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0

‘애굽’(Egypt)과 마찬가지로 ‘유브라데’(Euphrates)도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또한 이러한 기억지식이 나오는 감각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선지서의 말씀에서 분명합니다. 미가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As by “Egypt,” so also by “Euphrates,” are signified memory-knowledges, and also the sensuous things from which these knowledges come. This is evident from the Word in the prophets, as in Micah:

 

10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 11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12그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강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미7:10-12) My she-enemy hath said, Where is Jehovah thy God? The day in which he shall build thy walls [macerias], that day shall the decree be far removed; that day also he shall come even to thee from Asshur, and to the cities of Egypt, and to the river [Euphrates] (Micah 7:10–12).

 

선지자들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천적 인간과 같이 되게 하실 주님의 오심에 관하여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So did the prophets speak concerning the coming of the Lord who should regenerate man so that he might become like the celestial man. In Jeremiah: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렘2:18) 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Egypt, to drink the waters of Sihor? Or 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Asshur, to drink the waters of the river [Euphrates] (Jer. 2:18)?

 

여기서 ‘애굽’(Egypt)과 ‘유브라데’(Euphrates)는 마찬가지로 기억지식을 의미하고, ‘앗수르’(Asshur)는 거기서 나오는 추론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where “Egypt” and “Euphrates” likewise signify memory-knowledges, and “Asshur” reasonings thence derived. In David: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11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시80:8, 11) Thou hast made a vine to go forth out of Egypt; Thou hast cast out the nations; Thou hast planted her; Thou hast sent out her shoots even to the sea, and her twigs to the river (Euphrates) (Ps. 80:8, 11),

 

여기서도 ‘유브라데강’(river Euphrates)은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유브라데가 앗수르 쪽을 향한 이스라엘 영토의 경계였던 것처럼, 기억지식은 영적이고 천적인 인간의 지성과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다음 말씀도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lso the “river Euphrates” 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of the memory [sensuali et scientifico]. For the Euphrates was the boundary of the dominions of Israel toward Assyria, as the knowledge of the memory is the boundary of the intelligence and wisdom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man. The same is signified by what was said to Abraham: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15:18) Unto thy seed will I give this land, from the river of Egypt unto the great river, the river Euphrates (Gen. 15:18).

 

이 두 경계는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These two boundaries have a like signification.

 

해설

AC.120은 앞의 AC.118에서 ‘브랏’, 곧 유브라데가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한 설명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미가 조금 더 구체화됩니다. ‘애굽’과 마찬가지로 ‘유브라데’도 기억지식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러한 기억지식이 나오는 감각적인 것들까지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기억지식이 왜 천적 인간의 질서에서 가장 바깥쪽에 놓이는지도 점차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연계에서 감각을 통하여 받아들이고 기억에 저장하는 것들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미7:10-12를 인용한 이유는 이 구절에 앗수르와 애굽과 강, 곧 유브라데가 함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천적 인간과 같이 되게 하실 주님의 오심에 관한 예언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여러 나라와 지역과 경계에 관한 표현도 단순한 지리적 이동에 머무르지 않고,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적인 질서와 관계됩니다. 앞에서 에덴의 네 강을 천적 인간의 내적인 것들에 관한 묘사로 읽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렘2:18에서는 애굽의 시홀 물을 마시는 것과 앗수르로 가서 유브라데 물을 마시는 것이 함께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애굽’과 ‘유브라데’가 기억지식을 의미하고, ‘앗수르’는 거기서 나오는 추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인용은 특히 중요합니다. 앞의 AC.119에서는 앗수르가 이성을 의미한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추론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성적 능력이 있다는 것과 그 이성이 무엇을 출발점으로 삼아 추론하는가는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기억지식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근거로 위의 것들을 판단하려는 질서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이성의 명철함을 받는 질서는 같지 않습니다.

 

시80:8, 11의 포도나무는 애굽에서 나와 심어지고 그 가지가 바다까지, 넝쿨이 유브라데까지 뻗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유브라데강’이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자연적인 경계와 영적인 경계의 관계를 통하여 직접 설명합니다. 유브라데가 앗수르 쪽을 향한 이스라엘 영토의 경계였던 것처럼, 기억지식은 영적이고 천적인 인간에게 있는 지성과 지혜의 경계입니다. 따라서 ‘경계’라는 말은 기억지식을 무가치한 것으로 낮추는 표현이 아니라, 그것이 내적인 생명이 자연적인 차원에 이르는 가장 바깥쪽에 놓여 있음을 나타냅니다.

 

창15:18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신 땅이 애굽 강에서 큰 강 유브라데까지라고 한 것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경계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을 둘러싼 자연적인 경계 역시 속뜻에서는 인간의 내적인 상태와 관계된 경계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앞의 AC.117에서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 들어 있는 모든 것도 아르카나를 의미하고 표상하며 그 안에 담고 있다고 한 원리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입니다.

