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인간관계가 어려워지고 상대방의 부당한 태도로 자신의 앞날까지 불안해질 때, 그리스도인은 ‘이런상황에서어떻게하는것이성경적인가? 참고견디는것이믿음인가, 아니면그관계에서벗어나는것이지혜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선택이란 반드시 더 많은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은 선악의 문제이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는 지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분별했다고 해서 반드시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을 하든 정직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며, 자신도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슬기로운자는재앙을보면숨어피하여도어리석은자들은나아가다가해를받느니라’(잠22:3) 잠언은 위험을 알아보고 피하는 사람을 슬기롭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고통을 무조건 참는 것이 성경적 인내는 아닙니다. 실제로 위험하거나 부당한 관계가 반복된다면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도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물론 일시적인 갈등과 지속적인 위협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위험이 분명한데도 믿음이라는 이유로 계속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판단력과 분별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능력을 사용하여 악을 피하고 선한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참된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가 단순한 호의나 무조건적인 관용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참된 사랑에는 무엇이 상대방과 공동체를 위한 선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함께해야 합니다. 악을 방치하거나 부당한 요구를 계속 받아들이는 것이 반드시 사랑은 아닙니다.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거리를 둘 수 있고, 복수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것과 계속 함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또한 사랑한다는 것이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에 무조건 협력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때로는 분명한 경계를 세우는 것이 자신과 상대방 모두를 위한 선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자는온갖말을믿으나슬기로운자는자기의행동을삼가느니라’(잠14:15) 갈등이 깊어지면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분노 때문에 성급하게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자신의 감정에 끌려가지 않고 상황을 신중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필요한 사실을 확인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와 그 결과를 충분히 생각해야 합니다. 상대방과 직접 부딪힐수록 갈등이 커진다면 적절한 공식 절차나 제삼자의 도움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정당한 절차를 따르는 것은 상대방을 배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충돌을 줄이면서도 자신의 책임과 권리를 지키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신중함은 결정을 끝없이 미루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확인한 뒤 책임 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마음으로자기의길을계획할지라도그의걸음을인도하시는이는여호와시니라’(잠16:9)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는다는 것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특별한 응답만 기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이해를 사용하여 진리를 분별하고, 자신의 의지로 그 진리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로운 판단과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다면 기도하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준비도 해야 합니다. 가능한 길을 살피고, 각 선택의 결과를 생각하며, 정직하고 책임 있는 방법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반드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선택이 모두 정당할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어떤 동기로,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느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선과진리의결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은 사랑과 의지에 관계되고, 진리는 지혜와 이해에 관계됩니다. 선한 의도가 있어도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으며,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이기심이나 복수심을 위해 사용한다면 참된 선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선한 의도이지만, 그렇다고 부당한 행동까지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지혜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생각은 정당하지만, 그 과정에서 부정직한 방법을 사용하거나 상대방에게 보복하려 한다면 그것 역시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선택 앞에서는 ‘내가원하는것이참으로선한가?’와 함께 ‘그선을이루려는방법도진실하고지혜로운가?’를 물어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선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선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진리가 결합할 때 나타납니다.
결국 성경적인 삶이란 언제나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하거나 더 많은 고통을 견디는 삶이 아닙니다. 때로는 머무르는 것이 인내이고, 때로는 떠나는 것이 지혜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는 것이 사랑이지만, 때로는 정당한 권리를 지키는 것이 자신과 이웃을 위한 선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나 분노가 아니라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잠언은 ‘너는마음을다하여여호와를신뢰하고네명철을의지하지말라너는범사에그를인정하라그리하면네길을지도하시리라’(잠3:5–6)고 말씀합니다. 이는 자신의 판단을 전혀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를 절대화하지 않고 모든 참된 지혜의 근원이신 주님을 인정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행동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부당하게 행동하더라도 자신까지 부당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을믿는다는것은생각하기를멈추는것이아니라, 주님께받은지혜로분별하고주님께받은자유로선을선택하며살아가는것입니다.
‘천주교회에속해있다는것이참된신앙의중요한보증이다.’ 이 명제에는 천주교 신자가 자신이 속한 교회를 바라보는 신앙적 확신과, 그 확신이 잘못 이해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영적인 위험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천주교는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역사적이고 가시적인 연속체로 이해하며, 사도적 계승과 성사, 교도권과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진리와 은총이 보존되고 전달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에게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특정한 종교단체의 회원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 안에 머물며, 교회가 보존해 온 신앙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성사와 전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보다 오랫동안 전해져 온 신앙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주님을 섬기려는 귀중한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교회가 참된 신앙을 가르치는 공동체라는 사실과, 그 교회에 속한 사람이 실제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같은 것일까요? 바른 교회의 가르침을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 가르침이 자신의 내면에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특정 교회의 역사적 정통성과 제도적 권위가 그 구성원 개개인의 영적 상태까지 보증할 수 있을까요? 이번 문제의 핵심은 참된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보다, 교회에 속해 있다는 외적인 사실과 그 사람 안에 참된 교회의 생명이 존재한다는 내적인 사실을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CatechismoftheCatholicChurch)836–838항은 가톨릭교회와의 일치를 설명하면서, 신앙고백과 성사와 교회 통치 및 친교의 유대 안에서 교회와 온전히 결합한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837항은 교회에 온전히 결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체어리티 안에 머물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명시합니다. 그 사람은 교회의 품 안에 외적으로 머물러 있을 뿐, 마음으로는 참되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빛’(LumenGentium)14항 역시 교회의 자녀들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은총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지 못할 뿐 아니라 더 엄중한 판단을 받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천주교는 교회에 등록하고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구원이 자동으로 보장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과 성사생활이 인간 안에서 사랑과 선한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천주교회에속해있다는것이참된신앙의중요한보증이다’라는 명제를 천주교의 공식 교리 자체로 단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 명제는 교회가 보존하고 전달하는 구원의 수단들에 대한 신뢰가, 일부 신자들의 의식 속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확신으로 바뀔 때 발생할 수 있는 신앙적 통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통념은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체어리티의 필요성과도 긴장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공식 교리가 이러한 위험을 경계한다고 해서, 교회 소속에 대한 신앙적 확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와 권위, 전통과 규모에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그 공동체가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라고 이해하고 사도들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적 계승과 신앙의 연속성을 강조한다면, 그 안에 속한 신자들은 자신이 올바른 신앙의 길 위에 있다는 확신을 갖기 쉽습니다. 물론 이러한 확신은 신앙의 지속성과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확신의 근거가 점차 주님과의 실제적인 결합에서 교회 제도에 대한 소속감으로 옮겨갈 때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교회는주님의진리를가르치므로나는그가르침에따라살아야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우리교회는참된교회이므로나는이미참된신앙안에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문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앞의 문장은 교회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할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뒤의 문장은 교회의 권위와 정통성을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보증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수단에서, 자신의 영적 안전을 확인하는 외적인 근거로 변할 위험이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교회에 대한 신뢰 자체가 아니라, 그 신뢰를 자신의 참된 신앙에 대한 확신으로 옮겨 놓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위험을 이미 여러 곳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7:21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향하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22절과 23절에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주님께서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으로 종교적 활동을 했다는 사실과, 실제로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왔다는 사실이 동일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요8:31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에 거해야 참으로 자신의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약1:22역시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참된 신앙의 표지는 외적인 종교적 정체성에만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알고 인정하는 일이 실제적인 순종과 사랑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아무리 귀중하더라도 그 가르침이 인간의 의지와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 주어진 진리는 아직 살아 있는 신앙으로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참된 교회에 속한다는 사실과 참된 교회의 생명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일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예루살렘과그천적교리’(TheNewJerusalemandItsHeavenlyDoctrine, NJHD, 1758) NJHD.241–248에서 교회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특히 NJHD.242는 교회가 주님에게서 오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에 의하여 성립한다고 가르치며, NJHD.243은 말씀에서 비롯된 교리가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는 인간 안에 교회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가 왜 중요한지를 분명히 하는 가르침입니다. 