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11 심화

3.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졌을까?’

 

11에서는 먹지 말라는 명령만큼이나 만지지 말라는 명령이 반복됩니다. 특히 부정한 짐승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해지고, 그것을 옮기는 사람은 옷까지 빨아야 했습니다. 먹지도 않았는데 단지 접촉했다는 이유로 왜 부정해졌을까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94(9:3)는 이 문제에 직접적인 단서를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는 이 좋은 의미에서는 선한 애정 안에 있는 자연적 즐거움을 의미하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proprium과 악한 욕망에서 나오는 더러운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레11:27, 29-33의 부정한 기는 것들을 직접 언급하면서, 이런 것들이 악한 욕망에서 나오는 더러운 즐거움을 표상했기 때문에 당시 표상교회에서는 그것을 만지는 것까지 부정하게 여겼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접촉입니다. 인간은 어떤 악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고 해서 그 악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악한 욕망이나 거짓을 마음 가까이에 두고 반복해서 바라보고 즐기다 보면 그것이 점차 우리의 애정과 생각에 영향을 줍니다. 처음에는 단지 접촉하는 것처럼 보여도 계속 가까이하면 어느 순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994가 강조하는 것은 그 안의 즐거움입니다. 악은 언제나 처음부터 무섭고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재미있고 달콤하고 만족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험담을 듣는 즐거움, 복수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느끼는 만족, 음란한 생각의 쾌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낫다는 것을 확인할 때의 기쁨도 처음에는 작은 즐거움처럼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 안에 어떤 애정이 들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원하지 않는 악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오르거나 유혹을 받는 것 자체가 곧 그 악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혹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여 즐기고 의도하느냐, 아니면 그것이 악임을 알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느냐입니다. 악이 문 앞에 오는 것과 문을 열어 안으로 들이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또한 이 말씀을 사람 자체에 적용해서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면 나도 더러워진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영적으로 피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악과 거짓입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면서도 그 사람을 지배하는 악을 악으로 분별할 수 있게 합니다.

 

11에서 부정해진 사람이 영원히 부정한 채 남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옷을 빨고 저녁까지 기다린 뒤 다시 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악과 거짓의 영향이 인간에게 들어올 수 있지만 주님의 진리를 통해 다시 정결하게 될 수 있다는 큰 원리와 잘 어울립니다. 거듭남은 한 번도 더러워지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더러움을 깨닫고 계속 씻김을 받는 삶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레11의 접촉 규정은 인간의 마음이 무엇과 가까이하고 무엇을 즐기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생각과 욕망과 정보와 영상과 이야기에 접촉합니다. 그 모든 것을 마음 안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것은 접촉하는 순간부터 그것이 내 애정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 살펴야 합니다.

 

거듭남에는 먹지 않는 뿐 아니라 만지지 않는 도 있습니다. 어떤 악은 충분히 경험해 본 뒤 판단하겠다고 가까이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지혜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분별은 무엇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뿐 아니라 무엇과 마음의 접촉을 끊을 것인가까지 포함합니다. 11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바로 그 마음의 경계까지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SWC.11 심화 3)

 

 

 

SWC.레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SWC.레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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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1 심화2, ‘왜 기어 다니는 곤충 중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을까?’

SWC.레11 심화2. ‘왜 기어 다니는 곤충 중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을까?’레11의 음식법 가운데 상당히 뜻밖의 규정이 하나 있습니다.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일반적으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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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어 다니는 곤충 메뚜기 종류는 먹을 있었을까?’

 

11의 음식법 가운데 상당히 뜻밖의 규정이 하나 있습니다.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일반적으로 가증하게 여기라고 하시면서도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은 먹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메뚜기와 베짱이와 귀뚜라미와 팥중이 종류가 예외가 됩니다. 왜 이런 작은 차이가 정함과 부정함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놀라울 만큼 직접적인 설명을 남겼습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543(9:3)은 바로 레11:20-22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런 메뚜기 종류를 먹도록 허용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다리는 영적 선과 결합된 자연적 선을 의미하고, ‘은 그 선에서 나오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에서 나오는 진리는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결합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곤충을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원리를 보여 줍니다. 메뚜기는 땅 가까이 사는 낮은 생물입니다. 가장 높은 천적인 것을 직접 표상하는 동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선과 결합되어 있고, 거기에서 자연적인 진리가 나온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적인가 영적인가의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 자연적 인간은 제거되어야 할 인간이 아닙니다. 자연적 인간도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직업과 돈과 음식과 휴식과 인간관계와 일상의 즐거움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지배되는가, 아니면 영적인 선과 체어리티를 섬기는가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버는 것은 매우 자연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돈 자체를 사랑하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 한다면 자연적인 것이 자기애와 결합한 것입니다. 반대로 가족을 책임지고 다른 사람을 돕고 선한 쓰임을 하기 위해 정직하게 일하여 돈을 번다면 같은 자연적 활동이 영적인 선과 연결됩니다. 음식과 휴식과 취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이 삶의 목적이 될 때와 선한 쓰임을 위한 몸과 마음을 돌보는 수단이 될 때는 그 내적 질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 작은 곤충의 뛰는 다리는 자연적인 삶을 무조건 버리지 말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품고 있습니다. 다만 물리적으로 위로 뛰는 행위 자체를 영적 상승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핵심은 영적 선과 결합된 자연적 선에서 나오는 자연적 진리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을 세상에서 떼어내어 순수하게 영적인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평범한 자연적 삶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과정입니다. 일하고, 먹고, 쉬고, 가족을 돌보고, 사람을 만나고, 작은 친절을 행하는 모든 일이 체어리티와 연결될 때 자연적인 삶도 천국의 질서를 섬기게 됩니다.

