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0 심화

1.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면 이성적인 것은 겉 사람에 속할까?

 

AC.40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걸리는 문장이 있습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이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영문은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입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면, 앞의 이성적인 것들은 겉 사람에 속한다는 뜻인가?’

 

먼저 문장 자체가 무엇을 분명하게 말하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라는 두 가지를 말한 뒤 ‘the latter’, 곧 ‘후자’가 속 사람에 속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후자’는 ‘intellectual things’, 곧 ‘지적인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AC.40이 직접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반대편 명제까지 만들어 ‘그러므로 이성적인 것들은 겉 사람에 속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40은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짧은 문장이지만 AC를 읽을 때 상당히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빈자리를 대칭적으로 채워 넣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새들’이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특별히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고 덧붙였을까요?

 

AC.40의 문맥에서 먼저 분명한 것은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과 ‘새들’ 사이의 차이입니다. 물에서 번성하는 것들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뜻합니다. 반면 새들은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물고기와 새의 차이를 통해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과, 그것을 넘어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인간의 더 높은 능력이 구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구절 하나를 외우고 있다는 것과 그 구절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앞의 것은 기억 지식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뒤의 것은 이성적·지적인 활동과 관계됩니다. 물론 이것은 AC.40의 대응을 이해하기 위한 쉬운 예이지, rational과 intellectual을 각각 이렇게 정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는 말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참된 영적 이해는 단순히 외부에서 정보를 많이 축적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필요하지만,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 속 사람의 지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40은 적어도 이 둘의 층위가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rational’과 ‘intellectual’의 차이를 현대 심리학의 두 가지 사고 기능처럼 간단히 정의하려고 하면 오히려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rational은 논리적으로 계산하는 능력이고 intellectual은 마음 깊이 진리를 직관하는 능력이다’라고 고정하면 이해하기는 쉬워 보이지만, AC.40은 그런 정의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rational은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의 중간 영역이다’라고 이번 한 문장만으로 확정하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여러 글에서 인간의 rational과 intellectual,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훨씬 더 세밀하게 다룹니다. 그 전체 설명을 따라가야 두 용어의 관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40에서는 먼저 본문이 말하는 만큼을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고기는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나타냅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새’가 왜 물고기와 함께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지도 조금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 안에는 단순히 기억에 저장된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더 높은 차원의 활동도 있습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인간의 여러 능력도 살아 있는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 문장은 앞으로 AC를 계속 읽게 만드는 작은 예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성적인 것은 정확히 어디에 속하는가?’, ‘이성적인 것과 지적인 것은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에 AC.40 한 문장으로 성급하게 답을 만들어 넣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인간의 내적 구조를 더 펼쳐 보일 때까지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간단합니다.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고 했으므로 이성적인 것들은 곧 겉 사람에 속한다는 뜻인가?’

 

AC.40만 놓고 보면 ‘그렇게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명시적으로 말하는 것은 후자, 곧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성적인 것의 정확한 위치와 역할은 더 넓은 AC의 설명 속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본문이 말하는 것과 우리가 거기서 추론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AC를 오래 읽어 가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때로는 조금 덜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말한 것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이 됩니다.

 

 

 

AC.40, 창1:20, ‘지식과 지성이 살아나는 순간 : 물고기와 새로 나타나는 거듭난 생명’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창1:29)

 

AC.56

천적 인간은 오직 천적인 것들로 기뻐하는데, 이것들은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천적 음식’(celestial food)이라 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이것들 역시 그의 삶과 일치하므로 이르기를 ‘영적 음식’(spiritual food)이라 합니다. 자연적 인간도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는데, 이것들은 그의 삶에 속하므로 이르기를 ‘음식’(food), 곧 ‘먹을거리’라 하며,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는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적 음식을 표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와 ‘열매 맺는 나무’(tree in which is fruit)로 묘사되며,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씨 가진 나무’(tree yielding seed)라 합니다. 그의 자연적 음식은 다음 절에서 설명됩니다. The celestial man is delighted with celestial things alone, which being in agreement with his life are called celestial food. The spiritual man is delighted with spiritual things, and as these are in agreement with his life they are called spiritual food. The natural man in like manner is delighted with natural things, which, being of his life, are called food, and consist chiefly of memory-knowledges. As the spiritual man is here treated of, his spiritual food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as by the “herb bearing seed,” and by the “tree in which is fruit,” which are called, in general, the “tree yielding seed.” His natural food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