교리는 인간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참되고 거짓인지를 분별하도록 가르치며, 주님께서 어떤 삶을 원하시는지 알려 줍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진리를 이해 속의 지식으로만 보존하고 실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진리는 아직 그의 생명과 온전히 결합되지 않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실제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멸시한다면, 그의 이해에는 사랑에 관한 진리가 있을지라도 의지에는 그 사랑이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교리적 이해에 부족함이 있더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 한다면, 그 사람 안에는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정통성이나 교리적 정확성을 개인의 참된 신앙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참된 교회의 생명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적인 삶으로 나타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천국의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1798과 AC.8152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AC.1798에서 스베덴보리는 교회들이 교리적인 차이로 나뉘어 서로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었음을 언급하면서, 사랑과 체어리티를 신앙의 중심에 둔다면 그러한 차이가 교회를 분열시키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는 모든 교리가 동일하게 참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의 차이는 여전히 검토되어야 하며, 잘못된 교리는 인간의 신앙과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적 차이를 근거로 다른 공동체 전체를 배척하거나, 자기 공동체만이 참된 신앙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태도는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AC.8152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선, 곧 체어리티가 본질적인 것이며, 그것이 교리와 삶에서 첫자리를 차지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어 교회를 이루는 것은 삶이지 교리 자체가 아니며, 교리도 삶이 되는 만큼 교회를 이룬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이번 명제의 핵심을 매우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인간의 이해 안에 있는 진리는 그 자체로 아직 그의 생명이 아닙니다. 그 진리가 의지 안에 받아들여지고 실제적인 삶의 원리가 될 때, 비로소 인간 안에 참된 교회의 생명이 형성됩니다. 따라서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나 정통 교리를 인정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 안에 참된 신앙이 존재한다고 보증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교의 오랜 역사와 풍부한 전통, 성사와 전례, 수도생활과 자선활동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이러한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외적인 질서와 형식을 통하여 영적인 것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예배의 질서는 인간이 주님께 마음을 향하도록 도울 수 있으며, 기도문은 신앙을 표현하는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이 선과 악을 분별하도록 도울 수 있고, 자선과 봉사는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수단이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그 궁극적인 목적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같은 미사에 참여하고 같은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내적인 상태는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 의무를 충실히 지키면서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교리적인 지식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악을 피하려 노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단할 수 없지만, 외적인 종교생활의 풍부함이 반드시 내적인 거듭남의 정도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적 활동의 외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그 활동을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입니다. 교회가 참으로 인간에게 유익한 것은 그 사람을 자기 제도에 의존하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천주교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중요한 접점도 존재합니다. 천주교의 공식 교리 자체가 체어리티 없는 교회 소속은 구원을 보증하지 못한다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교리와 삶을 분리해서는 참된 교회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전통이 교회의 본질과 성사의 역할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는 가톨릭교회 안에 신앙과 성사와 교회 통치의 온전한 질서가 보존되어 있다고 가르치며, 그러한 교회적 일치를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이해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를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결합에 두며, 외적인 교회의 소속보다 인간 안에서 실제로 거듭남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번 명제에서는 이 교회론 전체를 다시 논증하기보다, 공식 교리와 신앙적 통념을 구별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교회 소속만으로 구원을 보증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류로 검토해야 할 것은 가톨릭교회의 모든 교회론이 아니라, 교회가 지닌 권위와 은총의 수단에 대한 신뢰를 자신의 내적인 영적 상태에 대한 보증으로 바꾸는 이해입니다. 교회가 참된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가르침이 개개인의 삶에서 참된 생명이 되었다는 사실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천주교 밖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개신교 신자 역시 자신이 성경 중심의 정통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나 오랫동안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해 왔다는 사실에서 신앙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자신이 정통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안수를 받았으며 오랜 세월 말씀을 가르쳐 왔다는 사실을 자신의 영적 성숙에 대한 근거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러한 외적인 경력과 지위는 참된 신앙을 자동으로 증명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고 새로운 교회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이 상응론과 내적 의미를 이해한다는 이유로 영적으로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동일한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프로프리움’(proprium)은 종교적인 이름과 지식을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진리를 많이 알게 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자기 안의 악을 더욱 세밀하게 발견하고, 자신이 받은 빛에 따라 살아가야 할 책임을 깊이 느껴야 합니다. 참된 교회에 관한 가르침은 다른 공동체를 내려다보는 기준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기준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참된 교회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교회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생각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의 살아 있는 결합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속한다는 이름을 가졌더라도 실제로 생명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속한 사람이라는 종교적인 이름이 있더라도, 주님의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이름 자체가 참된 신앙의 생명을 보증하지는 못합니다. 교회는 인간에게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분과 결합하도록 돕는 거룩한 공동체여야 하지만, 그 교회에 속한다는 외적인 사실이 주님과의 실제적인 결합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어느교회에속해있는가?’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교회를통하여배운주님의진리가나의이해와의지안에서살아움직이고있는가?나는그진리의빛으로악을피하고이웃을사랑하며선한쓰임을행하고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교회가 부여하는 종교적 신분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실제적인 생명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SL.RC.004해설)
창5에서 에녹의 마지막은 다른 족장들과 확연히 다릅니다. 아담에서 야렛까지는 모두 ‘죽었더라’로 끝나지만, 에녹에게는 ‘그가더이상있지아니하였으니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기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히11:5은 ‘믿음으로에녹은죽음을보지않고옮겨졌으니하나님이그를옮기심으로다시보이지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전통에서는 흔히 에녹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진 특별한 인물이라고 이해해 왔습니다. 그런데 AC.520-521에서 스베덴보리는 창5:24의 속뜻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다’는 것은 에녹이 만든 교리가 ‘후대의쓰임을위해보존되었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에녹이라는 개인이 하나님께 옮겨졌다는 문자적 의미를 부정하는 것일까요? 여기서는 먼저 AC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5를 해설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주된 관심은 개별 인물들의 전기를 복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이라는 이름들을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로 해석하고, 그들의 ‘날들’과 ‘연수’를 교회의 때와 상태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에녹이하나님과동행하였다’, ‘그가더이상있지아니하였다’, ‘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다’는 말씀 역시 같은 흐름 안에서 에녹 교회의 상태와 그 교회가 남긴 교리의 운명을 설명하는 말씀으로 풀이합니다.
그 속뜻의 흐름은 매우 분명합니다. AC.519에 따르면 에녹이라 불린 사람들은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 목적은 후대 사람들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AC.520에서는 ‘하나님과동행하였다’가 이 신앙에 관한 교리를 나타내고, ‘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다’는 것은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AC.521은 그 이유까지 밝힙니다. 주님께서는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장차 소멸하고, 이후의 인류가 교리를 통해 선과 진리를 배워야 할 것을 예견하셨으므로 에녹의 교리를 보존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속뜻에서 ‘데려가심’의 핵심은 ‘사라짐’이 아니라 ‘보존’입니다.
이것은 에녹에게 왜 다른 족장들과 달리 ‘죽었더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창5에서 ‘죽음’은 각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에녹의 경우에는 그 교회가 형성한 것이 그 상태의 종말과 함께 완전히 없어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에녹이라는 교회 자체의 시대는 지나가더라도 그들이 정리한 교리는 후대에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에녹에 대해 단순히 ‘죽었더라’고 하지 않고 ‘그가더이상있지아니하였으니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기때문이다’라는 특별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속뜻에서 이것은 한 교회의 소멸보다 그 교회가 남긴 것을 주님께서 거두어 보존하셨다는 데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속뜻을 곧바로 ‘그러므로에녹이라는개인도없었고,에녹이하나님께옮겨지는사건도전혀없었다’는 명제로 바꾸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520-522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하고 있는 것은 창5:24의 ‘내적의미(internalsense)’입니다. 그의 관심은 이 구절의 모든 역사적·문자적 가능성을 하나씩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이 말씀이 천국적 의미에서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 개인 에녹의 역사성이나 그에게 일어난 자연적 사건의 세부를 우리가 대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AC의 해석에서 창5:24의 중심적인 속뜻이 ‘에녹교리의보존’이라는 사실입니다.
