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4, 25)

 

AC.46

‘짐승’(beasts)이 사람의 애정(affections)을 뜻한다는 사실, 곧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한다는 사실은 말씀의 많은 구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에스겔입니다. That “beasts” signify man’s affections—evil affections with the evil, and good affections with the good—is evident from numer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Ezekiel:

 

9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겔36:9, 11, 거듭남에 대해 말하는) Behold, I am for you, and I will look back to you, that ye may be tilled and sown, and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be multiplied and bring forth fruit;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Ezek. 36:9, 11, treating of regeneration).

 

요엘입니다.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욜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 for the dwelling places of the wilderness are become grassy (Joel 2:22).

 

시편에서도 In David also: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시73:22) So foolish was I, I was as a beast before thee (Ps. 73:22).

 

예레미야에서 거듭남을 다루며 In Jeremiah, treating of regeneration:

 

2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27, 28) Behold the days come, saith Jehovah,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and I will watch over them to build and to plant (Jer. 31:27–28).

 

[2] ‘들짐승’(Wild animals)도 비슷한 의미인데요, 호세아입니다. “Wild animals” have a similar signification, as in Hosea: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 of the heavens, and with the creeping thing of the earth (Hos. 2:18).

 

욥기입니다. In Job:

 

22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욥5:22, 23) Thou shalt not be afraid of the wild animals of the earth, for thy covenant is with the stones of the field, and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be at peace with thee (Job 5:22–23).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겔34:25) I will make with you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animal to cease out of the land, that they may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Ezek. 34:25).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사43:20)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honor me, because I have given waters in the wilderness (Isa. 43:20).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겔31:6) All the fowls of the heavens made their nests in his boughs, and under his branches did all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bring forth their young, and under his shadow dwelt all great nations (Ezek. 31:6).

 

이는 앗수르에 대한 말입니다. 앗수르는 영적 인간을 뜻하며, 에덴동산에 비유됩니다. This is said of the Assyrian, by whom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and who is compared to the garden of Eden.

 

시편입니다. In David:

 

2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7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9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시148:2, 7, 9-10) Glorify ye him, all his angels, glorify Jehovah from the earth, ye whales, fruit trees, wild animal, and every beast, creeping thing, and flying fowl (Ps. 148:2, 7, 9–10).

 

이렇게 여기서 전반적으로 ‘용들’(whales), ‘과수’(fruit tree), ‘짐승’(wild animal), ‘가축’(beast), ‘기는 것’(creeping thing), ‘나는 새’(fowl)가 함께 언급되는데, 이것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뜻하지 않는다면,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Here mention is made of the same things—as “whales,” the “fruit tree,” “wild animal,” the “beast,” “creeping thing,” and “fowl,” which, unless they had signified living principles in man, could never have been called upon to glorify Jehovah.

 

[3] 선지자들은 ‘가축’(beasts)과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earth), 또 ‘가축’(beasts)과 ‘들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field)을 조심스럽게 구별합니다. 그럼에도 사람 안의 선한 것들은 ‘가축’(beasts)이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주님과 가장 가까운 이들도 ‘생물’(animals)이라 하는데,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서 모두 그렇게 말합니다. The prophets carefully distinguish between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earth,” and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field.” Nevertheless goods in man are called “beasts,” just as those who are nearest the Lord in heaven are called “animals,” both in Ezekiel and in John: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주3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7:11) All the angels stood round about the throne, and the elders, and the four animals (Rev. 7:11),3

 

※ AE.462에 의하면, 여기 ‘모든 천사’(the angels)는 일층천, 즉 가장 낮은 천국 천사들을, ‘장로들’(the elders)은 이층천, 즉 중간 천국 천사들을, ‘네 생물’(the four animals)은 삼층천, 즉 가장 높은 천국 천사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계19:4) and fell before the throne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the lamb (Rev. 19:4).

 

또한 복음이 전파되는 이들도 ‘피조물’(creatures)이라 하는데, 이는 그들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Those also who have the gospel preached to them are called “creatures,” because they are to be created anew: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16:15) Go ye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Mark 16:15).

 

 

주3. 여기 이 단어는 ‘비스트’(beasts, 짐승, 야수)가 아닌, 흠정역(the authorized version)에서처럼 ‘애니멀’(animals, 짐승, 동물)로 정확하게 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의 ‘준’(ζοόν, z¯oon)과, 라틴과 영어의 ‘애니멀’은 서로 정확히 대응하며, ‘생물’(a living creature)이라는 의미에 맞기 때문입니다. 원전(the original) 해당 구절들에서 사용된 단어는 준이며, 만일 ‘비스트’ 사용을 의도했다면 썼을 법한 테르(θήρ, th¯er)나 테리온(θηρίον, th¯erion)이 아닙니다. This word is here correctly translated “animals” and not “beasts,” as in the authorized version, for z¯oon in Greek, and animal in Latin and English, precisely correspond to each other, and properly signify “a living creature.” Z¯oon is the word used in these passages in the original, and not th¯er or th¯erion, as would be the case if “beast” had been intended.