 

따라서 레11의 메뚜기 규례는 뜻밖의 희망을 보여 줍니다. 땅에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이라도 영적인 선과 결합되어 그 선에서 진리가 나오면 인간에게 받아들여져 삶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연적인 삶을 버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삶까지 거듭나게 하십니다. (SWC.11 심화 2)

 

 

 

SWC.레11 심화3, ‘왜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졌을까?’

SWC.레11 심화3. ‘왜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졌을까?’ 레11에서는 ‘먹지 말라’는 명령만큼이나 ‘만지지 말라’는 명령이 반복됩니다. 특히 부정한 짐승의 주검을 만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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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1 심화1,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왜 나뉘었을까? - 음식법에 감추어진 애정의 분별’

SWC.레11 심화1.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왜 나뉘었을까? - 음식법에 감추어진 애정의 분별’ 레11을 읽으면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은 ‘하나님께서는 왜 어떤 동물은 정하다고 하고 어떤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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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나뉘었을까? - 음식법에 감추어진 애정의 분별

 

11을 읽으면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동물은 정하다고 하고 어떤 동물은 부정하다고 하셨을까?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물 자체에 도덕적인 선악이 있다는 뜻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분명합니다. 동물 자체가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교회가 표상교회였기 때문에 각 동물이 인간 안의 서로 다른 애정을 표상했던 것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719(7:2)는 정한 짐승이 선한 애정을, 부정한 짐승이 악한 애정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정한 짐승들이 온순하고 선하며 유용한 성질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 부정한 짐승들은 그 반대의 성질을 표상합니다. 중요한 것은 동물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물이 표상하는 인간의 애정입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650(11:7)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레11의 음식법 자체를 직접 언급합니다. 당시 교회가 표상교회였기 때문에 짐승에 관한 법 하나하나에도 표상적 의미가 있었으며, 먹을 수 있는 짐승은 선을, 먹을 수 없는 짐승은 악을 의미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레11의 정결 규례는 고대의 음식 목록을 넘어 인간 안의 선한 애정과 악한 애정을 분별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먹는다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음식은 몸 밖에 있을 때는 아직 내 몸이 아니지만 먹으면 내 몸 안으로 들어와 나의 일부가 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애정이나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 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기며 의도할 때 점차 자기 것으로 삼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정한 것을 먹으라고 하고 부정한 것은 먹지 말라고 합니다.

 

이 원리는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악한 생각이나 욕망이 떠오르지 않는 상태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유혹 속에서는 원하지 않는 생각과 욕망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느냐, 아니면 주님의 진리 앞에서 그것이 악임을 보고 거절하느냐입니다. 우리 앞에 음식이 놓였다고 모두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듯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실패를 들었을 때 은근한 즐거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즐거움을 계속 되새기며 즐긴다면 그것을 먹는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누군가를 돕고 싶은 마음, 진실을 알고 싶은 마음, 용서하고 싶은 마음, 주님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런 선한 애정은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삶의 일부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레11의 내적 의미를 살아간다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음식 목록을 그대로 복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루 동안 내 마음에 들어오는 수많은 애정과 생각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것이 즐거운가?가 아니라 즐거움은 어떤 사랑에서 오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이런 의미에서 영적인 식생활과 같습니다. 무엇이든 마음이 원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무엇이 생명에 속하고 무엇이 죽음에 속하는지를 분별하여 생명에 속한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11의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오늘도 우리 마음의 식탁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먹고 있는가? 어떤 애정과 생각을 것으로 만들고 있는가?이것이 음식법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SWC.11 심화 1)

 

 

 

SWC.레11 심화2, ‘왜 기어 다니는 곤충 중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을까?’

SWC.레11 심화2. ‘왜 기어 다니는 곤충 중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을까?’레11의 음식법 가운데 상당히 뜻밖의 규정이 하나 있습니다.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일반적으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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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SWC.레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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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짐승 너희가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3모든 짐승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4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낙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5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6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7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9물에 있는 모든 중에서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모든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10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물에서 사는 모든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11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고기를 먹지 말고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12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 13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14말똥가리와 말똥가리 종류와 15까마귀 종류와 16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17올빼미와 가마우지와 부엉이와 18 올빼미와 사다새와 너새와 19황새와 백로 종류와 오디새와 박쥐니라 20날개가 있고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로되 21다만 날개가 있고 발로 기어 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22 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팥중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23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다니는 곤충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 24이런 것은 너희를 부정하게 하나니 누구든지 이것들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25 주검을 옮기는 모든 자는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26굽이 갈라진 모든 짐승 중에 쪽발이 아닌 것이나 새김질 아니하는 것의 주검은 네게 부정하니 만지는 자는 부정할 것이요 27 발로 다니는 모든 짐승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은 네게 부정하니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28 주검을 옮기는 자는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그것들이 네게 부정하니라 29땅에 기는 길짐승 중에 네게 부정한 것은 이러하니 두더지와 쥐와 도마뱀 종류와 30도마뱀붙이와 육지 악어와 도마뱀과 사막 도마뱀과 카멜레온이라 31모든 기는 이것들은 네게 부정하니 주검을 만지는 모든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32이런 어떤 것의 주검이 나무 그릇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자루에든지 무엇에 쓰는 그릇에든지 떨어지면 부정하여지리니 물에 담그라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할 것이며 33그것 어떤 것이 어느 질그릇에 떨어지면 속에 있는 것이 부정하여지나니 너는 그릇을 깨뜨리라 34먹을 만한 축축한 식물이 거기 담겼으면 부정하여질 것이요 그같은 그릇에 담긴 마실 것도 부정할 것이며 35이런 것의 주검이 물건 위에 떨어지면 그것이 모두 부정하여지리니 화덕이든지 화로이든지 깨뜨려버리라 이것이 부정하여져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 되리라 36샘물이나 물이 고인 웅덩이는 부정하여지지 아니하되 주검에 닿는 것은 모두 부정하여질 것이요 37이것들의 주검이 심을 종자에 떨어지면 그것이 정하거니와 38만일 종자에 물이 묻었을 때에 그것이 위에 떨어지면 너희에게 부정하리라 39너희가 먹을 만한 짐승이 죽은 때에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40그것을 먹는 자는 옷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주검을 옮기는 자도 그의 옷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41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지니 42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것들은 가증함이니라 43너희는 기는 기어다니는 때문에 자기를 가증하게 되게 하지 말며 또한 그것 때문에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하지 말라 44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46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길짐승에 대한 규례니 47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 (11)

