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쓸쓸히 홀로 고독사하는 사람도 있고...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편안하게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통사고 등 갑작스런 사고사나 전쟁이나 강도, 감옥 형장의 이슬, 혹은 자살 등... 제가 말씀드리고픈 것은 저는 고등학생 때 모친을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이런 사별의 경험은 정말 선 굵은 인생의 자국을 남기더라는 거죠. 아마 숨을 거두시는 분도 그러지 싶은데... 그런데 어떻게 사후 자기가 죽은지조차 모를 수가 있는 건가요? 모든 게 이어진다면서 말이죠...

 

 

임종, 곧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모습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히 숨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곁에 없는 가운데 홀로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오랜 치료 끝에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통사고나 재난, 전쟁이나 범죄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역시 고등학생 때 모친을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갑작스러운 사별은 남겨진 사람의 삶에 아주 깊고 오래가는 자국을 남깁니다.

 

그래서 AC.320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죽음의 모습이 이렇게 다양하고, 어떤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충격적인데, 어떻게 죽은 사람이 처음에는 자신이 죽은 사실조차 모를 수 있을까요? 더구나 스베덴보리는 죽음 이후에도 삶과 의식이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이어진다면 사고나 죽음의 순간에 대한 의식도 그대로 이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여기서 먼저 구별할 것은 ‘의식의 연속’과 ‘자신이 처한 새로운 상태에 대한 인식’입니다. AC.320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이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연속성이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알지 못합니다. 자신에게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흔히 ‘의식이 끊어지는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야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AC.320의 설명은 그 반대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끝났지만 사람 자신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나는 죽지 않았는데 왜 내가 죽었다고 하는가?’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영이라고 말해 주었을 때 놀라고 경이로워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자신은 여전히 감각과 욕구와 생각을 가진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통사고나 전쟁, 범죄와 같은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AC.320만으로 각각의 경우에 죽은 사람이 정확히 무엇을 경험하는지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항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증언하는 것은 죽음의 방식에 따른 세부 과정이 아니라,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도 자신의 존재와 의식이 계속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저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일반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임종의 경우를 상상하여 그 사람이 반드시 이런 순서로 경험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지상에서 남겨진 사람이 경험하는 ‘죽음’과, 죽은 사람 자신이 경험하는 ‘계속되는 삶’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순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단절입니다. 특히 갑작스러운 사별은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320에서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죽은 사람의 경험은 ‘나는 없어졌다’가 아니라 오히려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입니다.

 

이것은 제가 어린 시절 모친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경험을 생각할 때에도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남겨진 저에게 그 사건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단절이었지만, AC.320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어머니 자신의 생명까지 그 사고의 순간에 함께 끊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이후 어머니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경험하셨는지를 제가 알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육체의 죽음이 그분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킨 것은 아니라는 스베덴보리의 증언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사람이 죽음이라는 사건을 부정하거나 혼란에 빠져 있다는 뜻으로만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AC.320의 초점은 삶의 놀라운 연속성에 있습니다. 사람은 죽었는데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는 죽었지만 사람 자신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AC.320은 우리에게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 줍니다. 지상에 남은 사람에게 죽음은 분명 슬프고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이별입니다. 그 슬픔을 가볍게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증언을 따른다면 그 이별의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 너머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AC.320이 들려주는 첫 번째 사후세계의 소식은 어쩌면 아주 단순합니다. ‘죽음 뒤에도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

bygrace.kr

 

