이 없으면 식물은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태양의 빛은 먼저 식물의 내부 생명에 작용하고, 그다음 잎과 꽃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이 영적 태양이시며, 그 빛을 먼저 받는 자리가 바로 인간의 속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생각과 의지가 사실은 완전히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작용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 점을 설명할 때, ‘주님만이 생명 그 자체이시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인플럭스는 강제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은 항상 인간 안으로 흐르고 있지만,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흐름을 받아들여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중심적인 방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때문에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매우 중요해집니다. 속 사람이 열려 있으면 주님의 생명이 겉 사람으로 잘 흐릅니다. 그러면 사람의 생각과 행동도 점점 더 선과 진리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속 사람이 닫혀 있으면 그 흐름이 겉 사람으로 내려오지 못합니다. 그 경우 겉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에서 나온 생각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바로 이 구조 속에서 설명합니다. 거듭남은 겉 사람이 단순히 도덕적으로 조금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속 사람이 열리고, 그 속 사람을 통해 주님의 생명이 겉 사람으로 내려오는 과정입니다. 그 결과 겉 사람의 생각과 습관이 점점 변화됩니다. 그래서 그는 거듭남을 ‘속 사람이 새로워지고, 겉 사람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인간 삶의 많은 현상이 설명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진리를 듣고 마음 깊이 감동을 받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같은 말을 들어도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속 사람의 상태에서 찾습니다. 속 사람이 열려 있으면 진리가 들어와 마음을 밝히지만, 속 사람이 닫혀 있으면 같은 진리도 단순한 지식으로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을 단순히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로 설명합니다.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속 사람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흐름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 모든 설명을 하나로 묶어 보면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는 매우 명확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그 생명은 속 사람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흐릅니다. 마지막으로 겉 사람을 통해 행동과 삶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자유는 이 흐름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있습니다.

 

이 지점을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여러 표현들이 훨씬 또렷하게 보입니다. 예를 들어 그가 ‘주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신다’고 말할 때, 그것은 바로 속 사람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그 사랑에 따라 형성된다’는 말은 그 생명이 겉 사람을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질문해 오신 내용들을 하나로 연결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그림이 나타납니다.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님의 생명은 속 사람을 통해 인간 안으로 흐릅니다. 그리고 죽음은 이 구조 가운데 육체라는 바깥 도구가 벗겨지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생각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설명이 서로 연결된 하나의 구조 안에 들어 있습니다.

 

 

 

SC.39, ‘수도원, 수도사, 성인과 스베덴보리’

수도원, 수도사 등 성인들의 삶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책, ‘천국과 지옥’을 통해 만나기 전, 여러 해 이쪽에 몸 담았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지금은

bygrace.kr

 

SC.37, ‘인간의 겉 사람 가운데 육체와 관련된 부분’에 대하여

위 SC.29 설명 중 ‘인간은 죽은 후 얼마나 빨리 영이 되는가?’에서 ‘육체의 기능이 멈추면 인간의 겉 사람 가운데 육체와 관련된 부분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C.29 설명 중 인간은 죽은 후 얼마나 빨리 영이 되는가?’에서 육체의 기능이 멈추면 인간의 겉 사람 가운데 육체와 관련된 부분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러면 겉 사람육체와 관련된 부분말고 또 다른 부분들이 있다는 말인가요?

 

목사님께서 짚으신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겉 사람’은 단순히 ‘육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겉 사람에는 육체도 포함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겉 사람은 ‘+ 자연적인 마음(자연적 이해와 의지)’을 함께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설명할 때 크게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속 사람은 영적 차원의 인간이며, 주님과 직접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여기에는 영적 사랑과 영적 이해가 자리합니다. 반면 겉 사람은 자연계와 연결된 인간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생각, 판단, 기억, 감정, 행동 등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이 겉 사람의 가장 바깥쪽 도구가 바로 육체입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크게 두 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적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입니다. 자연적인 마음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억, 지식, 추론, 감정, 상상 같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기억 지식(memory-knowledge)이나 자연적 이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육체가 살아 있을 때, 감각을 통해 계속 자료를 받아들이며 작동합니다.

