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지적인것들이속사람에속한다면,앞의이성적인것들은겉사람에속한다는뜻인가?’
먼저 문장 자체가 무엇을 분명하게 말하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rationalandintellectualthings’라는 두 가지를 말한 뒤‘thelatter’,곧‘후자’가 속 사람에 속한다고 합니다.따라서 여기서‘후자’는‘intellectualthings’,곧‘지적인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AC.40이 직접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적인것들은속사람에속한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반대편 명제까지 만들어‘그러므로이성적인것들은겉사람에속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AC.40은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이것은 짧은 문장이지만AC를 읽을 때 상당히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스베덴보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면,우리가 빈자리를 대칭적으로 채워 넣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새들’이 일반적으로‘이성적이고지적인것들’을 뜻한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특별히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고 덧붙였을까요?
AC.40의 문맥에서 먼저 분명한 것은‘물들이번성하게하는것들’과‘새들’사이의 차이입니다.물에서 번성하는 것들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뜻합니다.반면 새들은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합니다.그러므로 물고기와 새의 차이를 통해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과,그것을 넘어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인간의 더 높은 능력이 구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구절 하나를 외우고 있다는 것과 그 구절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앞의 것은 기억 지식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뒤의 것은 이성적·지적인 활동과 관계됩니다.물론 이것은AC.40의 대응을 이해하기 위한 쉬운 예이지,rational과intellectual을 각각 이렇게 정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지적인것들은속사람에속한다’는 말은 중요합니다.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참된 영적 이해는 단순히 외부에서 정보를 많이 축적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필요하지만,기억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 속 사람의 지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AC.40은 적어도 이 둘의 층위가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rational’과‘intellectual’의 차이를 현대 심리학의 두 가지 사고 기능처럼 간단히 정의하려고 하면 오히려 조심해야 합니다.예를 들어‘rational은논리적으로계산하는능력이고intellectual은마음깊이진리를직관하는능력이다’라고 고정하면 이해하기는 쉬워 보이지만,AC.40은 그런 정의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rational은겉사람과속사람사이의중간영역이다’라고 이번 한 문장만으로 확정하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스베덴보리는 이후 여러 글에서 인간의rational과intellectual,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훨씬 더 세밀하게 다룹니다.그 전체 설명을 따라가야 두 용어의 관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AC.40에서는 먼저 본문이 말하는 만큼을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물고기는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나타냅니다.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그리고 그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새’가 왜 물고기와 함께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지도 조금 보이기 시작합니다.사람 안에는 단순히 기억에 저장된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그것을 가지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더 높은 차원의 활동도 있습니다.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인간의 여러 능력도 살아 있는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 문장은 앞으로AC를 계속 읽게 만드는 작은 예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이성적인것은정확히어디에속하는가?’, ‘이성적인것과지적인것은정확히어떻게다른가?’라는 질문에AC.40한 문장으로 성급하게 답을 만들어 넣기보다,스베덴보리가 뒤에서 인간의 내적 구조를 더 펼쳐 보일 때까지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간단합니다.
‘지적인것들이속사람에속한다고했으므로이성적인것들은곧겉사람에속한다는뜻인가?’
