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

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be used to denote time itself. As in Isaiah: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사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사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날’(day)이 시간을 뜻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또한 그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As “day” is used to denote time, it is also used to denote the state of that time, as in Jeremiah: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렘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렘3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33:20, also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해설

AC.23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날’(day)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해석 원리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가 처음부터 ‘날은 곧 상태다’라고 단순하게 등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에서 ‘날’이 문자적인 하루를 넘어 ‘시간 자체’를 나타내는 용례가 매우 흔하다고 설명하고, 이어서 날이 시간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 시간의 상태’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23의 논리는 ‘날은 하루가 아니다’라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날 → 시간 → 그 시간에 속한 상태’로 깊어지는 구조입니다.

 

첫 번째 증거군은 사13:6, 9, 13, 22와 사23:7, 15입니다. 사13장에는 ‘여호와의 날’,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는 표현들이 이어지며, 특히 마지막에는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고 하여 ‘때’와 ‘날들’이 나란히 사용됩니다. 여기서 ‘날’은 단순한 24시간 하나를 가리키는 말로 제한되지 않고 어떤 사건과 상태가 펼쳐지는 때를 나타냅니다. 사23장에서도 ‘옛날’, ‘그날’,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이라는 시간 표현들이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두로, 왕, 칠십이라는 각각의 상응을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 ‘날’이라는 말이 하루보다 넓은 시간과 시대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AC.23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날’이 시간을 나타내므로 또한 ‘그 시간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용되는 첫 구절이 렘6:4의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입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실제 하루가 저물어 가는 모습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때의 상황과 상태를 함께 담아냅니다. 바로 앞 AC.22에서 ‘저녁’과 ‘아침’이 각각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한 것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따라서 시간의 표현은 말씀 안에서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렘33:20, 25의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 그리고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라는 표현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도 낮과 밤은 실제 자연의 시간 질서를 배경으로 하지만, 스베덴보리가 AC.23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낮과 밤에 ‘그 때’가 있으며 시간의 표현이 그에 속한 상태와 결부되어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 곧바로 낮과 밤을 시험과 회복의 모든 교대에 일대일로 대응시키거나, 거듭남의 모든 과정에 대한 별도의 섭리 법칙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주제들은 해당 내용을 직접 다루는 다른 AC 문맥에서 살피는 편이 안전합니다.

 

애5:21의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는 ‘날’과 ‘상태’의 관계를 특히 이해하기 쉽게 보여 줍니다. 지나간 달력의 날짜 자체를 다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날들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그 날들에 속했던 삶과 상태가 새로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더구나 바로 앞에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라는 기도가 놓여 있으므로, 여기서 새롭게 되기를 구하는 것은 단순한 시간의 회귀가 아니라 주님께로 돌이켜지는 삶의 회복과 연결됩니다. 다만 AC.23은 여기서 ‘옛적’을 곧바로 태고교회라고 해설하지 않으므로, 이 구절의 직접적인 역할도 ‘날들이 그 날들에 속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AC.23이 왜 AC.22 바로 뒤에 놓이는지도 분명해집니다. AC.22에서는 ‘저녁’과 ‘아침’이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내며,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상태에서 주님께 속한 상태로 나아가는 질서가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AC.23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창1에서 반복되는 ‘날’ 자체가 단순한 시간 단위에 머물지 않고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말씀 전체의 용례를 제시합니다. 따라서 창1의 ‘첫째 날’, ‘둘째 날’과 이어지는 날들을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로 읽는 것은 ‘날’이라는 단어에 임의로 새로운 뜻을 붙인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시간과 상태가 결부되어 표현되는 방식을 따라 읽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AC.23을 근거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날’을 언제나 기계적으로 ‘영적 상태’라고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곳에서는 실제 하루가 중심일 수 있고, 어떤 곳에서는 더 넓은 시간이나 시대가 중심일 수 있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그 시간에 속한 상태가 함께 표현됩니다. 중요한 것은 문맥입니다. AC.23이 보여 주는 것은 ‘날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상태만을 뜻한다’는 상응 사전식 공식이 아니라, 말씀에서 시간의 표현이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함께 담을 수 있다는 해석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창세기 1장의 전체 구조와 만날 때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AC.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1의 여섯 날을 인간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인 상태라고 이미 제시했습니다. AC.23은 이제 여러 선지서의 용례를 통해 ‘날’이라는 말 자체가 그러한 읽기를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1의 날들은 단순히 시계로 계산되는 여섯 개의 시간 단위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차례로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의 상태들로 읽힙니다.

 

결국 AC.23의 핵심은 ‘시간을 버리고 상태만 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에서는 시간과 상태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시간의 이름이 그 시간에 속한 영적 상태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1의 ‘날’을 읽을 때도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가?’라는 질문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 날은 거듭나는 사람의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가?’라고 물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AC.23이 창조의 날들을 거듭남의 날들로 읽도록 열어 주는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AC.23 해설)

 

 

 

AC.24, 창1:6-7(AC.24-25), ‘궁창의 구별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때’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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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 창1:5(AC.22-23), ‘저녁에서 아침으로 : 사람의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나아가는 첫 날의 질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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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저녁’은 모든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늘의 상태, 곧 거짓의 상태이며 신앙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모든 이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빛의 상태, 곧 진리의 상태이며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저녁’은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하지만,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다윗을 통해 하신 다음 말씀과 같습니다. What is meant by “evening” and what by “morning” can now be discerned. “Evening” means every preceding state, because it is a state of shade, or of falsity and of no faith; “morning” is every subsequent state, being one of light, or of truth and of the knowledges of faith, “Evening,” in a general sense, 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of man’s own; but “morning,” whatever is of the Lord, as is said through David: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 and his word was on my tongue; the God of Israel said, 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 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 when the sun ariseth, even a morning without clouds, when from brightness, from rain, 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 (2 Sam. 23:2–4).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아침’이라 하며, 그분이 오시는 때는 신앙이 없기 때문에 ‘저녁’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니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단8:14, 26)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

 

※ 여기서 ‘주야’에는 원문의 ‘저녁-아침’(evening-morning)이라는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에서 ‘아침’은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곧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In like manner “morning” is used in the Word to denote every coming of the Lord; consequently it is an expression of new creation.