AC.320,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심화 1. ‘soul’과 ‘spirit’ ‘soul’과 ‘spirit’의 차이가 뭔가요? 그리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은?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20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거의 나란히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the life of souls’라고 말한 뒤 곧바로 ‘that is, of novitiate spirits’라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 soul과 spirit을 서로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 이후 계속 살아가는 동일한 인간을 서로 조금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일반적으로 soul은 ‘영혼’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320의 ‘the life of souls’에서는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인간의 생명 또는 인간 자신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단순히 육체 안에 들어 있는 어떤 비물질적 ‘부분’으로 생각하면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려는 뜻을 충분히 살리기 어렵습니다. AC.320의 관심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부품으로 나누는 데 있지 않고, 육체가 죽은 뒤에도 인간 자신이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반면 spirit은 ‘영’으로 옮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novitiate spirits’는 죽음 이후 처음 영계에 들어간 사람들을 가리키므로 ‘신참, 신생 영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그 ‘영’이 지상에서 살던 사람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AC.320이 이어서 설명하듯 그는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며, 자신을 전과 같은 한 사람으로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AC.320의 첫 문장은 ‘영혼이라는 어떤 것이 죽은 뒤 어떻게 되는가’를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인간은 처음 영계에서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소개하는 문장입니다. ‘soul’이라는 표현으로 사후에 계속되는 인간의 생명을 넓게 제시하고, 곧이어 ‘novitiate spirits’라는 표현으로 지금부터 다룰 대상이 죽음 직후 영계에 들어온 사람들임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영혼’이라고 하면 육체에서 빠져나온 희미한 무엇을 떠올리고, ‘영’이라고 하면 더욱 비현실적인 존재를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죽은 뒤에도 인간은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AC.320에서도 바로 그 때문에 새로 영계에 들어온 사람이 자신에게 ‘당신은 영입니다’라고 말하면 놀란다고 합니다. 자신은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며, 전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살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번역에서는 soul과 spirit의 차이를 완전히 지워 버릴 필요도 없고, 반대로 두 단어 사이에 지나치게 엄격한 존재론적 구별을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soul은 ‘영혼’, spirit은 ‘영’으로 구별하여 옮기되, 이 문맥에서는 둘 다 육체의 죽음 이후 계속 살아가는 동일한 인간을 가리킨다는 점을 기억하면 됩니다.

 

결국 AC.320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soul과 spirit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나인가?’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그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바로 그 사람이 ‘나’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이 사라지고 영이라는 전혀 다른 존재가 생겨나는 사건이 아니라, 육체를 벗은 인간이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임을 발견하는 사건입니다.

 

 

 

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

bygrace.kr

 

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저는 많은 경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저세상(the other life)에 들어가면 그는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아직도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매우 실제적이어서, 누군가 그에게 자신이 영이라고 말해 주면 그는 크게 놀라고 경이로워합니다. 이는 자신이 감각과 욕구, 생각에 있어서 전과 똑같이 한 인간으로 존재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며, 또한 세상에 살 때에는 영의 존재를 믿지 않았거나, 혹은 어떤 사람들처럼 영이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With regard to the general subject of the life of souls, that is, of novitiate spirits, after death, I may state that much experience has shown that when a man comes into the other life he is not aware that he is in that life, but supposes that he is still in this world, and even that he is still in the body. So much is this the case that when told he is a spirit, wonder and amazement possess him, both because he finds himself exactly like a man, in his senses, desires, and thoughts, and because during his life in this world he had not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or, as is the case with some, that the spirit could be what he now finds it to be.

 

해설

AC.320부터 AC.323까지는 창세기 4장의 속뜻으로 들어가기 전에 삽입된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라는 짧은 연속 기사입니다. 앞의 AC.314-319에서 사람이 영생에 들어가는 과정에 관한 여러 경험을 소개했다면, 여기서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좀 더 일반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AC.320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기 존재가 단절되었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자신이 저세상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음 이후의 삶이 지상의 의식과 전혀 연결되지 않은 낯선 존재 상태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나’라는 분명한 자각 가운데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순하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감각과 욕구, 생각’에 있어서 자신이 이전과 똑같이 한 인간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고, 무엇인가를 원하고 사랑하며, 주변의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오히려 놀라게 됩니다. 지상에서는 영을 육체를 잃은 희미한 존재처럼 생각했는데, 실제로 영이 되고 보니 자신이 여전히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죽음으로 없어지는 것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입고 있던 육체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애정, 곧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내적인 생명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죽음은 ‘존재하던 사람이 없어지고 전혀 다른 존재가 생기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계의 육체를 벗고도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 있음을 발견하는 사건입니다.

 

특히 AC.320은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영’에 대한 막연한 관념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은 영을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나 의식만 남은 어떤 것으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언하는 영은 그렇게 막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죽은 사람 자신이 ‘나는 전과 똑같은 사람인데 무엇이 달라졌다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만큼 자기 존재와 감각과 사고의 연속성을 경험합니다. 이어지는 AC.321-323에서는 이 점이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AC.320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은 ‘죽으면 내가 없어지는가?’가 아니라 ‘육체를 벗은 뒤에도 계속 살아가는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원하고 사랑하는 내가 계속된다면, 지금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내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AC.320 자체의 초점은 아직 사후의 심판이나 천국과 지옥의 결정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먼저 확실하게 말하려는 것은 훨씬 기본적인 사실입니다. 육체의 죽음으로 인간의 의식과 인격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전히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20은 이후 이어질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설명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문과 같습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은 희미하고 추상적인 상태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보고 느끼고 원하고 생각하는 ‘나’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소멸이 아니라, 사람이 육체를 벗은 뒤에도 자신의 생명이 계속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경계입니다.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심화 1. ‘soul’과 ‘spirit’ ‘soul’과 ‘spirit’의 차이가 뭔가요? 그리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은?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

bygrace.kr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

bygrace.kr

 

