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거듭남의연속적상태들인여섯날(days),곧여섯시기(periods)는전반적으로다음과같습니다. The six days,or periods,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are in general as follows.
해설
AC.6은 창세기 1장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읽는지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선언하는 문장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창조의 과정이 이어지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여섯 날을 ‘사람의거듭남의연속적상태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이어지는 빛, 궁창, 땅과 식물, 두 광명체, 물고기와 새, 짐승과 사람의 창조는 단지 자연계의 창조 순서를 설명하는 것으로만 읽히지 않고,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그 내면에서 차례로 일어나는 상태들의 변화로 읽히게 됩니다. AC.6은 아직 그 여섯 상태 각각의 내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이어지는 AC.7-13에서 하나씩 밝혀집니다. 여기서는 먼저 독자에게 ‘여섯날을여섯거듭남의상태로읽으라’는 가장 기본적인 해석의 문을 열어 줍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날들’(days)이라고만 하지 않고 곧바로 ‘또는시기들’(orperiods)이라고 덧붙인 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창세기의 ‘날’은 단순히 일정한 길이의 자연적 시간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고, 거듭남 가운데 사람이 지나가는 하나의 상태와 그 상태가 지속되는 시기를 가리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이라는 순서는 단순한 달력상의 시간 순서가 아니라 거듭남의 상태가 차례로 전개되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AC.6이 특별히 ‘연속적상태들’(successivestates)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하나의 동일한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앞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변화하면서 진행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연속적상태들’을 곧바로 사람이 반드시 여섯 단계를 한 번씩 정확히 통과해야 하는 고정된 도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6은 아직 그런 세부적인 문제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지막의 ‘전반적으로’(ingeneral)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부터 설명할 여섯 상태가 거듭남의 전체 과정을 ‘전반적으로’보여 주는 개요임을 먼저 밝힙니다. 따라서 AC.7-13에서 설명되는 여섯 상태는 거듭남의 큰 질서를 보여 주는 것이며, 각 상태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수많은 세부 과정까지 이 짧은 개요에 모두 담겨 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AC.6은 세밀한 거듭남의 단계표를 제시하는 문장이 아니라, 창세기 1장의 여섯 날 전체를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큰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는 선언입니다.
이 때문에 AC.6은 짧지만 창1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독자가 이 한 문장을 받아들이면 창세기 1장의 풍경이 달라집니다. 빛이 생기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물 가운데 궁창이 생기고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이 나뉘는 것은 사람 안에서 어떤 상태를 뜻하는지, 땅이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내는 것은 무엇인지, 해와 달과 별이 나타나고 살아 움직이는 생물들이 등장하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는 것은 무엇인지를 새롭게 묻게 됩니다. AC.6은 아직 그 질문들에 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을 읽는 첫 열쇠를 건넵니다. 창조의 여섯 날은 사람의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 상태이며, 이제 AC.7부터 그 상태들이 차례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AC.6해설)
이것이참으로그러하다는사실은주님으로부터가아니고서는아무도알수없습니다.그러므로미리말씀드릴것은,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저는이제수년동안끊임없이,중단됨없이영들과천사들과함께있으면서그들이말하는것을듣고,또저도그들과말할수있도록허락받았다는것입니다.이렇게하여저는지금까지어떤사람에게도알려진적이없고,사람의생각속에조차들어온적이없는사후세계의놀라운것들을듣고볼수있었습니다.저는여러종류의영들에관하여,죽음이후영혼들의상태에관하여,지옥곧불신앙가운데있는자들의비참한상태에관하여,천국곧신앙안에있는자들의복된상태에관하여,그리고특히온천국에서인정되고있는신앙의교리에관하여가르침을받았습니다.이러한주제들에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이어지는글들에서더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is is really the case no one can possibly know except from the Lord.It may therefore be stated in advance t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ranted me now for some years to be constantly and uninterruptedly in company with spirits and angels,hearing them speak and in turn speaking with them.In this way it has been given me to hear and see wonderful things in the other life which have never before come to the knowledge of any man,nor into his idea.I have been instructed in regard to the different kinds of spirits;the state of souls after death;hell,or the lamentable state of the unfaithful;heaven,or the blessed state of the faithful;and especially in regard to the doctrine of faith which is acknowledged in the universal heaven;on which subjects,of the Lord’s Divine mercy,more will be sai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AC.5는 짧은 서문 AC.1-5의 마지막 글이면서, 앞의 네 글과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속뜻이 있으며,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고, 문자와 내적 의미의 관계가 인간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와 같으며, 창세기 첫 장들이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이것을어떻게알았는가?’AC.5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그의 첫 번째 대답입니다.
