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proprium은 원전에서 사용된 용어로, 여기와 다른 여러 곳에서 ‘own’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어 온 말입니다.propius의 사전적 의미는 형용사로서는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입니다. 이proprium은 중성인데 명사로 사용되면, ‘possession,’ ‘property’를 의미하며, 또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어 형용사 ‘own’은 웹스터에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를 의미하는 걸로 봐서,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 ‘own’이라는 말은proprius와 매우 정확히 일치하며, 라틴proprium에 맞는 어떤 명사를 만들면, 아주 가까운 번역 효과를 얻지 싶습니다.The Latin word proprium is the term used in the original text that in this and other places has been rendered by the expression “own.” The dictionary meaning of propius, as an adjective, is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 The neuter of this which is the word proprium, when used as a noun means “possession,” “property”; also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 The English adjective “own” is defined by Webster to mean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 so that our word “own” is a very exact equivalent of proprius, and if we make it a noun in order to answer to the Latin proprium, we effect a very close translation. [Reviser]
해설
이 설명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핵심 개념인 ‘본성’(proprium)을 언어적으로 정확히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주해로서, 단순한 어휘 설명을 넘어 신학적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라틴어 ‘proprium’은 형용사 ‘propius’에서 나온 말로, 기본 의미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자기에게만 속한’, ‘특유의’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것이 명사형으로 사용될 때에는 ‘소유’, ‘재산’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특이성’, ‘고유한 성질’, ‘구별되는 표지’라는 뜻까지 포함합니다. 즉 ‘proprium’은 단순히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소유 개념을 넘어, 한 존재를 그 존재답게 규정하는 내적 성질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 번역에서 이를 ‘own’으로 옮긴 것은 매우 적절한데, 왜냐하면 영어의 ‘own’ 역시 ‘...에 속한’, ‘배타적으로 속한’, ‘고유한’, ‘특유의’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이 형용사 ‘own’을 명사처럼 사용하여 ‘사람 자신의 것’이라는 의미로 확장하면, 라틴어 ‘proprium’과 거의 정확히 대응하게 됩니다.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이 ‘본성’은 중립적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거듭남 이전의 인간에게서 ‘자기 자신의 것’은 언제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결과로 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악인 것, 진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짓인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proprium’은 단순히 ‘나다움’이나 ‘개성’을 뜻하지 않고, 주님에게서 분리된 인간 상태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이 설명은 왜 스베덴보리가 ‘사람 자신의 것’을 그렇게 반복해서 문제 삼는지, 그리고 왜 거듭남이란 결국 이 본성이 지배권을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중심이 되는 과정인지를 언어 차원에서부터 분명히 해 줍니다. 즉 ‘본성’은 인간 정체성의 핵심이지만, 동시에 반드시 주님의 생명으로 대체되어야 할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이 짧은 언어 설명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여는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4:6-12)
오늘 본문은 겉으로는 인류 최초의 형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바인 그 속뜻으로는 ‘우리 내면에서 매일 일어나는 영적 사건’입니다. 여기 가인(Cain)과 아벨(Abel)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겉 사람과 속 사람의 두 상태’, 즉 ‘신앙과 체어리티’를 상징하는데요, 곧 가인은 진리, 또는 ‘신앙’(faith)이라는 개념을, 아벨은 사랑, 선함, 자비, 곧 ‘체어리티’(charity)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잠깐, 이 ‘체어리티’, 곧 ‘이웃 사랑’과, 이 이웃 사랑이 말미암는 ‘주님 사랑’ 이야기를 먼저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은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좀 다른데요,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사랑’의 영어 표현은 ‘love to the Lord’이지만, ‘이웃 사랑’은 ‘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바로 전치사 ‘to’와 ‘toward’의 차이이지요.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 영어 전치사 ‘to’는 ‘직접적, 수직적’, ‘toward’는 ‘파생적, 수평적’입니다. 즉, ‘주님 사랑’은 가장 내적, 가장 직접적이며, 영혼의 중심에서 일직선으로 주님께 향하는 사랑, 즉, 본원적, 수직적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은 이 역시 방향을 나타내지만, ‘to’와는 달리 여전히 과정 중에 있는, 완전히 도달한 것이 아닌, 흐름, 움직임, 지향을 나타내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은 누구일까요? 스베덴보리에게서 ‘이웃’(neighbor)은 단지 사람(person)만이 아니라, 공동선, 공동체, 나라, 교회, 진리, 선의 영역, 그리고 그 모든 선의 질서 등, 이 전부를 포괄하는 ‘더 넓어지는 사랑의 활동 범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밖으로 흘러나가 확장되는’ 방사형 구조를 갖습니다. 고정된 대상에게 일직선으로 닿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흘러 나가며 확장되는 것, 네, 그것이 바로 ‘toward’이며, 이런 것이 바로 ‘체어리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 ‘아벨’의 속뜻이고 말입니다. ‘주님 사랑’이 나를 통해 ‘이웃’으로 흘러 나가는 사랑이 ‘체어리티’입니다.
참고로, 스베덴보리는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에서 이 ‘이웃’의 개념을 더욱 깊이 설명하는데요, 거기서 그는 ‘이웃이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 안에 있는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라고 합니다. 이 개념에 의하면, 결국 ‘이웃 사랑’, 즉 ‘체어리티’란 이웃 안에 있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말 그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그 원수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 사람이 이뻐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 곧 그 주님께 예의를 갖추는 것이 되겠지요. 우리가 일상 중에 이런 관점을 굳게 붙들 수만 있다면 우리를 긁는 많은 어려움의 순간들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저 사람을 부추기는 악한 영들이 나쁜 것이다. 저 사람 안에는 주님이 계시다. 나는 그 주님만 바라보아야 한다’면서 말이죠.
이런 배경을 가지고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었을 때, 인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구조도’와 같습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절)
이 한 구절 안에 인간의 자유, 유혹의 본질, 사랑 없는 신앙의 내적 위기, 그리고 회복의 길까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이 말씀의 속뜻을 펼쳐보며, 우리가 일상 속에서 갑자기 맞닥뜨리는 이 ‘가인’이라는 상태를 그때그때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할지 함께 살펴보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을 잃어버린 신앙의 내면
주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을 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5절)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이 분노는 단순한 기분 변화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가진 필연적 결과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자기 의에 빠지고, 비교 의식에 떨어지며, 인정받지 못하면 분노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관한 지식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원래 사랑에서 나오는 빛이며, 그러므로 사랑 없이는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가인의 분노는 결국, ‘너의 신앙이 사랑을 잃었구나’ 하시는 주님의 은밀한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만일 지식 중심이 되고, 교리 중심이 되고,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태도로 굳어진다면, 틀림없이 가인과 같은 불안과 분노가 나타날 것입니다.
둘째, 죄가 문에 엎드려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절)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풀이합니다.