 

 

AC.321, 창4 앞, 육체를 벗은 뒤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은 더욱 뛰어납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 기능을 누리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bygrace.kr

 

AC.319, 창3 뒤, ‘두 번째 사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9 나는 또 다른 한 사람도 보았는데, 그는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5 심화

1. ‘태고 시대’

 

AC.45에는 ‘태고 시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이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석기 시대, 동굴 생활, 돌도구, 사냥과 채집 같은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곧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게 원시적인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와 의지의 상태를 동물로 표현할 만큼 깊은 영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태고 시대’와 현대의 역사학·고고학에서 사용하는 시대 구분을 그대로 같은 것으로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의 선사시대 구분은 주로 도구, 생활 방식, 유물과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반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태고 시대를 말할 때 스베덴보리의 주된 관심은 그러한 기술사적 분류가 아니라 ‘태고교회’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 사람들은 영적으로 깊었다’는 말을 ‘석기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높은 영적 상태에 있었다’는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AC.45도 그런 역사학적 주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표현 방식입니다. 이 둘을 구별해 두면 현대 고고학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불필요하게 정면충돌시키지 않고 그의 글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특별히 돌리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퍼셉션’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이 무엇이 선하고 참인지 교리와 지식을 통해 배우고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방식과는 다른 내적인 지각을 가리킵니다. AC를 계속 읽으면 태고교회와 퍼셉션의 관계가 훨씬 자세하게 설명됩니다. 따라서 AC.45의 ‘태고 시대 사람들’이라는 표현도 그러한 전체 문맥 안에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동물들을 가지고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을 표현했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AC.45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고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상징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며, 그와 같은 표현이 이후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 전체에도 계속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들의 구체적인 언어생활이나 의사소통 방식을 상상하여 복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추상어가 없어서 동물 그림으로 말했던 원시인들’이라는 뜻도 아니고, 반대로 모든 태고교회 사람이 오늘날의 신학자보다 더 많은 교리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과 ‘영적 상태의 깊이’를 같은 척도로 재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자연과학, 역사, 언어, 기술에 관해 과거 사람이 알지 못했던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현대인이 그만큼 더 깊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의 높은 영적 상태를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현대 과학과 기술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두 종류의 ‘앎’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AC를 읽는 데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류의 역사를 단순히 ‘옛날에는 무지했고 오늘날은 발전했다’는 한 방향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지식과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것과, 인간의 내적 상태가 주님을 향해 얼마나 열려 있는가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저술에서 태고교회가 높은 상태로 묘사되는 것을 현대의 기술 발전에 대한 부정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태고교회를 낭만적인 ‘완전무결한 황금시대’로 만드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이하와 AC의 설명을 따라가면 바로 그 태고교회 안에서도 인간의 proprium이 강해지고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모든 사람이 완전했던 시대’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이후의 설명과 맞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특별히 태고교회의 초기 상태와 그들에게 있었던 천적인 성질과 퍼셉션이지, 아주 먼 옛날이라는 시간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AC.45에서 ‘태고 시대’를 만났을 때 ‘석기 시대와 어떻게 맞지?’라는 질문에 너무 오래 붙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이렇게 구별하면 충분합니다. 현대 역사학의 시대 구분은 인간의 외적인 생활과 물질문화를 중심으로 하고,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태고 시대는 태고교회와 관련된 인간의 영적 상태를 중심으로 합니다. 두 설명은 애초에 같은 질문에 답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AC.45의 문장도 훨씬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원시인들이 놀랍게도 고등 신학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인간의 이해와 의지에 속한 내적인 것들을 동물들을 통해 표현했으며, 그러한 상징적 표현이 이후 말씀에도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자연의 형상과 인간의 내적 상태 사이의 관계를 오늘날과는 다르게 지각했던 태고교회의 영적 상태가 놓여 있습니다.

