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 천국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 있는 관계를 말합니다. 자연계의 어떤 것이 단지 우연히 영적인 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기능과 쓰임을 통하여 영적인 것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상응은 사람이 임의로 정하는 상징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개인적으로 장미를 어머니의 사랑과 연결하여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매우 의미 있는 상징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응은 개인의 연상이나 취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있는 질서에서 나옵니다.

 

사람 자신도 상응을 이해하는 중요한 예가 됩니다. 사람의 얼굴은 마음의 정서를 드러내고, 말은 생각을 표현하며, 행동은 의지를 밖으로 나타냅니다. 미소가 기쁨을 나타내고 눈물이 슬픔을 나타내는 것처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표현합니다. 물론 이러한 예만으로 스베덴보리의 상응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는 기본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말씀의 속뜻도 이러한 관계와 깊이 연결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빛, 물, 불, 산, 나무, 강, 집, 길과 같은 자연적인 것들은 단순히 사전식으로 하나의 숨은 뜻을 부여받은 암호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의 성질과 기능, 그리고 말씀 전체에서의 쓰임과 문맥을 따라 영적인 것과의 관계를 밝힙니다. 그러므로 상응을 공부한다는 것은 ‘빛은 무조건 이것, 물은 무조건 저것’이라는 식으로 상응표를 외우는 일이 아닙니다. 각각의 표현이 어떤 문맥에서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표상’과 ‘상응’은 서로 밀접하지만 완전히 같은 말로 취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 의식이 더 내적인 영적 실재를 나타낼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표상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상응’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그러한 표상과 의미가 가능하게 하는 질서 있는 관계를 가리키는 데 더 적합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어떤 것이 영적인 것을 표상하고 의미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언어유희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상응의 질서가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을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자의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비가 왔으니 주님께서 나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보내셨다거나, 우연히 어떤 동물을 보았으니 그것이 내 미래를 예고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다릅니다. 상응은 점술이나 징조 해석의 도구가 아닙니다. 특히 말씀을 해석할 때에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 전체의 연결과 영적 질서 안에서 어떻게 그 상응을 밝히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응의 관계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연결에서 끝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의 문자에서 속뜻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이 단어의 숨은 뜻은 무엇인가?’를 알아맞히는 일이 아닙니다. 외적인 표현을 통하여 그 안의 영적인 질서를 보고,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AC.1에서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가리킨다고 한 것과 연결됩니다.

 

AC.4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그 안에 품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앞으로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를 하나씩 해설하면서 우리는 상응이 실제 말씀 해석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AC.4에서는 상응의 모든 체계를 미리 완성하려 하기보다, ‘말씀의 자연적인 표현과 그 안의 영적인 것 사이에는 임의적이지 않은 질서 있는 관계가 있다’는 기본 원리를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AC.4 심화 2)

 

 

 

AC.4, 서문, ‘창세기는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말한다’

AC.4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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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AC.4 심화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나 행위가 그 자체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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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나 행위가 그 자체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방식을 경험합니다. 국기가 한 나라를 나타내고, 왕관이 왕권을 나타내며, 결혼반지가 부부의 결합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표상’은 사람이 임의로 의미를 부여한 상징보다 훨씬 깊은 개념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인물이나 장소, 사물이나 행위가 ‘표상한다’고 할 때에는 그 외적인 것이 말씀 안에서 더 내적인 영적 실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제사는 문자적으로는 실제로 행해진 종교의식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제사들이 주님과 주님께 속한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라는 외적인 의식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상적 기능을 합니다.

