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에피소드는 매우 인상적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분별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응급상황에서 자녀를 살리려는 부모의 사랑은 선한 정서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선한 정서가 곧바로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장로는 자신의 돈이 아니라 교회의 돈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허락 없이 교회 재정을 개인 용도로 옮긴 것은 객관적으로는 잘못입니다. 본인도 그것을 인정하고 끝까지 변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의 양심이 살아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행위보다 먼저 그 행위의 ‘의도(intention)’와 ‘사랑(love)’을 봅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인지, 타인을 위한 것인지에 따라 영적 성격은 전혀 달라집니다. 만약 이 장로가 교회 돈을 이용해 개인 사업을 하거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했다면 그것은 명백한 자기애와 탐욕에서 나온 것이며, 영적으로도 매우 위험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거나 사치를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자녀를 살리려는 절박함 속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규정 위반을 없애지는 않지만, 주님께서는 외적인 행동뿐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랑의 질을 함께 보십니다. 이것이 말씀의 속뜻이 끊임없이 가르치는 심판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선한 목적은 악한 수단을 거룩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말합니다. 천국에서는 선과 진리가 언제나 함께 갑니다. 사랑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맹목적인 열심이 되고,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냉혹한 정의가 됩니다. 이 장로의 행동은 사랑은 있었지만 진리의 질서를 잠시 벗어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징계를 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는 순간, 그 오류는 거듭남의 재료가 되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잘못을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자기애가 선을 집어삼키기 시작합니다.

 

한편 당회의 모습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흥미롭게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장로들은 모두 원칙을 말합니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교회 재정은 거룩한 것이며, 신뢰는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에는 사건만 보았고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나서야 판단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약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욱 완전한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지혜란 많은 사실을 하나의 선 안에서 질서 있게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리는 사실을 충분히 알수록 더욱 공정해집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사람은 당회장입니다. 그는 규정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실을 밝힌 뒤에 판단하자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공정한 판단(just judgment)’의 정신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주님은 결코 성급하게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외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전 생애, 의도, 반복된 삶의 방향까지 모두 보신 후에 심판하십니다. 천국의 천사들도 누군가를 단 한 사건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전체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삶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봅니다.

 

당회의 최종 결정도 흥미롭습니다. 공식 징계는 하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재정부에서는 물러나게 하고 일정 기간 모든 직분을 내려놓게 했습니다. 이것은 사랑과 질서를 함께 살리려는 시도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자비는 결코 질서를 파괴하지 않으며, 참된 질서는 언제나 자비를 품고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 역시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지 않으시면서도 죄인을 회복시키기 위해 가장 적절한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마지막입니다. 장로는 직분을 다시 받을 기회가 왔지만 스스로 사양합니다. 그는 직분보다 주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이것을 단순한 겸손 이상의 변화로 보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직분을 사랑하고, 다음에는 직분을 통한 명예를 사랑하며, 마지막에는 직분과 상관없이 선 자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 장로는 외적인 명예를 잃으면서 오히려 내적인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자유로운 얼굴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더 많이 얻어서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proprium이 한 겹 벗겨질 때 비로소 평안을 얻게 됩니다.

 

결국 이 에피소드는 ‘원칙이냐 사랑이냐’의 대립을 말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참된 원칙은 사랑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며, 참된 사랑은 결코 원칙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이 둘을 함께 이루십니다. 사람의 눈은 흔히 규정과 자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려 하지만, 주님의 지혜는 질서를 보존하면서도 한 영혼을 잃지 않는 길을 찾으십니다. 그래서 천국의 정의는 냉혹하지 않고, 천국의 자비는 무질서하지 않습니다. 이 균형이야말로 주님의 통치가 인간의 판단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며,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깊이 묵상해야 할 영적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SY.5, ‘찬성 125표, 반대 193표’, 20년 섬긴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의 고백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에피소드는 앞선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울림을 주지만, 실제 목회 현실을 아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몇 가지 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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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74세 목사님, 교회 문 닫는 날 일어난 일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읽어 보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말 있었던 실화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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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읽어 보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말 있었던 실화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영적 원리가 무엇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도 역사적 사실 여부보다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를 더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같은 원칙은 이런 간증이나 에피소드에도 어느 정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한 편의 목회 간증으로 읽되, 그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 절망과 희망, 섭리와 자유 사이의 관계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첫째,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작은 충성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야기 속 목사는 18년 동안 거의 아무런 외적 성과 없이 시골 교회를 지켰고, 세 명뿐인 성도들과 함께 신실하게 예배드렸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의 숫자나 외적인 성공이 아니라, 사람이 맡겨진 자리에서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점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결과를 통제할 수 없지만, 자신의 의지와 삶의 방향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한 사랑에서 비롯된 작은 선행 하나도 영적인 세계에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둘째, 세 명의 집사님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는 장면도 깊이 생각해 볼 만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런 일을 실패나 상실로만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다 보면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순간,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영적 공동체로 옮겨집니다. 따라서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아간 사람이 평안히 세상을 떠났다면, 그것을 단순한 비극으로만 볼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각 사람을 가장 적절한 때에 다음 삶으로 인도하신다고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사상에 더 가깝습니다.

 

셋째, 교회가 텅 비고 혼자 예배드리는 장면은 외적인 교회와 내적인 교회의 차이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은 흔히 교인의 수나 건물의 규모를 보고 교회의 성공 여부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진정한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에 따라 살려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인이 한 사람도 없던 예배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으로 드려졌다면 결코 헛된 예배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넷째, 마지막 예배를 준비하던 날 한 여성이 찾아오는 장면은 많은 사람에게 가장 감동적인 부분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조금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야기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 여성을 정확히 그 시간에 보내신 것처럼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주님의 섭리를 매우 강하게 말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조금도 침해하지 않는 섭리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사람을 강제로 움직이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모든 과정 속에서도 가장 선한 결과가 나오도록 끊임없이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이 만남은 ‘강제된 기적’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자유로운 삶을 주님께서 하나의 선한 방향으로 연결하신 섭리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다섯째, 자살을 결심했던 여성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장면 역시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잘 어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사람이 아무리 절망 속에 있어도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선한 길을 마련하려 하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극적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어떤 사람은 여러 번 넘어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쉽게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끝처럼 보여도, 주님은 여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준비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여섯째,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작은 교회가 다시 살아나는 장면은 희망을 주는 결말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서도 교회가 커진 것 자체를 가장 큰 축복으로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여전히 두세 사람뿐이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진실한 사랑 가운데 있었다면 이미 충분히 살아 있는 교회였을 것입니다. 반대로 수천 명이 모여도 사랑과 진리가 없다면 외형만 남은 교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핵심은 ‘교인이 많아졌다’가 아니라, ‘절망하던 한 사람이 다시 삶을 선택했고, 그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가장 가치 있는 메시지는 ‘끝이라고 생각한 자리에서 새로운 시작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특정 교단이나 신학을 떠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표현하면,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사람을 더 선한 상태로 이끌기 위해 일하며,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끊임없이 생명의 길을 마련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눈앞의 실패만 보지만, 주님은 그 실패까지도 더 큰 선을 위한 과정으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를 읽으며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교회가 다시 붐비게 된 마지막 장면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예배당 문이 조용히 열리던 순간입니다. 그 문은 단순히 한 사람의 출입문이 아니라, 절망이 희망으로, 포기가 사명으로, 끝이 새로운 시작으로 바뀌는 전환점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특별한 기적을 경험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자신의 자리에서 조용히 선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영적 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SY.4, ‘교회 계좌에서 4천만 원이 개인 계좌로 이체됐습니다’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에피소드는 매우 인상적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분별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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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2, ‘전 재산 10억 헌금한 장로가 2년 뒤 법원에 간 이유’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이야기의 핵심은 ‘10억을 잃은 장로’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을 믿던 신앙이 무너지고, 주님을 믿는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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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이야기의 핵심은 ‘10억을 잃은 장로’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을 믿던 신앙이 무너지고,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비극처럼 보이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의 시험(temptation)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시험을 통해 이 사람의 신앙을 더 깊고 순결한 상태로 인도하십니다.