 

해설

AC.56은 창1:29의 ‘먹을거리’를 설명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천적 음식이 있고, 영적 인간에게는 영적 음식이 있으며,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연적 음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식은 육체가 먹는 자연적인 음식이 아니라 각각의 인간이 무엇으로 기뻐하며, 무엇이 그의 삶과 일치하는가를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의 음식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은 천적 인간입니다. 천적 인간은 ‘오직 천적인 것들로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천적인 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천적 음식’이라고 부릅니다. 이어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영적 음식’이라고 합니다. 자연적 인간 역시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고, 그것들이 그의 삶에 속하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하며, 그것은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의할 것은 천적·영적·자연적 인간을 단순히 ‘높음 → 중간 → 낮음’이라는 세 칸짜리 단계표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AC.56의 직접적인 관심은 세 부류의 서열을 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각각의 삶에는 그 삶과 일치하여 기쁨을 주는 것이 있고, 그래서 그것을 ‘음식’이라고 부른다는 점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뻐하는 것’을 음식이라고 부를까요? AC.56은 음식의 상응에 대한 전체 교리를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문장 자체에서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천적인 것들은 천적 인간의 ‘삶과 일치’하고, 영적인 것들은 영적 인간의 ‘삶과 일치’하며, 자연적인 것들은 자연적 인간의 ‘삶에 속하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여기서 음식은 단순히 머리로 알고 있는 정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에 맞으며 그가 기쁨을 얻는 것과 관계됩니다.

 

이것은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느냐만 보면 그 사람의 영적 수준을 정확히 판정할 수 있다’는 간단한 진단법을 주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동시에 여러 종류의 기쁨이 있고, 자연적인 기쁨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닙니다. AC.56의 요점은 훨씬 제한적입니다. 천적·영적·자연적 인간에게 각각 그 삶과 일치하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이 그들에게 음식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이 ‘천적인 것들로 기뻐한다’고 할 때에도 이를 곧바로 ‘사랑 자체만으로 기뻐하며 더 이상 진리의 매개가 필요 없다’고 풀 필요는 없습니다. 앞의 AC.51-53에서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설명을 보았지만, AC.56은 여기서 천적 음식의 세부 성질을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저 천적 인간은 자기 삶과 일치하는 천적인 것들로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영적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한다고 해서 ‘아직 사랑에 도달하지 못하고 진리만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48에서 영적 인간은 이미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의 ‘영적 음식’을 사랑과 분리된 진리나 교리 지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음식’과 단순한 ‘정보’를 구별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영적인 사실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의 영적 음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AC.56은 음식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그것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지식의 보유량보다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삶 안에 있으며 무엇으로 기뻐하는지가 이번 표현의 중심에 더 가깝습니다.

 

자연적 인간의 경우에는 스베덴보리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의 음식은 자연적인 것들이며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은 앞의 AC.40에서도 만났습니다. 외부에서 배우고 기억에 저장하는 지식들입니다. 이런 지식 자체를 낮거나 악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적 인간의 삶에 속하는 중요한 재료이며, 이후 영적인 것들이 받아들여지는 데에도 쓰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적 음식 = 세상적 성공과 쾌락’이라고 단순화하는 것은 AC.56보다 좁습니다. 본문이 직접 예로 드는 것은 오히려 기억 지식입니다. 자연적 인간은 자연적 차원에 속하는 것들로 기뻐하며, 그 음식은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선하게 사용되는지 악하게 사용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며, AC.56은 여기서 그것을 논하지 않습니다.

