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의강은지혜를뜻합니다.거기에서네강이흘러나왔는데,첫째는선과진리이고,둘째는선과진리,곧사랑과신앙에속한모든것에대한앎[cognitio]입니다.이것들은속사람에게속합니다.셋째는이성이고,넷째는기억지식[scientia]이며,이것들은겉사람에게속합니다.이모든것은지혜에서나오며,이지혜는주님을향한사랑과신앙에서나옵니다.(10-14절)Wisdom is meant by the river in the garden. From thence were four rivers,the first of which is good and truth;the second is the knowledge[cognitio]of all things of good and truth,or of love and faith. These are of the internal man.The third is reason,and the fourth is memory-knowledge[scientia],which are of the external man.All are from wisdom,and this is from love and faith in the Lord(verses 10–14).
AC.78은 창2:10-14의 강들을 통하여 천적 인간의 지혜와 그 지혜에서 나오는 것들을 개요로 보여 줍니다. 먼저 동산의 강은 ‘지혜’를 뜻하며, 그 강에서 다시 네 강이 흘러나옵니다. 따라서 이 네 강을 서로 독립된 네 가지 능력이나 지식으로 보기보다 하나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들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구나 마지막 문장은 그 지혜 자체도 독립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향한사랑과신앙’에서 나온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 전체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에서 다시 속 사람과 겉 사람에게 속한 것들이 나온다는 하나의 질서가 놓여 있습니다.
첫째와 둘째 강에 해당하는 것은 속 사람에게 속합니다.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앎’[cognitio]입니다. 여기서 선과 사랑, 진리와 신앙의 관계가 함께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그러나 AC.78은 아직 첫째 강과 둘째 강의 이름이나 각각의 세부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은 선과 진리 및 그것들에 대한 앎이 속 사람에게 속한다는 큰 구별을 먼저 제시합니다.
셋째와 넷째 강은 겉 사람에게 속합니다. 셋째는 이성이고, 넷째는 기억지식[scientia]입니다. 여기서 둘째 강의 ‘앎’[cognitio]과 넷째 강의 ‘기억지식’[scientia]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문 자체가 서로 다른 말을 사용하면서 전자는 속 사람에게, 후자는 겉 사람에게 속한다고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한 문장만으로 ‘앎’과 ‘기억지식’의 모든 차이를 미리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차이는 네 강에 관한 상세 해설을 따라가며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속 사람의 것들과 겉 사람의 것들이 서로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선과 진리, 그것들에 대한 앎, 이성, 기억지식은 모두 하나의 지혜에서 나오며, 그 지혜는 다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겉 사람에게 속한 이성과 기억지식도 여기서는 그 자체로 낮거나 악한 것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AC.78은 네 강의 그림을 통하여 천적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여러 것이 하나의 근원에서 질서 있게 이어지고 있음을 개요로 먼저 보여 줍니다. (AC.78해설)
‘기억지식’(memory-knowledges)이라는 표현은 처음 접하면 조금 낯설지만, AC를 읽으면서 자주 만나게 되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AC.24의 영어 번역에서 Potts는 라틴어 scientifica를 ‘memory-knowledges’라고 옮깁니다. 여기 붙은 개정자의 주(Reviser)는 이것을 ‘외적기억속에들어있는것들로,신학적인것이든그밖의것이든온갖종류가대량으로축적되어있는것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기억지식’은 특별히 신비하거나 영적인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읽어 외적 기억에 축적한 수많은 지식과 정보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역사적 사실이나 지리 정보, 과학 지식, 언어와 직업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성경에 관하여 배운 사실들도 기억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이삭의아버지이다’, ‘예수께서베들레헴에서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도 그 내용이 성경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곧 속 사람의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외적 기억에 저장되어 내가 필요할 때 떠올리고 말할 수 있는 지식으로 있는 한, 그것은 기억 지식의 차원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scientifica의 핵심은 단순히 ‘세속적인지식’이라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이 사람의 외적 기억에 속해 있다는 데 있습니다.