히11:5은 이 문제를 더욱 흥미롭게 만듭니다. 신약은 창5:24를 인용하면서 에녹이 ‘죽음을보지않고옮겨졌다’고 말하고 그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따라 에녹을 신앙의 인물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창5:24안에 더 깊은 속뜻이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에서는 문자적 의미와 내적 의미가 서로 경쟁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거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문자적 의미는 내적 의미를 담고 지탱하는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히11이 문자적 의미에서 에녹의 믿음과 옮겨짐을 말한다고 해서, 창세기의 속뜻에서 에녹이 한 교회와 그 교리의 보존을 나타낸다는 설명이 자동으로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도 두 층위를 억지로 하나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히11:5이 강조하는 것은 에녹의 믿음이며, AC.520-521이 강조하는 것은 에녹으로 의미된 교리의 보존입니다. 전자는 신약이 문자적 서술을 사용하여 믿음의 삶을 가르치는 것이고, 후자는 창세기의 계보 안에 들어 있는 교회사의 속뜻을 밝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는에녹이실제로옮겨졌다고했으니AC의해석은틀렸다’거나, 반대로 ‘AC가교리의보존이라고했으니히브리서의에녹이야기는역사적의미가없다’고 어느 한쪽을 성급하게 지워 버리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문자와 속뜻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AC.520-522에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데려가셨다’는 표현을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에녹의 시대에는 이미 퍼셉션이 매우 약해져 있었습니다. AC.522에 따르면 그들의 퍼셉션은 ‘아무런명료함이없는일종의일반적이고흐릿한퍼셉션’이었으며, 그래서 마음은 자기 바깥에 있는 교리적인 것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변화가 어디까지 진행될지를 아셨습니다. 언젠가 인간은 태고교회처럼 내적인 길을 통해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지 못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퍼셉션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 안에 있던 선과 진리가 교리의 형태로 보존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에녹의 ‘옮겨짐’을 속뜻에서 바라보면 매우 아름다운 섭리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인간의 상태가 쇠퇴하여 어떤 영적 능력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될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능력과 함께 모든 선과 진리가 사라지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한 시대가 직접 누렸던 것을 다음 시대가 받을 수 있는 형태로 바꾸어 보존하십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는 퍼셉션이었던 것이 에녹을 통해 교리가 되었고, 그 교리는 퍼셉션을 잃게 될 후대 사람들이 다시 선과 진리를 배울 수 있도록 보존되었습니다. 이것이 AC.521이 말하는 ‘어둠을통해빛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을하나님이데려가셨다는것은무엇을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AC의 속뜻을 따라 답하면, ‘주님께서에녹으로의미된교리를후대의쓰임을위해보존하셨다는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에녹이 어디로 갔는가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남기셨는가입니다. 퍼셉션의 시대가 저물어도 주님은 그 시대에 주셨던 선과 진리를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다음 시대가 받을 수 있는 교리의 형태로 보존하셨습니다. 인간의 상태는 변하고 교회의 형태도 바뀌지만, 사람이 다시 선과 진리를 알고 주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하고 보존하시는 분, AC.520-522에서 ‘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다’는 말씀은 바로 그러한 주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AC.520-522심화1)
AC.519에서 에녹 교회의 사람들이 한 일은 매우 특별합니다. 그들은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대상이었던것들’을 모아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할 수 있었는데, 왜 그것을 굳이 교리로 만들어야 했을까요? 살아 있는 퍼셉션이 있다면 기록된 교리나 외적인 기준은 오히려 불필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AC.464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퍼셉션이 있었으므로 에녹이 만든 교리가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에녹의 교리는 현재의 필요보다 ‘미래의필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창5의 교회들을 따라오면서 우리는 그 변화가 한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명료하게 퍼셉션했지만, 후대 교회로 내려가면서 퍼셉션은 점차 더 일반적이고 흐릿해졌습니다. 게난에 이르면 그 변화가 분명해지고, 마할랄렐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상태가 나타났으며, 야렛은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알아볼 수 없게 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AC.519의 한 표현이 중요해집니다. 에녹의 사람들이 교리를 만든 목적은 그것이 ‘무엇이선이고무엇이진리인지를아는기준’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에는 사람 안에 그러한 분별의 기준이 살아 있었습니다. 선을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이 사라진 뒤에도 사람이 자기 생각과 욕망을 선과 진리의 기준으로 삼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전 교회들이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했던 것들을 보존하여,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배울 수 있게 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했습니다. 에녹의 교리는 바로 이러한 필요에 응답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퍼셉션에서 교리로의 변화에는 두 측면이 함께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이것은 분명 이전보다 낮아진 상태를 보여 줍니다. 살아 있는 퍼셉션으로 알던 것을 이제는 외적으로 주어진 가르침을 통해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인간이 이전의 내적 능력을 잃어 간다고 해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에 이르는 길까지 닫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방식에 맞추어 그 길을 새롭게 마련하십니다. 직접 퍼셉션할 수 있을 때에는 퍼셉션으로 인도하시고, 그것이 사라져 갈 때에는 이전에 주신 선과 진리를 교리의 형태로 보존하여 후대가 그것을 통해 배울 수 있게 하십니다. 인간의 상태는 낮아져도 주님의 인도하심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 자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에녹의 교리는 인간이 머리로 만들어 낸 추상적인 신학 체계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 재료는 앞선 교회들이 실제로 ‘퍼셉션했던것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먼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살아 있는 선과 진리가 있었고, 그다음 그것이 교리의 형태로 정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의 질서는 ‘교리에서생명으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받은생명이교리로보존되는것’이었습니다. 이후 사람들이 그 교리를 배우게 되었을 때에도 목적은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아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를 통해 다시 선을 알고 선한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었습니다.
이 점은 AC.519가 ‘하나님과동행하다’를 단순히 ‘교리를알다’라고 하지 않고, ‘신앙의교리에따라가르치고사는것’이라고 설명하는 데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에녹에게 교리는 박물관에 보관된 과거의 퍼셉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알고, 그것을 가르치며, 그에 따라 살아가기 위한 기준이었습니다. 따라서 교리가 삶에서 분리되는 순간 에녹이 교리를 만든 본래 목적에서도 멀어지게 됩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과동행함’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삶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오늘날 말씀과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적용도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직접 퍼셉션하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마음에이렇게느껴진다’, ‘내안에서이런확신이든다’는 것 자체를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과 말씀으로부터 나온 참된 교리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살펴야 합니다. 에녹의 교리가 필요해진 이유 자체가 인간의 내적 퍼셉션이 더 이상 안전한 기준이 될 수 없게 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을 오늘날 개인의 직감이나 강한 내적 확신과 곧바로 동일시하여 그것을 말씀이나 교리보다 앞세우는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오히려 거꾸로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말씀과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삶과 분리하는 것입니다. 앞서 마할랄렐 교회에서 보았듯이 쓰임의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기 시작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질서의 변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교리는 선과 진리를 분별하고 그것에 따라 살도록 주어진 것이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만족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교리가 퍼셉션을 대신하게 된 이후에도 주님의 목적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지식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하고 마침내 그 선이 삶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에녹은 태고교회의 쇠퇴 과정 가운데 있으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놀라운 보존의 섭리를 보여 주는 교회입니다. 인간에게서 어떤 내적 능력이 사라져 갈 때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선과 진리까지 사라지게 두지 않으십니다. 한 시대가 직접 받을 수 있었던 것을 다음 시대가 받을 수 있는 형태로 옮겨 보존하십니다. 퍼셉션으로 받았던 것이 교리가 되고, 그 교리가 후대에게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출현은 단순히 ‘퍼셉션의시대가끝나고교리의시대가시작되었다’는 교회사적 변화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질 때마다 그 상태에 맞는 방법으로 계속 다가오시며, 사람이 다시 선과 진리를 알고 그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에녹이 ‘하나님과동행하였다’는 말씀 안에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보존과 인도하심이 담겨 있습니다. (AC.518-519심화1)
개신교 신앙에서 참된 믿음은 반드시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가르침은 매우 익숙합니다.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으면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역사하시고, 이전에 사랑하던 죄를 멀리하며, 점차 주님을 닮아 가는 새로운 삶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믿음이 단순한 지식이나 입술의 고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떤 신자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믿음이 진실하다면 삶의 변화는 언젠가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므로, 지금 당장 자신을 살피고 잘못된 습관을 고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변화시키실 때가 되면 변화가 시작될 것이고, 아직 변화되지 않은 부분은 성령께서 앞으로 해결해 주실 문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한다는 진리가 들어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책임을 뒤로 미루는 위험도 숨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믿음이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변화는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나는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되,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합리성을 사용하여 그 역사에 실제로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까?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믿음과 체어리티, 회개와 거듭남의 관계는 바로 이 질문을 깊이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참된 믿음이 선한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치지만, 그 열매가 아무런 노력 없이 자동적으로 생긴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3장은 성화를 죄의 지배가 약화되고 신자가 거룩함 안에서 자라나는 실제적인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육체의 욕망과 성령을 따르는 새로운 생명 사이에 계속적인 싸움이 일어난다고 가르칩니다. 제16장 2항은 선행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와 증거로 설명하며, 3항은 선행을 행할 능력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에게서 오지만, 신자들이 특별한 감동이 찾아올 때까지 자신의 의무를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공식 교리를 ‘믿기만하면언젠가자동으로선해진다’는 주장으로 소개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다만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믿음과 삶의 관계를 설명할 때 ‘참으로믿으면열매는자연히따라온다’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며, 그 말이 회개와 자기 성찰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의 진실성을 과거의 회심 경험이나 현재의 확신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변화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아도 그것을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참된 믿음이 열매를 맺는다는 가르침 자체가 아니라, 그 열매가 어떤 영적 질서를 통해 맺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믿음과 열매의 관계를 매우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요15:4-5에서 주님께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제자들도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단순히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요15:10에서는 자신의 계명을 지키면 자신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또한 약2:17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하며, 약2:22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믿음과 행함은 서로 무관한 두 활동이 아닙니다. 믿음은 인간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과 관계되며, 행함은 그 진리가 실제 삶에서 사랑과 결합하여 나타나는 일과 관계됩니다. 