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1(D1)-주일예배(2540, 눅18,15-17),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자’의 속뜻.pdf
0.39MB
축도.2024-04-21(D1)-주일예배(2540, 눅18,15-17),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자’의 속뜻.pdf
0.23MB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자’의 속뜻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18:15-17)

 

 

선은 그 안에 순진함이 있는 만큼 선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순진함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結婚愛 414, 이순철 역) The reason why good is good insofar as innocence is within it is that all good is from the Lord, and innocence is to be led by the Lord. (CL.414)

 

 

주님께서는 천국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전의 아이들은 지금과 많이 달랐기 때문일까요? 그건 아니고, 어린아이의 속뜻이 순진함, 이노센스(innocence)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먼저 15절입니다.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사람들이 주님이 만져주시기를 바라고, 어린 아기들을 데리고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린 아기는 순진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기를 데리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은, 그 속뜻으로는, 사람들이 주님께 진리를 배우러 나올 때 순진한 마음으로 나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주님이 자기의 아기를 만져주시기 원했습니다. 주님이 아기를 만지신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순진한 마음 가운데로 오셔서 사람들과 교류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순진한 마음으로 말씀을 가까이할 때, 주님께서 그 마음속으로 오셔서 진리의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아기를 만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의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말씀에서 주님의 제자는 보통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을 뜻하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을 잘못 믿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 거짓 교리를 만들거나, 또는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는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을 꾸짖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배우려는 사람들을 방해하거나 박해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순진한 사람들을 박해할까요? 순진함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그것에 따라 박해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전혀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의 순진함이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들은 무조건 베푸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새 교회에서는 이런 걸 무지의 순진함이라고 합니다. 이때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순진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가 하면, 참된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순진함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순진함이란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한 그것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거짓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질시하고 핍박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 또한 순진한 사람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 가령, 이런 아르카나, 말씀의 속뜻에 기반한 새로운 내용들을 전한다 하여 기존 기독교회, 개신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 여러 방법을 통해 괴롭히는...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주님의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꾸짖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순진함의 단계 내지는 유형은 다양한데요, 그래서 말씀에서는 아이를 젖먹이라 하기도 하고, 아기, 또는 어린아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젖먹이가 가장 순진한 것이고, 아기나 어린아이로 갈수록 그보다는 덜 순진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꾸짖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6절입니다.

 

16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어린아이에 비유되는 순진함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스베덴보리 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414번 글에서는

 

선은 그 안에 순진함이 있는 만큼 선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순진함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즉 순진함이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인데, 그러므로 순진함이 없으면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럴 경우, 비록 겉보기엔 선처럼 보일지라도 그 선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이 아니므로 참된 선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말씀하신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주님은 교회 안의 사람이든 교회 밖의 사람이든 그들의 순진하고 선한 마음 안으로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1059번 글에 의하면, 놀랍게도 주님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로 더 많이 오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진리를 대적하지 않지만, 주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랍니다. 진리를 대적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주님 당시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입맛대로 왜곡해서 진리로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일 돌이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3절 이하에서는 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3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눅13:23-30)

 

여기서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주님께 여쭙는 것은 ‘교회 안에 주님을 대적하는 자가 많은데 구원받을 자가 과연 있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중 된 자는 교회 밖의 타 종교 사람들을 뜻하고, 먼저 된 자는 교회 안에 있는 자로서 말씀을 왜곡한 자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교회 안의 사람들보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구원받기가 쉽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덮고 있는 지적 어둠은 주님에 의해 쉽게 걷히지만, 진리를 알면서도 더럽힌 자들은 그들을 덮고 있는 어둠이 걷히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완고함 때문이지요. 17절입니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순진함이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뜻합니다.

 

※ 참고로,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천국을 떠받치는 두 키워드는 ‘순진함’(innocence)과 ‘평화’(peace)라고 합니다.

 

순진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이유에 대해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281번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순진성(innocence)에 대해 천사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순진성이 모든 선함의 본질이라는 것과, 선은 그 안에 순진성이 있을 때만 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지혜(wisdom)도 순진성이 있어야 지혜이며, 사랑(love), 이타심(charity), 신앙(faith)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순진성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

 

선은 그 안에 순진함이 있어야 선이다. 모든 선은 주께로부터 오며, 순진함이란 주의 인도하심을 받기 원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말하기를, 오직 순진성에 의해서만 진리는 선에, 선은 진리에 결합될 수 있으므로 천사는 순진성이 있어야 천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선과 진리가 천국적 결혼으로 결합되지 않은 사람 안에는 천국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과 진리의 결합을 천국적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천국적 결혼이 바로 천국인 것이다.

 

또 천사에게 들은 것은, 참된 결혼애는 순진성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참된 결혼애는 남편과 아내의 마음이 선과 진리의 결합 안에 있을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 결합이 낮은 단계로 내려와 결혼애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했다. 부부는 각자의 마음이 사랑 안에 있는 만큼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결혼애에는 애들 같은 천진난만한 장난스러움이 있다고 했다. (천국과 지옥 281, 김은경 역)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진리 안에 들어온 우리들은 나름대로 순진한 사람들입니다.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으로 이 진리를 택했고, 진리에 따라 살고자 지금 노력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타 종교나 타 교파의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들 중에도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린 아기를 데리고 주님께로 오는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진리 안에 있다고 우월감을 가지거나 다른 종교나 교파 사람들을 경시하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영적 순진함을 잃어버리거나 시험에 들 수가 있습니다.

