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6 심화

1. 왜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이 대목은 AC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새끼와  기름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동물 제사는 좋아하시고 농산물 제사는 싫어하신 것인가? 그러나 AC.326의 초점은 제물의 물질적 종류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두 제물의 차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의 AC.325에서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표상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 역시 각각의 내적 상태에서 나오는 예배를 나타냅니다.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이고,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차이는 먼저 무엇을 가져왔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가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있습니다.

 

특히 성경이 단순히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지 않고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으며, 반대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말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배와 예배자의 내적 상태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드리는 외적인 행위만 따로 떼어 놓고 그것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예배 안에 어떤 사랑과 의도가 있으며, 그 사람의 삶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가 함께 관련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까닭을 그가  좋은 물건을 바쳤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26이 직접 제시하는 이유는 그 예배가 분리된 신앙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신앙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신앙이 자기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것이 문제입니다. 반대로 아벨의 예배가 받아들여진 것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주님께서 가인을 미워하셔서 그의 예배를 임의로 거부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습니다. 달라진 것은 인간 편의 상태입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여 결합하는 질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받지 않으셨다는 말씀은 변덕스러운 하나님의 감정이라기보다 인간의 내적 상태와 영적 질서의 문제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예배에도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주일의 예배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을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서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찬송하지만 일상에서는 알고 있는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스르고 이웃의 선을 외면한다면, 외적인 예배 형식만으로 그 분리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일상에서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려고 힘쓰며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고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는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그 삶과 예배는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착하게 살기만 하면 신앙이나 교리는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문제는 진리와 선 가운데 어느 하나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함께 있어야 할 것들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게 하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삶 안에서 선으로 살아 있게 합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정확한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떼어 놓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창4:3-5에서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단순히 두 종류의 제물이 아니라 두 종류의 예배이며, 더 깊게는 그 예배가 나오는 두 가지 내적 상태입니다. 하나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AC.325에서 시작된 사랑과 신앙의 분리 AC.326에서는 이렇게 예배의 분리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창4의 이야기는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가인은 자신을 돌아보거나 사랑과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기보다 분노하고 안색이 변합니다. 따라서 다음 AC.327부터는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4의 비극은 이제 내적인 분리에서 예배의 분리로, 그리고 다시 분노와 체어리티에 대한 적대로 깊어져 갑니다.

 

 

 

AC.326, 창4:3-5, 가인의 제물, 아벨의 제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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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4:3-5)

 

AC.326

각각의 예배가 묘사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가인의 제물(offering of Cain), 체어리티의 예배는 아벨의 제물(offering of Abel) 묘사됩니다. (3-4)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는 받아들여졌으나,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4-5) The worship of each is described, that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by the offering of Cain; and that of charity, by the offering of Abel. (verses 34) That worship from charity was acceptable, but not worship from separated faith. (verses 45)

 

해설

AC.326은 앞의 AC.325에서 제시된 가인아벨의 의미를 이제 예배의 문제로 발전시킵니다. AC.325에서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단지 두 가지 교리적 상태로 머물지 않고 각각 그 상태에 맞는 예배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창4:3-4에서 가인도 제물을 드리고 아벨도 제물을 드립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여호와께 예배드리며 둘 다 제물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AC.326은 그 차이가 제물의 외적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worship from charity)입니다. 참된 예배는 단순히 예배의 형식이 바르고 교리가 정확하며 기도와 찬송과 헌물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참된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배의 내적 생명이 중요합니다. AC.326에 따르면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예배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외적인 예배 안에 생명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주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거나 예배 자체를 거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립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도 얼마든지 종교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고 예배를 드리며 교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다면 그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 역시 그 분리를 그대로 품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는 말씀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두 사람이 가져온 물건을 비교하여 하나는 좋아하시고 다른 하나는 싫어하셨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속뜻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땅의 소산양의 새끼라는 물질적 차이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각각 어떤 내적 예배를 표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를,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받으셨다받지 않으셨다는 표현도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호의를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임의로 등을 돌리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인간 편의 상태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지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결합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따라서 차이는 주님의 사랑이 달라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제물은 오늘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게 하는 매우 엄중한 표상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물을 드리면서도, 그 신앙을 실제 이웃 사랑과 삶에서 분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고 어떤 진리를 알고 있는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는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가’, ‘나의 신앙은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나타나는가와 완전히 분리된다면,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에서 가인의 원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AC.326교리와 신앙은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도록 인도하고, 그 진리는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 안에서도 신앙과 체어리티는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AC.326아벨의 제물을 단순히 체어리티라고 하지 않고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배와 삶을 분리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예배의 내적 생명은 예배 시간에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평소에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고,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려 할 때 그 삶의 체어리티가 기도와 찬송과 말씀을 듣는 외적 예배 안에도 들어갑니다. 예배의 내적 질은 삶의 방향과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26은 창4의 비극이 깊어지는 두 번째 단계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사랑과 신앙 사이에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AC.326에서는 그 내적 분리가 예배에 나타납니다. 겉으로는 가인도 아벨도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지만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의 예배는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입니다.