갈5:6에서 바울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강조한 것도 같은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열매는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 생겨나는 외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생명의 변화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생명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는다는 비유는 인간이 스스로 선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지만, 그 비유를 근거로 인간에게 회개와 순종의 책임이 없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예루살렘의교리’(TheNewJerusalemandItsHeavenlyDoctrine, NJHD, 1758) NJHD.108-109에서 믿음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지 않으면 아직 살아 있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며, 그 말씀이 참되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보복을 상상하고, 상대방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면서도 그런 마음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이해에는 용서에 관한 진리가 있지만 의지에는 여전히 원망과 적개심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간이 오래 지난다고 해서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자신의 원망을 계속 정당화하면 그 감정은 더욱 깊은 습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보복하려는 마음이 주님의 사랑에 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실제로 그 악한 의도에서 돌아서려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단순한 호의나 따뜻한 감정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체어리티와 결합한다는 것은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자신의 의지 안에서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실제로 살아가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자연적인 사랑이 언제나 주님의 선과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인정한 진리를 실제로 행하려 할 때, 오랫동안 익숙해진 욕망과 습관의 저항을 경험합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싶어질 수 있으며,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자기 뜻을 거스르는 사람에게 분노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 TCR.571에서 인간이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상태로 변화되는 과정을 개혁과 거듭남이라는 두 상태로 구별합니다. 개혁의 상태에서는 이해가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지만, 거듭남의 상태에서는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여 인간의 사랑과 삶 자체가 새로워집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자신이 믿는 진리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고 해서 그의 의지가 이미 그 진리와 완전히 결합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와 의지 사이에는 실제적인 변화의 과정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악한 사랑과 맞서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섭리’(DivineProvidence, DP, 1764) DP.83에서도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기 시작할 때 개혁이 일어나고, 그 악을 실제로 멀리하며 싸워 이기는 과정에서 거듭남이 진행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삶의 변화가 단순한 시간의 경과가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심 아래 인간의 사랑과 의지가 실제로 새로워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변화를 이루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 악을 멀리하고 선을 사랑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고 일방적으로 그를 선하게 만드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DP.100-128은 인간이 외적인 삶에서 악을 죄로 여겨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멀리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그의 내면에서도 악을 제거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마치자기힘으로하는것처럼’(asifofoneself)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판단과 의지로 악을 멀리하는 것처럼 경험하지만, 실제로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과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만일 사람이 ‘내가할일은없고주님께서언젠가나를변화시키실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악을 계속 허용한다면, 그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유와 합리성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노력으로반드시선한사람이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공로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도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의지하여 실제로 행동하되, 그 선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은혜와 인간의 실천은 서로 경쟁하는 두 힘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가 인간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근원이며,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은 그 은혜를 실제로 받아들이도록 마련된 영적 질서입니다.
여기서 회개가 차지하는 위치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TCR.509-510에 따르면 참된 믿음과 체어리티는 회개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인간 안에 교회가 실제로 세워지는 일도 회개와 깊이 관계됩니다. 또한 TCR.528-530은 참된 회개가 자신의 삶을 살피고, 죄를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거나 언젠가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구별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분노 때문에 가족에게 반복적으로 상처를 주면서도 ‘주님께서나를변화시키실때가되면달라질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자신의 잘못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미래로 미루고 있는 셈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분노가 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화가 날 때 상대방을 모욕하는 말을 멈추며, 잘못했을 때 사과하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실제로 노력한다면 그는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때로 매우 작고 더디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실천은 단순한 감정의 변화보다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그의 내면을 새롭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믿음이 충분히 자란 다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부수적인 결과만이 아니라,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실제적인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삶의 변화를 인간이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고 모든 잘못을 즉시 고쳐야 하는 부담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속도와 방식으로 경험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반복하던 악한 행동에서 비교적 빨리 벗어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같은 문제를 두고 오랜 시간 시험을 겪을 수 있습니다. 또한 외적으로 나타나는 변화가 크다고 해서 그 사람의 내면까지 반드시 선하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명예를 높이거나 다른 사람의 인정을 얻기 위해서도 행동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32-534에서 참된 회개가 외적인 행위뿐 아니라 의지의 의도까지 살피는 것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행동이 얼마나 빨리 달라졌는가만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악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으며 어떤 사랑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전에는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하던 사람이 이제 그 거짓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려 한다면, 아직 모든 습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그 안에는 중요한 방향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반복되는 실패가 있다고 해서 주님의 은혜가 전혀 역사하지 않는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실패를 정당화하고 악을 계속 사랑하는 것과, 실패할 때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악에서 돌아서려는 것은 서로 다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거듭남을 판단할 때에는 조급한 자기 정죄나 다른 사람에 대한 단정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오늘 실제로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믿음이진실하다면삶의변화는자연스럽게따라온다’는 표현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이 말에서 ‘자연스럽게’라는 표현이 주님의 사랑을 깊이 받아들인 사람이 점차 선을 사랑하게 되고, 이전에는 의무로 여기던 선한 일을 기쁨으로 행하게 된다는 뜻이라면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인간은 선을 행하는 일을 외적인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라는 말이 인간이 자신의 악과 싸우거나 실제로 회개할 필요 없이 시간이 지나면 변화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오류입니다. 어떤 습관은 반복할수록 더욱 깊어지며, 자기중심적인 사랑은 정당화할수록 더욱 강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은 처음부터 아무런 노력 없이 선한 삶이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계속되면서, 점차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이 형성되고 그 사랑에서 선한 행동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절제하고 노력해야 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진리가 자신의 사랑이 되어 선한 일을 기쁨으로 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변화의 자연스러움은 회개를 생략해도 된다는 이유가 아니라, 회개와 거듭남을 통해 인간의 사랑이 새로워질 때 나타나는 영적 성숙의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일에도 신중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서도 눈에 띄는 변화가 없어 보일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신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상당한 변화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보이는 행동만으로 그 사람의 영적 상태 전체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변화는 자기 자신밖에 알지 못하는 내적인 싸움에서 일어나고 있을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선한 행동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목적에서 비롯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믿음에는변화가따른다’는 가르침을 다른 사람의 구원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가르침은 자기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질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합니다. 나는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보다, 그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악을 얼마나 정직하게 살피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선한가보다, 어제까지 정당화하던 악을 오늘은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려 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외적인 성과에 따라 기계적으로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라, 각 사람의 자유와 상태를 아시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거듭남의 길을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의 열매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진리를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믿음이 진실하다면 삶의 변화는 언젠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입니까? 참된 믿음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분명히 보존해야 할 중요한 진리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할 때 인간은 이전의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변화가 인간의 자유로운 회개와 실천 없이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그가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신의 잘못을 살피고 고치려 노력해야 하지만, 그 모든 참된 선의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변화는 단순히 기다려야 할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오늘 자신의 삶에서 주님의 진리에 응답함으로써 시작하고 계속해야 할 실제적인 과정입니다. 물론 변화의 속도와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며, 반복되는 시험과 실패 때문에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성급하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변화가 더디다는 사실과 변화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는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언젠가좋은사람이될것인가?’가 아닙니다. ‘나는지금주님께서알려주신진리에어떻게응답하고있는가?자신의악을죄로인정하고실제로멀리하려하고있는가?그리고주님께서주시는사랑과지혜가내삶에서선한쓰임으로나타나도록오늘무엇을선택하고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의 열매는 시간이 저절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 생명에 따라 살아갈 때 맺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믿음과 삶의 변화, 그리고 회개와 거듭남을 통해 열매 맺는 영적 생명의 의미입니다. (PR.004해설)
‘세례를받아천주교신자가되면하느님의자녀가된다.’ 이 말은 천주교 신앙생활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가르침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세례를 단순히 신앙 공동체에 가입하는 의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원죄가 씻기고 새로운 생명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결합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아직 말을 하지 못하고 신앙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풉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은총을 베푸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세례라는 외적인 의식이 이루어지는 순간, 인간의 내적인 생명에도 실제적인 영적 출생이 완성되는 것일까요? 물로 머리를 씻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과, 주님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새로운 생명이 인간의 내면에 형성되는 것은 같은 사건일까요? 더 나아가 ‘하느님의자녀가된다’라는 말은 새로운 종교적 신분이 부여되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생명을 받아 실제로 그분을 닮은 존재로 변화되어 간다는 뜻입니까? 이 질문의 목적은 세례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며, 그 세례가 가리키는 참된 영적 출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CatechismoftheCatholicChurch)1265항은 세례를 받은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느님의 양자가 되며, 그리스도의 지체와 성령의 성전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어 1266항은 세례를 통하여 성화의 은총과 의화의 은총이 주어지고,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덕과 성령의 선물이 부여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272항은 세례가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인호를 남긴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천주교는 세례를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실제로 역사하는 성사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세례받은 사람이라면 이후 어떻게 살아도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받은 은총은 신앙생활 속에서 성장해야 하며, 인간은 그 은총에 응답하고 죄를 피하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천주교는 유효한 세례를 받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자들도 그리스도와 일정한 친교 안에 있다고 인정합니다. 따라서 이 명제를 ‘천주교신자만하느님의자녀가된다’라는 배타적인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실제 쟁점은 세례라는 성사적 행위 자체가 인간에게 새로운 영적 신분과 은총을 부여한다는 천주교의 이해가,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의 질서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세례와 새로운 출생을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요3:3에서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세례의 필요성과 성사적 은총을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6절에서 주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영적 출생이 자연적인 사건이나 외적인 신분 변화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요1:12–13에서는 주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며, 그들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새로운 출생의 근원은 인간의 종교적 행위나 제도적 소속이 아니라 주님 자신입니다. 