 

이번 글에서 특히 중요한 문장은 ‘여기서는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입니다. 창1의 현재 문맥이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으므로, 창1:29에 나오는 음식도 영적 인간의 음식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그 음식이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라는 표상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서둘러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의 세부 속뜻을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AC.56은 아직 그것들을 각각 무엇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영적 인간의 음식이 이 두 가지 표상으로 묘사된다고만 합니다. 바로 다음 AC.5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두 표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므로 그 해석은 다음 글의 몫으로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풀은 생명이 있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는 상태’, ‘나무는 더 안정되었지만 아직 천적 사랑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 ‘씨는 앞으로 더 높은 생명으로 발전할 잠재력’이라고 이번 글에서 미리 정리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런 설명은 AC.56의 직접 내용이 아니며, 다음 AC.57이 실제로 말하는 해석과도 어긋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일반적으로 ‘씨 가진 나무’라고 부른다고 덧붙입니다. 이 표현 역시 이번 글에서 별도의 성장 단계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들이 영적 인간에게 주어진 영적 음식을 표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창1:29의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는 말은 단순히 최초 인간에게 채식을 명령하는 구절을 넘어, 속뜻에서는 영적 인간에게 주어지는 음식에 관한 말씀으로 읽힙니다. 다만 AC.56은 이 한 문장에서 음식의 모든 상응을 완성하지 않습니다. 천적·영적·자연적 음식의 차이를 간단히 제시하고, 현재 문맥에서 영적 인간의 음식이 무엇으로 표상되는지를 밝히는 데 그칩니다.

 

여기서 ‘주신다’는 표현도 눈여겨볼 수 있지만, 이번 AC가 그 단어의 속뜻을 따로 해설하지 않으므로 지나치게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앞의 AC.39 이후의 큰 흐름을 기억하면,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원리는 그대로 유지됩니다. 영적 음식 역시 인간이 자기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6에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가장 흥미로운 표현은 아마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일 것입니다. ‘내 삶과 일치하는 것이 음식이고, 그래서 그것으로 기뻐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이번 문장의 표현을 넘어 사람의 기쁨과 삶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질문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다만 여기서부터 곧바로 ‘내가 무엇에서 기뻐하는지만 보면 내가 자연적 인간인지 영적 인간인지 천적 인간인지 알 수 있다’고 자기 진단을 시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순간적인 즐거움 하나와 한 사람의 삶 전체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AC.56이 말하는 것은 각각의 인간에게 그의 ‘삶과 일치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기쁨은 한순간의 감정이라기보다 삶의 성질과 관계하여 읽는 편이 안전합니다.

 

또 자연적인 것에서 기뻐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로 자연적 인간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영적 인간도 자연계에서 살며 음식, 휴식, 학문, 가족, 일과 같은 자연적인 선을 기쁘게 누릴 수 있습니다. AC.56의 구별을 ‘무엇을 조금이라도 즐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삶에 속하고 그 삶과 일치하는가의 문제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AC.56의 핵심을 ‘천적 인간은 사랑을 먹고, 영적 인간은 진리를 먹고, 자연적 인간은 지식을 먹는다’는 세 문장으로만 압축하면 너무 단순해집니다. 어느 정도 기억을 돕는 표현은 될 수 있지만, 본문이 강조하는 ‘삶과 일치함’이라는 중요한 조건이 빠지기 때문입니다.

 

또 ‘거듭남이란 먹는 음식이 자연적 음식에서 영적 음식으로, 다시 천적 음식으로 바뀌는 과정’이라고 정리하는 것도 AC.56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갑니다. 특히 앞에서 보았듯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관계를 모든 사람이 차례로 통과하는 하나의 직선 단계표로만 보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56은 훨씬 단순하면서도 깊은 사실을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그의 삶과 일치하여 그가 기뻐하는 것들이 있고, 말씀은 그것을 ‘음식’이라는 언어로 표현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천적 음식이, 영적 인간에게는 영적 음식이,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연적 음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창1에서 다루는 것은 영적 인간이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그의 영적 음식으로 제시됩니다.