 

※ 아래 이야기는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종교가 다른 사람들끼리 미묘한 우월감을 갖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 불교계의 큰 스님 중 한 분인 탄허 스님에 대한 강연이 있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연자에 의하면, 탄허 스님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기독교 신학자보다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모두 외우고 이해하는데 자신은 3년이 걸렸는데 재능이 있는 사람은 3개월이면 될 거라고 했다고 합니다. 불교에 비해 기독교의 교리가 그만큼 깊이가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면서도 기독교와 동양의 유, 불, 선이 서로 회통(會通)해야 한다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탄허 스님에 대해 더 궁금해졌습니다. 강연하는 스님이 말하기를, 탄허 스님은 석가나 공자, 예수 같은 성인을 생각이 끊어진 자라고 정의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말일까요?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성인들은 우주 만물의 본질인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도 모두 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것을 아는 지는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생각하는 자는 영적인 사람이고, 생각이 끊어진 자, 즉 생각하지 않고 바로 아는 사람은 천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천적인 사람은 천국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지각, 즉 퍼셉션(perception)을 통해 주님과 직접 소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삼라만상의 이치를 앉은 자리에서, 생각하지 않고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강연자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밖에 있지 않고 사람 안에 있다고 할 뿐 모호하게 설명했습니다. 성경을 모두 이해했다는 탄허 스님이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만약 알았다면 예수님을 석가와 공자와 같은 성인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면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믿어야 한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 모르는 존재를 왜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까? 이 모든 의문들을 주님께서는 직접 세상에 오심으로써 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몸소 보여주시고, 음성을 들려주시며, 손으로 직접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새 교회의 진리를 통해 이제 누구나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가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진리를 믿고 따르는 일은 순진함이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항상 순진함을 구하시기를 바라고, 주님이 주신 순진함으로 늘 자신과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6:30-34)

 

아멘

 

2022-01-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4-2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도저히 마음이 안정이 안 되는 원인이 혹시 이번 총선 결과 때문이시면...

 

목사님, 저는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알려주고 있는 바에 따르면, 사람 안에는 두 창문이 있는데, 한쪽 창이 열리면 다른 쪽 창은 닫힌답니다. 즉 세상, 세속을 향한 창이 열리면, 천국을 향한 창이 닫히고, 천국을 향한 창이 열리면 세상을 향한 창은 닫히는 것이지요.

 

이 어느 쪽 창이 열리는가가 아주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 열린 창을 통해 그곳의 기운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인데요, 즉 천국을 향한 창이 열리면, 천국의 모든 입류(入流, influx)가, 지옥을 향한 창이 열리면, 지옥의 모든 기운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세상을 향한 창을 닫기로 하고, 그래서 가급적 스마트폰을 닫고 있고, 부득이 보게 되어도 그냥 제목들 정도만 보고 꾹 참습니다. 그리고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천국을 향한 창을 여느라 애쓰고 있습니다. 밤낮 없이 창세기 번역에 힘쓰고 있고, 또 저희 사모와 함께 몇 가지 성독(聖讀), 즉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스베덴보리 저) 및 ‘성 프란치스코’(엄두섭 저)를 일주일에 두 번씩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작금 상황이 너무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는데... 그러나 주님의 섭리를 믿고 꾹 참습니다. 우리의 경우, 지난 6.25, 그 전 일제 치하, 외국의 경우, 가령, 나치 히틀러의 2차 세계 대전 때, 유럽 및 유대인들의 처지 등을 말이지요. 특히 주님 당시, 로마의 식민지 시절 등... 그때도 주님은 주님이 직접 나서 모든 상황을 그때그때 즉각 바로잡아 주시지 않으셨지요, 전에 나눈 아래와 같은 말씀처럼 말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사42:3) (2024/2/4)

 

위 말씀의 속뜻은, 주님은 사람들의 거짓을 바로잡으시지도, 탐욕을 끄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생명은 오직 거짓과 탐욕밖에 없기 때문인데, 만일 이때 이 유일한, 비록 악하고 거짓되더라도, 생명을 건드리게 되면, 더 이상의 생명이 없어 사람은 바로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대신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려도 그와 동행, 그가 자의로 주님의 선과 진리 쪽으로 돌이키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역량에 맞춰 강약을 조절하시면서 말이지요...

 

목사님, 모두 힘드시지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믿으시며, 주님 주시는 ‘평안’ 가운데 힘써 거하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세상, 세속의 창은 잠시 닫으시고요...

Posted by bygracetistory
,

2024-04-14(D1)-주일예배(2539, 눅18,9-14), ‘자기를 높이는 자, 자기를 낮추는 자’의 속뜻.pdf
0.35MB
축도.2024-04-14(D1)-주일예배(2539, 눅18,9-14), ‘자기를 높이는 자, 자기를 낮추는 자’의 속뜻.pdf
0.23MB

 

 

 

 

‘자기를 높이는 자, 자기를 낮추는 자’의 속뜻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선과 진리는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말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선한 것, 진실한 것, 성실하고 공정한 것을 속 사람과 관계없이 오직 겉 사람으로부터 행한다면 그것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악이다. (계시록 해설 794:3, 이순철 역)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nd not from man, because they are done from the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But when a man does and speaks what is good, true, sincere, and just, for the sake of self and the world he does and speaks them from self, because from the external man without the internal; and such deeds or works are all evil (AE.794:3)

 

 