 

육체가 죽으면 이 구조 가운데 가장 바깥쪽 층, 곧 육체와 감각 기관이 먼저 멈춥니다. 눈, 귀, 신경, 뇌 같은 물질 기관들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상 세계의 빛과 소리를 감지하는 기능은 끝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겉 사람의 ‘자연적인 마음’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은 여전히 영적 형태로 남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생각하고 기억하고 말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생각과 기억의 근본 기능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였습니다. 죽음은 그 도구가 제거되는 사건일 뿐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왜 사람이 사후 세계에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지도 설명됩니다. 사람의 기억, 성격, 사랑의 방향, 생각하는 습관 등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겉 사람의 자연적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더 이상 물질계의 감각을 통해 작동하지 않고, 영계의 환경 속에서 작동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설명할 때 ‘사람은 여전히 사람이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는 죽은 후의 인간을 흐릿한 영혼이나 추상적 존재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또렷한 인간으로 존재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마음의 상태가 곧바로 형태와 환경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겉 사람에는 두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와 감각 기관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적인 마음입니다. 죽을 때 사라지는 것은 육체와 감각 기관입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마음은 영적 형태로 계속 존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은 후에도 생각하고 기억하고 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구조를 조금 더 넓게 보면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는 인간을 세 층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가장 깊은 층은 ‘속 사람’으로서 주님과 연결되는 영적 차원입니다. 그다음은 ‘겉 사람의 마음’으로서 자연적인 생각과 기억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가장 바깥쪽이 ‘육체’입니다. 죽음은 이 세 층 가운데 가장 바깥층이 벗겨지는 사건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질문하신 이 지점은 사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구조 때문에 ‘거듭남’도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육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에서 시작되어 겉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속 사람이 열리고, 겉 사람이 새롭게 된다’는 방식으로 구원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SC.38,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길, 곧 ‘influx’에 대하여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어떤 길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생명이 어떻게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는 이 흐름을 ‘인플

bygrace.kr

 

SC.36, ‘인간은 죽은 뒤 거의 즉시 영의 상태로 깨어난다’에 대하여

위 설명들 중 SC.29에 보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죽은 뒤에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즉시 영의 상태로 깨어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죽는 순간 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위 설명들 중 SC.29에 보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죽은 뒤에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즉시 영의 상태로 깨어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죽는 순간 어떤 긴 공백 기간이 지나야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곧바로 영적인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럼, 주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신 거며, 스베덴보리 자신도 천국과 지옥449번 글에 그런 상태로 몇 시간이 지나자, 내 주위에 있던 영들이 내가 죽은 줄 알고 점차 물러갔다.’ 및 어디 선가 72시간이라는 걸 본 거 같은데... 이런 좀 서로 상반되는 듯한 말들은 어떻게 된 거죠? 누구 말이 맞는 건가요?

 