 

AC.120은 또한 AC.80 이후 계속 남아 있던 감각과 기억지식의 문제를 상당히 선명하게 해 줍니다.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은 인간에게 없어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적 인간에게도 그것들은 존재하며 전체 질서의 경계를 이룹니다. 문제는 가장 바깥의 경계에 있는 감각과 기억지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과 신앙의 내적인 것들을 판단하려는 데 있습니다. AC.118에서 참된 이성의 명철함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의 이성적 마음 안으로 들어온다고 했으므로, 거듭난 질서에서는 생명의 흐름이 가장 바깥에서 안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안을 거쳐 밖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AC.120의 여러 인용 구절은 모두 유브라데가 왜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을 의미하며, 왜 그것이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불리는지를 밝히는 데 기여합니다. 미가는 이 의미를 주님의 오심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큰 문맥에 놓고, 예레미야는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추론의 문제를 보여 주며, 시편과 창세기는 유브라데라는 실제 경계를 통하여 기억지식이 지성과 지혜의 경계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감각과 기억지식은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놓여야 하며, 그 위에 있는 이성과 지성과 지혜 역시 궁극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AC.120)

 

 

 

AC.121, 창2:14, ‘천적 질서 -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지식까지’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1천적 질서의 본질, 곧 생명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 강들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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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9, 창2:14, ‘앗수르는 이성을 의미한다 -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의 구별’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19‘앗수르’(Asshur)가 이성적 마음, 곧 사람의 이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선지서들에서 매우 분명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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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19

‘앗수르’(Asshur)가 이성적 마음, 곧 사람의 이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선지서들에서 매우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That “Asshur” signifies the rational mind, or the rational of man, is very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Ezekiel:

 

3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겔31:3, 4) Behold, Asshur was a cedar in Lebanon, with fair branches and a shady grove, and lofty in height; and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 The waters made her grow, the deep of waters uplifted her, the river ran round about her plant. (Ezek. 31:3–4)

 

이성은 ‘레바논의 백향목’(cedar in Lebanon)이라 하며, ‘굵은 가지들 사이에 있는 가지’(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는 기억에 속한 앎들을 의미하는데, 이것들이 바로 이와 같은 상태에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에서 더욱 분명합니다. The rational is called a “cedar in Lebanon”; the “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 signifies the knowledges of the memory, which are in this very plight. This is still clearer in Isaiah:

 

23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사19:23-25) In that day shall there be a path from Egypt to Asshur, and Asshur shall come into Egypt, and Egypt into Asshur, and the Egyptians shall serve Asshur. In that day shall Israel be the third with Egypt and with Asshur, a blessing in the midst of the land, that Jehovah Zebaoth shall bless, saying, Blessed be Egypt my people, and Asshur the work of my hands, and Israel mine inheritance. (Isa. 19:23–25)

 

이 구절과 그 밖의 여러 구절에서 ‘애굽’(Egypt)은 기억지식을, ‘앗수르’(Asshur)는 이성을, ‘이스라엘’(Israel)은 지성을 의미합니다. By “Egypt” in this and various other passages is signified memory-knowledges, by “Asshur” reason, and by “Israel” intelligence.

 

해설

AC.119는 앞의 AC.118에서 ‘앗수르’가 이성적 마음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에스겔과 이사야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AC.118에서는 힛데겔강이 이성 또는 이성의 명철함을, 앗수르가 이성적 마음을 의미한다고 했으며, 이성의 명철함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 속한 이성적 마음 안으로 들어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의 두 인용은 바로 그 가운데 ‘앗수르가 왜 이성을 의미하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됩니다.

 

먼저 겔31:3-4에서는 앗수르를 크고 아름다운 ‘레바논 백향목’으로 묘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레바논 백향목이 이성을 의미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또한 그 나무의 가지들과 관련된 표현은 기억에 속한 앎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에서 백향목과 그 가지들은 단순한 거대한 나무의 모습이 아니라, 이성과 그것에 속하여 있는 앎들의 관계를 표현합니다. 특히 물과 깊은 물과 강들이 그 나무를 자라게 한다는 묘사는 앞에서 강과 물이 사람에게 지혜와 지성을 주고 자라게 하는 것들을 의미한다고 한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앗수르의 의미는 사19:23-25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말씀에는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함께 등장하며, 서로 왕래하고 함께 여호와를 섬기며 마침내 셋이 함께 복이 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세 이름의 의미를 직접 밝혀 ‘애굽’은 기억지식, ‘앗수르’는 이성, ‘이스라엘’은 지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앗수르 하나의 의미를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이 서로 구별된다는 사실까지 보여 줍니다.

 

이 점은 최근 여러 번호에서 계속 나타난 용어의 구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AC.111에서는 기억지식을 곧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여기는 겉 사람의 상태를 지적했습니다. AC.116에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이 이해에 속한다고 했고, AC.117에서는 애굽이 기억지식을, 구스 사람들이 앎을 의미한다고 구별했습니다. 이제 AC.119에서는 애굽의 기억지식과 앗수르의 이성과 이스라엘의 지성이 다시 구별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기억지식, 앎, 이성, 지성은 서로 바꾸어 써도 되는 비슷한 말들이 아니라 각각의 자리를 가진 개념들임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사19장의 인용 이유는 단순히 ‘앗수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 사이에 길이 열리고 서로 오가며 함께 섬긴다는 전체 장면 속에서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이 서로 관계를 맺는 질서가 표현됩니다. 이성은 기억지식과 단절되어 홀로 작용하는 것도 아니며, 지성 역시 이성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구별되면서도 올바른 질서 안에서는 함께 작용하고, 그 전체가 여호와께 복을 받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AC.118에서 유브라데, 곧 기억지식을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한 설명을 기억지식의 무가치함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다시 확인해 줍니다. 사19장에서 애굽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등장하지 않고 ‘내 백성 애굽’이라고까지 불리며 앗수르와 이스라엘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기억지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이성과 지성과 어떤 질서 안에서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연적인 앎과 이성적 능력이 올바른 질서 안에 있을 때 그것들도 전체적인 영적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119에서 에스겔과 이사야가 인용된 이유는 충분히 분명합니다. 에스겔은 앗수르를 레바논 백향목으로 묘사함으로써 이성과 그에 속한 것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이사야는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을 함께 놓음으로써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의 구별과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118의 ‘앗수르는 이성적 마음’이라는 해석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천적 인간 안에서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제자리를 얻어 질서 있게 관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119)