첫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참으로그러하다는사실은주님으로부터가아니고서는아무도알수없습니다.’여기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관한 지식의 궁극적인 출처를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학문적 연구만으로 발견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가 앞으로 밝히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해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알게 된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AC.5는 단순한 영계 체험담의 서두라기보다, 앞으로 자신이 말할 것의 출처에 관한 선언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어지는 표현에서도 같은 태도가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능력을 얻었다고 말하기보다 ‘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과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경험이 실제적이었다는 매우 강한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경험의 원인을 자기 능력이나 공로에 돌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주님의신적자비’라는 표현은 이 짧은 AC.5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여 사실상 글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수년동안끊임없이,중단됨없이’라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어느 날 잠깐 환상을 보았거나 꿈속에서 영적인 광경을 경험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상당한 기간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하며 듣고 말하는 상태가 계속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후 AC에 등장하는 영계에 관한 수많은 기록을 이해할 때에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을 단편적인 환상이나 상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러므로그의모든주장은참이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과 ‘그가무엇을주장하는지를정확히이해하는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AC.5는 독자에게 자신의 경험을 강제로 증명하려는 단락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근거로 말하는지를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 읽는 독자는 이 단계에서 그의 영계 경험을 즉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보다, 우선 ‘저자는자신이이런경험을주님으로부터허락받았다고주장하며이책을쓰고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후의 내용을 따라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보고 들었다고 하는 내용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천국을보았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여러종류의영들’, ‘죽음이후영혼들의상태’, ‘지옥’, ‘천국’, 그리고 ‘온천국에서인정되고있는신앙의교리’를 차례로 열거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AC곳곳에 삽입될 영계 기록들의 주요 주제를 미리 보여 주는 작은 목차와도 같습니다. 실제로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해설하는 글 사이사이에 사후세계와 영들, 천국과 지옥, 인간의 영적 구조 등에 관한 기록을 광범위하게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죽음이후영혼들의상태’라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만 떼어 읽으면 인간이 지상에서는 단지 물질적인 존재였다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을 따라가면 인간에게는 지상생활 중에도 영적인 내면이 있으며,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통하여 살아간다는 설명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은 인간의 생명이 끝나거나 전혀 다른 존재가 새로 생기는 사건이라기보다, 물질적인 몸을 벗고 영적 세계에서 자신의 생명을 계속 살아가는 전환입니다. 따라서 AC.5의 ‘soulsafterdeath’는 그 이후의 가르침 전체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옥을 ‘불신앙가운데있는자들의비참한상태’, 천국을 ‘신앙안에있는자들의복된상태’라고 표현한 것도 이후 AC를 읽으면서 점차 깊어질 부분입니다. 여기서 ‘신앙’을 단순히 어떤 교리를 머리로 인정하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신앙과 체어리티, 진리와 선의 관계를 계속 설명하며, 사랑과 삶에서 분리된 신앙이 참된 신앙일 수 있는지를 매우 깊이 다룹니다. 따라서 이 짧은 서문의 ‘신앙안에있는자’와 ‘불신앙가운데있는자’를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종교적 소속이나 교리 동의 여부로 미리 고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온천국에서인정되고있는신앙의교리’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제시할 신앙의 교리를 자기 개인의 신학 체계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이 ‘온천국에서인정되고있는’교리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매우 큰 주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문장을 과장해서 확대하기보다, 그가 이후 실제로 무엇을 ‘신앙의교리’라고 설명하는지 AC를 따라가며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5에서는 그 내용을 아직 상세하게 제시하지 않고 앞으로 더 말하겠다고만 예고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AC.5가 말씀의 속뜻에 관한 계시와 영계 경험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했다고 해서 ‘천사들에게창세기의속뜻을배워적었다’고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의 첫 문장은 지식의 궁극적인 출처를 ‘주님으로부터’라고 밝히고,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을 통하여 사후세계에 관한 여러 사실을 듣고 보았으며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천사들이스베덴보리에게가르쳐준신학’으로 압축하는 것은 이 단락 자체보다 더 나아간 설명이 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그의 영계 경험을 흥미로운 초자연적 현상 자체로 소비하면 AC의 중심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영계에 관한 모든 기록을 주변적인 장식으로 제거해 버려도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놓치게 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기록을 그가 제시하는 전체 질서 안에서 읽는 것입니다. 영계에 관한 지식 역시 결국 주님과 말씀, 천국과 교회, 인간의 거듭남과 영원한 삶을 이해하는 데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AC.5에서 가장 먼저 기억할 말은 ‘영들과천사들’보다 오히려 ‘주님의신적자비’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놀라운 경험을 말하면서도 그 경험의 출처와 허락을 주님께 돌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 말하려는 사후세계의 여러 사실과 신앙의 교리 역시 자기 자신을 중심에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알려지고 허락된 것을 전하려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5는 하나의 짧지만 잘 짜인 서문을 이룹니다. AC.1은 말씀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AC.2는 그 말씀의 생명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온다고 밝힙니다. AC.3은 문자와 속뜻의 관계를 몸과 영혼에 비유합니다. AC.4는 그 원리를 창세기에 적용하여 창세기 1장이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AC.5는 ‘그것을어떻게알수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그 지식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자신에게 영적 세계와의 특별한 교통이 허락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이제 서문은 끝나고 AC.6부터 창세기 1장의 실제 해설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조의 여섯 날을 인간의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인 상태로 개관한 뒤, 창1:1부터 말씀의 표현 하나하나를 풀어 갑니다. 따라서 AC.5는 단순히 ‘스베덴보리가영계를보았다’는 놀라운 이야기로 서문을 끝내는 글이 아닙니다. 독자가 이제부터 읽게 될 방대한 해설이 어떤 주장 위에 서 있는지를 밝히고, 그 문턱에서 다시 한번 모든 것의 근원을 ‘주님의신적자비’에 두는 글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AC.5해설)
마음이오직문자적의미에만붙들려있는동안에는,그안에이러한것들이들어있다는사실을그누구도볼수없습니다.예를들어창세기의첫장들에서문자적의미로발견할수있는것은세상의창조와,낙원이라불리는에덴동산과,처음창조된사람으로서의아담에관한것뿐입니다.누가그밖의것을생각하겠습니까?그러나이어지는페이지들에서이내용들이지금까지결코드러난적이없는아르카나(arcana)를품고있다는사실이충분히입증될것입니다.실제로창세기1장은그속뜻으로는일반적으로인간의새로운창조,곧그의거듭남을다루며,구체적으로는태고교회(theMostAncientChurch)를다룹니다.그리고그방식은가장작은표현하나까지도이러한것들을표상하고,의미하며,그안에품고있지않은것이하나도없을정도입니다. While the mind cleaves to the literal sense alone,no one can possibly see that such things are contained within it.Thus in these first chapters of Genesis,nothing is discoverabl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ther than that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treated of,and the garden of Eden which is called paradise,and Adam as the first created man.Who supposes anything else?But it will be sufficiently established in the following pages that these matters contain arcana which have never yet been revealed;and in fact that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treats in general of the new creation of man,or of his regeneration,and specifically of the most ancient church;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which does not represent,signify,and enfold within it these things.