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선하고 진실한 사람인지 아니면 악하고 거짓된 사람인지는 오직 주님만 아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판단할 때는 겉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행동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고, 살아오면서 그가 했던 일들을 잘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와 관련이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1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주님 당시 유대교회 안에는 신학적 견해가 다른 몇 개의 분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파나, 사두개파, 에세네파 같은 사람들인데, 그 중 바리새파 사람들은 토라라고 하는, 모세의 오경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경건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중들의 신망이 아주 높았고, 그들 스스로도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세리는 유대 사회에서 천대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나름 전문직이었고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천대를 받았던 까닭은 그들의 직업이 돈을 만지는 일이었고, 그러다 보니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며, 또 당시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서 아무래도 세리는 지배 계급의 수족 역할을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같은 시간에 성전에서 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이 먼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십계명을 글자 그대로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토색을 하거나 간음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토색이란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 것인데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소득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바쳤으며, 유대교회의 전통인 이른바 장로의 전통에 따라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그 역시 토색질하는 자요 간음자였습니다. 말씀에서 간음은 영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왜곡하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처럼 많이 아는 사람들이 말씀을 왜곡했고, 또한 그것으로 교인들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교인들에게서 진리와 선을 빼앗는 일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는, 그것이 바로 간음이요 토색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자들이었지만, 속으로는 토색하는 자요, 간음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세리를 내려다보며,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음은 세리의 기도입니다.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자신이 저지른 악과 거짓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죄를 고백했습니다.  

 

참고로, 이 기도는 특히 정교회에서 아주 유명한, 그리고 가장 기본이 되는 기도입니다. 정교회에서는 이를 ‘예수기도’라고 하는데 묵주를 한알 한알 돌리며, 밤을 새워 이 문장만 반복합니다.

 

주님께서 두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말씀의 영적 의미는 몰랐기 때문에, 오로지 문자적인 뜻만을 지켰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능히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 이를테면 말씀의 문자적인 뜻을 잘 지키며, 이웃에게 겸손한 사람들도 구원을 받습니다. 비록 속뜻을 모르더라도 말이지요. 그러나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계명을 지킨다고 자랑하며, 함부로 이웃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사람들에 대해 마태복음 7장 22, 2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영적인 마음과 자연적인 마음, 두 마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마음을 다르게 말하면 속 사람(internal man)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주님과 연결된 마음입니다. 그에 비해 자연적 마음은 겉 사람(external man)이라 불리고, 이는 세상과 연결된 마음입니다. 여기서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겉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다만 겉 사람이 하되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 있고,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즉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후자, 즉 겉 사람 혼자서 하는 것은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하는 행동은 겉과 속이 같으며, 그러므로 진실하고 선합니다. 반대로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은 겉과 속이 다르며, 그러므로 악하고 위선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요3:2) 하였고, 거듭남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바리새인들은 겉과 속이 다른, 교활하고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 주님은 그들에게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눅11:39-41)

 

라고 말씀하십니다. 잔은 포도주를 담는 그릇이므로 영적으로는 진리와, 그리고 대접은 떡을 담는 그릇이므로 영적으로는 선과 각각 관련됩니다. 포도주와 떡은 각각 진리와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악과 거짓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모두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하셨습니다.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는 것은 이웃에게 선을 베풀 때는 속 사람으로부터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의미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리의 심정으로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반성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14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계시록해설 794:3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선과 진리는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말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겉 사람으로부터 행한다면 그것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악이다.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자기도 모르게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말만 그럴듯하고 진심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축복을 하면서 속으로는 안 되기를 바랄 때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인간의 자아로부터 나오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매사가 뜻대로 안 될 때는 니고데모처럼 은밀하게 말씀이신 주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무슨 일이든 겉 사람 혼자 하던 버릇을 버리고 겸손하게 속 사람의 뜻을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또한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6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6-7)

 

아멘

 

2021-12-0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4-1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속뜻

 

AC.468

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리들 또는 교회들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교리들 또는 교회들은 여러 변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태고교회 때부터 ‘노아’(Noah)에 이르기까지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쇠퇴하여 마침내 소수에게만 남게 됩니다. 홍수 때 그것이 남아 있던 그 소수를 ‘노아’(Noah)라 하였습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and shown in the foregoing chapter, it is evident that by names are signified heresies and doctrines. Hence it may be seen that by the names in this chapter are not meant persons, but things, and in the present instance doctrines, or churches, which were preserved, notwithstanding the changes they underwent, from the time of the most ancient church even to “Noah.” But the case with every church is that in course of time it decreases, and at last remains among a few; and the few with whom it remained at the time of the flood were called “Noah.”

 

[2] 참된 교회가 쇠퇴하여 소수에게만 남게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쇠퇴해 온 다른 교회들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와 ‘남은 자’(remnant)라 하며, ‘땅의 가운데’ 또는 ‘중앙에’ 있다고 합니다. 전체적인 경우가 그러한 것처럼 개별적인 경우도 그러합니다. 즉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각 사람에게도 그러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 또는 보편적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또는 참된 신앙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얼마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멸망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몇 사람을 위하여 한 성읍이, 때로는 한 나라 전체가 구원받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교회는 인체와 같습니다. 심장이 건강한 동안에는 그 주변의 내장들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심장이 쇠약해지면 신체의 다른 부분들이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여 사람이 죽습니다. 마지막 리메인스가 바로 ‘노아’(Noah)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6:12과 다른 여러 곳에서 알 수 있듯 온 땅이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That the true church decreases and remains with but few, is evident from other churches which have thus decreased. Those who are left are in the Word called “remains,” and a “remnant,” and are said to be “in the midst,” or “middle,” “of the land.” And as this is the case in the universal, so also it is in the particular, or as it is with the church, so it is with every individual man; for unless remains were preserved by the Lord in everyone, he must needs perish eternally, since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are in the remains. So also in the general or universal—if there were not always some with whom the church, or true faith, remained, the human race would perish; for, as is generally known, a city, nay, sometimes a whole kingdom, is saved for the sake of a few. It is in this respect with the church as it is with the human body; so long as the heart is sound, life is possible for the neighboring viscera, but when the heart is enfeebled, the other parts of the body cease to be nourished, and the man dies. The last remains are those which are signified by “Noah”; for (as appears from Gen. 6:12, as well as from other places) the whole earth had become corrupt.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창6:12)