 

 

 

AC.120, 창2:14, ‘유브라데 -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은 지성과 지혜의 경계다’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0‘애굽’(Egypt)과 마찬가지로 ‘유브라데’(Euphrates)도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또한 이러한 기억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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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8, 창2:14, ‘힛데겔과 유브라데 -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이성과 기억지식으로’ (AC.118-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창2:14) AC.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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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창2:14)

 

AC.118

‘힛데겔강’(river Hiddekel)은 이성, 또는 이성의 명철함을 의미합니다. ‘앗수르’(Asshur)는 이성적 마음을 의미합니다. ‘앗수르 동쪽으로 흐르는 강’(river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hur)은 이성의 명철함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 속한 이성적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브랏’(Phrath), 곧 유브라데는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이것은 최하위 또는 경계입니다. The “river Hiddekel” is reason, or the clearsightedness of reason. “Asshur” is the rational mind; the “river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hur” signifies that the clearsightedness of reason comes from the Lord through the internal man into the rational mind, which is of the external man; “Phrath,” or Euphrates, is memory-knowledge, which is the ultimate or boundary.

 

해설

AC.118은 셋째 강 힛데겔과 넷째 강 유브라데를 설명하면서 에덴에서 나온 네 강의 구조를 거의 완성합니다. 힛데겔은 이성, 또는 이성의 명철함을 의미하고, 앗수르는 이성적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유브라데는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그것은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합니다. 앞의 두 강이 의지와 이해에 관계했다면, 이제 셋째와 넷째 강에서는 이성과 기억지식까지 나타나면서 천적 인간 안에 있는 것들이 더욱 바깥쪽으로 펼쳐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특히 ‘앗수르 동쪽으로 흐르는 강’에 대한 설명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이 이성의 명철함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 속한 이성적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힛데겔은 이성이고 앗수르는 이성적 마음이라는 각각의 의미보다, 그 둘 사이에서 무엇이 어떻게 흘러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이성의 참된 명철함은 겉 사람의 이성적 마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그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것은 AC.115에서 처음 분명하게 등장한 ‘유입’의 설명을 한층 구체화합니다. 거기서는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드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그 유입의 근원과 통로와 도착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성의 명철함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의 이성적 마음 안으로 들어옵니다. 따라서 사람의 이성이 참으로 밝아지는 것은 이성이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을 때가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일 때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99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거기서는 질서가 회복된 사람에게서 주님께서 사랑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 AC.118에서는 그 가운데 특히 이성적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 이성의 명철함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성은 거듭남에서 제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근원에서 생명을 받아야 할 겉 사람의 중요한 능력입니다.

 

마지막으로 ‘브랏’, 곧 유브라데는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합니다. 이것 역시 앞에서 기억지식을 부정적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 이유를 다시 보여 줍니다. 기억지식이 최하위에 있다는 것은 그것이 불필요하거나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여기서 묘사되는 질서 가운데 가장 바깥쪽에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속 사람을 거쳐 이성과 같은 겉 사람의 능력에 이르고, 기억지식은 그 질서의 가장 바깥 경계에 놓입니다. 문제는 기억지식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고, 그 가장 바깥의 것을 근원으로 삼아 위의 질서를 거꾸로 세우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18은 AC.80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에서 출발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성과 기억지식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기억지식은 분명히 전체 질서 안에 자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성적 마음 역시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명철함을 받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이성과 기억지식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질서입니다. 가장 바깥에 있는 것이 스스로 근원이 되려 하는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속 사람을 통하여 받아들이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AC.118은 네 강에 관한 설명 가운데서도 유입의 방향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사람에게 이성적 마음과 기억지식이 실제로 있지만, 참된 명철함의 근원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기억지식은 그 질서의 최하위 또는 경계를 이룹니다. 이렇게 볼 때 에덴의 강들은 천적 인간 안에 있는 여러 능력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질서를 이루며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AC.118)

 

 

 

AC.119, 창2:14, ‘앗수르는 이성을 의미한다 -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의 구별’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19‘앗수르’(Asshur)가 이성적 마음, 곧 사람의 이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선지서들에서 매우 분명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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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7, 창2:13, ‘구스와 스바 - 사랑과 신앙에 관한 앎을 의미하는 말씀의 지명들’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창2:13) AC.117더욱이 ‘구스 땅’(land of Cush), 곧 에티오피아에는 금과 보석과 향품이 풍부했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들은 선과 진리,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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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속뜻에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들은 기억지식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며, 많은 사람은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둘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각각은 서로 구별되며,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천국 전체는 무수히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주님에 의해 가장 뚜렷하게 질서 지어집니다. It is however a very difficult matter to describe these things as they are in the internal sense, for at the present day no one knows what is meant by faith from love, and what by the wisdom and intelligence thence derived. For external men scarcely know of anything but memory-knowledge, which they call intelligence and wisdom, and faith. They do not even know what love is, and many do not know what the will and understanding are, and that they constitute one mind. And yet each of these things is distinct, yea, most distinct, and the universal heaven is ordinated by the Lord in the most distinct manner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love and faith, which are innumerable.