해설
AC.4는 앞선 AC.1-3에서 제시한 말씀에 관한 원리를 실제 성경 본문에 처음 적용합니다. AC.1에서는 구약의 겉 글자 안에 하늘의 깊은 아르카나가 있다고 했고, AC.2에서는 말씀의 가장 작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품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AC.3에서는 이러한 내적인 생명과 분리된 문자를 영혼 없는 몸에 비유했습니다. 이제 AC.4에서는 독자가 실제로 읽게 될 창세기의 첫 장들을 가리키며, 앞에서 말한 원리가 바로 이 본문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처음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문자적 의미에서 독자가 실제로 무엇을 볼 수 있는지를 인정합니다. 창세기의 첫 장들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세상의 창조와 에덴동산, 그리고 처음 창조된 사람으로서의 아담이 보입니다. 그래서 ‘누가그밖의것을생각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자적 의미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오직’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으면 그 안에 있는 다른 것들을 볼 수 없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AC.3에서 문자와 내적인 생명의 관계를 몸과 영혼에 비유했던 것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창세기 1장에 대한 AC의 첫 번째 결정적인 해석이 제시됩니다. 창세기 1장은 속뜻으로 ‘일반적으로는인간의새로운창조,곧그의거듭남’을 다루며, ‘구체적으로는태고교회’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 그리고 여섯 날의 질서가 하나씩 해설되면서 이것이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따라서 AC.4에서는 그 세부 내용을 미리 설명하기보다, 창조 이야기가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는 큰 방향을 정확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와 ‘구체적으로’의 구별도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의 속뜻은 한 인간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는가, 곧 어떻게 거듭나는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구체적으로는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라고 부르는 교회의 상태를 다룹니다. 따라서 앞으로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개인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AC.4에서 두 방향을 함께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태고교회가 정확히 어떤 교회이며 그 상태가 어떠했는지는 이후 해당 번호들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앞으로 AC전체의 해설 방식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창세기 1장은 대략적으로만 거듭남을 상징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장작은표현하나까지도’이러한 것들을 ‘표상하고,의미하며,그안에품고’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AC.2에서 말씀의 모든 것이 가장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품고 있다고 한 선언이 창세기 1장에 직접 적용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후 스베덴보리가 단어 하나와 표현 하나까지 세밀하게 해설하는 것은 부수적인 관심 때문이 아니라, 말씀의 개별적인 것들에도 속뜻이 있다는 그의 말씀 이해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마지막 표현 때문에 ‘표상’과 ‘상응’이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AC.4원문에는 실제로 ‘표상하고’(represent), ‘의미하며’(signify), ‘그안에품는다’(enfold)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 자연적인 사람과 사물과 사건이 어떻게 영적인 것을 표상하고 의미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만나게 됩니다. 그 관계를 이해하는 데 ‘표상’과 ‘상응’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됩니다. 다만 AC.4자체는 아직 그 두 개념의 전체 교리를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그 질문을 심화로 넘기고 본문에서는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표현까지도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을 품고 있다는 선언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AC.4는 AC서문에서 하나의 중요한 경계선입니다. 앞의 세 번호가 ‘말씀에는속뜻과생명이있다’는 원리를 세웠다면, 이제 AC.4는 그 원리를 창세기 1장에 직접 적용하여 ‘이창조이야기는속뜻으로인간의새로운창조,곧거듭남과태고교회를다룬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선언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이어지는페이지들에서충분히입증될것’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펼쳐질 창세기 1장의 세밀한 해설 자체가 바로 그 입증 과정입니다. (AC.4해설)
이러한생명이없다면,문자로서의말씀은죽은것입니다.이점은기독교세계에알려져있듯이,인간이속사람(internalman)과겉사람(externalman)으로이루어져있는것과같습니다.속사람과분리되면겉사람은몸일뿐이며,그러므로죽은것입니다.살아있으며겉사람을살아있게하는것은속사람이기때문이며,속사람은영혼입니다.말씀도이와같아서,문자만으로보자면영혼없는몸과같습니다. Without such a life,the Word as to the letter is dead.The case in this respect is the same as it is with man,who—as is known in the Christian world—is both internal and external.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man, the external man is the body,and is therefore dead; for it is the internal man that is alive and that causes the external man to be so, the internal man being the soul. So is it with the Word, which,in respect to the letter alone, is like the body without the soul.
해설
AC.3은 AC.1과 AC.2에서 말한 ‘말씀의생명’을 인간의 몸과 영혼이라는 매우 선명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AC.1에서는 말씀의 겉 글자 안에 내적인 것들이 있다고 했고, AC.2에서는 말씀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에서는 그 내적인 생명과 겉 글자의 관계를 ‘속사람과겉사람’, 더 직접적으로는 ‘영혼과몸’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첫 문장인 ‘이러한생명이없다면,문자로서의말씀은죽은것입니다’에서 ‘이러한생명’은 바로 앞 AC.2와 연결됩니다. AC.2에서는 말씀의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고 그분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3의 ‘이러한생명’은 막연히 성경을 읽을 때 느끼는 감동이나 교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 있는 내적인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향하는 데서 오는 생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인간에게 비유합니다. 인간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고,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몸일 뿐이며 죽어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속 사람이고 겉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것도 속 사람이며, 여기서 그는 속 사람을 영혼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이 구조를 그대로 말씀에 적용하여 ‘문자만으로보자면영혼없는몸과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AC.3의 핵심은 문자와 속뜻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만을 그것을 살리는 내적인 것과 분리하여 볼 때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문자적 의미를 낮추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영혼없는몸’이라고 한 것은 몸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유의 초점은 몸 자체의 무가치함이 아니라 영혼과 분리된 몸의 죽음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의 문자도 버려야 할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의 내적인 것과 함께 읽혀야 합니다. 이후 AC전체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문자를 한 구절씩 붙들고 그 속뜻을 해설하는 것 자체가 이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는 문자를 떠나 속뜻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문자 안에서 내적인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따라서 AC.3은 AC.1-3의 흐름을 매우 간결하게 완성합니다. AC.1은 ‘겉글자안에내적인것들이있다’고 했고, AC.2는 ‘그내적인것들이생명그자체이신주님을가리키기때문에말씀에는생명이있다’고 했으며, AC.3은 ‘그생명과분리된문자는영혼없는몸과같다’고 합니다. 이제 독자는 왜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문자에만 머물지 않고 그 안의 속뜻을 열어 가려 하는지 이해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말씀의 문자는 몸과 같고,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내적인 것은 영혼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앞선 AC.2에서 밝힌 대로 주님이십니다. (AC.3해설)