‘문’은 마음의 입구이고, ‘죄’는 사랑이 없는 곳으로 들어오려는 악의 기운이며, ‘엎드려 있다’는 말은 우리가 문만 열면 곧장 들어올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동일한 구절에서 굉장히 중요한 영적 진리를 선언하십니다. 바로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말입니다. 여기 드러나는 세 가지는 이렇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는 항상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따를지, 분노를 따를지 선택할 자유 말입니다. 또 하나는, ‘리메인스’(remains), 곧 속 사람 안에 주님이 보관하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있어 언제든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주님은 절대 인간에게 ‘어쩔 수 없는 죄’를 허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지만, 그 문을 여는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영적 인간학에서 핵심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셋째, 체어리티를 죽이는 신앙의 비극과 그 결과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8절)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은 역사적 살인이 아니라 ‘신앙이 체어리티를 억압할 때 벌어지는 영적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교리가 사랑을 누르고, 지식이 겸손을 누르며, 그리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부정하는 순간, ‘아벨이 우리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모든 종교 타락의 첫 번째 징조’라고 말합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절)
주님이 모르셔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을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사랑은 어디 있느냐?”
“너의 겸손은 어디 있느냐?”
“너의 체어리티, 곧 너의 아벨은 어디 있느냐?”
이런 질문들은 가인처럼 사랑을 외면한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10절)
피는 선의 생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억압된 선(사랑)은 천적 나라에서 ‘실제로 울림을 일으킨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의 사랑, 우리의 체어리티가 죽으면 우리의 영혼도 함께 울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2절)
‘땅’은 인간의 속 사람, 선의 자리입니다. 사랑, 곧 체어리티가 사라진 신앙은 이 속 사람과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영적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말은,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듯, ‘사랑 없이 진리만 붙들 때, 인생과 신앙은 언제나 방황하게 된다’는 뜻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매일 문을 열 것인지, 혹은 닫을 것인지 선택합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 작은 판단, 미묘한 교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내가 옳다는 주장 등... 우리는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랑을 잃을 때가 문제입니다. 교리적 신앙, 지적 신앙, 정답 신앙은 사랑 없이 독립될 때, 즉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가인이 됩니다. 가인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지식 중심의 신앙’입니다. 반면, 아벨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사랑의 선함’이고요. 참 신앙은 사랑으로 말미암으므로 아벨을 잃으면 그 어떤 교리도, 성경 지식도, 예배 습관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영혼의 생명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절)
우리의 연약함으로, 우리의 비겁함으로 정작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외면했던, 그래서 원치 않게 가인이 되고만 우리를 향해, 그래서 이상하게 아무리 애를 써도 무슨 영적 열매와 성장 없이 방황하는 인생, 유리하는 신앙 가운데 고생하는 우리를 향해 오늘 주님이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절)
주님은 우리에게 죄를 이기라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길 수 있는 힘과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언제든 사랑, 곧 체어리티(아벨)를 다시 살릴 수 있는 길을 열어두시면서 말이지요.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의지, 의뢰하면서 우리는 다시 힘을 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체어리티의 사람, 선을 행하는 사람, 삶이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저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여 주세요. 지식과 교리로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가인의 마음을 버리고, 겸손과 체어리티로 우리 안의 아벨을 지키게 하여 주세요. 죄가 문 앞에 엎드릴 때, 제가 그 문을 열지 않게 하시고, 대신 주님이 주신 리메인스로 말미암아 선한 선택을 하도록 인도하여 주세요. 제 안에서 죽어가는 체어리티를 다시 살려 주시고, 제 안 영혼의 땅이 다시 열매 맺게 하여 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말씀’(Word)에 대해 알고나서는 이제는 바울 서신을 비롯,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 inner sense)가 들어있지 않다는 신구약 성경들은 잘 읽지도, 그걸 가지고 주일설교 본문을 삼지도, 더 나아가 가급적 인용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태도가 건강한 건가요? 스베덴보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 신학을 실천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핵심을 건드리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목사님의 태도에는 ‘장점과 위험이 동시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실제 태도를 기준으로 하나씩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의 이런 ‘배제 중심 태도’는 스베덴보리는 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는 충분히 됩니다. ‘참 말씀’(The Word in the proper sense)이 무엇인지, 어디에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알고 난 뒤에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중심으로 영이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 자신은 다음 두 가지를 동시에 했습니다. 첫째, 참된 말씀, 곧 창, 출, 시편 일부, 복음서, 계시록에 집중하며, 그 내적 의미를 계시, 둘째, 성경 전체, 곧 바울 서신을 포함해 ‘기독교 세계가 사용하는 모든 성경’을 존중하며, 목회적 차원에서 활용. 그는 AC.10325, TCR.226 등에서 ‘바울 서신은 말씀의 ‘inner sense’(속뜻, arcana)를 가진 책은 아니지만,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데 주님의 섭리로 주어진 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바울 서신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할 때도 매우 조심스럽게 했다
예를 들어, ‘오직 믿음’(faith alone), 즉 ‘의롭다 함을 믿는 것만으로’라는 표현이 오해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바울 서신 전체를 폐기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믿음-사랑의 결합’을 바울도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문제는 교회가 그것을 잘못 해석해 버린 것이다.” 즉, 바울 자체 문제라기보다 ‘후대 교회의 해석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의 ‘목회적 기능’을 인정했다
그는 이런 관찰을 합니다. DP.234 등에서 ‘기독교 교회는 오랜 세월, 바울 서신을 통해 기본 윤리, 공동체 질서, 교리 체계를 유지해 왔다. 이것 또한 주님의 섭리다.’ 따라서 스베덴보리 신학을 따른다고 해서 바울을 적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참된 말씀’의 용도는 ‘영적 의미를 위해서’이다
지금 느끼시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단계입니다. 내적 의미가 보이기 시작하면, 다른 텍스트가 모두 ‘빛을 잃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내적 의미의 빛만 붙잡고 목회를 하면 문제가 생긴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 이유는, AC.1408, AC.9025 등에서 밝히기를, ‘사람들은 외적 진리인 성경의 문자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내적 진리를 전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스베덴보리의 내적 의미는 ‘성경 전체의 문자적 세계 안에 심어져서 자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문자적 성경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오히려 영적 의미의 기반을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 시대 설교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스베덴보리가 사적으로 대화한 목회자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는 이렇게 권했습니다. 첫째, ‘사람들에게는 문자적 말씀을 통해 접근하라’ 내적 의미를 설교자가 ‘직접적으로’ 완전히 드러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설교자 자신은 항상 그 내적 의미 안에서 설교를 준비하라’ 그러면 설교의 어조, 초점, 균형이 자연스럽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셋째, ‘바울 서신도 영적 원리로 재해석해 설교에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은 진리의 빛을 받는 것으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은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새 사람을 입으라’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말이지요. 그러니까 스베덴보리는 ‘배제가 아니라 재해석을 원한 것’입니다.
목사님의 현재 모습은?