 

해설

AC.111은 앞의 AC.110에서 제시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을 설명하기가 왜 어려운지를 밝힙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이 개념들이 추상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신앙에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인지 자체를 거의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AC.110의 ‘사랑의 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 ‘사랑의 진리’,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라는 구별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그 어려움을 인정하면서 설명을 이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특히 지적하는 것은 ‘겉 사람’이 지성과 지혜를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겉 사람은 기억지식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가 기억지식 자체를 부정한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기억지식은 주님의 유입을 받는 인간의 능력 가운데 하나로 계속 등장했습니다. 문제는 기억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곧 지성이나 지혜라고 여기고, 심지어 신앙까지도 알고 기억하고 있는 내용과 동일시하는 데 있습니다. AC.111은 지식의 양과 참된 지혜의 생명이 같은 것이 아님을 구별합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는 열쇠가 바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지성도 머릿속에 축적된 기억지식에서 독립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지혜와 지성이 나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혜와 지성을 이해하려면 사람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앎과 이해에 어떤 사랑이 생명을 주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AC.110에서 비손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많은 사람이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것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하나를 이룬다’는 것과 ‘구별된다’는 것이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의지와 이해는 하나의 마음을 이루지만 서로 같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사랑과 신앙 역시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생명을 이루지만 그렇다고 둘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AC.110에서 선과 진리,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세밀하게 구별한 것도 이러한 질서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별은 단순한 인간 심리의 분석에 그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전체가 ‘무수히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주님에 의해 가장 뚜렷하게 질서 지어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질서가 획일성을 뜻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하나 됨은 서로 다른 것들의 차이를 없애 모두 똑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차이들을 가장 뚜렷하게 구별하시면서도 그것들을 하나의 천국으로 질서 지으시는 것입니다. 구별과 하나 됨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주님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 안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주님께서는 뒤섞어 차이를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질서 안에 두시면서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생명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AC.111의 마지막 문장은 앞의 세밀한 구별들이 단순한 용어상의 복잡함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처럼 세밀하게 구별하는 까닭은 주님께서 사람과 천국을 실제로 그렇게 질서 지으신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11을 읽으면서 아직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혜와 지성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모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 번호는 왜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는지를 먼저 보여 줍니다. 기억지식을 지혜로 여기고, 알고 있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기 쉬운 우리의 익숙한 틀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제 보여 주려는 것은 지식에서 출발하여 사랑으로 올라가는 질서가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신앙에서 지혜와 지성이 생명을 얻는 질서입니다. AC.111은 바로 그 낯선 질서로 독자를 데려가기 위한 중요한 문턱입니다. (AC.111 해설)  

 

심화

1.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무엇이며, 왜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가?’

 

AC.111 심화 1,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무엇이며, 왜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가?’

AC.111 심화1.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무엇이며, 왜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가?’ AC.111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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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2, 창2:11-12, ‘참된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옴’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2또한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으며,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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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0, 창2:11-12,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하윌라는 마음을 뜻함’ (AC.110-115)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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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

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곧 퍼셉션의 본성이 어떠한지, ‘생명나무’(tree of lives), 곧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의 본성이 어떠한지, 그리고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 곧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본성이 어떠한지는 뒤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But the nature of the “tree of the garden,” or perception; of the “tree of lives,” or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nd of the “tree of knowledge,” or faith originating in what is sensuous and in mere memory-knowledge, will be shown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AC.106은 창2:9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짧게 정리하면서, 이 절에서 등장한 세 가지 중요한 주제가 앞으로 더 자세히 밝혀질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곧 ‘동산의 나무’인 퍼셉션, ‘생명나무’인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지식의 나무’인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입니다. AC.102에서 먼저 제시했던 세 가지 의미를 AC.103-105에서 일부 설명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으로 이 주제들이 모두 설명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금 창2:9을 읽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안내가 됩니다. 특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는 아직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은 그것이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을 뜻한다는 데까지입니다.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지, 사람이 감각과 기억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이후의 타락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앞으로 이어지는 설명을 더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지식의 나무’를 지식이나 이성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아직 하지 않은 말을 앞질러 하는 것이 됩니다.

 

‘생명나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AC.105에서는 그것을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하면서, 마침내 ‘주님의 자비’라고 설명했습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106은 그 생명나무의 ‘본성’ 역시 뒤에서 더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붙들어야 할 중심은 생명나무를 어떤 교리적 정의 하나로 완전히 파악했다는 생각보다,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의 자비에 있다는 지금까지의 질서입니다.