AC.24가 이 용어를 특별히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궁창위의물’과 ‘궁창아래의물’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을 cognitiones라 하고,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scientifica라 합니다. 개정자의 주는 cognitiones를 우리가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그것을안다’고 할 때의 앎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 구별을 ‘scientifica는죽은지식이고cognitiones는살아있는지혜다’라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AC.24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이 둘이 속하는 층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기억 지식 자체가 나쁘거나 거듭남에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사람이 외적 세계에서 습득하고 기억해 둔 수많은 것들을 사용하여 그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AC.24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아직 자신이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여기지만, 주님께서는 그가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것들을 통해서도 그를 선과 진리로 이끄십니다. 따라서 겉 사람과 그 안의 기억 지식은 없애 버려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속 사람과 올바른 질서 안에서 연결되어 주님께 쓰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경 지식도 좋은 예가 됩니다. 사람이 말씀의 내용을 많이 기억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주님께서 사람을 가르치시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전에 외워 두었던 한 구절이 어느 순간 자신의 악을 보게 하거나,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게 하거나,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깨닫게 하는 데 쓰일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기억 지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높은 질서 아래 놓이고 올바른 쓰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지식’은 쉽게 말하면 ‘외적기억에축적되어있는지식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것을 단순히 머릿속에 있다는 이유로 경시할 필요도 없고,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곧 영적 지혜라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AC.24가 보여 주는 거듭남의 질서는 이러한 겉 사람의 기억 지식과 속 사람 안의 것들이 처음에는 혼란스럽게 섞여 있다가, 주님께서 그 둘을 구별하시고 각각 제자리에 놓으시는 과정입니다. 바로 그 구별을 나타내는 것이 ‘궁창위의물’과 ‘궁창아래의물’입니다. (AC.24심화1)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창1:9)
AC.27
속사람과겉사람이둘다존재한다는사실과,여러진리와선이주님으로부터속사람을통하여겉사람으로흘러들어온다는사실이알려지면,비록겉보기에는그렇지않아보여도,거듭나는중인사람안에있는그러한여러진리와선,곧참과선에관한여러지식은그의기억속에저장되어‘기억지식’(scientifica)가운데로분류됩니다.왜냐하면겉사람의기억속에스며든것은자연적인것이든,영적인것이든,또는천적인것이든모두그곳에기억지식으로머물며,나중에주님에의해거기에서불러내어지기때문입니다.이러한지식들이바로‘한곳으로모인물’(watersgatheredtogetherintooneplace)이며,‘바다’(seas)라고합니다.그러나겉사람자체는‘마른땅’(dryland)이라하고,곧이어‘땅’(earth)이라하는데,이에대해서는이어지는다음내용에서말씀드리겠습니다.When it is known that there is both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and that truths and goods flow in from,or through,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from the Lord,although it does not so appear,then those truths and goods,or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 in the regenerating man,are stored up in his memory,and are classed among its knowledges[scientifica];for whatsoever is insinuated into the memory of the external man,whether it be natural,or spiritual,or celestial,abides there as memory-knowledge,and is brought forth thence by the Lord. These knowledges are the “watersgatheredtogetherintooneplace,” and are called “seas,” but the external man himself is called the “dry[land],” and presently “earth,” as in what follows.
해설
AC.27은 창세기 셋째 날의 첫 장면인 ‘천하의물이한곳으로모이고뭍이드러나라’는 말씀을 거듭남의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앞의 AC.24-25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고, 주님께서 사람을 그의 현재 상태에서부터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시는 질서를 살폈다면, 이제 AC.27에서는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들어온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안에서 어떤 상태에 놓이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이 번호는 앞의 ‘궁창’과 뒤의 ‘바다와땅’을 연결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먼저 제시하는 전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둘 다 존재하며,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비록겉보기에는그렇지않아보여도’라고 덧붙입니다. 사람의 의식에서는 자신이 배우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AC.27의 초점은 이러한 인간의 활동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으며, 그것들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이른다는 질서를 점차 알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들어온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은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가면 ‘기억지식’(scientifica)가운데로 분류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의 내용이 자연적인가, 영적인가, 천적인가 하는 것과 그것이 겉 사람의 기억 안에 존재하는 방식은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뿐 아니라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라도 겉 사람의 기억 속에 스며들면 그곳에서는 기억 지식으로 머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관한 지식이나 천국에 관한 지식이라고 해서 그것이 기억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 사람의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기억 속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창1:9의 ‘한곳으로모인물’이 나타내며, 그것들을 ‘바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물’이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과 연결되고, 그 물들이 모여 ‘바다’가 된다는 것이 AC.27의 직접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바다’를 곧 영적 생명 자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모여 있는 기억 지식의 상태와 관련됩니다. 앞으로 그 지식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겉 사람이 어떻게 생명을 받아 실제 열매를 내게 되는지는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더 전개됩니다.