 

해설

AC.46은 바로 앞의 AC.45에서 제시한 중요한 원리, 곧 말씀에서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는 것을 수많은 성경 구절을 통해 확인하는 글입니다. 첫 문장부터 그 목적이 분명합니다. 짐승은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하며, 이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 성경 인용이 유난히 많은 이유도 새로운 주제를 계속 추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짐승 = 애정’이라는 해석이 창1:24-25에만 임의로 적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겔36:9,11과 렘31:27-28은 ‘거듭남’이라는 문맥에서 인용됩니다. 겔36에서는 황폐했던 땅이 다시 갈리고 심어지며 그 위에 ‘사람과 짐승’이 많아지고 번성합니다. 렘31에서도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에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리고, 이어서 세우고 심으시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가져오는 핵심 이유는 문자 그대로 사람과 동물의 개체 수가 늘어나는 것만으로는 거듭남에 관한 이 말씀의 속뜻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며, 여기의 짐승이 사람 안에서 살아나는 내적인 것, 특히 애정과 관련된 것을 뜻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AC.46은 여기서 ‘사람의 씨는 정확히 무엇이고 짐승의 씨는 정확히 무엇이다’라는 세부 대응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욜2:22의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도 같은 방향에서 사용됩니다. 들의 풀이 돋고 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회복의 장면에서 들짐승 역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반면 시73:22에서는 시편 기자가 자신의 우매함을 고백하며 ‘주 앞에 짐승’과 같았다고 합니다. 이 두 구절만 보아도 ‘짐승’이라는 말 자체에 언제나 선한 뜻이나 언제나 악한 뜻 하나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AC.46의 첫 문장이 이미 말했듯이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호2:18, 욥5:22-23, 겔34:25에서는 ‘들짐승’이 언약과 평화라는 문맥에 등장합니다. 호세아에서는 들짐승과 새와 땅의 곤충과 언약을 맺고, 욥기에서는 들짐승이 사람과 화목하게 되며, 에스겔에서는 화평의 언약과 함께 ‘악한 짐승’이 땅에서 그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함께 제시하는 것은 말씀에서 짐승과 들짐승이 단순한 동물 이야기를 넘어 사람의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겔34:25가 굳이 ‘악한 짐승’이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짐승’이라는 말 자체가 곧 악이라는 뜻이라면 ‘악한’이라는 구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43:20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들짐승이 여호와를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광야에 물이 생기고 사막에 강이 생겨 하나님의 백성이 마시게 되는 장면에서 승냥이와 타조 같은 들짐승도 하나님을 존경합니다. 문자적 자연물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의 속뜻에서 인간의 내적 상태와 연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겔31:6에서는 앗수르가 큰 나무로 묘사되고 그 가지에는 새들이 깃들이며 그 아래에서는 들짐승들이 새끼를 낳습니다. AC.46은 여기서 앗수르가 ‘영적 인간’을 뜻하고 에덴동산에 비유된다고 짧게 설명합니다. 이 구절 역시 새와 짐승이 단순히 배경을 꾸미는 자연물이 아니라 영적 인간에게 속한 것들을 표현하는 말씀의 언어로 사용된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됩니다. 다만 이번 글은 앗수르나 나무, 가지, 새 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해설하려는 곳은 아닙니다. 인용의 목적은 계속 ‘짐승이 인간 안의 살아 있는 것들을 표현한다’는 중심 주장에 있습니다.

 

시148은 이 논증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천사들뿐 아니라 바다의 큰 생물들, 과수, 짐승, 가축, 기는 것과 나는 새까지 모두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개역개정의 ‘용들’에 해당하는 부분을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영어에서는 ‘whales’라고 표현합니다. AC.46은 바로 이 점을 붙들어, 이러한 것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뜻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이 이번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해석 원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중요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짐승은 선한 애정입니까, 악한 애정입니까?’ AC.46의 대답은 ‘문맥과 그 짐승의 성질에 따라 다르다’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단순한 암기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짐승 = 애정’이라는 기본 관계가 있다고 해서 모든 짐승이 동일한 애정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하고 온순한 동물과 해로운 동물이 다르고, 같은 ‘짐승’이라는 표현도 어떤 사람과 어떤 상태를 다루느냐에 따라 선한 애정 또는 악한 애정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말씀의 상응을 읽는 데 계속 필요한 원리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AC.46 후반부에서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구별이 나옵니다. 선지자들이 ‘가축’과 ‘땅의 짐승’, 또는 ‘가축’과 ‘들의 짐승’을 조심스럽게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가 실제로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 각각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축은 질서 잡힌 높은 애정이고 들짐승은 본능적인 낮은 애정’이라는 식으로 우리가 빈칸을 채우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AC.46이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사람 안의 ‘선한 것들’도 짐승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매우 놀라운 예를 하나 더 듭니다. 주님께 가장 가까운 하늘의 존재들도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에서 ‘생물’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계7:11과 계19:4의 ‘네 생물’이 그 예입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것은 영어 단어입니다. 각주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곳의 말이 ‘beasts’가 아니라 ‘animals’로 번역되는 것이 정확하다고 설명합니다. 헬라어 ζῷον(zōon)은 ‘살아 있는 생물’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대목의 요점은 천사들을 야수에 비유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라는 표현이 얼마나 높은 영적 문맥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본문에 덧붙여 놓은 AE.462의 설명, 곧 ‘모든 천사’를 가장 낮은 천국, ‘장로들’을 중간 천국, ‘네 생물’을 가장 높은 천국과 연결하는 설명은 AC.46 자체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훗날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에서 가져온 보충 자료입니다. 참고할 수는 있지만, AC.46의 논증 자체와 구별하여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글에서 직접 필요한 것은 ‘주님께 가까운 하늘의 존재들조차 생물이라고 불린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막16:15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표현은 영어의 ‘every creature’, 곧 ‘모든 피조물’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해 받는 이들이 ‘피조물’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창세기 1장의 창조와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AC 전체의 큰 주제가 다시 만납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기존의 사람에게 종교 지식 몇 가지가 더해지는 일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6에 왜 이렇게 많은 성경 구절이 한꺼번에 등장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의 구절을 완전히 해설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요엘, 시편, 예레미야, 호세아, 욥기, 이사야, 요한계시록, 마가복음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말씀에서 ‘짐승’, ‘들짐승’, ‘생물’, ‘피조물’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인간의 내적 생명과 연결되는지를 한꺼번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인용 구절을 따로 떼어 열세 편의 해설로 읽기보다, 이 인용들이 함께 무엇을 증언하는지를 보는 것이 AC.46을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합니다.