 

해설

레위기 11장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짐승을 먹을 수 있고 어떤 짐승은 먹을 수 없는지, 어떤 물고기와 새와 곤충과 길짐승이 정하고 부정한지, 그 주검을 만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길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장의 마지막에 이 모든 규례의 목적이 밝혀집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그리고 다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따라서 레11의 중심은 음식 자체가 아니라 거룩함이며, 그 거룩함을 위해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음식법의 기본 원리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650(11:7)은 레11의 규례를 직접 언급하면서, 당시 교회가 표상교회였기 때문에 짐승에 관한 법들도 모두 영적인 것을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먹을 수 있는 짐승은 선을, 먹을 수 없는 짐승은 악을 의미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719(7:2)도 정한 짐승은 선한 애정을, 부정한 짐승은 악한 애정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동물 자체가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악해서가 아니라, 각각의 동물이 가진 성질이 인간 안의 서로 다른 애정과 욕망을 표상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먹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먹은 음식이 몸 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일부가 되듯, 말씀에서 먹는 것은 어떤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삼는 것, 곧 삶에 결합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레11은 단순히 어떤 동물을 먹어도 되는가?를 가르치는 장이 아닙니다. 거듭남의 관점에서는 나는 무엇을 안으로 받아들여 삶의 일부로 만들고 있는가?를 묻는 장입니다. 인간은 날마다 수많은 생각과 지식과 욕망과 즐거움에 접촉하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거절하면서 자기 내면을 형성합니다.

 

3절로 8절에서는 육지 짐승의 두 가지 기준이 제시됩니다.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동시에 새김질해야 합니다. 낙타와 사반과 토끼는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고, 돼지는 굽은 갈라졌지만 새김질하지 않으므로 부정합니다. 여기에서 새김질은 정확히 무엇이고 갈라진 굽은 정확히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기지만, 스베덴보리가 레11의 이 두 조건을 각각 특정한 영적 의미로 직접 해설한 충분히 강한 원전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새김질은 말씀 묵상, 굽은 행함처럼 그럴듯한 대응을 만들어 내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본문 자체가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어느 한 조건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에서도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분리되어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레11의 두 조건 역시 적어도 한쪽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영적 질서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세부 대응은 보류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9절로 19절에서는 물속 생물과 새로 범위가 넓어집니다. 물속 생물 가운데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만 먹을 수 있고, 이어 독수리와 솔개와 까마귀와 올빼미 등 먹지 못할 새들이 열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물고기는 일반적으로 자연적 인간 안의 지식과 기억지식에 연결되고, 새는 생각과 지적인 것들에 연결됩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지식과 생각 역시 분별되어야 한다는 큰 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이것, 비늘은 저것’, 또는 레11에 열거된 새 하나하나를 특정한 악이나 거짓에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는 것은 직접 원전이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 상응을 만들어 내는 일이 될 수 있으므로 하지 않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지식이 영적 양식이 되는 것도 아니고,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20절로 23절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예외가 나옵니다. 날개가 있으면서 기어 다니는 곤충은 일반적으로 먹지 못하지만, 발 위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AE.543(9:3)은 바로 레11:20-22를 인용하면서, ‘다리는 영적 선과 결합된 자연적 선을, ‘은 그 선에서 나오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선에서 나온 진리는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결합되어야 하므로 이런 곤충은 먹도록 허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것이라고 해서 그 자체로 낮거나 악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삶이 영적 선과 연결되어 있을 때 그것 역시 거듭난 인간의 삶에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24절 이후에는 먹음뿐 아니라 접촉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부정한 짐승의 주검을 만지거나 옮기면 저녁까지 부정하게 되고, 어떤 경우에는 옷을 빨아야 합니다. AC.994(9:3)는 레11:27, 29-33의 기는 것들을 직접 언급하면서, ‘기는 이 좋은 의미에서는 선한 애정에서 나오는 자연적 즐거움을, 반대 의미에서는 proprium과 악한 욕망에서 나오는 더러운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당시 표상교회에서는 그러한 것을 표상하는 부정한 기는 것과 접촉하는 것까지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적 즐거움 자체가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즐거움 안에 어떤 애정이 들어 있는가입니다. 음식과 휴식과 아름다움과 몸의 감각 같은 자연적인 즐거움도 선한 쓰임과 체어리티에 연결되면 좋은 것이지만,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지배되면 인간을 가장 낮은 감각적인 것에 붙잡아 둘 수 있습니다.

 

32절로 40절에서는 부정한 주검이 그릇이나 의복이나 음식과 물에 접촉했을 때의 규례가 이어집니다. 어떤 것은 물에 담가 씻지만 질그릇은 깨뜨려야 하고, 샘이나 물이 고인 웅덩이는 부정해지지 않으며, 마른 종자와 물 묻은 종자의 경우도 다르게 취급됩니다. 이런 세부 규례 하나하나에도 표상적 의미가 있었겠지만,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해설이 확보되지 않은 부분까지 세밀한 상응으로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전체 계열에서는 한 가지가 분명합니다. 부정한 것이 인간의 삶에 접촉했을 때 그것을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씻고, 분리하고, 때로는 버리는 정결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아는 데서 끝나지 않고 실제로 악과 거짓의 영향을 제거하는 과정까지 포함합니다.

