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째, 혹은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르지만, 이렇게 여섯 번째 상태까지 이르는 이는 적고(few),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do not all arrive at this state. The greatest part, at this day, attain only the first state; some only the second; others the third, fourth, or fifth; few the sixth; and scarcely anyone the seventh.

 

해설

AC.13은 앞에서 설명한 거듭남의 여러 상태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정도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짧게 덧붙입니다. 여기서 ‘이 상태’는 바로 앞 AC.12에서 설명한 여섯 번째 상태를 가리킵니다. 곧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며,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앞의 여섯 상태를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차례차례 통과하여 마침내 같은 지점에 도달하는 고정된 프로그램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을 사람들의 영적 수준을 판정하는 서열표처럼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다섯 번째 상태이고 저 사람은 두 번째 상태다’라고 외적인 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AC.13의 목적이 아닙니다. 앞선 AC.7-12에서 살펴본 상태들은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주는 것이지, 우리가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분류하기 위한 기준표가 아닙니다. 특히 외적으로 경건하게 말하거나 선을 행하는 모습만으로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알 수는 없습니다. AC.9에서도 이미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하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직 생명이 없는 상태가 있을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의 모양만이 아니라 그 행동이 어떤 내적 원리에서 나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13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일곱 번째 상태’입니다. 그러나 AC.13 자체는 이 일곱 번째 상태가 무엇인지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의 흐름과 AC.12 마지막에서 사랑이 지배권을 얻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한 내용, 그리고 이어지는 창조의 일곱째 날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짧은 문장만을 근거로 일곱 번째 상태를 여러 영적 개념과 곧바로 동일시하여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상태가 깊어질수록 실제로 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왜 뒤의 상태로 갈수록 사람이 줄어드는지를 AC.13이 설명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인내하지 못해서인지, 시험이 어려워서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를 이 번호만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13은 이유를 분석하기보다 단지 실제 상태의 차이를 짧게 알려 줍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at this day)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에 있고, 어떤 사람들은 두 번째, 어떤 사람들은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상태에 있으며,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말을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통계적 법칙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대부분’, ‘적은 이들’, ‘거의 아무도 없음’이라는 표현 역시 정확한 비율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대부분이 첫 번째 상태에 있다’는 말을 곧바로 ‘대부분의 신앙인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확대하는 것도 AC.13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말하는 거듭남의 여러 상태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실현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정도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AC.13은 매우 짧지만 앞의 AC.7-12를 읽는 방식에 중요한 균형을 잡아 줍니다. 창조의 날들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준다고 해서 그것을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같은 속도와 같은 깊이로 통과하는 일률적인 단계표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남으로 이끄시는 질서는 분명하지만, 실제 사람들의 상태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관심은 다른 사람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를 판단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질서 있게 하고 계시는지를 살피는 데 있어야 합니다. AC.13은 거듭남의 높은 상태를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도록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거듭남이 얼마나 깊고 실제적인 주님의 역사인지를 겸손하게 바라보게 하는 짧은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3 해설)

 

심화

1. ‘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AC.13, 심화 1, ‘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AC.13.심화1. ‘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수도원 전통에서 말해 온 ‘완덕’이나 ‘합일’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일곱 번째 상태’ 사이에는 분명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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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AC.14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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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창1 개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움직이는 영적 인간의 여섯 번째 상태’

AC.12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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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ing), 그리고 ‘날’(day)의 의미는 위의 5절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The meaning of “evening,” of “morning,” and of “day,” was shown above at verse 5.

 

해설

AC.26은 매우 짧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8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를 다시 길게 해설하지 않고, ‘저녁’(evening), ‘아침’(morning), ‘날’(day)의 의미는 앞의 5절에서 이미 설명했다고만 말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역할은 새로운 의미를 추가하는 데 있지 않고, 첫째 날을 해설하면서 이미 세워 놓은 원리가 둘째 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앞의 AC.22에서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 곧 그늘이나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를 뜻하고, ‘아침’은 그 뒤에 오는 상태, 곧 빛이나 진리와 신앙에 관한 지식의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것은 일반적으로 ‘저녁’, 주님께 속한 것은 ‘아침’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AC.23에서는 ‘날’이 말씀에서 시간 자체를 나타내며, 그로부터 그 시간의 상태도 나타낼 수 있음을 여러 선지서의 용례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AC.26의 짧은 참조는 바로 앞에서 확정한 이 의미들을 다시 가져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을 읽는 데 중요한 점을 보여 줍니다. 첫째 날에 적용된 ‘저녁’, ‘아침’, ‘날’의 속뜻이 둘째 날에 와서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창1에서 창조의 날들이 이어질 때, 각 날의 구체적인 내용은 달라지지만 ‘저녁’, ‘아침’, ‘날’이라는 표현은 앞에서 설명된 의미를 바탕으로 계속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그 뜻을 다시 설명하지 않고 5절 해설을 가리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AC.26은 바로 앞 AC.24-25와 연결해서 읽으면 자연스럽습니다. 둘째 날에는 궁창이 생기고,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이 구별되며, 궁창을 ‘하늘’이라고 부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고, 사람 안의 것들이 점차 질서 안에 놓이는 거듭남의 상태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의 끝에도 다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둘째 날 역시 단순한 자연계의 하루가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저녁’, ‘아침’, ‘날’의 의미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다만 AC.26 자체가 ‘모든 영적 성장은 반드시 혼란과 약화를 거쳐야 한다’는 새로운 법칙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짧은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하려는 일은 훨씬 단순합니다. 독자가 이미 설명된 용어의 의미를 잊지 않고 계속 적용하도록 앞의 해설을 다시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AC를 읽을 때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설명했다’고 할 때에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뜻을 만들어 내기보다, 먼저 그가 가리키는 앞의 설명으로 돌아가 그 의미를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AC.26의 핵심은 ‘재확인’입니다. 둘째 날의 ‘저녁’, ‘아침’, ‘날’도 첫째 날에서 이미 밝혀진 속뜻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각 날은 서로 고립된 장면들이 아니라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로 이어지며, 같은 표현들은 앞에서 밝혀진 의미를 지니면서 다음 상태로 계속 나아갑니다. AC.26은 짧은 한 문장으로 그 연결을 놓치지 않도록 해 주는 번호입니다. (AC.26 해설)