AC.27에서 특히 주목할 표현은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이러한 것들이 ‘나중에주님에의해거기에서불러내어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거기’는 속 사람 안의 어떤 별도의 리메인스 저장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 자체의 흐름상 바로 앞에서 말한 겉 사람의 기억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 문장을 ‘주님께서사람의모든기억작용을직접조작하신다’는 심리학적 설명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AC.27이 강조하는 것은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단지 인간 자신의 소유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후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그것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리메인스’와도 구별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및 그에 속한 상태들과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AC.27의 이 한 문장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리메인스를저장소에서꺼내는메커니즘’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겉 사람의 기억에 저장된 ‘scientifica’, 곧 기억 지식이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천사들의 매개나 퍼셉션, 양심 같은 특정한 작동 방식 하나로 고정하기보다, 본문이 밝히는 범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 자체를 ‘마른땅’이라 하고, 곧이어 ‘땅’이라 한다고 말한 뒤 자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넘깁니다. 이 멈춤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AC.27은 아직 마른 땅이 왜 땅이 되고 어떻게 식물을 내는지를 모두 설명하려는 번호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확정되는 것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에 기억 지식으로 저장되고, 그것들이 ‘한곳으로모인물’, 곧 ‘바다’로 표현되며, 겉 사람 자체가 ‘마른땅’으로 드러난다는 데까지입니다.
따라서 AC.27의 셋째 날은 곧바로 열매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물이 모이고 마른 땅이 드러납니다. 거듭남에서도 사람이 진리를 한 번 듣고 곧바로 완성된 삶의 열매를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안에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 지식 자체가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기억 속에 받아들여진 것들도 이후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AC.27은 바로 이 ‘기억에모이는지식’과 ‘드러나는겉사람’에서 셋째 날의 다음 단계를 준비합니다. (AC.27해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mostancienttime)를‘태초’(太初, thebeginning)라고합니다.선지자들은여러곳에서이를‘옛날’(thedaysofold, [antiquitatis])이라부르기도하고,또한‘영원’(thedaysofeternity)이라부르기도합니다.이‘태초’는또한사람이거듭나기시작하는첫시기를포함하는데,이때그는새로태어나생명을받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거듭남자체를사람의‘새창조’(anewcreation)라고합니다.선지서거의모든곳에서‘창조하다’(tocreate),‘짓다’(toform),‘만들다’(tomake)라는표현들은거듭나게하는것을의미하지만,각각그의미에는차이가있습니다.이사야를보면,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beginning.”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ofold” [antiquitatis]and also the “daysofeternity.”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for he is then born anew,and receives life.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creation” of man.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As in Isaiah:
그러므로주님은‘구속자’(theRedeemer),‘태에서부터지으신이’(theFormerfromthewomb),‘만드신이’(theMaker),그리고‘창조자’(theCreator)라고불리시는데,같은선지서에서,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fromthe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as in the same prophet:
‘천’(heaven)은거듭남이전의속사람을,‘지’(earth)는겉사람을의미한다는것은뒤에이어질내용에서볼수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AC.16부터 스베덴보리는 창1:1의 각 표현을 본격적으로 풀기 시작합니다. 첫 표현은 ‘태초’(thebeginning)입니다. 그는 먼저 ‘태초’가 태고, 곧 가장 오래된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선지서에서는 이를 ‘옛날’(thedaysofold)또는 ‘영원’(thedaysofeternity)이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시간 개념 자체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AC.16에서 중요한 것은 이 ‘태초’가 문자적으로 먼 옛 시작을 가리킬 뿐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하는 첫 시기까지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 그는 ‘새로태어나생명을받기’때문에, 그에게도 하나의 새로운 시작, 곧 영적인 ‘태초’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창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앞의 AC.4에서 이미 창세기 1장이 사람의 새 창조, 곧 거듭남을 다룬다고 밝힌 것과 직접 연결됩니다. 창1:1의 ‘하나님이천지를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의 시작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사람이 ‘생명을받는다’는 말도 육체적 생명을 새로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매여 있던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영적 생명으로 깨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순한 성격 개선이나 종교적 습관의 보완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질서를 이루어 가시는 ‘새창조’입니다.