 

그 두 음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바로 다음 AC.57에서 밝혀집니다. 따라서 AC.56은 그 해석을 미리 완성하기보다 ‘사람에게도 영적인 음식이 있으며, 그 음식은 그의 삶과 일치하여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기본 원리를 붙들고 다음 글로 넘어가게 하는 짧은 연결 글로 읽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심화

1.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56 심화 1,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56.심화1.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56에는 비슷한 문장이 세 번 반복됩니다. 천적 인간은 천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bygrace.kr

 

 

 

AC.57, 창1:29,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1:29) AC.57 ‘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는 쓰임을 지향

bygrace.kr

 

AC.55, 창1:28, ‘생육, 번성', '결혼한 땅’, '땅에 충만', '풀, 나무, 공중의 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21)

 

AC.42

앞서 말했듯이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Fishes)은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이제 생명을 얻은 기억 지식을 뜻합니다. 그리고 ‘큰 바다짐승들’(great whales, Whales)은 그러한 지식들의 일반 원리를 뜻하는데, 개별적인 것들은 이 일반 원리 아래에 있으며, 또 거기에서 나옵니다. 우주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어떤 일반 원리 아래 있지 않은 것은 없는데, 그래야 그것이 존재하고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래’(Whales)나 ‘큰 물고기’(great fishes)는 선지자들에 의해 종종 언급되며, 그때마다 기억 지식의 일반 원리를 뜻합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인간의 지혜 또는 지성, 곧 일반적으로 말해 지식(scientia)을 표상하는데, 그래서 ‘큰 악어’(great whale)라고 합니다. 에스겔을 보면, “Fishes,” as before said, signify memory-knowledges, now animated by faith from the Lord, and thus alive. “Whales” signify their general principles, in subordination to which, and from which, are the particulars; for there is nothing in the universe that is not under some general principle, as a means that it may exist and subsist. “Whales,” or “great fishes,” are sometimes mentioned by the prophets, and they there signify the generals of memory-knowledges. Pharaoh the king of Egypt (by whom is represented human wisdom or intelligence, that is, knowledge [scientia] in general), is called a “great whale.” As in Ezekiel: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겔29:3)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that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myself (Ezek. 29:3).

 

[2] 또 다른 곳에서는 And in another place: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겔32:2) Take up a lamentation for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unto him, thou art as a whale in the seas, and hast gone forth in thy rivers, and hast troubled the waters with thy feet (Ezek. 32:2),

 

이 말씀은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그러니까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사야에서는 by which words are signified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and thus from themselves. In Isaiah: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rd and great and strong sword, shall visit upon leviathan the longish [oblongum] serpent, even leviathan the crooked serpent, and he shall slay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a. 27:1).

 

여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는 그런 사람들이 진리의 일반 원리조차 알지 못하게 된 상태를 뜻합니다. 예레미야에서도 By “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 signified that such persons are ignorant of even the general principles of truth. So in Jeremiah: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렘51:34) Nebuchadnezzar the king of Babylon hath devoured me, he hath troubled me, he hath made me an empty vessel, he hath swallowed me as a whale, he hath filled his belly with my delicacies, he hath cast me out (Jer. 51:34),

 

여기 ‘좋은 음식’(delicacies)이라 한 것은 신앙의 지식(knowledges)을 뜻하며, 요나를 삼킨 고래처럼 그것들을 삼켰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큰 뱀’(whale)은 신앙의 지식에 관한 일반 원리를 단지 기억 지식으로만 지니고, 그런 방식으로 행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denoting that he had swallowed the knowledges of faith, here called “delicacies,” as the whale did Jonah; a “whale” denoting those who possess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knowledges of faith as mere memory-knowledges, and act in this manner.

 

해설

AC.42는 창1:21의 ‘큰 바다짐승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0에서 물고기는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물고기 하나하나보다 더 큰 것이 등장합니다. 바로 ‘큰 바다짐승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이 개별적인 기억 지식들을 포괄하는 ‘일반 원리들’(general principles)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이 ‘일반 원리’라는 말부터 조금 어렵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여러 개별 지식을 한데 묶어 이해하게 해 주는 보다 포괄적인 지식이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실을 각각 따로 가지고만 있지 않습니다. 비슷한 것들을 묶고, 그 관계를 파악하고, 보다 큰 개념 아래에서 이해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우주 안에는 어떤 일반 원리 아래 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서, 개별적인 것들이 존재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창1:21의 거대한 물고기 또는 큰 바다짐승은 바로 이러한 ‘기억 지식의 일반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AC.42는 ‘큰 바다짐승’이라는 상징 자체를 처음부터 악한 것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창1:21에서는 하나님께서 큰 바다짐승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큰 바다짐승=악한 지식’이라는 고정된 상응표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의 첫 설명에서 큰 바다짐승은 우선 기억 지식의 일반 원리를 뜻합니다. 이후 선지서에서 인용되는 부정적인 사례들은 그러한 지식과 일반 원리가 인간 자신의 지혜와 결합하여 잘못 사용될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애굽 왕 바로를 예로 듭니다. 겔29:3에서 바로는 자기 강들 가운데 누운 ‘큰 악어’로 묘사되며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AC.42는 바로가 ‘인간의 지혜 또는 지성, 곧 일반적으로 말해 지식’을 표상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의 초점은 단순히 ‘애굽이나 악어가 나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기억 지식과 인간의 지성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특히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는 말은 바로 앞의 AC.39-41에서 계속 강조했던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주제와도 자연스럽게 대비됩니다.