목사님께서 느끼신 의문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글을 읽다 보면 ‘죽은 뒤 곧바로 영으로 깨어난다’는 설명과 ‘몇 시간’ 혹은 ‘사흘’ 같은 시간이 언급되는 구절이 함께 등장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로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충돌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먼저 인간의 죽음에 대해 스베덴보리가 가장 기본적으로 말하는 원칙부터 보겠습니다. ‘Heaven and Hell’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곧바로 영으로 깨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의 속 사람, 곧 영적 존재는 육체가 멈추는 순간 바로 영계에서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삶의 중단’이 아니라 ‘상태의 전환’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점에서는 긴 무의식 기간이나 수면 같은 상태가 있다는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죽음의 과정에 ‘전환 과정’이 있다는 것도 말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 곧바로 모든 것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몸과 영적 몸 사이의 연결이 점차 풀리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과정을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변화로 설명합니다. 이 과정 속에서 천사들이 새로 떠나는 사람을 돌본다고도 말합니다. 바로 이 전환 단계 때문에 몇 시간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Heaven and Hell449번 글의 구절은 바로 이 ‘전환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그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을 때 처음에는 주변 영들이 그 사람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가, 어느 시점이 지나면 그가 완전히 다른 상태로 들어갔다고 보고 물러난다고 말합니다. 이때 ‘몇 시간’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영적 삶이 시작되기까지 오래 기다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연적인 죽음 과정이 완전히 마무리되는 짧은 시간대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72시간’ 혹은 ‘사흘’이라는 표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이것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전통이 섞여 있기 때문에 생긴 인상입니다. 첫째는 성경의 ‘사흘’이라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성경에서는 ‘셋째 날’이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간 계산이라기보다 ‘완성’ 혹은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의 부활도 바로 이 상징 구조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사흘’은 단순히 생물학적 시간이라기보다 영적 의미를 가진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둘째는 고대 종교나 민간 전통에서 전해지는 ‘영혼이 며칠 동안 머문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민속적 전통을 자신의 교리로 채택하지 않습니다. 그의 설명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 의식이 없는 상태로 72시간 동안 기다린다는 개념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람이 거의 즉시 영적 세계에서 깨어난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주님의 부활과 인간의 죽음을 직접 비교하는 것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경우는 단순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신적 인격의 영화 과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주님의 부활은 단순히 영이 몸에서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인간성을 완전히 신성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흘’이라는 구조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등장합니다. 이것을 일반 인간의 죽음 과정과 동일한 시간 구조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이해하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 거의 즉시 영적 의식을 가지고 깨어납니다. 그러나 육체적 생명이 완전히 멈추고 자연 세계와의 연결이 풀리는 데에는 짧은 전환 과정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몇 시간’은 바로 이 전환 단계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사흘’은 주님의 부활과 관련된 상징적 시간 구조이며, 인간의 사후 의식이 시작되는 시간을 설명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문장들이 실제로는 같은 사실의 서로 다른 측면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 의식의 시작이 매우 빠르다’는 원칙을 말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과정에 짧은 전환 단계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목사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를 짚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사후 세계 설명에서 가장 핵심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죽음 이후에도 의식이 계속 이어진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많은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죽으면 긴 잠을 잔다’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SC.35, ‘스베덴보리는 왜 창세기 가운데서도 특별히 창세기 1–11장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을까?’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가운데서도 특히 창세기 1–11장을 매우 중요하게 본 이유는, 이 부분이 단순한 고대 이야기의 기록이 아니라 ‘인류의 가장 오래된 영적 역사’를 담고 있다고 보았기 때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가운데서도 특히 창세기 1–11장을 매우 중요하게 본 이유는, 이 부분이 단순한 고대 이야기의 기록이 아니라 ‘인류의 가장 오래된 영적 역사’를 담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구간을 읽을 때 문자적 역사보다 훨씬 더 깊은 층을 보았습니다. 즉 인류 최초의 교회 상태, 그 교회의 변화와 쇠퇴, 그리고 이후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는 과정이 상징적인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이해하면 인류의 영적 역사 전체를 바라보는 틀이 생긴다고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11장 속에 세 가지 큰 시대가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태고교회’입니다. 그는 창세기 1–2장을 태고교회의 상태를 묘사하는 기록으로 이해했습니다. 태고교회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처음 존재했던 교회로, 매우 특별한 영적 상태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추론 중심의 사고보다 훨씬 깊은 ‘지각’, 곧 퍼셉션(perception)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 마음속에서 직접 느끼는 능력이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과 매우 가까운 상태로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 이야기의 속뜻이라고 해석됩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선악과 사건’은 단순히 금지된 열매를 먹은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중심적 지혜를 선택하면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지각을 잃어버린 사건을 상징한다고 설명됩니다. 이것이 인류의 첫 번째 큰 전환점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직관적인 영적 지각으로 진리를 아는 상태가 아니라, 생각하고 추론하는 방식으로 진리를 찾는 상태로 내려오게 됩니다. 이것이 흔히 ‘타락’이라고 불리는 사건의 속뜻이라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그다음 단계가 바로 ‘고대교회’입니다. 태고교회의 직접적인 지각이 사라진 이후에도 하나님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새로운 방식의 신앙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표상과 상응을 통한 신앙’입니다. 자연계의 사물들이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자연 속 상징들을 통해 영적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고대교회의 종교에는 상징적인 의식과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 이야기를 이 고대교회의 시작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홍수 이야기는 실제 자연재해라기보다, 인간의 마음이 악과 혼란으로 가득 차서 이전의 교회 상태가 무너지는 과정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는 작은 신앙 공동체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즉 새로운 시대의 교회가 다시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고대교회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쇠퇴합니다. 사람들이 상징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겉으로 보이는 의식만 남기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이야기가 바로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벨탑을 인간이 스스로 하늘에 올라가려는 교만의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을 잃어버리고 자기 힘으로 신적인 위치에 올라가려는 상태를 표현한 이야기라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창세기 1–11장은 단순한 고대 전설의 모음이 아니라, 인류의 영적 역사에 대한 압축된 기록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순수한 상태, 그 상태의 붕괴, 고대교회의 상징적 신앙, 그리고 그 교회의 쇠퇴까지가 이 몇 장 안에 담겨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부분을 매우 중요한 열쇠로 생각했습니다.