 

퍼셉션 역시 아직 다 밝혀진 것이 아닙니다. AC.104에서 그것은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하여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고 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중요한 설명이지만, AC.106은 그 ‘본성’이 앞으로 더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AC를 읽는 태도에도 도움이 됩니다. 어떤 낯선 개념을 처음 만났을 때 즉시 익숙한 개념으로 바꾸어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그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점차 어떤 내용을 더해 가는지를 따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AC.106은 내용은 짧지만 독자에게 중요한 여백을 남깁니다. 주님의 말씀과 그 속뜻을 이해하는 일은 한 표현의 뜻을 한 번 확인하고 끝내는 일이 아니라, 이어지는 말씀 안에서 그 뜻이 점차 열리고 서로 연결되는 과정을 따라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창세기 첫 부분처럼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하게 읽어 온 말씀을 전혀 다른 깊이에서 다시 접할 때에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자기 이해 안에 넣으려 하기보다 지금 밝혀진 만큼 충실히 받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은 기다리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AC.106에서 우리는 퍼셉션과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에 관한 결론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문턱에 서 있습니다. 지금까지 분명해진 것은 참과 선을 퍼셉션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의 근원도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신앙의 근원을 찾는 문제는 앞으로 더 밝혀질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에게 결론을 서두르게 하지 않고, 이어지는 말씀과 설명을 따라 그 차이를 더 분명히 보도록 이끕니다. (AC.106 해설)

 

 

 

AC.107, 창2:10,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뜻함’ (AC.107-109)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창2:10) AC.107‘에덴에서 흘러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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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5, 창2:9, ‘동산 가운데의 생명나무, 의지의 중심에 있는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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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은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에서 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watered by the mist (verses 5–6).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5, 6절)

 

해설

AC.75는 창2:5-6에 나오는 ‘관목’, ‘초목’, ‘지면’, ‘안개’를 천적 인간의 상태와 관련하여 읽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개요에서 먼저 사람의 ‘기억지식과 이성’이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에서 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여기서 관목과 초목은 단순한 식물에 관한 묘사로만 읽히지 않고, 앞 번호에서 말한 천적 인간에게 있는 기억지식과 이성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제시됩니다.

 

특히 ‘기억지식과 이성’이라는 순서를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되면 기억지식이나 이성이 없어지는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다만 AC.75는 아직 천적 인간에게서 기억지식과 이성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이전 상태와 비교하여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천적 인간은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다’거나 반대로 ‘기억지식과 이성이 천적 인간을 만든다’는 식으로 미리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관목과 초목이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에서 난’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이 개요는 기억지식과 이성만 제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적셔지는 상태까지 함께 언급합니다. 그렇다면 ‘지면’은 무엇이며, ‘안개’는 무엇이고, 왜 비가 아니라 안개로 적셔지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러나 AC.75는 아직 그 각각의 의미와 관계를 풀어 설명하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은 창2:5-6의 여러 표현이 천적 인간의 기억지식과 이성의 상태를 묘사한다는 큰 윤곽을 먼저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75에서는 관목은 무엇, 초목은 무엇, 지면은 무엇, 안개는 무엇이라고 각각 고정된 상응표를 먼저 만드는 것보다 스베덴보리의 설명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한 문장에서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은 천적 인간에게도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창2:5-6의 관목과 초목 및 그것들을 적시는 안개의 모습이 그 상태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각각의 표현이 어떤 관계 속에서 그 상태를 나타내는지는 뒤따르는 상세 해설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AC.75 해설)

 

 

 

AC.76, 창2:1-17 개요, ‘그의 생명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 (7절)

AC.76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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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4,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2-3절)

AC.74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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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 심화

1.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에는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것들은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천적인 것이든 모두 그곳에 ‘기억 지식’(scientifica)으로 머물며,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표현은 짧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배우고 기억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단지 기억 속에 쌓여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거듭남의 과정에서 주님에 의해 사용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거기에서’라는 말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장의 흐름상 ‘거기’는 속 사람 안에 있는 어떤 별도의 영적 저장소가 아니라 바로 앞에서 말한 ‘겉 사람의 기억’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뿐 아니라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라도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가면 그곳에서는 기억 지식으로 머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어린 시절에 들었던 말씀이나 부모와 교사에게 배운 선한 가르침, 훗날 읽고 배운 성경의 진리들이 오랫동안 기억 속에 머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했거나 실제 삶과 연결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훗날 삶의 어떤 상황에서 그 말씀이 다시 떠오르고, 이전에는 단순한 지식이었던 것이 자신의 삶을 비추는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AC.27의 표현을 실제 삶에 적용해 본다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특정한 기억이 떠오르는 모든 현상을 곧바로 ‘주님께서 불러내셨다’고 판정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억 지식’ 자체가 곧 영적 생명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많이 기억하며, 선과 진리에 관한 말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사람이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AC.27은 오히려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조차 겉 사람의 기억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그곳에서 기억 지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기억 속에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와 그것이 실제로 사람의 의지와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가는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억 지식이 하찮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외적으로 배우고 기억해 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이후 거듭남 가운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읽고 배우고 기억하는 일, 선과 진리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들이 기억 속에 들어갈 당시에는 단순한 지식처럼 보일 수 있지만, AC.27은 그것들이 그곳에 머물다가 나중에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기억은 거듭남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 안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은 주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데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이 표현을 리메인스(remains)와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및 그와 관련된 상태들을 가리키며, 인간의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AC.27에서 직접 말하는 것은 ‘속 사람의 리메인스 저장소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의 기억에 저장되어 기억 지식이 된 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는’ 것입니다. 두 주제 사이에 더 넓은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AC.27 한 문장만으로 둘을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이것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불러내시는 것일까요? 천사나 선한 영들을 통해서인지, 퍼셉션이나 양심을 통해서인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인간이 영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천사와 영들의 매개가 있다는 사실, 또한 퍼셉션과 양심의 서로 다른 상태들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러나 AC.27은 여기서 그 작동 방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 문장을 근거로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기억 지식을 꺼내신다’거나 ‘양심을 통하여 리메인스를 활성화하신다’는 식의 일정한 메커니즘을 확정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설명이 됩니다.