 

 

 

AC.45, 창1:24-25, ‘짐승으로 드러나는 마음 : 애정과 욕정의 질서화’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4 심화

1. 왜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 이 책은 처음부터 계속 선과 진리 이야기인가?’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그리고 이제 AC.44에서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까지 비슷한 구도가 계속 나타납니다. 창세기에는 빛과 어둠, 물과 땅, 풀과 나무, 해와 달, 물고기와 새, 짐승이 나오는데,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다시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이야기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질문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질문을 잘 이해하면 앞으로 AC를 읽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수많은 교리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두 주제로 골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생명과 거듭남을 설명할 때 이 둘의 관계가 매우 근본적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인간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람에게는 무엇인가를 알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면이 있고,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원하며 행하는 면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크게 이해와 의지로 구별합니다. 진리는 이해와 특별히 관계되고 선은 의지와 특별히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진리 = 이해, 선 = 의지’라는 기계적인 공식으로만 외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좋아하고 원하여 실제로 행하는 것이 하나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AC.44가 바로 그 문제를 매우 실제적인 언어로 보여 줍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사람은 들으면서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참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신앙을 말하면서도 그 신앙에 따라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문제는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라 ‘내가 아는 진리가 내가 사랑하고 행하는 선과 하나가 되어 있는가?’라는 삶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창세기 1장을 설명하면서 이 문제가 계속 나타날까요? 지금 스베덴보리가 창조 이야기를 한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속뜻으로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비치고, 서로 다른 것들이 구별되고, 지식이 생기고, 그 지식들이 살아나며, 마침내 이해에 속한 것뿐 아니라 의지에 속한 것들도 새롭게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날들이 진행될수록 선과 진리의 관계도 같은 모습으로 단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다른 단계에서 나타납니다.

 

이 점에서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 ‘행함과 들음’을 완전히 같은 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며 사용되는 문맥도 다릅니다. 그러나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진리와 관계되고 사랑은 선과 관계되며,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계되고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그래서 AC를 읽다 보면 서로 다른 용어들이 계속 선과 진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연결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천국을 설명할 때도 선과 진리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생명은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 상태도 아니고, 막연히 좋은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태도 아닙니다. 천사들의 생명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들이 결합된 삶과 관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도 결국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 설명에서 계속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말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다룬다고 봅니다. 따라서 말씀 속의 수많은 자연물과 사건이 속뜻에서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의 여러 상태와 관계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모든 단어를 ‘이것은 선, 저것은 진리’라는 두 칸짜리 표에 넣어 해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응은 훨씬 다양하고 문맥에 따라 세밀하게 달라집니다. 다만 그 다양한 상응들이 결국 사람의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의 상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선과 진리는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경쟁 구도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만 착하면 진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무엇이 선인지 알기 위해 진리가 필요하고, 알게 된 진리는 실제 선한 삶을 향해야 합니다. AC.44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 사람 안에 심겨야 한다고 한 뒤 곧바로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결합을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AC에서 선과 진리가 계속 등장하는 것을 ‘또 같은 이야기’라고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번에는 선과 진리의 관계가 거듭남의 어느 단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라고 물으며 읽으면 좋습니다. 창조 첫째 날의 빛에서 말하는 진리와 여섯째 날의 이해와 의지의 관계는 똑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됨에 따라 같은 근본 문제가 점점 더 깊은 차원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계속 말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람의 영적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과 깊이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를 읽을 때 선과 진리가 또 나왔다고 생각하기보다, ‘이번에는 이 둘이 어떻게 만나고 있으며, 아직 무엇이 분리되어 있고, 거듭남이 그것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어 가는가?’라고 살펴보면 글의 흐름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끝까지 선, 진리 이야기만 한다’는 첫인상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같은 두 단어를 되풀이하는 책이라기보다, 인간의 내면이 주님에 의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지를 선과 진리의 관계를 통해 아주 오랫동안, 여러 각도와 여러 단계에서 추적하는 책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AC.44, 창1:24-25, ‘지식에서 생명으로 : 이해와 의지가 하나 될 때 나타나는 참된 신앙’(AC.44-48)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2 심화

1.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가?