 

심화

1.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AC.326 심화 1, 왜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AC.326 심화1. 왜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이 대목은 AC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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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창4:1-2, 가인과 아벨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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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심화

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에서 특별히 깊이 살펴볼 표현은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첫 문장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믿고,  믿음에 따라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순서가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는 그 질서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가장 깊은 생명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지각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직접 연결됩니다. 퍼셉션은 밖에서 배운 교리를 하나씩 논증하고 판단하여 이것이 참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천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을 서로 독립된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사랑 안에 그 사랑에 속한 진리가 있었고, 진리는 자신을 낳은 사랑과 하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말은 단순히 사랑도 하고 신앙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 사랑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선에 속한 진리를 지각했고, 그 진리는 다시 선을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어떻게 사는가를 서로 다른 질문처럼 나누기 쉬운 것과 달리,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과 지각과 삶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이 천적 질서를 오늘날 영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 그대로 시간적인 순서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거기서 나왔다고 해서, 오늘날 사람도 먼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충분히 가진 다음에야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영적 인간에게서는 오히려 먼저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 진리를 신앙하며, 그것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은 거듭남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를 가졌지만, 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됩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질서가 서로 반대인 것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에게도 진리는 결국 선과 결합되어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길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아는 진리는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 선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중요하다는 말을 교리와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에게 진리는 거듭남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무엇이 선인지 알지 못하면 올바르게 선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진리가 선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스스로 교회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가인의 원리가 시작됩니다. AC.325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과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알면 경계하기 쉽지만, 참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전체적인 질서에서 떼어 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면 자신이 여전히 진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퍼셉션이 약해진 사람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보존하며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한 교리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교리가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교리를 많이 알고 성경의 속뜻을 깊이 이해하며 신앙 고백이 정확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알게 되는 것은 큰 은혜이지만, 그 지식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많이 보고 더 깊이 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면 오히려 가인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를 아는 목적은 남보다 높은 영적 지식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며 실제 쓰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25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그대로 되찾으려 하기보다 그 안에 있는 영원한 질서를 붙들어야 합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배우는 진리가 삶으로 내려오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쓰임으로 나타날 때 신앙과 체어리티는 다시 형제로 함께 있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입니다.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이 삶에서 떨어져 독립적인 것이 되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 안의 가인이 태어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AC.325, 창4:1-2, 가인과 아벨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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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4:1-2)

 

개요

 

AC.325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였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아벨(Abel)이라 하였습니다. (1-2) The most ancient 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 but there arose 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 The doctrine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called Cain; and charity, which is love toward the neighbor, was called Abel. (verses 12)

 

해설

AC.325는 창4의 속뜻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열쇠를 제시합니다. 4의 가인과 아벨을 단지 인류 최초의 두 형제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 데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어떻게 분리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 읽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되는 두 형제의 관계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영적 역사이기도 합니다.

 