 

[3] 각 사람 안에 존재하는 리메인스뿐 아니라 교회 전체 안에 존재하는 리메인스에 관해서도 선지서에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에서는, Of remains as existing in each individual as well as in the church in general, much is said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3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4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사4:3, 4) He that is left in Zion, and he that remaineth in Jerusalem, shall be called holy to him, even everyone that is written unto lives in Jerusalem, when the Lord shall have washed the filth of the daughters of Zion, and shall have washed away the bloods of Jerusalem from the midst thereof, (Isa. 4:3–4)

 

이 말씀에서 거룩함은 리메인스에 관하여 서술되며, 이 리메인스는 교회의 리메인스뿐 아니라 교회에 속한 사람의 리메인스도 의미합니다. 시온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those left)이 단지 ‘남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거룩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사야에서는, in which passage holiness is predicated of the remains, by which are signified the remains of the church, and also of a man of the church; for “those left” in Zion and Jerusalem could not be holy merely because they were “left.” Again:

 

20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사10:20, 21)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he remains of Israel, and such as are escaped of the house of Jacob, shall no more again stay upon him that smote them, but shall stay upon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in truth. The remains shall return, the remains of Jacob, unto the mighty God. (Isa. 10:20–21)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렘50:20) In those days, and in that time, the iniquity of Israel shall be sought for, and there shall be none; and the sins of Judah, and they shall not be found; for I will pardon him whom I shall make a remnant. (Jer. 50:20)

 

미가에서는, In Micah: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미5:7) The remains of Jacob shall be in the midst of many peoples, as the dew from Jehovah, as the showers upon the grass. (Micah 5:7)

 

[4] 사람 또는 교회의 남은 것, 곧 리메인스는 또한 십분의 일로 표상되었으며, 그것은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을 포함하는 수도 거룩하였으며, 따라서 ‘십’(ten)은 리메인스에 관하여 서술됩니다. 이사야에서는, The residue or remains of a man, or of the church, were also represented by the tenths, which were holy; hence also a number with ten in it was holy, and “ten” is therefore predicated of remains; as in Isaiah: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그중에 십 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사6:12, 13) Jehovah shall remove man, and many things [shall be] left in the midst of the land; and yet in it [shall be] a tenth part, and it shall return, and shall be for exterminating; as an oak, and an ilex, when the stock is cast forth from them, the holy seed is the stock thereof; (Isa. 6:12–13)

 

여기서 남은 것은 ‘거룩한 씨’(seed of holiness)라 불립니다. 아모스에서는, where the residue is called a “seed of holiness.” And in Amos: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암5:3) Thus saith the Lord Jehovah, The city that goeth forth a thousand shall have a hundred left, and that which goeth forth a hundred shall have ten left to the house of Israel. (Amos 5:3)

 

이 말씀들과 다른 많은 구절에서 속뜻으로는 지금까지 말해 온 ‘리메인스’(remains)가 의미됩니다. 교회의 리메인스로 말미암아 한 성읍이 보존된다는 것은 소돔에 관하여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분명합니다. In these and many other passages, in the internal sense are signified the “remains” of which we have been speaking. That a city is preserved for the sake of the remains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to Abraham concerning Sodom: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18:32) Abraham said, Peradventure ten may be found there; and he said, I will not destroy it for ten’s sake. (Gen. 18:32)

 

해설

AC.468은 창5의 ‘장 개요’를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제시된 이름들의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확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 또는 교회를 뜻한다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유보해 두었던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적어도 창5의 속뜻을 해설하는 이 자리에서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는 개인들의 일대기를 설명하기 위한 이름들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며 변화해 온 교리와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창5의 족보 형식은 속뜻으로는 교회의 영적 역사가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교회들이 ‘여러 변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태고교회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보존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462-467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줍니다. 처음에는 천적인 태고교회가 있었고, 이후 그 상태가 점차 달라졌으며, 라멕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홍수 때까지 참된 교회가 남아 있던 소수가 있었고, 바로 그들을 ‘노아’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노아’는 이 문맥에서 단지 열 번째 교회의 명칭만이 아니라, 이전 교회가 거의 사라진 가운데 주님께서 보존하신 ‘마지막 리메인스’를 나타냅니다.

 

[2]에서 이 ‘리메인스’의 원리는 교회 전체에서 한 사람의 내면으로 확대됩니다. 이것이 AC.468의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교회 전체에 참된 것과 선한 것이 소수에게 남아 있어 인류 전체가 보존되는 것처럼, 한 사람 안에도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과거의 좋은 기억 정도로 말하지 않습니다.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바로 이 리메인스 안에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그의 내면에 보존하신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들이 훗날 거듭남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심장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심장이 건강한 동안에는 주변의 장기들도 생명을 유지하지만, 심장이 쇠약해져 더 이상 영양을 공급하지 못하면 다른 부분들도 함께 죽게 됩니다. 교회 안의 리메인스가 이와 같습니다. 참된 교회가 외적으로 크게 쇠퇴하더라도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소수를 보존하시는 동안에는 인류와 교회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노아’가 바로 홍수 직전 이러한 마지막 리메인스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보존은 단지 몇 사람이 재난에서 살아남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인류 가운데 영적 생명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 ‘교회 안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는 섭리를 보여 줍니다.