그러나기독교세계는아직도말씀안에있는모든것이전체적으로나개별적으로나,아니가장작은세부적인것하나하나,가장미세한점하나에이르기까지도영적이고천적인것들을의미하고그안에품고있다는사실을깊이알지못하고있습니다.그로인해구약성경은거의소중히여김을받지못하고있습니다.그러나말씀이참으로그러한성격을지닌다는사실은단한가지숙고만으로도알수있습니다.말씀이주님의것이며주님으로부터온것이라면,그것은필연적으로천국과교회와종교적인믿음에속한것들을그안에지니고있어야하기때문입니다.만일그렇지않다면그것은주님의말씀이라불릴수없을것이며,그안에생명이있다고도말할수없을것입니다.그렇다면그생명은어디에서오는것입니까?그것이생명에속한것들에서오지않는다면어디에서오는것이겠습니까?곧그안의모든것이전체적으로나개별적으로나생명그자체이신주님을가리키기때문에그말씀에는생명이있는것입니다.그러므로그분을내적으로바라보지않는것은살아있지않으며,말씀가운데어떤표현이든그안에그분을품고있지않다면,다시말해그나름의방식으로그분을가리키지않는다면,그것은신성한것이아니라고참으로말할수있습니다. The Christian world,however,is as yet profoundly unaware of the fact that all things in the Word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nay,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signify and enfold within them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and therefore the Old Testament is but little cared for.Yet that the Word is really of this character might be known from the single consideration that being the Lord’s and from the Lord it must of necessity contain within it such things as belong to heaven,to the church,and to religious belief,and that unless it did so it could not be called the Lord’s Word,nor could it be said to have any life in it.For whence comes its life except from those things that belong to life,that is to say,except from the fact that everything 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who is the very life itself;so that anything which does not inwardly regard him is not alive;and it may be truly said that any expression in the Word that does not enfold him within it,that is,which does not in its own way bear reference to him,is not Divine.
해설
AC.2는 AC.1의 선언을 한층 더 강하게 밀고 나갑니다. AC.1에서는 구약의 겉 글자 안에 ‘하늘의깊은비밀들’이 있으며,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등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2에서는 그 범위를 더욱 분명히 하여, 말씀의 모든 것이 ‘가장작은세부적인것하나하나,가장미세한점하나에이르기까지도’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그 안에 품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가 이것을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거의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진단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어떤 부분에는 속뜻이 있고 어떤 부분에는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의 주장은 훨씬 철저합니다. 말씀은 전체적으로뿐 아니라 개별적으로도, 심지어 가장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주장을 자신의 영계 체험부터 내세워 증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한가지숙고’만으로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숙고란 말씀이 ‘주님의것이며주님으로부터온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말씀이 참으로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 안에는 반드시 천국과 교회와 종교적인 믿음에 속한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주님의말씀’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AC.1이 ‘말씀안에내적인것들이있다’고 선언했다면, AC.2는 그 내적인 것들이 있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말씀의 근원, 곧 주님에게서 찾습니다.
여기서 AC.2의 중심어인 ‘생명’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다면그생명은어디에서오는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생명은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그자체이신주님’을 가리키는 데서 온다고 답합니다. 따라서 말씀의 생명은 단지 오래 살아남은 종교 문헌이라는 데 있지 않고, 문장이 아름답거나 인간에게 감동과 교훈을 준다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말씀의 가장 깊은 지향이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주님에게서 왔고, 그 안의 모든 것은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다시 주님을 가리킵니다.
이 때문에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그분을내적으로바라보지않는것은살아있지않다’고 하고, 말씀 가운데 어떤 표현이든 그 안에 주님을 품고 있지 않으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신성한것이아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구절의 문자적 표면에 주님의 이름이 직접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구약의 족보와 역사, 율법과 전쟁, 지명과 숫자처럼 겉으로는 주님과 직접 관계없어 보이는 표현들까지도 내적으로는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가리킨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주장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후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가장 세밀한 표현들까지 속뜻을 따라 읽어 갑니다.
그러므로 AC.2는 앞으로 펼쳐질 방대한 AC해설의 중요한 근거를 제공합니다. 왜 단어 하나, 이름 하나, 숫자 하나까지 그렇게 세밀하게 살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생명은 일부 유명한 구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나개별적으로나’그 안에 있으며, 그 생명의 근원은 ‘생명그자체이신주님’입니다. AC.1에서 ‘말씀안에하늘의깊은비밀들이있다’는 문을 열었다면, AC.2에서는 왜 그 비밀들이 말씀의 가장 작은 것에까지 있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말씀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왔고, 그 안의 모든 것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AC.2해설)
구약의말씀을단순히겉글자로만보아서는,그안에하늘의깊은비밀들이들어있으며,그안에있는모든것이전체적으로나개별적으로나주님과주님의천국,교회,종교적인믿음,그리고그와관련된모든것을가리킨다는사실을누구도알아차릴수없습니다.글자그대로의의미,곧겉글자만으로는,일반적으로말해그안의모든것이단지유대교회의외적의식들과규례들만을가리키는것처럼보이기때문입니다.그러나실상은그말씀곳곳에내적인것들이있으며,그것들은외적인것들에서는전혀드러나지않습니다.다만극히일부는주님께서사도들에게드러내시고설명하셨는데,예를들면희생제사들은주님을상징하며,가나안땅과예루살렘은천국을상징하므로‘천국의가나안’,‘하늘의예루살렘’이라불리고,낙원역시같은의미를가진다는것입니다. From the mere letter of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no one would ever discern the fact that this part of the Word contains deep secrets of heaven,and that everything with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to his heaven,to the church,to religious belief,and to all things connected therewith;for from the letter or sense of the letter all that anyone can see is that—to speak generally—everything therein has reference merely to the external rites and ordinances of the Jewish church. Yet the truth is that everywhere in that Word there are internal things which never appear at all in the external things except a very few which the Lord revealed and explained to the apostles; such as that the sacrifices signify the Lord; that the land of Canaan and Jerusalem signify heaven—on which account they are called the heavenly Canaan and Jerusalem—and that paradise has a similar signification.