 

겔32:2는 처음 읽으면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바로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이며, 강에서 움직이면서 발로 물을 휘저어 더럽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곧바로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그러므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풀이합니다. 독자는 당연히 ‘어떻게 저 구절에서 이런 뜻이 나오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AC.42 안에서 확실하게 붙들 수 있는 연결고리는 이렇습니다. 물고기는 기억 지식을 뜻하고, 큰 물고기 또는 고래는 그 기억 지식의 일반적인 것들을 뜻하며, 바로는 인간의 지혜 또는 지성, 곧 지식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면서 그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붙인 ‘and thus from themselves’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많이 알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지식과 지성을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근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앞의 AC.39-41과 함께 읽으면 더 분명해집니다. 거기서도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AC.42에서도 기억 지식과 지성 자체를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1:21의 물고기와 큰 바다짐승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좋다’고 하신 것들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생겨난 지혜처럼 붙들고, 그 힘으로 신앙의 신비를 지배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사27:1의 인용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는 것’이 그러한 사람들이 ‘진리의 일반 원리조차 알지 못하게 된 상태’를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우리가 이 한 절의 모든 상징을 여기서 따로 해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2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큰 바다짐승이 ‘일반적인 것들’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것이 상실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모습은 진리의 일반적인 것들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렘51:34에서는 느부갓네살이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좋은 음식’이 신앙의 지식을 뜻하며, 그것을 고래가 요나를 삼킨 것처럼 삼켰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경우의 ‘고래’는 ‘신앙의 지식에 관한 일반 원리를 단지 기억 지식으로만 지니고, 그런 방식으로 행하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핵심은 지식을 많이 소유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살아 있는 신앙의 것이 되지 못하고 단지 기억 속의 지식으로만 머무르는 상태입니다.

 

이 대목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매우 중요한 구별을 줍니다. AC.40에서 기억 지식은 결코 악한 것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생명을 얻은 기억 지식은 창조의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 살아 있는 물고기로 표현됩니다. AC.42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억 지식에는 개별적인 것들이 있고 그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들이 있으며, 이 질서 자체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지식을 단지 기억 속에 쌓아 두거나, 자기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장악하려 하면 같은 상징이 부정적인 문맥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42를 ‘지식은 위험하다’는 경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방대한 학문과 지식을 사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글이 묻는 것은 지식의 양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어떤 질서 안에 있으며, 그것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에 접근할 때 그 출발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기억 지식이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살아날 때 그것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자기 지혜의 소유물로 붙들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 하면, 같은 지식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C.42의 여러 선지서 인용을 읽으면서 ‘스베덴보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구절에서 이런 속뜻을 알아내는가?’라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이것은 겔32:2 한 절만 더 자세히 풀이한다고 해결되는 질문이 아닙니다.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을 때 반복해서 만나게 될 중요한 문제이므로, 이 질문은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심화

1.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가?

 

AC.42, 심화 1,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가?

AC.42.심화1.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가? AC.42를 처음 읽으면 놀라운 장면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겔29:3의 바로와 큰 악어, 겔32:2의 바다와 강을 휘젓는

bygrace.kr

 

 

 

AC.43, 창1:22-23,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ygrace.kr

 

AC.41, 창1:20, ‘생물'(living soul, thing moving itself)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뜻하고, ‘새들’(birds)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이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물속에서 돌아다니는 것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곧 ‘물고기들’(fishes)이 기억 지식을 뜻한다는 사실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re signified the memory-knowledge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 That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or “fishes,” signify memory-knowledges is plain from Isaiah: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사50:2, 3) I came and there was no man; at my rebuke I dry up the sea, I make the rivers a wilderness; their fish shall stink because there is no water and shall die for thirst; I clothe the heavens with blackness (Isa. 50:2–3).

