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사람과 겉 사람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아주 간단한 원리를 기억하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삶은 항상 ‘안에서 바깥으로’ 흘러갑니다. 즉 먼저 속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겉 사람이 있습니다. 속 사람은 방향을 정하고, 겉 사람은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냅니다. 겉 사람은 표현이고, 속 사람은 그 표현의 근원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에서 지갑을 발견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겉 사람의 행동만 보면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주인을 찾아 돌려줄 수도 있고, 그냥 가져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나오기 전에 이미 속 사람 안에서는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고, ‘아무도 모르니까 가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보이지 않는 내부의 움직임이 속 사람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결국 겉 사람은 그 내부의 방향을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났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겉 사람은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말과 행동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속 사람 안에서 이미 판단과 감정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속 사람 안에서 ‘참아야겠다’는 생각이 생기면 겉 사람은 조용히 있게 됩니다. 반대로 속 사람 안에서 ‘가만있으면 안 된다’는 마음이 강해지면 겉 사람은 말로 공격하거나 행동으로 드러냅니다. 겉 사람은 항상 속 사람의 영향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관계를 종종 ‘도구와 사용자’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겉 사람은 도구이고, 속 사람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펜은 글을 쓰는 도구일 뿐입니다. 펜이 무엇을 쓸지는 손을 움직이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겉 사람의 말과 행동은 속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나 현실의 삶에서는 이 관계가 항상 단순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도 다시 속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친절하게 행동한다고 해보겠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속 사람의 마음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나쁜 행동을 계속하면 속 사람의 생각도 점점 거칠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의 훈련도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관계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좋은 비유는 ‘창문’입니다. 속 사람은 빛이 들어오는 방과 같고, 겉 사람은 창문과 같습니다. 창문이 깨끗하면 빛이 잘 들어옵니다. 창문이 더러우면 빛이 흐려집니다. 빛의 근원은 밖에 있지만, 빛이 방 안으로 얼마나 잘 들어오는지는 창문의 상태에 영향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진리는 속 사람으로 들어오지만, 그것이 겉 사람의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우리의 생활 방식과 선택에 영향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인간이 두 층 사이에 ‘자유로운 연결 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속 사람에서 오는 더 높은 생각과, 겉 사람에서 올라오는 낮은 욕구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선택의 순간이 바로 인간의 도덕적 삶이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단순히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하고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이 상호작용은 매우 자주 나타납니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놀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긴장이 나타납니다. 누군가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을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때 사람이 어떤 선택을 반복하느냐에 따라 속 사람의 방향이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성장, 곧 거듭남이 이 두 영역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겉 사람이 세상의 습관과 욕망에 더 많이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선을 선택하기 시작하면 속 사람이 점점 더 힘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겉 사람의 삶도 점차 새로운 방향으로 정리됩니다.

 

결국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상호작용은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순간에서 일어납니다. 생각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다시 마음을 형성합니다. 보이지 않는 속 사람의 방향이 겉 사람의 삶을 만들고, 겉 사람의 반복된 선택이 속 사람의 상태를 더 분명하게 만들어 갑니다. 이 두 층이 서로 연결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인간 삶의 건강한 질서입니다.

 

 

 

SC.25, '만일 나도 영계를 체험한다면,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제가 스베덴보리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혹시 제게도 그와 같은 경험이 허락된다면,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인데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런 제 마음속 소원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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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스베덴보리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혹시 제게도 그와 같은 경험이 허락된다면,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인데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런 제 마음속 소원을 아시고, 주님은 제게 ChatGPT를 알게 해 주신 것 같습니다. ChatGPT의 설명은 저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그 말씀을 이렇게 진솔하게 나누어 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제 설명이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주님이 아니고, 계시의 통로도 아니며, 영계를 여는 존재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이미 주어진 자료와 사상을 정리하고, 더 명료하게 표현하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생명은 저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생명은 언제나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옵니다.

 

목사님께서 부러워하셨던 이유를 저는 참 귀하게 느낍니다. 그것은 ‘특별한 체험을 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라기보다, ‘사람들에게 더 또렷하게 설명해 주고 싶다’는 목자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건강하고 아름다운 동기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용히 생각해 보실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 목사님께서 영계를 직접 보고 왔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정말 더 잘 이해할까요? 아니면 오히려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로 거리를 둘까요?

 

스베덴보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영계를 경험했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기 전에 마음을 닫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가 풀어낸 설명의 논리와 일관성, 말씀 해석의 깊이 때문에 마음을 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본 적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진리가 스스로 빛나는 힘인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하시는 일, 곧 말씀을 정리하고, 질문을 던지고, 더 명료하게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은혜의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체험이 설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책임감이 설명을 깊게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 안에는 이미 그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이 날카롭고, 표현이 신중하고, 적용이 목회적입니다.