AC.40만 놓고 보면‘그렇게까지말할수는없습니다.’본문이 명시적으로 말하는 것은 후자,곧‘지적인것들이속사람에속한다’는 사실입니다.이성적인 것의 정확한 위치와 역할은 더 넓은AC의 설명 속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본문이 말하는 것과 우리가 거기서 추론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AC를 오래 읽어 가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때로는 조금 덜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말한 것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창1:29)
AC.56
천적인간은오직천적인것들로기뻐하는데,이것들은그의삶과일치하기때문에이르기를‘천적음식’(celestialfood)이라합니다.영적인간은영적인것들로기뻐하며,이것들역시그의삶과일치하므로이르기를‘영적음식’(spiritualfood)이라합니다.자연적인간도마찬가지로자연적인것들로기뻐하는데,이것들은그의삶에속하므로이르기를‘음식’(food),곧‘먹을거리’라하며,주로기억지식으로이루어져있습니다.여기서는영적인간을다루고있기때문에,그의영적음식을표상으로설명하고있습니다.곧‘씨맺는채소’(herbbearingseed)와‘열매맺는나무’(treeinwhichisfruit)로묘사되며,이것들은일반적으로‘씨가진나무’(treeyieldingseed)라합니다.그의자연적음식은다음절에서설명됩니다. The celestial man is delighted with celestial things alone, which being in agreement with his life are called celestial food.The spiritual man is delighted with spiritual things, and as these are in agreement with his life they are called spiritual food.The natural man in like manner is delighted with natural things, which, being of his life, are called food, and consist chiefly of memory-knowledges.As the spiritual man is here treated of, his spiritual food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as by the “herbbearingseed,” and by the “treeinwhichisfruit,” which are called, in general, the “treeyieldingseed.”His natural food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
해설
AC.56은 창1:29의 ‘먹을거리’를 설명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천적 음식이 있고, 영적 인간에게는 영적 음식이 있으며,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연적 음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식은 육체가 먹는 자연적인 음식이 아니라 각각의 인간이 무엇으로 기뻐하며, 무엇이 그의 삶과 일치하는가를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의 음식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은 천적 인간입니다. 천적 인간은 ‘오직천적인것들로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천적인 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천적음식’이라고 부릅니다. 이어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영적음식’이라고 합니다. 자연적 인간 역시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고, 그것들이 그의 삶에 속하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하며, 그것은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의할 것은 천적·영적·자연적 인간을 단순히 ‘높음→중간→낮음’이라는 세 칸짜리 단계표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AC.56의 직접적인 관심은 세 부류의 서열을 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각각의 삶에는 그 삶과 일치하여 기쁨을 주는 것이 있고, 그래서 그것을 ‘음식’이라고 부른다는 점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뻐하는것’을 음식이라고 부를까요? AC.56은 음식의 상응에 대한 전체 교리를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문장 자체에서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천적인 것들은 천적 인간의 ‘삶과일치’하고, 영적인 것들은 영적 인간의 ‘삶과일치’하며, 자연적인 것들은 자연적 인간의 ‘삶에속하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여기서 음식은 단순히 머리로 알고 있는 정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에 맞으며 그가 기쁨을 얻는 것과 관계됩니다.
이것은 ‘사람이무엇을좋아하느냐만보면그사람의영적수준을정확히판정할수있다’는 간단한 진단법을 주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동시에 여러 종류의 기쁨이 있고, 자연적인 기쁨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닙니다. AC.56의 요점은 훨씬 제한적입니다. 천적·영적·자연적 인간에게 각각 그 삶과 일치하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이 그들에게 음식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이 ‘천적인것들로기뻐한다’고 할 때에도 이를 곧바로 ‘사랑자체만으로기뻐하며더이상진리의매개가필요없다’고 풀 필요는 없습니다. 앞의 AC.51-53에서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설명을 보았지만, AC.56은 여기서 천적 음식의 세부 성질을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저 천적 인간은 자기 삶과 일치하는 천적인 것들로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영적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한다고 해서 ‘아직사랑에도달하지못하고진리만먹는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48에서 영적 인간은 이미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의 ‘영적음식’을 사랑과 분리된 진리나 교리 지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음식’과 단순한 ‘정보’를 구별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영적인 사실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의 영적 음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AC.56은 음식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그것이 ‘그의삶과일치하기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지식의 보유량보다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삶 안에 있으며 무엇으로 기뻐하는지가 이번 표현의 중심에 더 가깝습니다.
자연적 인간의 경우에는 스베덴보리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의 음식은 자연적인 것들이며 ‘주로기억지식으로이루어져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은 앞의 AC.40에서도 만났습니다. 외부에서 배우고 기억에 저장하는 지식들입니다. 이런 지식 자체를 낮거나 악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적 인간의 삶에 속하는 중요한 재료이며, 이후 영적인 것들이 받아들여지는 데에도 쓰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적음식=세상적성공과쾌락’이라고 단순화하는 것은 AC.56보다 좁습니다. 본문이 직접 예로 드는 것은 오히려 기억 지식입니다. 자연적 인간은 자연적 차원에 속하는 것들로 기뻐하며, 그 음식은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선하게 사용되는지 악하게 사용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며, AC.56은 여기서 그것을 논하지 않습니다.