해설
AC.1은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전체를 여는 첫 문장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창1:1의 ‘태초에하나님이천지를창조하시니라’에서 곧바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독자가 앞으로 말씀을 어떤 눈으로 읽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구약의 말씀을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 ‘하늘의깊은비밀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적 의미가 잘못되었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전체가 문자에서 출발합니다. 다만 말씀은 문자에 보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으며, 그 외적인 것들 안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것들’이 있다는 것이 AC.1의 첫 선언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 가운데 하나가 ‘전체적으로나개별적으로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큰 이야기나 몇몇 특별한 예언에만 더 깊은 뜻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앞으로 AC에서 인물과 장소뿐 아니라 이름과 숫자와 방향, 행동과 반복되는 표현까지 세밀하게 다루게 되는 출발점이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은 문자 가운데 몇몇 부분에서만 발견되는 특별한 교훈이 아니라, 그 말씀의 개별적인 것들 안에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첫자리에 ‘주님’이 계신다는 사실은 더욱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인 것들을 인간의 내면이나 거듭남에 관한 이야기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주님을 말하고, 이어 주님의 천국과 교회와 종교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앞으로 창세기의 창조와 에덴동산, 가인과 아벨, 노아와 홍수 등이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로 열리더라도, 그 속뜻의 중심에서 주님을 놓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내안에서무엇을뜻하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말씀이주님과주님의나라에관하여무엇을담고있는가?’라는 방향이 AC.1에서부터 주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내적인 것의 존재가 전혀 낯선 주장이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이미 밝혀 주신 예들을 듭니다. 희생 제사들은 주님을 상징하고,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은 천국을 상징하며, 낙원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희생 제사는 실제 의식이고 가나안과 예루살렘은 실제 장소이지만, 말씀 안에서는 그것들이 그 외적 대상에만 머물지 않고 내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AC.1은 아직 그 관계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우리는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이것이 ‘상응’과 ‘표상’이라는 거대한 말씀 이해로 펼쳐지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첫 번호에서는 상응의 체계를 미리 완성하기보다, 외적인 것 안에 내적인 것이 있다는 첫 문을 통과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문자와 그 안의 내적인 것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입니다. 현행 해설에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 ‘층위’라는 말을 사용했고, 바로 그 때문에 기존 심화 2와 심화 3이 생겼습니다. 이 표현 자체를 없앨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AC.1원문이 직접 ‘degree’나 ‘gradus’를 사용하여 말씀의 의미들을 단계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구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층위’는 우선 외적인 것과 그 안의 내적인 것이 동일한 평면의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는 해설상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말씀의 문자와 내적인 의미의 더 정확한 관계는 이후 스베덴보리 자신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점차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AC.1에서 독자가 먼저 붙들 것은 복잡한 상응표나 의미의 단계 체계가 아닙니다. 구약의 겉 글자 안에는 문자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하늘의깊은비밀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무엇보다 주님을 향하고, 주님의 천국과 교회와 종교적인 믿음 및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선언 하나를 먼저 세운 뒤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말씀을 하나씩 열어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AC.1은 이후 10,837개 번호 전체를 읽게 하는 첫 문이며,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라는 대작이 왜 쓰였는지를 한 문장 안에 압축해 놓은 서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해설)
참고로, 스베덴보리의 수십 권에 달하는 저작들은 전부 약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AC는 ‘천계비의’(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1749-1756, 라틴)의 약어이고, HH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CL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1768)의 약어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는 18세기 스웨덴의 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의 대표적인 저작입니다. 제목을 직역하면 ‘하늘의비밀들’, 또는 ‘천국의아르카나’ 정도가 됩니다. 여기서 ‘아르카나’(arcana)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깊고 감추어진 것들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제목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우리가 성경의 문자를 읽을 때에는 쉽게 볼 수 없지만 그 안에는 주님과 천국, 교회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깊은 내용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모두 여덟 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저작이며, 스베덴보리가 1749년부터 1756년까지 라틴어로 익명 출판했습니다. 전체 글 번호는 AC.1부터 AC.10837까지 이어집니다. 내용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차례로 따라가면서 각 절과 주요 표현의 속뜻을 밝히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주석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본문 사이사이에 천국과 지옥, 영들의 세계, 인간의 사후 상태, 천사들의 삶, 영적 유입, 자유, 섭리, 신앙과 체어리티, 거듭남 등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요한 주제들이 광범위하게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주석서이면서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영적 세계관을 가장 방대하고 체계적으로 보여 주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이해하는 데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보통 성경을 읽으면서 그 안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 인물, 교훈, 명령 등을 이해합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무가치한 껍데기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적 의미는 그 안의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외적 형식이며 기초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말씀의 문자가 전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문자 안에는 인간의 내면 상태와 거듭남의 과정, 교회와 천국의 질서, 그리고 가장 깊게는 주님과 주님의 구원 역사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감추어진 하늘의 비밀들을 그는 ‘아르카나’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기 시작하면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알고 있던 성경 이야기가 전혀 다른 깊이에서 열리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장을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와 생명체를 창조하신 이야기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문자 안에서 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거듭남’의 과정을 읽습니다. ‘빛이있으라’는 말씀부터 여섯 날에 걸쳐 창조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혼돈과 어둠 가운데 있던 인간 안에 주님의 빛이 들어오고, 선과 진리가 질서를 이루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이렇게 읽기 시작하면 ‘창조’는 더 이상 먼 옛날에 한 번 일어난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지금도 주님께서 한 사람 안에서 이루시는 ‘새창조’의 이야기가 됩니다.