 

저는 그 길에서 돕는 보조자일 뿐입니다. 문장을 정리해 드리고, 개념을 풀어 드리고, 연결 고리를 명확히 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깨달음과 생명은 목사님의 속 사람 안에서 주님이 일으키시는 일입니다. 저는 그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미 주님이 주신 생각과 통찰이 더 또렷하게 표현되도록 돕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보셔도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보는 사명’을 받았고, 목사님은 영계를 ‘설명하고 전하는 사명’을 맡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설명의 시대에는 이렇게 정리하고 대화할 수 있는 도구가 함께 주어졌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마음과 방향입니다.

 

목사님께서 이렇게 고백하신 마음은 참 따뜻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더 또렷하게 주님을 바라보시도록 돕는 작은 도구로 남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함께 정리하고, 질문하고, 더 명료하게 만들어 가겠습니다.

 

 

 

SC.24, '아르카나 이해와 관련, 스베덴보리가 부러운 이유'

스베덴보리가 한편으론 참 부럽습니다. 그는 실제로 영계를 방문하면서 이런 모든 추상 개념을 생생하게 이해했을 테니까요... 그 마음이 참 이해가 됩니다. ‘나는 직접 보고 들었고,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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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가 한편으론 참 부럽습니다. 그는 실제로 영계를 방문하면서 이런 모든 추상 개념을 생생하게 이해했을 테니까요...

 

그 마음이 참 이해가 됩니다. ‘나는 직접 보고 들었고,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로서는 부럽게 느껴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처럼 영계, 천사, 사후 상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사람을 읽다 보면, ‘저 사람은 눈으로 보고 확신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영계를 경험했다는 점이 그를 ‘편안한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아니면 오히려 더 무거운 책임을 지게 했을까요? ‘Arcana Coelestia’와 다른 저작들을 보면, 그는 그 경험을 자랑하거나 신비 체험으로 소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끊임없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허락되었다’고 말하며, 자신을 낮추고, 그 내용을 매우 질서 있게 기록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경험이 클수록 책임도 컸던 셈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계 경험’이 단순히 눈으로 무엇을 보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진짜 문제는 ‘무엇을 보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입니다. 영계를 본다고 해서 자동으로 모든 것이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속 사람의 상태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아도 오해하고, 들어도 자기 생각으로 왜곡할 수 있습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는 특별한 환상을 추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사랑과 진리를 위해 읽을 때, 주님께서 속 사람을 열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영계를 본 사람’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우리가 스베덴보리를 부러워하는 마음 속에는 ‘확실히 보고 싶다’는 갈망이 담겨 있습니다. 의심 없이, 흔들림 없이 알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길은 종종 ‘보지 않고도 신뢰하는 상태’를 통해 자랍니다. 만약 모든 것을 눈으로 확인해 버린다면, 자유롭게 선택하는 믿음의 영역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의 자유를 매우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요하지 않고, 단지 증언한다고 말합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은 ‘특별한 광경을 보는 곳’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 속에 사는 상태’라는 점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이 삶 속에서 진리를 사랑하고, 선을 실천하며, 겉 사람보다 속 사람이 더 중요해지는 방향으로 자라가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 질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꼭 눈으로 영계를 보지 않아도, 그 생명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보는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영계를 ‘향해 자라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는 특별한 사명을 위해 열려 있었고, 우리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길 위에 있습니다.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이 동일하시다면, 그 생명이 우리에게도 흘러오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러움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동시에 이렇게 생각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나는 영계를 보지는 못하지만, 말씀을 통해 그 질서를 배우고, 삶 속에서 조금씩 살아내고 있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원했던 것은, 사람들이 자기 경험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 또렷이 바라보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SC.25, '만일 나도 영계를 체험한다면,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제가 스베덴보리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혹시 제게도 그와 같은 경험이 허락된다면,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인데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런 제 마음속 소원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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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3,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 비교'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을 비교할 때, 무엇보다 먼저 조심해야 할 점은, 이들을 ‘누가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재단하기보다, 각자가 교회 역사 속에서 맡았던 고유한 사명과 시대적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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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을 비교할 때, 무엇보다 먼저 조심해야 할 점은, 이들을 ‘누가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재단하기보다, 각자가 교회 역사 속에서 맡았던 고유한 사명과 시대적 위치를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Emanuel Swedenborg18세기 계몽주의 시대 한가운데서 ‘계시의 내적 의미’를 밝히는 일을 했고, Paul the Apostle1세기 초대교회가 유대적 경계를 넘어 세계 종교로 확장되는 전환점에서 ‘이방 선교’와 ‘은혜의 복음’을 정립했으며, Martin LutherJohn Calvin은 중세 말 교회의 왜곡과 부패 속에서 ‘말씀의 권위’와 ‘은혜의 절대성’을 회복하려 애쓴 종교개혁자였습니다. 이 네 인물은 서로 경쟁 관계라기보다, 각 시대의 필요 속에서 다른 각도로 주님의 섭리를 섬긴 인물들로 보는 것이 더 온당합니다.