 

 

 

AC.27, 창1:9, ‘물이 모이고 땅이 드러남 : 기억 속에 모인 진리와 겉 사람의 준비’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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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 창1:6-7, ‘하늘과 땅을 펴심 : 파괴가 아니라 굽힘으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땅을 펼치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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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

‘땅을 펼치고 하늘을 편다’(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선지자들이 매우 흔히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사야에 보면, 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 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 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A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am Jehovah that maketh all things,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lone, that spreadeth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또한 주님의 강림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And again, where the advent of the Lord is openly spoken of: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사42:3)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Isa. 42:3);

 

즉, 주님께서는 오류들을 꺾지 않으시고 욕정들을 끄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굽히십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that is, he does not break fallacies, nor quench cupidities, 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 and therefore it follows: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42:5) Jehovah God createth the heavens, and stretcheth them out; he spreadeth out the earth, and the productions thereof; he giveth breath unto the people upon it, and spirit to them that walk therein (Isa. 42:5).

 

이와 같은 뜻을 지닌 다른 구절들은 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해설

AC.25는 바로 앞 AC.24에서 설명한 ‘궁창’,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을 선지서의 언어를 통해 한 번 더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이 사람의 거듭남을 말할 때 ‘땅을 펼치고 하늘을 편다’는 표현을 매우 흔히 사용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하늘과 땅에 관한 설명 자체가 아니라, 창조의 언어가 사람의 재창조, 곧 거듭남을 말하는 데에도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하늘’은 속 사람, ‘땅’은 겉 사람과 연결되었으므로, 하늘과 땅을 새롭게 펴고 펼친다는 표현은 거듭남 가운데 사람의 내적·외적 질서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세워지는 것과 연결됩니다.

 

첫 번째로 인용되는 사44:24에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분이라고 하시면서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다’고 말씀하십니다. AC.25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다’는 선지서의 표현이 사람을 지으시고 구속하시는 주님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구속자’와 ‘지은 자’라는 표현이 하늘과 땅을 펴시는 창조의 언어와 함께 놓임으로써, 창조의 언어가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와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를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주님의 단독 사역’이라고 단순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생명과 능력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주님에게서 받은 자유 안에서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응답하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AC.25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사42:3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는 오류들을 꺾지 않으시고 욕정들을 끄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굽히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모든 오류와 욕정을 한순간에 강제로 제거하여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드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아직 오류와 욕정이 존재하는 그 사람의 현재 상태에서도 그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그를 점차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십니다.

 

여기서 ‘굽히신다’는 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오류 자체를 조금씩 고쳐 마침내 진리로 만들고, 악한 욕정 자체를 정화하여 마침내 선한 사랑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짓은 진리가 되어야 할 재료가 아니며 악한 사랑은 그대로 천국적 사랑으로 발전하는 씨앗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은 처음에는 오류와 욕정의 영향을 받으면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끄시면서 점차 거짓에서 진리로, 악한 사랑의 지배에서 선한 사랑의 질서로 방향을 바꾸게 하십니다. AC.24에서 사람이 감각의 착각과 욕정과 같은 자기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참되고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고 한 설명이 바로 이 대목과 연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사42:3 다음에 사42:5를 이어 인용합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라는 표현은 다시 창조의 언어로 돌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AC.25가 여기서 ‘호흡’, ‘영’, ‘소산’ 각각의 세부 상응을 해설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이 단락에서의 직접적인 논지는 주님의 강림을 말하는 같은 문맥 안에서 ‘꺾지 않고 끄지 않으며 굽히심’과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치심’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거듭남은 파괴를 통한 새 창조가 아니라,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주님께서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시면서 그의 내적·외적 질서를 새롭게 세우시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을 사람 안의 선과 진리에 일대일로 대응시켜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25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이 이미지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역사 방식입니다. 사람에게 아직 오류와 욕정이 남아 있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 사람을 강제로 꺾고 끄는 방식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현재 상태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점진성은 인간의 악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자유와 수용 능력을 따라 질서 있게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결국 AC.25가 선지서의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다’는 표현을 가져오는 이유는 창세기의 창조 언어와 인간의 거듭남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1에서 하늘과 땅이 질서를 찾아가는 모습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단번에 파괴하고 새것으로 대체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혼합되고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그의 자유 안에서 점차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굽히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를 새롭게 세워 가십니다. 이것이 AC.25가 보여 주는 ‘하늘과 땅을 펴심’과 ‘굽히심’의 거듭남입니다. (AC.25 해설)