이번 글에서 특히 중요한 문장은 ‘여기서는영적인간을다루고있기때문에’입니다. 창1의 현재 문맥이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으므로, 창1:29에 나오는 음식도 영적 인간의 음식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그 음식이 ‘씨맺는채소’와 ‘열매맺는나무’라는 표상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서둘러 ‘씨맺는채소’와 ‘열매맺는나무’의 세부 속뜻을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AC.56은 아직 그것들을 각각 무엇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영적 인간의 음식이 이 두 가지 표상으로 묘사된다고만 합니다. 바로 다음 AC.5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두 표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므로 그 해석은 다음 글의 몫으로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풀은생명이있지만오래지속되지않는상태’, ‘나무는더안정되었지만아직천적사랑에는이르지못한상태’, ‘씨는앞으로더높은생명으로발전할잠재력’이라고 이번 글에서 미리 정리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런 설명은 AC.56의 직접 내용이 아니며, 다음 AC.57이 실제로 말하는 해석과도 어긋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씨맺는채소’와 ‘열매맺는나무’를 일반적으로 ‘씨가진나무’라고 부른다고 덧붙입니다. 이 표현 역시 이번 글에서 별도의 성장 단계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들이 영적 인간에게 주어진 영적 음식을 표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창1:29의 ‘내가너희에게주노니너희의먹을거리가되리라’는 말은 단순히 최초 인간에게 채식을 명령하는 구절을 넘어, 속뜻에서는 영적 인간에게 주어지는 음식에 관한 말씀으로 읽힙니다. 다만 AC.56은 이 한 문장에서 음식의 모든 상응을 완성하지 않습니다. 천적·영적·자연적 음식의 차이를 간단히 제시하고, 현재 문맥에서 영적 인간의 음식이 무엇으로 표상되는지를 밝히는 데 그칩니다.
여기서 ‘주신다’는 표현도 눈여겨볼 수 있지만, 이번 AC가 그 단어의 속뜻을 따로 해설하지 않으므로 지나치게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앞의 AC.39이후의 큰 흐름을 기억하면,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원리는 그대로 유지됩니다. 영적 음식 역시 인간이 자기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6에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가장 흥미로운 표현은 아마 ‘그의삶과일치하기때문에’일 것입니다. ‘내삶과일치하는것이음식이고,그래서그것으로기뻐한다는것은구체적으로무슨뜻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이번 문장의 표현을 넘어 사람의 기쁨과 삶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질문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다만 여기서부터 곧바로 ‘내가무엇에서기뻐하는지만보면내가자연적인간인지영적인간인지천적인간인지알수있다’고 자기 진단을 시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순간적인 즐거움 하나와 한 사람의 삶 전체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AC.56이 말하는 것은 각각의 인간에게 그의 ‘삶과일치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기쁨은 한순간의 감정이라기보다 삶의 성질과 관계하여 읽는 편이 안전합니다.
또 자연적인 것에서 기뻐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로 자연적 인간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영적 인간도 자연계에서 살며 음식, 휴식, 학문, 가족, 일과 같은 자연적인 선을 기쁘게 누릴 수 있습니다. AC.56의 구별을 ‘무엇을조금이라도즐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삶에 속하고 그 삶과 일치하는가의 문제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AC.56의 핵심을 ‘천적인간은사랑을먹고,영적인간은진리를먹고,자연적인간은지식을먹는다’는 세 문장으로만 압축하면 너무 단순해집니다. 어느 정도 기억을 돕는 표현은 될 수 있지만, 본문이 강조하는 ‘삶과일치함’이라는 중요한 조건이 빠지기 때문입니다.