물론 이러한 말씀들이 세례와 거듭남의 관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물과 성령, 외적인 씻음과 내적인 새 생명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세례가 영적인 출생을 나타내는 거룩한 의식이라는 사실과, 그 의식의 시행이 곧 영적 출생의 완성이라는 주장은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 TCR.667–691에서 세례의 의미와 쓰임을 체계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이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과 동시에 영계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연결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TCR.677–680). 두 번째 쓰임은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그분을 따르게 하는 것이고(TCR.681–683), 세 번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인간이 거듭나는 것입니다(TCR.684–687). 이 세 가지를 함께 살펴보면 스베덴보리가 세례를 단순한 종교적 가입 절차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는 주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의식이며 자연계에서 행해지는 세례는 영계의 질서와도 실제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첫 번째 쓰임과 세 번째 쓰임을 구별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기독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실제로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새로운 영적 삶을 향한 입문이며, 후자는 그 입문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세례가 인간을 거듭남의 길로 인도할 수는 있지만, 세례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거듭남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참된 가치는 그 의식 자체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인간을 주님께 인도하여 어떤 새로운 생명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가에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유아 세례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TCR.677에서 스베덴보리는 아직 합리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없고 신앙에 관한 것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유아들도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이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아직 선과 악을 분별하거나 의식적으로 회개할 능력이 없는 아이가 세례받는 순간 이미 영적인 거듭남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아 세례에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받은 아이들이 영계에서 기독교인들과 연결되며,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그 아이들이 장차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보호하고 준비시키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세례가 영계와 무관한 단순한 표시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의 영적 상태는 점차 자신이 무엇을 믿고 사랑하며 어떤 삶을 선택하는가와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세례받았다는 사실이 이후의 모든 삶을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 유아 세례는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라 거듭남을 향한 거룩한 시작이며, 주님께서는 그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계속 인도하십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천국의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4255은 세례가 교회와 교회에 속한 것들로 들어가는 입문을 나타내며, 동시에 거듭남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세례의 물은 영적으로 진리를 의미하고, 물로 씻는 행위는 진리를 통하여 인간의 악과 거짓이 제거되는 정결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물이 육체의 더러움을 씻는다고 해서 인간의 의지에 자리 잡은 자기 사랑과 탐욕과 미움과 교만을 실제로 씻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내적인 악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그 악을 죄로 여겨 피할 때 점차 제거됩니다. 이 과정에서 진리는 단순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려 주는 지식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의지를 변화시키는 수단이 됩니다. 따라서 세례의 물이 나타내는 참된 씻음은 자연적인 물질 자체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역사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례가 단순한 상징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세례에는 자연계와 영계를 연결하는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가 나타내는 영적 실재와 세례라는 외적인 행위를 서로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례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주님의 진리를 통하여 정결해지고 실제로 거듭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자녀가된다’라는 말의 가장 깊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TCR.684에서 세례의 궁극적인 쓰임을 거듭남이라고 설명하면서,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고 선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번에 완성되는 종교적 신분의 변경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합리성을 사용하는 가운데 평생 계속되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천국과지옥’(HeavenandHell, HH, 1758) HH.329–345에서 어린아이들이 죽음 이후 주님의 인도 아래 천국에서 양육받고 성장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 가르침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특정한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완성되거나 제한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세례를 받은 아이뿐 아니라 세례를 받지 못한 아이도 주님의 사랑과 섭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시며, 각 사람을 그가 처한 상태와 환경에 따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표현은 단순히 종교적인 소속을 가리키는 신분 명칭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 가장 깊은 의미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반영하는 존재로 실제로 변화되어 간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천주교의 세례론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사이에는 인정해야 할 공통점과 중요한 차이가 함께 존재합니다. 양쪽 모두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 의미가 단순한 외적 가입 절차보다 깊다고 인정합니다. 또한 세례받은 사람이 이후에도 신앙 안에서 성장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세례 자체가 성화의 은총과 의화의 은총을 부여하고, 인간을 하느님의 양자로 만들며,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인호를 남긴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세례의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인정하면서도,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인 교회로의 입문과 궁극적인 쓰임인 거듭남을 명확하게 구별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세례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사의 시행 자체가 인간 안에서 어떤 영적 변화를 이루는가, 그리고 그 성사가 가리키는 실제적인 거듭남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가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영적 출생은 세례라는 외적인 의식의 시행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이해와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그가 점차 악을 피하고 선을 사랑하는 존재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문제는 실제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세례를 받고 평생 천주교 신자로 살아왔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례명을 소중히 여기고 주일마다 미사에 참석하며 여러 성사생활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의 신앙생활에 귀중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을 행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나는세례받은하느님의자녀다’라는 사실에 안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러한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필요한 것이 세례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복적인 확인이 아니라, 세례가 가리키는 참된 회개와 거듭남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또한 이 문제는 천주교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개신교 신자 역시 자신이 세례를 받았거나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한 순간 구원과 하나님의 자녀 됨이 이미 확정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이후의 실제적인 거듭남을 부차적인 문제로 여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이 세례와 거듭남의 영적 의미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영적으로 더 성숙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진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과 그 진리가 자신의 삶 안에서 실제로 살아 있다는 사실은 서로 다릅니다. 세례의 영적 의미를 이해했다면, 그 이해는 자신을 높이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세례를 통하여 인간에게 보여 주시는 거룩한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물은 육체를 씻지만, 주님의 진리는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그가 자신의 악을 발견하도록 돕습니다. 세례는 한 번 이루어지는 외적인 의식일 수 있지만, 주님의 진리로 마음을 씻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평생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지만, 그 사실을 영적 성장의 완성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세례는 주님께서 인간을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거룩한 시작이며,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여 진리를 배우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정에서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요1:12-13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자녀 됨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종교적 신분을 바꾸는 일보다 훨씬 깊으며,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삶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언제세례를받았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그세례가나타내는거듭남의길을지금도걸어가고있는가?주님께서주시는진리로자신의악을발견하고피하며,주님의사랑을받아이웃을위한선한쓰임으로나아가고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참된 생명은 외적인 의식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 이루어 가시는 실제적인 거듭남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SL.RC.003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구원은전적으로하나님의은혜로받는다’는 고백은 가장 중요한 신앙의 기초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행이나 종교적 열심, 도덕적 성취를 통해 구원의 자격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인간의 교만을 경계하고 모든 구원의 공로를 하나님께 돌린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떤 신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원이전적으로은혜라면내가할일은믿는것뿐이며,그밖의노력은구원과관계가없다’고 생각합니다. 회개와 순종, 악을 멀리하려는 노력과 이웃을 위한 선행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나중에 맺는 열매일 뿐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구원이 인간의 공로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인간이 구원을 위해 아무런 응답도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과연 같은 의미입니까? 모든 선한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면, 인간은 그 능력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자유와 의지를 사용하여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까?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신적 은혜와 인간의 자유, 그리고 거듭남의 질서를 살펴보면, 은혜가 인간의 응답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응답을 가능하게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구원론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엡2:8-9는 사람이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며, 이것은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고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롬3:28역시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종교개혁 전통은 ‘오직은혜’(solagratia)와 ‘오직믿음’(solafide)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오직 믿음이라는 표현을 참된 믿음에는 사랑과 순종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2항은 믿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유일한 도구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 안에서 그 믿음은 홀로 있지 않으며 사랑으로 역사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제14장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공식적인 구원론 전체를 ‘믿는다고말하기만하면어떻게살아도구원받는다’는 주장으로 소개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다만 전통적인 개신교는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고, 특히 칭의를 인간의 선행에 근거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언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믿음과 체어리티, 죄 사함과 거듭남을 분리하여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따라서 이번 문항의 핵심은 은혜를 인정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은혜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실제 구원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회개와 순종을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엡2:8-9에서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 바울은 바로 다음 절인 엡2:10에서 신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선한 일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제출하는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인간이 살아가도록 준비된 삶의 방향입니다. 또한 빌2:12-13에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권면하면서, 그들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칩니다. 