이 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43:7을 인용합니다. ‘내이름으로불리는모든자곧내가내영광을위하여창조한자를오게하라그를내가지었고그를내가만들었느니라.’여기서는 한 사람 또는 한 백성을 두고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라는 세 동사가 함께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이유는 선지서의 ‘창조’언어가 단지 우주나 인간의 최초 창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주님께 속하도록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에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동시에 이 세 동사가 모두 같은 뜻으로 무의미하게 반복된 것이 아니라 각각 의미의 차이를 가진다고 밝힙니다. 다만 AC.16에서는 그 차이를 아직 자세히 풀지 않으므로, 여기서 세 동사를 임의로 세 단계에 정확히 배당하기보다는 ‘말씀은거듭남을여러측면에서창조·형성·만듦의언어로표현한다’는 정도로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어지는 사43:15의 ‘나는여호와너희의거룩한이요이스라엘의창조자요너희의왕이니라’는 말씀은 새 창조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더욱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앞에서 주님을 ‘구속자’, ‘태에서부터지으신이’, ‘만드신이’, ‘창조자’라고 부른다고 설명한 뒤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창조자’라는 호칭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으로 존재하게 된 사실만을 말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습니다. AC.16의 문맥에서는 주님께서 사람을 구속하시고, 형성하시고, 새롭게 만드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이 ‘새창조’라면 그 창조자는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선택하며 순종하지만, 그 안에서 생명을 주시고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점이 이 인용의 핵심입니다.
시102:18의 ‘창조함을받을백성이여호와를찬양하리로다’는 말씀은 ‘창조’가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의 백성은 육체적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창조함을받을’백성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이 표현은 사람이나 교회가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매우 적절한 증거가 됩니다. 이미 자연적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시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씀 안의 ‘창조’에는 최초의 물질적 창조를 넘어선 영적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롭게 된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것은 새 창조가 단순한 내면의 심리 변화가 아니라,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향하는 새로운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네 번째 인용인 시104:30은 이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주의영을보내어그들을창조하사지면을새롭게하시나이다.’여기서는 ‘창조’와 ‘새롭게하다’가 한 구절 안에서 나란히 나타납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16의 ‘거듭남은새창조’라는 설명과 매우 잘 맞습니다. 주님의 영이 보내어질 때 그들이 ‘창조되고’, 그 결과 ‘지면’이 새로워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붙드는 핵심은 주님의 생명과 역사가 사람을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시104:30의 ‘주의영’을 성령론 전체로 확대하거나 ‘지면’을 AC.16의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겉 사람과 반드시 일대일로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번호에서 이 구절이 담당하는 직접적인 역할은 ‘창조’가 곧 새롭게 함과 연결되어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 네 인용을 함께 놓고 보면 왜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자체를사람의새창조라고한다’고 말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사43:7에서는 사람이 ‘창조되고,지어지고,만들어지며’, 사43:15에서는 주님이 ‘창조자’라고 불리시고, 시102:18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백성이 다시 ‘창조함을받을백성’이라고 불리며, 시104:30에서는 주님의 영으로 ‘창조됨’과 ‘새롭게됨’이 함께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네 구절은 따로따로 흩어진 증거가 아니라 하나의 논증을 이룹니다. 말씀의 선지적 언어에서 ‘창조’는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별도의 인용 구절 심화가 없어도 AC.16에서 왜 이 네 본문을 가져왔는지가 충분히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창1:1의 ‘천’(heaven)과 ‘지’(earth)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미리 예고합니다. ‘천’은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지’는 겉 사람을 의미하며, 그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너무 앞서갈 필요는 없습니다. AC.16이 아직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속뜻에서 읽을 때, 우주 창조의 언어가 동시에 인간의 내적·외적 존재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질서 지어지는 거듭남의 언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AC.16의 중심은 간결합니다. ‘태초’는 사람의 거듭남이 시작되는 첫 시기를 포함하고, 거듭남은 ‘새창조’이며, 그 새 창조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제 이어지는 구절들은 그 새 창조가 속 사람과 겉 사람 안에서 어떤 질서로 이루어지는지를 하나씩 보여 주게 됩니다. (AC.16해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6, 7)
AC.25
‘땅을펼치고하늘을편다’(spreadouttheearthandstretchouttheheavens)는표현은사람의거듭남을다룰때선지자들이매우흔히사용하는말입니다.이사야에보면,To “spreadouttheearthandstretchouttheheavens,” 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As in Isaiah:
즉,주님께서는오류들을꺾지않으시고욕정들을끄지않으시며,오히려그것들을참되고선한것으로굽히십니다.그러므로이어서말씀하시기를, that is,he does not break fallacies,nor quench cupidities,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and therefore it follows:
이와같은뜻을지닌다른구절들은더언급하지않겠습니다.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해설
AC.25는 바로 앞 AC.24에서 설명한 ‘궁창’,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을 선지서의 언어를 통해 한 번 더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이 사람의 거듭남을 말할 때 ‘땅을펼치고하늘을편다’는 표현을 매우 흔히 사용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하늘과 땅에 관한 설명 자체가 아니라, 창조의 언어가 사람의 재창조, 곧 거듭남을 말하는 데에도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하늘’은 속 사람, ‘땅’은 겉 사람과 연결되었으므로, 하늘과 땅을 새롭게 펴고 펼친다는 표현은 거듭남 가운데 사람의 내적·외적 질서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세워지는 것과 연결됩니다.