 

41절로 43절에서는 다시 기는 이 강조됩니다.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 또는 여러 발로 기어 다니는 것을 먹지 말라고 하시며, ‘그것 때문에 자기를 가증하게 되게 하지 말며 또한 그것 때문에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AC.994가 설명하듯 악한 의미의 기는 것은 proprium에서 나오는 더러운 감각적 즐거움과 욕망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문제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감각적 즐거움이 삶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선과 진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거듭남은 자연적인 것을 파괴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의 질서 아래 놓이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44절과 45절에서 이 모든 규례의 이유가 마침내 밝혀집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인간은 자기 힘으로 거룩함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거룩함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거룩해진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선과 진리에 반대되는 악과 거짓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함으로써 주님의 것이 자기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11먹으라먹지 말라는 결국 거룩함의 두 방향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받아들이고, 그분에게 반대되는 것은 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45절은 이 거룩함을 출애굽과 연결합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여호와라.이스라엘이 정결 규례를 완벽하게 지켰기 때문에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여호와께서 그들을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셨고, 그 후 구원받은 백성에게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정결해져 주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인간을 악과 거짓의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 후 선과 악을 분별하며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도록 계속 인도하십니다.

 

마지막 47절은 그래서 레11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이것은 바로 앞 레10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10에서 제사장에게 요구된 것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는 이었습니다. 그런데 레11에서는 그 분별이 제사장과 성소를 넘어 백성의 식탁과 손과 그릇과 일상생활 전체로 내려옵니다. 거룩함은 제단 앞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레11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가장 깊은 질문은 어떤 음식을 먹어도 되는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어떤 애정을 즐기고, 어떤 생각을 반복하며, 어떤 지식을 자기 것으로 삼고, 어떤 감각적 즐거움을 사랑하는지가 결국 우리의 내면을 형성합니다. 거듭남은 모든 것을 무차별하게 받아들이는 삶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는 받아들이고 악과 거짓은 거절하는 분별의 삶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11의 길고 세밀한 음식법은 결국 이 한 말씀을 인간의 가장 평범한 일상까지 내려보낸 것입니다. (SWC.11 해설)

 

심화

1.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나뉘었을까? - 음식법에 감추어진 애정의 분별

 

SWC.레11 심화1,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왜 나뉘었을까? - 음식법에 감추어진 애정의 분별’

SWC.레11 심화1.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왜 나뉘었을까? - 음식법에 감추어진 애정의 분별’ 레11을 읽으면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은 ‘하나님께서는 왜 어떤 동물은 정하다고 하고 어떤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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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어 다니는 곤충 메뚜기 종류는 먹을 있었을까?’

 

SWC.레11 심화2, ‘왜 기어 다니는 곤충 중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을까?’

SWC.레11 심화2. ‘왜 기어 다니는 곤충 중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을까?’레11의 음식법 가운데 상당히 뜻밖의 규정이 하나 있습니다.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일반적으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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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졌을까?’

 

SWC.레11 심화3, ‘왜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졌을까?’

SWC.레11 심화3. ‘왜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졌을까?’ 레11에서는 ‘먹지 말라’는 명령만큼이나 ‘만지지 말라’는 명령이 반복됩니다. 특히 부정한 짐승의 주검을 만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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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0,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 - 거룩한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은 어디에서

SWC.레10,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 - 거룩한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1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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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10 심화

5. 나답과 아비후는 죽었는데 아론의 규례 위반은 받아들여졌을까?’

 

10을 끝까지 읽으면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장의 처음에서는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했다가 죽습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서도 명령대로 행하지 않은 일이 발생합니다. 속죄제 염소를 제사장이 먹어야 했는데 이미 불살라 버린 것입니다. 모세는 크게 노하지만 아론의 설명을 듣고 좋게 여겼습니다.왜 앞의 일은 죽음으로 끝나고 뒤의 일은 받아들여졌을까요?

 

먼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레10:19-20의 아론의 행동을 직접 상세하게 해설하여 두 사건의 차이를 항목별로 설명한 강한 원전은 이번 검토에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장면에 세밀한 상응을 임의로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가 보여 주는 차이는 분명합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을 적극적으로 가져와 예배에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에게서가 아닌 다른, 사랑과 말씀 이외의 다른 근원에서 나온 예배로 직접 해설합니다.

 

반면 아론의 경우에는 다른 불을 가져오거나 자기 방식의 예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을 잃은 바로 그날, 자신에게 닥친 비극 가운데서 속죄제물을 먹는 것이 과연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실 일인지 묻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설명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이 두 사건은 하나님의 규칙을 어기면 죽는다는 동일한 범주로 묶이지 않습니다. 나답과 아비후 사건의 중심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한 대로 예배의 근원이 바뀐 데 있습니다. 주님의 불 대신 다른 불, 말씀에서 나온 교리 대신 다른 근원에서 나온 것이 거룩한 예배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마지막 사건은 오히려 외적 규례와 그 규례가 섬기는 내적 목적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론은 규례를 무시하여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라 오늘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는데 이것을 먹는 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과연 옳겠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에는 영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보다 위에 놓고 거룩한 것을 자기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뜻을 진실하게 따르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황에서 뜻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기계적 복종과 같지 않습니다. 참된 순종에는 분별이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자기 편의대로 말씀을 고치는 것을 분별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문자만 지켰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내적인 순종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점에서 레10 마지막은 10절의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라는 말씀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 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순한 규칙 준수보다 더 깊은 분별을 요구합니다. 다른 불과 주님의 불을 분별하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며,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실제로 무엇을 기쁘게 여기시는지를 묻습니다.