 

이 점에서 ‘표상’과 단순한 ‘비유’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는 어떤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다른 것을 끌어와 비교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표상은 단지 설명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문학적 장치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이 실제로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표상하도록 말씀 안에 배열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집트와 가나안, 성막과 성전, 제사와 절기 같은 것들이 문자적 의미를 가지면서 동시에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것이 표상적 의미를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그 문자적 이야기나 역사적 차원을 곧바로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표상한다’는 말의 핵심은 외적인 것 안에 그것이 나타내는 더 내적인 것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것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서 그 문자가 나타내고 있는 영적인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에서 말씀의 문자와 내적인 것을 몸과 영혼의 관계에 비유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들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영적인 것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과 그 안의 나무와 강, 뱀과 열매 같은 것들도 이후 AC의 해설을 따라가면 각각 태고교회와 인간의 내적 상태에 관한 것을 표상하고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임의로 ‘이것은 이것을 상징한다’고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질서와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상응과 속뜻의 연결을 따라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AC.4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그 안에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문장이 앞으로 AC에서 ‘표상’이라는 말을 수없이 만나게 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조의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이 단지 자연계의 대상들로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에 관한 영적인 것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표상’을 이해할 때 가장 먼저 붙들 것은 ‘외적인 것이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표상이 자의적인 상징 놀이가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영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각각의 표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해당 문맥에서 하나씩 확인해 가야 합니다. (AC.4 심화 1)

 

 

 

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 심화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 천국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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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서문, ‘창세기는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말한다’

AC.4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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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심화

1. ‘속 사람’(internal man)

 

AC.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에게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에서 매우 자주 만나게 되므로 처음 등장하는 이 자리에서 기본적인 뜻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속 사람’을 단순히 ‘마음속의 나’, ‘겉 사람’을 ‘밖으로 보이는 나’라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구별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몸으로 행동하고 말하며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겉 사람과 관계하고,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사랑은 속 사람과 관계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구별은 단순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구별보다 깊습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는 생각과 욕망도 많이 있지만, 그것이 단지 마음속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속 사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인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생각하고 원하는 것 역시 내면에서 일어나지만 여전히 겉 사람의 질서에 속할 수 있습니다.

 

속 사람은 사람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에 의해 형성되고 열리는 내적인 인간과 관계합니다.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거듭남에서는 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매우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내적인 것을 통하여 외적인 것을 질서 있게 하시며, 사람이 받은 진리와 선이 실제 삶에 나타나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단지 겉으로 보이는 행동을 고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주님의 질서 아래 서로 연결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AC.3에서 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말씀의 비유로 사용되는지도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이 살아 있으며 겉 사람을 살아 있게 하고,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죽은 몸과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말씀의 문자만을 그 안의 내적인 것과 분리하여 보면 영혼 없는 몸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속 사람은 좋은 것이고 겉 사람은 나쁜 것’이라는 대립이 아닙니다. 몸이 영혼과 결합하여 살아 있는 인간을 이루듯이, 겉 사람도 속 사람과 올바르게 연결될 때 인간의 삶에서 필요한 쓰임을 수행합니다.

 

따라서 ‘속 사람’을 단순히 양심, 진심, 속마음, 또는 인간의 가장 깊은 중심 하나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를 계속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내적인 것 자체도 여러 방식으로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3에서는 우선 ‘속 사람은 자연적인 겉 사람보다 내적인 인간이며,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고 겉 사람을 질서 있게 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정도를 붙들면 충분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의 비유도 단순한 몸과 마음의 비유보다 훨씬 깊어집니다. 사람의 겉 사람이 속 사람과 분리되어서는 참으로 살아 있을 수 없듯이, 말씀의 겉 글자 역시 그 안의 내적인 생명과 분리되어서는 살아 있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앞선 AC.2에서 보았듯이 그 모든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입니다. (AC.3 심화 1)

 

 

 

AC.3, 서문, ‘문자는 몸이고, 속뜻은 생명이다’