첫 문장인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습니다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사랑을 통하여(through love)라는 말은 단순히 주님을 사랑하면서 믿었다는 정도보다 깊은 뜻을 가집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사랑은 신앙에 나중에 덧붙여지는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신앙이 나오는 근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은 서로 독립된 두 가지라기보다 하나의 생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를 이루고 있었으며, 선을 사랑하는 의지에서 그 선에 속한 진리에 대한 지각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신앙은 어떤 교리 내용을 먼저 배우고 논증하여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고, 그 진리를 살아가는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AC.325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짧은 표현은 바로 이러한 천적 질서를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여기서 창4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처음부터 신앙 자체가 거짓이거나 악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이 자기 생명의 근원인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으로 서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가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나무의 줄기와 뿌리에서 끊어질 때 생명을 잃는 것처럼, 신앙과 진리도 사랑과 선 안에 있을 때 살아 있지만 그것에서 분리되면 본래의 생명을 잃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상태가 가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인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라고 규정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가인을 처음부터 단순히 악이나 거짓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본래 교회 안에 있던 신앙이 사랑에서 구별되기 시작하고, 그 구별이 점차 분리로 굳어져 독립적인 교리가 되어 가는 상태가 가인으로 표상됩니다. 이후 창4에서는 이 분리가 더욱 진행되면서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앞세우고,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친절한 감정이나 몇 가지 구제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으로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행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은 본래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없애야 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아벨을 가인의 형제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AC.325는 앞의 AC.324에서 말한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이 어떻게 생겨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회의 쇠퇴는 언제나 처음부터 노골적인 거짓이 밖에서 들어오는 방식으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참된 것 하나가 전체적인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세울 때에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것이지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되면 질서가 무너집니다.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지만, 선과 삶에서 분리된 진리가 자기 지성과 자기 의를 세우는 수단으로 변하면 가인의 원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다만 이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날 인간의 거듭남에 그대로 시간적인 순서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고 해서 오늘날의 영적 인간도 먼저 완성된 사랑을 가진 뒤에야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갖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시고 선과 진리를 결합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질서는 같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을 단순히 악과 으로 대응시키는 것은 아직 너무 이릅니다. 4의 첫 비극은 아벨이 들에서 죽을 때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본래 하나의 생명을 이루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의 살인은 그 내적인 분리가 끝까지 진행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AC.325는 창4 전체를 읽는 데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줍니다. ‘내가 가진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가, 아니면 그것들과 분리되어 스스로 서려 하고 있는가?4는 이제 그 작은 분리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심화

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 심화 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 심화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에서 특별히 깊이 살펴볼 표현은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첫 문장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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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6, 창4:3-5, 가인의 제물, 아벨의 제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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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4, 창4,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들과 에노스라는 새로운 교회 (AC.324-337)

창4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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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4 심화

1. 4 5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계열

 

 성급한 질문일  있지만, 그리고 이미  차례 거듭 고민했던 질문이지만... 4, 5 시간순으로 읽어야 하나요?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가인 이후  여러 대가 흐르도록 태고교회는 처음엔 어두운 세월을 지내다가  이후 회복된 걸로 보기에는 태고교회라는 위상(?) 어딘가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4 시간순으로 읽으면,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여러 대가 흐르도록 나이만 먹다가 수백, 수천 년이 흐른 후에야 셋이라는 자녀를   되는데... 이건 ... 차라리 4 따로, 5 따로, 그러니까 가인 계열과  계열이 나란히 동시대를 살다가 홍수를 맞이하는, 이런 이해가  나을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4와 창5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4에서는 가인에게서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여러 대가 이어지고, 라멕에게서 다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긴 계보가 모두 소개된 뒤 창4:25에 와서 다시 아담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연대기처럼 직선적인 시간순으로만 읽으면, 마치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지나간 뒤에야 아담과 하와가 셋을 낳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을 해석하는 방식에서는 이러한 계보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개인들의 출생 연대를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과 에녹, 이랏 등의 이름은 말씀의 속뜻에서 특정한 교리와 교회적 상태를 나타내며, 셋과 에노스 및 창5의 여러 이름들 역시 이어지는 교회적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4와 창5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도 먼저 누가 정확히   먼저 태어났는가?보다 말씀이 어떤 교회적 계열과 상태의 연속을 보여 주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4는 특히 태고교회 안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들과 그 변화를 가인으로부터 이어지는 계열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구별되기 시작하고, 그 구별이 분리로 굳어지면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며, 그 뒤에도 그 교리적 상태가 여러 형태로 파생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반면 창4 마지막의 셋과 에노스, 그리고 창5에서 다시 이어지는 계보는 태고교회 안의 또 다른 교회적 계승과 상태의 연속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4 가인 계열이 역사적으로 완전히 끝난 다음 5  계열이 시작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은 한 계열의 영적 역사를 충분히 보여 준 뒤 서술의 초점을 다른 계열로 옮겨 그 계열의 상태들을 다시 처음부터 펼쳐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4와 창5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큰 시대 안에서 전개되는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의 서술로 함께 읽는 것은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여기서 함께 또는 나란히라는 말을 역사적 동시성에 관한 정밀한 연대표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 해석이 직접적으로 밝히는 것은 각 이름이 나타내는 교회적 상태와 그 상태들의 연속이지, 가인 계열의 어느 인물이 셋 계열의 어느 인물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살았는지를 확정하는 연대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계열이 같은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전개되었다는 것과  세대를 일대일로 맞추어 동시대라고 확정한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창4:25에서 셋이 등장하는 것도 훨씬 자연스러워집니다. 이것을 반드시 가인의 여러  후손이 모두 지나간  비로소 셋이 태어났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 없이, 말씀의 서술 초점이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회적 계열에서 셋으로 표상되는 다른 교회적 계열로 옮겨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5에서는 다시 아담에서 시작하여 셋과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이어지는 계열을 하나의 연속된 교회적 역사로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가인 계열을 단순히 악한 계열’, 셋 계열을 선한 계열이라고 나누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처음부터 아무런 진리도 없는 순수한 악을 뜻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이후 점차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서 변질됩니다. 반대로 셋으로 이어지는 계열 역시 아무런 쇠퇴 없이 처음의 가장 순수한 천적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노아까지 이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여러 상태를 거치며 결국 그 시대의 종말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태고교회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는 단지 가장 처음의 순수한 아담 상태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 시작하여 여러 후속 교회와 상태들을 거쳐 그 교회 시대의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큰 흐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매우 높은 천적 상태도 있고, 점차 쇠퇴하는 상태도 있으며, 본래의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적 상태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창1-9의 속뜻을 당시 지상에 살던 모든 사람의 역사적 상태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장들에서 직접 추적하는 것은 무엇보다 교회와 그 교회의 연속적인 상태들입니다. 물론 그 속뜻에 담긴 영적 원리는 오늘의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수 있고, 한 교리나 지식을 전체보다 높일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런 상태에서도 다시 생명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적용과 당시 모든 인류가 똑같은 교회적 상태를 동시에 거쳤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결국 AC.324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두 가지 흐름입니다. 인간 편에서는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고 교리들이 독립하면서 여러 교회적 상태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그 분열과 쇠퇴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섭리가 계속됩니다. 4와 창5를 이러한 관점에서 함께 읽으면, 가인과 아벨, 셋과 에노스, 그리고 창5의 긴 계보는 단순한 고대 가족사의 연속을 넘어 교회가 어떻게 변화하고 쇠퇴하며,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교회의 생명을 이어 가시는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로 열리게 됩니다.