 

그래서 레10은 엄격함으로 시작하지만 율법주의로 끝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외적 형식을 기계적으로 실행하는 데서 자동으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함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그분의 뜻을 진실하게 분별하고 따르는 데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을 가져왔고, 아론은 여호와께서 어찌 좋게 여기셨으리요?라고 물었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는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거룩한 곳으로 가져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통한 상황에서도 무엇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규칙을 많이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점점 더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SWC.10 심화 5)

 

 

 

SWC.레10,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 - 거룩한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은 어디에서

SWC.레10,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 - 거룩한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1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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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0 심화4, ‘나답과 아비후는 왜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SWC.레10 심화4. ‘나답과 아비후는 왜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뒤 모세는 미사엘과 엘사반에게 그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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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10 심화

4. 나답과 아비후는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뒤 모세는 미사엘과 엘사반에게 그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메고 나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신 처리 이상의 표상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5:8)는 레10:1-5를 직접 인용하며 나답과 아비후가 진영 밖으로 옮겨진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들의 예배가 천국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배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의 진영은 천국과 교회를 표상했습니다.

 

따라서 진영 은 단순히 공동체에서 추방당했다는 의미보다 더 깊습니다. 다른 불에서 나온 예배는 천국의 질서에 속하지 않으므로 천국을 표상하는 진영 안에 머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4와 레6에서 보았던 진영 과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각 제사의 문맥이 다르므로 모든 진영 을 완전히 같은 세부 상응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큰 원리는 천국과 교회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것이 분리되고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거듭남의 중요한 면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것을 넣어 주시는 것만 생각하지만, 거듭남에는 밖으로 옮겨지는 도 있습니다. 이전에는 내 신앙이라고 생각했던 자기 의, 내 열심이라고 생각했던 자기애, 진리라고 확신했던 거짓이 주님의 빛 가운데 드러나면 그것은 더 이상 마음의 중심에 머물 수 없습니다.

 

특히 나답과 아비후가 표상한 것은 노골적인 세상 악이 아니라 종교적 형태를 가진 잘못된 예배였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합니다. 인간은 세속적인 욕심보다 종교적인 proprium을 더 오래 붙들 수도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애라는 사실을 발견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불이 비추면 그 근원이 드러납니다. 주님에게서 온 사랑인지 자기에게서 나온 다른 불인지 분명해지고, 다른 불에 속한 것은 천국의 질서 밖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다른 사람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10의 내적 의미가 먼저 향하는 곳은 다른 사람의 신앙을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입니다. ‘ 안에서 진영 밖으로 옮겨져야 다른 불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먼저입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천국에 속하지 않는 것을 분리하는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의 모든 종교적 열심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 열심 가운데 자기애에서 나온 것을 드러내어 밖으로 옮기시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만이 예배의 불로 남게 하십니다. (SWC.10 심화 4)

 

 

 

SWC.레10 심화5, ‘왜 나답과 아비후는 죽었는데 아론의 규례 위반은 받아들여졌을까?’

SWC.레10 심화5. ‘왜 나답과 아비후는 죽었는데 아론의 규례 위반은 받아들여졌을까?’ 레10을 끝까지 읽으면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장의 처음에서는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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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0 심화3, ‘왜 제사장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을까? -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한다

SWC.레10 심화3. ‘왜 제사장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을까? -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한다는 것’ 나답과 아비후 사건 직후 여호와께서는 아론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하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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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10 심화

3. 제사장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을까? -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한다는

 

나답과 아비후 사건 직후 여호와께서는 아론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이것 때문에 나답과 아비후가 술에 취해 다른 불을 드렸던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성경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음주 여부를 사실처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포도주 금지 규례가 이 자리에 놓인 영적 이유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적인 단서를 줍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71(9:21)은 레10:8-10을 직접 인용하면서 취함이 신앙의 진리에 관한 오류와 혼란을 표상했기 때문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포도주 자체가 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6377은 포도주가 좋은 의미에서는 영적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을 의미하며,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성찬에서도 포도주가 거룩하게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주에는 반대 의미도 있습니다. 진리가 악과 섞여 왜곡되면 포도주는 거짓을 나타내며, ‘ 취함은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류 속에서 비틀거리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레10의 핵심은 술이라는 물질보다 분별력을 잃는 상태입니다.

 

실제로 본문 자체가 이유를 말합니다.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백성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적 흥분이 아니라 맑은 영적 분별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다른 과 연결됩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문제는 거룩해 보이는 것과 실제로 거룩한 것을 분별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향로와 향과 성소와 제사장이라는 외적 요소만 보면 모두 거룩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의 불은 다른 불이었습니다. 외적 거룩함과 내적 거룩함을 구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위험이 있습니다. 감동적이라고 해서 모두 신적이지 않고, 열정적이라고 해서 모두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성경 구절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든 교리가 말씀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내가 강하게 느낀다는 사실과 이것이 주님의 진리다라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영적 생활은 단순한 흥분보다 분별을 향합니다. 무엇이 선처럼 보이는가보다 그 선의 근원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리처럼 들리는가보다 그것이 실제 말씀과 주님의 사랑에 일치하는지를 살핍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이 분별은 더욱 중요합니다. 10:11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포도주 금지 규례는 레10의 중심 주제와 정확히 맞닿습니다. 다른 불과 주님의 불을 분별하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며,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별하는 것, 이것이 주님의 쓰임을 맡은 사람에게 필요한 영적 맑음입니다. (SWC.10 심화 3)

 

 

 

SWC.레10 심화4, ‘나답과 아비후는 왜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SWC.레10 심화4. ‘나답과 아비후는 왜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뒤 모세는 미사엘과 엘사반에게 그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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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0 심화2, 왜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이 제물은 받고 나답과 아비후는 삼켰을까?

SWC.레10 심화2. 왜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이 제물은 받고 나답과 아비후는 삼켰을까? 레9:24과 레10:2를 나란히 놓으면 놀라운 문장이 반복됩니다. 레9에서는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번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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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10 심화

2. 같은 여호와 앞의 제물은 받고 나답과 아비후는 삼켰을까?