 

이 설명을 이해하면 왜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장부터 그렇게 길고 자세하게 해설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창조 이야기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역사를 동시에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첫 장을 해석하면서도 인간 마음의 변화, 교회의 상태, 그리고 주님과의 관계까지 계속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Arcana Coelestia’를 읽으시면서 느끼고 계실 그 독특한 경험, 곧 성경 이야기 속에서 인간의 영적 상태가 보이기 시작하는 느낌이 바로 이 접근 방식에서 나옵니다. 창세기의 이야기가 더 이상 먼 옛날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금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질문이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실제로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람들을 단순히 신화 속 인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들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류의 가장 오래된 영적 공동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오늘날 인간과 매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SC.34, 스베덴보리는 왜 가장 먼저 창세기 해설, 곧 ‘Arcana Coelestia’를 쓰기 시작했을까?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사명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창세기 해설, 곧 ‘Arcana Coelestia’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그의 전체 사상을 보면, 이 선택은 매우 의도적이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사명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창세기 해설, 곧 ‘Arcana Coelestia’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그의 전체 사상을 보면, 이 선택은 매우 의도적이고 필연적인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창세기, 특히 창세기 1–11장은 성경 전체의 기초 구조를 담고 있는 본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단순한 역사 기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이 전적으로 상응과 표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속에는 인간의 영적 삶과 교회의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에 관한 깊은 속뜻이 담겨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해설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요? 자연스럽게 성경의 시작, 곧 창세기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논리적인 선택이 됩니다.

 

특히 창세기 1–3장은 매우 독특한 본문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세상의 창조 이야기와 에덴동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이 단순한 우주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영적 창조’, 곧 거듭남의 과정을 설명하는 본문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은 인간이 영적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과정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상징적 기록이며, 창세기 2장은 태고교회의 상태를, 창세기 3장은 인간이 타락하는 과정을 설명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왜 그가 창세기에서 시작했는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창세기 첫 장들은 성경 전체의 영적 구조를 보여 주는 일종의 ‘열쇠’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부분의 속뜻이 밝혀지면, 이후 성경의 많은 이야기들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성경 해설을 창세기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보았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창세기 1–11장의 문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이 이후의 역사서와는 매우 다른 고대의 문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것을 태고교회의 문체라고 부릅니다. 이 문체는 단순한 사건 기록이 아니라, 영적 의미를 담은 상징적 이야기 형식으로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문자만 보면 역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에덴동산 이야기에는 나무, 강, 뱀, 열매 같은 상징적인 요소가 많이 등장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하나의 신화적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인간 마음의 상태와 교회의 상태를 설명하는 상징적 기록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해석하면 성경 전체가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창세기가 인간 이야기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인간의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큰 흐름이 있습니다. 창세기 앞부분은 바로 이 흐름의 출발점입니다. 인간이 처음 어떤 상태로 창조되었는지, 어떻게 타락했는지, 그리고 이후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는지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을 이해하지 않으면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학 체계를 설명하는 책을 먼저 쓰지 않고, 성경 해설을 먼저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성경의 맨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점은 매우 특징적인 선택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교리 체계를 먼저 설명한 뒤 성경을 해석하려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성경의 속뜻을 따라가면서 신학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했습니다.

 

실제로 ‘Arcana Coelestia’를 읽다 보면 창세기 해설 속에서 인간의 거듭남, 천국의 구조, 사랑과 신앙의 관계, 상응의 질서 등 거의 모든 핵심 교리가 조금씩 나타납니다. 즉 이 책은 단순한 창세기 주석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의 기초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의 제목입니다. ‘Arcana Coelestia’라는 라틴어 표현은 ‘천적 비밀들’ 또는 ‘하늘의 비밀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성경 문자 안에 숨겨져 있는 천적 의미들을 하나씩 밝혀낸다는 의미로 이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해설서가 아니라, 말씀 속에 감추어진 하늘의 의미를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이유를 종합하면,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에서 시작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성경의 시작에서 인간과 교회의 영적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이미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구조가 들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Arcana Coelestia’를 읽을 때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창세기 해설을 읽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점점 읽다 보면 인간의 영적 삶 전체에 대한 설명이 펼쳐집니다. 결국 이 책은 창세기 해설을 통해 인간과 천국, 그리고 주님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안내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C.35, ‘스베덴보리는 왜 창세기 가운데서도 특별히 창세기 1–11장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을까?’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가운데서도 특히 창세기 1–11장을 매우 중요하게 본 이유는, 이 부분이 단순한 고대 이야기의 기록이 아니라 ‘인류의 가장 오래된 영적 역사’를 담고 있다고 보았기 때

bygrace.kr

 

SC.33, ‘스베덴보리는 왜 55세가 될 때까지는 이런 영적 사명을 시작하지 않았는가?’