 

[3]에서 인용되는 사4:3-4, 사10:20-21, 렘50:20, 미5:7은 바로 이 원리가 말씀 전체에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남아 있는 자’, ‘남은 자’, ‘피한 자’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단순히 숫자상 살아남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시온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이 단지 남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거룩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까닭도 이것입니다. 이들이 ‘거룩하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남은 자’의 주제는 AC의 리메인스 교리와 깊이 연결됩니다.

 

[4]에서는 이 리메인스가 왜 ‘십’이라는 수와 연결되는지가 설명됩니다.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표상하였기 때문에 십을 포함하는 수가 거룩하게 사용되었고, ‘십’은 리메인스에 관하여 서술되었습니다. 그래서 사6:12-13에서는 모든 것이 황폐해진 뒤에도 ‘십분의 일’과 ‘거룩한 씨’가 남으며, 암5:3에서는 천 명 가운데 백 명, 백 명 가운데 열 명이 남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산술적인 비율 자체가 아니라, 황폐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무엇인가를 남겨 두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거룩한 씨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18:32의 소돔 이야기가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이라는 아브라함의 간구와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십’은 단순한 인원수를 넘어 리메인스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몇 사람을 위하여 한 성읍이, 때로는 한 나라 전체가 구원받기도 한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외적인 규모가 아니라 그 안에 아직 보존되어 있는 선과 진리입니다.

 

이렇게 AC.468은 창5의 장 개요 전체를 ‘리메인스’라는 놀라운 원리로 마무리합니다. 태고교회는 쇠퇴했고 퍼셉션도 마침내 사라졌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소멸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까지 보존된 것을 ‘노아’라 하셨고, 바로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고대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이 질서는 교회의 역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의 거듭남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안에서도 때로는 선과 진리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주님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그것을 붙들고 다시 영적 생명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교회의 마지막 남은 자인 동시에, 인간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끝까지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섭리를 보여 주는 이름입니다. (AC.468 해설)  

 

심화

‘리메인스가 없으면 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

 

AC.468 심화, ‘리메인스가 없으면 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

AC.468 심화‘리메인스가 없으면 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 AC.468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bygrace.kr

 

AC.460-468 심화, ‘창5의 이름들은 왜 사람이 아니라 교리 또는 교회를 의미하는가?’

AC.460-468 심화 ‘창5의 이름들은 왜 사람이 아니라 교리 또는 교회를 의미하는가?’ 창5를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족보입니다. ‘아담은 셋을 낳고, 셋은 에노스를 낳고, 에노

bygrace.kr

 

 

 

AC.469, 창5:1, '계보의 책, 영적으로 창조되어 천적으로 된 태고교회'(AC.469-47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bygrace.kr

 

AC.467, 창5, ‘라멕에게서 퍼셉션이 사라지고 노아라는 새 교회가 시작된다’

개요 AC.467‘라멕’(Lamech)은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을 전혀 간직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며, ‘노아’(Noah)는 새 교회로 묘사됩니다. (29절) “Lamech” is described as retaining nothing of the perception whi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개요

 

AC.467

‘라멕’(Lamech)은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을 전혀 간직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며, ‘노아’(Noah)는 새 교회로 묘사됩니다. (29절) “Lamech” is described as retaining nothing of the perception which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and “Noah” is described as a new church. (verse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29절)

 

해설

AC.467은 앞의 AC.466에서 노아를 ‘고대교회’라고 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아홉 번째 교회인 ‘라멕’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그다음 ‘노아’는 ‘새 교회’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라멕에서 노아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히 아홉 번째 교회 다음에 열 번째 교회가 이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한 질서가 끝나고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시작되는 중요한 전환입니다.

 

여기서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특징은 주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참인지 추론하여 받아들이는 방식과 달랐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AC.467은 라멕에 이르러 그 퍼셉션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462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온 변화가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줍니다. ‘셋’은 처음의 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 않았고, 이후 여러 교회가 계속 이어졌으며, 마침내 ‘라멕’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창5의 여러 이름을 통하여 나타나는 변화는 단순히 교회의 명칭이 바뀌어 온 과정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특징짓던 내적 상태가 점차 달라져 마침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지속될 수 없게 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노아’가 등장합니다. AC.467은 노아를 단순히 라멕 다음의 교회라고 하지 않고 ‘새 교회’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라멕에게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면, 다음 교회는 이전의 상태를 그대로 회복하거나 반복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달라진 인간의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필요했고, 그 새 교회를 ‘노아’라고 한 것입니다. 앞의 AC.466에서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전환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에녹에 관한 AC.464도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을 교리로 형성하여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했던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영원히 같은 방식으로 지속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제 라멕에 이르러 그 퍼셉션이 사라지고 노아라는 새 교회가 시작된다는 AC.467의 설명은, 왜 앞선 시대에 그러한 교리의 보존이 필요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다만 그 보존된 교리가 새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이후의 본문 해설을 따라가며 살펴보아야 합니다.