 

AC.42를 처음 읽으면 놀라운 장면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겔29:3의 바로와 큰 악어, 겔32:2의 바다와 강을 휘젓는 악어, 사27:1의 리워야단과 바다의 용, 렘51:34의 삼키는 큰 뱀을 차례로 인용하면서 그것들이 기억 지식과 그 일반 원리, 그리고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는 상태와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속뜻을 단순한 개인적 성경 연구의 결과라고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저작 전체의 전제 자체가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 안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내적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주님의 자비로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말씀의 내적 의미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고 이해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러면 주님이나 천사가 옆에서 한 문장씩 불러 주었고 스베덴보리는 받아 적었는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저술에는 영들과 천사들과의 대화,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 어떤 것의 의미를 지각하거나 알도록 허락받았다는 진술 등이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모두 하나의 방식으로 묶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천사가 구술한 책이다’라고 말하면 그의 저술 방식 자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반대로 ‘성경을 펼치면 속뜻이 화면처럼 눈앞에 자동으로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실제로 보고 들었다고 기록한 경험과, 말씀의 내적 의미를 해설하는 작업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지만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어떤 한 절의 속뜻을 알게 되는 모든 순간에 정확히 어떤 인식 과정이 일어났는지를 우리가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일관된 상응의 연결’입니다. 예를 들어 AC.42에서 큰 물고기가 기억 지식의 일반적인 것을 뜻한다고 한 뒤, 스베덴보리는 그 뜻을 한 구절에만 기대지 않습니다. 여러 선지서의 서로 다른 구절을 가져와 같은 상징이 문맥에 따라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으로 AC를 계속 읽으면 물, 땅, 씨, 나무, 빛, 새, 짐승, 애굽, 앗수르, 바벨론 같은 표현들이 한 번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서 서로 연결되어 해석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속뜻을 ‘단어마다 비밀 암호 하나가 붙어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물고기=기억 지식’, ‘새=이성적인 것’이라는 대응표를 외운 뒤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같은 표현도 문맥과 그것이 놓인 관계, 긍정적 또는 부정적 의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AC.42에서 ‘큰 바다짐승’이 좋은 창조의 일부로 등장하면서도, 선지서에서는 인간 자신의 지혜와 결합된 부정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내는 비유적 해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의 설명에서 상응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그에게 속뜻은 ‘이 구절을 오늘 내 삶에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겠다’는 설교적 적용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는 그의 해석에 동의할 것인지 검토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성경에 재미있는 상징적 의미를 덧붙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스베덴보리의 속뜻 설명을 읽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가 계시를 받았다고 했으니 아무것도 묻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한 구절만 떼어 놓고 ‘문자만 보면 이런 뜻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며 즉시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AC를 계속 읽으면서 그가 같은 상징을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서로 다른 구절의 해석이 일관되는지, 앞뒤의 교리적 맥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42의 겔32:2가 좋은 사례입니다. 그 한 절만 처음 보면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라는 해석은 매우 갑작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AC.40-42에서 물고기와 큰 물고기, 기억 지식과 그 일반적인 것, 인간의 지혜와 지성이라는 연결을 차례로 읽고 나면 적어도 스베덴보리가 어떤 구조 안에서 그 구절을 읽고 있는지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AC 전체를 더 읽을수록 그 연결이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는지 검토할 수 있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가?’라는 질문에는 두 층의 답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말씀의 내적 의미는 인간의 독창적인 추론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시가 매 구절마다 정확히 어떤 심리적·지각적 과정으로 전달되었는지를 우리가 하나의 공식으로 재구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의 저작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영계와의 열린 교통을 주장했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님으로부터 밝혀졌다고 증언했으며, 그것을 방대한 성경 구절과 상응의 연결 속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어떻게 이런 뜻이 나오지?’라는 어리둥절함을 그대로 가지고 읽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 질문을 가지고 계속 읽는 것이 좋습니다. 한두 구절에서 모든 것을 납득하려 하기보다 AC 전체를 따라가면서 같은 상응이 어떻게 되풀이되고, 문맥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며, 전체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것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검토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 기억 지식을 묶는 일반 원리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1 심화

1. ‘천사적 영’

 