 

주인공은 교회에 처음 나갔을 때 진심으로 주님을 찾았습니다. 외로운 청년 시절, 말씀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고, 교회에서 아내를 만나고, 가정을 이루고, 평생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러한 모든 시작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심어 두신 선한 애정과 리메인스(remains)가 역사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미묘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교회가 제 삶 자체였어요.’ 이 한 문장은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교회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교회라는 외적 형식과 주님 자신이 서서히 동일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라 살려는 사람들 안에 있다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외적 교회는 내적 교회를 위한 그릇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이 장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섬긴다’는 것과 ‘교회를 떠받친다’는 것을 거의 같은 의미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갔다’, ‘교회를 뒷받침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믿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악해서가 아니라 아직 미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마음은 더욱 교회에 의지하게 됩니다. 집은 텅 비어 있었지만, 교회는 그 빈자리를 메워 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봉사도 더 열심히 하고, 새벽기도도 더 열심히 하고, 당회도 빠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이 시기는 동시에 가장 위험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은 위로를 간절히 찾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는 자연스럽지만, 그 위로가 주님에게서 오는지, 사람에게서 오는지를 분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바로 그때 건축헌금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에 하나님은 반드시 채워 주십니다’, ‘먼저 내어 놓으면 두세 배로 갚아 주십니다’, ‘하늘나라에 쌓는 보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닙니다.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을 움직이는 방식입니다. 이 장로는 돈 때문에 움직인 것이 아니라 아내를 향한 사랑, 주님을 잘 섬기고 싶다는 소원, 40년 동안 교회를 섬긴 충성, 장로로서의 책임감이 하나로 묶여 움직였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선한 애정이 주님께 직접 향하지 않고, 한 사람의 권위와 결합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악은 언제나 선한 것을 정면으로 공격하기보다, 선한 것을 이용한다고 설명합니다. 자기 사랑은 거짓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과 경건한 마음까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줄 압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단순한 헌금 이야기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이용하는 자기애’라는 영적 주제를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장로가 결국 10억 원을 헌금하게 되는 과정은 단순히 ‘사기를 당했다’는 사건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인간 안에 있는 선한 의지와 자기 판단이 어떻게 뒤섞일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그는 억지로 돈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 가운데, 그것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믿는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더욱 깊은 시험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거듭나는 동안 자신의 선과 주님의 선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붙들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흔드십니다. 그것은 사람의 교만을 꺾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된 선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장로에게는 그것이 ‘교회’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사랑했고, 목사도 사랑했고, 성도들도 사랑했습니다. 그 자체는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의 신앙의 중심축이 주님이 아니라 교회라는 외적 제도에 너무 강하게 묶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둥이 흔들리자 그의 세계 전체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건축비가 예상과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됩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오해일 것이다.’ 그는 오히려 소문을 막으려 했습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신뢰해 온 사람을 쉽게 의심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의혹은 점점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건축헌금이 교회 건축보다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고, 자신이 절대 신뢰했던 목회자가 그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이 장로가 받은 충격은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닙니다. 돈보다 훨씬 큰 것이 무너졌습니다. ‘내가 평생 믿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내 인생은 무엇이었는가’, ‘내 신앙은 거짓이었는가.’ 이 질문들이 한꺼번에 밀려온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것은 외적인 교회가 무너지는 시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이란 단순히 고난을 겪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이 사람 안에서 실제로 충돌하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 장로도 바로 그 상태에 들어갑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쌓아 온 신뢰와 추억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눈앞의 사실이 있습니다. 사랑과 진실이 서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합니다. 부정도 해 보고, 변명도 찾아보고, 기다려도 봅니다. 그러나 결국 사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거듭남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사랑하던 것을 하루아침에 빼앗지 않으십니다. 먼저 스스로 살펴보게 하시고, 여러 번 확인하게 하시며, 자유롭게 판단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사람이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

 

결국 법정까지 가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이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여기서부터 진짜 신앙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더 이상 사람을 붙잡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를 붙잡을 수도 없고, 장로라는 직분도 붙잡을 수 없으며, 교회라는 이름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붙잡을 수 있는 자리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우상이 무엇이든 그것을 허무시는 분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크고 참된 것을 주시기 위해 허락하시는 분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너무 의지하던 것이 무너질 때, 비로소 주님께 대한 직접적인 신뢰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중심은 ‘10억을 잃었다’가 아니라 ‘주님 외에는 영원히 의지할 분이 없음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환점은 법정 장면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인공이 마음속에서 깨닫기 시작하는 한 가지 진리입니다. ‘내가 믿은 것은 하나님이어야 했는데, 어느새 사람을 믿고 있었구나.’ 이 깨달음은 매우 아픈 것이지만, 동시에 거듭남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신앙은 사람이나 조직이나 직분을 통하여 시작될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반드시 주님께 직접 연결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은 언제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도 사람이며, 아무리 건강한 교회도 외적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잘못 붙들고 있던 지팡이를 허락 가운데 빼앗으십니다. 벌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부러질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다시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이 고백은 매우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는 교회를 잃었고, 명예도 잃었으며, 평생 모은 재산도 잃었고, 사람들의 신뢰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으로는, 그는 외적인 것들을 잃으면서 내적인 것을 얻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은 외적인 신앙보다 내적인 신앙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예배당이 중요하고, 목회자가 중요하며, 직분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점차 주님의 임재는 건물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기도는 특정 장소가 아니라 마음에서 드려질 수 있고, 예배는 형식만이 아니라 삶으로 드려질 수 있으며,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임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신앙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깊어진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주인공이 결국 모든 목회자를 미워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배신을 경험한 사람은 쉽게 극단으로 갑니다. ‘목사는 다 그렇다’, ‘교회는 다 거짓이다’, ‘신앙 자체가 속임수였다’ 이렇게 결론 내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까지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까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분별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교회는 언제나 순수한 사람들과 불순한 사람들이 함께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처럼, 외적인 교회 안에는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악을 보고 곧바로 주님의 교회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또 다른 오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또한 ‘거룩한 것의 모독’(profanation)이라는 주제도 생각하게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 헌신과 사랑을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재정 비리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자기 사랑에 종속시키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이 가장 위험한 이유는 세상의 것만 원하는 데 있지 않고, 거룩한 것까지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려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진짜 비극은 10억 원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순수한 신앙과 헌신이 다른 사람의 자기 사랑에 이용당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여기에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은 선한 것을 이용하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이용당한 선까지도 결국에는 그 사람의 거듭남을 위해 다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였던 이 장로는 마지막에는 돈보다 훨씬 귀한 것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을 통하여 믿던 신앙’에서 ‘주님을 직접 믿는 신앙’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간증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깊은 영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SY.3,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74세 목사님, 교회 문 닫는 날 일어난 일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읽어 보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말 있었던 실화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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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1, ‘집사님, 우리 교회에서 나가주시겠습니까?’

