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2 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에서 특별히 깊이 생각할 부분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그것을 주된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길의 마지막인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신앙을 높이려 했는데 오히려 신앙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역설은 선과 진리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진리는 선이 무엇인지 보여 주고 선으로 인도하며, 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이 되게 합니다. 따라서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면 처음에는 여전히 진리의 지식과 형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 진리가 자기 목적을 잃게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 참된지를 알고 믿는 것은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무엇을 믿는가’ 자체만을 신앙의 본질로 만들면, 진리는 점차 삶과의 연결을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교리도 남아 있고 성경에 관한 지식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매우 강하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삶의 선을 향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proprium은 그 진리를 자기 생각과 욕망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 자체가 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랑과 목적이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진리 때문에 자기 생각을 고치기보다, 자기 생각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해석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더 이상 자신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가 됩니다. 신앙의 언어는 남아 있지만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생명은 점점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과정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중요하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더 나아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리고 그 분리가 계속되면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지키려 했던 신앙 자체마저 변질됩니다.

 

이것은 진리가 선에서 생명을 받는다는 스베덴보리의 기본 질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의 지식이 아무리 정확해도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고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그 지식만으로는 살아 있는 신앙을 이루지 못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와의 결합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2를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말씀으로 사용하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아는 것이 사는 것보다 앞설 수 있고, 교리적 확신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더 잘 믿기 위해 배운 진리가 어느 순간 자신의 생각과 자기 의를 지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이 경고는 더욱 중요합니다. AC에 관한 지식이 많아지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속뜻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신앙의 생명이 깊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더 분명하게 보고,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해지며,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AC.325부터 AC.332까지 이어 보면 그 흐름은 분명합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이어 교리가 왜곡되고, 그 왜곡된 상태가 확장되어 여러 파생 교리를 낳고, 마지막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됩니다.

 

결국 라멕은 ‘신앙을 버린 사람’의 단순한 표상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높이고 신앙을 그 생명에서 계속 분리한 결과, 마침내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AC.332의 가장 무거운 질문은 ‘나는 신앙을 얼마나 강하게 붙들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내 신앙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AC.332 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2.심화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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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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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18)

 

AC.332

이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 역시 각각 그 이름들로 불렸으며, 그 마지막이 ‘라멕’(Lamech)인데, 그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18절) The heresies that sprang from this one are also called by their names, in the last of which, called Lamech, there was nothing of faith remaining. (verse 18)

 

해설

AC.332는 앞의 AC.331에서 말한 ‘이 이단의 확장’이 계속되어 마침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31에서 ‘에녹’은 가인으로 표상된 이단, 곧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더욱 확장된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이제 창4:18에는 에녹에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타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집안의 계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하나의 교리적, 교회적 상태에서 여러 파생된 상태들이 생겨나며 점차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AC.332가 먼저 말하는 것은 ‘이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입니다. 처음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였습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리가 한 번 일어나고 계속 유지되면 그것이 한 형태로만 머물지 않고 여러 파생된 교리적 상태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4의 ‘낳고, 낳고, 낳았다’는 계보의 언어는 속뜻에서 단순한 혈통의 계승만이 아니라 교리와 교회의 상태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는 영적 계승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특정 교단을 정죄하는 의미로 곧바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24부터의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면서 생겨난 교리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이단들이 생겨났다’는 말은 단순히 교파의 수가 늘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의 영적 분리에서 여러 변형된 교리적 상태들이 파생되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점에서 창4의 계보는 하나의 점진적인 변질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 가인은 신앙 자체를 없앤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것을 주된 것으로 높이려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아직 신앙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AC.330에서 가인이 ‘표’를 받아 보존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져야 했기 때문에 신앙 자체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소멸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존되었다고 해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 자체가 승인된 것은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계속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은 채 전개되면 그 상태 역시 점차 변질될 수 있습니다. AC.331의 에녹은 그 첫 확장이고, AC.332에서는 다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을 거쳐 라멕에 이릅니다. 각각의 이름은 앞의 상태에서 파생된 또 다른 교리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AC.332에서 가장 무거운 말이 나옵니다. ‘그 마지막이 라멕인데, 그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출발점은 신앙을 높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정작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 계열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설입니다.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앞세워 신앙을 지키려 했지만, 신앙을 그 생명인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한 결과 마침내 신앙 자체의 성질도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단지 어떤 교리를 알고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진리가 되고, 신앙은 삶의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되어 있다면 처음에는 여전히 신앙의 지식과 형식을 유지할 수 있어도, 그 상태가 계속 진행되면서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말을 그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32는 가인에서 파생되어 라멕에 이른 특정한 교리적 계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당시 인류 전체에서 신앙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창4와 창5, 그리고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전체 흐름을 함께 보면 주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교회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과정이 계속 나타납니다.

 

이 점은 AC.330의 ‘가인의 표’와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가인 계열의 모든 후손이 반드시 끝까지 참된 신앙을 유지하도록 강제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 가운데 주님께서 보존하신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과 결합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그것을 계속 왜곡하여 잃을 수도 있습니다. 라멕은 바로 후자의 길이 끝까지 진행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은 단순히 ‘한 이단이 여러 이단으로 갈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 깊게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한 번 무너진 뒤 그 분리가 계속될 때 어떠한 영적 붕괴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고, 이어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으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 그 왜곡이 계속 확대되자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높였던 신앙 자체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창4의 계보 전체를 단순한 절망의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특정한 한 계열의 성공이나 실패에 매이지 않습니다. 가인 계열이 라멕에서 신앙마저 잃는 상태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구원의 질서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의 말씀에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어떤 것들이 보존되고, 또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어떻게 준비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AC.332는 우리에게 매우 엄중하면서도 단순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신앙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 신앙을 많이 말하고 진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만으로 그 신앙이 살아 있다고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그 진리가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게 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결합될 때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자신만을 높이기 시작하면, 끝에는 체어리티뿐 아니라 신앙 자체까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이 라멕에 이른 가인 계열의 무거운 경고입니다.