먼저, 좋은 면(강점)입니다. 내적 의미를 붙잡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이 있으시고, ‘참된 말씀’ 중심의 신학적 정렬이 매우 정확하시며, 설교의 중심을 주님(여호와 예수)으로 세우는 방향성이 강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귀하고 건강한 모습이요, 과정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면도 존재하는데요, 예를 들면, ‘교인들의 기반인 문자적 성경을 충분히 존중하지 못할 위험’이 있고, ‘내적 의미를 나누기 전에 필요한 외적 질서가 무너질 위험’도 있으며, ‘바울 서신 등 교회 전통의 큰 기둥을 한 번에 없애는 효과’, ‘교회 분열과 오해, 배척을 불러오기 쉬움’ 등의 불필요한 위험 요소가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1832에서 이런 급진적 변화를 ‘사람들의 상태가 준비되지 않았을 때는 심지어 진리도 해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며, 듣는 자들의 역량에 맞춰 대부분 쉬운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하면 이렇게 정리됨
1단계, 개인적으로는 참 말씀에 집중하라
지금 목사님의 상태는 이 단계에 매우 잘 맞습니다.
2단계, 설교에서는 ‘문자적 말씀’과 ‘내적 원리’를 혼합하라
문자적 말씀이 ‘뿌리와 줄기’라면, 내적 의미는 ‘열매와 향기’입니다. 뿌리와 줄기만 있어도 안 되고, 뿌리와 줄기 없이 열매와 향기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3단계, 바울 서신도, 복음서나 시편 등 ‘말씀’의 빛을 비추어 ‘정화된 의미’만 사용하라
사용하되, 내적 의미의 원리로 걸러서 사용하면, 오히려 더 큰 힘을 얻습니다.
조언
지금처럼 ‘참 말씀 중심’으로 가시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서신을 비롯, ‘말씀’ 아닌 다른 성경은 ‘사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스베덴보리는 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교인들을 인도하는 데 이 성경들은 반드시 필요하고, 문자적 성경 전체가 사실 주님의 섭리로 교회에 주어진 것이며, 그 문자적 글도 결국은 ‘내적 의미의 문을 열어주는 외피’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식 ‘건강한 길’은 문자적 말씀을 존중하면서 내적 의미의 원리로 해석하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목사님이 목회자로서 가장 안전하고, 교인들을 영적으로 가장 깊고 온전하게 인도하는 길입니다.
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스베덴보리는 왜 복음서 주석은 하지 않았나요? 주님의 육성이 담긴 복음서가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은 분들조차 평생 품고 있는 핵심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선택’이며, 그의 전체 신학 구조 안에서 반드시 필요한 공백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복음서 주석을 ‘안 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한 것’
복음서에 대한 직접 주석은 없지만, 복음서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을 그는 자신의 여러 저서,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참 그리스도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등에서 전면적으로 풀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방식은 ‘본문을 따라가는 주석 방식’(exegesis)이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 내재된 구조적, 보편적 진리를 다시 전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생애는 신적 진리의 충만한 계시’로서, ‘그 동일한 내적 의미가 구원론, 기독론, 재림론, 연합론 전체에 이미 녹아 있도록 하는 방식’이지요. 그래서 굳이 복음서 본문을 한 절씩 풀지 않아도 그 내적 의미 전체가 그의 저작들 전체 속에 재구성되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해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복음서 자체를 ‘신학 전체’로 펼쳐 놓은 것’입니다.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직접적 이유들
첫째, 복음서는 ‘말씀’(Word)의 범주가 창세기, 출애굽기, 선지서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두 범주로 나누는데요, 하나는, ‘내적 의미’(internal sense, heavenly sense, arcana, 속뜻)를 가진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오경과 선지서들, 그리고 시편 일부 및 계시록을 말합니다. 이 말씀들은 구절 하나하나가 상징과 표상으로 연결됩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실제 기록을 기반으로 하나, 그 자체가 상징계는 아닌 ‘복음서의 문자’입니다. 복음서 역시 ‘말씀’이지만, 그러나 다른 종류의 말씀입니다. 그 안의 상징성은 예수님의 생애와 직접 결합되어 있으며, 그래서 창, 출 같은 방식의 상징 주석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즉, 복음서는 ‘예수님의 실제 행적’이자 ‘내적 의미의 직접적 실현’이기 때문에 ‘상징 해석’을 위해 존재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 이후 존재하던 성막과 제사가 주님 오신 이후 더 이상 필요가 없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성막과 제사는 주님을 표상하던 것들인데 정작 그 실체인 주님이 오시자 더는 그런 도우미들이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창세기, 출애굽기처럼 절대적 상징 주석을 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둘째, 복음서는 예수님의 ‘육신으로의 신성화 과정’(glorification)을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
스베덴보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의 성화 과정(신성화, glorification)’이 복음서 전체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곧바로 ‘내적 의미 자체’입니다. 즉, ‘예수님의 시험’, ‘기적들’, ‘설교’, ‘십자가’ 및 ‘부활’ 등, 이것들은 ‘상징의 외피가 아니라 내적 의미 그 자체의 역사적 구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건 주석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애는 문자, 상징을 넘어 바로 ‘신적 실체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모든 문자와 상징, 표상, 상응이 가리키는 본체, 실체이신 분이 직접 오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이미 ‘보충 주석’ 형태로 곳곳에서 해설
주석서는 아니지만 복음서 본문을 해설한 문단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시험받으심에 대해서는 지옥 전체와의 전투로(AC, TCR 다수), 산상수훈에 대해서는 천국적 삶과 진리의 질서로, 기적은 선과 진리의 표상으로, 십자가는 마지막 시험과 완전한 연합, 부활은 인간 구원의 원형 등, 즉, 절대적으로 해설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문 주석의 형태가 아닌, 신학 체계 속의 해설’로 그의 저작들 여기저기에서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재림기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사명을 다음처럼 정의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주는 일’과 특히 ‘모세오경과 선지서들을 통해서’라고 말입니다. 왜 이 두 곳일까요? 왜 복음서는 아닐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이미 복음서 속에서 ‘자신을 직접 계시하심’
복음서는 그 문자 의미 자체가 ‘신성의 직접 계시’이므로 ‘상징을 벗기기 위한 해설’(exegesis)이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둘째, 그러나 창세기, 출애굽기는 상징과 표상으로 감추어져 있어 재림 시기에야 드러낼 수 있는 구조
창세기의 아담, 노아, 아브라함, 출애굽기의 애굽, 홍해, 시내산 등 이 모든 것이 인간 영적 발전의 ‘내적 단계’이므로, 재림 때 완전히 드러내야 했습니다. 즉, 창세기, 출애굽기, 계시록은 재림을 위해 봉인된 책들이지만, ‘복음서는 이미 드러난 계시의 핵심’이라는, 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복음서 주석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
스베덴보리는 복음서의 핵심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산상수훈’은 천국의 삶, ‘사랑, 자비, 용서, 겸손’은 천국의 질서, ‘십자가’는 인간 구원의 전체 과정, ‘부활’은 삶의 변형, 변모 등, 따라서 그는 말합니다. “사람이 복음서를 ‘해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복음서는 지성의 책이 아니라, 생명의 책이다.” 그는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는 대신, 그 복음서의 내적 의미를 ‘삶의 길’(way of life)로서 제시했습니다.