 

해설

AC.22에서 스베덴보리는 창1에서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을 단순한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언어로 해석하는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저녁’은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은 그늘의 상태, 곧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입니다. 반대로 ‘아침’은 이후의 상태로, 빛의 상태, 곧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루가 지나갔다는 뜻을 넘어, 거듭남 가운데 한 상태에서 그 다음 상태로 나아가는 영적 질서를 나타냅니다. AC.20에서 처음 빛이 나타났고 AC.21에서 빛과 어둠이 구별되었다면, AC.22에서는 그 변화의 방향이 ‘저녁에서 아침으로’ 표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대비를 더욱 일반적인 원리로 확장하여 ‘저녁’은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21의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낮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은 밤에 비유된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사람 자신의 것이란 단순히 인간의 개성이나 자연적인 능력 전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여기는 proprium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서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인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가 나온다고 여기던 질서에서 그것들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질서로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 원리를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가 먼저 인용하는 말씀이 삼하23:2-4입니다. 여기서 ‘돋는 해의 아침 빛’, ‘구름 없는 아침’,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이라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AC.22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직접적인 이유는 ‘아침’이 빛과 생명이 나타나는 상태를 표현한다는 것을 말씀 자체에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아침의 빛 아래 새 풀이 돋아나는 모습은 빛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이 나타나는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만을 근거로 ‘새 풀’을 퍼셉션이나 특정한 영적 기능에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붙드는 중심은 ‘아침’입니다. 아침은 주님께 속한 빛이 나타나는 상태이며, 그 빛 아래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상태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개인의 거듭남을 넘어 주님의 세상 오심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아침’이라 하고, 그분이 오시는 당시의 상태는 신앙이 없었으므로 ‘저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같은 사건을 모순되게 저녁과 아침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기 직전의 상태를 그 근본적인 신앙의 결핍 때문에 ‘저녁’이라 하고, 바로 그 상태 가운데 주님께서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된 것을 ‘아침’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질서는 한 개인의 거듭남뿐 아니라 교회의 황폐와 주님의 오심이라는 더 큰 차원에서도 적용됩니다.

 

이 대목에서 단8:14, 26이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이천삼백 주야까지니’라고 번역하지만, 히브리어 표현에는 ‘저녁’과 ‘아침’이 들어 있으며 Potts 역시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이라고 옮겨 AC.22의 논지를 드러냅니다. 더구나 단8의 문맥에서는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며 진리가 땅에 던져지는 황폐의 상황과, 이후 성소가 정결하게 되는 회복이 함께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단순히 ‘저녁’과 ‘아침’이라는 단어가 우연히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신앙과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진 상태와 그 뒤의 회복이라는 문맥이 ‘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영적 질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다만 단8의 ‘이천삼백’을 AC.22에서 별도의 예언 시간표로 풀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기서는 그 숫자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초점은 신앙이 없는 상태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는 상태가 ‘아침’이라는 데 있으며, 이를 통해 주님의 오심을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22에서 단8:14, 26을 읽을 때도 숫자의 계산보다 ‘저녁에서 아침으로’, 곧 황폐한 상태에서 주님의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되는 구조를 붙드는 것이 본문의 논지에 더 충실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AC.22 전체를 하나로 묶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아침’이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며, 따라서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모든 오심’은 주님의 역사적 성육신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오심으로 이전의 어두운 상태에 빛이 시작되고 새로운 질서가 열리는 모든 경우에 ‘아침’이라는 영적 표현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아침은 새로운 창조의 표현이 됩니다. 창1의 창조가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설명과도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22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는 단순히 어두웠다가 밝아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 자신의 것에서 주님께 속한 것으로,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에서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로 나아가는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의 오심이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밤을 아침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심으로 아침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교회의 회복에서도 ‘아침’이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이유입니다. (AC.22 해설)

 

심화

1. ‘왜 스베덴보리는 단8:14, 26의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 심화 1, ‘왜 스베덴보리는 단8:14, 26의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 심화1. ‘왜 스베덴보리는 단8:14, 26의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를 처음 읽을 때 가장 어리둥절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단8:14, 26의 인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을 때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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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 창1:5, ‘날이 뜻하는 시간과 상태 : 거듭남의 날들을 읽는 원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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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 창1:4-5, ‘빛과 어둠의 분별 : 주님에게서 난 것은 낮,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밤’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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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4, 5)

 

AC.21

‘빛’(light)은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선’(good)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둠’(darkness)은 사람이 새로 잉태되고 다시 태어나기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악이 선처럼 보였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어둠이며, 단지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proprium에 속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아직 남아 있는 것들입니다.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낮’(day)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은 어둠에 속하므로 ‘밤’(night)에 비유됩니다. 이러한 비유들은 말씀에 자주 나옵니다. 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해설