 

AC.467은 결국 태고교회에서 고대교회로 넘어가는 경계선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한쪽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라멕’이 있고, 다른 쪽에는 ‘새 교회’인 ‘노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 교회의 끝이 곧 주님의 역사의 끝은 아닙니다. 한 형태의 교회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에도 주님은 인간의 달라진 상태에 맞추어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라멕과 노아 사이에는 단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의 끝에서도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고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가 함께 나타나 있습니다. (AC.467 해설)

 

 

 

AC.468, 창5, ‘노아는 교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리메인스를 가리킨다’

속뜻 AC.468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

bygrace.kr

 

AC.466, 창5, ‘노아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가 된 열 번째 교회이다’

개요 AC.466열 번째 교회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 이름을 ‘노아’(Noah)라 하였습니다.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 합니다. (28-29절) A tenth, the parent of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 was named “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개요

 

AC.466

열 번째 교회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 이름을 ‘노아’(Noah)라 하였습니다.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 합니다. (28-29절) A tenth, the parent of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 was named “Noah.” This church is to be called the ancient church. (verses 28–29)

 

28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28, 29절)

 

해설

AC.466은 AC.460부터 이어져 온 교회들의 계승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으로 이어진 뒤, 열 번째 교회로 ‘노아’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노아를 단순히 그 연속 가운데 하나를 더 추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교회에 새로운 이름을 붙입니다. 바로 ‘고대교회’입니다. 따라서 노아는 태고교회의 이어지는 여러 교회가 끝나 가는 지점인 동시에,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보여 주는 이름입니다.

 

원문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the parent of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입니다. 노아라 하는 교회로부터 홍수 후에 다시 세 교회가 이어져 나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AC.466은 아직 그 세 교회가 무엇이며 각각 어떠한 상태인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노아가 이전 교회의 마지막에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홍수 이후에 이어질 교회들의 출발점이 된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이 점에서 ‘노아’를 열 번째 교회라고 하는 것과 ‘고대교회’라고 하는 것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노아는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순서로는 열 번째이지만, 그 성격에서는 새로운 교회의 시작입니다. 즉 교회의 역사가 완전히 끊어진 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앞선 시대에서 보존된 것을 통하여 다음 시대의 교회가 준비됩니다. 창5의 교회 계승이 노아에 이르면서 하나의 큰 전환점을 맞는 것입니다.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 한다’는 말은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태고교회’와도 분명히 구별됩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는 단순히 시대가 앞서고 뒤선다는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회의 상태와 방식에도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AC.466은 아직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는 곳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노아와 함께 ‘고대교회’라는 새로운 교회가 시작된다는 점을 붙들어 두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구체적인 차이는 이후의 해설에서 차례로 밝혀집니다.

 

또한 AC.466은 앞에서 에녹에 관하여 살펴본 내용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에서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이 교리로 형성되어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이제 노아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와는 다른 상태의 교회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앞선 교회에서 보존된 것이 후대에 쓰이도록 준비되었다는 AC.464의 설명은, 교회의 상태가 달라져도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를 준비하신다는 큰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66은 그래서 창5 전체의 방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이 장은 태고교회에서 출발하여 여러 교회를 거쳐 단순히 쇠퇴와 종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노아’라는 열 번째 교회에 이르러 다음 시대를 준비합니다. 태고교회의 한 시대가 저물어 가는 가운데서도 주님은 다음 교회를 위한 것을 보존하시고, 홍수 이후 다시 교회가 이어질 길을 마련하십니다. ‘노아’는 바로 그 연속과 전환의 자리에 놓인 교회이며, 그 교회를 가리켜 스베덴보리는 ‘고대교회’라고 합니다. (AC.466 해설)

 

 

 

AC.467, 창5, ‘라멕에게서 퍼셉션이 사라지고 노아라는 새 교회가 시작된다’

개요 AC.467‘라멕’(Lamech)은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을 전혀 간직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며, ‘노아’(Noah)는 새 교회로 묘사됩니다. (29절) “Lamech” is described as retaining nothing of the perception whi

bygrace.kr

 

AC.465, 창5,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이다’

개요 AC.465 아홉 번째 교회를 가리켜 ‘라멕’(Lamech)이라 하였습니다. (25절) A ninth church was called “Lamech.” (verse 25)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5절) 해설AC.465는 앞에서 이어져 온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개요

 

AC.465

 

아홉 번째 교회를 가리켜 ‘라멕’(Lamech)이라 하였습니다. (25절) A ninth church was called “Lamech.” (verse 25)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5절)

 

해설

AC.465는 앞에서 이어져 온 교회의 순서 가운데 ‘라멕’을 아홉 번째 교회로 제시합니다. AC.463에서 ‘에노스’부터 ‘므두셀라’까지 세 번째에서 여덟 번째 교회가 차례로 제시되었고, 이제 그다음 교회가 ‘라멕’입니다. 따라서 창5:25의 ‘라멕’ 역시 장 개요에서는 한 교회의 이름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은 짧지만 AC.460에서 시작된 흐름을 그대로 이어 갑니다.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교회가 차례로 이어졌고, ‘라멕’은 그 연속 가운데 아홉 번째에 해당합니다. 문자상으로는 족보 속에서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속뜻으로는 ‘라멕’이라는 이름을 통하여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또 하나의 교회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도 AC.465가 말하는 범위를 넘어 ‘라멕’이라는 교회의 구체적인 상태를 미리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장 개요에서 우선 밝혀 주는 것은 그 위치와 순서입니다. ‘라멕’은 ‘므두셀라’ 다음에 이어지는 아홉 번째 교회이며, 그 교회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이후 해당 본문에 대한 해설에서 밝혀집니다.