 

오히려 AC.27에서 확실하게 붙들어야 할 것은 더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사실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은 그곳에 기억 지식으로 머물며, 그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기억과 생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거듭남의 생명과 질서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과 진리를 배우고 기억하는 일은 그 자체가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일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받아들여 기억 속에 간직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라는 표현의 중심은 기억의 세부적인 작동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27의 중심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기억 지식으로 모여 ‘바다’를 이루고, 그곳에 머물러 있던 것들이 이후 주님에 의해 사용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사람이 배운 지식 자체를 영적 생명으로 착각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주님께서 그 지식들을 거듭남 가운데 쓰실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기억 지식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며,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AC.27 심화 1)

 

 

 

AC.27, 창1:9, ‘물이 모이고 땅이 드러남 : 기억 속에 모인 진리와 겉 사람의 준비’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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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 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이라는 표현은 처음 접하면 조금 낯설지만, AC를 읽으면서 자주 만나게 되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AC.24의 영어 번역에서 Potts는 라틴어 scientifica를 ‘memory-knowledges’라고 옮깁니다. 여기 붙은 개정자의 주(Reviser)는 이것을 ‘외적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들로, 신학적인 것이든 그 밖의 것이든 온갖 종류가 대량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기억 지식’은 특별히 신비하거나 영적인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읽어 외적 기억에 축적한 수많은 지식과 정보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역사적 사실이나 지리 정보, 과학 지식, 언어와 직업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성경에 관하여 배운 사실들도 기억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이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도 그 내용이 성경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곧 속 사람의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외적 기억에 저장되어 내가 필요할 때 떠올리고 말할 수 있는 지식으로 있는 한, 그것은 기억 지식의 차원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scientifica의 핵심은 단순히 ‘세속적인 지식’이라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이 사람의 외적 기억에 속해 있다는 데 있습니다.

 

AC.24가 이 용어를 특별히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을 cognitiones라 하고,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scientifica라 합니다. 개정자의 주는 cognitiones를 우리가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것을 안다’고 할 때의 앎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 구별을 ‘scientifica는 죽은 지식이고 cognitiones는 살아 있는 지혜다’라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AC.24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이 둘이 속하는 층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기억 지식 자체가 나쁘거나 거듭남에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사람이 외적 세계에서 습득하고 기억해 둔 수많은 것들을 사용하여 그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AC.24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아직 자신이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여기지만, 주님께서는 그가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것들을 통해서도 그를 선과 진리로 이끄십니다. 따라서 겉 사람과 그 안의 기억 지식은 없애 버려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속 사람과 올바른 질서 안에서 연결되어 주님께 쓰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경 지식도 좋은 예가 됩니다. 사람이 말씀의 내용을 많이 기억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주님께서 사람을 가르치시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전에 외워 두었던 한 구절이 어느 순간 자신의 악을 보게 하거나,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게 하거나,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깨닫게 하는 데 쓰일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기억 지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높은 질서 아래 놓이고 올바른 쓰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 지식’은 쉽게 말하면 ‘외적 기억에 축적되어 있는 지식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것을 단순히 머릿속에 있다는 이유로 경시할 필요도 없고,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곧 영적 지혜라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AC.24가 보여 주는 거듭남의 질서는 이러한 겉 사람의 기억 지식과 속 사람 안의 것들이 처음에는 혼란스럽게 섞여 있다가, 주님께서 그 둘을 구별하시고 각각 제자리에 놓으시는 과정입니다. 바로 그 구별을 나타내는 것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입니다. (AC.24 심화 1)

 

 

 

AC.24, 창1:6-7(AC.24-25), ‘궁창의 구별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때’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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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28

말씀에서 ‘물’(waters)로는 여러 지식(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을, ‘바다’(seas)로는 그 많은 물, 곧 지식의 집합을 의미할 때가 참 많은데요, 이사야에 보면, It is a very common thing in the Word for “waters” to signify 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 and consequently for “seas” to signify a collection of knowledges. As in Isaiah: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9) 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 [scientia] of Jehovah, as the waters cover the sea (Isa. 11:9).

 

이사야 또 다른 데 지식의 결핍이 다루어지는 곳을 보면, And in the same prophet, where a lack of knowledges [cognitionum et scientificorum] is treated of:

 

5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 6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 애굽의 강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 갈대와 부들이 시들겠으며 (사19:5, 6) The waters shall fail from the sea, and the river shall be dried up and become utterly dry, and the streams shall recede (Isa. 19:5–6).

 

학개에서 새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 In Haggai, speaking of a new church:

 

6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2:6, 7)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the sea and the dry [land]; and I will shake all nations; and the desire of all nations sha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Hag. 2:6–7).

 

또 거듭나는 중인 사람에 대해 스가랴서에서는 And concerning man in the process of regeneration, in Zechariah:

 

7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슥14:7, 8) There shall be one day, it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but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and it shall be in that day that living waters shall go out from Jerusalem, part of them toward the eastern sea, and part of them toward the hinder sea (Zech. 14:7–8).

 

시편에도 보면, 황폐해졌다가 거듭나 주님을 경배하게 될 사람을 묘사하면서, David also, describing a vastated man who is to be regenerated and who will worship the Lord:

 

33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34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시69:33, 34) Jehovah despiseth not his prisoners; let the heavens and the earth praise him, the seas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therein (Ps. 69:33–34).