 

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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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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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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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수 있는가?

 

AC.332 심화 4, ‘가인 계열’ 이야기와 현 기독교, 개신교 생명 주기의 오버랩

AC.332 심화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수 있는가? 가인 계열을 따라 읽다 보면 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모습이 겹쳐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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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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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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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467

‘라멕’(Lamech)은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을 전혀 간직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며, ‘노아’(Noah)는 새 교회로 묘사됩니다. (29절) “Lamech” is described as retaining nothing of the perception which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and “Noah” is described as a new church. (verse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29절)

 

해설

AC.467은 앞의 AC.466에서 노아를 ‘고대교회’라고 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아홉 번째 교회인 ‘라멕’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그다음 ‘노아’는 ‘새 교회’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라멕에서 노아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히 아홉 번째 교회 다음에 열 번째 교회가 이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한 질서가 끝나고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시작되는 중요한 전환입니다.

 

여기서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특징은 주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참인지 추론하여 받아들이는 방식과 달랐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AC.467은 라멕에 이르러 그 퍼셉션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462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온 변화가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줍니다. ‘셋’은 처음의 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 않았고, 이후 여러 교회가 계속 이어졌으며, 마침내 ‘라멕’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창5의 여러 이름을 통하여 나타나는 변화는 단순히 교회의 명칭이 바뀌어 온 과정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특징짓던 내적 상태가 점차 달라져 마침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지속될 수 없게 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노아’가 등장합니다. AC.467은 노아를 단순히 라멕 다음의 교회라고 하지 않고 ‘새 교회’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라멕에게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면, 다음 교회는 이전의 상태를 그대로 회복하거나 반복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달라진 인간의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필요했고, 그 새 교회를 ‘노아’라고 한 것입니다. 앞의 AC.466에서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전환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에녹에 관한 AC.464도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을 교리로 형성하여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했던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영원히 같은 방식으로 지속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제 라멕에 이르러 그 퍼셉션이 사라지고 노아라는 새 교회가 시작된다는 AC.467의 설명은, 왜 앞선 시대에 그러한 교리의 보존이 필요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다만 그 보존된 교리가 새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이후의 본문 해설을 따라가며 살펴보아야 합니다.

 

AC.467은 결국 태고교회에서 고대교회로 넘어가는 경계선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한쪽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라멕’이 있고, 다른 쪽에는 ‘새 교회’인 ‘노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 교회의 끝이 곧 주님의 역사의 끝은 아닙니다. 한 형태의 교회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에도 주님은 인간의 달라진 상태에 맞추어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라멕과 노아 사이에는 단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의 끝에서도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고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가 함께 나타나 있습니다. (AC.467 해설)

 

 

 

AC.468, 창5, ‘노아는 교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리메인스를 가리킨다’

속뜻 AC.468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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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6, 창5, ‘노아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가 된 열 번째 교회이다’

개요 AC.466열 번째 교회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 이름을 ‘노아’(Noah)라 하였습니다.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 합니다. (28-29절) A tenth, the parent of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 was nam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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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465

 

아홉 번째 교회를 가리켜 ‘라멕’(Lamech)이라 하였습니다. (25절) A ninth church was called “Lamech.” (verse 25)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5절)

 

해설

AC.465는 앞에서 이어져 온 교회의 순서 가운데 ‘라멕’을 아홉 번째 교회로 제시합니다. AC.463에서 ‘에노스’부터 ‘므두셀라’까지 세 번째에서 여덟 번째 교회가 차례로 제시되었고, 이제 그다음 교회가 ‘라멕’입니다. 따라서 창5:25의 ‘라멕’ 역시 장 개요에서는 한 교회의 이름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은 짧지만 AC.460에서 시작된 흐름을 그대로 이어 갑니다.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교회가 차례로 이어졌고, ‘라멕’은 그 연속 가운데 아홉 번째에 해당합니다. 문자상으로는 족보 속에서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속뜻으로는 ‘라멕’이라는 이름을 통하여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또 하나의 교회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도 AC.465가 말하는 범위를 넘어 ‘라멕’이라는 교회의 구체적인 상태를 미리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장 개요에서 우선 밝혀 주는 것은 그 위치와 순서입니다. ‘라멕’은 ‘므두셀라’ 다음에 이어지는 아홉 번째 교회이며, 그 교회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이후 해당 본문에 대한 해설에서 밝혀집니다.

 

특히 ‘아홉 번째’라는 표현은 창5의 이름들이 서로 무관하게 나열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 안에 있음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셋’에서 시작하여 여러 이름을 거쳐 ‘라멕’에 이르는 동안 각각의 이름은 이어지는 교회를 가리키며, 창5는 그 순서를 통하여 태고교회의 여러 상태가 어떻게 계속되어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465의 핵심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라멕’은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교회들의 흐름 가운데 아홉 번째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장 개요는 각 이름의 의미를 자세히 풀기 전에 먼저 전체 계승의 뼈대를 세워 줍니다. 독자는 이 뼈대를 붙들고 이후 본문 해설로 들어가면서 ‘라멕’이라 하는 교회가 앞선 교회와 어떻게 이어지며 또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AC.465 해설)

 

 

 

AC.466, 창5, ‘노아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가 된 열 번째 교회이다’

개요 AC.466열 번째 교회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 이름을 ‘노아’(Noah)라 하였습니다.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 합니다. (28-29절) A tenth, the parent of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 was nam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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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4, 창5, ‘에녹은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으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교회이다’

개요 AC.464‘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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