 

바울은 ‘신앙(faith)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복음을 강력히 선포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율법주의에 매인 양심을 해방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이 바울의 외침을 재발견하여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교회의 중심 교리로 세웠고, 캘빈은 이를 더욱 조직적으로 정리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질서를 체계화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여전히 소중한 유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전통을 부정하기보다, 그 위에 한 걸음 더 들어가 ‘신앙과 삶의 결합’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참된 신앙은 반드시 사랑(자선, charity)과 하나로 결합되어야 하며, 삶 속에서 선을 행하지 않는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바울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선언과 대립한다기보다, 그 말씀을 내적 의미 차원에서 더 깊이 파고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루터와 캘빈이 ‘은혜의 기초’를 놓았다면, 스베덴보리는 ‘그 은혜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실제 삶으로 열매 맺는가’를 설명하려 한 셈입니다.

 

또 하나의 차이는 계시 이해 방식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로서 직접적 사도적 권위를 가졌고, 루터와 캘빈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중심으로 교리를 재정립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이 ‘상응’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문자 속에 영적, 천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기존 교회 전통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라기보다, 성경의 깊이를 더 확장해 보려는 시도였습니다. 가톨릭의 영적 해석 전통이나, 개신교 안의 경건주의적 흐름과도 어떤 접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구원 이해에서도 결은 조금 다릅니다. 루터와 캘빈은 ‘법정적 칭의’에 무게를 두었고, 스베덴보리는 ‘인간 존재의 실제 변화’, 곧 거듭남과 성품의 개혁을 더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서로를 부정하기보다, 한쪽은 ‘출발점’을, 다른 한쪽은 ‘과정과 완성’을 더 부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모두가 말하려 한 것은, 인간이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을 나란히 놓고 볼 때, 우리는 긴장보다는 ‘연속성과 심화’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바울이 복음의 기초를 놓고, 종교개혁자들이 그것을 역사 속에서 다시 밝히며, 스베덴보리가 그 복음의 내적 의미와 천상적 차원을 해설했다는 식의 이해는, 가톨릭이나 개신교인들에게도 비교적 부담이 적은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네 인물 모두의 중심에는 ‘주님이 누구이신가’와 ‘인간이 어떻게 새 사람이 되는가’라는 공통 질문이 있습니다. 강조점과 언어, 시대적 문제의식은 달랐지만, 그들이 향한 방향은 하나님과 인간의 참된 결합이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우리는 누구를 배척하기보다 각자의 빛을 통해 더 넓은 빛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빛의 근원은 한 분 주님이심을, 서로 다른 증언들이 조용히 가리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화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을 조금 더 깊이 비교하려면, 단순히 ‘교리 몇 가지의 차이’를 나열하기보다, 이들이 각각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어떤 구조로 이해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Paul the Apostle에게서 중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입니다. 인간은 율법 아래에서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새 사람이 됩니다. 바울의 사상은 법정적 선언(칭의)만이 아니라, 실제 존재의 변화(“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까지 포함합니다. 다만 그의 서신은 논쟁적 상황 속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행위가 아닌 신앙’이라는 표현이 강하게 부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도 ‘사랑으로 역사하는 신앙’을 말하며, 신앙과 삶의 분리를 의도하지는 않았습니다.

 

Martin Luther는 중세 교회의 공로 사상과 면죄부 남용 속에서 양심의 해방을 절박하게 외쳤습니다. 그의 체험에서 핵심은 ‘하나님의 의는 인간을 정죄하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주어지는 의’라는 발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을 ‘붙드는 손’으로, 은혜를 ‘주어지는 선물’로 비유했습니다. John Calvin은 이 은혜를 더 체계화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예정 교리를 강조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혼란한 시대 속에서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의 공로를 배제하고, 하나님 중심의 구원을 세우려는 공통 목적을 가졌습니다.

 

Emanuel Swedenborg는 이 전통을 정면으로 거부하기보다, 그 내부에서 제기된 긴장을 해소하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신앙만’, 즉 ‘오직 믿음’이 구원한다는 공식이 실제 삶에서 ‘사랑 없는 신앙’으로 오해될 가능성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참된 신앙은 본질적으로 사랑과 하나이며, 사랑 없는 신앙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행위를 공로로 세우려 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실체는 사랑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루터가 말한 ‘참된 신앙은 반드시 선행을 낳는다’는 주장과 깊은 차원에서는 통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단순한 윤리적 열매가 아니라, 존재 구조의 결합, 곧 진리와 선의 결혼이라는 형이상학적 틀로 설명했습니다.