AC.21은 바로 앞 AC.20에서 처음 나타난 ‘빛’이 무엇이며, 그 빛이 이전의 ‘어둠’과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설명합니다. AC.20에서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고,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AC.21에서는 그 첫 빛이 비침으로써 이전에는 구별할 수 없었던 두 근원이 드러납니다. 하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1:4의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는 거듭남 가운데 일어나는 매우 중요한 분별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빛’이 선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이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며, 주님은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21에서 선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사람이 그것을 얼마나 선하게 느끼는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칭찬받는가, 심지어 종교적으로 얼마나 경건해 보이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AC.20에서 ‘주님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라고 한 설명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빛이 나타났다는 것은 단지 사람이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참으로 주님에게서 오는지를 분별할 가능성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에 비해 ‘어둠’은 흥미롭게도 처음부터 어둠처럼 보였던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되고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악이 선처럼 보이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어둠인 것들이 ‘빛처럼 보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AC.21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영적인 어둠의 위험은 사람이 언제나 ‘나는 지금 어둠 속에 있다’고 느끼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선이라고 여기고 거짓을 진리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빛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AC.20의 첫 빛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빛이 비치기 전에는 어둠을 어둠으로 분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proprium에 속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proprium을 단순히 인간의 개성, 재능, 성격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문맥에서 말하는 proprium은 사람이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자기에게서 생각하고 의도하며 행하는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상태와 깊이 관련됩니다. 따라서 ‘사람 자신의 것’이 어둠이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자연적 능력이나 개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는 것이 영적으로는 빛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표현은 이러한 것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첫 빛을 받았다고 해서 이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AC.20에서도 사람은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AC.21에서도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어둠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달라진 것은 이제 그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빛 사이에 구별이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첫 단계는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한순간에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이전에는 하나처럼 보였던 것을 주님의 빛 가운데 서로 다른 것으로 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창1:4의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에서 분별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빛으로 자기 어둠을 완전하게 밝혀내는 것이 아닙니다. AC.20에서 빛 자체가 주님에게서 왔듯이,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를 참으로 분별하게 하는 기준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느낌과 판단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빛 안에서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전에는 선처럼 보였던 악과 진리처럼 보였던 거짓이 무엇이었는지 점차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어 창1:5의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낮’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은 어둠에 속하므로 ‘밤’에 비유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도 기준은 근원입니다. ‘낮’은 단순히 기분이 밝거나 신앙생활이 잘되는 때를 뜻하고 ‘밤’은 낙심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때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속한 것은 낮이며,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것은 밤입니다. 이 비유가 말씀에 자주 나온다고 스베덴보리가 덧붙이는 것도 빛과 어둠, 낮과 밤의 이러한 구별이 말씀 전체에서 반복되는 영적 언어임을 보여 줍니다.

 

다만 AC.21에서는 아직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의 의미까지 앞당겨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 AC.22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다룹니다. AC.21의 초점은 먼저 빛과 어둠이 ‘나뉘고’, 그것들이 낮과 밤으로 불린다는 데 있습니다. 첫 빛이 비친 뒤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 구별이 없으면 사람은 여전히 자기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어둠을 빛으로 오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21은 거듭남에서 ‘분별’이 얼마나 근본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전에는 악이 선처럼,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지만 주님의 빛이 비치면서 그 둘이 나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람 자신의 것이 즉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한 번 빛을 보았다는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에게서 오는 것과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을 구별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AC.20이 ‘빛의 첫 인식’을 말했다면 AC.21은 그 빛으로 비로소 시작되는 ‘빛과 어둠의 분별’을 보여 줍니다. (AC.21 해설)

 

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 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 심화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의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현실적인 인간 경험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거듭남 이전에 악을 언제나 악처럼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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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 창1:5(AC.22-23), ‘저녁에서 아침으로 : 사람의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나아가는 첫 날의 질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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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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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이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선이라 여기고, 그러한 사랑들을 지지하는 모든 것을 진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선들이 악이며, 이러한 진리들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그는 비로소 처음으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며, 또한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주님 자신이 요한복음에서 가르치십니다. The first state is when the man begins to know that the good and the true are something higher. Men who are altogether external do not even know what good and truth are; for they fancy all things to be good that belong to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nd all things to be true that favor these loves; not being aware that such goods are evils, and such truths falsities.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That men ought to know that the Lord exists he himself teaches in John: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또한 주님이 선 자체, 곧 생명이시며, 진리 자체, 곧 빛이시고, 따라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선도 진리도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Also, that the Lord is good itself, or life, and truth itself, or light, and consequently that there is neither good nor truth except from the Lord, is thus declared: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해설