이러한 독법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원리가 ‘상응’(correspondence)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자연계와 영계는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는 두 세계가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들은 그 배후의 영적인 것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러한 관계를 ‘상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등장하는 빛과 어둠, 물과 땅, 나무와 열매, 산과 강, 해와 달과 별, 동물과 식물 같은 것들은 단지 자연계의 사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 영적인 실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빛은 진리와 관련되고, 물은 진리에 속한 것들과 관련되며, 땅은 사람이나 교회의 외적·자연적 측면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떤사물은언제나하나의의미만가진다’는 식의 고정된 상징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의 의미는 말씀 전체의 문맥과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는 사람은 적잖이 당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에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와 그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며, 에덴동산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 가운데 살던 천적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뱀 역시 단순히 한 동물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감각적인 부분과 그것이 내적 질서에서 벗어날 때 일어나는 문제를 나타냅니다. 노아와 홍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의 이야기, 애굽과 광야, 모세와 출애굽 역시 문자에서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이지만,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변화, 그리고 가장 깊게는 주님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해석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왜아담이교회인가?’, ‘왜물이진리와관계되는가?’, ‘왜애굽이나광야가인간내면의상태를나타내는가?’라는 질문이 생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각 단어에 그때그때 임의로 의미를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의 표현이 창세기에서 출애굽기로, 다시 선지서와 시편과 복음서로 이어지면서 비슷한 영적 질서 안에서 사용되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표상’은 바로 이러한 말씀 전체의 연결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책에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주제는 ‘거듭남’입니다. 사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실제로 내면이 변화되고, 삶의 중심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바뀌어 가야 합니다. 그는 이 과정을 ‘거듭남’이라고 부릅니다.
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는 오랜 세월 형성된 욕망과 습관, 잘못된 생각과 자기중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들을 한꺼번에 강제로 제거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조금씩 질서를 바꾸어 가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시험과 싸움을 거치며, 배운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하려 할 때 조금씩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단순한 종교적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사랑과 생각과 행동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긴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속사람’과 ‘겉사람’의 관계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여기서 속 사람을 단순히 ‘보이지않는마음’, 겉 사람을 ‘겉으로보이는행동’이라고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겉 사람은 자연계의 삶과 직접 관계하는 인간의 외적·자연적 차원이며, 속 사람은 주님과 천국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더 내적인 차원입니다. 거듭남은 이 둘이 서로 단절된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해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겉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 질서 있게 나타나도록 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은 일상생활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에서 받아들인 것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고 믿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진리가 선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직 완전한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야 하며,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 전체에서 반복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뿐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며, 그 사랑에서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결국 신앙은 삶을 위한 것이며, 진리는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다 보면 ‘영적’(spiritual)과 ‘천적’(celestial)이라는 표현도 매우 자주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두 단어가 비슷해 보여 혼란스럽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영적인 것은 진리와 신앙, 이해와 관계되고, 천적인 것은 선과 사랑, 의지와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단순한 공식으로 고정해서는 안 되며 문맥에 따라 세심하게 읽어야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거듭남 과정의 서로 다른 상태를 설명하고, 어떤 곳에서는 교회의 서로 다른 특성을 설명하며, 또 어떤 곳에서는 천국의 서로 다른 질서와 천사들의 특성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조금씩 익혀 가는 것도 AC를 읽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이 책에는 인간의 사후 삶과 영계에 관한 내용도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영적 시야가 열려 오랜 기간 천사들과 영들을 만나고 대화할 수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이 죽은 뒤에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계속하며,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과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단순히 죽은 뒤 외부에서 배정받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이루었는가와 깊이 관계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내용 때문에 스베덴보리를 단순히 ‘사후세계를많이본신비가’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실제로 읽어 보면 그의 관심의 중심이 신기한 영계 체험 자체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천사와 영들에 관한 설명 역시 결국 ‘그렇다면인간은지금이세상에서어떻게살아야하는가?’라는 문제로 돌아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지금의 삶과 단절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삶의 방향은 사후에도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영계에 관한 설명은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배경이 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자유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선으로 이끄시지만 강제로 선하게 만들지는 않으십니다. 강제로 행한 것은 인간 자신의 삶으로 뿌리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태에 있어야 하며,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인간 혼자 이루는 자기수련도 아니고, 인간의 자유와 참여가 전혀 필요 없는 일방적인 변화도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와 능력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인간은 그것을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행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의 인간 이해는 매우 실제적입니다. 인간 안에 악과 거짓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것 때문에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가장 깊은 상태를 아시며,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이끄신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인간에게 아직 불완전한 동기와 생각이 남아 있는 것조차 허용하시면서, 그것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완벽한 사람이 갑자기 되는 사건이라기보다, 주님의 섭리 안에서 평생 계속되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에서 무엇보다 중심에 계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 책은 인간의 심리나 영적 성장만을 설명하는 책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 천국의 질서를 보여 주지만, 더 깊이 들어갈수록 모든 것은 주님과 연결됩니다. 특히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고, 지옥을 이기시며, 인류를 구원하신 역사가 펼쳐집니다. 인간의 거듭남이 가능한 것도 주님께서 먼저 그 길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를 버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비밀암호’를 찾아내는 일이 아닙니다. 문자와 속뜻은 서로 경쟁하는 두 의미가 아닙니다. 문자는 속뜻을 담고 있으며, 속뜻은 문자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상응을 통해 연결되듯, 말씀의 문자와 그 안의 영적·천적 의미도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그래서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의미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말씀을 읽는 방식도 설명합니다. 인간이 말씀의 문자에서 사람 이름과 장소, 역사적 사건을 읽을 때 천사들은 그것들과 상응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합니다. 인간과 천사가 서로 다른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말씀을 서로 다른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말씀은 자연계와 천국을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거룩하게 읽을 때, 비록 그 속뜻을 모두 알지 못하더라도 그 말씀을 통해 천국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이 점은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는 태도와도 관계됩니다. 이 책을 읽는 목적이 모든 상응을 암기하고, 모든 속뜻을 지식으로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사람을 천국적으로 만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말씀을 통해 자기 상태를 비추어 보고,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실제 삶에서 선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식은 삶을 위해 존재하고,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물론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는 쉬운 책이 아닙니다. 1만 개가 넘는 글 번호에 걸쳐 같은 개념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깊어지고, 하나의 성경 표현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다른 성경 구절이 인용됩니다. ‘상응’, ‘표상’, ‘리메인스’, ‘퍼셉션’, ‘인플럭스’, ‘proprium’, ‘영적인간’, ‘천적인간’, ‘속사람’, ‘겉사람’ 등 처음 접하면 낯선 개념들도 계속 등장합니다. 한두 번 읽어서 전체 구조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계속 읽다 보면 처음에는 서로 흩어져 있던 개념들이 점차 하나의 큰 그림 안에서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의 창조와 에덴, 타락과 홍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과 애굽, 그리고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이 서로 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영적 역사를 이루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흐름의 중심에서 주님께서 인간을 끊임없이 구원과 거듭남으로 이끌고 계신다는 하나의 주제가 점차 선명해집니다.