AC.41에 ‘천사적 영’(angelic spirit)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 읽으면 조금 낯섭니다. ‘천사’라는 것인지 ‘영’이라는 것인지, 혹은 천사와 영 사이에 또 다른 종류의 존재가 있다는 뜻인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천사적 영’을 단순히 ‘천사를 다른 관점에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의 존재들을 설명하면서 ‘영들’(spirits),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 ‘천사들’(angels)이라는 표현을 문맥에 따라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따라서 ‘angelic spirit’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것을 곧바로 ‘angel’과 완전히 같은 말로 바꾸어 읽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천사적 영’을 천사와 영 사이에 존재하는 완전히 별개의 제3종족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생물학적 종과 같은 구별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후의 인간을 ‘영’, ‘천사적 영’, ‘천사’ 등으로 말할 때에는 그 존재의 상태와 그가 속한 사회, 그리고 설명하고 있는 문맥이 함께 고려됩니다. 따라서 ‘천사적 영’이라는 표현에는 적어도 일반적인 ‘영’보다 천사적인 상태와 성질에 가까운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AC.41에서는 왜 굳이 ‘천사적 영’을 언급했을까요?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사실 ‘천사적 영이 정확히 어느 계층에 속하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글의 중심은 ‘생명’입니다. 사람의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 생명이 없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그 실제적인 예로 천사적 영의 말과 생각을 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적 영의 말 하나하나와 생각 하나하나, 심지어 생각의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그 가장 작은 것 안에도 ‘주님에게서 나오는 애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대목을 읽을 때 우리의 관심도 ‘천사적 영은 천사인가 영인가?’라는 존재 분류에만 머물기보다, ‘왜 그의 생각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살아 있다고 하는가?’라는 AC.41의 본래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AC.41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독법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글에는 사후세계의 여러 존재와 상태를 가리키는 낯선 명칭들이 등장합니다. 그런 표현의 정확한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필요하지만, 한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곧바로 완성된 영계의 계층표를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그 글이 지금 말하려는 중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AC.41에서 ‘천사적 영’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천사적 영’을 ‘천사와 완전히 같은 존재를 달리 부르는 말’이라고 고정하지도 않고, ‘천사와 영 사이의 별도 종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선은 ‘천사적인 상태와 성질을 가진 영적 존재를 가리키는 스베덴보리의 표현’ 정도로 이해하면서, AC.41의 핵심인 ‘주님에게서 오는 애정이 생각과 말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살아 있게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면 충분합니다. 이후 AC를 계속 읽으면서 스베덴보리가 ‘영’, ‘천사적 영’, ‘천사’를 실제로 어떤 문맥에서 구별하여 사용하는지를 차츰 더 정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AC.41, 창1:20, ‘참된 생명의 근원 : 주님에게서 오는 것만이 살아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0 심화

1.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면 이성적인 것은 겉 사람에 속할까?

 

AC.40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걸리는 문장이 있습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이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영문은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입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면, 앞의 이성적인 것들은 겉 사람에 속한다는 뜻인가?’

 

먼저 문장 자체가 무엇을 분명하게 말하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라는 두 가지를 말한 뒤 ‘the latter’, 곧 ‘후자’가 속 사람에 속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후자’는 ‘intellectual things’, 곧 ‘지적인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AC.40이 직접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반대편 명제까지 만들어 ‘그러므로 이성적인 것들은 겉 사람에 속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40은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짧은 문장이지만 AC를 읽을 때 상당히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빈자리를 대칭적으로 채워 넣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새들’이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특별히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고 덧붙였을까요?

 

AC.40의 문맥에서 먼저 분명한 것은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과 ‘새들’ 사이의 차이입니다. 물에서 번성하는 것들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뜻합니다. 반면 새들은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물고기와 새의 차이를 통해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과, 그것을 넘어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인간의 더 높은 능력이 구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구절 하나를 외우고 있다는 것과 그 구절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앞의 것은 기억 지식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뒤의 것은 이성적·지적인 활동과 관계됩니다. 물론 이것은 AC.40의 대응을 이해하기 위한 쉬운 예이지, rational과 intellectual을 각각 이렇게 정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는 말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참된 영적 이해는 단순히 외부에서 정보를 많이 축적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필요하지만,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 속 사람의 지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40은 적어도 이 둘의 층위가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rational’과 ‘intellectual’의 차이를 현대 심리학의 두 가지 사고 기능처럼 간단히 정의하려고 하면 오히려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rational은 논리적으로 계산하는 능력이고 intellectual은 마음 깊이 진리를 직관하는 능력이다’라고 고정하면 이해하기는 쉬워 보이지만, AC.40은 그런 정의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rational은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의 중간 영역이다’라고 이번 한 문장만으로 확정하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여러 글에서 인간의 rational과 intellectual,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훨씬 더 세밀하게 다룹니다. 그 전체 설명을 따라가야 두 용어의 관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40에서는 먼저 본문이 말하는 만큼을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고기는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나타냅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새’가 왜 물고기와 함께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지도 조금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 안에는 단순히 기억에 저장된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더 높은 차원의 활동도 있습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인간의 여러 능력도 살아 있는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 문장은 앞으로 AC를 계속 읽게 만드는 작은 예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성적인 것은 정확히 어디에 속하는가?’, ‘이성적인 것과 지적인 것은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에 AC.40 한 문장으로 성급하게 답을 만들어 넣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인간의 내적 구조를 더 펼쳐 보일 때까지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간단합니다.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고 했으므로 이성적인 것들은 곧 겉 사람에 속한다는 뜻인가?’