AC.20에서 창1:3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는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를 나타냅니다. 바로 앞 AC.17-19에서는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고, 깊음이 있으며, 그럼에도 주님의 자비가 사람 안에 보존된 리메인스 위에서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빛’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빛은 사람이 스스로 어둠을 헤치고 얻어 낸 깨달음이 아니라, 이미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던 주님에게서 오는 첫 영적 빛입니다. AC.19에서 아직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았던 것이 AC.20에 이르러 비로소 빛 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첫 번째 상태를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더 높은 것’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한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것을 선이라고 여기고, 그러한 사랑을 지지하는 것을 진리라고 여깁니다. 따라서 문제는 그 사람에게 선과 진리에 관한 말이나 지식이 전혀 없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기준으로 선과 진리를 판단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악인 것을 선이라 하고 거짓인 것을 진리라고 여기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의 시작은 무엇인가를 많이 아는 데서보다 ‘내가 지금까지 선이라고 여긴 것이 정말 선인가?’라는 새로운 분별이 시작되는 데서 나타납니다.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처음 일어나는 변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즉시 자기의 모든 악을 보고 완전히 버린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 표현의 정도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도 인정과 칭찬을 원하고, 선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 공로를 마음속에 붙들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AC.20의 직접적인 정의라기보다 그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적용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전에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선을 그대로 선이라고 여겼지만, 이제 처음으로 그 판단 자체가 흔들리고 참된 선의 기준이 자기 자신보다 높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새 생명이 ‘잉태되는’ 최초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두 번째 인식이 열립니다. 곧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AC.20의 두 인식은 서로 연결됩니다.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절대적인 선과 진리의 기준으로 삼던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0의 빛은 단순한 자기반성이나 도덕적 성찰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빛이 깊어질수록 그 인식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먼저 요8:24의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를 인용합니다.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앞 문장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주님 자신이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AC.20에서 지나치게 넓은 구원론이나 특정 교리의 증명 구절로 확대하기보다, 거듭남의 빛이 결국 주님의 존재와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향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삼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요1:1, 3-5, 9의 인용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앞의 요8:24가 ‘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요1의 말씀은 왜 주님이 선 자체와 진리 자체이신지를 밝히는 데 사용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에서 생명과 빛이 주님 안에 있으며,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라는 말씀은 빛의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는 말씀은 AC.16에서 시작된 ‘새 창조’의 주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첫 창조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새 창조에서도 생명과 빛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특히 Potts 본문에 포함된 요1:5의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AC.17-20의 흐름에서 의미가 선명합니다. 앞에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었고, 이제 그 어둠 가운데 빛이 비칩니다. 그러나 이것을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모든 표현이 일대일로 상응한다고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AC.20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요한복음 구절들을 인용한 직접적인 목적은 주님이 생명 자체, 곧 선 자체이시며, 빛 자체, 곧 진리 자체이시므로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참된 선도 진리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빛이 있으라’의 속뜻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따라서 AC.20의 ‘첫 번째 상태’를 AC.7의 첫 번째 상태와 서로 다른 두 체계처럼 나눌 필요도 없습니다. AC.7은 거듭남의 전체 여섯 날을 개괄하면서 첫 상태를 ‘유아기에서부터 거듭남 직전까지의 상태’와 ‘거듭남이 시작되는 상태’로 설명했고, AC.20은 이제 창1:3의 실제 본문을 따라 그 첫 빛이 무엇인지 더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여기서 사람은 갑자기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절대적인 선과 진리로 여기던 상태에서 깨어나 선과 진리가 자기보다 높은 것이며, 더 나아가 그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AC.20에서 ‘빛이 있으라’는 말씀은 거듭남의 매우 작지만 결정적인 전환입니다. 사람은 아직 많은 싸움을 앞두고 있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사라진 것도 아니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온전히 행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전에는 어둠을 어둠으로 알지 못했지만 이제 빛이 비치면서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니었음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빛 안으로 더 들어갈수록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됩니다. 거듭남의 첫 빛은 결국 자신을 더 선한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하는 빛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시선을 돌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게 하는 빛입니다. (AC.20 해설)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 심화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문장으로 읽으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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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 심화 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 심화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의 설명을 실제 인간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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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 창1:4-5, ‘빛과 어둠의 분별 : 주님에게서 난 것은 낮,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밤’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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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수면 위를 품으시는 자비 : 리메인스 위에서 시작되는 거듭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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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또는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 ‘품는다’(brood)고 합니다. 그것이 운행하는 대상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시고 보존해 두신 것들인데, 말씀 전체에서 이것들을 가리켜 ‘리메인스’(remains), 또는 ‘남은 자’(remnant)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 나오는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은 바로 이러한 지식들을 말합니다.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AC.19는 창1:2의 마지막 말씀,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의 속뜻을 밝힙니다. 앞선 AC.17-18이 거듭남 이전의 인간을 ‘혼돈과 공허’, ‘흑암’, ‘깊음’으로 묘사했다면, 여기서는 그처럼 어두운 상태의 인간에게 이미 주님의 자비가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출발점은 사람이 먼저 자신을 고치거나 주님께 올라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버리지 않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자비에 있습니다.

 

‘운행하다’(move), 또는 ‘품다’(brood)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암탉이 자기 알을 품는 모습에 비유합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세부적인 상응을 임의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사람 안에 보존해 두신 것들 위에서 계속 역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현재 상태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아무것도 없는 존재처럼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이 아직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 그 안에 감추어 두시고 보존하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1:2의 마지막 장면은 단순히 흑암 가운데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다는 모습이 아니라,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생명을 자비로 품고 계시는 주님의 역사를 보여 줍니다.

 