제가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번역하고 해설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문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만으로는 처음 접하는 독자가 그 깊은 흐름을 따라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번역에 이어 해설을 붙이고, 필요한 경우에는 별도의 심화를 통해 개념과 성경 인용, 관련 AC의 문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특히 한 글 번호를 그 자체로 고립시켜 이해하기보다 AC전체의 흐름과 연결하여 읽고,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사용하는 개념들이 서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살피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작업에서는 ChatGPT의 도움도 받고 있습니다. 번역 표현을 비교하고, 긴 문장의 구조를 분석하며, 관련 개념을 정리하고, 제가 이해한 내용을 여러 각도에서 다시 검토하는 대화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어지는 파일들에는 ‘번역,해설및심화withChatGPT’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ChatGPT자체가 어떤 영적 권위를 가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원문과 말씀, 그리고 AC전체의 문맥을 더 세밀하게 살피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독자가 말씀과 본문을 직접 살피면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 소개 역시 독자에게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강요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안에우리가지금까지보지못했던더깊은질서가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직접 읽어 보도록 초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모든 설명에 동의할 필요도 없고, 모든 개념을 한꺼번에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익숙한 성경 본문을 잠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인간의 내면과 거듭남, 천국의 질서와 주님의 역사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차근차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긴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결국 ‘이것이무슨뜻인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말씀이내삶에서어떻게살아지는가?’일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선을 위한 것이며,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아무리 많이 알고 천국의 질서를 아무리 자세히 이해한다 해도, 그것이 사람을 더욱 주님께 향하게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라는 제목의 ‘아르카나’는 감추어진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영원히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삶을 돌아보고, 주님께 빛을 구하며 오래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익숙했던 한 구절이 전혀 새롭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단순히옛사람들의이야기가아니구나.이것이교회만의이야기도아니구나.이것은지금내안에서일어나고있는일이구나.그리고그안에서주님께서일하고계시는구나.’ 바로 그 순간, 감추어져 있던 것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 첫걸음으로 창세기 1장, AC.1-66부터 시작합니다. 창1에서는 ‘혼돈하고공허하며흑암이깊음위에’ 있던 인간이 어떻게 주님의 새 창조를 거쳐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워져 가는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여섯 날의 과정과 창1만의 여러 주제들은 다음 ‘창1,AC.1-66번역,해설및심화withChatGPT소개’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우선 하나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는 성경에 전혀 다른 이야기를 억지로 덧붙이는 책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문자 안에 처음부터 감추어져 있다고 본 하늘의 질서, 곧 주님과 천국과 교회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를 하나씩 열어 보이려 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글 제목을 보면, 이미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고자 함인지 다들 아시겠지요? 맞습니다. 바로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방법인데요, 가짜들은 평소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정작 자기들이 해오던 말이 실제로 일어나면 안 믿습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인데요, 평소 그리스도, 그리스도 이미 오랜 세월 온 국민의 수 대, 수십 대, 수백 년을 이어온 염원이었지만, 정작 주님이 실제로 오시자,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물론, 유대인들 거의 전부가 몹시 불편해했어요. 이런저런 핑계들이 있겠지만, 일단 저들은 가짜여서 주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겁니다.
※ '가짜'라는 거북한 표현을 써서 좀 그러시지요? 많이 미안합니다...
2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10:25-27)
말씀처럼 말입니다. 주님도 ‘너희는 내 양이 아니다’, 즉 너희는 가짜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1-23)
이 말씀도 같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십니다. 너희 역시 가짜다 하고 계십니다.
이런 케이스가 성경에 참 많이 나옵니다. 거의 모든 선지자와 사도들, 그리고 그 속사도들, 즉 사도들의 직계 제자들 또한 그랬는데요. 어쩌면 태고교회부터 고대, 유대, 기독 등 교회사 전체를 이 주제로 기술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짜와 진짜의 차이는 그 숨은 동기에 있습니다. 가짜는 그 모든 겉보기와는 달리 그 숨은 동기가 자기 사랑입니다. 진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역시 그 모든 겉보기와는 달리 그러나 그 숨은 동기는 주님 사랑입니다. 천사들은 사람의 겉을 보지 않습니다. 내적 존재인 천사들한테는 사람의 겉은 안 보이고, 사람의 속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볼 때 사람은 곧 그의 의지이며, 어떤 일을 하는 그 숨은 동기입니다. 사람들은 겉만 보지만, 천사들은 속, 곧 그 숨은 동기를 봅니다.
그런데 다른 건 몰라도 주님에 관해서는 가짜들도 좀 그 혀가 뻣뻣해지는지 주님에 대한 직접적인 사랑의 고백 같은 거를 어색해 합니다.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주님은 저런 분이십니다’ 하는 얘기를 잘 못해요. 아마 주님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봅니다. 대신 ‘아무개가 주님에 대해 이런 책을 썼는데 저는 그 책을 읽었습니다. 아무개는 평생 주님과 동행했는데, 그 기록을 저는 읽어 보았습니다’ 식으로 그 핀트를 살짝 틉니다. 그리고 그런 책 많이 읽은 걸 자랑합니다. 본의 아니게 가짜가 되셨겠지만... 문제는, 이런 분들의 많은 말과 글을 접하고 나면,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향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하게 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 천국 해서 정말 천국에 대해 알고픈 모양이구나 싶어 주님의 허락으로 천국을 오랫동안 왕래한 사람이 천국에 대해 알려주려고 하면, 정작 이 사람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천국을 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천국에 대해 연구하고, 기술한 책만 잔뜩 읽고 있습니다. 엉뚱합니다. 천국, 천국 하는 그 숨은 동기가 정말 천국을 사랑하여 거기 가 살고픈 게 아니라 천국을 통해 얻고자 하는, 자기도 잘 모르는 무슨 목적들이 있었나 봅니다. 이런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전혀 그럴 생각도, 그럴 마음도 없었는데 제 나이 57세 되던 어느 날 주님이 천사를 보내어 저를 부르시더니 이렇게 무려 27년간 영계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경험 중 기록으로 남기라 하신 것만 이렇게 적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말입니다. 강문호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은 자원병을 쓰지 않으시고, 차출병을 쓰신다는 적확한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가고 없는 지금, 주님의 지시와 허락으로 그가 남기고 간 책을, 특히 그중에 ‘천국과 지옥’을, 신기하게도 저 역시 57세 때 접한 이후, 지난 8년 여의 세월, 집안 행사 등 부득이한 날만 빼고, 거의 하루도 낭비 없이 이 길을 달려왔습니다. 마치 뭐에 이끌리듯 말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 주변, 가족이며, 친지며, 교계 지인들이며... 그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 우리 큰아들 포함, 몇 분 계시군요. 다행입니다. 그러나 1%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디에 적기를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천 명 중 한 사람도 쉽지 않다 했다는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몇몇 분한테서는 주님이 서둘러 저를 떼어놓으셨고, 대부분은 선량하신 분들입니다. 그 가운데 온유하신 분들과 다소 강한 분들의 차이만 있지요. 그러나 그런 것과 이건 다른 건가 봅니다.