 

AC.40만 놓고 보면 ‘그렇게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명시적으로 말하는 것은 후자, 곧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성적인 것의 정확한 위치와 역할은 더 넓은 AC의 설명 속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본문이 말하는 것과 우리가 거기서 추론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AC를 오래 읽어 가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때로는 조금 덜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말한 것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이 됩니다.

 

 

 

AC.40, 창1:20, ‘지식과 지성이 살아나는 순간 : 물고기와 새로 나타나는 거듭난 생명’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9 심화

1. 왜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실까?

 

AC.39에서 특히 마음에 오래 남는 문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십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으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분명히 알게 하지 않으실까요? 왜 사람이 ‘내가 선을 행한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허락하실까요?

 

AC.39은 그 이유를 직접 말합니다. 그 단계의 사람은 ‘달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는 나중에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마침내 퍼셉션하도록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사람을 일부러 속여 ‘네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고 가르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문이 사용하는 말은 ‘허락하신다’(permit)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듭남의 처음부터 자기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을 깊이 알고 살아갈 수 있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가 현재 생각할 수 있는 상태에서부터 출발하도록 허락하시고, 거기서부터 점차 더 깊은 인식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은 AC.39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영적 상태를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서부터 거듭남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사람은 실제로 ‘내가 공부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선을 행한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AC.39은 그런 인간의 활동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실제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는 가운데, 그 근원에 대한 인식이 점차 달라지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내가 행하는 이 선의 근원은 정말 나 자신인가?’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을 먼저 ‘믿게’ 됩니다. AC.39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중에는 그것을 ‘퍼셉션’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완전한 퍼셉션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고 믿는 상태’를 지나, 마침내 그것을 더욱 내적으로 퍼셉션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AC.39은 바로 이 과정을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끄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선은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9의 관심은 인간의 행동을 없애는 데 있지 않고, 그 행동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 그것을 자기 고유의 선으로 여기지 않는 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점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AC.39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노력해서 선한 사람이 되었다’고 모든 것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도 AC.39이 향하는 방향과 다릅니다. 사람은 실제로 배우고 선택하고 행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안에 있는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글들에서는 이것이 나중에 ‘마치 자기로부터인 것처럼’ 행한다는 중요한 원리와 더욱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AC.39 자체에서는 아직 그 전체 교리를 펼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먼저 주님께서 사람의 현재 상태를 허락하시고,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퍼셉션하는 데까지 이끄신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허락하신다’는 한 단어가 참 깊게 다가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처음부터 완성된 영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듭남을 시작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자기에게서 생각하고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여기는 바로 그 상태에서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씩 이끌어, 마침내 선과 진리의 참된 근원을 알아보게 하십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그때는 정말 내가 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안에서도 주님께서 나를 이끌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라는 감사가 생길 수 있습니다. 다만 개별 사건 하나하나에 대해 ‘이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이다’라고 우리가 섣불리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9이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은 더 근본적인 사실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을 시작하시고,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에게서 찾던 상태에서 그것을 주님에게서 인정하는 상태로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AC.39의 이 짧은 문장은 인간의 미숙함을 정죄하는 말이라기보다, 그 미숙함 속에서부터 사람을 이끄시는 주님의 자비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이 아직 ‘내가 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단계에서도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은 자기가 선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선을 행하고, 자기가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내가 한다’는 자기 공로에서 ‘주님으로부터 받는다’는 인정으로 옮겨 가는 것, AC.39이 보여 주는 살아남의 과정에는 바로 이러한 깊은 변화가 들어 있습니다.