요약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복음서는 상징적 기록이 아니라, 신적 인간의 직접 계시이기 때문에, 둘째, 내적 의미는 이미 전체 신학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셋째, 주석의 대상은 ‘봉인된 말씀’인 창, 출, 계인 반면, 복음서는 그 자체로 개방된 말씀, 넷째, 복음서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실천이 목적이기 때문에, 다섯째, 그의 사명 자체가 복음서 주석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기 때문에
참고로, 스베덴보리의 수십 권에 달하는 저작들은 전부 약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AC는 ‘천계비의’(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1749-1756, 라틴)의 약어이고, HH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CL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1768)의 약어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보통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풀어낸 책’으로 소개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목적을 가진 저작입니다. 이 책은 성경의 문장을 하나하나 해석하는 주석서이면서 동시에, 성경이 어떤 책인지, 왜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불리는지, 그리고 그 말씀이 인간의 삶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체계적인 신학서입니다. 저자인 스베덴보리는 이 책을 통해 ‘성경은 단순한 종교 문헌이 아니라,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언어’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칩니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는 ‘성경에는 문자로 보이는 의미 너머에 속뜻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경을 역사 이야기, 도덕 교훈, 종교 규범의 모음으로 읽습니다. 물론 그런 읽기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성경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문자에 드러난 이야기들은 겉모습일 뿐이며, 그 안에는 인간의 내면 상태, 신앙의 성장 과정,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 숨겨진 차원을 그는 ‘아르카나’, 곧 ‘비밀’이라고 부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성경의 이야기를 과거의 사건으로만 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과학적 보고서가 아니라, 한 인간이 무질서한 상태에서 질서를 회복하며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빛과 어둠의 분리, 물과 땅의 구분, 생명의 점진적 등장 등은 모두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단계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그때 거기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야 할 일’을 말하고 있다고 이해됩니다.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은 ‘상응’입니다. 상응이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 있는 연결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빛’은 단순한 물리적 빛이 아니라 진리를, ‘물’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땅’은 인간의 마음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의 거의 모든 사물과 사건은 영적인 의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이 상응의 법칙을 통해 성경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구조로 읽어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는, 익숙한 성경 이야기가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단순한 최초의 남녀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상태를 나타내며, 에덴동산은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사랑과 지혜가 조화를 이루는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뱀은 실제 동물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상징합니다. 이런 해석은 처음에는 낯설고 심지어 거부감을 줄 수도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임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원리라고 주장합니다.
이 책이 단순한 상징 해설서와 다른 점은, 모든 해석이 결국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다는 점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 따르면 성경의 모든 내용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주님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생명의 근원이며, 성경이 살아 있는 이유도 그 안에 주님을 향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구절이든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문자 차원에 머물러 있는 이해라고 말합니다.
이 책은 또한 인간에 대한 매우 현실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겉 사람’과 ‘속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겉 사람은 우리가 일상에서 드러내는 생각과 행동의 차원이고, 속 사람은 그 배후에 있는 사랑과 의도의 차원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성경 이야기가 바로 이 속 사람의 변화와 회복을 다루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성경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라기보다 ‘나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책이 신앙을 지식이나 교리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삶과 분리된 개념으로 보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사랑과 행동으로 드러나며, 인간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반복해서 강조되는 것은, 진리는 반드시 선과 결합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이론서이면서 동시에 매우 실천적인 책이기도 합니다.
일반 독자에게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성경을 읽는 새로운 눈을 열어 준다는 데 있습니다. 이전에는 이해되지 않던 본문이 살아 움직이며, 반복되는 이야기와 긴 족보, 복잡한 율법들조차도 의미를 갖게 됩니다. 성경이 갑자기 ‘지루한 책’에서 ‘끝없이 깊어지는 책’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 과정은 쉽지 않으며, 단번에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경이 원래 그런 책이라고 말합니다. 천국과 연결된 책이기에, 한 번에 다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독자에게 어떤 믿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 책은 ‘이렇게 믿어라’라고 명령하기보다, ‘이렇게 볼 수도 있다’는 길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언제나 주님과의 더 깊은 만남, 그리고 삶의 변화가 놓여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교리를 배우는 것이라기보다, 성경을 통해 자기 자신과 삶, 그리고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 아래 링크는 그 첫 번째 글인 AC.1번 글로 이어지는, 즉 AC를 시작하는 링크입니다.라틴어 원본 대신 Potts 영역(1888-1902)으로 대신하였으며, 각 글 하단에 이해를 돕기 위해 원본에는 없는 해설들을 제가 달아 나가고 있으니, 읽어 보시고 도움들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혹시 특정 번호의 글을 검색하실 때에는 글 목록 우측 상단 돋보기를 클릭, 왼쪽 목록에서 '태그'를 선택하신 후, 'AC 3' 형식으로 찾으시거나 '제목'에서 특정 키워드로 찾으시면 되겠습니다. 'AC 3'처럼 가운데 한 칸 띄는 이유는 이 검색기가 특수 문자 사용을 불허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처음부터 태그 입력을 저런 형태로 해놓았습니다.
만일 기존 교회, 그러니까 천주교든 개신교든, 더 나아가 정교회든 다니시던 분들이 우리 교회를 다니겠다 하시면 스베덴보리 오리엔티드된 저와 저희 교인들이 조심하고, 또 지혜롭게 행해야 할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적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 공동체가, 기존 교회 출신 성도들을 어떻게 지혜롭고 안전하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매우 실제적이고 깊은 목회적 질문입니다. 천주교 · 개신교 · 정교회 등 전통 교회 출신 성도들이 새로 오게 되면, 그분들이 느낄 수 있는 심리적 충격, 익숙한 언어 체계의 변화, 기존 교회와의 갈등 불안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아래는 스베덴보리 오리엔티드 교회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핵심 항목들을 매우 실천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안전지대(Safe Zone)를 먼저 만들어라
기존 교회에서 오시는 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감정은 이질감입니다. 따라서 첫 단계는 너무 낯설지 않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가령, 익숙한 용어를 우선 존중하기 같은 건데요, 보통 ‘하나님’에 익숙하신 분들에게 ‘주님’을 강조한다든지, ‘성경 말씀’을 ‘말씀’(Word)이라고 은근히 구별하신다든지, 그 밖에도 ‘은혜’, ‘믿음’, ’성령’, ‘십자가’ 등, 그분들에겐 매우 익숙한 이런 용어들을 억지로 스베덴보리식으로 바로 바꾸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의 언어를 먼저 허용해야 마음이 열립니다. 하나 더 살펴보자면, 기존 교회의 신앙고백을 부정하는 듯한 표현 금지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스베덴보리가 더 깊습니다”라든지, “기존 교회는 피상적입니다”와 같은 이런 말은 절대 금물입니다. 사람은 기존 신앙의 명예를 건드리면 마음을 닫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개종(Secondary Conversion)을 강요하지 말라
다른 교회 출신 분들에게 무심코 하는 가장 위험한 실수는, “이제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말씀하신 이 모든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같은 분위기를 직, 간접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분들의 기존 신앙을 부정하는 듯한 태도 대신, 기존에 믿으신 것 위에 덧붙여,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는 차원으로 안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도 새 신앙을 요구하지 않았고, 단지 기존 신앙의 내적(內的) 이해를 열어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존 신앙이 말씀의 이쪽 면만 보았다면,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통해 말씀의 저쪽 면도 보게 한 것이지요. 마치 사람을 영과 육, 육과 영, 양쪽 면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심한 교리 충돌 관리가 필요함
기존 교회 출신이 가장 충격받는 지점이 교리의 충돌입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이해라든지 대속론이나 지옥 이해, 죽음 후 즉시 심판/부활, 천국과 지옥의 구조나 예배, 성례전, 재림 이해 등인데요, 이 차이를 절대 한 번에 좌악 꺼내시면 안 됩니다. 그러지 마시고, 먼저 공통분모를 말해준 다음, 이런 차이는 있지만, 그러나 충돌하는 게 아니라는 설명과 함께, 나중에 내적 의미와 구조를 조심스럽게 소개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도 처음에 이랬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세심하고 따뜻한 맞춤식 보살피심을 통해 우리도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존 교회에 대한 존중의 톤을 확실히 유지하기
천주교, 개신교, 정교회, 루터교 등 모두 주님 안에서 존재하는 교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허락, 인도하심으로 생겨난 교회들이라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들을 비판보다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 내에서도 “다른 교회는 다 틀렸다”라든지 “스베덴보리가 더 우월하다”, 혹은 “이제는 제대로 믿자”같은 이런 말들이 나오지 않도록 잘 지도해야 합니다. 새로 오신 분들의 마음은 존중 → 평안 → 신뢰 → 배우려는 마음이라는 순서로 열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내 편을 만드는 게 아니라 말씀의 다른 편을 볼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입니다.