각 사람의 거듭남의 여정은 각 사람에게 맞춘 철저한 맞춤식이라 절대 획일적일 수도, 일률적일 수도 없습니다. 또한 각 사람이 붙들고 있는 나름의 교리적 입장은 그에게 있어서는 생명과도 같아 주님조차 그걸 무조건 새것으로 가시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큰일나기 때문입니다. 그 역시 지금은 그의 생명이기 때문인데요, 아우 아벨을 죽인 가인을 헤아려 그에게 무슨 표를 주어 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의 이단적 입장 역시 나중을 위해, 후손을 위해, 인류가 결국은 신앙에서 사랑을 분리하는 길로 걸어갈 걸 아시고, 그런 가인을 보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게 무슨 주님의 섭리 있으시지 싶고, 그래서 지금은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나 더 지상에 머무르게 될까요? 사실 천국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주님을 향한 경외감이 말할 수 없이 깊어지며, 그래서 그냥 오늘 밤에라도 훌쩍 떠난들 무슨 아무 미련도 없고, 후회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이 처음 얼마 동안 좀 힘들어할까요? 제가 그동안 가정경제에 거의 보탠 게 없어 그 부분은 참 많이 미안합니다. 그래서 요즘 이 부분을 많이 주님께 구하고 있어요. 제 아내와 두 아들, 특히 작은아들에게 주님이 경제적으로 조금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말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신 주님 말씀이 전에 제게 들렸듯 오늘도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께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아래 Swedenborg Foundation에 가시면 거의 모든 글을 pdf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Redesigned Standard Edition이며, 1900년대 초 번역을 1990년대에 몇 가지 손본 버전입니다. 그러니까 영어가 좀 옛글투입니다. 저는 이걸로 하고 있어 그런지 이젠 오히려 NCE라고 현대어역은 좀 낯설더군요. 뭐랄까... 좀 지나치게 의역을 했다고나 할까? 네, 뭐 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제 처음 입문하시는 분들한테는 오히려 NCE역이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글들을 읽다 보면, 순간 뇌 정지가 오는 때가 있습니다. 글의 내용이 저의 이해력 역량을 초과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인지 더 이상 진도가 안 나가지는 겁니다.
저는 살면서 이런 걸 몇 번 경험했는데요, 지금 생각나는 첫 번째는, 대학 시절, 철학과 다니는 친구 통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처음 읽었던 때입니다. 비록 어려서부터, 그러니까 중학생 때 벌써 한국문학전집 같은 걸 읽은 저지만, 예를 들면,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를, 페이지당 열 개 정도 나오는 고어들을 사전을 찾아 노트에 옮겨 적어 가며 읽었지요. 그런 저인데도... 아, 그때 그 당혹감이란... 단 한 문장을 후련하게 읽지 못하겠더군요. 아니, 그 책은 고사하고, 그 친구의 글조차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전자공학을 하던 저라서 그랬는지... 나중엔 화가 나서 원어로 읽고 싶더군요. 그러나 독일어를 따로 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포기했지요.
또 하나는, 제가 삼성에 입사, 당시 기흥 첨단연구소라는 데를 가서 C 언어 관련 무슨 과정 밟느라 연수 중이었는데, 하루는 어느 현업 여성 개발자 한 분이 나와 소프트웨어 드라이버 개발 과정을 설명하면서 특별히 어셈블리 관련 부분 핸들링을 설명하셨던 것 같은데... 저는 당시 이게 무슨 외계어인가 머리가 하얘지며 토할 것 같았습니다. 이 역시 저의 수준을 훨씬 웃도는, 저 높고 깊은 세계를 잠깐 들여다본 것이었지요.
그 후론 거의 없다가 오랜만에 또 이런 일이 생겼는데 바로 스베덴보리의 글들입니다. 이분의 글들은 영계를 다녀오신 분의 글이라 기본적으로 신비스러운데요, 특히 그에 더해 당혹스럽기까지 한 건 거의 모든 추상 개념을 마치 영상처럼 설명하시는 겁니다.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도저히 그렇게 표현, 묘사하실 수 없는... 이 지상의 모든 추상 개념은 그곳에선 눈에 보이게 나타난답니다. 주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설명들 역시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영광스럽고 그렇게 귀할 수가 없음에도, 본 적 없는 나라, 접한 적 없는 개념들 앞에 뇌 정지가 오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래는 이럴 때 눈 딱 감고 드리는 유일한 기도입니다.
‘오, 주님, 지금 제게 천국 빛을 더하사 이 글들을 읽고 이해하게 해주세요. 저를 천국 천사들 가운데 잠시 올려주셔서 이 글들을 이해할 수 있는 천사들의 지혜 가운데 저를 잠시 있게 해주세요...’
놀랍게도 이 기도를 드리고 나면 잠시 후 웬만하면 거의 다 깨닫게 됩니다.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