 

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사42:3)

 

AC.25 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사42:3)

AC.25 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사42:3) AC.25에서 스베덴보리는 사42:3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를 인용하면서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원리를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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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 창1:8, ‘저녁과 아침과 날 : 앞서 밝힌 의미의 재확인’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저녁’(evening), ‘아침’(mor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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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 창1:6-7(AC.24-25), ‘궁창의 구별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때’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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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창1:6, 7)

 

AC.24

하나님의 영, 곧 주님의 자비가 참되고 선한 지식을 낮으로 이끌어 내시고, 첫 빛, 곧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는 선과 진리는 없다는 빛을 주신 후, 주님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별하시며, 따라서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cognitiones)과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scientifica)을 구별하십니다. 속 사람을 ‘궁창’(expanse)이라 하고,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을 ‘궁창 위의 물’(the waters above the expanse)이라 하며,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궁창 아래의 물’(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이라 합니다. After the spirit of God, or the Lord’s mercy, 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and has given the first light, that the Lord is, that he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 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 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2 The internal man is called an “expanse”; 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above the expanse”; 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

 

 

주2. ‘지식’(knowledges, cognitiones)이란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들을 뜻하는데, 예를 들면 우리가 ‘나는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다’라고 말할 때의 그 앎입니다. 반면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은 외적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들로, 신학적인 것이든 그 밖의 것이든 온갖 종류가 대량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 두 용어에 대한 스베덴보리 자신의 정확한 정의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AC.27, 896, 1486, 2718, 5212를 보시고, 또한 개정자의 서문 주해(Reviser’s Prefatory Notes)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Knowledges [cognitiones] are what we really know, as when we say “I do not merely think so, I know it.”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re what we have in the external memory—a vast accumulation of all kinds, theological and otherwise. For precise definitions of these words by Swedenborg himself, see Arcana Coelestia, n. 27, 896, 1486, 2718, 5212. See also the Reviser’s Prefatory Notes. [Reviser]

 

 

[2] 사람은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에는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며, 더욱이 그 성질과 상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에 깊이 잠겨 있으면서 속 사람에 속한 것들까지 그 안에 잠기게 하여, 서로 구별되는 것들을 혼란스럽고 어두운 하나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하시고, 그다음에 ‘물과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후의 구절에서처럼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고 하지는 않으십니다. Man, 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 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 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For, 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 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 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Therefore it is first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then,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but not,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1:7, 8)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Gen. 1:7–8).

 

[3] 따라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다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속 사람이 있다는 사실, 곧 속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은 오직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주님에 의해 자기가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도록 인도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궁창 아래의 물들의 구별이 언급되고, 그다음에 궁창 위의 물들이 언급됩니다. 또한 이것은 천국의 아르카나인데,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것들, 곧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에 의해서도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저녁에서 아침으로, 곧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또는 ‘땅’(earth)에서 ‘하늘’(heaven)로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궁창, 곧 속 사람을 ‘하늘’(heaven)이라 하는 것입니다. 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 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which are of the Lord alone. Now as the external man, when being regenerated, 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 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 and whereas, being such, he is led by them of the Lord, as by things of his own, 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 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 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 that man, by things of his own, 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 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 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 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or from “earth” to “heaven.” Therefore the expanse, or internal man, is now called “heaven.”

 