그것이 바로 ‘리메인스’(remains), 또는 ‘남은 자’(remnant)입니다. AC.19는 여기서 그것을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는 우선 그 직접적인 설명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동시에 리메인스를 단순히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좋은 추억이나 종교 지식 전체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사람이 자기 힘으로 모아 둔 영적 자산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시고 보존해 두신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후 AC에서는 리메인스가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 순진함과 체어리티에 속한 상태들까지 포함하는 훨씬 깊은 개념으로 펼쳐지지만, AC.19에서는 그 전체 교리를 미리 끌어오기보다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사람 안에 무엇인가를 이미 보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은 무엇일까요? AC.19는 여기의 ‘수면’이 바로 이러한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창1:2의 문자에서는 흑암 아래의 물과 그 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 안에 주님께서 감추어 보존하신 것들과 그 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자비가 나타납니다. 이것을 알고 다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를 읽으면, 이 말씀은 창조 이전의 한 장면을 넘어 주님께서 사람의 거듭남을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AC.19에는 리메인스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중요한 말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18의 ‘황폐’와 연결됩니다. 아직 사람의 겉에 속한 것들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들이 거듭남의 새로운 생명으로 전면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고도 그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선한 것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공로나 명예로 돌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AC.19가 직접 제시한 사례는 아니지만, 왜 사람에게 속한 것이 물러나는 과정과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이 빛 가운데 나오는 과정이 서로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문제는 리메인스 자체가 불안정하거나 쉽게 오염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낼 사람의 외적 상태가 아직 주님의 질서 아래 놓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그러나 ‘황폐해질 때까지 리메인스가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주님께서 그 이전에는 사람 안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창1:2의 그림은 정반대입니다. 아직 ‘빛’도 ‘낮’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영은 이미 수면 위를 운행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직 자기 안에서 분명한 영적 빛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주님의 자비는 이미 그 사람 안에 보존된 것들 위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AC.18의 황폐를 단순히 버림받음이나 파괴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쪽에서는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는 것들이 물러나는 과정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모든 과정 가운데 주님의 자비가 이미 사람 안에 보존하신 것들 위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9는 리메인스 교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현재 모습만 보고 ‘저 사람 안에는 아무런 선도 남아 있지 않다’고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다고 해서 그 모든 세월 동안 주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리메인스가 있다는 사실이 사람의 거듭남을 자동적으로 보장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그 사람이 훗날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을 자비로 준비하고 보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AC.19의 중심은 리메인스라는 개념 자체보다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자비’입니다. 리메인스가 존재하는 것도 주님께서 감추어 보존하셨기 때문이고, 그것들이 훗날 거듭남에 사용되는 것도 주님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1:2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어두우면서도 동시에 희망적입니다. 아직 빛은 나타나지 않았고 사람은 여전히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흑암 속에서도 주님의 자비는 이미 사람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 보존하신 것들 위에서 운행하며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말씀에서 마침내 ‘빛이 있으라’는 새로운 상태가 시작됩니다. (AC.19 해설)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 심화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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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심화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의 Potts 영어에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그 자비가 ‘move’, 또는 암탉이 알을 품듯 ‘brood’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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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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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과 황폐 :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잉태되기까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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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을 뜻하며, 사람은 전적으로 이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또한 그것들 속에 완전히 잠겨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그는 빛이 없으므로, ‘깊음’(deep), 곧 어둡고 혼란한 어떤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말씀 여러 곳에서 ‘깊음’(deeps), ‘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 사람의 거듭남 이전에 그것들은 ‘마르거나’(dried up) ‘황폐해집니다’(wasted). 다음 이사야 말씀처럼 말입니다. The “faces of the 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 of the sea,” 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 “dried 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As in Isaiah: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사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러한 사람은 또한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는 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를 포함하는데, 이는 거듭남에 앞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참된 것을 알 수 있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기 전에,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해설

AC.18은 창1:2의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에서 ‘깊음’(deep)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바로 앞 AC.17에서 ‘혼돈’은 선이 없음, ‘공허’는 진리가 없음, ‘흑암’은 주님 신앙과 영적, 천적 삶에 대한 어리석음과 무지를 뜻한다고 했다면, AC.18은 그 어둠 아래에 있는 사람의 상태를 한층 더 깊이 들여다봅니다. 스베덴보리는 ‘깊음’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 욕정에서 생겨나는 거짓(falsities)이라고 설명하며, 사람은 이것들로 전적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속에 완전히 잠겨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빛이 없는 이 상태의 사람은 ‘깊음’, 곧 어둡고 혼란한 어떤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깊음’은 단순히 사람에게 몇 가지 나쁜 욕망이나 잘못된 생각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 이전에는 욕정과 거짓이 그의 삶과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보여 주는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AC.18의 초점은 인간의 어두운 상태를 묘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여러 곳에서 이러한 사람들을 ‘깊음’ 또는 ‘바다 깊은 곳’이라고 하며,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이 깊음이 ‘마르거나’(dried up) ‘황폐해진다’(wasted)고 말합니다. 여기서 ‘황폐’(vastation)는 AC.18을 이해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 자체를 파괴한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것과 선한 것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 가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서 직접 말하듯,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으려면 먼저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저항하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황폐는 거듭남과 별개의 파괴 과정이 아니라, 새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람을 준비시키시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이것을 악한 성향의 흔적이 사람에게서 완전히 소멸한다는 뜻으로까지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더 이상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고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물러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사51:9-11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에는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여호와의 역사가 나옵니다. AC.18의 문맥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깊은 물’, ‘바다 깊은 곳’, ‘말리다’, 그리고 그곳에 ‘길을 내다’라는 표현입니다. 앞에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과 거짓을 ‘깊음’이라고 했는데, 이사야에서는 바로 그 깊은 물이 말라 길이 열리고 구속받은 자들이 그 길을 건너갑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깊음’이 그대로 보존된 채 그 위에 새 생명이 덧붙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구속의 길을 가로막는 것을 처리하시고 그 가운데 길을 내신다는 AC.18의 설명을 뒷받침합니다. 거듭남의 길은 사람이 자기 욕정과 거짓을 스스로 헤쳐 나와 만드는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깊음을 마르게 하시고 길을 내심으로 열리는 길입니다.