AC.3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문자로서의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은 기독교 세계에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속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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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단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말씀에 왜 생명이 있는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등장하지만, 동시에 스베덴보리가 주님과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주님을 ‘생명 그 자체’라고 할 때에는 주님께서 우리처럼 생명을 받아 가지고 계신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이 주님 자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없으며,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주님에게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생명이 있지만 주님은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AC.2에서는 이 깊은 주제를 인간 생명의 구조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꺼낸 것이 아니라 ‘말씀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꺼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생명이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는 데서 온다고 합니다. 말씀의 가장 깊은 생명과 주님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 ‘그분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다’고까지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을 가리킨다’는 것을 모든 구절에서 문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2 자체가 ‘그 나름의 방식으로’(in its own way) 주님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구약의 어떤 본문은 문자적으로 인물의 생애를 말하고, 어떤 본문은 전쟁이나 율법이나 족보를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외적인 것 안에 있는 내적인 것이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향하기 때문에 그것이 살아 있고 신성한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생명 그 자체’라는 표현은 이후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으면서 훨씬 더 깊어질 주제입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다는 것, 그 생명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끼도록 허락받는다는 것, 생명이 어떻게 인간에게 유입되는가 하는 문제들은 이후 각각의 문맥에서 더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AC.2 한 번호에서 그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AC.2에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이해하는 가장 안전한 출발점은 이것입니다. 말씀에는 그 자체로 독립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고 그분을 가리키기 때문에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말씀에 생명을 더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자체이시며, 바로 그분을 향하는 내적인 것이 말씀을 살아 있고 신성한 말씀 되게 합니다. (AC.2 심화 2)

 

 

 

AC.2, 서문, ‘말씀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

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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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 심화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의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는 얼핏 보면 단순한 강조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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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의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는 얼핏 보면 단순한 강조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더구나 이 표현은 AC.1에도 이미 등장했고, AC.2에서는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라는 말이 뒤따르면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가 굳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전체적으로’는 말씀이 전체적인 흐름과 내용에서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와 종교적인 믿음 등에 관계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개별적으로나’라고 덧붙입니다. 말씀의 큰 이야기와 중심 주제만 내적인 것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이루는 개별적인 것들에도 내적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AC.2에서는 이것을 더욱 강화하여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품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AC의 해설 방식이 왜 그토록 세밀한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한 장 전체가 어떤 내적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몇몇 중요한 구절만 속뜻을 가지고 나머지는 그 이야기를 이어 주는 장식이나 배경이라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인물과 장소, 행동과 사물, 숫자와 방향, 반복되는 표현들까지 하나씩 살핍니다. 그렇게 하는 근거가 바로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내적인 것을 품고 있다는 그의 확신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개별적으로’를 각 단어 하나에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상응 뜻을 기계적으로 대입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를 읽어 가면 같은 말도 문맥과 연결 관계에 따라 그 의미가 드러나는 방식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작은 세부에까지 속뜻이 있다’는 것과 ‘모든 단어를 고정된 상응 사전으로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전자는 AC.2가 직접 선언하는 말씀의 성격이고, 후자는 우리가 그 선언을 잘못 사용하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해석 방식입니다.

 

그리고 AC.2에서는 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가 특별히 주님과 연결됩니다. 말씀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의 궁극적인 초점은 단순히 ‘성경의 모든 단어에는 숨은 뜻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내적인 것들이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 전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AC의 방대한 세부 해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말씀의 전체적인 이야기뿐 아니라 그 이야기를 이루는 개별적인 것들까지 내적인 것을 품고 있으며,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 확신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말씀을 큰 주제만 요약하지 않고 가장 세밀한 표현들까지 따라가며 해설합니다. (AC.2 심화 1)

 

 

 

AC.2 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 심화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단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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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서문, ‘말씀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

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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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4. ‘신적 진리’(Divine Truth)란 무엇인가?

 