 

‘땅’(earth)이 그릇(recipient)을 의미한다는 것이 스가랴를 보면 분명한데, That the “earth” signifies a recipient, appears from Zechariah: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슥12:1) Jehovah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 of the earth, and formeth the spirit of man in the midst of him (Zech. 12:1).

 

해설

AC.28은 앞의 AC.27에서 시작된 ‘물’, ‘바다’, ‘땅’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다른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AC.27에서는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들어온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가 기억 지식(scientifica)으로 머물며, 이렇게 모인 지식들이 ‘바다’를 이루고, 겉 사람 자체는 ‘마른 땅’으로 표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28에서는 이것이 창1:9-10에만 적용되는 일회적인 풀이가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반복하여 나타나는 의미임을 보여 줍니다. ‘물’은 여러 지식(cognitiones et scientifica)을, ‘바다’는 그 많은 물, 곧 지식의 집합을, ‘땅’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수용체(recipient)를 의미합니다.

 

먼저 사11:9의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는 말씀은 ‘물’과 ‘바다’가 지식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매우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충만함이 바로 ‘물이 바다를 덮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창1:10의 모인 물과 바다를 지식들과 그 집합으로 읽는 것은 창세기의 한 구절에 임의로 붙인 상징 풀이가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확인되는 언어의 연결이라는 것입니다.

 

이어 사19:5-6은 그 반대 상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직접 ‘지식의 결핍이 다루어지는 곳’이라고 소개합니다. ‘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라는 표현은 앞의 사11:9에서 물이 충만한 모습과 대조됩니다. 앞에서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충만함이 물의 충만함으로 표현되었다면, 여기에서는 물이 없어지고 마르는 모습이 지식의 결핍을 나타냅니다. 이 두 구절을 함께 놓으면 AC.28에서 말하는 물과 지식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애굽, 강, 갈대와 부들의 세부 상응까지 모두 풀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AC.28의 직접적인 목적은 물과 바다가 지식 및 그 집합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말씀의 용례로 확증하는 데 있습니다.

 

학2:6-7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새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라고 소개하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AC.28은 여기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 각각의 속뜻을 세밀하게 풀이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새 교회의 형성을 말하는 문맥에서도 창조의 언어인 하늘, 땅, 바다, 육지가 함께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자연적 창조 언어가 말씀의 다른 곳에서는 교회의 영적 상태와 새로워짐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예로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슥14:7-8에 이르면 스베덴보리는 더욱 분명하게 ‘거듭나는 중인 사람에 대하여’라고 말합니다.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라는 말씀에 이어,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물과 바다가 거듭남의 문맥 속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AC.28은 ‘동해’와 ‘서해’, ‘여름’과 ‘겨울’의 세부적인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이상의 상응을 덧붙이기보다, 물과 바다가 단순한 자연물에 그치지 않고 거듭나는 사람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말씀의 언어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머무는 것이 안전합니다.

 

시69:33-34 역시 같은 점을 다른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황폐해졌다가 거듭나 주님을 경배하게 될 사람’을 묘사하는 말씀이라고 직접 소개합니다.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라는 표현에서 하늘과 땅과 바다가 거듭난 사람의 상태를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여기에서도 ‘바다 가운데 움직이는 모든 것’을 별도로 ‘살아 있는 지식’이라고 확정하거나, ‘찬송’을 인간 존재 전체의 특정한 영적 상태로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28에서의 직접적인 역할은 하늘과 땅과 바다라는 표현들이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을 경배하는 상태를 말할 때에도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슥12:1은 앞의 인용들과는 조금 다른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들면서 ‘땅’이 수용체(recipient)를 의미한다는 것이 여기에서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라는 표현에서, AC.28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땅’이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자리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의 AC.27에서 마른 땅, 곧 겉 사람이 드러난다는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사람 안의 심령’을 근거로 거듭남 전체의 세부 구조를 새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28에서 필요한 만큼 말하면, ‘바다’가 지식들의 집합이라면 ‘땅’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수용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하나 있습니다. ‘물’이 지식을 의미한다고 해서 지식 자체가 곧 영적 생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땅’이 수용체라고 해서 땅 자체가 생명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앞의 AC.27에서 보았듯이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천적이든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것들은 그곳에서 기억 지식으로 머물며,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집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기억에 모여 있다는 것과 그 지식이 실제 선한 삶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은 같은 단계가 아닙니다.

 

이 점은 바로 다음 창1:11-12와 AC.29로 이어질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물이 모여 바다가 되고 땅이 드러난 뒤에야 그 땅에서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28은 아직 거듭남의 열매 자체를 설명하는 단계가 아니라, 그 열매가 나타날 수 있는 질서가 준비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사람은 많은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그것을 삶에서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억 속의 지식과 실제 생명의 열매를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28의 핵심은 ‘많이 아는 사람이 곧 영적인 사람이다’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물은 여러 지식이고, 바다는 그 지식들이 모인 집합이며, 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체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아직 다음 단계의 생명을 위한 준비와 질서에 속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상태에서 창1:10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합니다. 지식이 모이고, 바다가 형성되고, 땅이 드러남으로써 이제 다음 단계에서 생명이 싹트고 열매 맺을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AC.28 해설)

 

심화

1. ‘스베덴보리는 AC 초기부터 어떻게 여러 말씀의 속뜻을 알 수 있었을까?’

 

AC.28 심화 1, ‘스베덴보리는 AC 초기부터 어떻게 여러 말씀의 속뜻을 알 수 있었을까?’