아래는 어제 본 ‘집사님, 우리 교회에서 나가주시겠습니까?’라는 제목의 유튜브입니다. 전반적으로는 지난날 나름의 소목회를 해봤던 저로서는 감동과 함께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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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8/02)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41, ‘내 영혼아 주 찬양하여라’,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성찬), 찬87,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입니다.

 

오늘은 창3 아홉 번째, 본문은 창3:23-24이고, AC 글 번호로는 305번에서 313번입니다. 오늘로 창3 본문을 마치며, 다음 주는 AC 창3 뒤와 창4 앞, 그러니까 ‘사후 사람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사후 사람이 영혼, 즉 영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내용을 연결하여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설교 후 성찬 있습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본문은 지난주처럼 창3 세 번째 파트 전체를 읽겠습니다.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0-24)

 

제목은

 

그룹들, 두루 도는 불 칼,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심

 

이며, 다음은 오늘 범위인 AC.305-313의 요약입니다.

 

AC.305 (23절) 요약

 

창3:23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을 통하여, 타락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던 지성과 지혜의 상태를 잃고, 새로운 영적 질서 아래 살아가게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는 단순히 장소에서 추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되는 지혜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더 이상 직접 누리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동산’은 진리를 이해하는 지성을, ‘에덴’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사랑과 지혜가 함께 무너지고, 천적 생명의 상태를 상실하였음을 뜻합니다. 사람은 여전히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지만, 이제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자연적 인간의 상태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는 거듭나기 이전의 자연적 인간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 새로운 구원의 질서를 마련하신 주님의 섭리였습니다. 사람은 퍼셉션은 잃었지만, 말씀을 배우고, 양심을 형성하며, 신앙과 체어리티를 통해 점진적으로 거듭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에덴에서의 추방은 생명을 빼앗으신 사건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위한 새로운 구원의 시작을 마련하신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AC.306-313 (24절) 요약

 

창3:24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시는 심판의 장면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 더 깊은 영적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는 단순히 어떤 장소에서 추방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더 이상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선과 진리를 지각(perception)하는 상태에 머물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구원의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에덴동산 동쪽’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근원을 의미하며, 그곳에 두신 ‘그룹들’은 사람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앙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함부로 접하여 모독(profanation)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룹은 생명의 길을 막는 존재가 아니라, 장차 사람이 다시 생명에 이를 수 있도록 그 길을 거룩하게 보존하는 존재입니다. 이어지는 ‘두루 도는 불 칼’은 자기 사랑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광적 욕망(insane desires), 그리고 진리를 왜곡,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persuasions을 뜻합니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생명나무에 이를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이 주님의 보호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의미가 창세기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성막과 성전의 그룹들, 언약궤 위의 그룹들, 에스겔의 환상에 나타나는 그룹들은 모두 같은 원리를 나타냅니다. 곧 주님께서는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계시를 열어 주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시며, 거룩한 것이 profanation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보호하십니다. 따라서 계시를 제한하시는 것 역시 심판이 아니라 자비의 한 형태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진리를 허락하시며, 그 이상의 빛이 오히려 사람을 더 깊은 파멸로 이끌게 될 때에는 사랑으로 그것을 감추십니다.

 

이러한 보호의 필요성은 특히 홍수 이전 태고교회의 마지막 사람들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사랑에서 진리를 직접 지각하는 천적 인간이었지만, 자기 사랑이 의지를 완전히 지배하게 되면서 이해마저 거짓을 진리로 확신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선과 진리를 모두 자기 사랑을 위하여 이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광적인 persuasions 속에서 거의 회복이 불가능한 영적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이 더 깊은 거룩한 것까지 profane 하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셨으며, 이것이 바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의 영적 의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심판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는 끝났지만, 주님께서는 홍수 이후 인류를 위하여 새로운 구원의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가는 천적 인간이었지만,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함으로써 양심을 형성하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에 이르는 영적 인간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비록 퍼셉션은 잃었지만, 거듭남의 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아담’을 최초의 한 개인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아담’은 태고교회 자체를,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참된 인간이 된 교회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창3은 한 개인의 범죄와 추방의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형성과 타락, 그리고 그 이후에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생명나무의 길은 닫힌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언젠가 다시 인간을 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끝까지 지키고 보존하시는 소망의 길인 것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05, 창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창3:23) AC.305 ‘에덴동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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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6,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AC.306-313)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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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7, 창3:24,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7 여기서는 홍수로 멸망한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에 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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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8, 창3:24, ‘그룹들’(cherubim)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8 앞에서 ‘동쪽’(east)과 ‘에덴동산’(garden of Ede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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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 창3:24, ‘두루 도는 불 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9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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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0, 창3:24, ‘홍수 이전 사람들과 홍수 이후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0 이 절에 나오는 각각의 표현에는 매우 깊은 아르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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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1, 창3:24,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1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는 이와 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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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2, 창3:24, ‘창3 마지막 절의 표현 하나하나’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2 이 구절에서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상태가 충분히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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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3, 창3:24, ‘유전악’(hereditary evil)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3 여기서 첫 사람에 관하여 말한 것으로부터, 오늘날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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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리딩 순서대로 다음과 같습니다.

 

 

AC.306,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AC.306-313)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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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8, 창3:24, ‘그룹들’(cherubim)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8 앞에서 ‘동쪽’(east)과 ‘에덴동산’(garden of Ede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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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3, 창3:24, ‘유전악’(hereditary evil)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3 여기서 첫 사람에 관하여 말한 것으로부터, 오늘날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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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1, 창3:24,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1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는 이와 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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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성찬 있습니다.

 

잠깐 광고 하나 드리면, 지난 2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를 어제 마쳤습니다. 블로그에 pdf 버전으로 올려놓았으니 자유롭게 보시기 바랍니다. 부디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내용들이 깨달아지고, 영혼에 큰 유익과 기쁨들 되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pdf 소개

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pdf 소개 ‘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pdf’는 흔히 ‘인간의 타락’이라고 불리는 창세기 3장을, 단순한 최초 인간의 범죄 기록이나 불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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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8-02(D1)

 

 

2662, 9, 창3.9, 2026-08-02(D1)-주일예배(창3,23-24, AC.305-313, 성찬), ‘그룹들, 두루 도는 불 칼,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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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7/26, 창3:20-22, AC.280-304), ‘하와, 가죽옷, 영생할까 하노라’

※ 오늘(2026/07/2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40,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찬86,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입니다. 오늘은 창3 여덟 번째, 본문은 창3:20-22이고, AC 글 번호로는 280번에서 304번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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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쓸쓸히 홀로 고독사하는 사람도 있고...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편안하게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통사고 등 갑작스런 사고사나 전쟁이나 강도, 감옥 형장의 이슬, 혹은 자살 등... 제가 말씀드리고픈 것은 저는 고등학생 때 모친을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이런 사별의 경험은 정말 선 굵은 인생의 자국을 남기더라는 거죠. 아마 숨을 거두시는 분도 그러지 싶은데... 그런데 어떻게 사후 자기가 죽은지조차 모를 수가 있는 건가요? 모든 게 이어진다면서 말이죠...

 

 

임종, 곧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모습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히 숨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곁에 없는 가운데 홀로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오랜 치료 끝에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통사고나 재난, 전쟁이나 범죄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역시 고등학생 때 모친을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갑작스러운 사별은 남겨진 사람의 삶에 아주 깊고 오래가는 자국을 남깁니다.