 

9:24과 레10:2를 나란히 놓으면 놀라운 문장이 반복됩니다. 9에서는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번제물과 기름을 사르고, 10에서는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나답과 아비후를 삼킵니다. 왜 같은 주님의 불이 한쪽에서는 예배를 완성하고 다른 쪽에서는 심판처럼 나타날까요?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불은 좋은 의미에서는 신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6832(3:2)는 제단의 거룩한 불을 신적 사랑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레9에서 주님에게서 나온 불이 번제물과 기름을 사르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참된 예배에 생명을 주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 자체가 레10에서 갑자기 증오나 분노로 변한 것은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불의 근원이 아니라 그것을 만나는 상태입니다. AC.9375(24:1)는 나답과 아비후가 말씀 이외의 다른 근원에서 나온 교리와 예배를 표상했다고 설명하고, AC.10244(30:20)는 그들의 예배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요한 원리와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언제나 선과 사랑과 생명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동일한 신적 생명이 다르게 경험됩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신적 사랑은 기쁨과 생명이 되지만, 그 사랑에 반대되는 상태에서는 그것이 견딜 수 없는 것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레9과 레10의 두 불을 좋은 하나님과 화난 하나님의 변화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변한 것은 인간의 상태입니다. 9에서는 주님께서 명하신 질서 안에 놓인 제물이 그 불을 받아 예배가 완성됩니다. 10에서는 다른 사랑에서 나온 예배가 그 동일한 거룩함과 만납니다.

 

빛도 비슷합니다. 같은 햇빛이 건강한 눈에는 세상을 보게 하지만 심하게 상한 눈에는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태양이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으로 빛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분노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받는 상태가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3절의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중에서 거룩함을 나타내겠다는 말씀도 달리 들립니다. 주님의 거룩함은 인간의 상태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그 거룩함과 조화를 이루는 것과 이루지 못하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레10의 불은 주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별도의 분노의 에너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9의 불과 근본적으로 같은 신적 사랑의 거룩함 앞에서 무엇이 그 사랑에 속하고 무엇이 다른 사랑에 속하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도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자기애가 선처럼 보이고 자기 지혜가 진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더 가까이 들어올수록 그 안에서 무엇이 주님의 것이고 무엇이 proprium의 것인지 드러납니다. 신적 불은 참된 선을 살리고 다른 불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레9의 불과 레10의 불은 서로 반대되는 두 하나님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변함없는 한 분 주님의 신적 사랑 앞에서 서로 다른 인간의 상태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의 불은 언제나 사랑의 불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불을 품은 채 그 사랑 앞에 서는가입니다. (SWC.10 심화 2)

 

 

 

SWC.레10 심화3, ‘왜 제사장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을까? -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한다

SWC.레10 심화3. ‘왜 제사장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을까? -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한다는 것’ 나답과 아비후 사건 직후 여호와께서는 아론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하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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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0 심화1,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불’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SWC.레10 심화1.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불’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나답과 아비후 이야기를 읽으면 가장 먼저 드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다른 불이 무엇이었기에 두 사람이 즉시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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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10 심화

1.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나답과 아비후 이야기를 읽으면 가장 먼저 드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다른 불이 무엇이었기에 사람이 즉시 죽어야 했을까?성경 본문은 그들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을 향로에 담아 분향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불이 물리적으로 정확히 어디에서 온 불이었는지보다 스베덴보리는 그 사건이 표상한 영적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375(24:1)는 나답과 아비후를 직접 다룹니다. 그들은 아론의 아들들이므로 말씀에서 나오는 교리를 표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른 을 가지고 분향한 것은 말씀 이외의 다른 근원에서 나온 교리로 예배를 세우는 을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불은 사랑의 선을, 향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AC.9965(28:43)는 더욱 직접적입니다. 제단의 불은 신적 사랑, 곧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표상했지만 다른 은 지옥에서 나오는 사랑을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AC.10244(30:20) 역시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향을 피운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에서 나온 예배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다른 의 핵심은 불의 종류가 아니라 사랑의 근원입니다. 외적으로는 똑같이 향을 피웁니다. 똑같은 성소이고 똑같은 제사장이고 똑같은 향로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온다면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예배가 됩니다.

 

이것은 매우 무서운 동시에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거룩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까지 거룩하다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하면서 명예를 사랑할 수 있고, 봉사하면서 인정받기를 사랑할 수 있으며, 진리를 변호하면서 자기 우월감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겉의 향은 거룩하지만 속의 불은 다른 불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레9 마지막 장면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9에서 불은 여호와 앞에서 나왔습니다.인간이 만든 불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불이 번제물과 기름을 사릅니다. 참된 예배의 생명인 사랑은 주님에게서 인간에게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사랑을 받아 다시 주님을 예배합니다.

 

그런데 레10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자기들이 불을 가져옵니다. 바로 이 대비가 두 장을 연결합니다. 9주님의 이고 레10다른 입니다. 하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 아닌 다른 근원에서 오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을 단순히 현대 예배 방식의 차이나 예전의 형식 문제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찬양 형식이나 예배 순서가 익숙하지 않다고 그것을 다른 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본문의 내적 의미와 거리가 멉니다. 핵심은 외적 형식보다 훨씬 깊은 곳, 곧 그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의 근원입니다.

 

10은 그래서 우리에게 얼마나 뜨겁게 예배하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 뜨거움은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자기애도 뜨겁고 종교적 열광도 뜨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불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참된 거듭남은 내 안의 모든 불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불이 주님의 불이고 어떤 불이 proprium의 다른 불인지를 분별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예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SWC.10 심화 1)

 

 

 

SWC.레10 심화2, 왜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이 제물은 받고 나답과 아비후는 삼켰을까?