AC.28 심화1. ‘스베덴보리는 AC 초기부터 어떻게 여러 말씀의 속뜻을 알 수 있었을까?’ AC.28을 처음 읽으면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이 생깁니다. 이제 겨우 창1을 설명하는 AC.28인데, 스베덴보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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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연한 풀에서 열매 맺는 나무까지 : 회개 안에서 자라나는 거듭남의 셋째 날’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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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 창1:9, ‘물이 모이고 땅이 드러남 : 기억 속에 모인 진리와 겉 사람의 준비’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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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7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둘 다 존재한다는 사실과, 여러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비록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아 보여도, 거듭나는 중인 사람 안에 있는 그러한 여러 진리와 선, 곧 참과 선에 관한 여러 지식은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로 분류됩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스며든 것은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또는 천적인 것이든 모두 그곳에 기억 지식으로 머물며,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식들이 바로 ‘한곳으로 모인 물’(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이며, ‘바다’(seas)라고 합니다. 그러나 겉 사람 자체는 ‘마른 땅’(dry land)이라 하고, 곧이어 ‘땅’(earth)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다음 내용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When it is known that there is both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hat truths and goods flow in from, or through,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from the Lord, although it does not so appear, then those truths and goods, or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 in the regenerating man, are stored up in his memory, and are classed among its knowledges [scientifica]; for whatsoever is insinuated into the memory of the external man, whether it be natural, or spiritual, or celestial, abides there as memory-knowledge, and is brought forth thence by the Lord. These knowledges are the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 and are called “seas,” but the external man himself is called the “dry [land],” and presently “earth,” as in what follows.

 

해설

 

AC.27은 창세기 셋째 날의 첫 장면인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는 말씀을 거듭남의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앞의 AC.24-25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고, 주님께서 사람을 그의 현재 상태에서부터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시는 질서를 살폈다면, 이제 AC.27에서는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들어온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안에서 어떤 상태에 놓이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이 번호는 앞의 ‘궁창’과 뒤의 ‘바다와 땅’을 연결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먼저 제시하는 전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둘 다 존재하며,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비록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아 보여도’라고 덧붙입니다. 사람의 의식에서는 자신이 배우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AC.27의 초점은 이러한 인간의 활동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으며, 그것들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이른다는 질서를 점차 알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들어온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은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가면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로 분류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의 내용이 자연적인가, 영적인가, 천적인가 하는 것과 그것이 겉 사람의 기억 안에 존재하는 방식은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뿐 아니라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라도 겉 사람의 기억 속에 스며들면 그곳에서는 기억 지식으로 머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관한 지식이나 천국에 관한 지식이라고 해서 그것이 기억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 사람의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기억 속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창1:9의 ‘한곳으로 모인 물’이 나타내며, 그것들을 ‘바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물’이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과 연결되고, 그 물들이 모여 ‘바다’가 된다는 것이 AC.27의 직접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바다’를 곧 영적 생명 자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모여 있는 기억 지식의 상태와 관련됩니다. 앞으로 그 지식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겉 사람이 어떻게 생명을 받아 실제 열매를 내게 되는지는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더 전개됩니다.

 

AC.27에서 특히 주목할 표현은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이러한 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거기’는 속 사람 안의 어떤 별도의 리메인스 저장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 자체의 흐름상 바로 앞에서 말한 겉 사람의 기억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 문장을 ‘주님께서 사람의 모든 기억 작용을 직접 조작하신다’는 심리학적 설명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AC.27이 강조하는 것은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단지 인간 자신의 소유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후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그것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리메인스’와도 구별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및 그에 속한 상태들과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AC.27의 이 한 문장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리메인스를 저장소에서 꺼내는 메커니즘’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겉 사람의 기억에 저장된 ‘scientifica’, 곧 기억 지식이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천사들의 매개나 퍼셉션, 양심 같은 특정한 작동 방식 하나로 고정하기보다, 본문이 밝히는 범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 자체를 ‘마른 땅’이라 하고, 곧이어 ‘땅’이라 한다고 말한 뒤 자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넘깁니다. 이 멈춤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AC.27은 아직 마른 땅이 왜 땅이 되고 어떻게 식물을 내는지를 모두 설명하려는 번호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확정되는 것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에 기억 지식으로 저장되고, 그것들이 ‘한곳으로 모인 물’, 곧 ‘바다’로 표현되며, 겉 사람 자체가 ‘마른 땅’으로 드러난다는 데까지입니다.

 

따라서 AC.27의 셋째 날은 곧바로 열매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물이 모이고 마른 땅이 드러납니다. 거듭남에서도 사람이 진리를 한 번 듣고 곧바로 완성된 삶의 열매를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안에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 지식 자체가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기억 속에 받아들여진 것들도 이후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AC.27은 바로 이 ‘기억에 모이는 지식’과 ‘드러나는 겉 사람’에서 셋째 날의 다음 단계를 준비합니다. (AC.27 해설)

 

심화

1.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 심화 1,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 심화1.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에는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것들은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천적인 것이든 모두 그곳에 ‘기억 지식’(scientif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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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 창1:10, ‘물과 바다와 땅 : 지식이 모이고, 생명을 받아들일 거듭남의 그릇’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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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 창1:8, ‘저녁과 아침과 날 : 앞서 밝힌 의미의 재확인’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저녁’(evening), ‘아침’(mor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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