해설

AC.24는 창세기 1장의 둘째 날에 등장하는 ‘궁창’이 인간의 거듭남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본문입니다. 앞선 단계에서 주님의 자비가 참되고 선한 지식을 낮으로 이끌어 내시고, 사람에게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이고 진리 자체이시고 모든 선과 진리는 그분에게서 온다’는 첫 빛을 주셨다면, 이제 그 빛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궁창의 핵심은 단순한 ‘분리’보다 ‘구별’입니다. 거듭남 이전에는 서로 다른 것들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었지만, 이제 주님께서 그것들이 서로 다름을 드러내시고 질서를 세우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을 ‘궁창’(expanse)이라고 하고, 속 사람 안의 지식을 ‘궁창 위의 물’,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궁창 아래의 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cognitiones’와 ‘scientifica’의 구별이 중요합니다. 본문에 붙은 개정자의 주에 따르면 cognitiones는 사람이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는 정도를 넘어 ‘나는 그것을 안다’고 할 때의 앎이며, scientifica는 외적 기억 안에 축적되어 있는 온갖 종류의 기억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 둘을 곧바로 ‘살아 있는 영적 지식’과 ‘죽은 세속 지식’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AC.24에서 우선 강조되는 것은 이들이 속하는 층위가 다르며, 거듭남 가운데 그 차이가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거듭남 이전의 사람은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며, 더욱이 그 성질과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에 깊이 잠겨 있기 때문에 속 사람에 속한 것들까지 같은 차원 안에 끌어들여, 본래 구별되어야 할 것들을 혼란스럽고 어두운 하나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표현 순서도 섬세합니다. 처음에는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고 하고 ‘물과 물로 나뉘라’고 할 뿐, 곧바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이라고 명확히 부르지 않습니다. 이후에야 위와 아래의 물이 분명히 구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문장 순서에서 거듭남의 질서를 읽습니다. 사람은 먼저 속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 가고, 그다음에야 그 둘에 속한 것들의 질서를 점차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이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은 속 사람이 있으며, 그 속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 중인 사람의 겉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신이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은 앞선 거듭남의 단계들과도 연결됩니다. 사람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으면서도 아직 그것을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상태를 지나갑니다.

 

바로 여기서 AC.24의 매우 중요한 아르카나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통해서도 그를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감각의 착각과 욕정과 같은 사람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주님께서 사람을 참되고 선한 것들로 이끄시고 굽히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을 주님께서 선한 것으로 인정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아직 그것들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도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현재 상태와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점차 선과 진리 쪽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거듭남은 이미 완전해진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아직 자기 자신의 것들 속에 있는 사람을 주님께서 차츰 질서 안으로 이끄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궁창 아래의 물이 먼저 언급되고 궁창 위의 물이 그다음에 언급되는 순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의 의식과 경험에서는 겉 사람의 것들이 먼저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을 행한다고 느끼며, 그 뒤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처음부터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자신 안에 겉 사람과 구별되는 속 사람이 있음을 알고, 그 속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궁창’은 바로 이러한 구별이 시작되고 질서가 세워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땅에서 하늘로’ 진행된다고 말합니다. 앞의 AC.22-23에서 살핀 저녁과 아침의 질서가 여기에서 다시 거듭남의 실제 과정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보이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주님께 속한 것으로 이끄시며, 겉 사람에 머물러 있던 그의 의식은 점차 속 사람의 질서와 연결되어 갑니다. 이 과정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의 전체와 각각의 부분에서 계속된다는 것이 ‘모든 움직임과 순간’이라는 표현의 뜻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궁창, 곧 속 사람을 ‘하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사람 안에 별도의 작은 천국이 만들어졌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24의 직접적인 뜻은 속 사람이 ‘땅’으로 표현되는 겉 사람과 구별되며, 그 속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가 주님께 속한다는 데 있습니다. 거듭남은 이렇게 혼란스럽게 섞여 있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주님에 의해 구별되고, 사람 자신의 것처럼 여겨지던 것들이 점차 주님의 선과 진리 아래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창1의 궁창은 바로 그 구별과 질서의 시작을 나타냅니다. (AC.24 해설)

 

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C.24 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C.24 심화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이라는 표현은 처음 접하면 조금 낯설지만, AC를 읽으면서 자주 만나게 되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AC.24의 영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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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 창1:6-7, ‘하늘과 땅을 펴심 : 파괴가 아니라 굽힘으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땅을 펼치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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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 창1:5, ‘날이 뜻하는 시간과 상태 : 거듭남의 날들을 읽는 원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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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그는 ‘형상’(image)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들이 그의 ‘음식’(food)이 됩니다. 또한 그의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로부터 싸움이 일어나며,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고, 그 후 그는 천적 인간이 됩니다. 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 “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24-3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여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는데, 이는 창1의 여섯째 날, 곧 짐승과 사람의 창조에 해당하는 단계입니다. 앞선 다섯 번째 상태에서 신앙은 이미 살아 있는 생명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사람은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확고해지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만이 아니라 사랑이 함께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람은 신앙으로 말할 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순서를 제시합니다. 그는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단계의 사람이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질서 가운데 있음을 보여 줍니다. 앞선 상태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신앙이 이제 사랑과 함께 작용하면서, 사람이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한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여기서 ‘짐승’은 일상적인 말에서처럼 거칠고 악한 본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등장하는 생물들과 짐승들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들을 표상합니다. 다만 각각의 생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뒤의 해당 절에서 자세히 다루어지므로, 여기서는 여섯 번째 상태에서 더욱 충만한 생명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큰 흐름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동시에 그를 ‘형상’(image)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26-27의 ‘하나님의 형상’과 직접 연결됩니다. 여기서는 형상의 모든 의미를 미리 풀기보다,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함께 행동하기 시작한 거듭난 사람을 스베덴보리가 ‘영적 인간’이며 ‘형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형상’의 구체적인 속뜻은 이어지는 창조 본문의 해설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의 삶은 두 층위로 유지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들을 그의 ‘음식’(food)이라고 합니다. 몸이 음식을 통해 유지되듯이 영적 생명도 그것을 기르고 유지하는 양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지식만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행위들이 함께 언급된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과 그 진리를 선한 삶으로 살아 내는 것이 함께 영적 생명을 이루어 갑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됩니다. 이것은 몸이나 감각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연계에서 몸을 가지고 살아가며 감각을 통하여 세상을 접합니다. 문제는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 가운데 무엇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가입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싸움’이 일어납니다.