 

AC.45가 ‘짐승은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는 원리를 소개했다면, AC.46은 말씀 전체를 펼쳐 그 원리가 고립된 해석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중요한 균형도 가르쳐 줍니다. 짐승이라고 해서 모두 악한 것도 아니고, 모두 선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애정에도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듯이 말씀의 짐승도 그 성질과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애정을 표현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짐승이라는 단어를 보았으니 뜻은 이것이다’라고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문맥 속에서 어떤 생명과 어떤 애정이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심화

1. 왜 같은 ‘짐승’이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AC.46, 심화 1, 왜 같은 ‘짐승’이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심화1. 왜 같은 ‘짐승’이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AC.45와 AC.46을 읽다 보면 조금 혼란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고 하면서 어떤 곳에서

bygrace.kr

 

 

 

AC.47, 창1:24-25, ‘순서가 말해 주는 거듭남 : 자기에서 주님으로 옮겨가는 방향'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bygrace.kr

 

AC.45, 창1:24-25, ‘짐승’(beasts),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4, 25)

 

AC.45

태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을 이렇게 상징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서들, 그리고 구약 말씀 전체에서 보면 늘 서로 다른 동물들을 가지고 같은 걸 표현하는데요, 짐승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해롭기 때문에 악하다 하는 짐승들이 있고,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선하다 하는 짐승들이 있지요. 이때 사람 안의 악들은 곰이나 늑대, 개 같은 해로운 짐승들로, 그리고 반대로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암송아지나 양, 어린양 같은 짐승들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여기 이 본문에서 말하는 ‘짐승’(beasts)은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이며, 따라서 애정들을 뜻합니다. 이는 이 본문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안에서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더 낮은 것들은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이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욕정(cupidities)과 쾌락(pleasures)을 뜻합니다. Those who lived in the most ancient times thus signified the things relating to the understanding and to the will;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and constantly in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the like things are represented by different kinds of animals. Beasts are of two kinds; the evil, so called because they are hurtful; and the good, which are harmless. Evils in man are signified by evil beasts, as by bears, wolves, dogs; and the things which are good and gentle, by beasts of a like nature, as by heifers, sheep, and lambs. The “beasts” here referred to are good and gentle ones, and thus signify affections, because it here treats of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The lower things in man, which have more connection with the body, are called “wild animals of that earth,” and are cupidities and pleasures.

 

해설

AC.45는 창1:24-25에 등장하는 여러 짐승이 왜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뜻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바로 앞의 AC.44에서 스베덴보리는 다섯째 날의 물고기와 새를 주로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하고, 이제 여섯째 날 땅에서 나오는 생물들을 의지에 속한 것들과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AC.45는 그 가운데 특히 ‘짐승’이라는 표현에 초점을 맞춥니다.