SWC.레10 심화2. 왜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이 제물은 받고 나답과 아비후는 삼켰을까? 레9:24과 레10:2를 나란히 놓으면 놀라운 문장이 반복됩니다. 레9에서는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번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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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0,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 - 거룩한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은 어디에서

SWC.레10,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 - 거룩한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1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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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10,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 거룩한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1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3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중에서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백성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4모세가 아론의 삼촌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아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 하매 5그들이 나와 모세가 말한 대로 그들을 입은 진영 밖으로 메어 내니 6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족속은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말미암아 슬퍼할 것이니라 7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그리하면 죽음을 면하리라 그들이 모세의 말대로 하니라 8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너와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10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11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12모세가 아론과 남은 아들 엘르아살에게와 이다말에게 이르되 여호와께 드린 화제물 소제의 남은 것은 지극히 거룩하니 너희는 그것을 취하여 누룩을 넣지 말고 제단 곁에서 먹되 13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소득과 아들들의 소득인즉 너희는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으라 내가 명령을 받았느니라 14흔든 가슴과 들어올린 뒷다리는 너와 자녀가 너와 함께 정결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소득과 아들들의 소득으로 주신 것임이니라 15 들어올린 뒷다리와 흔든 가슴을 화제물의 기름과 함께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너와 자손의 영원한 소득이니라 16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즉 이미 불살랐는지라 그가 아론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이르되 17 속죄제물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18 피는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하는 것이었으니 제물은 너희가 내가 명령한 대로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했을 것이니라 19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제물을 먹었더라면 여호와께서 어찌 좋게 여기셨으리요 20모세가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 (10)

 

해설

레위기 10장은 바로 앞 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9:24에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살랐습니다. 그리고 레10:2에서도 다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나답과 아비후를 삼킵니다.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인데 하나는 제물을 받아들이는 불이고 다른 하나는 제사장을 삼키는 불입니다. 이 충격적인 대비가 레10 전체를 여는 열쇠입니다. 문제는 불이라는 외적 현상 자체가 아니라 어떤 사랑에서 예배가 나오는가입니다.

 

1절에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불을 담고 향을 놓아 여호와 앞에서 분향합니다. 겉모습만 보면 모든 것이 종교적입니다. 그들은 이방 제사장도 아니고 아론의 아들들이며, 향로를 들고 성소에서 향을 피웁니다. 문제는 단 하나, 그것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375(24:1)는 이 사건을 직접 해설하면서 나답과 아비후가 말씀에서 나오는 교리를 표상했으며, 그들이 다른 을 사용한 것은 말씀에서 나온 것이 아닌 다른 근원에서 예배와 교리를 세우는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불은 사랑의 선을, 향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AC.9965(28:43)는 이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제단의 은 신적 사랑, 곧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표상하지만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은 지옥에서 나오는 사랑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AC.10244(30:20)도 레10:1-2를 직접 인용하면서 그들의 행동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에서 나오는 예배를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레10다른 은 단순히 불을 잘못 가져온 제의상의 실수가 아닙니다. 예배의 겉모습은 거룩하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내적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 아닌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면 레9와 레10의 연결이 매우 깊어집니다. 9에서 인간은 제물을 준비하고 제단에 올렸지만 마지막 불은 여호와 앞에서나왔습니다. 참된 예배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그 불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들의 다른 을 가져옵니다. 9의 불은 주님에게서 인간에게 내려오는 사랑이고, 10의 다른 불은 인간의 proprium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께 올리려는 사랑입니다. 겉으로는 둘 다 불이고 둘 다 예배에 사용되지만 근원은 정반대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예배하고 있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나를 예배하게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설교도 다른 불로 할 수 있고, 기도도 다른 불로 할 수 있으며, 봉사와 선교와 성경 연구까지 다른 불로 할 수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 영향력을 갖고 싶은 욕망, 자기 교리를 지키려는 집착이 거룩한 행위의 연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향은 같아 보여도 그 향을 태우는 불이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2절에서 여호와 앞에서 나온 불이 나답과 아비후를 삼킨 것은 하나님께서 순간적인 실수에 격분하여 두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죽음을 표상적 예배의 소멸과 천국과의 결합이 끊어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AC.10244는 당시 이스라엘 교회에서 외적 의식이 내적인 천국의 실재를 정확히 표상할 때 그 표상을 통해 천국과의 결합이 있었으며, 규정된 표상을 깨뜨리면 그 결합을 더 이상 나타낼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은 다른 사랑에서 나오는 예배에는 천국과의 결합이 없다는 영적 사실을 극적으로 표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3절의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중에서 거룩함을 나타내겠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까이 갈수록 무엇이 주님의 것이고 무엇이 proprium의 것인지 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것을 다루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자기 지혜를 거룩한 것에 섞으면 그것은 더 위험한 혼합이 됩니다. 목회와 말씀 연구와 예배 인도처럼 거룩한 것에 가까운 쓰임일수록 불인가, 주님의 불인가?라는 자기 점검이 더 필요합니다.

 

4절로 7절에서는 나답과 아비후의 시신이 진영 밖으로 옮겨지고 아론과 남은 아들들은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어 애도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5:8)은 나답과 아비후가 진영 밖으로 옮겨진 것을 직접 언급하면서 그들의 예배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천국에서 나온 예배가 아니었음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진영이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가족의 슬픔을 부정하라는 일반 명령이 아니라 표상교회 안에서 천국에 속하지 않은 예배가 밖으로 제거되는 장면입니다. 아론의 잠잠함역시 그의 내면 상태를 우리가 함부로 심리적으로 추측하기보다는 본문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8절부터 장면은 갑자기 포도주와 독주 문제로 넘어갑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이어집니다.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나답과 아비후 사건 뒤에 우연히 붙은 별개의 음주 규정이 아닙니다. 10의 두 번째 핵심인 분별의 문제입니다.