 

AC.12는 이 싸움을 길게 설명하지 않고 그 방향과 결과를 짧게 제시합니다. 싸움은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며, 그 후 사람은 ‘천적 인간’이 됩니다. 여기서 사랑은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뜻합니다.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가던 사람이 마침내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에 이를 때, 스베덴보리는 그를 천적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단순히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의 사람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12에서는 아직 이 둘의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듭남의 진행 가운데 처음에는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사랑이 지배적인 원리가 되는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더 깊은 차이는 이후 AC에서 훨씬 정교하게 밝혀집니다.

 

결국 AC.12는 창조의 여섯째 날에 대응하는 거듭남의 여섯 번째 상태를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사람은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며,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함께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영적 인간’이며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로 양육되고, 자연적 생명과의 싸움을 지나 마침내 사랑이 지배하는 질서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AC.12는 여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너머의 천적 상태를 바라보게 합니다. (AC.12 해설)

 

심화

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 심화 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 심화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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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창1 개요, ‘모두가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 거듭남의 현실’

AC.13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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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창1 개요,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확고해지는 다섯 번째 상태’

AC.11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생명 있는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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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생명 있는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하늘의 새들’(birds of the heavens)이라 불립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heavens.”

 

해설

AC.11은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AC.10의 네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면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그 내적인 생명이 실제로 활동하면서 ‘생명 있는 것들’을 산출하기 시작합니다. 창조 이야기에서도 넷째 날까지 빛과 궁창과 땅과 식물과 광명체들이 나타났지만, 다섯째 날에 이르러 처음으로 움직이는 생물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순서를 인간의 거듭남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신앙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에 관한 말을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선 상태에서도 사람은 이미 경건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AC.9에서는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것들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AC.10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한 뒤, AC.11에서는 이제 신앙이 실제로 그 사람의 말과 생각에서 활동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어지는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표현은 조금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증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여러 삶의 경험을 통하여 진리와 선이 참임을 검증한다’는 구체적인 과정으로 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11 자체가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밖에서 배워 받아들였던 진리가 이제 그 사람 안에서 신앙으로 활동하며 그의 생각과 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AC.9와 AC.11을 비교하면 중요한 변화가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AC.9에서 사람은 이미 회개하고 선을 행했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행하는 것들은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11에서는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이 ‘생명 있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두 표현의 대비는 거듭남에서 단순히 어떤 행동을 하느냐만이 아니라, 그 행동이 어떤 내적 생명에서 나오는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AC.11에서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7부터 이어지는 전체 과정에서 거듭남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게 하시며, 사람이 회개하고 선을 행하는 과정을 지나도록 이끄십니다. 그리고 AC.10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AC.11의 ‘생명 있는 것들’ 역시 그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생명 있는 산출물들을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창1:20-23의 다섯째 날과 직접 연결됩니다. 그러나 AC.11은 아직 물고기와 새의 세부적인 상응을 밝히는 곳이 아니라 창조의 여섯 날이 거듭남의 여섯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개괄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물고기와 새가 각각 무엇을 세밀하게 의미하는지를 미리 확정하기보다, 넷째 상태에서 속 사람 안에 불붙은 신앙과 체어리티로부터 이제 처음으로 ‘생명 있는 것들’이 산출되기 시작한다는 큰 흐름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창조의 순서도 의미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셋째 날에는 식물이 나타나고, 넷째 날에는 광명체들이 나타나며, 다섯째 날에는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와 새가 등장합니다. 거듭남에서도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는 외적인 변화가 먼저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모두 동일한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의 것을 차례로 질서 있게 하시면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으로부터 살아 있는 결과들이 산출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상태 역시 거듭남의 마지막 상태는 아닙니다. 바로 다음 AC.12에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여섯 번째 상태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11에서는 신앙이 살아 움직이며 진리와 선 안에서 사람이 확고해져 가는 것이 중심이라면, 다음 상태에서는 사랑이 더욱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 차이를 남겨 두어야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상태의 경계가 흐려지지 않습니다.