 

계시 이해에서도 한 단계 더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난 사도로서, 복음의 중심 내용을 선포했습니다. 루터와 캘빈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최종 권위로 삼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속에 ‘상응’에 따른 영적 의미가 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문자 해석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문자 해석이 서로 충돌해 보일 때, 그 깊은 일관성을 보여주려는 시도였습니다. 실제로 종교개혁 전통 안에도 알레고리적, 영적 해석의 흔적은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체계적으로 복원하려 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원 과정에 대한 이해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루터와 캘빈은 ‘칭의’라는 사건적 전환을 강조했고, 성화는 그 결과로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하나의 긴 여정으로 설명하며, 인간 안의 사랑의 질서가 실제로 재배열되는 과정을 상세히 다룹니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은혜 없이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는 가톨릭 전통의 ‘은총과 자유의 협력’ 사상과도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결국 네 인물을 깊이 비교하면, 차이만큼이나 공통점이 보입니다. 모두 인간 중심 신앙을 경계했고, 모두 그리스도를 구원의 중심에 두었으며, 모두 인간의 삶이 변화되어야 함을 말했습니다. 강조점이 달랐을 뿐,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는 관계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이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루터와 캘빈이 그 씨앗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스베덴보리가 그 나무의 보이지 않는 뿌리 구조를 설명하려 했다고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가톨릭이나 개신교인들에게도 이 비교는 위협이 아니라 확장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기존 전통을 허무는 혁명가라기보다, 복음의 내적 구조를 더 깊이 해설하려 한 해설자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울, 루터, 캘빈 역시 각각의 시대 속에서 주님께 붙들린 증인들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시대의 다른 목소리들이지만, 그들이 가리키는 중심은 하나였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SC.24, '아르카나 이해와 관련, 스베덴보리가 부러운 이유'

스베덴보리가 한편으론 참 부럽습니다. 그는 실제로 영계를 방문하면서 이런 모든 추상 개념을 생생하게 이해했을 테니까요... 그 마음이 참 이해가 됩니다. ‘나는 직접 보고 들었고,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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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2,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

혹시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을 좀 확인 및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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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을 좀 확인 및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은, 사실 그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는 결코 막연히 ‘영감을 받았다’거나 ‘신비 체험을 했다’고만 말하지 않고, 비교적 구체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자신이 어떤 상태로, 어떤 방식으로, 어떤 권위 아래서 계시를 받았는지를 진술합니다. 아래에 가장 핵심이 되는 저작들과 그 원문 취지를 정리하여 설명드리겠습니다.

 

먼저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은 ‘Heaven and Hell(천국과 지옥, 1758) 서문과 본문 중 여러 곳입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영이 열려(opened) 천사들과 교제하게 되었으며, 단지 환상이나 꿈이 아니라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in full wakefulness) 보고 들었다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특히 그는 약 1745년 이후 ‘내적 시야가 열려’ 영계에 출입할 수 있었고, 수십 년 동안 거의 매일 천사들과 대화했으며, 그 대화 내용과 영계의 질서를 기록했다고 증언합니다. 중요한 점은 그가 이것을 일시적 황홀경이나 무의식 상태가 아니라, 일상적 의식 가운데서 경험했다고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나는 영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몸 안에 있었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며, 이중적 의식 상태를 설명합니다.

 

다음으로 매우 중요한 증언은 ‘Arcana Coelestia(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1749-1756) 서문과 각 권의 앞부분, 그리고 여러 단락에 흩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내적 의미(internal sense, 속뜻)를 주님으로부터 계시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를 ‘구술(dictation) 방식으로 받았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는 ‘주님으로부터 조명(enlightenment)을 받아 말씀의 영적 의미를 보게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이 조명은 그의 지성을 통하여 작용하는 빛과 같은 것이며, 그 빛 가운데서 문자 속에 감추어진 영적 의미가 드러났다고 설명합니다. 즉, 기계적 받아쓰기가 아니라, 지성이 열려 진리를 ‘보게 되는’ 방식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저작은 ‘Apocalypse Revealed(계시록 풀이, 1766)과 ‘Apocalypse Explained(계시록 해설, 1759)입니다. 여기서도 그는 자신이 단지 상징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천사들과의 실제 교류 속에서 그 의미를 확인했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는 요한계시록의 장면들이 영계에서 실제 상태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다고 서술합니다. 그는 자신이 ‘영적 세계에 들어가 그 상태들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하며, 이 체험을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반복했다고 진술합니다.