 

사51:9-11의 앞뒤 흐름도 AC.18의 논지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라는 부르짖음 뒤에 바다와 큰 깊음을 말리시는 주님의 능력이 나오고, 그 결과 ‘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한 목적은 단지 ‘깊음’이라는 같은 단어가 성경 다른 곳에도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깊음이 마르고 길이 열리며 구속받은 자가 돌아오는 전체 그림이, 황폐가 왜 거듭남에 앞서 필요한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황폐의 목적은 황폐 그 자체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욕정과 거짓 가운데 버려두시는 것도 아닙니다. 깊음 가운데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가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인용은 AC.18에서 ‘황폐’를 단순한 파괴나 절망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러한 상태의 사람이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자연적 생명이나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천국의 빛에서 볼 때 아직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생명이 그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음을 매우 강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황폐’가 등장합니다. 선지자들이 자주 말하는 인간의 황폐는 거듭남에 앞서며, 그 이유는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되기 전에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8에서 황폐는 단순히 사람이 고난이나 실패를 겪는다는 말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모든 고통을 자동으로 황폐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핵심은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던 것들이 그 지배력을 잃어,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사람 안에 이루실 수 있도록 길이 열리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 ‘옛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AC.18 전체를 압축합니다. 여기서 옛사람의 죽음은 육체적 죽음도 아니고, 인간의 개성이나 자연적 삶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사람을 지배하며 선과 진리의 유입을 거슬러 온 옛 질서가 더 이상 주도권을 쥐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새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가 아니라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라고 한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AC.18은 아직 거듭남의 완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새 생명이 시작될 수 있도록 먼저 길이 준비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창1:2의 ‘깊음’은 절망의 마지막 자리가 아니라 주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기 직전의 자리입니다. 깊음을 마르게 하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옛사람이 물러나고 새 사람이 잉태될 수 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AC.18 해설)

 

심화

1. ‘황폐를 거치면 욕정과 거짓은 정말 없어지는가?’

 

AC.18 심화 1, ‘황폐를 거치면 욕정과 거짓은 정말 없어지는가?’

AC.18 심화1. ‘황폐를 거치면 욕정과 거짓은 정말 없어지는가?’ AC.18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깊음’이 마르고 황폐해져야 하며,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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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황폐’(vastation, vastatio)란 무엇인가?

 

AC.18 심화 2, ‘황폐’(vastation, vastatio)란 무엇인가?

AC.18 심화2. ‘황폐’(vastation, vastatio)란 무엇인가? AC를 영어로 읽다 보면 오늘날에는 다소 낯선 ‘vastation’이라는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AC.18에서 Potts는 ‘선지자들이 자주 말하는 인간의 황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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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수면 위를 품으시는 자비 : 리메인스 위에서 시작되는 거듭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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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AC.17-19),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 : 거듭남 이전 인간의 실상’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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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창1:2)

 

AC.17

거듭남 이전의 사람을 가리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void and empty)라 하며, 또한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 ‘땅’(the ground)이라고 합니다. ‘혼돈’(void)은 선이 전혀 없는 곳을, ‘공허’(empty)는 진리가 전혀 없는 곳을 뜻합니다. 이로부터 ‘흑암’(thick darkness)이 나오는데, 이것은 어리석음을, 그리고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그 결과 영적, 천적 삶(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 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 “earth void and empty,” and also the “ground” 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 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 “empty” 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Hence comes “thick darkness,” 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렘4:22, 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해설

AC.17은 창1:2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가운데 먼저 ‘혼돈’, ‘공허’, ‘흑암’을 해설합니다. 바로 앞 AC.16에서 창세기의 창조가 사람의 ‘새 창조’, 곧 거듭남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으므로, 이제 창조가 시작되기 전의 땅은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사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람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고 부르며, 또한 선과 진리가 아직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 ‘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창1:2는 단순히 창조 이전 우주의 물리적 모습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속뜻에서는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시기 전 그의 영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혼돈’(void)과 ‘공허’(empty)는 막연히 뒤섞이고 텅 빈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두 말을 정확히 구별하여 ‘혼돈’은 선이 없는 상태, ‘공허’는 진리가 없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사람 안에 막연한 종교성을 더하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그것들이 사람의 삶 안에서 질서를 이루게 하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선이 없다’, ‘진리가 없다’는 이 표현을 근거로 거듭남 이전 사람의 모든 외적 선행이나 모든 자연적 진실성을 무가치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17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거듭남의 관점에서 사람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선과 진리가 아직 생명 있게 자리 잡지 않은 상태입니다. 사람에게 리메인스가 어떻게 보존되어 있고 주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는 이후 AC에서 더 자세히 밝혀집니다.

 

그리고 선과 진리가 없는 이 상태에서 ‘흑암’(thick darkness)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흑암을 ‘어리석음’과 ‘무지’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 지식이 부족하거나 지능이 낮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에 대한 무지인가가 중요합니다. 먼저 ‘주님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이며, 그 결과 ‘영적, 천적 삶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연적이고 세상적인 일에는 상당히 영리하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적인 것에는 흑암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AC.17의 ‘흑암’은 지적 능력의 부족보다 주님과 영적 생명에 관한 빛이 아직 사람의 의식과 삶 안에서 밝혀지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렘4:22-23을 인용합니다. 먼저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는 말씀은 AC.17에서 ‘흑암’을 ‘어리석음’과 주님 신앙에 관한 ‘무지’라고 설명한 것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곧 주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영적 어리석음과 무지의 근본적인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이어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라는 말씀은 사람이 자연적 총명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반드시 영적 선을 아는 지혜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 인용은 AC.17의 ‘어리석음’을 세상적인 무능이나 지적 결핍으로 오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렘4:23은 창1:2와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고 하는데,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이 창1:2와 거의 그대로 겹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우연한 어휘의 유사성을 보여 주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백성과 그들의 영적 상태를 두고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혼돈과 공허’가 물질적 우주의 최초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말씀의 언어로도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AC.16에서 ‘창조’가 거듭남을 의미한다는 것을 여러 선지서와 시편의 말씀으로 확인했다면, AC.17에서는 ‘혼돈과 공허’ 역시 인간의 영적 상태를 가리킬 수 있음을 예레미야를 통해 확인하는 셈입니다.