 

또한 ‘확증’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긍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문맥에서는 사람이 거짓을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 안에서 확고해지는가입니다. AC.11에서는 그 대상이 분명히 ‘진리와 선’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확증은 자기주장의 완고함이 아니라, 거듭남 가운데 신앙이 활동하면서 사람이 진리와 선 안에서 점차 확고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AC.11의 다섯 번째 상태는 ‘생명’과 ‘확고해짐’이라는 두 흐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더 이상 외부에서 배운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고 그 사람에게서 말로 나타날 만큼 활동하기 시작하며, 사람은 그 신앙으로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집니다. 동시에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이 이제 ‘생명 있는 것들’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창조의 다섯째 날에 나타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로 표현합니다. 다음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 살아 있는 신앙이 사랑과 더욱 깊이 결합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AC.11 해설)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 심화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을 처음 읽으면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라는 표현에서 조금 멈추게 됩니다. 우리말의 ‘확증하다’는 보통 어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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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창1 개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움직이는 영적 인간의 여섯 번째 상태’

AC.12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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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창1 개요,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네 번째 상태’

AC.10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였으며, 신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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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였으며,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속 사람 안에서 불붙게 되며, 이것들을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합니다. The fourth state is when the man becomes affected with love, and illuminated by faith. He indeed previously discoursed piously, and brought forth goods, but he did so 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 and not from faith and charity; wherefore faith and charity are now enkindled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alled two “luminaries.”

 

해설

AC.10은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첫 번째 상태에서 인간은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었고, 두 번째 상태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했으며, 세 번째 상태에서는 회개하고 경건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아직 그 선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네 번째 상태에서는 한층 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은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며’,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속 사람 안에서 실제로 ‘불붙게’ 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이전 상태에서도 사람이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네 번째 상태에서 비로소 외적으로 선한 행동이 처음 나타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차이는 그 선의 내적인 근원과 상태에 있습니다. 이전에는 시험과 곤경을 지나면서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했지만, 아직 그것이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AC.9가 덧붙여 보여 준 것처럼 그는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AC.10의 변화는 단순히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었다’는 변화가 아니라, 이미 행하고 있던 선이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과 연결되기 시작하는 변화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먼저 ‘사랑에 감동된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종교적인 감정이 강해지거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뜻한다고 볼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선을 외적인 압박 때문에 행하는 데서 점차 벗어나 선 자체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시험과 곤경이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을 잠잠하게 하는 과정에서 선이 나타났다면, 이제는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체어리티가 실제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사람은 ‘신앙으로 밝아집니다.’ 신앙은 여기서 단순히 알고 있는 교리나 기억 속의 신앙 지식에 머물지 않습니다. AC.8에서 리메인스로 저장되어 있던 신앙의 지식들이 언급되었고, AC.9에서는 사람이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AC.10에서는 신앙이 사람을 밝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진리가 단지 밖에서 주어진 지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 안에서 실제로 빛의 기능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의 핵심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주는 말이 ‘불붙게 된다’(enkindled)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불붙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신앙과 체어리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선 상태들에서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 구별이 일어나도록 이끄시며, 사람이 회개하고 선을 행하는 과정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준비 가운데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 점에서 AC.9와 AC.10의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AC.9의 사람도 선을 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선행이 있느냐 없느냐’만으로 두 상태를 구별할 수 없습니다. AC.9에서는 사람이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아직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AC.10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외적으로 선한 행동의 수가 늘어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행동의 내적인 생명과 근원이 달라져 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불붙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창1:14-18에서 넷째 날에 등장하는 두 큰 광명체와 직접 연결됩니다. 그러나 AC.10은 아직 그 광명체들의 세부적인 상응을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며, 창조 이야기의 두 광명체가 바로 이 내적 변화를 나타낸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세부적인 의미는 이후 해당 절의 해설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순서는 창세기 1장의 거듭남 구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빛은 첫째 날에 이미 나타났지만, 해와 달과 별에 해당하는 광명체들은 넷째 날에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처음부터 어떤 빛과 신앙의 지식이 주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속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로 자리 잡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상태를 거치게 하시면서 사람 안의 것을 질서 있게 준비하시고,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가 내적으로 살아 움직이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AC.10에서 말하는 네 번째 상태를 단순히 ‘신앙심이 강해지는 단계’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더 중요한 변화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 사람의 내적 삶에서 실제로 생명을 가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선을 단지 해야 하기 때문에 행하는 데서 점차 벗어나 선에 마음이 움직이고, 진리를 단지 알고 있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진리로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진다’고 표현한 변화입니다.

 

또한 이 상태를 인간의 성취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AC.7부터 이어지는 거듭남의 모든 상태에서 주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실제로 회개하고,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며,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생명을 주시고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점차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기에게 선의 공로를 돌리는 데서 벗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AC.10의 네 번째 상태는 앞선 세 상태에서 준비되어 온 것이 속 사람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리메인스로 저장되어 있던 것, 시험과 곤경 가운데 드러나기 시작한 것, 회개와 선행으로 나타났지만 아직 자기에게 귀속되던 것이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살아 있는 내적 원리로 불붙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을 창조의 넷째 날에 나타난 두 ‘광명체’로 표현합니다. 이후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 내적인 생명이 더욱 풍성한 살아 있는 결과들을 낳게 됩니다. (AC.10 해설)

 

 

 

AC.11, 창1 개요,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확고해지는 다섯 번째 상태’

AC.11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생명 있는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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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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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생명이 없습니다. 이러한 선과 진리들은 부드러운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되며, 이에 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 “tender grass,” and also the “herb yielding seed,” and afterwards the “tree bearing fruit.”