AC.1 해설을 읽다가 ‘신적 진리’(Divine Truth)라는 표현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AC.1 원문 자체에는 ‘Divine Truth’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말씀의 내적인 것과 그 근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해설에 사용된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신학 용어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AC.1의 어떤 단어를 신적 진리라고 번역한 것인가?’가 아니라 ‘해설에서 말한 신적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진리’는 단순히 인간이 알고 있는 옳은 정보나 참된 명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수많은 사실과 진리를 알 수 있지만, ‘신적’이라는 말이 붙을 때에는 그 출처가 인간의 지식이나 추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적 진리는 말씀과도 깊이 연결되고, 인간에게 빛을 주며 선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역사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진리는 인간의 이해 속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신적 진리가 된다’고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신적 진리가 신적인 것은 인간에게 어떤 효과를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근원 자체가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그 신적 진리를 자신의 이해와 삶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이 점은 AC.1과도 잘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약의 외적 의식과 규례와 역사처럼 보이는 것들 안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것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주님과 주님의 천국과 교회 등에 관계한다고 선언합니다. 이때 말씀을 단순한 인간의 종교 문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 ‘신적 진리’라는 개념은 앞으로 매우 중요해집니다. 다만 AC.1 자체가 아직 그 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그 의미를 미리 지나치게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AC.1과 관련하여 ‘신적 진리’를 기억할 때에는 우선 두 가지만 붙들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참인 정보’를 뜻하는 말이 아니며, 그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말씀과 주님, 선과 진리, 신적 유입에 관한 설명이 쌓이면 ‘신적 진리’라는 말의 깊이도 점차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AC.1 심화 4)

 

 

 

AC.1, 서문, ‘말씀 안에 담긴 하늘의 비밀들’

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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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심화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해설과 심화 2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원어에서는 층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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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해설과 심화 2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원어에서는 층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서는 먼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AC.1 원문에는 우리가 해설에서 사용한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AC.1의 ‘층위’를 어떤 하나의 영어 또는 라틴어 단어의 번역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저작 전체에서 ‘단계’ 또는 ‘층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말 가운데 하나는 영어 번역에서 ‘degree’, 라틴어에서는 ‘gradus’입니다. 특히 서로 질적으로 구별되는 단계들을 설명할 때 이 개념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 천국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AC.1에서 `gradus`라고 썼고 우리가 그것을 층위라고 번역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따라서 기존 설명처럼 AC.1의 ‘층위’의 원어가 곧 ‘degree’, 더 엄밀히는 ‘discrete degree’라고 확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AC.1 해설에서 ‘층위’라고 한 것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차이를 독자에게 설명하기 위해 선택한 한국어입니다. 이후 다른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gradus’나 그 밖의 관련 표현을 사용한다면 그 자리에서는 각각의 원어와 문맥을 따라 번역해야 합니다.

 

이것은 번역 작업에서 꽤 중요한 원칙입니다. 해설을 위해 사용하는 한국어 개념과 스베덴보리 원문의 전문용어를 서로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층위’가 스베덴보리 사상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고 해서 그 단어가 등장하는 모든 해설의 배후에 반드시 하나의 동일한 원어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대로 실제 원문에 ‘gradus’가 등장할 때는 그 문맥에서 ‘단계’, ‘층위’, ‘정도’ 가운데 무엇이 가장 적절한지 따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1의 층위에 대한 원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답은 조금 뜻밖입니다. ‘AC.1에는 그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없다’입니다. ‘층위’는 우리가 해설에서 사용한 표현이며, 스베덴보리의 단계 개념을 대표하는 중요한 원어 가운데 ‘gradus’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둘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구별을 분명히 하는 것이 앞으로 라틴어 원문까지 함께 대조하며 AC를 번역할 때 훨씬 안전한 출발점이 됩니다. (AC.1 심화 3)

 

 

 

AC.1 심화 4, ‘신적 진리’(Divine Truth)란 무엇인가?

AC.1 심화4. ‘신적 진리’(Divine Truth)란 무엇인가? AC.1 해설을 읽다가 ‘신적 진리’(Divine Truth)라는 표현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AC.1 원문 자체에는 ‘Divine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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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2, ‘층위’란 무엇인가?

AC.1 심화2. ‘층위’란 무엇인가? AC.1 해설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말씀의 겉 글자와 그 안의 내적인 것이 단순히 같은 평면에 놓인 두 가지 설명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표현하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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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2. ‘층위’란 무엇인가?