또 ‘거듭남이란먹는음식이자연적음식에서영적음식으로,다시천적음식으로바뀌는과정’이라고 정리하는 것도 AC.56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갑니다. 특히 앞에서 보았듯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관계를 모든 사람이 차례로 통과하는 하나의 직선 단계표로만 보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56은 훨씬 단순하면서도 깊은 사실을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그의 삶과 일치하여 그가 기뻐하는 것들이 있고, 말씀은 그것을 ‘음식’이라는 언어로 표현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천적 음식이, 영적 인간에게는 영적 음식이,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연적 음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창1에서 다루는 것은 영적 인간이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씨맺는채소’와 ‘열매맺는나무’가 그의 영적 음식으로 제시됩니다.
그 두 음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바로 다음 AC.57에서 밝혀집니다. 따라서 AC.56은 그 해석을 미리 완성하기보다 ‘사람에게도영적인음식이있으며,그음식은그의삶과일치하여그를기쁘게하는것’이라는 기본 원리를 붙들고 다음 글로 넘어가게 하는 짧은 연결 글로 읽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창1:21)
AC.42
앞서말했듯이‘물에서번성하여움직이는모든생물’(everylivingsoulthatcreepeth, whichthewaterscausedtocreepforth, Fishes)은주님에게서오는신앙으로이제생명을얻은기억지식을뜻합니다.그리고‘큰바다짐승들’(greatwhales, Whales)은그러한지식들의일반원리를뜻하는데,개별적인것들은이일반원리아래에있으며,또거기에서나옵니다.우주안에있는그어떤것도어떤일반원리아래있지않은것은없는데,그래야그것이존재하고유지될수있기때문입니다.그래서‘고래’(Whales)나‘큰물고기’(greatfishes)는선지자들에의해종종언급되며,그때마다기억지식의일반원리를뜻합니다.애굽왕바로는인간의지혜또는지성,곧일반적으로말해지식(scientia)을표상하는데,그래서‘큰악어’(greatwhale)라고합니다.에스겔을보면, “Fishes,”as before said, signify memory-knowledges, now animated by faith from the Lord, and thus alive.“Whales”signify their general principles, in subordination to which, and from which, are the particulars; for there is nothing in the universe that is not under some general principle, as a means that it may exist and subsist.“Whales,”or“greatfishes,”are sometimes mentioned by the prophets, and they there signify the generals of memory-knowledges.Pharaoh the king of Egypt (by whom is represented human wisdom or intelligence, that is, knowledge [scientia] in general), is called a“greatwhale.” As in Ezekiel:
이말씀은기억지식을수단으로삼아,그러니까자기자신으로부터신앙의신비속으로들어가려는사람들을뜻합니다.이사야에서는by which words are signified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and thus from themselves.In Isaiah:
여기‘바다에있는용을죽이시리라’(slayingthewhalesthatareinthesea)는그런사람들이진리의일반원리조차알지못하게된상태를뜻합니다.예레미야에서도By“slayingthewhalesthatareinthesea”is signified that such persons are ignorant of even the general principles of truth. So in Jeremiah:
여기‘좋은음식’(delicacies)이라한것은신앙의지식(knowledges)을뜻하며,요나를삼킨고래처럼그것들을삼켰다는뜻입니다.이처럼‘큰뱀’(whale)은신앙의지식에관한일반원리를단지기억지식으로만지니고,그런방식으로행하는사람들을뜻합니다. denoting that he had swallowed the knowledges of faith, here called“delicacies,”as the whale did Jonah; a“whale”denoting those who possess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knowledges of faith as mere memory-knowledges, and act in this manner.