 

또한 예레미야는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고 말합니다. AC.16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천’(heaven)이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지’(earth)가 겉 사람을 의미한다고 미리 밝혔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늘에 빛이 없다’는 표현도 AC.17의 ‘흑암’과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속 사람 자체가 주님에게서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아직 사람에게 영적 빛이 드러나 그의 의식과 삶을 밝혀 주는 상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AC.18과 AC.19에서는 이 어둡고 황폐한 상태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지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므로, AC.17만으로 거듭남 이전 인간의 내적 상태 전체를 닫힌 체계처럼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AC.17의 진단은 매우 엄중하지만 절망을 선언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혼돈’은 선의 없음, ‘공허’는 진리의 없음, ‘흑암’은 주님 신앙과 영적, 천적 삶에 대한 어리석음과 무지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이야기는 바로 이 상태에서 시작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창조가 불가능하다는 선언이 아니라, 주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사람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와 빛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빛을 비추심으로써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AC.17은 인간을 정죄하기 위한 인간론이라기보다, 왜 우리에게 주님의 새 창조가 필요한지를 보여 주는 거듭남의 첫 진단이라고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17 해설)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 심화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의 ‘혼돈’, ‘공허’, ‘흑암’을 자신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신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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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과 황폐 :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잉태되기까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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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창1:1, ‘태초와 거듭남의 시작 : 사람의 새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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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한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태초’는 또한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하는 첫 시기를 포함하는데, 이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a new creation)라고 합니다. 선지서 거의 모든 곳에서 ‘창조하다’(to create), ‘짓다’(to form), ‘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은 거듭나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각각 그 의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러므로 주님은 ‘구속자’(the Redeemer), ‘태에서부터 지으신 이’(the 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the Maker), 그리고 ‘창조자’(the Creator)라고 불리시는데, 같은 선지서에서,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시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천’(heaven)은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지’(earth)는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AC.16부터 스베덴보리는 창1:1의 각 표현을 본격적으로 풀기 시작합니다. 첫 표현은 ‘태초’(the beginning)입니다. 그는 먼저 ‘태초’가 태고, 곧 가장 오래된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선지서에서는 이를 ‘옛날’(the days of old) 또는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시간 개념 자체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AC.16에서 중요한 것은 이 ‘태초’가 문자적으로 먼 옛 시작을 가리킬 뿐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하는 첫 시기까지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에, 그에게도 하나의 새로운 시작, 곧 영적인 ‘태초’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앞의 AC.4에서 이미 창세기 1장이 사람의 새 창조, 곧 거듭남을 다룬다고 밝힌 것과 직접 연결됩니다. 창1:1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의 시작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사람이 ‘생명을 받는다’는 말도 육체적 생명을 새로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매여 있던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영적 생명으로 깨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순한 성격 개선이나 종교적 습관의 보완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질서를 이루어 가시는 ‘새 창조’입니다.

 

이 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43:7을 인용합니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여기서는 한 사람 또는 한 백성을 두고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라는 세 동사가 함께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이유는 선지서의 ‘창조’ 언어가 단지 우주나 인간의 최초 창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주님께 속하도록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에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동시에 이 세 동사가 모두 같은 뜻으로 무의미하게 반복된 것이 아니라 각각 의미의 차이를 가진다고 밝힙니다. 다만 AC.16에서는 그 차이를 아직 자세히 풀지 않으므로, 여기서 세 동사를 임의로 세 단계에 정확히 배당하기보다는 ‘말씀은 거듭남을 여러 측면에서 창조·형성·만듦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정도로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어지는 사43:15의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는 말씀은 새 창조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더욱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앞에서 주님을 ‘구속자’, ‘태에서부터 지으신 이’, ‘만드신 이’, ‘창조자’라고 부른다고 설명한 뒤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창조자’라는 호칭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으로 존재하게 된 사실만을 말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습니다. AC.16의 문맥에서는 주님께서 사람을 구속하시고, 형성하시고, 새롭게 만드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이 ‘새 창조’라면 그 창조자는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선택하며 순종하지만, 그 안에서 생명을 주시고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점이 이 인용의 핵심입니다.

 

시102:18의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는 말씀은 ‘창조’가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의 백성은 육체적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창조함을 받을’ 백성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이 표현은 사람이나 교회가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매우 적절한 증거가 됩니다. 이미 자연적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시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씀 안의 ‘창조’에는 최초의 물질적 창조를 넘어선 영적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롭게 된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것은 새 창조가 단순한 내면의 심리 변화가 아니라,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향하는 새로운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네 번째 인용인 시104:30은 이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기서는 ‘창조’와 ‘새롭게 하다’가 한 구절 안에서 나란히 나타납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16의 ‘거듭남은 새 창조’라는 설명과 매우 잘 맞습니다. 주님의 영이 보내어질 때 그들이 ‘창조되고’, 그 결과 ‘지면’이 새로워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붙드는 핵심은 주님의 생명과 역사가 사람을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시104:30의 ‘주의 영’을 성령론 전체로 확대하거나 ‘지면’을 AC.16의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겉 사람과 반드시 일대일로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번호에서 이 구절이 담당하는 직접적인 역할은 ‘창조’가 곧 새롭게 함과 연결되어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 네 인용을 함께 놓고 보면 왜 스베덴보리가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라고 한다’고 말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사43:7에서는 사람이 ‘창조되고, 지어지고, 만들어지며’, 사43:15에서는 주님이 ‘창조자’라고 불리시고, 시102:18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백성이 다시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라고 불리며, 시104:30에서는 주님의 영으로 ‘창조됨’과 ‘새롭게 됨’이 함께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네 구절은 따로따로 흩어진 증거가 아니라 하나의 논증을 이룹니다. 말씀의 선지적 언어에서 ‘창조’는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별도의 인용 구절 심화가 없어도 AC.16에서 왜 이 네 본문을 가져왔는지가 충분히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창1:1의 ‘천’(heaven)과 ‘지’(earth)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미리 예고합니다. ‘천’은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지’는 겉 사람을 의미하며, 그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너무 앞서갈 필요는 없습니다. AC.16이 아직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속뜻에서 읽을 때, 우주 창조의 언어가 동시에 인간의 내적·외적 존재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질서 지어지는 거듭남의 언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AC.16의 중심은 간결합니다. ‘태초’는 사람의 거듭남이 시작되는 첫 시기를 포함하고, 거듭남은 ‘새 창조’이며, 그 새 창조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제 이어지는 구절들은 그 새 창조가 속 사람과 겉 사람 안에서 어떤 질서로 이루어지는지를 하나씩 보여 주게 됩니다. (AC.16 해설)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심화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가 선지서 거의 모든 곳에서 거듭남을 의미한다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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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AC.17-19),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 : 거듭남 이전 인간의 실상’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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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AC.15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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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해설