 

그래서 AC.320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죽음의 모습이 이렇게 다양하고, 어떤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충격적인데, 어떻게 죽은 사람이 처음에는 자신이 죽은 사실조차 모를 수 있을까요? 더구나 스베덴보리는 죽음 이후에도 삶과 의식이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이어진다면 사고나 죽음의 순간에 대한 의식도 그대로 이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여기서 먼저 구별할 것은 ‘의식의 연속’과 ‘자신이 처한 새로운 상태에 대한 인식’입니다. AC.320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이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연속성이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알지 못합니다. 자신에게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흔히 ‘의식이 끊어지는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야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AC.320의 설명은 그 반대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끝났지만 사람 자신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나는 죽지 않았는데 왜 내가 죽었다고 하는가?’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영이라고 말해 주었을 때 놀라고 경이로워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자신은 여전히 감각과 욕구와 생각을 가진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통사고나 전쟁, 범죄와 같은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AC.320만으로 각각의 경우에 죽은 사람이 정확히 무엇을 경험하는지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항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증언하는 것은 죽음의 방식에 따른 세부 과정이 아니라,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도 자신의 존재와 의식이 계속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저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일반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임종의 경우를 상상하여 그 사람이 반드시 이런 순서로 경험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지상에서 남겨진 사람이 경험하는 ‘죽음’과, 죽은 사람 자신이 경험하는 ‘계속되는 삶’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순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단절입니다. 특히 갑작스러운 사별은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320에서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죽은 사람의 경험은 ‘나는 없어졌다’가 아니라 오히려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입니다.

 

이것은 제가 어린 시절 모친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경험을 생각할 때에도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남겨진 저에게 그 사건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단절이었지만, AC.320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어머니 자신의 생명까지 그 사고의 순간에 함께 끊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이후 어머니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경험하셨는지를 제가 알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육체의 죽음이 그분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킨 것은 아니라는 스베덴보리의 증언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사람이 죽음이라는 사건을 부정하거나 혼란에 빠져 있다는 뜻으로만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AC.320의 초점은 삶의 놀라운 연속성에 있습니다. 사람은 죽었는데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는 죽었지만 사람 자신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AC.320은 우리에게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 줍니다. 지상에 남은 사람에게 죽음은 분명 슬프고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이별입니다. 그 슬픔을 가볍게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증언을 따른다면 그 이별의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 너머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AC.320이 들려주는 첫 번째 사후세계의 소식은 어쩌면 아주 단순합니다. ‘죽음 뒤에도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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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심화 1. ‘soul’과 ‘spirit’ ‘soul’과 ‘spirit’의 차이가 뭔가요? 그리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은?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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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거의 나란히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the life of souls’라고 말한 뒤 곧바로 ‘that is, of novitiate spirits’라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 soul과 spirit을 서로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 이후 계속 살아가는 동일한 인간을 서로 조금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일반적으로 soul은 ‘영혼’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320의 ‘the life of souls’에서는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인간의 생명 또는 인간 자신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단순히 육체 안에 들어 있는 어떤 비물질적 ‘부분’으로 생각하면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려는 뜻을 충분히 살리기 어렵습니다. AC.320의 관심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부품으로 나누는 데 있지 않고, 육체가 죽은 뒤에도 인간 자신이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반면 spirit은 ‘영’으로 옮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novitiate spirits’는 죽음 이후 처음 영계에 들어간 사람들을 가리키므로 ‘신참, 신생 영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그 ‘영’이 지상에서 살던 사람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AC.320이 이어서 설명하듯 그는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며, 자신을 전과 같은 한 사람으로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AC.320의 첫 문장은 ‘영혼이라는 어떤 것이 죽은 뒤 어떻게 되는가’를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인간은 처음 영계에서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소개하는 문장입니다. ‘soul’이라는 표현으로 사후에 계속되는 인간의 생명을 넓게 제시하고, 곧이어 ‘novitiate spirits’라는 표현으로 지금부터 다룰 대상이 죽음 직후 영계에 들어온 사람들임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영혼’이라고 하면 육체에서 빠져나온 희미한 무엇을 떠올리고, ‘영’이라고 하면 더욱 비현실적인 존재를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죽은 뒤에도 인간은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AC.320에서도 바로 그 때문에 새로 영계에 들어온 사람이 자신에게 ‘당신은 영입니다’라고 말하면 놀란다고 합니다. 자신은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며, 전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살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번역에서는 soul과 spirit의 차이를 완전히 지워 버릴 필요도 없고, 반대로 두 단어 사이에 지나치게 엄격한 존재론적 구별을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soul은 ‘영혼’, spirit은 ‘영’으로 구별하여 옮기되, 이 문맥에서는 둘 다 육체의 죽음 이후 계속 살아가는 동일한 인간을 가리킨다는 점을 기억하면 됩니다.

 

결국 AC.320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soul과 spirit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나인가?’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그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바로 그 사람이 ‘나’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이 사라지고 영이라는 전혀 다른 존재가 생겨나는 사건이 아니라, 육체를 벗은 인간이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임을 발견하는 사건입니다.

 

 

 

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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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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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저는 많은 경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저세상(the other life)에 들어가면 그는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아직도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매우 실제적이어서, 누군가 그에게 자신이 영이라고 말해 주면 그는 크게 놀라고 경이로워합니다. 이는 자신이 감각과 욕구, 생각에 있어서 전과 똑같이 한 인간으로 존재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며, 또한 세상에 살 때에는 영의 존재를 믿지 않았거나, 혹은 어떤 사람들처럼 영이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With regard to the general subject of the life of souls, that is, of novitiate spirits, after death, I may state that much experience has shown that when a man comes into the other life he is not aware that he is in that life, but supposes that he is still in this world, and even that he is still in the body. So much is this the case that when told he is a spirit, wonder and amazement possess him, both because he finds himself exactly like a man, in his senses, desires, and thoughts, and because during his life in this world he had not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or, as is the case with some, that the spirit could be what he now finds it to be.

 

해설

AC.320부터 AC.323까지는 창세기 4장의 속뜻으로 들어가기 전에 삽입된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라는 짧은 연속 기사입니다. 앞의 AC.314-319에서 사람이 영생에 들어가는 과정에 관한 여러 경험을 소개했다면, 여기서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좀 더 일반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AC.320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기 존재가 단절되었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자신이 저세상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음 이후의 삶이 지상의 의식과 전혀 연결되지 않은 낯선 존재 상태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나’라는 분명한 자각 가운데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순하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감각과 욕구, 생각’에 있어서 자신이 이전과 똑같이 한 인간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고, 무엇인가를 원하고 사랑하며, 주변의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오히려 놀라게 됩니다. 지상에서는 영을 육체를 잃은 희미한 존재처럼 생각했는데, 실제로 영이 되고 보니 자신이 여전히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죽음으로 없어지는 것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입고 있던 육체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애정, 곧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내적인 생명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죽음은 ‘존재하던 사람이 없어지고 전혀 다른 존재가 생기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계의 육체를 벗고도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 있음을 발견하는 사건입니다.