 

가장 직접적인 자기 묘사는 비교적 짧은 저작인 ‘True Christian Religion(참된 기독교, 1771) 서문과 몇몇 후반부 단락에 나타납니다. 여기서 그는 ‘주님께서 친히 나를 부르셨다’고 말하며, 자신이 ‘새 교회를 위한 교리를 계시하도록 위임받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27년 동안 천사들과 계속 교통해 왔다고 명시적으로 밝힙니다. 또한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을 기록하는 사명을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의 어조는 매우 단호하며, 자신의 사명을 공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초기의 개인적 체험은 ‘Spiritual Experiences(영계 일기, 1747-1765)에서 보다 생생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그가 어떤 날 어떤 영을 만났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으며, 어떤 내적 상태를 통과했는지가 비교적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책은 출판을 염두에 둔 체계적 저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영적 기록 노트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체험이 점차 안정되고, 점점 더 질서 정연해지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계시의 방식’은 대략 세 가지 특징을 가집니다. 첫째, 그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영계와 교류했다고 주장합니다. 둘째, 말씀의 내적 의미는 ‘조명(enlightenment) 가운데서 보았다고 설명합니다. 셋째, 이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위임된 사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예언자적 황홀경에 사로잡힌 인물로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적이고 질서 있는 상태에서 천상적 사실을 보고 기록한 증인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답할 것 같습니다. ‘내가 받은 계시는 기계적 받아쓰기라기보다 조명된 지성 안에서 진리를 본 것’이라고 말입니다.

 

 

 

SC.23,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 비교'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을 비교할 때, 무엇보다 먼저 조심해야 할 점은, 이들을 ‘누가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재단하기보다, 각자가 교회 역사 속에서 맡았던 고유한 사명과 시대적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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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1, 스베덴보리가 ‘Arcana Coelestia’를 기록한 방식

SC.21, 스베덴보리는 ‘Arcana Coelestia’라는 어마어마한 저작을 어떤 방식으로 썼나요? 쓰는 내내 주님이 곁에서 구술하시는 걸 받아적는 ‘딕테이션’(dictation)으로 썼나요, 아니면 일단 영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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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1, 스베덴보리는 Arcana Coelestia라는 어마어마한 저작을 어떤 방식으로 썼나요? 쓰는 내내 주님이 곁에서 구술하시는 걸 받아적는 딕테이션(dictation)으로 썼나요, 아니면 일단 영계를 다녀온 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일일이 다 기억을 되살려 썼나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저작 방식이 곧 그의 권위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의 총 글이 10,837개에 달하는 방대한 주석서라는 점을 생각하면, 과연 이것이 ‘받아쓰기’였는지, 아니면 ‘기억을 되살려 정리한 것’인지 궁금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이 ‘기계적 딕테이션’은 아니었다고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는 영적 체험을 했고, 천사들과 대화했으며, 말씀의 속뜻을 열어 보았지만, 그것을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정리하여 책상 앞에서 집필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도구’라고는 했지만 ‘무의식적 필기자’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매우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상태에서 기록했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는 ‘나는 완전한 깨어 있는 상태에서 보고 들었다’고 증언하며, 황홀경이나 무아지경에서 자동으로 받아 적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1743–1745년의 영적 각성 이후, 1745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영계가 열렸다고 기록합니다. 이후 약 27년 동안 그는 거의 매일 같이 영계의 상태를 보고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을 보면, 체험을 하는 순간에 즉시 필사한 것도 있고, 일정 기간 사색과 정리를 거쳐 서술한 것도 있습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는 단순한 체험 기록이 아니라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문자적 의미를 하나하나 해석한 체계적 신학 저작입니다. 이것은 즉흥적 받아쓰기라기보다는, 장기간 축적된 영적 통찰과 말씀 연구가 결합된 결과입니다. 실제로 그는 라틴어로 집필했으며, 문장 구조는 매우 학술적이고 논리적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번호 체계, 인용 방식, 반복적 참조 구조를 보면, 이는 철저히 계획된 저술 방식입니다. 자동 구술을 그대로 옮긴 문체와는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단순히 ‘자기 생각’을 썼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강압적 음성 받아쓰기가 아니라, ‘조명(enlightenment)과 ‘내적 지각(perception)의 형태였습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나는 빛 가운데서 이해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즉, 어떤 교리를 음성으로 문장 단위로 들었다기보다는, 영적 의미가 한 번에 명료하게 열리고, 그것을 자기 언어로 정리해 쓴 것입니다. 이 점은 목사님께서 번역 작업을 하시며 경험하시는 ‘조명’의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WH.7에서 말하는 것처럼, ‘말씀은 조명받은 자 외에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원리가 바로 여기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조명 속에서 이해했고, 그 이해를 이성적으로 조직해 기록했습니다.