 

 

 

AC.39, 창1:20, ‘비로소 살아나는 신앙 : 주님이 행하심을 알 때 시작되는 생명’(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8 심화

1. 넷째 날 요약, 정리

 

창1:14-19의 넷째 날에 해당하는 AC.30-38을 여기까지 읽고 나면 여러 내용이 한꺼번에 등장해서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순종, 교대와 다양함, 낮과 밤, 빛과 어둠이 연이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넷째 날이 끝나는 이 지점에서 전체 흐름을 한 번 묶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넷째 날은 ‘빛이 처음 생기는 날’이라고 이해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빛은 이미 첫째 날에 등장했습니다. 넷째 날에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광명체들’입니다. 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랑과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빛을 비추고 삶을 이끌게 되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이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AC.31-34를 지나면서 이 점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영적 생명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를 말하면서 사랑을 더 큰 것으로 두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사랑에서 옵니다.

 

이것은 ‘사랑만 있으면 진리나 신앙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다만 그 질서에서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넷째 날의 해와 달은 바로 이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많이 알고 말하는 것만으로 영적 생명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삶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별들도 등장합니다. 별은 신앙에 속한 여러 지식과 진리들을 나타냅니다. 해와 달과 별을 함께 보면 넷째 날의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사람 안에 단지 하나의 막연한 ‘종교적 느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과 그것에 속한 여러 진리가 서로 관계를 이루면서 영적 삶을 비추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33에서는 이 빛의 근원이 더욱 깊이 설명됩니다. 사람의 생각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 하나가 아니라 인간 생명의 중심과 관계된 것입니다. 넷째 날에 큰 광명체인 사랑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도 이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4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다시 강조됩니다. 사랑 없는 신앙, 곧 삶과 분리된 신앙은 참된 의미의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넷째 날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분명해집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머릿속에 많이 저장하는 과정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AC.35에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인간의 두 능력인 ‘의지’와 ‘이해’가 등장합니다. 사람은 의지하고 이해하는 존재이며, 이 두 능력은 본래 하나의 생명을 이루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의지와 이해의 관계가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주님의 자비로 사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보존되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악한 의지가 원하는 것과 다른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거듭남의 길이 열립니다.

 

이 대목은 넷째 날의 사랑과 신앙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다는 말을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옳다고 믿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처음부터 선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사람을 가르치시고, 사람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며 점차 의지와 삶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참된 결합은 악한 의지와 거짓된 생각의 일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AC.36은 그래서 신앙을 ‘순종’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단순히 무엇을 알고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특별히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중심에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둡니다. 여기서도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신앙한다고 말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어떤 사랑과 삶으로 나타나는가가 중요합니다.

 

AC.37에서는 창1:14의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로부터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이라는 중요한 원리를 설명합니다. 자연계에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이 있고,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있듯이 영적 생명에도 서로 다른 상태들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이 획일적이 되어 생명이 없게 되고, 선과 진리도 분별되거나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것을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침체와 혼란과 악을 경험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7이 말하는 것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와 다양함’입니다. 따라서 모든 영적 후퇴나 악한 상태를 주님께서 성장시키기 위해 주신 필수적인 계절이라고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이 변화 없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을 가진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AC.38에서는 넷째 날을 마무리하면서 네 가지 대응을 매우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낮’은 선, ‘밤’은 악, ‘빛’은 진리, ‘어둠’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들은 ‘낮의 일’, 악한 것들은 ‘밤의 일’이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요3:19, 21을 인용하여 빛과 어둠이 인간이 받아들이는 진리와 거짓, 그리고 그의 삶과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AC.37의 ‘밤’과 AC.38의 ‘밤’을 기계적으로 똑같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37에서는 하루의 변화 전체가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지만, AC.38에서는 낮과 밤의 대조를 통해 선과 악을 나타냅니다. 말씀의 상응은 단어 하나에 언제나 하나의 뜻만 붙여 놓은 고정된 암호표가 아니라, 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이렇게 AC.30-38을 한 흐름으로 놓고 보면 넷째 날의 중심이 보입니다. 앞선 과정에서 사람이 선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였다면, 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광명체처럼 세워지고 영적 삶을 비추며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된 두 생명이 아니라 하나를 이루어야 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고 순종과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을 단순히 ‘해와 달과 별의 창조’라고만 읽으면 그 속뜻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이 날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점차 살아 있는 빛으로 자리 잡고,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더욱 분명히 구별되며, 영적 생명이 그 빛 아래서 질서를 이루어 가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넷째 날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광명체처럼 세워져 영적 삶을 비추고 다스리며,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살아 있는 질서를 이루어 가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AC.38, 창1:18-19, ‘낮과 밤의 분별 : 행위로 드러나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기준’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