 

특히 AC.320은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영’에 대한 막연한 관념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은 영을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나 의식만 남은 어떤 것으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언하는 영은 그렇게 막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죽은 사람 자신이 ‘나는 전과 똑같은 사람인데 무엇이 달라졌다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만큼 자기 존재와 감각과 사고의 연속성을 경험합니다. 이어지는 AC.321-323에서는 이 점이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AC.320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은 ‘죽으면 내가 없어지는가?’가 아니라 ‘육체를 벗은 뒤에도 계속 살아가는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원하고 사랑하는 내가 계속된다면, 지금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내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AC.320 자체의 초점은 아직 사후의 심판이나 천국과 지옥의 결정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먼저 확실하게 말하려는 것은 훨씬 기본적인 사실입니다. 육체의 죽음으로 인간의 의식과 인격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전히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20은 이후 이어질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설명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문과 같습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은 희미하고 추상적인 상태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보고 느끼고 원하고 생각하는 ‘나’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소멸이 아니라, 사람이 육체를 벗은 뒤에도 자신의 생명이 계속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경계입니다.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심화 1. ‘soul’과 ‘spirit’ ‘soul’과 ‘spirit’의 차이가 뭔가요? 그리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은?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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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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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1, 창4 앞, 육체를 벗은 뒤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은 더욱 뛰어납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 기능을 누리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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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9, 창3 뒤, ‘두 번째 사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9 나는 또 다른 한 사람도 보았는데, 그는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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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 소개

 

‘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AC) 가운데 창세기 3장에 해당하는 AC.190-313을 중심으로, 그 앞뒤에 배치된 사후 세계에 관한 설명인 AC.182-189와 AC.314-319까지 번역하고 해설한 책입니다. 전체 643쪽에 걸쳐 스베덴보리의 영어 번역문과 한국어 번역, 메인 해설, 필요한 주제에 대한 심화를 함께 수록했습니다. 창세기 3장은 흔히 인간의 타락, 또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다루는 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을 단순히 인류 최초의 두 사람이 금지된 열매를 먹은 사건으로 읽지 않습니다. 그는 이 이야기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지혜를 받아 살아가던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어떻게 점차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신뢰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보다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인간이 어떻게 죄를 지었는가를 설명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인간이 왜 주님에게서 멀어지는지, 그 과정에서 사랑과 신앙은 어떻게 변질되는지,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깊이 살펴보는 책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빛이 생기고, 궁창이 나타나며, 땅과 식물과 해와 달과 별과 생물들이 차례로 등장하는 창조의 과정은 자연계가 형성되는 이야기인 동시에, 영적으로 죽어 있던 인간이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창세기 2장에서는 그렇게 거듭난 인간이 마침내 천적 인간이 되어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에덴동산은 바로 이러한 천적 생명과 지혜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 후반부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새로운 움직임도 나타났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인간의 ‘프로프리움’(proprium)에 관한 문제로 설명합니다. 창세기 3장은 바로 그 프로프리움을 인간이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본래의 천적 질서가 어떻게 무너져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중요한 개념은 ‘프로프리움’입니다. 프로프리움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고 여기는 것, 곧 자신의 고유한 생각과 의지, 판단과 성향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일상생활에서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무엇을 사랑할지 결정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러한 느낌은 인간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모든 참된 생명과 선, 사랑과 지혜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심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질서 안에서 사용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것을 주님과 독립된 선과 지혜의 근원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영적 질서가 뒤바뀌게 됩니다. 창세기 3장의 타락은 바로 이러한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주님을 노골적으로 부정하거나 악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자기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고, 그것을 좋아하고,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삶의 중심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보여 주는 첫 번째 중요한 인물이 바로 ‘뱀’입니다. 창세기 3장의 겉뜻에서는 뱀이 여자에게 접근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의심하게 만들고 금지된 열매를 먹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뱀이 인간 안의 ‘감각적인 부분’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감각은 우리가 자연계를 보고 듣고 만지고 경험하는 능력입니다.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능력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감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참되다고 여기고,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마저 자신의 감각과 지식으로 검증할 수 있어야만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본래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퍼셉션했지만, 후손들은 점차 자신이 보고 느낄 수 없는 것은 믿지 않으려 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신앙의 질서가 뒤바뀌기 시작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뱀의 유혹은 단순히 외부의 악한 존재가 인간에게 말을 건 사건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감각이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보다 높은 판단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과정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뱀과 여자와 남자를 각각 인간 안의 서로 다른 부분으로 설명합니다. 뱀은 감각적인 부분을, 여자는 자기 사랑 또는 프로프리움을, 남자는 합리적인 부분을 나타냅니다. 감각적인 부분이 자기 사랑을 설득하고, 자기 사랑이 그 설득을 받아들이며, 마침내 합리적인 부분까지 그 판단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타락을 단순히 충동적인 잘못이나 지식의 부족으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따라 무엇을 믿고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달라질 수 있으며, 본래 진리를 이해하는 데 사용해야 할 합리적인 능력조차 자신이 사랑하는 욕망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의 타락은 인간의 한 부분이 잘못된 선택을 한 사건이 아니라, 사랑과 생각과 판단의 질서가 점차 뒤집히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감각과 이성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인간의 감각에 근거한 추론이 신앙의 신비를 어둡게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뱀이 신중함을 나타내는 긍정적인 표상이 될 수 있음을 밝힙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신 말씀과 광야에 세워졌던 놋뱀이 그 중요한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놋뱀이 주님 안의 감각적인 부분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감각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사랑과 질서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을 중심으로 감각을 사용할 때에는 그것이 진리를 거부하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사용할 때에는 위험을 분별하고 선을 보호하는 유익한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신앙을 위해 이성을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감각과 이성이 어디에 근거하고 무엇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려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히 금지된 음식을 먹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던 사람이 이제 자기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기준으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결정하려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합리적인 태도가 숨어 있습니다. 인간은 진리를 알고 싶고, 어떤 말이 참인지 확인하고 싶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찾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진리를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진리의 최종적인 근원과 판단자로 삼으려는 태도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과, 자신의 이성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주님의 진리도 거부하겠다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창세기 3장은 바로 이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어떻게 인간의 영적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지 보여 줍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는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이 벗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에서 나타납니다. 겉뜻에서는 금지된 열매를 먹은 뒤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리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던 순진성과 천적 상태를 잃어버린 것으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벌거벗음은 단순히 옷을 입지 않은 외적인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프로프리움 안에서 얼마나 무력하고 가난한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표상입니다. 특히 창세기 2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같은 벌거벗음이라도 어떤 영적 상태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순진성 안에 있을 때의 벌거벗음과, 그 순진성을 잃은 뒤 자신의 상태를 부끄러워하는 벌거벗음은 같지 않습니다. 이 책은 이러한 차이를 통해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이 단순히 하나의 사물에 하나의 뜻을 고정하는 작업이 아니라, 말씀의 전체 문맥과 인간의 영적 상태를 함께 살펴보는 작업임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들에게 모든 선과 진리가 즉시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부끄러워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자신들의 행위를 인정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는 이러한 모습이 그들에게 아직 퍼셉션의 흔적과 자연적 선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자신이 악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실제로 그 악에서 돌이키는 것은 같은 일일까요?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계속 같은 잘못을 선택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악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멀리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악을 깨닫는 능력이 남아 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참된 회개와 거듭남이 이루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책은 이러한 미묘한 구별을 통해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함께 살펴봅니다.