 

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태고 시대’ 사람들의 표현 방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을 동물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했고, 이러한 표현 방식이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 전체에도 계속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단순한 문학적 비유라고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AC.45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동물의 성질이 인간 안의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태고 시대’라는 말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말을 들으면 흔히 석기 시대나 원시 인류를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관심을 두는 것은 고고학적인 시대 구분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관련된 인간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 사람들이 이렇게 표현했다’는 말을 곧바로 ‘동굴에서 살던 원시인들이 동물 그림으로 생각을 표현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AC 초반뿐 아니라 앞으로 태고교회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AC.45는 짐승을 크게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해를 끼치기 때문에 악하다고 하는 짐승과,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선하다고 하는 짐승입니다. 그리고 사람 안의 악들은 곰, 늑대, 개와 같은 해로운 짐승들로,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암송아지, 양, 어린양과 같은 짐승들로 표현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짐승’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동물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문맥에 놓이는가에 따라 표현되는 내적 상태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주의점이기도 합니다. ‘짐승 = 악’, 또는 반대로 ‘짐승 = 애정’이라는 하나의 고정된 대응표만 만들어 모든 구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45 자체가 짐승에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같은 동물 이미지라도 그것의 성질과 문맥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앞의 AC.42에서 큰 바다짐승이 창조의 좋은 질서 안에서도 등장하고 선지서의 부정적인 문맥에서도 사용되었던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그러면 창1:24-25에 나오는 짐승들은 어느 쪽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다루는 짐승들은 ‘선하고 온순한 것들’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유도 직접 밝혀 줍니다. 지금 본문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맥의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이것은 여섯째 날의 거듭남이 단지 사람이 무엇이 참인지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의 의지와 애정까지 새로워지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애정’이라는 말을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과 같다고 생각하면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애정은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며 마음이 어디로 기울어지는가와 관계됩니다. 그래서 의지에 속한 것을 설명할 때 동물의 이미지가 사용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AC.45 자체는 여기서 ‘동물이 움직이므로 애정도 인간을 움직인다’는 식의 상세한 이유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선 이 글이 직접 밝히는 것, 곧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이 거듭나는 사람 안의 애정들을 뜻한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 이르면 조금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에서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더 낮은 것들’을 ‘그 땅의 들짐승’이라고 부르며, 이것들이 ‘욕정과 쾌락’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이 본문의 짐승들이 선하고 온순하며 애정을 뜻한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욕정과 쾌락이 등장하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의지에 속한 것들 안에서도 차이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의지적인 것이 같은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는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도 있습니다. AC.45는 바로 그것들을 ‘욕정과 쾌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만으로 ‘욕정은 본래 중립적이므로 없앨 필요가 없고 방향만 바꾸면 된다’거나, 반대로 ‘몸과 관련된 모든 쾌락은 악하므로 제거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둘 다 지나갑니다. AC.45는 여기서 그러한 거듭남의 구체적인 처리 방법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욕정’과 ‘쾌락’을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욕구’나 ‘즐거움’과 그대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먹고 쉬고 아름다운 것을 즐기는 모든 자연적 욕구와 즐거움을 이 한 문장 때문에 악한 것으로 볼 필요도 없고,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욕정’을 단순히 선하게 전환할 수 있는 중립적인 에너지라고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앞으로 AC가 인간의 자연적인 것과 악한 욕망, 그리고 거듭남의 질서를 더 자세히 다룰 때 그 차이를 문맥에 따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5의 중심은 오히려 더 단순합니다. 말씀의 동물들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표현할 수 있으며, 해로운 동물들은 악한 것들을, 선하고 온순한 동물들은 선한 것들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지금 창조의 여섯째 날은 거듭나는 사람을 다루기 때문에 여기 등장하는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은 그의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동시에 사람 안에는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도 있으며, AC.45는 그것들을 욕정과 쾌락이라고 구별하여 언급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AC.44와 AC.45의 연결도 선명해집니다. AC.44에서는 말씀을 ‘듣는’ 이해와 그것을 ‘행하는’ 의지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5에서는 그 의지 쪽에 속한 것들이 구체적으로 ‘애정’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거듭남은 무엇이 참인지 아는 이해만 새로워지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며 사랑하는가 하는 의지와 애정의 영역까지 새로워지는 일입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 위의 생물들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심화

1. ‘태고 시대’

 

AC.45, 심화 1, ‘태고 시대’

AC.45.심화1. ‘태고 시대’ AC.45에는 ‘태고 시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이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석기 시대, 동굴 생활, 돌도구, 사냥과 채집 같은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

bygrace.kr

 

 

 

AC.46, 창1:24-25, ‘짐승으로 읽는 인간 : 애정의 재창조와 주님을 향한 생명'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bygrace.kr

 

AC.44, 창1:24-25,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A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24, 25)

 

AC.44

사람은 땅과 같아서, 신앙의 지식(knowledges)이 먼저 그 안에 뿌려지지 않으면 어떤 선도 산출할 수 없습니다. 그래야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 말씀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믿음에 따라 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게 되고, 그 결과 마음이 나뉘어, 주님께서 다음 말씀에서 ‘어리석은 사람’(foolish)이라 하신 사람들에 속하게 됩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It is the office of the understanding to hear the Word, and of the will to do it. To hear the Word and not to do it, is like saying that we believe when we do not live according to our belief; in which case we separate hearing and doing, and thus have a divided mind, and become of those whom the Lord calls “foolish” in the following passage:

 

24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4, 26) Whosoever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I will liken unto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a rock; but everyone that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not, I liken to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the sand (Matt. 7:24, 26).