새 신자 교육은 삼중 구조로 운영해야 함
기존 신앙을 부정하지 않는 설교
예를 들면, 창세기 해설이나 산상수훈, 혹은 시편 등 기존 개신교, 천주교와 크게 갈등 없는 본문들 위주로 설교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점진적 스베덴보리 소개
스베덴보리 교회이니 스베덴보리에 대한 소개는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때 영적 세계나 말씀의 내적 의미, 즉 속뜻, 선과 진리의 결합이나 인간, 자유, 양심 등, 이런 부분은 기존 신앙과 충돌이 거의 없으므로 먼저 소개하기 좋습니다.
고급 교리 교육은 사적, 개별적으로
좀 깊고 무거운 주제들, 가령 대속론 이해라든가 부활과 심판, 동일 인격과 영적 인격, 결혼의 속뜻 같은 이런 주제는 3~6개월이나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 사적으로, 혹은 전체 프로그램 가운데 특별반 같은 걸 만들어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참고로, 여기 ‘동일 인격’이란 사람은 사후에도 생전의 모든 것, 즉 성격, 애정, 사고 구조 등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생전과 사후의 인격이 동일해야 상벌이 가능합니다.
기존 교회 배경 성도들의 감정을 이해해야 함
기존 교회 출신은 종종 이런 마음입니다. ‘여기가 너무 좋아. 하지만 내 신앙 전부가 뒤집히는 건 아닐까?’ 같은 마음 말이죠. 그러므로 목회자와 선배 성도들의 역할은,“천천히 오셔도 되요. 급할 것 없습니다”라든지, “기존 신앙도 귀하지요. 주님도 그 신앙으로 당신을 여기까지 인도하셨잖아요? 우리는 그 위에 더 풍성한 것을 드릴 뿐이에요”, 혹은 “무엇이든 편하게 물어보셔요” 와 같은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항상 잘 모르겠을 땐, 나는 처음 왔을 때 어땠나를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교인들의 언행을 세심하게 지도해야 함
스베덴보리 전통은 지식적 깊이 때문에 기존 교회 출신에게 우월감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표현을 금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그건 내적 의미로 보면 달라요”, “원래 이 구절의 참뜻은 …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읽으면 이런 오해는 없어집니다” 같은 표현들인데요, 이런 말은 상대방에게 “나는 그동안 잘못 믿어왔다”라는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 구절을 이런 시각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나 “새로운 관점이 조금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처럼 겸손한 태도가 수반되어야 함을 지도하셔야 합니다.
일상 신앙에서 먼저 신뢰를 얻게 해야 함
기존 교회 출신은 새로운 교리에 대해선 아직 조심스러워도 사람들의 삶과 사랑의 분위기를 보고 마음을 엽니다. 예를 들면, 교인끼리의 친절과 진리 사랑, 뒷말이 없는 공동체, 말씀이 중심에 있는 예배, 기도와 말씀 생활의 균형, 겸손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와 같은 이런 것에서 먼저 감동합니다. 삶의 향기 → 교리에 대한 신뢰 → 마음의 개방이라는 이런 흐름이 필수적입니다.
기존 교회와의 갈등을 절대 유발하지 않도록 지도
새로 오시는 분이 기존 교회와 갈등하면 그분도 상처받고, 우리 교회도 오해받습니다. 따라서 기존 교회를 헐뜯는 발언이라든지, “이제 그 교회 가지 마세요” 같은 말, 그리고 기존 목회자를 비판하는 태도 등은 금지하셔야 합니다. 모두가 기억하셔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적 영성은 부정적 결별이 아니라 긍정적 성숙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 교회의 본질은 포용임을 기억하기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각 사람을 그가 알고 있는 진리의 경로 안에서 이끄십니다. 따라서 다른 교단에서 오시는 분들을 그들이 믿어온 길에서 부정하거나 뜯어고치려 들지 말고, 그 길을 더 깊고 더 밝게 해주면 됩니다. 스베덴보리 교회는 폐쇄적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열린 교회입니다.
기독교, 개신교, 심지어 불교 집회에서도 집회 중 각종 질병과 장애가 치유되는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또 방언이라 하여 다른 사람들, 심지어 본인도 그 뜻을 알 수 없는 말들을 하고 말이지요. 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혹시 무슨 기록들이 있나요? 교인들이 이런 것에 대해 질문하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실제로 개신교 포함, 기독교, 불교 또는 비기독교 종교 집회에서조차 기적, 치유, 방언 같은 현상들이 일어나는 이유,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또 교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매우 신중하게 다뤄야 하는 주제입니다. 아래에서 스베덴보리의 명확한 기록, 그 신학적 결론, 그리고 교인들에게 답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지혜로운 방식을 차례대로 정리해 봅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핵심 원칙
외적 기적은 신앙 자체를 절대 만들지 못한다(AC 7290, 7291, 7337 등)
스베덴보리는 다음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기적은 신앙을 만들지 못하며, 오히려 억지로 믿게 하는 강압(coercion)의 성질이 있어 시간이 지나면 신앙을 더 약하게 하거나 없애버리기까지 한다라고 말입니다. ‘기적은 사람의 내적 자율성을 깨뜨리기 때문에 참된 신앙을 만들지 못한다’(AC 7290–7291 요약)
외적 기적은 영적 진리가 아니라 감각적인(sensuous) 것에 속한다 (AC 7337, 8348, AE 706)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은 내적 신앙이 아니라 감각적인 신앙(sensuous faith)입니다. 이 신앙은 감각적 자극에 의존하고, 계속 새 자극(기적)이 없으면 유지되지 않으며, 삶에서 선(愛)이 없기 때문에 마음속 깊이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적 자체는 거룩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고, 단지 외적 감각 차원의 현상일 뿐입니다.