첫 번째로 인용되는 사44:24에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네구속자요모태에서너를지은’분이라고 하시면서 ‘홀로하늘을폈으며나와함께한자없이땅을펼쳤다’고 말씀하십니다. AC.25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하늘을펴고땅을펼친다’는 선지서의 표현이 사람을 지으시고 구속하시는 주님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구속자’와 ‘지은자’라는 표현이 하늘과 땅을 펴시는 창조의 언어와 함께 놓임으로써, 창조의 언어가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와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를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주님의단독사역’이라고 단순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생명과 능력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주님에게서 받은 자유 안에서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응답하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AC.25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사42:3입니다. ‘상한갈대를꺾지아니하며꺼져가는등불을끄지아니하고’라는 말씀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는오류들을꺾지않으시고욕정들을끄지않으시며,오히려그것들을참되고선한것으로굽히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모든 오류와 욕정을 한순간에 강제로 제거하여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드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아직 오류와 욕정이 존재하는 그 사람의 현재 상태에서도 그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그를 점차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십니다.
여기서 ‘굽히신다’는 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오류 자체를 조금씩 고쳐 마침내 진리로 만들고, 악한 욕정 자체를 정화하여 마침내 선한 사랑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짓은 진리가 되어야 할 재료가 아니며 악한 사랑은 그대로 천국적 사랑으로 발전하는 씨앗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은 처음에는 오류와 욕정의 영향을 받으면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끄시면서 점차 거짓에서 진리로, 악한 사랑의 지배에서 선한 사랑의 질서로 방향을 바꾸게 하십니다. AC.24에서 사람이 감각의 착각과 욕정과 같은 자기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참되고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고 한 설명이 바로 이 대목과 연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사42:3다음에 사42:5를 이어 인용합니다. ‘하늘을창조하여펴시고땅과그소산을내시며’라는 표현은 다시 창조의 언어로 돌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AC.25가 여기서 ‘호흡’, ‘영’, ‘소산’각각의 세부 상응을 해설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이 단락에서의 직접적인 논지는 주님의 강림을 말하는 같은 문맥 안에서 ‘꺾지않고끄지않으며굽히심’과 ‘하늘을펴고땅을펼치심’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거듭남은 파괴를 통한 새 창조가 아니라,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주님께서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시면서 그의 내적·외적 질서를 새롭게 세우시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한갈대’와 ‘꺼져가는등불’을 사람 안의 선과 진리에 일대일로 대응시켜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25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이 이미지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역사 방식입니다. 사람에게 아직 오류와 욕정이 남아 있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 사람을 강제로 꺾고 끄는 방식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현재 상태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점진성은 인간의 악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자유와 수용 능력을 따라 질서 있게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결국 AC.25가 선지서의 ‘하늘을펴고땅을펼친다’는 표현을 가져오는 이유는 창세기의 창조 언어와 인간의 거듭남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1에서 하늘과 땅이 질서를 찾아가는 모습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단번에 파괴하고 새것으로 대체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혼합되고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그의 자유 안에서 점차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굽히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를 새롭게 세워 가십니다. 이것이 AC.25가 보여 주는 ‘하늘과땅을펴심’과 ‘굽히심’의 거듭남입니다. (AC.25해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창1:6, 7)
AC.24
하나님의영,곧주님의자비가참되고선한지식을낮으로이끌어내시고,첫빛,곧주님이계시며,그분이선자체이시고진리자체이시며,그분으로말미암지않는선과진리는없다는빛을주신후,주님은속사람과겉사람을구별하시며,따라서속사람안에있는지식(cognitiones)과겉사람에속한기억지식(scientifica)을구별하십니다.속사람을‘궁창’(expanse)이라하고,속사람안에있는지식을‘궁창위의물’(thewatersabovetheexpanse)이라하며,겉사람의기억지식을‘궁창아래의물’(thewatersbeneaththeexpanse)이라합니다. After the spirit of God,or the Lord’s mercy,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and has given the first light,that the Lord is,that he is good itself,and truth itself,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2The internal man is called an “expanse”;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 “thewatersabovetheexpanse”;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 “thewatersbeneaththeexpanse.”