 

창세기 3장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면은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 모습입니다. 겉뜻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피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해설을 따라 읽으면 더욱 깊은 문제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멀리하셨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의 상태가 변했다고 해서 사랑을 거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악과 거짓에 사로잡힐수록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지고, 그 결과 마치 주님께서 자신에게서 멀어지신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에서 중요한 질문은 주님께서 왜 인간을 버리셨는가가 아니라, 인간이 왜 주님의 임재를 두려워하고 그분에게서 숨으려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책은 인간의 죄와 두려움을 설명하면서도, 그 한가운데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특히 창3:9의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은 인간의 타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위치를 모르셔서 그를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적인 설명을 고려하면, 이 말씀은 인간이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도록 부르시는 주님의 역사와 관계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기 판단이 옳다고 확신하면서도 실제로는 주님의 선과 진리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신의 실제 상태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이 점은 이 책의 앞부분에서 다루는 사후의 자기 인식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주님을 알아 가는 일과 자기 자신을 바르게 아는 일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에게 있는 모든 생명과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할수록 자신의 참된 모습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3:14-19에서는 뱀과 여자와 남자에게 주어진 말씀들이 이어집니다. 겉뜻에서는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이 선포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들을 인간이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 사랑과 감각적인 판단에 기울어질 때 어떤 영적 상태가 형성되는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뱀이 배로 다니며 흙을 먹는다는 말씀, 여자와 뱀 사이의 적대 관계, 해산의 고통과 남편의 다스림, 땅의 저주와 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 그리고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은 각각 인간 내면의 변화와 관계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구절들을 주님께서 분노하시어 인간에게 임의로 고통을 부과하신 장면으로만 읽는다면, 스베덴보리가 밝히려는 속뜻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책은 인간이 스스로 받아들인 악과 거짓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설명하는 동시에, 주님께서 그러한 상태를 어떻게 허용하고 제한하시며 가능한 선을 보존하시는지를 살펴봅니다.

 

이 가운데 창3:15의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적대 관계는 특별히 중요합니다. 전통적인 기독교에서도 이 구절은 오랫동안 구원에 관한 약속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 말씀을 주님과 인간의 구원이라는 더 깊은 문맥에서 읽습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과 감각적인 판단에 사로잡혔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안의 악과 거짓에 맞서 주님께서 이루시는 역사와 관련된 깊은 의미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의 타락은 인간의 실패만을 기록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과정과 함께, 그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주님의 역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심각했는가 하는 사실뿐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섭리입니다.

 

이 책에서 특히 깊이 생각하게 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자유와 프로프리움의 관계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과 관계하지만,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주님의 진리 안에서 사용할 수도 있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강화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삶의 최종적인 기준으로 삼을 때, 본래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간의 자유나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면서도 참된 생명과 선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가 어떤 사랑과 질서 안에서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창3:20-24에 이르면 태고교회 후손들의 변화는 더욱 심각한 단계로 들어갑니다.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부르는 장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장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말씀, 그리고 마침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점차 천적 선과 진리를 잃어버리면서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가죽옷을 입히시는 장면에서는 인간의 상태가 변한 가운데서도 그에게 허용되는 새로운 삶의 조건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고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는 장면에서는 더욱 역설적인 주님의 섭리가 드러납니다. 겉으로 보면 주님께서 인간에게서 생명나무에 접근할 기회를 빼앗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인간이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더럽히는 일을 막으시는 보호의 섭리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거룩한 것의 더럽힘’은 이 책에서 반드시 이해해야 할 중요한 개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룩한 진리를 단순히 모르는 상태와, 그것을 알고 내적으로 인정한 뒤 악한 사랑과 결합하여 더럽히는 상태를 구별합니다. 인간이 어떤 진리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을 더럽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속한 선과 진리를 알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사랑과 악한 욕망에 종속시키면 훨씬 심각한 영적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는 인간에게 진리를 주기 싫어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을 더럽혀 스스로를 더욱 깊은 파멸에 빠뜨리는 일을 막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보호가 반드시 인간이 원하는 것을 허락하는 방식으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때로는 허용하지 않으시고 접근을 막으시는 일에도 인간을 향한 깊은 사랑과 섭리가 담겨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과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 사이의 차이도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에게는 천적 씨가 있었으며, 그들에게서는 사랑이 의지와 이해를 하나로 다스렸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는 그러한 천적 퍼셉션이 없었지만, 진리를 이해할 능력을 통해 주님께서 양심을 형성하시고 체어리티로 인도하시는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거듭나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동일한 내적 구조와 동일한 방식으로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태고교회의 높은 영적 상태를 그리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의 인간에게도 주님께서 어떠한 거듭남의 길을 마련하셨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어지는 유전악에 관한 설명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인간에게 존재하는 모든 유전악이 아담이라는 최초의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부정합니다. 창세기 초반의 아담이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나타낸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는 각 사람이 실제로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 안에 악한 성향을 형성하고, 그러한 성향이 후손들에게 전해져 유전적인 것이 되며, 세대를 거치면서 더욱 증가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유전악을 물려받았다는 사실과 자신이 자유롭게 악을 선택하여 실제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영적 유전악의 설명을 현대 유전학에서 검증된 생물학적 기제와 곧바로 동일시하거나, 특정 가족이나 민족이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판단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이 책은 스베덴보리의 역사적 표현을 충실히 소개하면서도 그러한 해석상의 한계를 구별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심으로써 유전악이 더 이상 해를 끼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에게 이어져 온 악이 얼마나 깊고 오래되었는가보다, 그 악의 지배에서 인간을 벗어나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하심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창세기 3장의 속뜻에 관한 설명 앞뒤로 인간이 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창3 앞의 AC.182-189에서는 죽음에서 깨어나는 영혼을 천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들이 어떻게 돌보는지, 그가 어떻게 빛을 보고 자신이 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지, 그리고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과 자기 인식을 통해 천국으로 인도되는지를 설명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지각하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러한 묘사는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영적 경험에 속하므로, 자연과학적으로 직접 관찰하고 검증한 사실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을 지키면서 읽을 때, 독자는 스베덴보리가 사후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했는지를 더욱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창3 뒤의 AC.314-319에서는 다시 살아난 영혼이 천사들의 친절한 봉사와 가르침을 받지만, 자신의 내적 성향에 따라 어떤 영들과 함께하기를 원하는지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특히 천사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지만, 어떤 영혼은 그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이 먼저 그 사람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천사들과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마침내 지상에서 살아온 자신의 삶과 일치하는 영들과 함께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천국과 지옥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원리가 나타납니다. 인간이 사후에 어떤 상태를 받아들이는가는 그가 지상에서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가 하는 문제와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천국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것과 천국의 사랑을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선으로 인도하시지만,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았는가 하는 문제도 존중하십니다. 이러한 설명은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함께 작용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AC.318에 등장하는 한 영혼의 이야기는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그는 죽음 직후 자신이 집과 재산을 모두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심장에 해당하는 영역에 속한 천적 영들에게 친절한 돌봄을 받은 뒤에는, 그 큰 친절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반응에서 그가 지상에서 신앙의 체어리티 안에 있었음을 확인하고, 그가 즉시 천국으로 들어 올려졌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떤 특별한 신앙적 업적을 이루었는지가 아닙니다. 그가 다른 존재에게서 받은 선에 대해 어떤 사랑으로 응답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참된 신앙이 단순히 교리를 알고 고백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웃을 향한 실제적인 사랑과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AC.319에서는 천사들에 의해 천국으로 옮겨져 주님께 받아들여지고 천국의 영광을 본 또 다른 사례를 통해, 모든 천국의 생명과 기쁨의 근원이 결국 주님이심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처럼 창세기 3장의 앞뒤에 배치된 사후의 삶에 관한 설명은 창세기 3장 본문과 별개의 흥미로운 이야기로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이 인간의 사랑과 내적 삶이 어떻게 변질되는지를 보여 준다면, 사후에 관한 설명은 그렇게 형성된 내적 삶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 지상에서 사랑하고 선택해 온 모든 것과 완전히 단절되어 전혀 새로운 존재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에도 인간의 내적 사랑과 성향이 계속 나타나며, 그것이 영들과의 교류와 천국 또는 지옥을 향한 방향에 깊이 관계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두 부분은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면서도 하나의 중요한 질문으로 만납니다. 인간은 지금 무엇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번 창3 작업에서 심화를 별도로 수록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본문을 번역하고 메인 해설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그 안에서 마무리하되, 독자가 여전히 중요하게 질문할 수 있는 문제는 독립적인 심화로 다루었습니다. 예를 들어 악을 깨닫는 능력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곧 구원의 가능성을 의미하는가, 광야의 놋뱀은 왜 주님을 표상하는가, 신앙의 진리를 감각과 합리성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어떤 질서가 필요한가, 주님의 전능과 인간의 자유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유전악은 어떻게 전해지고 거듭남을 통해 어떻게 해롭지 않게 되는가 하는 문제들이 그러한 심화의 대상입니다. 사후의 삶에 관한 부분에서도 천사들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데 왜 어떤 영혼은 그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는지, 천국과 지옥은 주님이 결정하시는지 인간이 자신의 사랑에 따라 선택하는지, 그리고 받은 친절을 갚으려는 마음이 어떻게 신앙의 체어리티를 드러내는지를 별도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심화는 새로운 지식을 무한히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메인 해설만으로는 충분히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깊이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이 책의 중요한 편집 원칙 가운데 하나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내용과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덧붙이는 해석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설에는 매우 단정적인 표현이 등장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번호에서는 특별한 영적 의미를 직접 밝히면서도, 다른 번호에서는 더 깊은 아르카나가 존재하지만 자신도 아직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가 직접 설명하지 않은 부분에 해설자가 임의로 의미를 부여하거나, 하나의 상응을 발견했다는 이유로 모든 성경 구절에 같은 의미를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에덴동산 동쪽, 두루 도는 불 칼, 생명나무의 단수와 복수처럼 세밀한 표현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이러한 신중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 책은 가능한 한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면서도, 원문에 없는 결론을 마치 스베덴보리가 직접 가르친 것처럼 제시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또한 이 책은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하거나 그의 가르침에 다소 거리감을 느끼는 독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는 퍼셉션, 프로프리움, 리메인스,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속 사람과 겉 사람, 의지와 이해, 체어리티와 상응 등 낯선 개념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을 단순히 암기하는 것만으로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퍼셉션은 단순한 직감이 아니며, 프로프리움은 일상적인 자기 존중과 구별해야 하고, 체어리티는 단순히 자선 활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한 스베덴보리가 어떤 사람을 영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아니다’라고 표현할 때에는 그것을 그 사람의 생물학적 인간성이나 존엄을 부정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책은 그러한 개념들을 가능한 한 충분히 설명하고, 독자가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문맥 안에서 이해하도록 돕고자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창3 작업은 인간의 타락을 설명하면서 인간에 대한 비난이나 정죄에 머무르지 않으려 했습니다. 창세기 3장을 읽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담과 하와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는지, 왜 뱀의 유혹에 넘어갔는지, 왜 자신의 잘못을 다른 존재에게 돌렸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해설을 따라 읽으면 이러한 질문은 점차 우리 자신의 내적 상태를 돌아보는 질문으로 바뀝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가장 신뢰하고 있는가,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판단은 어떤 사랑에서 비롯되었는가, 나는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싶어 하는가 아니면 이미 내려놓은 자신의 결론을 정당화하고 싶은 것인가, 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잘못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렇게 창세기 3장은 아득한 과거에 있었던 누군가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 우리의 생각과 사랑과 신앙을 비추어 보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성찰이 끝없는 죄책감이나 자기 정죄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 책에서 거듭 강조하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참된 선과 지혜의 근원이 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며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에 빠지고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앞세울 때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실제 상태를 아시며, 그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고 더 깊은 파멸을 막기 위해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의 타락은 인간의 악을 드러내는 이야기인 동시에 주님의 섭리가 얼마나 깊고 세밀한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선함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신을 절망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선의 근원이신 주님께 더욱 깊이 의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번 책을 읽는 독자에게 특별히 권하고 싶은 것은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성경 해석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그 해석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뱀이 감각적인 부분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고, 여자가 프로프리움을 나타내며 남자가 합리적인 부분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응의 의미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신앙의 목적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인간이 왜 주님에게서 멀어지는지 깨닫고, 자신의 사랑과 판단을 돌아보며,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를 이해하는 일은 결국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깊이 알아 가는 일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많은 속뜻을 알고 있어도 그 지식은 인간 자신의 지적인 만족이나 우월감을 강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은 바로 그러한 위험을 경계하도록 가르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1장이 인간의 거듭남의 시작을 보여 주고, 창세기 2장이 주님과 사랑으로 결합한 천적 인간의 삶을 보여 준다면, 창세기 3장은 그 질서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세 장을 함께 읽으면 더욱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생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듭남을 시작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인간을 천적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인간이 자신의 프로프리움을 사랑하여 타락하는 가운데서도 가능한 선을 보존하고 더 깊은 파멸을 막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심지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천사들을 통하여 인간을 돌보시고 각자의 내적 상태에 따라 인도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이 책은 창세기 3장의 어두운 이야기 속에서도 끊임없이 주님의 사랑과 섭리를 바라보도록 이끌고자 합니다.