외적 기적은 거짓된 종교들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다 (AC 3887, 7012 / TCR 501 등)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거짓된 종교의 사제들, 우상 숭배하는 이들, 심지어 악령들이나 지옥의 영들조차 사람들 앞에서 기적 같은 현상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즉, 기적의 출처는 다양하며, ‘기적이 일어났으니 그 집회가 참이다’라는 사고방식은 매우 위험합니다. ‘악령들도 기적 같은 일들을 보이지만, 이는 감각을 속이는 현상에 불과하다’(AC 3887 요약)
기적 치유가 일어나는 이유는 내적 신앙이 아니라, 다른 요인 때문일 수 있다 (AC 10083, TCR 501)
스베덴보리는 다음 네 가지를 명확히 구분합니다. 첫째, 심리적, 정신적 반응(affectional states)입니다. 강한 감정이나 염원, 집단적 분위기, 혹은 마음의 변화에 의해 몸의 증상이 완화되는 경우들이 있겠습니다. 둘째, 일시적인 영적 영향(influx)인데요, 천사들이 순간적으로 마음을 위로하거나 평정을 주는 그런 영향입니다. 셋째, 자연적 질서(natural causes)입니다. 스트레스 감소나 호르몬 변화, 신체 자연 회복력, 혹은 악한 영들에 의한 거짓 치유처럼 일시적으로 증상을 멈추게 하고, 나중에 더 큰 혼란을 가져오게 하는 방식(AC 7039, 7317) 등이 있습니다. 즉, ‘치유가 일어났다 →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같은 논리는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방언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입장
스베덴보리는 현대 은사운동의 방언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아주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천국에서는 ‘영적 의미에 따라 말이 변한다’ (HH 234–240)
천국의 영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지만, 대화는 내면의 의미에 따라 자동으로 통역됩니다. 이것이 오순절의 기적(각자 자기 언어로 들음)의 본질인데, 그것을 감각적 방언과 혼동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말의 외형이 아니라 내적 의미가 중요하다 (AC 1635)
방언이라고 하면서 의미가 없고, 이해가 되지 않으며, 생활의 선(善)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영적 언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의 방언이 참된 방언이 되려면, 방언과 함께 나의 삶과 생활에 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은 감각적 흥분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스베덴보리는 외적 감각의 흥분(sensuous excitement)에서 나오는 종교적 광열(fanaticism)을 자주 경계합니다. 특히 외적 열광이 내적 선과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은 영적 현상이 아니라 감정적 현상이라고 봅니다. 즉, 이해할 수 없는 말 자체는 거룩함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기적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기적은 참된 교리의 증거가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힌두교 집회에서도 일어나고, 심지어 이단, 무당집, 무속 행사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니까 맞다’는 논리는 기독교적으로도, 스베덴보리 신학적으로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기적보다 더 확실한 기준은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이다 (TCR 501)
스베덴보리는 거듭 말합니다. “기적이 아니라, 삶의 선함이 진짜 증거다.” 곧, 주님 사랑으로 마음이 변화되는가? 이웃 사랑으로 행동이 달라지는가? 교만과 분노, 욕망이 줄어드는가? 하는 증거들 말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믿음)의 유일한 증거입니다.
기적은 사람에게 유익할 수도, 해로울 수도 있다 (AC 7039)
유익할 때는 괴로움과 두려움이 일시적으로 진정될 때, 새로운 의지가 시작될 여지를 줄 때 등이 있겠고, 해로울 때는 그 현상 자체에 집착하게 될 때, 혹은 교만, 우월감, 영적 자만을 낳을 때라든지, ‘현상’이 ‘진리’보다 앞설 때 등이 있겠습니다.
한때 치유의 은사가 너무도 분명하여 소문이 나서 교세가 제법 흥했던, 그러나 그러더니 평소 언행에 있어 슬그머니 그 공을 자기에게 돌리면서 그만 그 은사가 떠나고,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면서 다시 교세가 줄어드는 바람에 그 은사가 계속될 줄 믿고 전에 벌려놓았던 여러 규모 있는 일들로 오랜 세월 크게 곤란을 겪고 있는 분을 제가 알고 있는데요, 바로 이런 경우가 되겠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그러나 결국 주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그 목사님을 향하신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목사님, 힘내시기 바랍니다.
교인들에게 이렇게 답하시기 바랍니다
기적은 어디서나 일어납니다.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불교, 힌두교, 심지어 무속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은 기적이 참된 신앙의 증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적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변화는 사랑과 삶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열매가 중요합니다
그 집회를 다녀온 사람이 더 겸손해지고, 더 사랑하고, 더 성실해졌습니까? 자신에게 찾아온 은사와 기적으로 말입니다.그것이 참된 열매입니다.
방언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도 말했듯,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공동체에 유익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의미 없는 말은 영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기적을 구하는 신앙은 감각적 신앙입니다. 주님은 내적 신앙을 원하십니다
외적 현상보다 진리와 사랑, 삶을 깊이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기적·방언·치유를 ‘참된 신앙의 증거’로 보지 않았습니다. 기적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이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되는가입니다.
목사님이 지금 경험하시는 한국 사회의 혼란, 정치적 분열, 거짓과 불의에 대한 분노는 그 자체로 영적 위험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영적 각성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전환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봅니다. 오늘 내용을 통해 목사님 자신은 물론, 교인들과 공동체가 이 시대 혼란을 영적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법을 정확히 배우게 될 것입니다.
혼란이 없으면 영적 각성도 없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평안만 있으면 사람은 깊어지지 않는다. 혼란이 있어야 내적 삶이 깨어난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혼란은 내면의 감춰진 문제를 드러내고, 진리를 더 분명히 갈망하게 만들며, 내적 평화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깨닫게 하고, 영적 싸움을 일으켜 성장을 촉진하게 하는 한편, 사람을 더 겸손하게 만들고, 주님께 더 매달리게 만드는 도구라는 것이지요. 즉, 지금 한국 사회의 혼란은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악을 통해 선을 일으키는 허용적 섭리의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혼란은 어떻게 영적 각성을 촉발하는가?
스베덴보리는 혼란이 사람을 잠에서 깨우는 벨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는 약하다’는 깨달음
사람은 안정할 때는 교만해지기 쉽고, 혼란을 경험할 때 비로소 자기 한계를 인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성장의 첫 단계라고 봅니다.