주2. ‘지식’(knowledges, cognitiones)이란우리가실제로알고있는것들을뜻하는데, 예를들면우리가‘나는단지그렇게생각하는것이아니라,그것을안다’라고말할때의그앎입니다. 반면‘기억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은외적기억속에들어있는것들로, 신학적인것이든그밖의것이든온갖종류가대량으로축적되어있는것들을말합니다. 이두용어에대한스베덴보리자신의정확한정의는‘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C.27, 896, 1486, 2718, 5212를보시고, 또한개정자의서문주해(Reviser’sPrefatoryNotes)도참고하시기바랍니다.Knowledges [cognitiones] are what we really know,as when we say “Idonotmerelythinkso,Iknowit.”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re what we have in the external memory—a vast accumulation of all kinds,theological and otherwise. For precise definitions of these words by Swedenborg himself, see Arcana Coelestia, n. 27,896,1486,2718,5212.See also the Reviser’s Prefatory Notes.[Reviser]
[2] 사람은거듭남이시작되기전에는속사람이존재한다는것조차알지못하며,더욱이그성질과상태에대해서는알지못합니다.그는속사람과겉사람이서로구별되지않는다고생각합니다.왜냐하면몸과세상에속한것들에깊이잠겨있으면서속사람에속한것들까지그안에잠기게하여,서로구별되는것들을혼란스럽고어두운하나로만들어버렸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먼저‘물가운데에궁창이있으라’(Lettherebeanexpanseinthemidstofthewaters)하시고,그다음에‘물과물로나뉘라’(Letitdistinguishbetweenthewatersinthewaters)하시는것입니다.그러나아직은이후의구절에서처럼‘궁창아래의물과궁창위의물로나뉘라’(Letitdistinguishbetweenthewaterswhichareundertheexpanseandthewaterswhichareabovetheexpanse)고하지는않으십니다. Man,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For,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Therefore it is first said,“Lettherebeanexpanseinthemidstofthewaters,” and then,“Letitdistinguishbetweenthewatersinthewaters”;but not,“Letitdistinguishbetweenthewaterswhichareundertheexpanseandthewaterswhichareabovetheexpanse,” 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3] 따라서사람이거듭남의과정에서다음으로인식하게되는것은,속사람이있다는사실,곧속사람안에있는것들은오직주님께속한선과진리라는사실입니다.그러나거듭남이진행되는동안그의겉사람은여전히자기가행하는선을자기에게서나온것으로여기고,자기가말하는진리도자기에게서나온것으로여깁니다.그럼에도그는그러한상태에있기때문에,주님에의해자기가자기자신의것이라고여기는이러한것들을통하여선을행하고진리를말하도록인도됩니다.그러므로먼저궁창아래의물들의구별이언급되고,그다음에궁창위의물들이언급됩니다.또한이것은천국의아르카나인데,사람은자기자신의것들,곧감각의착각이나욕정에의해서도주님에의해참되고선한것들로이끌리고굽혀진다는사실입니다.그리하여거듭남의모든움직임과순간은전체적으로나부분적으로나저녁에서아침으로,곧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또는‘땅’(earth)에서‘하늘’(heaven)로진행됩니다.그러므로이제궁창,곧속사람을‘하늘’(heaven)이라하는것입니다. 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which are of the Lord alone. Now as the external man,when being regenerated,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and whereas,being such,he is led by them of the Lord,as by things of his own,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that man,by things of his own,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or from “earth” to “heaven.”Therefore the expanse,or internal man,is now called “heaven.”