 

‘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타락에 관한 해설서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끝까지 돌보시는 주님의 섭리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태고교회의 영적 쇠퇴와 인간의 자기 사랑, 감각과 이성의 질서, 퍼셉션의 상실, 선과 진리의 황폐화, 거룩한 것의 더럽힘,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 유전악과 거듭남, 그리고 사후에도 계속되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주제를 하나로 연결하는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십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하고 지혜로운 존재라고 생각할수록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지만, 자신의 생명과 선과 지혜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참된 거듭남의 길이 열립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창세기 3장의 속뜻을 공부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신의 삶과 사랑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남기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 누구로부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선택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 안에서 무엇을 가장 사랑하고 누구를 가장 신뢰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내가 아는 진리가 나를 더욱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가, 아니면 내가 남보다 더 잘 안다는 확신을 강화하는가? 내가 믿는 주님은 나의 뜻을 이루어 주시는 분인가, 아니면 나에게 참된 생명과 선을 주시고 나를 새롭게 거듭나게 하시는 분인가? 창세기 3장은 이러한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프로프리움을 더욱 굳게 붙잡을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길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이 독자에게 단순히 새로운 신학 지식을 제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깊이 깨닫고 그분의 사랑을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내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창3, AC.182-319 - 20261027, 본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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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 AC.67-181 번역, 해설 및 심화 with ChatGPT (20261021)

‘창2, AC.67-181 번역, 해설 및 심화 with ChatGPT’ 소개 ‘창2, AC.67-181 번역, 해설 및 심화 with ChatGPT’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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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8

 

어떤 영 하나가 내게 와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는 얼마 전에 막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아직도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저세상에 있으며, 더 이상 집이나 재산 등 세상에서 소유했던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고, 이전에 소유하던 모든 것을 잃은, 전혀 다른 나라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는 크게 불안해졌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주님께서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친히 돌보신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자기 자신에게 맡겨졌는데, 이는 그의 생각이 세상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평소의 방향을 따라 움직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의 생각이 분명히 드러나므로 그의 생각도 그대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이제 생활할 모든 수단을 잃은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깊이 고민하였습니다. 이러한 염려 가운데 있을 때, 그는 심장의 기능에 상응하는 공동체에 속한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게 되었고, 그들은 그가 바랄 수 있는 모든 친절과 사랑으로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그는 다시 자기 자신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처럼 큰 친절을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지를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마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육체 안에서 살아 있을 때 이미 신앙의 체어리티 가운데 살았던 사람임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졌습니다. A certain spirit came and discoursed with me, who, as was evident from certain signs, had only lately died. At first he knew not where he was, supposing himself still to be in the world; but when he became conscious that he was in the other life, and that he no longer possessed anything, such as house, wealth, and the like, being in another kingdom, where he was deprived of all he had possessed in the world, he was seized with anxiety, and knew not where to betake himself, or whither to go for a place of abode. He was then informed that the Lord alone provides for him and for all; and was left to himself, that his thoughts might take their wonted direction, as in the world. He now considered (for in the other life the thoughts of all may be plainly perceived) what he must do, being deprived of all means of subsistence; and while in this state of anxiety he was brought into association with some celestial spirits who belonged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who showed him every attention that he could desire. This being done, he was again left to himself, and began to think, from charity, how he might repay kindness so great, from which it was evident that while he had lived in the body he had been in the charity of faith, and he was therefore at once taken up into heaven.