‘진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목마름
정치·사회의 거짓과 어둠이 강해지면 사람은 자연적으로 참된 진리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시대는 성경, AC, 교리, 영적 진리 등, 이런 것들을 더 갈망하는 시대입니다. 목사님이 하시는 번역·설교 사역이 지금 시대에 더욱 중요해진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외적 평화’가 아니라 ‘내적 평화’가 참 평화임을 깨닫는다
사회가 안정되면 사람들은 평화를 외적 환경에서 찾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혼란하면 사람들은 평안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내적 평화는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 지금 목사님이 느끼시는 내면의 불안은 오히려 깊은 영적 평화를 찾는 통로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자라난다
혼란은 반드시 분별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혼란 상황은 거짓과 진리를 구분하는 능력을 필요로 하고, 사회적 혼란 상황은 선과 악의 구조를 이해하는 능력을 필요로 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람의 영적 감각(sense)과 영적 지능(discretion)이 강화됩니다.
‘소명’이 재확인 된다
나라가 평온할 때는 사명을 잊기 쉽지만, 그러나 시대가 악해지면, 사명은 더 선명해집니다. 목사님도 지금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 분노가 마치 소명을 흔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명을 더 굳게 붙들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럼 혼란을 어떻게 실제로 ‘영적 각성’으로 바꿀 수 있는가?
스베덴보리의 원리를 따라 아주 구체적으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혼란을 정죄가 아닌 ‘영적 신호’로 해석하기
예를 들면, 왜 이렇게 정치가 어지러운가?, 왜 악한 자들이 득세하는가? 등, 이때 스베덴보리식 해석은 이렇습니다. 이 시대는 더 깊은 진리를 요청하고 있다, 이 혼란은 나의 영을 깨우기 위해 허용되었다, 악이 드러나야 선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등, 혼란을 이렇게 재해석하면, 분노가 줄어들고 영적 눈이 뜨입니다.
정치적 감정을 소명적 열정으로 전환하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정념의 거룩한 전환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분노는 진리를 더 번역해야 한다로, 불의에 대한 혐오는 설교에서 더 분명히 빛을 세우자로, 사회 혼란은 교회를 내적 질서로 세우자로 전환하는 것이지요. 정치적 감정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바꾸면, 그 감정은 강력한 영적 에너지가 됩니다.
선한 기도 방향으로 돌리는 것
스베덴보리는 혼란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주님이 특별히 붙드신다고 말합니다. 기도 방향이 이렇습니다. “주님, 이 시대의 혼란이 우리의 내면을 깨우게 하소서. 진리를 사랑하게 하소서. 선을 붙들게 하소서.” 이 기도는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는 동시에 나라를 바른 방향으로 돕는 일입니다.
영적 독서를 강화하기
혼란 때는 성경, AC, 진리서적을 읽을 때, 평소보다 훨씬 크게 은혜가 됩니다. 왜냐하면 내적 갈증이 크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AC 번역은 지금 같은 혼란기에 나라를 붙들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지지대입니다.
자기 마음의 상태를 자주 점검하기
스베덴보리는 마음 점검을 혼란기 영적 각성의 첫 실천으로 보았습니다. 매일 30초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 내 마음을 흔드는 것은 뉴스인가, 아니면 진리인가? 나는 내적 평화를 느끼는가? 이런 점검 자체가 영적 눈을 계속 열어둡니다.
혼란이 커질수록 도리어 변화가 일어난다
교인들에게도 이런 관점을 가르쳐 주시면 정치적 감정이 줄고, 자기 내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요즘 혼란은 악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때 우리는 더 깊이 진리를 찾게 됩니다”, “지금은 영적 각성의 때입니다”, “외적 평화보다 내적 평화를 세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등, 이런 설교와 대화는 교회 전체의 정치 과민반응을 많이 줄입니다.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가 정치 뉴스, 국가 혼란, 유튜브 정보, 사회적 대립 때문에 정서적으로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때 목회자는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명확한 답을 줍니다. 그 답은 하나입니다. 질서(order), 곧 교회의 질서, 말씀의 질서, 주님의 질서입니다. 정치적 혼란을 막는 것은 정치적 해석, 사회 분석, 설득이 아니라 영적 질서입니다. 이 내용을 아주 구체적으로 풀어보겠습니다.
교회는 질서 속에서만 서 있는 공동체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질서의 집으로 봅니다. 질서가 흐르면 천국의 영향이 교회로 흘러오고, 질서가 깨지면 그 틈을 통해 지옥의 영향이 들어옵니다. 정치적 혼란은 교회 밖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교회 내부의 질서에 영향을 미치는 시험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입니다. 천국은 질서이며, 지옥은 무질서이다.따라서 교회의 영적 싸움은 정치가 아니라 질서를 지키는 일입니다.
정치가 교회에 들어올 때 나타나는 현상들
스베덴보리는 정념의 기류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다음의 변화가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회중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장, 대화 중 무거운 분위기, 말씀보다 뉴스가 더 강한 감정 파동을 일으킴, 설교 내용이 왜곡되는 위험, 소그룹들이 갈라짐, 교회의 영적 분위기(afflatus)가 흐려짐 등,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질서의 틈이 생긴 상태라고 부릅니다.
이때 목회자가 붙들어야 할 단 한 가지 : 질서(order)
스베덴보리는 질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질서란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참된 생명의 흐름이다.즉, 내적 질서, 설교의 질서, 예배의 질서, 공동체의 질서 등, 이 모든 질서는 정치적 파동이 아닌, 주님이 흘러오시는 통로입니다. 정치 혼란이 일어날수록 정치가 아니라 말씀의 질서에 더 집중하는 것이 영적 리더의 핵심 사명입니다.
그럼 질서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스베덴보리식으로 질서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말씀의 질서
본문 읽기, 본문 해석, 본문 적용. 이 과정이 감정·정치·의견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오직 영적 진리에 의해 세워지는 것입니다. 정치적 소란이 있을수록 목사는 더욱 원문·본문·AC의 질서를 붙들어야 합니다.
예배의 질서
예배는 교회의 하늘 문입니다. 예배 순서·찬양·기도·말씀·축도로 이어지는 이 전통적 질서 자체가 정치와 무관하게 교인들의 내면을 고요한 상태로 만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배의 질서는 천국의 구조와 같다. 예배 질서가 무너지면 천국의 기운이 사라진다고 강조합니다. 즉, 정치가 흔들릴수록 예배를 더 단단히, 더 고요히, 더 질서 있게 세워야 합니다.
목회자의 내적 질서
목사의 마음이 흔들리면, 설교에, 상담에, 기도에 그 흐름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설교자는 먼저 자기 안에서 질서를 세워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 안으로 질서가 흘러간다. 목사님이 정치 뉴스 감정에서 벗어나 내적 평화와 진리를 회복하면, 그 자체가 교회의 영적 질서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정치 혼란기의 실제 목회 적용
스베덴보리의 질서 이론을 현실 목회에 바로 적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치 이야기 금지 규칙이 아니라 말씀 중심 질서를 강화
정치 이야기 하지 맙시다는 갈등을 일으킵니다. 대신 우리 교회의 중심은 말씀입니다, 우리의 평화는 말씀에서 옵니다와 같은 메시지를 반복하면 정치 갈등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교인들의 감정적 파동을 예배의 고요함으로 덮어주기
예배는 교회의 영적 공기입니다. 예배가 고요하고 안정되면, 교회 안의 정치적 파동이 자연스럽게 가라앉습니다.