이 두 말씀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명령과 그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선언이 함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마7:21에서 자신에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14:15에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은 믿음의 고백이 실제적인 사랑과 순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물론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선한 행위로 구원의 대가를 지불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인간의 삶에서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행위를 무조건 대립시키기보다, 참된 믿음이 무엇이며 그 믿음이 어떻게 사랑과 결합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예루살렘의교리’(TheNewJerusalemandItsHeavenlyDoctrine, NJHD, 1758) NJHD.108-109에서 믿음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의 관계에 비추어 설명합니다. 인간은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옳다고 인정할 수 있지만,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사랑과 결합하지 않으면 아직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그 말씀이 참된 진리라는 사실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이 걸려 있을 때마다 이웃을 속이고 해치면서도 그 행동을 고칠 생각이 없다면, 그가 알고 있는 진리는 아직 자신의 사랑과 결합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어려운 사람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거나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따라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행하려는 영적 삶의 원리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와 분리된 믿음은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에 선행이라는 외적인 조건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자체가 선과 결합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살아 있는 믿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내가해야할일은믿는것뿐이다’라는 말은 믿음을 단순한 지적 동의나 신앙고백으로 이해할 때 심각한 오류가 됩니다. 참된 믿음은 주님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살아가는 데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회개와 악을 멀리하는 일은 구원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합니까? 스베덴보리는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 TCR.509-510에서 회개 없이는 참된 믿음도 진정한 체어리티도 존재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인간 안에 교회가 실제로 세워지는 일이 회개와 깊이 관계된다고 가르치며, 회개를 단순히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거나 죄 때문에 슬퍼하는 감정으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TCR.528-531에서는 참된 회개를 자기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회개가 구원에 덧붙여지는 선택적인 종교 활동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악을 사랑하면서도 그 악을 전혀 버리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거짓말이 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계속 거짓을 행하고, 그 잘못을 고치려 하지 않으면서 ‘나는은혜로구원받았으므로행위는중요하지않다’고 말한다면, 그는 은혜를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거짓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며, 실제로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자유 안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인간이 구원의 자격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바치는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받아들여지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여기서 ‘인간이해야할일’이라는 표현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이 회개하고 악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면 어떤 신자는 그것이 결국 행위구원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고 염려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 악을 제거하거나 참된 선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신적섭리’(DivineProvidence, DP, 1764) DP.100-128에 따르면 인간은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는 일을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마치자기힘으로하는것처럼’(asifofoneself)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며 행동하는 것처럼 경험하지만, 그에게 있는 모든 참된 생명과 선을 행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인간이 자신의 이해로 진리를 배우고 의지로 그것을 선택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여 악을 멀리하려 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는 과정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은 주님의 은혜와 경쟁하는 독립적인 구원의 능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은혜가 인간 안에서 작용하도록 마련하신 신적 질서의 일부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시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모든 선한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실제로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인간이 자신의 악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분노와 원망에 사로잡혀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을 때마다 화를 내고 상대방을 모욕하면서, 자신은 원래 성격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강하게 확신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분노와 지배욕이 실제로 다른 사람을 해치는 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며, 자신의 행동을 고치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는 오랫동안 형성된 습관 때문에 여러 번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다는 사실만으로 주님의 은혜가 그에게 역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의 도움으로 그 악에서 돌아서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35에서 자신의 모든 내면을 충분히 살피기 어려운 사람이라도 악을 죄로 여기고 행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러한 행동 역시 회개의 중요한 형태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특별한 신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나 강렬한 종교적 체험을 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서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멀리하려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실제적인 과정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외적인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적으로 선한 사람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기 위해 선행을 하고,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헌금하며, 종교적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훌륭한 행동이지만, 그 행동을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이 여전히 자기중심적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단순히 외적인 행위의 양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행위를 움직이는 사랑과 목적에 비추어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자신의 내적인 동기를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사랑을 정직하게 살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행을 구원의 대가로 삼는 태도와, 주님의 은혜가 자신의 삶에서 실제적인 선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가르침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전자는 인간이 자신의 공로를 쌓아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태도이지만, 후자는 인간이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지혜를 실제로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내는 삶입니다. 따라서 ‘선행으로구원받는것은아니다’라는 말은 옳지만, 그 말이 ‘선한삶은구원과관계없다’는 뜻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선행은 구원에 대한 외적인 보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삶 안에서 실제로 결합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직은혜’라는 고백은 오히려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구원이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라는 말은 단지 과거에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한 순간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는 순간에도, 그 악을 멀리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삶에서도 주님의 은혜는 계속 필요합니다. 인간이 어떤 선한 일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공로를 자기 것으로 주장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주님에게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 그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은혜만을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을 실제로 변화시키기 원하며, 주님의 진리는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고 선을 사랑하도록 인도합니다. 따라서 은혜는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드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악을 극복하고 참된 자유를 회복하도록 하는 신적 능력입니다. 갈5:6에서 바울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말씀한 것도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사랑과 분리된 믿음은 단순한 종교적 지식이나 확신으로 남을 수 있지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의 삶 안에서 하나가 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은혜의 신앙은 믿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회개와 거듭남, 체어리티와 선한 쓰임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할까요? 이 질문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살피고 더 많은 선행을 해야 한다는 부담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와 거듭남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상태와 능력을 아시며,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진리를 가르치고 선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있는 악을 발견할 때마다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모든 악을 한순간에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신의 영적 상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빠질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면서 오늘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오랫동안 반복하던 거짓말을 멈추는 일이 중요한 회개의 시작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가까운 가족에게 가하는 언어적 폭력을 멈추는 일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성공과 명예를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던 태도를 버리는 일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변화는 겉보기에 작아 보일지라도 영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자유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받는 것이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믿는 것뿐입니까? 구원이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에서 비롯된다는 고백은 반드시 보존해야 할 중요한 진리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행이나 종교적 공로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모든 참된 선과 진리, 거듭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실제적인 회개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믿음과 체어리티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인간이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는 일이 거듭남의 중요한 질서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인간은 이러한 일을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해야 하지만, 실제로 그 모든 선한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은혜와 인간의 응답은 서로 경쟁하는 두 구원의 원인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가 유일한 근원이며, 인간은 그 은혜를 자신의 자유 안에서 받아들여 실제로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구원을위해무엇을얼마나더해야하는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주님께서주시는은혜를실제로어떻게받아들이고있는가?내가이미알고있는진리를삶으로실천하고있는가?자신의악을죄로인정하고멀리하며,주님에게서오는사랑과지혜를이웃을위한선한쓰임으로나타내고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참된 은혜의 신앙은 인간의 공로를 부정하지만 인간의 책임을 지우지 않으며, 믿음을 강조하지만 회개와 거듭남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할수록,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의지하여 더욱 성실하게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게 됩니다. 결국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라는 말의 참된 의미는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에 인간이 그 은혜를 받아들여 실제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은혜와 믿음,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실제적인 거듭남의 관계입니다. (PR.003해설)
‘교회밖에는구원이없다.’ 이 짧은 문장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교회론적 명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라틴어로는 ‘ExtraEcclesiamNullaSalus’라고 하며, 3세기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와 관련하여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명제는 본래 교회의 일치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강조하는 신학적 맥락에서 사용되었지만, 역사 속에서는 종종 눈에 보이는 교회 조직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배타적 주장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천주교에서 이 명제는 교회가 구원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이 교회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설명하는 중요한 교리적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여러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가 아닌 개신교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 다른 종교 안에서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까? 무엇보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라는 제도에 속하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천주교의 배타성을 비판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구원의 근원과 교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묻게 합니다.