해설
AC.24는 창세기 1장의 둘째 날에 등장하는 ‘궁창’이 인간의 거듭남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본문입니다. 앞선 단계에서 주님의 자비가 참되고 선한 지식을 낮으로 이끌어 내시고, 사람에게 ‘주님이계시며그분이선자체이고진리자체이시고모든선과진리는그분에게서온다’는 첫 빛을 주셨다면, 이제 그 빛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궁창의 핵심은 단순한 ‘분리’보다 ‘구별’입니다. 거듭남 이전에는 서로 다른 것들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었지만, 이제 주님께서 그것들이 서로 다름을 드러내시고 질서를 세우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을 ‘궁창’(expanse)이라고 하고, 속 사람 안의 지식을 ‘궁창위의물’,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궁창아래의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cognitiones’와 ‘scientifica’의 구별이 중요합니다. 본문에 붙은 개정자의 주에 따르면 cognitiones는 사람이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는 정도를 넘어 ‘나는그것을안다’고 할 때의 앎이며, scientifica는 외적 기억 안에 축적되어 있는 온갖 종류의 기억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 둘을 곧바로 ‘살아있는영적지식’과 ‘죽은세속지식’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AC.24에서 우선 강조되는 것은 이들이 속하는 층위가 다르며, 거듭남 가운데 그 차이가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거듭남 이전의 사람은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며, 더욱이 그 성질과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에 깊이 잠겨 있기 때문에 속 사람에 속한 것들까지 같은 차원 안에 끌어들여, 본래 구별되어야 할 것들을 혼란스럽고 어두운 하나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표현 순서도 섬세합니다. 처음에는 ‘물가운데에궁창이있으라’고 하고 ‘물과물로나뉘라’고 할 뿐, 곧바로 ‘궁창아래의물’과 ‘궁창위의물’이라고 명확히 부르지 않습니다. 이후에야 위와 아래의 물이 분명히 구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문장 순서에서 거듭남의 질서를 읽습니다. 사람은 먼저 속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 가고, 그다음에야 그 둘에 속한 것들의 질서를 점차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이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은 속 사람이 있으며, 그 속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 중인 사람의 겉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신이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은 앞선 거듭남의 단계들과도 연결됩니다. 사람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으면서도 아직 그것을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상태를 지나갑니다.
바로 여기서 AC.24의 매우 중요한 아르카나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통해서도 그를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감각의 착각과 욕정과 같은 사람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주님께서 사람을 참되고 선한 것들로 이끄시고 굽히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을 주님께서 선한 것으로 인정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아직 그것들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도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현재 상태와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점차 선과 진리 쪽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거듭남은 이미 완전해진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아직 자기 자신의 것들 속에 있는 사람을 주님께서 차츰 질서 안으로 이끄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궁창 아래의 물이 먼저 언급되고 궁창 위의 물이 그다음에 언급되는 순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의 의식과 경험에서는 겉 사람의 것들이 먼저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을 행한다고 느끼며, 그 뒤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처음부터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자신 안에 겉 사람과 구별되는 속 사람이 있음을 알고, 그 속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궁창’은 바로 이러한 구별이 시작되고 질서가 세워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저녁에서아침으로’, ‘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 ‘땅에서하늘로’진행된다고 말합니다. 앞의 AC.22-23에서 살핀 저녁과 아침의 질서가 여기에서 다시 거듭남의 실제 과정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보이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주님께 속한 것으로 이끄시며, 겉 사람에 머물러 있던 그의 의식은 점차 속 사람의 질서와 연결되어 갑니다. 이 과정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의 전체와 각각의 부분에서 계속된다는 것이 ‘모든움직임과순간’이라는 표현의 뜻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궁창, 곧 속 사람을 ‘하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사람 안에 별도의 작은 천국이 만들어졌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24의 직접적인 뜻은 속 사람이 ‘땅’으로 표현되는 겉 사람과 구별되며, 그 속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가 주님께 속한다는 데 있습니다. 거듭남은 이렇게 혼란스럽게 섞여 있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주님에 의해 구별되고, 사람 자신의 것처럼 여겨지던 것들이 점차 주님의 선과 진리 아래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창1의 궁창은 바로 그 구별과 질서의 시작을 나타냅니다. (AC.24해설)
두번째상태는주님께속한것들과사람에게고유한것들이서로구별되는때입니다.주님께속한것들은말씀에서‘리메인스’(remains)라고불리며,여기서는특별히유아기부터배워온신앙의지식들을뜻합니다.이것들은저장되어있다가사람이이상태에이르기전까지는드러나지않습니다.오늘날이상태는시험,불행또는슬픔없이존재하는경우가거의없습니다.이러한것들로말미암아몸과세상에속한것들,곧사람에게고유한것들이잠잠해지고마치죽은것처럼되기때문입니다.이와같이겉사람에속한것들이속사람에속한것들로부터분리됩니다.속사람안에는주님께서이때까지저장해두신리메인스가있으며,바로이러한쓰임을위해보존되어온것입니다. The second state is when a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and those which are proper to man.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and here are especially knowledges of faith,which have been learned from infancy,and which are stored up,and are not manifested until the man comes into this state.At the present day this state seldom exists without temptation,misfortune,or sorrow,by which the things of the body and the world,that is,such as are proper to man,are brought into quiescence,and as it were die.Thus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are separated from those which belong to the internal man.In the internal man are the remains,stored up by the Lord unto this time,and for this use.