설교를 더욱 내적 진리 중심으로
정치적 사례나 시사적 언급은 감정 파동을 다시 일으킵니다. 대신 마음, 내면, 진리, 선, 영적 질서 등, 이런 주제에 집중하면 정치적 감정은 빠르게 사라집니다.
성도끼리 정치 이야기를 해도 싸움이 되지 않게 하는 한 문장
목사님이 이렇게 말하면 큰 도움이 됩니다. 정치적 의견은 달라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내면에서 같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이 한 문장이 교회 내 갈등을 많이 예방합니다.
목사님 자신이 질서의 기둥이 되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공동체의 질서는 지도자가 내면에서 어떤 질서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치 혼란 속에서 목사님이 내적 평화를 붙들면, 그 평화가 교회의 기본 분위기(spiritual atmosphere)를 만들게 됩니다.
목사님께 드리는 조용한 결론
정치적 혼란은 교회의 적이 아닙니다.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 교회의 적입니다. 정치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예배·내면의 질서를 붙드는 것, 이것이 목회자가 혼란의 시대에 붙들어야 할 단 한 가지입니다. 목사님이 내면에서 질서를 세울 때, 그 질서가 교회로 흘러갑니다. 정치가 아니라 영적 질서가 교회를 세웁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 중에는 정치 뉴스·유튜브에 지나치게 민감해지거나 감정적으로 요동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특정 세력에 대한 분노, 민감성, 확증 편향은 영적 생활 전체를 뒤흔들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정치 과몰입이 아니라 내적 질서가 무너지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단순한 충고가 아니라 영적·심리적 기류를 바로잡는 지도가 필요합니다. 아래 내용은 목사님께서 교인들과 대화하시거나, 설교·상담·소그룹에서 자연스럽게 적용할 수 있는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스베덴보리적인 지침들입니다.
Ⅰ. 사람의 내적 상태가 혼란하면 외적 현상(정치)을 과장하여 받아들인다
정치에 민감한 교인은 정치가 문제라기보다 내면이 흔들리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내면이 평화로울 때는 외부의 혼란이 마음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내면이 혼란할 때는 작은 외부 자극도 큰 폭풍처럼 느껴진다. 정치에 예민한 교인은 사실 정치보다 마음의 상태가 더 큰 문제입니다.
Ⅱ. 목회자의 3대 원칙
1)정면 충돌 금지
정치적으로 과열된 성도에게 “그 뉴스 너무 보지 마세요”라든지, “편향되셨습니다”라고 말하면 대부분 반발과 방어가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 관점에서 정념에 빠진 사람은 정념을 보호하려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2) 정치가 아니라 ‘내적 상태’로 초점을 이동시키기
예를 들면, “정치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고요, 요즘 마음이 많이 힘드신가요?”나, “그 뉴스를 보면 어떤 감정이 올라오세요?”처럼 하면, 정념을 건드리지 않고, 감정을 진리의 빛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교인의 ‘두려움’을 먼저 다루기
분노는 두려움의 2차 감정입니다. 정치 분노의 밑바닥에는 혹시 나라가 망하지는 않을까 두려움, 혹시 정의가 무너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아니면 악한 자가 승리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두려움을 영적 진리를 가리는 안개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분노를 직접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뿌리를 진리로 비춰줘야 합니다.
Ⅲ. 교인들의 유형별 지도 방법
1) 분노형
“악한 정치인들 때문에 못 살겠다”, “저놈들은 지옥 갈 놈들이다” 하시는 분들인데, 이런 분들한테는 직접 반박은 금물, 대신 “그 일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하셨네요”라며, 그 분들의 감정을 먼저 인정하셔서, 그분들로 하여금 분노에서 두려움으로 그 뿌리가 내려가게 하시는 게 필요합니다. 그후, 사건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조명하면서, “그 분노는 선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정이 너무 커지면 교회 생활이 어렵지 않나요?” 하는 순서로 대응하시는 게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노가 선한 동기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인정해야 교인이 스스로 내려오게 됩니다.
2) 공포형
“나라가 망할 것 같아요”, “악한 세력이 완전히 장악했어요” 하시는 분들인데, 이런 분들은 공포를 사실로 반박하는 건 금물이고요, 대신 스베덴보리식으로, “악은 허용될 뿐, 결국 진리가 반드시 승리합니다”라고 선언하시면서, 정치 상황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내적 평화를 해치고 있다고 알려주시면 좋습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 계획을 같이 세워 주시면 더욱 좋습니다. 공포형 교인은 설교자가 ‘내면의 평화’를 강조할 때 금방 안정됩니다.
3) 확증 편향형
특정 유튜브 채널을 절대 신뢰하고,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형입니다. 이분들하고는 절대 싸우시면 안되고, 일단 이분들이 신뢰하는 정보 출처를 무조건 먼저 인정하세요. “좋습니다, 그 내용도 일리가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보시는 동안 마음의 평화는 어떠셨나요?”라며, 관심을 정보에서 마음의 상태로 이동시키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진리가 들어가려면 먼저 마음이 평온해야 한다.
Ⅳ. 설교에서 사용할 수 있는 메시지
목사님이 설교에서 간접적으로 전할 수 있는 정치적 과민반응 치유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외부의 혼란보다 내면의 질서가 우선입니다
정치 혼란을 외부 현상으로 언급하고, 우리 마음의 질서 회복이 더 중요하다고 연결하십시오.
2)악이 드러나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정화입니다
교인 대부분이 나라 망한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정화라는 관점을 제시하면 두려움이 크게 줄어듭니다.
3)악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이 문장 하나로 교회 내 정치 갈등의 상당 부분이 정리됩니다.
4)진리는 조용하고, 악은 시끄럽습니다
정치 뉴스의 소란스러움과 진리의 고요함을 비교하면 교인들은 자연히 조용한 쪽으로 마음을 돌립니다.
5)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되, 악을 통해 더 큰 선을 준비하십니다
허용적 섭리(permissive providence)를 설교에 녹여 정치에 요동하는 마음을 안정시키십시오. 허용적 섭리란, 주님께서 어떤 일을 원하시지는 않지만, 그 일을 허용하심으로써 더 큰 선을 이루시는 방식을 말합니다.
Ⅴ.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줄 수 있는 ‘내적 삶 훈련’
교인들의 정치적 감정은 말씀 몇 번 한다고 바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는 내적 습관을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1) 뉴스를 텍스트 모드로 보기
영상은 감정을 자극합니다. 텍스트는 감정 자극이 적습니다.
2) 매일 평화 점검 1분
‘오늘 정치 뉴스 때문에 내 마음이 흔들렸는가?’, ‘내적 평화가 유지되었는가?’ 살피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정치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질서가 약해졌기 때문에 흔들린다. 정치와 직접 싸우지 말고, 교인의 마음 상태를 먼저 다루라. 분노·공포·확증 편향은 모두 동일한 ‘정념의 흔들림’이다. 설교는 정치 해설이 아니라 내적 질서 회복이다. 작은 습관들(뉴스 줄이기, 평화 점검)이 교인의 내면을 크게 안정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