 

 

 

AC.324, 창4,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들과 에노스라는 새로운 교회 (AC.324-337)

창4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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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개요

 

AC.324

여기서는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 이단들(heresies) 다루며, 후에 에노스(Enosh) 하는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진 것에 관하여 다룹니다. Doctrines separated from the church, or heresies, are here treated of; and a new church that was afterwards raised up, called Enosh.

 

해설

AC.324는 한 문장으로 된 짧은 글이지만 창4 전체의 속뜻을 여는 중요한 개요입니다. 겉으로 보면 창4는 가인과 아벨의 출생과 제물, 아벨의 죽음, 가인의 추방과 후손들, 라멕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마지막의 셋과 에노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을 단순히 최초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연대기로만 읽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점차 구별되고 마침내 분리되면서 여러 교리적, 교회적 상태가 생겨나는 과정과, 그 쇠퇴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지는 과정을 다룹니다.

 

먼저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사랑과 신앙은 서로 독립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생명 안에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하였으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와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하면서 본래 함께 있던 것들이 점차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4에서 가인은 이러한 과정 가운데 나타나는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하게 됩니다.

 

여기서 heresies이단들이라고 번역할 때에는 오늘날 한국 교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이단이라는 말과 완전히 같은 의미로만 이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324의 관심은 어느 현대 교단이나 집단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래 교회의 하나 된 생명에서 어떤 교리가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것이 되는 현상입니다. 이후 설명에서 보게 되듯 가인의 문제도 신앙 자체가 악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마침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분리구별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구별될 수 있으며 실제로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집니다. 그러나 구별된다고 해서 서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을 때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4는 이 둘의 구별이 어떻게 분리로 변하고, 그 분리가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는지를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여 줍니다.