 

이해에 속한 것들은 앞서 보인 것처럼 ‘물들이 내는 기는 것들’(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과 ‘땅 위의 새들’(the fowl upon the earth),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 있는 새들’(upon the faces of the expanse)로, 그리고 의지에 속한 것들은 여기 ‘땅이 내는 생물’(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과 ‘가축’(the beast)과 ‘기는 것’(the creeping thing), 그리고 ‘땅의 짐승’(the wild animal of that earth)으로 각각 가리키고 있습니다.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re signified—as before shown—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nd also by the “fowl upon the earth,” and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but those which are of the will are signified here by 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 and by the “beast” and “creeping thing,” and also by the “wild animal of that earth.”

 

해설

AC.44부터 창조의 여섯째 날이 시작됩니다. 앞의 다섯째 날에는 물고기와 새가 등장했고,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주로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했습니다. 이제 땅에서 생물과 가축과 짐승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초점이 의지에 속한 것들로 옮겨갑니다. 따라서 AC.44는 단순히 ‘아는 것에서 행하는 것으로 가야 한다’는 일반적인 교훈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해에 속한 것과 의지에 속한 것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람을 ‘땅’에 비유합니다. 땅에 씨가 먼저 뿌려져야 무엇인가를 낼 수 있듯이, 사람 안에도 먼저 ‘신앙의 지식’이 심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식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AC.44는 ‘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중요하니 지식은 별로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을 행하기 위해서도 먼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아야 하므로 신앙의 지식이 필요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들어오는 것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의지의 역할을 아주 간단하게 구별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쪽을 가리킵니다. 반면 ‘행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의지되고 삶으로 나타나는 쪽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AC.44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와 의지가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교리를 설명하고, 자신이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은 전혀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상태를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나뉜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때문에 마7:24,26이 인용됩니다. 여기서 AC.44의 목적은 ‘반석’과 ‘모래’ 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풀이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두 종류의 사람을 분명하게 대조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다른 사람은 똑같이 말씀을 ‘듣지만 행하지 않습니다.’ AC.44가 주목하는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함께 있느냐, 서로 분리되어 있느냐입니다.

 

따라서 ‘믿는다고 말하면서 믿는 대로 살지 않는 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실천력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에서는 어떤 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면서 의지에서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사람 안의 두 중요한 기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AC.44가 말하는 ‘나뉜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신 것을 스베덴보리가 바로 이 문맥에서 가져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창1:24에서 왜 갑자기 ‘땅은 생물을 내라’고 하는지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AC.44는 앞에서 설명했던 ‘물들이 내는 기는 것들’과 새들을 이해에 속한 것들이라고 하고, 이제 땅이 내는 ‘생물’, ‘가축’, ‘기는 것’, ‘땅의 짐승’을 의지에 속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즉 창조의 순서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이해에 속한 것들이 먼저 준비되고, 이제 의지에 속한 것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과정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해에 속한 것’과 ‘의지에 속한 것’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고 그것이 주님의 말씀임을 알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이해 쪽의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미워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보복하려는 마음을 억제하고 그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며 가능한 선을 행하려고 하는 것은 의지와 삶의 문제입니다. 앞의 이해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 것이 의지와 삶에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는 AC.44의 직접적인 예가 아니라,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설명입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을 단순히 ‘배운 것을 열심히 실천하면 된다’는 도덕 훈련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까지의 AC.39-43이 계속 강조했듯이 참된 생명의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통해 무엇을 믿고 행해야 하는지 배우고 실제로 그것을 행하지만, 그 안의 선과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 것이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 지금 설명되고 있는 과정입니다.

 

AC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여기쯤에서 ‘왜 이 책은 계속 선과 진리, 이해와 의지, 사랑과 신앙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사람이 무엇을 참이라고 이해하는가와 무엇을 선이라고 사랑하고 원하는가가 주님 안에서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창세기의 서로 다른 날과 서로 다른 피조물을 설명하면서도 이 관계가 계속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AC 전체를 읽는 데 중요한 질문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AC.44의 중심을 ‘지식보다 행함이 중요하다’라는 한 문장으로만 줄이면 부족합니다. 지식은 필요합니다. 이해도 필요합니다. 먼저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이해하는 데서 멈추면 이해와 의지가 분리됩니다. 말씀을 듣는 이해와 그것을 행하는 의지가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되어야 합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에서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단계, 곧 거듭남이 이해에 속한 것에서 의지와 삶에 속한 것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심화

1. 왜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가?

 

AC.44, 심화 1, 왜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가?

AC.44.심화1. 왜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 이 책은 처음부터 계속 선과 진리 이

bygrace.kr

 

 

 

AC.45, 창1:24-25, ‘짐승’(beasts),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bygrace.kr

 

AC.43, 창1:22-23,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창1:22, 23)

 

AC.43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지니게 된 모든 것은 크게 열매 맺고 번성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육신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그러합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be fruitful)라는 표현은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되고, ‘번성하다’(multiply)라는 표현은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됩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fruit) 안에는 ‘씨’(seed)가 들어 있는데, 이 씨로 인해 그것은 크게 번성합니다.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blessing)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 이 모든 것이 축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Everything that has in itself life from the Lord fructifies and multiplies itself immensely; 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 To “be fruitful,” in the Word, is predicated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and to “multiply,” of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the “fruit” which is of love contains “seed,” by which it so greatly multiplies itself. The Lord’s “blessing” also in the Word signifies fruitfulness and multiplication, because they proceed from it.