 

 

해설

 

AC.318은 AC.317에서 예고된 두 사례 가운데 첫 번째를 소개합니다. 이 사례는 왜 어떤 사람은 죽은 직후 거의 곧바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단순히 한 사람의 특별한 경험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상태가 사후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매우 섬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 사람도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아직도 세상에 있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AC.181 이하에서 반복하여 설명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죽음은 의식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기 때문에, 사람은 처음에는 이전과 거의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자신이 전혀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재산을 잃었다는 사실보다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이었습니다. 집도 없고 재산도 없으며, 의지할 기반도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염려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살아온 사고방식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전히 세상의 기준으로 미래를 계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불안 자체가 아니라, 그 불안 속에서 드러난 마음의 방향입니다. 그는 먼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돌보신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곧바로 천국으로 인도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시 자기 자신에게 맡겨졌습니다. 이는 앞선 AC.315와 AC.316에서 보았던 원리와 동일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어떤 진리를 들려주신 뒤에도, 그것을 자신의 자유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평소의 생각을 따라가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내면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만을 원망하거나, 잃어버린 것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구하거나 불평하는 데 머물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고민한 것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였습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뒤에는 그의 생각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이처럼 큰 친절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이 한 가지 생각이 그의 영적 상태를 모두 드러냅니다.

 

만일 자기 사랑이 중심인 사람이라면, 그는 천사들의 도움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더 많은 도움을 받을 방법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받은 사랑을 어떻게 돌려줄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의 체어리티’의 본질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받은 사랑을 자기 안에 붙잡아두지 않고, 다시 다른 이에게 흘려보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의 한 생각만으로도 그는 세상에서 이미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본문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스베덴보리가 ‘이를 통해 그가 신앙의 체어리티 가운데 살았음이 분명히 드러났다’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천사들이 그의 과거를 조사하거나 심문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현재의 생각 하나가 그의 평생의 삶을 증언하였습니다. 이는 영계에서는 말보다 사랑이, 행동보다 의지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죽은 뒤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형성된 내적 사람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그를 맞이한 천사들이 ‘심장의 기능에 상응하는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심장은 사랑과 의지의 중심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공동체는 특별히 사랑과 생명의 선을 맡은 천적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이 먼저 이 사람을 돌보았다는 것은, 그의 내적 생명이 이미 천적 사랑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는 아직 그것을 완전히 의식하지 못했지만, 천사들은 그의 가장 깊은 상태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AC.318은 왜 어떤 사람은 죽은 직후 거의 곧바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비결은 특별한 지식이나 신비한 체험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이미 주님을 믿고, 이웃을 사랑하며, 받은 선을 다시 베풀고자 하는 삶이 그의 본성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죽음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서 시작된 천국의 삶이 아무런 장애 없이 계속 이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그는 긴 시험이나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자신의 참된 상태가 드러나는 즉시 천국으로 올려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심화

 

1. ‘이 사람에 대한 몇 가지 질문’

 

 

AC.318, 심화 1, ‘이 사람에 대한 몇 가지 질문’

AC.318.심화 1. ‘이 사람에 대한 몇 가지 질문’ 이 사람은 처음 눈 뜨는 과정부터, 그러니까 모든 신생 영들에게 허락된 기본 코스를 밟지 않았나요? 어떻게 자기가 죽어 내세에 와있는지조차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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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7, 창3 뒤, ‘저마다 다 다른 속도로 진행되는 사후의 여정’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7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향하여 더 천천히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더 빨리 나아갑니다. 나는 죽은 직후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진 사람들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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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9

 

나는 또 다른 한 사람도 보았는데, 그는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천국으로 인도된 다른 사람들에 관한 많은 경험이 있지만, 그것들은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I saw another also who was immediately translated into heaven by the angels, and was accepted by the Lord and shown the glory of heaven; not to mention much other experience respecting others who were conveyed to heaven after some lapse of time.

 

 

해설

 

AC.319는 AC.317과 AC.318에서 시작된 주제를 마무리하는 매우 짧지만 중요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더 빨리 천국으로 나아간다’고 말한 뒤, AC.318에서는 그 실제 사례를 하나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 AC.319에서는 또 다른 사례를 덧붙임으로써, 이러한 일이 특별한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실제로 여러 차례 목격한 사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표현은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졌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곧바로’는 시간의 길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영계에서 오랜 준비나 반복적인 상태의 변화가 거의 필요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내적 상태가 이미 천국과 충분히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긴 준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공동체로 인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를 천사들이 천국으로 데려갔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그는 주님께 받아들여졌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천사들은 어디까지나 인도하는 사역을 맡을 뿐이며, 사람을 천국의 시민으로 받아들이시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심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술에서 천사들은 결코 자기 권한으로 사람을 천국이나 지옥에 배치하지 않습니다. 모든 질서와 판단과 수용은 주님으로부터 이루어지며, 천사들은 그 섭리를 기쁨으로 수행하는 봉사자들입니다.

 

이어지는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는 표현도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광’은 언제나 주님의 신적 진리가 드러나는 광채와 그로부터 오는 기쁨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단순히 화려한 천국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하게 될 천국의 생명과 질서, 그리고 그 안에 충만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시작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본문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밖에도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천국으로 인도된 다른 사람들에 관한 많은 경험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앞의 두 사례만으로 모든 사람이 곧바로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어떤 사람은 즉시 천국으로 올라갔고, 어떤 사람은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천국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즉, 주님의 섭리는 획일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다루지 않으며,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정확히 맞추어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많은 경험이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서도 그의 기록 방식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독자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영계의 체험을 끝없이 나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리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정도까지만 사례를 제시하고, 나머지는 의도적으로 절제합니다. 이는 그의 저술이 체험담 자체를 위한 책이 아니라, 체험을 통하여 주님의 질서를 설명하려는 책임을 보여줍니다.

 

AC.319는 AC.317과 AC.318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후 세계에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기본 질서가 있지만, 그 질서가 적용되는 방식과 속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미 세상에서 천국의 사랑과 신앙 안에 살아온 사람은 매우 빠르게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에 따라 얼마의 준비 기간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도 사람을 받아들이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며, 천사들은 그 섭리를 수행하는 사랑의 봉사자들입니다. 따라서 AC.319는 천국 입성이 사람의 공로나 천사들의 결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각 사람의 내적 상태에 따라 베푸시는 질서 있고 자비로운 섭리의 결과임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증언하는 글입니다.

 

 

 

AC.318, 창3 뒤, ‘사후 거의 곧바로 천국에 올라간 처음 사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8 어떤 영 하나가 내게 와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는 얼마 전에 막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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