 

특히 ‘아홉 번째’라는 표현은 창5의 이름들이 서로 무관하게 나열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 안에 있음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셋’에서 시작하여 여러 이름을 거쳐 ‘라멕’에 이르는 동안 각각의 이름은 이어지는 교회를 가리키며, 창5는 그 순서를 통하여 태고교회의 여러 상태가 어떻게 계속되어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465의 핵심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라멕’은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교회들의 흐름 가운데 아홉 번째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장 개요는 각 이름의 의미를 자세히 풀기 전에 먼저 전체 계승의 뼈대를 세워 줍니다. 독자는 이 뼈대를 붙들고 이후 본문 해설로 들어가면서 ‘라멕’이라 하는 교회가 앞선 교회와 어떻게 이어지며 또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AC.465 해설)

 

 

 

AC.466, 창5, ‘노아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가 된 열 번째 교회이다’

개요 AC.466열 번째 교회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 이름을 ‘노아’(Noah)라 하였습니다.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 합니다. (28-29절) A tenth, the parent of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 was named “

bygrace.kr

 

AC.464, 창5, ‘에녹은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으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교회이다’

개요 AC.464‘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개요

 

AC.464

‘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에녹이 더 이상 있지 아니하였으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이라’(Enoch was no more, because God took him)고 한 것입니다. (22-24절) The church called “Enoch” is described as framing doctrine from what was revealed to and perceived by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doctrine, although of no use at that time, was preserved for the use of posterity.This is signified by its being said that “Enoch was no more, because God took him.” (verses 22–24)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2-24절)

 

해설

AC.464는 앞의 AC.463에서 일곱 번째 교회로 제시된 ‘에녹’이 다른 교회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줍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을 모아 ‘교리’로 형성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녹이 새로운 진리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태고교회가 주님으로부터 계시받고 퍼셉션을 통해 알았던 것들을 일정한 교리 형태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이후 교회의 상태가 달라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태고교회는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교리로 배워서 아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안에서 그것을 퍼셉션하던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퍼셉션이 살아 있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이미 내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따로 교리 형태로 정리하여 배우는 일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AC.464가 에녹이 형성한 교리가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리는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이 짧은 표현 안에는 교회의 상태가 앞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이 계속 유지된다면 별도의 교리가 필요하지 않았겠지만, 그것이 사라져 갈 때에는 이전에 퍼셉션으로 알았던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보존하고 전달할 필요가 생깁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한 일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퍼셉션으로 받아들였던 것들을 교리 형태로 남김으로써 후대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교리’는 퍼셉션을 대신하여 에녹이 만들어 낸 인간적인 사상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입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교회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이전에는 내적으로 직접 퍼셉션하던 것이 이제는 가르치고 배우며 보존할 수 있는 형태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이후 교회가 사용할 교리 사이에 놓인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 줍니다.

 

이와 연결되는 말씀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입니다. 장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에녹이라는 교회가 형성한 교리가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다’는 뜻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말씀은 장 개요의 속뜻으로는 에녹이라는 교회의 역할과 그 교리가 보존된 일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의 보다 구체적인 의미는 뒤의 본문 해설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AC.464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주님께서 한 교회의 상태가 변해 가는 가운데서도 다음 시대에 필요한 것을 미리 보존하신다는 점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계속 같은 방식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이 함께 사라지도록 두지 않으셨습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를 통하여 그것을 교리 형태로 보존하여 후대의 쓰임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교회의 상태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가 달라질 때에도 진리가 다음 세대에 전달될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함께 보여 줍니다. (AC.464 해설)

 

심화

‘에녹이 보존한 교리는 후대의 고대 말씀과 모세의 창세기 기록에 어떻게 이어졌는가?’

 

AC.464 심화, ‘에녹이 보존한 교리는 후대의 고대 말씀과 모세의 창세기 기록에 어떻게 이어졌는

AC.464 심화‘에녹이 보존한 교리는 후대의 고대 말씀과 모세의 창세기 기록에 어떻게 이어졌는가?’ AC.464는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

bygrace.kr

 

 

 

AC.465, 창5,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이다’

개요 AC.465 아홉 번째 교회를 가리켜 ‘라멕’(Lamech)이라 하였습니다. (25절) A ninth church was called “Lamech.” (verse 25)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5절) 해설AC.465는 앞에서 이어져 온

bygrace.kr

 

AC.463, 창5, ‘에노스에서 므두셀라까지 이어지는 교회들’

개요 AC.463세 번째 교회를 가리켜 ‘에노스’(Enosh)라 하였고(6절), 네 번째는 ‘게난’(Kenan)(9절), 다섯 번째는 ‘마할랄렐’(Mahalalel)(12절), 여섯 번째는 ‘야렛’(Jared)(15절), 일곱 번째는 ‘에녹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개요

 

AC.463

세 번째 교회를 가리켜 ‘에노스’(Enosh)라 하였고(6절), 네 번째는 ‘게난’(Kenan)(9절), 다섯 번째는 ‘마할랄렐’(Mahalalel)(12절), 여섯 번째는 ‘야렛’(Jared)(15절), 일곱 번째는 ‘에녹’(Enoch)(18절), 그리고 여덟 번째 교회는 ‘므두셀라’(Methuselah)라 하였습니다(21절). A third church was called “Enosh” (verse 6); a fourth “Kenan” (verse 9); a fifth “Mahalalel” (verse 12); a sixth “Jared” (verse 15); a seventh “Enoch” (verse 18); and an eighth church “Methuselah” (verse 21).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6, 9, 12, 15, 18, 21절)

 