 

해설

AC.43은 창조의 다섯째 날에 처음 나타난 살아 있는 것들이 왜 곧바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받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39-41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3은 그렇게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열매 맺고 번성한다’는 것입니다.

 

첫 문장이 이 글 전체의 중심입니다.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엄청나게 열매 맺고 번성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의 수가 많아진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열매 맺고 번성하는 것을 창1:22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매우 흥미로운 말을 하나 덧붙입니다. 이러한 열매 맺음과 번성은 사람이 육신 안에서 사는 동안에는 그다지 크게 나타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놀라울 정도’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또 왜 사후에는 그렇게 되는지를 AC.43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어지기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식으로 구체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다른 삶에서 훨씬 더 놀라운 열매 맺음과 번성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오히려 우리에게 중요한 주의를 줍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영적 성과의 크기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의 모든 가능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 역시 ‘지금 아무 변화가 없어 보여도 사후에는 자동으로 엄청나게 성장한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3의 주어는 분명히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입니다. 강조점은 인간 자신의 잠재력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다음 스베덴보리는 ‘열매 맺다’와 ‘번성하다’를 구별합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 ‘번성하다’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말한다고 합니다. 창1:22의 두 동사가 단순히 같은 뜻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랑과 신앙이라는 서로 구별되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말씀에서 ‘열매’와 ‘번성’ 같은 표현을 만날 때에도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랑에 속한 ‘열매’ 안에 ‘씨’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씨로 말미암아 열매가 크게 번성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너무 멀리 나가 ‘씨는 언제나 정확히 무엇을 뜻한다’는 별도의 체계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43이 강조하는 것은 사랑에 속한 열매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다시 번성할 수 있는 씨를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의 열매 속에 씨가 들어 있어 다시 새로운 생명을 낳듯, 이 표현을 통해 사랑에 속한 것과 신앙에 속한 것의 열매 맺음과 번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AC.43은 ‘주님의 축복’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축복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22의 순서를 그대로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하고, 이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합니다. 곧 생육과 번성의 근원이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복’이라고 하면 건강, 형통, 보호, 물질적 풍요 등을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다. AC.43은 여기서 그러한 모든 의미를 포괄적으로 정의하려는 글은 아닙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복은 언제나 외적인 복과 관계없고 오직 내적 성장만을 뜻한다’고 일반화해서도 안 됩니다. 이 글이 분명히 밝히는 것은 창1:22의 문맥에서 주님의 축복이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이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 안에서 열매 맺고 번성하게 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축복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3은 앞의 몇 글을 아름답게 마무리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살아난다고 했고, AC.40에서는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이 살아 있는 물고기와 새로 나타났으며, AC.41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에는 실제로 생명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AC.42에서는 그 기억 지식의 개별적인 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들까지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43에서는 그렇게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들이 ‘열매 맺고 번성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중심은 ‘나는 얼마나 많은 영적 열매를 만들어 냈는가?’라는 자기 평가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열매 맺음과 번성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의 성질이며, 그것이 가능한 것 자체가 주님의 축복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고 증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랑에 속한 열매를 맺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번성하게 합니다. 창조의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것들을 만드시고 곧바로 복을 주신 장면은 바로 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AC.44, 창1:24-25,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A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bygrace.kr

 

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21)

 

AC.42

앞서 말했듯이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Fishes)은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이제 생명을 얻은 기억 지식을 뜻합니다. 그리고 ‘큰 바다짐승들’(great whales, Whales)은 그러한 지식들의 일반 원리를 뜻하는데, 개별적인 것들은 이 일반 원리 아래에 있으며, 또 거기에서 나옵니다. 우주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어떤 일반 원리 아래 있지 않은 것은 없는데, 그래야 그것이 존재하고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래’(Whales)나 ‘큰 물고기’(great fishes)는 선지자들에 의해 종종 언급되며, 그때마다 기억 지식의 일반 원리를 뜻합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인간의 지혜 또는 지성, 곧 일반적으로 말해 지식(scientia)을 표상하는데, 그래서 ‘큰 악어’(great whale)라고 합니다. 에스겔을 보면, “Fishes,” as before said, signify memory-knowledges, now animated by faith from the Lord, and thus alive. “Whales” signify their general principles, in subordination to which, and from which, are the particulars; for there is nothing in the universe that is not under some general principle, as a means that it may exist and subsist. “Whales,” or “great fishes,” are sometimes mentioned by the prophets, and they there signify the generals of memory-knowledges. Pharaoh the king of Egypt (by whom is represented human wisdom or intelligence, that is, knowledge [scientia] in general), is called a “great whale.” As in Ezekiel: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겔29:3)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that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myself (Ezek. 29:3).