 

그리고 AC.324의 후반부는 이 장 전체를 읽는 데 또 하나의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교회에서 여러 교리들이 분리되어 나오고 이전의 상태가 쇠퇴해 가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에노스라 하는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집니다. 4의 속뜻에는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분리와 쇠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교회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새로운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함께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4:26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은 바로 이 에노스와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와 똑같은 형태로 되돌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달라진 인간의 상태 가운데 새로운 교회적 형태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노스의 등장은 단순히 족보에 한 사람이 더 추가되었다는 의미를 넘어, 한 교회적 상태가 쇠퇴하는 가운데 또 다른 교회적 상태가 시작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점에서 AC.324는 창3의 마지막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3 마지막에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나가게 되었지만 생명나무의 길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그 길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창4에서는 타락 이후의 인간과 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며, 그 가운데서도 주님과 인간의 연결이 어떻게 보존되어 가는지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창4를 읽을 때 가인 계열을 단순히 나쁜 사람들의 족보’, 셋과 에노스를 좋은 사람들의 족보로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이름들은 말씀의 속뜻에서 교리와 교회의 여러 상태를 표상합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어떤 교리적 상태가 어떻게 발전하고 변질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의 끝에서 왜 새로운 교회인 에노스가 등장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AC.324는 결국 창4 전체에 두 개의 큰 흐름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인간이 사랑과 신앙을 분리하고, 부분적인 것을 전체보다 앞세우면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흐름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한 인간의 쇠퇴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새로운 교회를 일으켜 세우시는 흐름입니다. 앞으로 AC.325-337은 창4의 각 절을 먼저 개괄하면서 바로 이 두 흐름을 차례로 펼쳐 보이게 됩니다.

 

심화

1. 4 5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계열

 

AC.324 심화 1, 창4와 창5는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셋 계열

AC.324 심화 1. 창4와 창5는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셋 계열좀 성급한 질문일 수 있지만, 그리고 이미 몇 차례 거듭 고민했던 질문이지만... 창4, 창5를 시간순으로 읽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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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창4:1-2, 가인과 아벨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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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3, 창4 앞, 사후의 삶을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사례를 이 장 끝에서 살펴봅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3이 장의 끝에서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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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3

장의 끝에서는,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n of those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d thought otherwise.

 

해설

AC.323은 한 문장으로 된 매우 짧은 글이지만, 앞의 AC.320-322를 마무리하면서 이 장 끝에 나올 실제 사례들을 미리 예고하는 연결고리입니다. 여기서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이란 앞에서 설명한 사후의 인간 상태를 지상에 있을 때 믿지 않았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AC.320에서는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간 직후에도 자신이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AC.321에서는 영의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탁월하다고 했으며, AC.322에서는 그것을 시각과 청각, 후각과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언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AC.323은 이제 이러한 사실을 지상에서 믿지 않았던 사람들의 사례를 이 장 끝에서 보여 주겠다고 예고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가 사후세계에 관하여 말하는 방식에서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앞의 AC.322에서 자신이 수천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영들의 감각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섬세하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후의 인간을 전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실제로 저세상에서 무엇을 경험하는지를 사례로 제시하겠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설명을 추상적인 교리적 진술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자신이 경험했다고 말하는 구체적인 사례로 이어 가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와 다르게 생각했다는 것은 단순히 사후세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는 뜻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의 문맥을 따르면, 사람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며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능력들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완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경우까지 포함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23은 또한 AC.320-322가 창세기 4장의 속뜻과 직접 연결된 본문이 아니라, 4를 시작하기 전에 삽입된 사후세계에 관한 연속 기사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이 짧은 기사는 여기서 일단 멈추지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창4의 속뜻을 설명한 뒤 장의 끝에서 다시 이 주제로 돌아와, 앞에서 말한 사실들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의 사례를 제시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323의 역할은 새로운 사후세계 교리를 하나 더 가르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의 세 글에서 말한 것을 기억하게 하면서 뒤에서 실제 사례를 통해 다시 확인하겠다고 약속하는 데 있습니다. AC.320-323을 통해 먼저 붙들어야 할 핵심은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육체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소멸이 아니며, 사람은 사후에도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짧은 사후세계 기사를 잠시 내려놓고, AC.324부터 본격적으로 창세기 4장의 속뜻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AC.324, 창4,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들과 에노스라는 새로운 교회 (AC.324-337)

창4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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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2, 창4 앞, 시각과 청각, 후각과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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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2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 그러니까 못 듣고, 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 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육체적 장애를 갖고 살아가시는 분들에 대해서 좀 깊이 다루어 주세요.