해설
AC.42는 창1:21의 ‘큰바다짐승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0에서 물고기는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memory-knowledges)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물고기 하나하나보다 더 큰 것이 등장합니다. 바로 ‘큰바다짐승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이 개별적인 기억 지식들을 포괄하는 ‘일반원리들’(general principles)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이 ‘일반원리’라는 말부터 조금 어렵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여러 개별 지식을 한데 묶어 이해하게 해 주는 보다 포괄적인 지식이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실을 각각 따로 가지고만 있지 않습니다. 비슷한 것들을 묶고, 그 관계를 파악하고, 보다 큰 개념 아래에서 이해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우주안에는어떤일반원리아래있지않은것이하나도없다’고 말하면서, 개별적인 것들이 존재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창1:21의 거대한 물고기 또는 큰 바다짐승은 바로 이러한 ‘기억지식의일반적인것들’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AC.42는 ‘큰바다짐승’이라는 상징 자체를 처음부터 악한 것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창1:21에서는 하나님께서 큰 바다짐승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좋았더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큰바다짐승=악한지식’이라는 고정된 상응표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의 첫 설명에서 큰 바다짐승은 우선 기억 지식의 일반 원리를 뜻합니다. 이후 선지서에서 인용되는 부정적인 사례들은 그러한 지식과 일반 원리가 인간 자신의 지혜와 결합하여 잘못 사용될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애굽 왕 바로를 예로 듭니다. 겔29:3에서 바로는 자기 강들 가운데 누운 ‘큰악어’로 묘사되며 ‘나의이강은내것이라내가나를위하여만들었다’고 말합니다. AC.42는 바로가 ‘인간의지혜또는지성,곧일반적으로말해지식’을 표상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의 초점은 단순히 ‘애굽이나악어가나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기억 지식과 인간의 지성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특히 ‘내것이라’, ‘내가만들었다’는 말은 바로 앞의 AC.39-41에서 계속 강조했던 ‘선과진리와생명의근원은인간자신이아니라주님’이라는 주제와도 자연스럽게 대비됩니다.
겔32:2는 처음 읽으면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바로가 ‘바다가운데의큰악어’이며, 강에서 움직이면서 발로 물을 휘저어 더럽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곧바로 ‘기억지식을수단으로삼아,그러므로자기자신으로부터신앙의신비속으로들어가려는사람들’을 뜻한다고 풀이합니다. 독자는 당연히 ‘어떻게저구절에서이런뜻이나오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AC.42안에서 확실하게 붙들 수 있는 연결고리는 이렇습니다. 물고기는 기억 지식을 뜻하고, 큰 물고기 또는 고래는 그 기억 지식의 일반적인 것들을 뜻하며, 바로는 인간의 지혜 또는 지성, 곧 지식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기억지식을수단으로삼아’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면서 그것을 ‘자기자신으로부터’ 하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붙인 ‘andthusfromthemselves’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많이 알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지식과 지성을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근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앞의 AC.39-41과 함께 읽으면 더 분명해집니다. 거기서도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AC.42에서도 기억 지식과 지성 자체를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1:21의 물고기와 큰 바다짐승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좋다’고 하신 것들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생겨난 지혜처럼 붙들고, 그 힘으로 신앙의 신비를 지배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사27:1의 인용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바다에있는용을죽이시는것’이 그러한 사람들이 ‘진리의일반원리조차알지못하게된상태’를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우리가 이 한 절의 모든 상징을 여기서 따로 해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2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큰 바다짐승이 ‘일반적인것들’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것이 상실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모습은 진리의 일반적인 것들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렘51:34에서는 느부갓네살이 ‘큰뱀같이나를삼키며나의좋은음식으로그배를채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좋은음식’이 신앙의 지식을 뜻하며, 그것을 고래가 요나를 삼킨 것처럼 삼켰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경우의 ‘고래’는 ‘신앙의지식에관한일반원리를단지기억지식으로만지니고,그런방식으로행하는사람들’을 뜻한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핵심은 지식을 많이 소유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살아 있는 신앙의 것이 되지 못하고 단지 기억 속의 지식으로만 머무르는 상태입니다.