 

[2] 또 다른 곳에서는 And in another place: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겔32:2) Take up a lamentation for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unto him, thou art as a whale in the seas, and hast gone forth in thy rivers, and hast troubled the waters with thy feet (Ezek. 32:2),

 

이 말씀은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그러니까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사야에서는 by which words are signified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and thus from themselves. In Isaiah: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rd and great and strong sword, shall visit upon leviathan the longish [oblongum] serpent, even leviathan the crooked serpent, and he shall slay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a. 27:1).

 

여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는 그런 사람들이 진리의 일반 원리조차 알지 못하게 된 상태를 뜻합니다. 예레미야에서도 By “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 signified that such persons are ignorant of even the general principles of truth. So in Jeremiah: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렘51:34) Nebuchadnezzar the king of Babylon hath devoured me, he hath troubled me, he hath made me an empty vessel, he hath swallowed me as a whale, he hath filled his belly with my delicacies, he hath cast me out (Jer. 51:34),

 

여기 ‘좋은 음식’(delicacies)이라 한 것은 신앙의 지식(knowledges)을 뜻하며, 요나를 삼킨 고래처럼 그것들을 삼켰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큰 뱀’(whale)은 신앙의 지식에 관한 일반 원리를 단지 기억 지식으로만 지니고, 그런 방식으로 행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denoting that he had swallowed the knowledges of faith, here called “delicacies,” as the whale did Jonah; a “whale” denoting those who possess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knowledges of faith as mere memory-knowledges, and act in this manner.

 

해설

AC.42는 창1:21의 ‘큰 바다짐승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0에서 물고기는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물고기 하나하나보다 더 큰 것이 등장합니다. 바로 ‘큰 바다짐승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이 개별적인 기억 지식들을 포괄하는 ‘일반 원리들’(general principles)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이 ‘일반 원리’라는 말부터 조금 어렵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여러 개별 지식을 한데 묶어 이해하게 해 주는 보다 포괄적인 지식이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실을 각각 따로 가지고만 있지 않습니다. 비슷한 것들을 묶고, 그 관계를 파악하고, 보다 큰 개념 아래에서 이해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우주 안에는 어떤 일반 원리 아래 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서, 개별적인 것들이 존재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창1:21의 거대한 물고기 또는 큰 바다짐승은 바로 이러한 ‘기억 지식의 일반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AC.42는 ‘큰 바다짐승’이라는 상징 자체를 처음부터 악한 것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창1:21에서는 하나님께서 큰 바다짐승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큰 바다짐승=악한 지식’이라는 고정된 상응표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의 첫 설명에서 큰 바다짐승은 우선 기억 지식의 일반 원리를 뜻합니다. 이후 선지서에서 인용되는 부정적인 사례들은 그러한 지식과 일반 원리가 인간 자신의 지혜와 결합하여 잘못 사용될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애굽 왕 바로를 예로 듭니다. 겔29:3에서 바로는 자기 강들 가운데 누운 ‘큰 악어’로 묘사되며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AC.42는 바로가 ‘인간의 지혜 또는 지성, 곧 일반적으로 말해 지식’을 표상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의 초점은 단순히 ‘애굽이나 악어가 나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기억 지식과 인간의 지성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특히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는 말은 바로 앞의 AC.39-41에서 계속 강조했던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주제와도 자연스럽게 대비됩니다.

 

겔32:2는 처음 읽으면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바로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이며, 강에서 움직이면서 발로 물을 휘저어 더럽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곧바로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그러므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풀이합니다. 독자는 당연히 ‘어떻게 저 구절에서 이런 뜻이 나오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AC.42 안에서 확실하게 붙들 수 있는 연결고리는 이렇습니다. 물고기는 기억 지식을 뜻하고, 큰 물고기 또는 고래는 그 기억 지식의 일반적인 것들을 뜻하며, 바로는 인간의 지혜 또는 지성, 곧 지식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면서 그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붙인 ‘and thus from themselves’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많이 알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지식과 지성을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근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앞의 AC.39-41과 함께 읽으면 더 분명해집니다. 거기서도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AC.42에서도 기억 지식과 지성 자체를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1:21의 물고기와 큰 바다짐승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좋다’고 하신 것들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생겨난 지혜처럼 붙들고, 그 힘으로 신앙의 신비를 지배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사27:1의 인용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는 것’이 그러한 사람들이 ‘진리의 일반 원리조차 알지 못하게 된 상태’를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우리가 이 한 절의 모든 상징을 여기서 따로 해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2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큰 바다짐승이 ‘일반적인 것들’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것이 상실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모습은 진리의 일반적인 것들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렘51:34에서는 느부갓네살이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좋은 음식’이 신앙의 지식을 뜻하며, 그것을 고래가 요나를 삼킨 것처럼 삼켰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경우의 ‘고래’는 ‘신앙의 지식에 관한 일반 원리를 단지 기억 지식으로만 지니고, 그런 방식으로 행하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핵심은 지식을 많이 소유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살아 있는 신앙의 것이 되지 못하고 단지 기억 속의 지식으로만 머무르는 상태입니다.