 

AC.1 해설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말씀의 겉 글자와 그 안의 내적인 것이 단순히 같은 평면에 놓인 두 가지 설명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스베덴보리에게 층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에서 서로 다른 단계와 질서의 구별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겉 사람과 속 사람, 지상과 천국을 단순히 같은 종류의 것이 조금 더 높아지거나 낮아진 것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후기 저작에서는 연속적 단계와 불연속적 단계의 구별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층위’라는 한국어는 스베덴보리의 세계를 설명할 때 유용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AC.1 원문 자체가 ‘층위’라는 전문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AC.1은 외적인 것들 안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것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1 해설에서 사용한 ‘층위’는 우선 이 차이를 독자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해설어입니다. 이것을 곧바로 스베덴보리의 단계 교리 전체와 동일시하거나, AC.1이 이미 자연적·영적·천적 단계의 완성된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구별은 오히려 ‘층위’라는 말을 더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말씀의 문자와 내적인 것을 완전히 분리된 두 책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속뜻을 문자적 의미의 조금 더 깊은 해석 정도로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의 말씀 안에서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어떻게 관계하는지는 이후 AC를 읽으면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서 AC.1에서 ‘층위’라는 표현은 하나의 유용한 안내어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다만 그 단어 자체를 AC.1 원문의 전문용어로 생각하지 않고, ‘겉 글자에서 보이는 외적인 것과 그 안에 존재하는 내적인 것을 구별하여 이해하기 위한 해설상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을 그어 두면 앞으로 스베덴보리의 실제 단계 교리가 등장할 때 그 개념과도 혼동하지 않고 연결할 수 있습니다. (AC.1 심화 2)

 

 

 

AC.1 심화 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심화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해설과 심화 2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원어에서는 층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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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1, ‘religious belief’를 왜 ‘종교적인 믿음’으로 번역하는가?

AC.1 심화1. ‘religious belief’를 왜 ‘종교적인 믿음’으로 번역하는가? AC.1에서 ‘religious belief’는 말씀의 내적인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열거하는 가운데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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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1. ‘religious belief’를 왜 ‘종교적인 믿음’으로 번역하는가?

 

AC.1에서 ‘religious belief’는 말씀의 내적인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열거하는 가운데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religious belief’,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faith’가 아니라 ‘belief’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AC 번역에서 ‘faith’는 기본적으로 ‘신앙’, ‘belief’는 ‘믿음’으로 구별하기로 한 원칙을 따르면, ‘religious belief’는 ‘종교적인 믿음’으로 옮기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신앙’이라고 번역하면 원문에서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했을 때 그 차이가 한국어에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AC.1의 이 한 표현만으로 ‘religious belief’의 신학적 범위를 지나치게 크게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 체계만을 가리키는지, 교회 밖에서 신성을 인정하는 종교적 믿음까지 모두 포함하는지, 또는 ‘faith’와 ‘belief’ 사이에 스베덴보리가 언제나 일정한 전문적 구별을 두는지까지는 더 많은 용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AC.1은 아직 그러한 구별을 설명하는 문맥이 아니라 말씀 안의 내적인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넓게 열거하는 서문의 첫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는 원문의 차이를 보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faith’가 나오지 않았는데 익숙한 신학 용어라는 이유로 ‘신앙’으로 바꾸지 않고, ‘religious belief’를 ‘종교적인 믿음’으로 옮겨 두는 것입니다. 이후 AC를 읽으며 ‘faith’와 ‘belief’의 실제 용례가 충분히 쌓이면 두 단어의 관계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사용을 따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AC.1 심화 1)

 

 

 

AC.1 심화 2, ‘층위’란 무엇인가?