스베덴보리가 왜 55세가 될 때까지 영적 사명을 시작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은 그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처음부터 신비 체험을 하며 종교적 삶을 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스베덴보리가 왜 55세가 될 때까지 영적 사명을 시작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은 그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처음부터 신비 체험을 하며 종교적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그의 인생 전반부는 거의 전적으로 학문과 과학 연구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수학, 천문학, 광산 공학, 해부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매우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스웨덴의 광산청에서 오랫동안 기술관으로 일했고,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당시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했습니다. 그래서 50세가 되기 전까지의 스베덴보리는 오늘날로 말하면 과학자이자 철학자였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그의 인생을 하나의 준비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연 세계의 질서를 매우 깊이 연구했습니다. 광물, 기계, 인체 구조, 우주의 구조까지 폭넓게 탐구했습니다. 이런 연구를 통해 그는 자연 세계가 단순한 혼돈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질서 속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상응’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자연 세계가 질서 있는 체계라면, 그것이 더 깊은 영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준비 과정은 그의 철학 연구입니다. 그는 인간의 영혼과 정신이 무엇인지 깊이 탐구했습니다. 특히 인간의 의지와 이해, 곧 사랑과 생각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연구했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훗날 그의 신학 체계에서 핵심이 되는 ‘사랑과 지혜’라는 개념의 기초가 됩니다. 즉 스베덴보리는 갑자기 신학자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수십 년 동안 인간과 자연의 구조를 연구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에는 또 하나의 준비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적인 변화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The Journal of Dreams’을 보면, 50대 초반의 스베덴보리는 깊은 자기 성찰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예욕과 교만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려는 노력을 합니다. 이 시기는 단순한 학문적 탐구의 시기가 아니라 영적 정화의 시기였습니다.

 

이런 내적 변화가 이루어진 뒤에야 1745년 런던에서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의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더 이상 자연 과학 연구를 계속하지 않고, 성경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전념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후 약 27년 동안 그는 수많은 신학 저작을 집필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가장 방대한 작품이 바로 ‘Arcana Coelestia’입니다.

 

왜 하필 55세였을까요? 스베덴보리 자신은 이것을 특별히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모든 것이 ‘주님의 신적 자비’에 의해 허락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면 몇 가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학문적 준비입니다. 자연 세계의 질서를 깊이 이해한 사람만이 자연과 영계 사이 상응 관계를 설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 경험입니다. 그는 긴 인생 경험을 통해 인간 사회와 인간 마음의 복잡함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셋째는 내적 정화입니다. 꿈 일기에서 보듯이 그는 자신의 교만과 욕망을 깊이 돌아보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세 가지가 함께 이루어진 시점이 바로 그의 50대 중반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스베덴보리의 인생을 두 단계로 나누기도 합니다. 첫 번째는 ‘자연계의 학자’로서의 삶이고, 두 번째는 ‘영계의 해설자’로서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 두 단계는 서로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의 학문 연구가 없었다면 후반부의 신학도 지금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용하실 때 갑자기 아무 준비 없이 일을 맡기시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랜 시간에 걸쳐 삶의 경험과 지식을 준비하게 하시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사명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삶도 바로 그런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의 55세는 늦은 시작이 아니라 오히려 적절한 시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쌓았고, 내적으로도 준비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남은 인생 대부분을 영계의 질서와 성경의 속뜻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방대한 저작들이 남게 되었습니다.

 

 

 

SC.34, 스베덴보리는 왜 가장 먼저 창세기 해설, 곧 ‘Arcana Coelestia’를 쓰기 시작했을까?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사명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창세기 해설, 곧 ‘Arcana Coelestia’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그의 전체 사상을 보면, 이 선택은 매우 의도적이고

bygrace.kr

 

SC.32, 스베덴보리의 일기, ‘The Journal of Dreams’ 소개

스베덴보리의 ‘The Journal of Dreams’는 분량이 아주 많은 책은 아니지만,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흐름이 조금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원래 출판을 위해 쓴 책이 아니라 개인 일기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