 

 

AC.322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농인교회와 농인목회, 그리고 지상에서 듣고 말하는 육체적 기능에 제한을 지닌 채 살아가는 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 한국 교계에서는 오랫동안 농아인교회’, ‘농아목회라는 명칭을 사용해 왔으므로 그 현장 용어를 존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분들의 본질을 이해할 때에는 육체적 청각과 음성언어의 제한을 영 자체의 결핍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AC.322의 핵심은 감각 능력이 육체 안에서 나타나기는 하지만 감각하는 생명 자체가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육체 안에서 살 때에도 실제로 감각하는 것은 영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청각기관의 제한으로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음성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이나 생각하고 사랑하고 다른 사람과 교통하는 인간적 능력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말하는 육체적 기능이 뛰어난 사람을 더 온전한 사람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사람의 본질은 자연적 육체의 기능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의지와 이해, 사랑과 생각을 지닌 영적 존재이며, 자연적 육체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활동하는 데 필요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장애가 그 사람의 영적 가치나 인간으로서의 온전함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AC.322는 농인들의 사후 상태를 생각하는 데에도 중요한 원리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육체를 벗은 영에게 시각과 청각과 촉각이 있으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도 지상에서보다 훨씬 더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AC.322가 농인의 사후 경험을 별도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원리에 따른다면 지상에서 자연적 청각에 제한이 있었다는 이유로 사후에도 그 사람의 영적 교통 능력이 제한된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육체적 기관의 제한과 영 자체의 능력은 서로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농인은 사후에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농인은 지금 이 땅에서도 온전한 인간입니다. 수어는 부족한 몸짓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 신앙과 예배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청인이 음성언어로 말씀을 받고 기도하듯 농인은 수어와 시각적 언어를 통하여 말씀을 받고 기도하며 다른 사람과 깊이 교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어로 드리는 기도와 예배를 음성으로 드리는 기도와 예배보다 낮은 것으로 볼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것 역시 육체적 청각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말씀을 영적으로 듣는다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육체의 귀로 말씀을 듣고도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듣지 않을 수 있으며,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하더라도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랑과 삶으로 응답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듣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청각과 영적 청각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말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교통을 음성을 내는 행위에만 한정할 수 없습니다. 농인이 손과 얼굴과 몸의 움직임으로 수어를 사용할 때 그는 분명히 자신의 생각과 애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오히려 AC.322에서 말하는 인간의 교통이 단순한 육체적 소리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소리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표현되고 전달되는 생각과 애정입니다.

 

따라서 농인목회도 단순히 청인의 음성 설교를 수어로 옮겨 주는 보조적 사역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농인의 언어와 문화와 삶의 경험 안에서 말씀이 받아들여지고, 공동체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실제 삶으로 나타나도록 섬기는 온전한 목회입니다. 교회 역시 농인을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기보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씀을 받고 표현하는 같은 교회의 지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육체적 장애를 개인의 죄나 신앙의 부족과 직접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계의 몸은 여러 자연적 조건과 원인 아래 놓여 있으며, 육체의 기능만으로 사람의 내적인 상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이 어떤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주님과 이웃에게 어떻게 응답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인을 위해 기도할 때에도 신체적 치유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치유를 구하는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그 사람이 지금도 온전한 인격이며 그의 언어와 삶과 신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고립된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교통하고, 배제되던 사람이 한 지체로 받아들여지며, 자신의 언어로 말씀을 받고 주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회복입니다.

 

AC.322의 마지막 말처럼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합니다.이것을 단순히 청력이나 시력 같은 자연적 감각기관의 성능을 평가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귀가 밝아도 이웃의 아픔을 듣지 못할 수 있고,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과 필요에 깊이 응답할 수 있습니다. 영적 생명의 깊이는 청력의 수치나 발음의 정확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받아들이며 주님과 이웃에게 어떻게 응답하는가와 관계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22는 농인에게 언젠가 육체의 제한이 없어질 것이니 지금을 견디라고만 말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육체의 귀와 음성을 인간의 온전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말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듣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참으로 말하는 것은 받은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농인교회와 농인목회는 바로 그 영적인 듣기와 말하기가 수어와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소중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22, 창4 앞, 시각과 청각, 후각과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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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