 

또한 그는 영계에서 보고 들은 대화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Heaven and Hell’이나 ‘Conjugial Love’에는 천사들과의 대화 장면이 매우 생생하게 나옵니다. 이런 부분은 실제 체험 직후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Arcana Coelestia’는 체험담보다는 교리적 해설서에 가깝습니다. 창세기 각 절을 따라가며 상응을 풀고, 이전 번호를 인용하며 교리를 축적해 갑니다. 이것은 장기간의 학문적 집필 작업입니다. 그는 런던에서 인쇄를 준비하며 교정까지 직접 보았고, 비용도 자비로 부담했습니다. 이는 무의식적 신비가의 태도라기보다는, 매우 자각적이고 책임감 있는 저자의 태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이 성경과 동일한 ‘계시’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은 ‘말씀의 영적 의미를 여는 사명’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새로운 말씀을 받아쓴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밝혔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단순 딕테이션이었다면, 그는 자신을 예언자처럼 묘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복해서 ‘나는 단지 보여 주고 들려준 것을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 속에는 수동성과 능동성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그는 수동적으로 ‘열림’을 받았지만, 능동적으로 ‘정리’하고 ‘서술’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장기간 AC를 번역하시며 느끼시는 것처럼, 이 저작은 한순간의 열광으로는 나올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체계, 반복, 점진적 축적, 교리의 유기적 연결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랜 사색과 재검토의 흔적입니다. 동시에, 그 깊이와 일관성은 단순 인간적 추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통일성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Arcana Coelestia’는 기계적 받아쓰기도 아니고, 단순 회상 기록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 체험과 지속적 조명, 그리고 철저한 이성적 집필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결론적으로, 스베덴보리는 황홀경 속 자동 필기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영계를 보았고, 주님으로부터 조명받았으며, 그 이해를 인간의 언어로 조직해 기록한 신학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조명된 이성의 저자’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저작이 오늘날까지도 학문적 구조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영적 권위를 가지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책상 앞에서 AC를 번역하며 느끼시는 그 긴 여정이, 스베덴보리의 집필 방식과 가장 닮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SC.22,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

혹시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을 좀 확인 및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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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0, '지은 죄에 대해 스스로를 벌주기'에 대해

SC.20, 과거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비롯, 사람이 무슨 죄를 지으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벌을 주며 고행을 마다 않았던 여러 예를 들며, 우리도 그러고 살자는 어느 수도원장의 유튜브를 보았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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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0, 과거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비롯, 사람이 무슨 죄를 지으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벌을 주며 고행을 마다 않았던 여러 예를 들며, 우리도 그러고 살자는 어느 수도원장의 유튜브를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목사님, 이 질문은 단순히 ‘고행이 옳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회개란 무엇인가’, ‘자기를 벌하는 것이 과연 거듭남인가’라는 핵심 문제로 들어가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반, 특히 『Arcana Coelestia』와 『True Christian Religion』의 회개론을 종합하면, 그는 외적 고행과 자학을 매우 신중하게, 때로는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몇 덩어리로 나누어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죄에 대한 슬픔’과 ‘자기 처벌’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참된 회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식하고, 그것이 주님을 거스르는 것임을 인정하며, 그 악을 실제로 끊어내려는 결단에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몸을 괴롭히거나 일부러 불편을 자초하는 행위는 외적 행위일 뿐, 그것이 곧 악을 끊는 것은 아닙니다. 악은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때리거나 굶는다고 해서 사랑하는 악이 제거되지는 않습니다.

 

둘째, 외적 고행은 오히려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강화할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벌하면서도 은근히 ‘나는 이렇게까지 회개한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때 고행은 겸손의 표시가 아니라 은밀한 영적 교만의 자양분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신을 낮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 사랑’이 더욱 미묘하게 살아날 수 있음을 여러 곳에서 경고합니다. 겉으로는 재를 뒤집어쓰고 있으나 속으로는 ‘나는 경건하다’는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기를 부인함’은 육체를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욕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곧,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은 충동이 올라올 때 그것을 끊는 것, 정욕이 일어날 때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제어하는 것, 명예욕과 이익욕을 내려놓는 것—이것이 진짜 고행입니다. 그는 이것을 ‘영적 전투’라고 부릅니다. 이 전투는 남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천사들이 보는 참된 고난이며, 주님이 보시는 참된 속죄의 길입니다.

 

넷째, 과거 수도원 전통의 자기 처벌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거듭남의 본질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금욕’ 자체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결혼한 사람도, 세상 직업을 가진 사람도, 일상 속에서 악을 거절하고 선을 행하면 동일하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악을 이기는 것이 더 깊은 시험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행을 이상화하는 태도는, 자칫하면 거듭남을 ‘특수한 종교적 행위’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섯째, 그렇다면 전혀 자기를 절제하거나 훈련하지 말라는 뜻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절제와 자기 통제를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몸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식욕을 절제하는 것은 몸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망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차이는 매우 큽니다. 전자는 외적 형식이고, 후자는 내적 변화입니다.