 

[2] 그러나 이 의미는 에스겔을 보면 더 분명한데, 거기서 주님은 새 성전, 곧 일반적으로는 새 교회를, 그리고 교회에 속한 사람인 거듭난 사람을 묘사하십니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plainer from Ezekiel, where the Lord describes the new temple, or a new church in general, and the man of the church, or a regenerate person; for everyone who is regenerate is a temple of the Lord: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겔47:8-10) The Lord Jehovih said unto me, These waters that shall issue to the boundary toward the east, and shall come toward the sea, being led into the sea, and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that shall creep for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there shall be exceeding much fish, because those waters shall come thither, and they shall heal, and everything shall live whither the river come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fishers shall stand upon it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hall they be; their fish shall be according to its kind, as the fish of the great sea, exceeding many (Ezek. 47:8–10).

 

여기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의 어부들’(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과 ‘그물 치는 것’(spreading of nets)은 자연적인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을 뜻합니다. “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ignify those who shall instruct the natural man in the truths of faith.

 

[3] ‘새들’(birds)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점도 선지자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이사야에 보면, That “birds” signify things rational and intellectual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Isaiah: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사46:11) Calling a bird from the east, the man of my counsel from a distant land (Isa. 46:11).

 

예레미야에서도 And in Jeremiah: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5)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5).

 

에스겔서에서는 In Ezekiel: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겔17:22, 23) I will plant a shoot of a lofty cedar, and it shall lift up a branch, and shall bear fruit, and be a magnificent cedar; and under it shall dwell every fowl of every wing, in the shadow of the branches thereof shall they dwell (Ezek. 17:22–23).

 

그리고 호세아에서는 새 교회, 곧 거듭난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And in Hosea, speaking of a new church, or of a regenerate man: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And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beast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s of heaven, and with the moving thing of the ground (Hos. 2:18).

 

여기서 ‘들짐승’(wild beast)이 실제 짐승을 뜻하지 않고, ‘새’(bird)도 실제 새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은, 주님께서 그것들과 ‘새 언약을 맺는다’(make a new covenant)고 하는 것만 봐도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wild beast” does not signify wild beast, nor “bird” bird, must be evident to everyone, for the Lord is said to “make a new covenant” with them.

 

해설

AC.40은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생물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곧 물속에서 돌아다니는 것들과 물고기들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뜻하고,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먼저 ‘기억 지식’이라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외부로부터 배우고 기억 속에 받아들이는 지식들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읽어 알게 된 내용, 교리를 배우면서 얻은 지식, 자연계와 삶을 통해 습득한 여러 사실 등이 모두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옵니다. AC.40은 이러한 기억 지식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섯째 날에는 그것들이 ‘생물’로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바로 앞의 AC.39와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아직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할 때 그에게 있는 것들이 식물처럼 ‘생명이 없는 것들’에 비유되지만, 사랑과 신앙으로 살아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기 시작하면 ‘생물’에 비유된다고 했습니다. AC.40은 이제 그 생물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물고기는 기억 지식에, 새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에 대응합니다.

 

그런데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당연히 ‘왜 물고기가 기억 지식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AC.40은 그 이유를 추상적인 설명으로 풀기보다 말씀의 여러 구절을 제시하여 그 대응을 보여 줍니다. 먼저 사50:2-3에서 바다와 강의 물이 없어지자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목말라 죽는 장면을 인용합니다. 이 구절은 물고기가 단순히 자연계의 물고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인간의 내적·영적 상태와 관계된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에스겔의 새 성전 환상이 이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준다고 합니다. 겔47:8-10에서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바다에 이르자 물이 되살아나고 고기가 심히 많아집니다. 그리고 어부들이 서서 그물을 칩니다. AC.40은 여기서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의 어부들’과 ‘그물 치는 것’이 ‘자연적인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을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이것이 왜 물고기와 기억 지식의 관계를 보여 주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치려면 그 진리들이 자연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AC.40은 바로 이러한 겉 사람의 기억 지식들을 물고기로 나타냅니다. 따라서 겔47장의 풍성한 물고기와 어부들은 단순한 어업의 번성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 교회와 거듭난 사람 안에서 자연적인 사람이 신앙의 진리로 가르침받는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인용됩니다.