해설
AC.8은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AC.7의 첫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아직 ‘혼돈’, ‘공허’, ‘흑암’가운데 있지만 주님의 자비가 먼저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상태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속한것들’과 ‘사람에게고유한것들’사이에 구별이 생기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사람이 이전보다 종교적이 되거나 도덕적으로 나아지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인지를 점차 구별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리메인스 전체에 대한 완전한 정의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여기서는특별히’라고 한정하면서 유아기부터 배워 온 ‘신앙의지식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AC를 따라가면 리메인스는 신앙의 지식에만 한정되지 않고, 주님께서 인간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그리고 선한 정서와 관련된 훨씬 풍성한 의미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AC.8에서는 우선 ‘사람이스스로만들어낸것이아니라주님께서인간안에저장하고보존해두신것’이라는 핵심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리메인스가 곧바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유아기와 어린 시절부터 많은 선과 진리를 접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모두 즉시 그의 의식적인 신앙과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감추어진 채 저장되어 있다가 거듭남의 과정에서 필요한 때가 되었을 때 주님께서 그것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AC.8은 리메인스가 ‘저장되어있다가사람이이상태에이르기전까지는드러나지않는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안에 무엇이 보존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는 이미 훨씬 오래전부터 그의 거듭남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두 번째 상태가 ‘시험,불행또는슬픔없이존재하는경우가거의없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여기서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기 위해 반드시 불행을 보내신다거나,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이 더 잘 거듭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문도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반드시 고난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거의없다’고 표현합니다. 핵심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일을 통하여 ‘몸과세상에속한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평소 자기의 판단과 능력, 세상에서의 성취와 안정, 몸의 욕구와 외적인 조건을 매우 강하게 붙들고 살아갑니다. 이것들이 인간의 삶에서 모두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몸도 필요하고 세상에서 맡은 일과 관계와 책임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인간 안에서 주도권을 차지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가릴 때입니다. 시험과 불행과 슬픔은 때때로 사람이 의지하던 외적인 것들의 힘을 약하게 하고, 자기 자신만으로 모든 것을 붙들 수 있다는 확신을 잠잠하게 합니다. AC.8에서 ‘마치죽은것처럼된다’는 것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실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지배력이 잠잠해지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여기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이것 역시 인간이 둘로 쪼개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뒤섞여 있어 그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면서 속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해 두신 것들이 드러날 수 있게 되고, 사람은 이전에는 구별하지 못했던 두 근원을 조금씩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분리’는 거듭남에 필요한 영적 구별이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말이 ‘사람에게고유한것들’입니다. Potts의 영어 ‘propertoman’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앞으로 매우 중요해지는 개념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생각과 의지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참된 선과 진리는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AC.8의 두 번째 상태는 바로 이 구별이 처음 분명해지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렇다고 시험이나 불행이 자동으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 완고해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변화의 근원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AC.8의 중심을 ‘고난을받아야거듭난다’로 잡으면 안 됩니다. 중심은 주님께서 이미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주님께 속한 것과 자기에게 속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8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사실 시험이나 슬픔이 아닙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거듭남을 의식하기 오래전부터 주님께서 이미 그 사람 안에 필요한 것을 저장해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거듭남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보존하신 것을 적절한 때에 사용하시면서 거듭남을 이끌어 가십니다. 리메인스는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구원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주님의 섭리 가운데 준비되어 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7에서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던 사람은 AC.8에 이르러 처음으로 하나의 구별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내가선하다고생각하는것’과 ‘실제로주님으로부터오는선’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며, ‘내생각’과 ‘주님의진리’역시 저절로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별이 생겨야 이후의 회개와 신앙의 삶도 가능해집니다. AC.8의 두 번째 상태는 완성된 거듭남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보존해 두신 것을 사용하시면서 인간 안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시작하시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AC.8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