먼저 오늘날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은 ‘교회밖에는구원이없다’라는 명제를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CatechismoftheCatholicChurch)846항은 이 명제를 긍정적 형태로 설명하면서, 모든 구원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그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온다고 가르칩니다. 이어 847항은 자기 잘못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은총의 도움을 받아 양심에 따라 그분의 뜻을 실천하려는 사람들도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밝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인류의빛’(LumenGentium)14항과 16항 역시 이러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에 필요한 교회로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그 교회에 들어가거나 그 안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오늘날 천주교의 입장은 모든 비가톨릭 신자를 무조건 배제하는 단순한 제도적 배타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보편성과 가톨릭교회의 구원적 필요성을 동시에 주장하는 구조입니다. 이 점을 정확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천주교가 실제로 가르치지 않는 내용을 만들어 놓고 비판하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천주교가 자기 밖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구원을 궁극적으로 가톨릭교회의 구원적 질서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주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과, 그러한 구원이 특정한 역사적 교회의 제도적 질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요14:6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며, 행4:12에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에서 ‘주님외에는구원이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과 ‘특정한역사적교회제도와의관계밖에는구원이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가 말씀을 보존하고 주님을 증언하며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곧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교회의 제도적 경계에 종속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참으로 주님의 교회라면, 사람들을 자기 자신에게 묶어 두기보다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가치는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의 숫자나 제도적 권위가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이 얼마나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지옥’(HeavenandHell, HH, 1758)HH.318에서 이 문제에 관하여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고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견해를 소개한 뒤, 그러한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주님의 자비가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주님의 자비가 모든 개인에게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느 나라와 시대에 태어날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떤 종교적 환경에서 성장할지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외적 조건이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면, 주님의 사랑과 공의가 인간이 선택할 수 없었던 역사적 조건에 종속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이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의 본질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은 복음을 직접 접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가진 종교와 양심을 통하여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선하게 살아갈 기회를 마련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동일하게 참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하시는 섭리가 인간의 종교적 환경에 의하여 차단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보편적 구원 섭리는 HH.328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각자의 종교 안에서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체어리티(charity)의 선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도 주님의 교회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 수 있는 교회의 특별한 역할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교회를 인체의 심장과 폐에, 다른 종교 안의 사람들을 여러 기관과 지체에 비유합니다. 심장과 폐가 온몸의 생명 유지에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듯, 말씀을 가진 교회도 인류 전체의 영적 생명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비유는 교회의 독점적인 구원 권한을 주장하기 어렵게 합니다. 심장과 폐는 몸 전체를 위하여 존재하지, 몸의 다른 기관들을 배제하기 위하여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가진 교회에 특별한 영적 빛을 주셨다면, 그것은 그 교회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배제하라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며 인류 전체를 섬기는 쓰임을 담당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교회의 영적 특권은 곧 영적 책임이 됩니다. 더 많은 진리를 받은 사람일수록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며, 그 빛을 자기 우월감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천국의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1032에서도 확인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와 맺으신 언약을 설명하면서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지닌 사람들과 결합하시며, 여기에는 교회 안의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도 포함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교리적 차이를 근거로 자기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을 부정하려는 태도 역시 경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종교적 명칭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그의 내면에 실제로 어떤 사랑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진리에 대한 이해를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선은 진리를 통하여 그 방향을 발견하고, 진리는 선과 결합할 때 생명을 얻습니다. 다만 사람이 자기 잘못 없이 더 밝은 진리를 배우지 못한 경우, 주님께서는 그가 알고 있는 진리와 선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를 이끄실 수 있습니다. 또한 HH.321–325항은 기독교 밖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사후에 주님에 관한 가르침을 받으며, 선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상에서 특정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영원한 배제를 뜻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사후의 가르침이 지상에서 형성된 사랑의 방향을 무조건 뒤집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선을 향한 사랑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종교적 명칭만이 아니라, 인간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르침은 결국 어느 종교를 믿든 선하게만 살면 모두 천국에 간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참된 선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은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체어리티 역시 단순한 친절이나 자선활동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선을 사랑하는 내적인 삶의 성향이며, 실제적인 행동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말은 선과 악의 구별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인 종교적 소속보다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삶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지상에서 형성된 지배적 사랑의 방향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가르침을 통하여 더 밝은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지상에서 어떻게 살아도 죽은 뒤에 얼마든지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구원 섭리는 보편적이지만 인간의 자유와 삶의 책임까지 없애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차이를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양쪽 모두 구원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있으며, 복음을 알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또한 신앙이 실제적인 삶과 결합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러한 구원까지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관련하여 이해하며, 가톨릭교회 안에 구원의 수단들이 온전히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가 인류 전체에 걸쳐 존재하며, 그 교회에 속한다는 것의 본질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천주교는 배타적이고 스베덴보리는 포용적이라는 정도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교회의 본질을 어디에 두고,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와 제도적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천주교가 교회의 성사적 질서와 역사적 연속성을 구원론 안에서 본질적인 요소로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주님과 인간의 실제적인 결합을 중심으로 교회를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교회는 구원의 근원을 소유하는 기관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인간에게 전하고 그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거룩한 수단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천주교 신자가 자신은 참된 교회 안에 있으므로 영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듯이, 개신교 신자도 자신이 정통교회에 속해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므로 구원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은 참된 교리를 알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보다 주님께 더 가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는 모두 같은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자신의 종교적 지식이나 소속에 대한 확신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일에는 신중해야 하지만, 자기 자신이 받은 진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는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밖에 있다는 이유로 그의 구원을 부정하기 전에, 먼저 자신은 교회 안에서 배운 사랑과 진리를 실제로 살아 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면, 교회에 속한 사람의 첫 번째 책임은 다른 사람의 구원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진리를 통하여 더욱 깊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처음의 명제로 돌아옵니다. ‘교회밖에는구원이없다.’ 이 말은 구원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으며, 모든 구원받은 사람이 궁극적으로 주님의 영적인 공동체에 속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때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교회’를 특정한 역사적 제도와 동일시하고, 그 제도와의 관계를 구원의 보편적인 조건으로 삼는다면 주님의 교회가 지닌 영적 본질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의 교회는 인간이 설정한 종교적 경계보다 크고,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하는 구원의 경로보다 깊습니다. 그렇다고 교리와 교회생활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진리를 배운 사람은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며, 교회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인도하는 책임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권위를 갖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진리의 빛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주님의 사랑을 실제로 살아 내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문을 자기 소유로 선언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주님을 증언하고 그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SL.RC.002해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을영접한날’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사람은 부흥회에서 복음을 듣고 눈물로 회개하며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였던 날을 기억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어느 날 말씀을 듣다가 비로소 예수님이 자신의 구주이심을 깨닫고 믿음을 고백했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 사람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그날 이후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개신교인은 자신이 예수님을 영접한 날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날, 곧 자신의 영적 생명이 시작된 날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고백에는 인간이 자연적 삶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주님을 믿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심한 순간에 인간은 실제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까? 아니면 그 순간은 영적 출생 자체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긴 과정의 중요한 시작일 수 있습니까?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개혁과 거듭남의 질서를 살펴보면, 우리가 흔히 하나의 사건으로 생각하는 회심과 영적 출생 사이에 반드시 구별해야 할 의미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개신교의 회심 이해를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개신교 안에는 회심을 하나의 분명한 사건으로 경험하는 것을 강조하는 전통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신앙교육과 점진적 변화를 통해 믿음이 자라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도 있습니다. 특히 복음주의와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교회에서는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결단을 강조하며, 그때의 경험을 구원의 중요한 증거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유아세례를 시행하는 전통에서는 반드시 성인이 된 뒤 특정한 영접기도를 드려야 영적 생명이 시작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0장은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인간을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이해를 밝히시며 의지를 새롭게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 전체가 영접기도를 드린 날짜를 영적 출생의 필수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회심의 경험이 강렬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이미 완전하게 거듭났다고 가르치는 것도 정통 개신교의 일반적인 입장은 아닙니다. 