이 대목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매우 중요한 구별을 줍니다. AC.40에서 기억 지식은 결코 악한 것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생명을 얻은 기억 지식은 창조의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 살아 있는 물고기로 표현됩니다. AC.42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억 지식에는 개별적인 것들이 있고 그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들이 있으며, 이 질서 자체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지식을 단지 기억 속에 쌓아 두거나, 자기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장악하려 하면 같은 상징이 부정적인 문맥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42를 ‘지식은위험하다’는 경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방대한 학문과 지식을 사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글이 묻는 것은 지식의 양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내가알고있는것들이어떤질서안에있으며,그것을가지고신앙의신비에접근할때그출발점을어디에두고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기억 지식이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살아날 때 그것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자기 지혜의 소유물로 붙들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 하면, 같은 지식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C.42의 여러 선지서 인용을 읽으면서 ‘스베덴보리는도대체어떻게이런구절에서이런속뜻을알아내는가?’라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이것은 겔32:2한 절만 더 자세히 풀이한다고 해결되는 질문이 아닙니다. 앞으로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을 때 반복해서 만나게 될 중요한 문제이므로, 이 질문은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창1:20)
AC.40
‘물들이번성하게하는것들’(creepingthingswhichthewatersbringforth)은겉사람에속한기억지식을뜻하고,‘새들’(birds)은일반적으로이성적이고지적인것들을뜻하는데,이가운데지적인것들은속사람에속합니다.‘물속에서돌아다니는것들’(creepingthingsofthewaters),곧‘물고기들’(fishes)이기억지식을뜻한다는사실은이사야를보면분명합니다. By the “creepingthingswhichthewatersbringforth” are signified the memory-knowledge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That the “creepingthingsofthewaters,” or “fishes,” signify memory-knowledges is plain from Isaiah:
[2] 그러나이의미는에스겔을보면더분명한데,거기서주님은새성전,곧일반적으로는새교회를,그리고교회에속한사람인거듭난사람을묘사하십니다.거듭난사람은누구나주님의성전이기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plainer from Ezekiel, where the Lord describes the new temple, or a new church in general, and the man of the church, or a regenerate person; for everyone who is regenerate is a temple of the Lord:
여기‘엔게디에서부터에네글라임까지의어부들’(FishersfromEn-gediuntoEn-eglaim)과‘그물치는것’(spreadingofnets)은자연적인사람을신앙의진리로가르칠사람들을뜻합니다. “FishersfromEn-gediuntoEn-eglaim,” with the “spreadingofnets,” signify those who shall instruct the natural man in the truths of faith.
[3] ‘새들’(birds)이이성적이고지적인것들을뜻한다는점도선지자들을보면분명합니다.이사야에보면, That “birds” signify things rational and intellectual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Isaiah:
여기서‘들짐승’(wildbeast)이실제짐승을뜻하지않고,‘새’(bird)도실제새를뜻하지않는다는점은,주님께서그것들과‘새언약을맺는다’(makeanewcovenant)고하는것만봐도누구나분명히알수있습니다. That “wildbeast” does not signify wild beast, nor “bird” bird, must be evident to everyone, for the Lord is said to “makeanewcovenant” with them.
해설
AC.40은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생물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물들이번성하게하는것들’, 곧 물속에서 돌아다니는 것들과 물고기들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지식’을 뜻하고,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지적인것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먼저 ‘기억지식’이라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외부로부터 배우고 기억 속에 받아들이는 지식들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읽어 알게 된 내용, 교리를 배우면서 얻은 지식, 자연계와 삶을 통해 습득한 여러 사실 등이 모두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옵니다. AC.40은 이러한 기억 지식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섯째 날에는 그것들이 ‘생물’로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바로 앞의 AC.39와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아직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할 때 그에게 있는 것들이 식물처럼 ‘생명이없는것들’에 비유되지만, 사랑과 신앙으로 살아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기 시작하면 ‘생물’에 비유된다고 했습니다. AC.40은 이제 그 생물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물고기는 기억 지식에, 새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에 대응합니다.
그런데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당연히 ‘왜물고기가기억지식을뜻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AC.40은 그 이유를 추상적인 설명으로 풀기보다 말씀의 여러 구절을 제시하여 그 대응을 보여 줍니다. 먼저 사50:2-3에서 바다와 강의 물이 없어지자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목말라 죽는 장면을 인용합니다. 이 구절은 물고기가 단순히 자연계의 물고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인간의 내적·영적 상태와 관계된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에스겔의 새 성전 환상이 이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준다고 합니다. 겔47:8-10에서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바다에 이르자 물이 되살아나고 고기가 심히 많아집니다. 그리고 어부들이 서서 그물을 칩니다. AC.40은 여기서 ‘엔게디에서부터에네글라임까지의어부들’과 ‘그물치는것’이 ‘자연적인사람을신앙의진리로가르칠사람들’을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이것이 왜 물고기와 기억 지식의 관계를 보여 주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치려면 그 진리들이 자연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AC.40은 바로 이러한 겉 사람의 기억 지식들을 물고기로 나타냅니다. 따라서 겔47장의 풍성한 물고기와 어부들은 단순한 어업의 번성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 교회와 거듭난 사람 안에서 자연적인 사람이 신앙의 진리로 가르침받는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인용됩니다.