 

AC.1071(9:21)은 레10:8-9를 직접 인용하면서 술 취함이 신앙의 진리에 관한 오류와 정신적 혼란을 표상하기 때문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포도주와 독주가 금지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포도주 자체는 좋은 의미에서 신앙의 진리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할 수 있지만, 술 취함은 진리가 거짓과 뒤섞여 올바른 판단을 잃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AC.6377도 포도주가 좋은 의미에서는 영적 사랑과 신앙의 선을, 반대 의미에서는 악에서 나온 거짓을 나타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에 고정된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문맥과 계열 안에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따라서 10절과 11절의 핵심은 금주 자체보다 분별입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고 그것을 백성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불의 근본 문제도 바로 분별의 실패였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기에게서 나오는 사랑을 구별하지 못하고, 말씀에서 나오는 교리와 다른 근원에서 나오는 교리를 구별하지 못하면 외적으로 아무리 거룩한 예배를 드려도 내적으로는 다른 불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단순히 선한가 악한가를 넘어 선처럼 보이는 것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분별하게 됩니다.

 

12절로 15절에서 모세는 남은 제사장들에게 소제와 화목제의 몫을 규례대로 먹으라고 다시 명합니다. 두 형제가 죽은 직후에도 거룩한 제사의 질서는 계속됩니다. 이것은 냉혹함을 의미하기보다 주님의 질서가 인간의 충격과 혼란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6과 레7에서 보았듯 거룩한 것을 먹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자기 삶으로 삼는 것과 연결됩니다. 다른 불이 제거된 뒤 필요한 것은 빈자리로 남는 것이 아니라 다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16절로 20절에서 뜻밖의 갈등이 생깁니다. 모세가 속죄제 염소를 찾았는데 이미 불살라져 있었습니다. 규례대로라면 피를 성소 안으로 가져가지 않은 이 속죄제물은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했습니다. 모세는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합니다. 그런데 아론은 오늘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는데 내가 속죄제물을 먹었더라면 여호와께서 좋게 여기셨겠느냐고 답합니다. 놀랍게도 20절은 모세가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고 끝납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레10 전체를 균형 있게 잡아 줍니다. 앞부분만 읽으면 이 장은 규칙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죽는다는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실제 규례에서 벗어난 일이 있었음에도 모세가 아론의 설명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나답과 아비후의 핵심 문제는 단순한 절차상의 사소한 실수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직접 해설처럼 문제의 중심은 다른 ’, 곧 다른 사랑과 다른 근원에서 나온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론은 비극 가운데서 거룩한 것을 형식적으로 먹는 것이 과연 주님 앞에 합당한지를 묻고 있습니다.

 

다만 이 마지막 사건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레10:19-20을 직접 상세하게 해설한 강한 원전을 이번 검토에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론의 슬픔은 정확히 이것을 상응한다거나 모세가 받아들인 것은 정확히 이런 영적 상태를 뜻한다고 세부 상응을 만들어 내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서 확실히 볼 수 있는 것은 문자적 절차의 기계적 실행 규례가 섬기는 거룩한 목적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순종은 자기 뜻대로 규례를 바꾸는 것도 아니지만, 외적 형식만 수행하면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10은 결국 거룩함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라는 장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향을 피웠지만 다른 불을 사용했습니다. 제사장들은 포도주와 독주를 피하여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규례를 아는 모세와 비극을 겪은 아론 사이에서 무엇이 여호와께서 좋게 여기시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됩니다. 이 모든 장면의 중심에는 분별이 있습니다.

 

9에서 주님에게서 나온 불은 제물을 사르고 백성을 경배하게 했습니다. 10에서 인간이 가져온 다른 불은 예배 자체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 안에 불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닙니다. 뜨거운 열심 자체도 기준이 아닙니다. 그 불이 어디에서 오는지가 기준입니다. 자기애에서 오는 열심인지, 세상 사랑에서 오는 열심인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참된 예배는 인간이 자기 불을 만들어 주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다시 주님을 예배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10의 두 불은 겉으로는 닮아 있지만 그 근원이 전혀 다릅니다.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바로 그 두 불을 점점 더 분명하게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SWC.10 해설)

 

심화

1.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SWC.레10 심화1,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불’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SWC.레10 심화1.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불’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나답과 아비후 이야기를 읽으면 가장 먼저 드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다른 불이 무엇이었기에 두 사람이 즉시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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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같은 여호와 앞의 제물은 받고 나답과 아비후는 삼켰을까?

 

SWC.레10 심화2, 왜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이 제물은 받고 나답과 아비후는 삼켰을까?

SWC.레10 심화2. 왜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이 제물은 받고 나답과 아비후는 삼켰을까? 레9:24과 레10:2를 나란히 놓으면 놀라운 문장이 반복됩니다. 레9에서는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번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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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사장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을까? -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한다는

 

SWC.레10 심화3, ‘왜 제사장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을까? -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한다

SWC.레10 심화3. ‘왜 제사장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을까? -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한다는 것’ 나답과 아비후 사건 직후 여호와께서는 아론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하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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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답과 아비후는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SWC.레10 심화4, ‘나답과 아비후는 왜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SWC.레10 심화4. ‘나답과 아비후는 왜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뒤 모세는 미사엘과 엘사반에게 그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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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답과 아비후는 죽었는데 아론의 규례 위반은 받아들여졌을까?’

 

SWC.레10 심화5, ‘왜 나답과 아비후는 죽었는데 아론의 규례 위반은 받아들여졌을까?’

SWC.레10 심화5. ‘왜 나답과 아비후는 죽었는데 아론의 규례 위반은 받아들여졌을까?’ 레10을 끝까지 읽으면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장의 처음에서는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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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SWC.레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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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9,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 거듭남이 쓰임이 되고 주님의 영광

SWC.레9,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 거듭남이 쓰임이 되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1여덟째 날에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다가 2아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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