다만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이러한 구별이 충분히 의식되지 않은 채, 특정한 날의 영접과 결단을 자신의 영적 출생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그 결과 신앙의 중심이 지금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보다 과거에 경험한 특별한 순간에 놓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검토해야 할 문제는 그날의 고백이 진실했는가를 의심하는 일이 아니라, 그 고백이 영적인 삶 전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성경에서 거듭남을 가장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장면은 요3에 나타나는 주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입니다. 요3:3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이를 육체적 출생으로 이해하여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요3:5에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설명하시며, 6절에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거듭남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에 가입하거나 특정한 신앙고백을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연적 생명만을 따라 살아가는 상태에서 벗어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아들이는 일을 뜻합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요3:8에서 바람이 임의로 불지만 사람이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영적 출생을 반드시 인간이 정확한 날짜와 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신앙이 변화된 결정적 순간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언제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르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말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을 기억하는 능력이 아니라 실제로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새예루살렘의교리’(TheNewJerusalemandItsHeavenlyDoctrine, NJHD, 1758) NJHD.173-176에서 영적 출생과 자연적 출생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인간은 부모에게서 자연적 생명을 받아 태어나지만, 영적 생명은 주님에게서 새롭게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적 생명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기울기 쉽지만, 영적 생명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말씀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이 단순히 종교적 지식을 새롭게 얻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사실을 배우고, 성경의 교리를 이해하며, 구원에 관한 설명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그의 의지와 사랑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 자연적 생명에서 영적 생명으로 충분히 옮겨 가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NJHD.173은 사람이 주님에게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NJHD.174는 영적 생명의 본질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에서 찾습니다. 따라서 영적 출생은 단순히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는 지적 결단보다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하는 생명의 방향 자체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일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 TCR.571에서 더욱 체계적으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으로 변화되는 과정에 두 가지 상태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첫 번째는 ‘개혁’(reformation)의 상태이고, 두 번째는 ‘거듭남’(regeneration)의 상태입니다. 개혁의 상태에서는 인간의 이해가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잘못 알고 있던 것을 깨닫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곧바로 그의 모든 사랑과 의지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상태인 거듭남에서는 이해로 받아들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억지로 행하던 일을 점차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행하게 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붙들고 있던 악을 죄로 인정하여 멀리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일을 기쁨으로 여기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인간의 내면에서 일종의 역전이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앞서서 의지를 이끌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 새롭게 형성된 사랑이 이해를 이끌며, 그 사랑에 따라 진리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한 날에 진리를 처음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결심했다면, 그날은 개혁의 중요한 출발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듭남 전체가 이미 이루어진 날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개혁과 거듭남을 구별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영접기도를 한 뒤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영적 생명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적 변화의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며,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사람이 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83-586에서 거듭남을 인간의 잉태와 태중의 성장, 출생과 양육에 비유합니다. 이 비유가 중요한 이유는 영적 출생을 하나의 독립된 순간만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적 생명도 출생 이전에 잉태와 성장의 과정을 거치며, 출생 이후에는 다시 오랜 양육과 성숙의 과정을 거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생명도 인간이 처음 진리를 받아들이고 변화되기를 원할 때부터 여러 단계에 걸쳐 형성되고 성장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회심이 강렬한 사건으로 경험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오랜 시간에 걸친 깨달음과 회개의 과정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특정한 날의 영접 경험을 무의미하다고 말해서도 안 되지만, 그 경험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영적 출생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시는 실제적인 역사이며, 그 역사에 인간이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출생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TCR.576-578에 따르면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고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없애고 일방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입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여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인정하며, 새로운 삶을 선택하도록 이끄십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신의 잘못을 살피고 고치려 노력해야 하지만, 그 모든 참된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영적 출생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심한 순간에도 주님의 은혜가 역사할 수 있으며, 그 이후 사람이 자신의 악과 싸우고 진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도 동일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처음 믿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그 이후의 성장은 인간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식으로 둘을 나눌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적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인간은 그 생명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한 번의 영접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이 스스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끊임없이 공급하시는 사랑과 진리를 인간이 받아들이면서 실제로 새로운 존재가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회심의 경험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생기는 문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전에 예수님을 영접하며 뜨거운 감동을 경험했고, 그날 이후 자신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전의 이기심과 분노, 교만과 거짓이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때 그는 두 가지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기 쉽습니다. 하나는 과거에 영접한 경험이 분명하므로 현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적 상태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여전히 죄된 성향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과거의 회심이 거짓이었으며, 자신은 처음부터 영적 생명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두 가지 판단 모두 신중해야 합니다. 참된 회심의 경험이 있었다고 해서 모든 악한 성향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이후에 시험과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과거에 받은 모든 영적 감동이 거짓이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자신의 악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악을 정당화하며 붙들고 있는지, 아니면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실제로 멀리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영적 생명의 성숙은 과거의 경험을 반복해서 확인하는 일보다, 현재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삶에서 드러납니다.
그런데 회심의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같은 원리를 적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니며 자연스럽게 성경을 배우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특별한 영접기도의 순간이나 강렬한 회심의 경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에게 영적인 생명이 시작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판단할 근거가 없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회심의 날짜를 기억하는가보다 그가 주님의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가에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TCR.571에서 지상에서 개혁의 첫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사후에도 거듭남의 다음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거듭남이 반드시 지상에서 어떤 특정한 날에 완성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상에서 새로운 영적 삶을 시작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상에서 그 첫 상태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사후에 다음 상태로 나아갈 수 없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 출생의 정확한 날짜를 찾아내는 데 집착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님을 향하여 자신의 내면을 열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악에서 돌아서는 삶을 시작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영적 생명의 시작은 중요하지만, 그 시작을 인간의 기억 속에 남은 하나의 종교적 사건과 반드시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의 의미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1:12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러나 요1:13은 이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영접은 인간이 자신의 결심만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는 행위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일이며, 그 생명에 따라 살아가도록 부름받는 일입니다. 또한 요14:23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말을 지키는 사람에게 아버지와 함께 와서 거처를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한순간 주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주님께서 자신의 내면에 거하시도록 하는 지속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한 날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그날의 경험 자체가 영원한 보증서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 시작된 믿음이 지금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 회개와 거듭남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날이 내 영적 생명이 시작된 날입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날이 자신의 삶에서 주님을 향해 돌아선 결정적인 출발점이었을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진리와 무관하게 살아가던 사람이 처음으로 주님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결심했다면, 그 경험은 귀하게 보존할 만한 영적 전환점입니다. 그러나 그날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영적 출생의 필수적인 날짜로 생각하거나, 영접기도를 드린 순간에 거듭남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연적인 생명에서 영적인 생명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개혁과 거듭남의 질서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함으로써 점차 새로운 생명을 이루어 갑니다. 이 모든 과정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역사이며, 인간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그 생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지 ‘나는언제예수님을영접했는가?’가 아닙니다. ‘그날이후나는실제로무엇을사랑하는사람으로변화되고있는가?주님의말씀이내이해를밝히는데서그치지않고내의지와선택을새롭게하고있는가?나는자신의악을죄로인정하고멀리하면서주님께서주시는선과진리를삶으로받아들이고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회심의 순간은 영적 여정에서 소중한 시작일 수 있지만, 그 시작 자체가 여정의 완성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참된 영적 생명은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 안에서 형성되고 성장하며, 인간이 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기쁨으로 실천할 때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예수님을 영접한 날의 의미와 영적 출생, 그리고 실제적인 거듭남의 관계입니다. (PR.002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