 

여기서 ‘새 성전’과 ‘새 교회’와 ‘거듭난 사람’이 함께 언급되는 것도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단지 외적인 종교 조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가 한 사람 안에 받아들여질 때 그 사람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교회의 모습을 갖습니다. 그래서 AC.40은 새 성전을 ‘일반적으로는 새 교회’, 그리고 ‘교회에 속한 사람, 곧 거듭난 사람’과 연결합니다. 이어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성전’이라고 그 이유까지 직접 밝힙니다.

 

AC.40의 두 번째 중심은 ‘새들’입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 역시 자신의 생각만으로 제시하지 않고 선지서의 여러 구절을 인용합니다.

 

사46:11의 ‘동쪽에서 부르는 날짐승’, 렘4:25의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겔17:22-23의 백향목 아래 깃드는 ‘각종 새’가 그 예입니다. AC.40이 이 구절들을 연이어 제시하는 목적은 각 구절의 모든 세부 속뜻을 여기서 설명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번 글의 초점은 ‘새’가 말씀에서 단순히 자연계의 새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렘4:25의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는 표현은 이런 독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사람이 없어지자 새들까지 날아간 광경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선지서의 표현 안에 인간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AC.40에서는 그 가운데 ‘새들’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마지막으로 호2:18을 인용하는 이유도 중요합니다. 거기서는 주님께서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표현을 근거로 ‘들짐승’이 단순히 들짐승을, ‘새’가 단순히 새를 뜻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동물들과 영적인 의미의 언약을 맺으신다는 것이 본문의 궁극적인 뜻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읽는 방법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도 중요합니다. 그는 문자적 의미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에 관한 더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여러 선지서에서 물고기와 새가 어떤 문맥에 놓이는지를 비교하면서 그 영적 의미를 밝혀 갑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도 있습니다. ‘물고기 = 기억 지식’, ‘새 = 이성적·지적인 것들’이라는 대응을 알았다고 해서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물고기와 모든 새를 문맥과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같은 뜻으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0 자체도 여러 말씀을 함께 제시하면서 그 문맥 안에서 대응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상응은 단어를 암호처럼 치환하는 작업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연결 속에서 살펴야 합니다.

 

또 하나 처음 읽는 독자가 궁금해할 수 있는 것은 ‘이성적인 것’과 ‘지적인 것’이 무엇이 다르기에 스베덴보리가 ‘그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고 따로 말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AC.40은 여기서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 본문만으로 둘을 억지로 명확하게 정의하기보다, 적어도 새가 인간의 단순한 기억 지식보다 높은 이성적·지적 영역을 나타내며 그중 지적인 것이 속 사람에 속한다는 정도를 먼저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문제는 별도로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섯째 날의 첫 장면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앞에서는 사람이 진리와 선을 배우고 행하면서도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겼다면, 이제 사랑과 신앙으로 살아나면서 겉 사람의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도 살아 있는 영적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창조 이야기에서는 물속에 생물들이 번성하고 하늘에는 새들이 날기 시작합니다.

 

AC.40의 핵심은 지식을 버리고 이성을 억누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인간에게 있는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능력들이 어떤 영적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 줍니다. 물고기는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새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다섯째 날에 생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제 이러한 것들도 앞의 AC.39에서 말한 ‘살아나는’ 상태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심화

1.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면 이성적인 것은 겉 사람에 속할까?

 

AC.40, 심화 1,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면 이성적인 것은 겉 사람에 속할까?

AC.40.심화1.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면 이성적인 것은 겉 사람에 속할까? AC.40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걸리는 문장이 있습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bygrace.kr

 

 

 

AC.41, 창1:20, ‘참된 생명의 근원 : 주님에게서 오는 것만이 살아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bygrace.kr

 

AC.39, 창1:20,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