영들이 육체 안에서 때보다 훨씬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반대임을 알고 있습니다. 영의 본성에 관하여 미리 형성된 관념 때문에 이것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저세상에 들어갔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게 하십시오. 그러면 믿지 않을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영들은 시각(sight)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운데 살기 때문인데, 선한 영들과 천사적 영들, 그리고 천사들은 세상의 한낮 정오의 빛으로는 거의 비교할 없을 만큼 훨씬 밝은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들이 머물며 사물을 보는 빛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영들은 또한 청각(hearing) 가지고 있으며, 청각 또한 육체의 청각으로는 비교할 없을 만큼 섬세합니다. 그들은 여러 동안 거의 끊임없이 저와 말해 왔습니다. 다만 그들의 말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그들에게는 후각(the sense of smell) 있으며, 이에 관해서도 역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다루고자 합니다. 그들에게는 지극히 섬세한 촉각(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 있습니다. 지옥에서 겪는 고통과 고문도 촉각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감각은 촉각과 관련되며, 다른 감각들은 단지 촉각의 여러 차이와 다양한 형태일 뿐입니다. 그들은 또한 육체 안에 있을 가졌던 것들과는 비교할 없는 욕망과 애정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Beware of the false notion that spirits do not possess far more exquisite sensations than during the life of the body. I know the contrary by experience repeated thousands of times. Should any be unwilling to believe this, in consequence of their preconceived ideas concerning the nature of spirit, let them learn it by their own experience when they come into the other life, where it will compel them to believe. In the first place spirits have sight, for they live in the light, and good spirits, angelic spirits, and angels, in a light so great that the noonday light of this world can hardly be compared to it. The light in which they dwell, and by which they see,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Spirits also have hearing, hearing so exquisite that the hearing of the body cannot be compared to it. For years they have spoken to me almost continually, but their spee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They have also the sense of smell, whi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treated of hereafter. They have 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 whence come the pains and torments endured in hell; for all sensations have relation to the touch, of which they are merely diversities and varieties. They have desires and affections to which those they had in the body cannot be compared,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hereafter. Spirits think with much more clearness and distinctness than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영들은 육체 안에서 때보다 훨씬 맑고 분명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의 생각에 속한 하나의 관념 안에는 세상에서 가졌던 개의 관념 안에 들어 있던 것보다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하게 서로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그것 가운데 무엇이라도 지각할 있다면 크게 놀랄 것입니다. 요컨대 영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 그리고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훨씬 완전한 방식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서 때에도 실제로 감각한 것은 영이었음을 인정하고 지각합니다. 감각 능력이 육체 안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것이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어 버리면 감각은 훨씬 섬세하고 완전해집니다. 생명은 감각의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감각이 없다면 생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관찰할 있는 사실입니다. There are more things contained within a single idea of their thought than in a thousand of the ideas they had possessed in this world. They speak together with so much acuteness, subtlety, sagacity, and distinctness, that if a man could perceive anything of it, it would excite his astonishment. In short, they possess everything that men possess, but in a more perfect manner, except the flesh and bones and the attendant imperfections. They acknowledge and perceive that even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it was the spirit that sensated, and that although the faculty of sensation manifested itself in the body, still it was not of the body; and therefore that when the body is cast aside, the sensations are far more exquisite and perfect. Life consists in the exercise of sensation, for without it there is no life, and such as is the faculty of sensation, such is the life, a fact that anyone may observe.

 

해설

AC.322는 앞의 AC.321에서 간략하게 제시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펼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이 육체를 벗으면 감각을 잃거나 희미한 존재가 된다는 생각을 그릇된 생각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수천 번에 걸친 경험을 근거로 오히려 그 반대라고 증언합니다. 영들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접촉하며, 욕망하고 사랑하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더구나 이러한 능력들은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완전하다고 합니다.

 

이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로 감각하는 것은 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입니다. 우리는 눈이 보고 귀가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육체의 감각기관은 자연계의 것을 인간의 내적인 생명에 전달하는 기관입니다. 감각 능력이 육체를 통하여 나타나기는 하지만 감각하는 생명 자체가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육체가 죽는다고 인간의 감각까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적 육체의 제약을 벗으면서 영의 감각은 더욱 섬세하고 완전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시각을 예로 듭니다. 영들은 빛 가운데 살며, 특히 선한 영들과 천사적 영들, 천사들은 이 세상의 한낮과 거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 청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거의 끊임없이 대화했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청각이 육체의 청각보다 훨씬 섬세하다고 증언합니다. 후각과 촉각 역시 존재하며, 특히 모든 감각이 어떤 의미에서는 촉각과 관계된다는 흥미로운 설명도 덧붙입니다. 다만 이러한 각각의 감각과 영계의 빛과 언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이후에 하겠다고 여러 차례 예고합니다.