해설

AC.463은 앞의 AC.461-462에서 시작된 창5의 구조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천적이었던 태고교회 자체에 이어 ‘셋’이 두 번째 교회로 제시되었고, 이제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가 각각 세 번째에서 여덟 번째 교회로 차례로 제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이름들을 단순히 족보에 나열된 이름으로 다루지 않고, 각각 하나의 교회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AC.463에서는 ‘세 번째 교회’,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 교회’라고 순서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것은 AC.460에서 말한 태고교회의 ‘이어지는 여러 세대’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문자상으로는 한 이름 다음에 다른 이름이 이어지는 족보의 형식이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교회들이 차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이름들을 단순히 서로 다른 명칭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교회의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낸다는 점입니다. 앞의 AC.462에서 이미 ‘셋’은 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 않았던 두 번째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차례로 이어진다고 해서 그 상태까지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면서도 각각의 교회에는 그에 해당하는 상태가 있었으며, 창5는 그 연속적인 변화를 이름들의 계승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다만 AC.463은 아직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가 각각 구체적으로 어떠한 상태의 교회였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그 이름들이 세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 이어지는 교회들을 가리킨다는 전체 구조를 제시합니다. 각 교회의 구체적인 성격과 차이는 뒤의 본문 해설을 따라가면서 하나씩 드러나게 됩니다. 따라서 장 개요 단계에서는 그 의미를 미리 채워 넣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먼저 제시하는 순서와 구조를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보면 창5의 반복되는 이름들은 단순한 나열이 아닙니다. ‘에노스’에서 ‘므두셀라’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바뀔 때마다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교회의 한 상태가 다음 상태로 넘어갑니다. 따라서 창5를 읽으면서 각각의 이름을 만날 때에는 ‘이 이름은 어떤 교회를 가리키며, 그 교회의 상태는 앞선 교회와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이후의 해설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463은 짧은 한 문장 안에 창5의 상당 부분을 한꺼번에 펼쳐 놓습니다. 태고교회에서 시작하여 ‘셋’을 거친 흐름이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에 이르기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창5의 족보를 따라간다는 것은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의 상태와 그 변화를 차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AC.463은 앞으로의 본문 해설에 들어가기 전에 그 전체적인 흐름을 한눈에 보여 주는 장 개요입니다. (AC.463 해설)

 

 

 

AC.464, 창5, ‘에녹은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으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교회이다’

개요 AC.464‘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

bygrace.kr

 

AC.462, 창5, ‘셋은 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 않았던 두 번째 교회이다’

개요 AC.462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는 않았던 두 번째 교회를 가리켜 ‘셋’(Seth)이라 하였습니다. (2-3절) A second church which was not so celestial as the most ancient church is called “Seth.” (verses 2–3) 2남자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개요

 

AC.462

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는 않았던 두 번째 교회를 가리켜 ‘셋’(Seth)이라 하였습니다. (2-3절) A second church which was not so celestial as the most ancient church is called “Seth.” (verses 2–3)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2, 3절)

 

해설

AC.462는 앞의 AC.461에서 말한 태고교회 다음에 이어진 두 번째 교회를 설명합니다. AC.461에서 ‘사람’과 ‘하나님의 모양’이 천적이었던 태고교회 자체를 가리켰다면, 여기서는 그 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는 않았던 두 번째 교회를 ‘셋’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셋’은 이 장의 속뜻에서 단순히 족보에 등장하는 한 사람의 이름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다음에 이어진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는 않았다’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두 번째 교회가 곧바로 천적인 성격을 완전히 잃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태고교회에서 이어진 것이 있었지만, 그 상태는 처음의 태고교회와 같지 않았습니다. 즉 AC.460에서 말한 ‘이어지는 여러 세대’는 단순히 같은 교회가 이름만 바꾸어 계속된 것이 아니라, 앞선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이어받으면서도 그 내적 상태에는 차이가 생긴 여러 교회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AC.462의 짧은 한 문장은 창5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의 태고교회가 가장 천적인 상태에 있었다면, 그다음 교회는 ‘그만큼 천적이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여기에는 이미 변화의 방향이 나타나 있습니다. 태고교회 최초의 상태가 그대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교회들 가운데 그 천적인 성격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앞으로 창5의 여러 이름은 이러한 상태의 변화를 차례로 보여 주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첫 교회는 좋았고 둘째 교회는 나빴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덜 천적이다’라는 것은 곧바로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던 태고교회 특유의 상태가 이전과 동일한 정도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상태를 선악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보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어떠한 방식과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또한 ‘셋’이라는 이름이 한 교회를 나타낸다는 것은 창5의 족보를 읽는 방법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문자상으로는 한 이름 다음에 또 다른 이름이 이어지지만, 속뜻으로는 한 교회의 상태 다음에 또 다른 교회의 상태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창5의 흐름을 따라간다는 것은 단지 여러 이름을 차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에서 비롯된 천적 생명이 이후의 교회들 가운데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하는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AC.462는 이렇게 창5에서 처음으로 ‘이어지는 여러 세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첫 번째 태고교회와 두 번째 ‘셋’은 동일한 상태가 아니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앞선 것으로부터 다음 것이 이어지되 그 상태에는 변화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연속성과 변화가 창5의 족보 안에 담긴 영적 흐름이며, 이후의 이름들을 읽을 때에도 계속 주목해야 할 핵심입니다. (AC.462 해설)

 

 

 

AC.463, 창5, ‘에노스에서 므두셀라까지 이어지는 교회들’

개요 AC.463세 번째 교회를 가리켜 ‘에노스’(Enosh)라 하였고(6절), 네 번째는 ‘게난’(Kenan)(9절), 다섯 번째는 ‘마할랄렐’(Mahalalel)(12절), 여섯 번째는 ‘야렛’(Jared)(15절), 일곱 번째는 ‘에녹

bygrace.kr

 

AC.461, 창5, ‘사람과 하나님의 모양은 태고교회 자체를 가리킨다’

개요 AC.461천적이었던 태고교회 그 자체를 가리켜 ‘사람’(homo), 그리고 ‘하나님의 모양’이라 하였습니다. (1절) The most ancient church itself, which was celestial, is what is called “man” [homo], and a “likene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