 

해설

AC.9는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를 매우 짧게 설명하지만, 실제 신앙생활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단락입니다. AC.8의 두 번째 상태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상태에 이르면 사람에게 실제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는 회개하기 시작하고,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미 상당히 거듭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 사람은 아직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 때문에 AC.9를 ‘세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위선적으로 선을 행한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가 거짓으로 경건한 척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실제로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선을 행합니다. 회개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거짓 신앙의 상태라기보다 거듭남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사람이 진심으로 선을 행하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결심했다’, ‘내가 선을 행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 때문에 그 사람이 행하는 것들이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상당히 강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 사람이 행한 모든 선행이 아무 가치도 없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선행의 외적인 모양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입니다. AC.2에서 이미 말씀의 생명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온다고 했듯이, 인간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도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이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아직 그 근원을 자기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AC.8과 AC.9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AC.8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구별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사람이 곧바로 자신의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삶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9에서는 바로 그 중간 상태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이미 선을 원하고 행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붙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배우는 과정까지 포함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인정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회개도 해야 하고 악을 피해야 하며 선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참된 선의 능력과 생명이 자기 고유의 것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AC.9에서는 아직 그 인정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 번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는 신앙생활에서 매우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전보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하고, 이웃을 돕고, 교회에서 봉사하며, 자신의 잘못을 고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변화 때문에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신앙적이라고 여기거나, ‘나는 이 정도로 변화했다’며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기 시작한다면 아직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AC.9는 바로 이 미묘한 자기 귀속을 드러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도 거듭남 가운데 반드시 다루어져야 하는 문제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선과 진리를 ‘부드러운 풀’,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창1:11-13의 셋째 날과 연결됩니다. 아직 완성된 생명이 아니라 처음 땅에서 싹트기 시작하는 생명입니다. 특히 식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전의 혼돈과 흑암의 상태에 비하면 분명한 진전입니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없다’는 표현만 떼어 이 세 번째 상태 전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실제로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으며, 다만 그 선과 진리의 참된 생명의 근원을 아직 충분히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 다음 상태로 나아가는 데 중요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내가 선을 행한다’는 데서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신다’는 인식으로 옮겨 갑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책임과 행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성실하게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을 자기 공로로 붙들지 않게 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되 그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AC.9가 앞으로 열어 놓는 거듭남의 중요한 방향입니다.

 

따라서 AC.9의 세 번째 상태는 매우 역설적인 단계입니다. 사람은 이미 회개하고 있으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을 행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선을 행하는 가운데 아직 남아 있는 proprium이 드러납니다. ‘내가 했다’는 생각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꺾으시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릴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 번째 상태는 ‘선을 행하기 시작한 상태’이면서 동시에 ‘그 선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배우기 시작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AC.9 해설)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 심화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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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AC.9 심화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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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창1 개요,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네 번째 상태’

AC.10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였으며, 신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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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창1 개요,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는 두 번째 상태’

AC.8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불리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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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불리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신앙의 지식들을 뜻합니다. 이것들은 저장되어 있다가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 것들로부터 분리됩니다.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이때까지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으며, 바로 이러한 쓰임을 위해 보존되어 온 것입니다. The second state is when a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nd those which are proper to man.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and here are especially knowledges of faith, which have been learned from infancy, and which are stored up, and are not manifested until the man comes into this state. At the present day this state seldom exists without temptation, misfortune, or sorrow, by which the things of the body and the world, that is, such as are proper to man, are brought into quiescence, and as it were die. Thus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are separated from those which belong to the internal man. In the internal man are the remains, stored up by the Lord unto this time, and for this use.

 