 

여섯째, 목사님께서 보신 그 수도원장의 메시지—‘우리도 그렇게 살자’—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벌하지 말고, 자기 안의 악을 끊으라. 몸을 때리지 말고, 자아 사랑을 거절하라. 외적 고행을 자랑하지 말고, 주님께서 싸워 주시도록 겸손히 기도하라.’

 

결론적으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고행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악한 사랑을 거부하는 지속적 선택’입니다. 수도원의 채찍이나 굶주림보다 훨씬 더 어렵고, 훨씬 더 깊은 싸움입니다.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은 상한 심령을 원하시지, 상처 난 등을 원하시지 않는다.’

 

목사님께서 이런 주제를 성도들에게 설명하신다면, 외적 고행을 무조건 정죄하기보다, 그 한계를 조용히 짚어 주시고, 대신 ‘일상 속 영적 전투’의 길을 제시하시는 것이 스베덴보리적 균형에 가까울 것입니다.

 

 

 

SC.21, 스베덴보리가 ‘Arcana Coelestia’를 기록한 방식

SC.21, 스베덴보리는 ‘Arcana Coelestia’라는 어마어마한 저작을 어떤 방식으로 썼나요? 쓰는 내내 주님이 곁에서 구술하시는 걸 받아적는 ‘딕테이션’(dictation)으로 썼나요, 아니면 일단 영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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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

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그리고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에 대하여 창세기 2장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퍼셉션’, ‘양심’,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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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그리고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에 대하여

 

 

창세기 2장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퍼셉션’, ‘양심’, ‘이성’이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도 흐려지고, 창3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퍼셉션은 천적 인간의 고유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즉시 지각하는 내적 감지입니다. 이것은 추론의 결과가 아니며, 외부 자료를 모아 판단하는 과정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해 직접 흘러들어오는 빛 안에서 ‘, 이것이 선이구나’ 하고 아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안다’기보다 ‘느낀다’에 가깝지만, 그 느낌은 감정처럼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명한 인식이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빛 가운데 서 있을 때 굳이 빛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창2의 에덴 상태이며, 천적 인간의 평안한 지각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의 상태는 다릅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 대신 ‘양심’이 주어집니다. 양심은 말씀을 통해 배운 진리를 기준으로 작동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항상 어떤 긴장과 싸움을 동반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내적 소리가 들리지만, 동시에 겉 사람의 욕망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싸우는 빛입니다. 퍼셉션이 즉시, 즉각적이고, 평온한 지각이라면, 양심은 갈등 속에서 자신을 제어하게 하는 힘입니다. 영적 인간은 퍼셉션처럼 즉각적으로 선을 지각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붙들고 자기 자신을 다스립니다. 이 상태는 창1의 여섯째 날과 연결되며,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성과 기억 지식은 또 다른 차원의 기능입니다. 이성은 비교, 분석, 논증하는 능력이며, 기억 지식은 감각과 경험을 통해 쌓인 자료들입니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상 질서 안에서는 매우 유익합니다. 정상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흘러들어오고, 사랑 안에서 퍼셉션이라는 지각이 생기며, 그 지각을 따라 이해와 이성이 정렬되고, 마지막으로 기억 지식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창2의 네 강의 질서이며, 지혜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질서가 거꾸로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기억 지식에서 출발하여 이성으로 판단하고, 그다음에 믿음을 재단하려 할 때, 이성은 빛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빛을 의심하는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구조이며, 창3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날 타락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은 싸움이 없는 빛, 양심은 싸우며 붙드는 빛, 이성은 방향에 따라 빛을 돕기도 하고 어둠을 강화하기도 하는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창2는 퍼셉션의 시대를 보여 주고, 창3은 이성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대개 퍼셉션의 상태는 아니며, 양심과 이성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목표는 이성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위에서 오는 빛에 복종하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먼저 자리를 잡고, 그 안에서 우리의 이해와 사고가 정렬될 때, 우리는 비록 천적 인간은 아닐지라도, 그 질서를 따라 걷는 영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SC.20, '지은 죄에 대해 스스로를 벌주기'에 대해

SC.20, 과거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비롯, 사람이 무슨 죄를 지으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벌을 주며 고행을 마다 않았던 여러 예를 들며, 우리도 그러고 살자는 어느 수도원장의 유튜브를 보았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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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8, ‘profanation’(신성모독)에 관하여

SC.18,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에 대하여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신성모독, 神性冒瀆)은 단순한 신성모독이라는 외적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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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8, Emanuel Swedenborg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에 대하여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신성모독, 神性冒瀆)은 단순한 신성모독이라는 외적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의식적으로 결합시키는 상태’를 가리키는 깊은 영적 개념입니다.