여기서 ‘새성전’과 ‘새교회’와 ‘거듭난사람’이 함께 언급되는 것도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단지 외적인 종교 조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가 한 사람 안에 받아들여질 때 그 사람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교회의 모습을 갖습니다. 그래서 AC.40은 새 성전을 ‘일반적으로는새교회’, 그리고 ‘교회에속한사람,곧거듭난사람’과 연결합니다. 이어 ‘거듭난사람은누구나주님의성전’이라고 그 이유까지 직접 밝힙니다.
AC.40의 두 번째 중심은 ‘새들’입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 역시 자신의 생각만으로 제시하지 않고 선지서의 여러 구절을 인용합니다.
사46:11의 ‘동쪽에서부르는날짐승’, 렘4:25의 ‘공중의새가다날아갔으며’, 겔17:22-23의 백향목 아래 깃드는 ‘각종새’가 그 예입니다. AC.40이 이 구절들을 연이어 제시하는 목적은 각 구절의 모든 세부 속뜻을 여기서 설명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번 글의 초점은 ‘새’가 말씀에서 단순히 자연계의 새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렘4:25의 ‘사람이없으며공중의새가다날아갔다’는 표현은 이런 독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사람이 없어지자 새들까지 날아간 광경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선지서의 표현 안에 인간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AC.40에서는 그 가운데 ‘새들’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마지막으로 호2:18을 인용하는 이유도 중요합니다. 거기서는 주님께서 ‘들짐승과공중의새와땅의곤충과더불어언약을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표현을 근거로 ‘들짐승’이 단순히 들짐승을, ‘새’가 단순히 새를 뜻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동물들과 영적인 의미의 언약을 맺으신다는 것이 본문의 궁극적인 뜻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읽는 방법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도 중요합니다. 그는 문자적 의미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에 관한 더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여러 선지서에서 물고기와 새가 어떤 문맥에 놓이는지를 비교하면서 그 영적 의미를 밝혀 갑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도 있습니다. ‘물고기 =기억지식’, ‘새 =이성적·지적인것들’이라는 대응을 알았다고 해서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물고기와 모든 새를 문맥과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같은 뜻으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0자체도 여러 말씀을 함께 제시하면서 그 문맥 안에서 대응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상응은 단어를 암호처럼 치환하는 작업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연결 속에서 살펴야 합니다.
또 하나 처음 읽는 독자가 궁금해할 수 있는 것은 ‘이성적인것’과 ‘지적인것’이 무엇이 다르기에 스베덴보리가 ‘그가운데지적인것들은속사람에속한다’고 따로 말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AC.40은 여기서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 본문만으로 둘을 억지로 명확하게 정의하기보다, 적어도 새가 인간의 단순한 기억 지식보다 높은 이성적·지적 영역을 나타내며 그중 지적인 것이 속 사람에 속한다는 정도를 먼저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문제는 별도로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섯째 날의 첫 장면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앞에서는 사람이 진리와 선을 배우고 행하면서도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겼다면, 이제 사랑과 신앙으로 살아나면서 겉 사람의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도 살아 있는 영적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창조 이야기에서는 물속에 생물들이 번성하고 하늘에는 새들이 날기 시작합니다.
AC.40의 핵심은 지식을 버리고 이성을 억누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인간에게 있는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능력들이 어떤 영적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 줍니다. 물고기는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새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다섯째 날에 생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제 이러한 것들도 앞의 AC.39에서 말한 ‘살아나는’ 상태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