해설

AC.8은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AC.7의 첫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아직 ‘혼돈’, ‘공허’, ‘흑암’ 가운데 있지만 주님의 자비가 먼저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상태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 사이에 구별이 생기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사람이 이전보다 종교적이 되거나 도덕적으로 나아지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인지를 점차 구별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리메인스 전체에 대한 완전한 정의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여기서는 특별히’라고 한정하면서 유아기부터 배워 온 ‘신앙의 지식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AC를 따라가면 리메인스는 신앙의 지식에만 한정되지 않고, 주님께서 인간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그리고 선한 정서와 관련된 훨씬 풍성한 의미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AC.8에서는 우선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 저장하고 보존해 두신 것’이라는 핵심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리메인스가 곧바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유아기와 어린 시절부터 많은 선과 진리를 접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모두 즉시 그의 의식적인 신앙과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감추어진 채 저장되어 있다가 거듭남의 과정에서 필요한 때가 되었을 때 주님께서 그것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AC.8은 리메인스가 ‘저장되어 있다가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안에 무엇이 보존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는 이미 훨씬 오래전부터 그의 거듭남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두 번째 상태가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여기서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기 위해 반드시 불행을 보내신다거나,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이 더 잘 거듭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문도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반드시 고난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거의 없다’고 표현합니다. 핵심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일을 통하여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평소 자기의 판단과 능력, 세상에서의 성취와 안정, 몸의 욕구와 외적인 조건을 매우 강하게 붙들고 살아갑니다. 이것들이 인간의 삶에서 모두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몸도 필요하고 세상에서 맡은 일과 관계와 책임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인간 안에서 주도권을 차지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가릴 때입니다. 시험과 불행과 슬픔은 때때로 사람이 의지하던 외적인 것들의 힘을 약하게 하고, 자기 자신만으로 모든 것을 붙들 수 있다는 확신을 잠잠하게 합니다. AC.8에서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는 것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실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지배력이 잠잠해지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여기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이것 역시 인간이 둘로 쪼개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뒤섞여 있어 그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면서 속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해 두신 것들이 드러날 수 있게 되고, 사람은 이전에는 구별하지 못했던 두 근원을 조금씩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분리’는 거듭남에 필요한 영적 구별이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말이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입니다. Potts의 영어 ‘proper to man’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앞으로 매우 중요해지는 개념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생각과 의지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참된 선과 진리는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AC.8의 두 번째 상태는 바로 이 구별이 처음 분명해지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렇다고 시험이나 불행이 자동으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 완고해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변화의 근원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AC.8의 중심을 ‘고난을 받아야 거듭난다’로 잡으면 안 됩니다. 중심은 주님께서 이미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주님께 속한 것과 자기에게 속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8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사실 시험이나 슬픔이 아닙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거듭남을 의식하기 오래전부터 주님께서 이미 그 사람 안에 필요한 것을 저장해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거듭남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보존하신 것을 적절한 때에 사용하시면서 거듭남을 이끌어 가십니다. 리메인스는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구원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주님의 섭리 가운데 준비되어 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7에서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던 사람은 AC.8에 이르러 처음으로 하나의 구별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며, ‘내 생각’과 ‘주님의 진리’ 역시 저절로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별이 생겨야 이후의 회개와 신앙의 삶도 가능해집니다. AC.8의 두 번째 상태는 완성된 거듭남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보존해 두신 것을 사용하시면서 인간 안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시작하시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AC.8 해설)

 

심화

1. ‘왜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져야 하는가?’

 

AC.8 심화 1, ‘왜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져야 하는가?’

AC.8 심화1. ‘왜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져야 하는가?’ AC.8에는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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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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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 창1 개요, ‘혼돈과 흑암 위에 먼저 움직이시는 주님의 자비: 거듭남의 출발점’

AC.7첫 번째 상태는 앞서는 상태로서, 유아기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의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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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

첫 번째 상태는 앞서는 상태로서, 유아기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의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The first state is that which precedes, including both the state from infancy, and that immediately before regeneration. This is called a “voi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And the first motion, which is the Lord’s mercy, is “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AC.7은 AC.6에서 예고한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 가운데 첫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첫 번째 상태는 아직 본격적인 거듭남이 시작된 상태가 아니라 그것에 ‘앞서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범위를 유아기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의 상태까지로 잡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첫 번째 상태’란 어느 한순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유아기에서 시작하여 거듭남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지나온 상태를 포괄합니다. AC.6에서 여섯 날을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이라고 한 직후, 그 첫 상태를 이렇게 거듭남에 앞서는 긴 상태로 설명한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첫 상태를 창1:2의 ‘혼돈’(void), ‘공허’(emptiness),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AC.7에서는 아직 이 세 표현이 각각 무엇에 상응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혼돈은 선의 부재이고 공허는 진리의 부재이다’와 같이 각각의 의미를 미리 확정하여 풀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첫 상태 전체를 이 세 표현으로 묘사한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은 아직 거듭나기 전이며, 창세기 문자 그대로의 모습으로 말하면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 상태를 바탕으로 이후의 창조, 곧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AC.7의 중심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자체보다 그 위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움직임’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첫 움직임을 놀랍게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창1:2의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과 연결합니다. 아직 사람에게 빛이 생겼다고 하지도 않았고, 사람이 무엇을 알고 믿거나 행했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거듭남의 첫 상태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움직임은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AC.7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주님의 자비가 먼저 움직이십니다.

 

따라서 AC.7에서는 이후의 교리를 너무 많이 앞당겨 설명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수면’을 곧 리메인스라고 확정하거나, ‘운행하다’를 어미 새가 알을 품는 모습으로 자세히 해설하거나, 이 첫 상태가 이후 거듭남의 모든 국면에서 반복된다고까지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들은 이후 번호들을 따라가면서 차례로 확인하면 됩니다. AC.7 자체가 지금 독자에게 보여 주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충분히 깊습니다. 거듭남에 앞서는 인간의 첫 상태는 유아기부터 거듭남 직전까지를 포함하며, 그것은 ‘혼돈’, ‘공허’, ‘흑암’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상태 위에서 최초로 움직이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입니다. 창조의 첫 빛이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기록된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거듭남의 첫 상태와 연결합니다. (AC.7 해설)

 

 

 

AC.8, 창1 개요,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는 두 번째 상태’

AC.8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불리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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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 창1 개요, ‘여섯 날, 여섯 상태: 거듭남의 질서를 여는 해석의 문’

AC.6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인 여섯 날(days), 곧 여섯 시기(periods)는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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