AC.15는 바로 앞 AC.14의 선언을 한 단계 더 깊게 합니다.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킬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15는 이에 대해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AC.14와 AC.15는 서로 떨어진 두 선언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집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장을 자신의 신학적 설명만으로 제시하지 않고 요14:6, 8-11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이 긴 인용의 핵심은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을 때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대답하신 데 있습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이 AC.15에 인용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라는 선언을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은 아버지를 주님과 떨어진 또 다른 신적 존재로 찾아서는 안 된다는 AC.15의 논지를 뒷받침합니다. 또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는 말씀은 두 분이 단순히 같은 목적을 가지고 협력한다는 정도를 넘어서는 하나 됨을 나타냅니다. 다만 AC.15는 여기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 전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단락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와 주님의 신적 인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이 짧은 번호 안으로 미리 끌어오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핵심, 곧 천국에서는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며 주님과 아버지가 하나이시라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요14:6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도 같은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단지 아버지께 데려다주는 외적인 통로나 중간 단계이고, 그 뒤에 주님과 별도로 만나야 할 또 다른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AC.15의 인용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며,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계시고 주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심을 밝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함께 인용한 것은 인간의 시선을 주님 너머의 또 다른 아버지에게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안에서 아버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AC.15는 짧지만 이후 AC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세웁니다. AC.14가 ‘주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에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답했다면, AC.15는 ‘그러면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며,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계신다고 답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요14:6, 8-11을 길게 인용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후 거듭남과 천국과 말씀의 속뜻을 읽으면서 ‘주님’을 만날 때 우리의 시선을 그분과 아버지 사이에서 둘로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주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AC.15 해설)

 

 

 

AC.16, 창1:1, ‘태초와 거듭남의 시작 : 사람의 새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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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AC.14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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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서 그분만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시는데, 이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자신을 그렇게 부르라고 명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In the following work, by the name Lord is meant the savior of the world, Jesus Christ, and him only; and he is called “the Lord” without the addition of other names. Throughout the universal heaven he it is who is acknowledged and adored as Lord, because he has all sovereign power in the heavens and on earth. He also commanded his disciples so to call him, saying,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13:13)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John 13:13).

 

그리고 그분의 부활 후에 제자들은 그분을 ‘주님’(the Lord)이라 불렀습니다. And after his resurrection his disciples called him “the Lord.”

 

해설

AC.14는 창세기 1장의 개별 표현을 해설하기에 앞서,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를 읽는 데 필요한 중요한 용어 하나를 분명히 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 그 이름이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한다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이후 AC를 읽다가 ‘주님’이라는 표현을 만나면 누구를 가리키는지 별도로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선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오직 그분만’이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신적 존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 가장 높은 자리를 드린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AC.14가 직접 밝히는 것은 온 천국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받으신다는 사실이며, 그 이유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부와 성령의 관계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곧 이어지는 AC.15와 이후 주님에 관한 가르침을 함께 보아야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선 ‘주님’이라는 이름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설명만으로 이 명칭을 정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13:13)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을 주님 자신이 옳다고 확인하신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부활 후 제자들이 그분을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덧붙입니다. 따라서 AC.14의 논지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분명합니다. ‘주님’이라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며, 그 호칭은 주님 자신의 말씀과 제자들의 증언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AC의 속뜻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인간의 거듭남, 천국, 교회, 말씀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끊임없이 ‘주님’을 언급합니다. 그때마다 막연한 신적 원리나 이름 없는 절대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앞의 AC.7-13에서 거듭남의 여러 상태를 살펴본 직후 이 선언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그 모든 거듭남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 누구인지도 자연스럽게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AC.14는 짧지만 이후 전체 저작의 독법을 정해 주는 중요한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여러 중개자 가운데 한 분이 아니며, 온 천국이 인정하고 경배하는 ‘주님’이십니다. 다만 이 짧은 단락 하나에서 삼위일체와 주님의 신적 인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한꺼번에 끌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다음 AC.15에서 아버지와 주님의 하나 되심이 이어지고, 이후 관련 가르침들이 점차 펼쳐집니다. AC.14에서는 먼저 이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됩니다. 앞으로 AC에서 말하는 ‘주님’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AC.14 해설)

 

심화

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 심화 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 심화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뜻한다고 말하면,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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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AC.15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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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창1 개요, ‘모두가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 거듭남의 현실’

AC.13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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