 

여기서 감각만큼 중요한 것이 욕망과 애정입니다. 영들은 육체 안에서 가졌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욕망과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후의 인간이 생각만 남은 추상적인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생명에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본질적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육체의 죽음이 그러한 애정의 생명을 없애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후에도 인간은 감각하고 생각할 뿐 아니라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계속 살아갑니다.

 

사고와 언어에 관한 설명은 더욱 놀랍습니다. 영들의 하나의 관념에는 지상에서 가졌던 천 개의 관념보다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은 훨씬 더 맑고 분명하며, 서로 말할 때에도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히 사후에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의 육체와 그 제약 안에서 표현되던 인간의 내적인 생각이 영의 상태에서는 훨씬 풍부하고 직접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인상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영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 그리고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훨씬 완전한 방식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20부터 계속된 설명의 핵심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사후의 인간은 지상 인간에게서 무엇인가가 크게 빠져나간 불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원하고 사랑하는 온전한 사람임을 경험합니다.

 

마지막으로 생명은 감각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AC.322 전체를 압축합니다. 여기서 감각은 단순히 육체의 오감만을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 글 전체가 시각과 청각뿐 아니라 욕망과 애정, 사고와 언어까지 함께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느끼고 원하고 사랑하고 생각하며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AC.320-322를 함께 읽으면 하나의 흐름이 선명해집니다. AC.320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AC.321에서는 사후의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이 오히려 더 탁월하다고 했고, AC.322에서는 그것을 구체적인 감각과 애정과 사고의 경험으로 펼쳐 보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반복해서 전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죽음은 인간의 생명이 희미해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육체를 벗은 뒤에도 인간은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사랑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AC.322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AC.322 심화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 그러니까 못 듣고, 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 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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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3, 창4 앞, 사후의 삶을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사례를 이 장 끝에서 살펴봅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3이 장의 끝에서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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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1, 창4 앞, 육체를 벗은 뒤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은 더욱 뛰어납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 기능을 누리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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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이 육체 안에서 때보다 훨씬 뛰어난 감각 기능을 누리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태는 거의 비교할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영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찰하는 능력을 허락하시기 전까지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A second general fact is that a spirit enjoys much more excellent sensitive faculties, and far superior powers of thinking and speaking, than when living in the body, so that the two states scarcely admit of comparison, although spirits are not aware of this until gifted with reflection by the Lord.

 

해설

AC.321은 앞의 AC.320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AC.320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이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AC.321에서는 사후의 삶이 단지 지상 삶의 의식이 그대로 계속되는 정도가 아니라, 감각과 생각과 말의 능력에 있어서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가 상태를 거의 비교할 없을 정도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이것은 사후의 인간을 희미한 의식이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관념과 정반대입니다. 사람이 육체를 벗었다고 해서 감각과 사고가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으로서 감각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이 훨씬 더 탁월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 AC.322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자신의 반복된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영들 자신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능력이 그렇게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320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라는 의식의 연속성을 경험합니다.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기 때문에 자신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자신의 감각과 사고가 훨씬 더 탁월해졌음에도 그것을 당연한 자신의 상태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이 이 사실을 깨닫는 것도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찰하는 능력을 허락하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자기 상태를 돌아보고 그것을 이전 상태와 비교하여 알아차리는 것 역시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생명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끼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생명과 그것을 인식하는 능력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AC.320AC.321을 함께 놓으면 사후세계에 관한 매우 중요한 그림이 나타납니다. 죽음 이후에도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계속 살아가며, 그 연속성이 너무 자연스러워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삶은 지상에서보다 희미해진 삶이 아니라, 감각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에 있어서 오히려 훨씬 더 탁월한 삶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의식과 인격이 흐려져 사라져 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전하는 증언입니다.

 

다만 AC.321에서는 아직 이러한 차이가 왜 생기는지, 각각의 감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지는지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AC.322에서 훨씬 구체적으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충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의 인간은 지상의 인간보다 덜 인간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이 더욱 탁월한 상태에서 계속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이 점은 결국 우리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만일 육체가 죽은 뒤에도 감각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인간 자신이 계속 살아가며, 오히려 그러한 능력이 더욱 탁월해진다면 인간의 본질을 자연계의 육체에만 둘 수는 없습니다. AC.321은 그 사실을 긴 논증으로 설명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영들과 함께하면서 거듭 경험한 하나의 일반적인 사실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다음 AC.322에서는 그 증언을 더욱 구체적인 경험으로 펼쳐 보이게 됩니다.

 

 

 

AC.322, 창4 앞, 시각과 청각, 후각과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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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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