AC.1 심화2. ‘층위’란 무엇인가? AC.1 해설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말씀의 겉 글자와 그 안의 내적인 것이 단순히 같은 평면에 놓인 두 가지 설명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표현하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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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서문, ‘말씀 안에 담긴 하늘의 비밀들’

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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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1. 왜 같은 ‘짐승’이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AC.45와 AC.46을 읽다 보면 조금 혼란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고 하면서 어떤 곳에서는 선한 애정을, 다른 곳에서는 악한 애정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상응이라는 것은 하나의 자연물이 하나의 영적 의미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짐승 = 애정’이라면 선한 애정인지 악한 애정인지도 하나로 정해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은 상응을 처음 접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상응을 단순한 ‘영적 암호표’처럼 생각하면 ‘물 = 진리’, ‘나무 = 지각’, ‘짐승 = 애정’처럼 하나의 단어 옆에 하나의 뜻을 적어 놓고 모든 성경 구절에 똑같이 대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AC를 읽어 가면 상응은 그렇게 기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됩니다.

 

AC.46 자체가 좋은 예입니다. 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짐승이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기본적인 연결은 유지됩니다. 짐승은 인간의 ‘애정’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애정 자체에 선한 애정과 악한 애정이 있으므로, 그것을 표현하는 짐승의 의미도 문맥과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자연계의 동물들도 모두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 AC.45에서 스베덴보리는 해를 끼치는 짐승과 해를 끼치지 않는 선하고 온순한 짐승을 구별했습니다. 곰, 늑대, 개와 같은 동물을 악한 애정의 예로 들고, 암송아지, 양, 어린양 같은 동물을 선하고 온순한 것의 예로 들었습니다. 따라서 ‘동물’이라는 큰 범주가 애정과 상응한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동물이 동일한 종류의 애정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같은 표현도 문맥의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AC.46에서 들짐승이 하나님과의 언약과 평화 속에 등장하는 구절들이 있는가 하면, 겔34:25에서는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들짐승’이라는 말을 발견하자마자 무조건 선이나 악 가운데 하나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태를 다루는 말씀인지, 그 짐승이 어떤 관계 속에서 등장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상응이 임의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본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문맥에 따른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짐승과 애정 사이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애정의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 안에서 주님을 향하고 이웃을 향하는 애정과, 자기와 세상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악한 애정은 모두 ‘애정’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범주에 속하지만 그 질과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상응을 읽을 때 ‘이 자연물의 정확한 정답은 무엇인가?’라고만 묻기보다 ‘이 자연물이 인간의 어떤 영역과 관계되며, 지금 이 문맥에서는 그 영역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더 좋습니다. 짐승의 경우에는 ‘애정과 관계된다’는 기본 관계를 먼저 붙들고, 그다음 그 애정이 선한지 악한지, 온순한지 해로운지, 질서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문맥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앞으로 AC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자연물이 긍정적인 문맥과 부정적인 문맥에 모두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스베덴보리가 마음대로 뜻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본적인 상응 관계 안에서도 대상의 질과 상태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 원리를 근거로 독자가 마음대로 문맥에 맞추어 의미를 만들어 내서는 안 됩니다. ‘긍정적인 구절이니까 좋은 뜻, 부정적인 구절이니까 나쁜 뜻’이라고 임의로 정하는 것도 상응의 해석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전체에 반복되는 용례와 상응의 질서를 통해 이러한 의미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AC를 읽을 때에는 개별 상응 하나를 떼어 자유롭게 응용하기보다, 그가 여러 구절을 서로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AC.46에 그토록 많은 성경 구절이 인용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의 구절만 보고 ‘짐승은 애정을 뜻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과 예레미야와 호세아와 시편과 이사야와 계시록 등 말씀 전체에서 짐승과 생물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는지를 함께 보여 줍니다. 상응은 한 구절에 억지로 끼워 넣는 해석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내적 연결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글 자체가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짐승이 어떻게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짐승’과 ‘애정’이라는 기본적인 상응 관계는 유지되지만, 인간의 애정 자체가 선하거나 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는 짐승의 의미도 그 성질과 문맥에 따라 달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어 하나에 뜻 하나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상응이 말씀 전체의 문맥에서 어떤 상태와 질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AC의 상응 해석이 조금 덜 낯설어집니다. 상응은 단순한 단어 사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내적 상태를 자연계의 형상들을 통해 표현하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AC.46, 창1:24-25, 말씀의 짐승들은 왜 인간의 애정을 뜻하는가?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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