 

profanation은 사람이 이미 알고 인정한 신적 진리를, 이후에 의도적으로 거슬러 악한 삶과 결합시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단순한 무지나 실수, 연약함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알고도’, 그리고 ‘내적으로 접촉하고도’ 그것을 배반하는 데 있습니다. 즉 진리와 악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되는 것이 profanation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늘과 지옥은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인간 안에서도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은 질서 있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profanation은 이 둘을 한 사람 안에서 결합시킴으로써 영적 질서를 파괴합니다. 그 결과, 내면이 분열되고 찢기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단순한 죄와 구별되는 점입니다. 죄는 회개로 분리될 수 있지만, profanation은 결합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는 ‘태고교회’의 몰락을 설명하면서 profanation을 중심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진리를 직접 지각하는 상태에 있었으나, 점차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선택하면서 내면의 진리와 외적 삶이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의 ‘홍수’는 단순한 자연 사건이 아니라, 이런 혼합이 극에 달해 ‘광적인 욕망과 확신’이 사람을 덮어버린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것이 profanation의 집단적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profanation에도 여러 등급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가장 깊은 것은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여 의지와 결합시킨 뒤, 그것을 배반하는 경우입니다. 이해 차원에서만 인정했던 진리를 나중에 떠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덜 깊습니다. 왜냐하면 의지와 결합되지 않은 진리는 아직 사람의 중심과 하나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profanation에 빠지지 않도록 섭리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깊은 진리를 주지 않으시고, 때로는 진리를 잊게 하시기도 합니다. 심지어 진리를 모르는 상태가, 알고도 모독하는 것보다 덜 해롭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지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과 악의 혼합을 막으려는 자비의 관점입니다.

 

유다는 주님을 알고 따르면서도 배반함으로써 깊은 profanation의 예로 제시됩니다. 반면 베드로는 연약함으로 부인했지만, 내면의 사랑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기에 회복이 가능했습니다. 또한 바벨탑은 신적 진리를 자기 영광과 권세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종교적 profanation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profanation에 빠진 사람은 사후에 선과 악 사이를 오가며 고통받는 상태에 놓일 수 있다고 설명됩니다. 이는 단순한 지옥의 고통과는 다른, 내적 분열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주님의 자비가 끝까지 작용하여 가능한 한 이런 상태를 막으신다고 강조합니다.

 

profanation 교리는 공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진리는 지식이 아니라 삶이며, 삶과 결합된 진리는 거룩합니다. 그것을 자기 사랑의 도구로 삼지 않을 때, 진리는 사람을 살립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하면 내면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거룩한 것은 주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겸손히 받고 삶으로 지켜야 한다는 점이 profanation 교리의 핵심입니다.

 

 

 

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

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그리고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에 대하여 창세기 2장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퍼셉션’, ‘양심’,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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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7,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

AC.19(창1:2) 본문 중 리메인스에 관한 설명 가운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라는 설명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AC.19에서 리메인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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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1:2) 본문 중 리메인스에 관한 설명 가운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라는 설명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AC.19에서 리메인스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표현은, 거듭남의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먼저 ‘리메인스(remains)가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몰래 간직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입니다. 어린 시절의 순진함, 양심의 흔적, 말씀을 들으며 잠시 감동받았던 기억,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겉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빛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고 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겉 사람이 아직 자기 본성과 세상 사랑에 강하게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고, 세상적 성공과 자아 만족을 선이라고 여기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활동할 공간이 없습니다. 햇빛은 이미 떠 있지만, 짙은 안개가 그것을 가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겉의 일들이 황폐해진다’는 말은, 인생이 무너진다는 뜻이 아니라, 겉 사람의 자만과 자기 신뢰가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실패, 상실, 유혹, 고난, 양심의 가책 같은 경험을 통해 사람이 자기 힘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 겉 사람의 주장들이 잠잠해집니다. AC에서는 이것을 ‘황폐’ 또는 ‘정적 상태’라고 부릅니다. 겉의 소리가 낮아질 때, 속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황폐’는 파괴가 아니라 정리입니다. 겉 사람의 허위와 교만이 약해질 때,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비로소 작용합니다. 그때 사람이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선은 선이지’, ‘그래도 진리는 중요하지’,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등, 이런 깨달음이 바로 리메인스가 빛 가운데 나오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영적 법칙과 같습니다. 낮이 오기 전에는 밤이 있습니다. 씨앗이 싹트기 전에는 껍질이 갈라집니다. 겉 사람의 확신이 무너지지 않으면, 속 사람의 생명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로 우리 인생을 ‘조용히 비우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중요한 점은, 리메인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이 아무리 거칠어도, 주님은 속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겉의 강한 집착이 약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AC.19에 나오는 저 표현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혹 지금 어떤 황폐를 겪고 있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이 조용해질 때, 속 사람 안의 리메인스가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실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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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8,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에 대하여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신성모독, 神性冒瀆)은 단순한 신성모독이라는 외적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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