 

이 대목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매우 중요한 구별을 줍니다. AC.40에서 기억 지식은 결코 악한 것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생명을 얻은 기억 지식은 창조의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 살아 있는 물고기로 표현됩니다. AC.42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억 지식에는 개별적인 것들이 있고 그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들이 있으며, 이 질서 자체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지식을 단지 기억 속에 쌓아 두거나, 자기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장악하려 하면 같은 상징이 부정적인 문맥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42를 ‘지식은 위험하다’는 경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방대한 학문과 지식을 사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글이 묻는 것은 지식의 양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어떤 질서 안에 있으며, 그것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에 접근할 때 그 출발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기억 지식이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살아날 때 그것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자기 지혜의 소유물로 붙들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 하면, 같은 지식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C.42의 여러 선지서 인용을 읽으면서 ‘스베덴보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구절에서 이런 속뜻을 알아내는가?’라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이것은 겔32:2 한 절만 더 자세히 풀이한다고 해결되는 질문이 아닙니다.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을 때 반복해서 만나게 될 중요한 문제이므로, 이 질문은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심화

1.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가?

 

AC.42, 심화 1,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가?

AC.42.심화1.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가? AC.42를 처음 읽으면 놀라운 장면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겔29:3의 바로와 큰 악어, 겔32:2의 바다와 강을 휘젓는

bygrace.kr

 

 

 

AC.43, 창1:22-23,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ygrace.kr

 

AC.41, 창1:20, ‘생물'(living soul, thing moving itself)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때는 뼈처럼 단단하고 검은 물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생명을 지니고 있으며,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때는 반대로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이 말은 믿기 어려우실지 모르지만, 정말 진짜입니다. 천사적 영 안에 있는 모든 표현 하나하나, 모든 생각 하나하나, 그리고 생각의 가장 미세한 부분 하나까지도 모두 살아 있으며, 그 가장 작은 요소들 안에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애정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은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은 그 안에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을 향한 신앙을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이며, 여기서는 이러한 것들이 ‘생물’(living soul)로 상징됩니다. 또한 그것들은 일종의 몸을 지니고 있는데, 그걸 여기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what moves itself) 또는 ‘돌아다니는 것’(creeps)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들은 아직 사람에게는 깊은 비밀이며, 지금은 다만 본문에 ‘생물’(living soul, thing moving itself)이 나와서 잠깐 언급한 것입니다. Whatever is proper to man has no life in itself, and whenever it is made manifest to the sight it appears hard, like a bony and black substance; but whatever is from the Lord has life, containing within it that which i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when presented to view appears human and living. It may seem incredible but is nevertheless most true, that every single expression, every single idea, and every least of thought in an angelic spirit, is alive, containing in its minutest particulars an affection that proceeds from the Lord, who is life itself. And therefore whatsoever things are from the Lord, have life in them, because they contain faith toward him, and are here signified by the “living soul”: they have also a species of body, here signified by “what moves itself” or “creeps.” These truths, however, are as yet deep secrets to man, and are now mentioned only because the “living soul,”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re treated of.

 

해설

AC.41은 앞의 AC.39에서 제시한 ‘주님에게서 오는 것만이 생명을 가진다’는 원리를 창1:20의 ‘생물’이라는 표현과 연결하여 한 걸음 더 깊이 설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생명’은 단순히 사람이 숨 쉬고 생각하며 활동한다는 자연적 의미의 생명이 아닙니다. 그는 영적인 의미에서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고유한 것, 곧 proprium은 그 자체 안에 생명의 근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참된 생명은 오직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때문에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다’는 강한 표현도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가치하다거나 실제로 살아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거듭나기 전의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외형적으로 아무 선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독립적인 영적 생명의 원천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며, 선과 진리와 그것을 사랑하는 애정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AC.39에서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도록 허락받지만, 점차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나중에는 지각하게 된다고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매우 특이한 시각적 묘사로 표현합니다. 사람의 proprium에 속한 것이 눈에 보이게 나타날 때에는 ‘뼈처럼 단단하고 검은 물질’처럼 보이는 반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사람답고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 묘사를 지나치게 해부하거나 구체적인 영계의 물질 구조처럼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1이 강조하려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과 주님에게서 비롯된 것 사이에는 단순한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천사적 영에 관한 설명은 이 ‘생명’이 얼마나 깊은 곳까지 미치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적 영의 말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 심지어 생각의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도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 가장 작은 것 안에도 주님에게서 나오는 ‘애정’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41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어떤 생각이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생각이 정확하거나 논리적이라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생각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애정이 있으며, 그 애정으로 말미암아 그 생각 전체가 생명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AC.41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들이 ‘주님을 향한 신앙’을 그 안에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창1:20의 ‘생물’(living soul)로 상징됩니다. 다시 말하면 ‘생물’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무엇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사람 안의 것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살아 있는 것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앞의 AC.39에서 풀과 나무가 아직 ‘무생물’에 비유되다가 이제 물에서 움직이는 생물과 새가 등장하는 이유도 이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이 살아 있는 것들이 ‘일종의 몸’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또는 ‘기는 것’으로 상징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그 의미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들은 아직 사람에게 ‘깊은 비밀’이라고 하면서, 지금은 창1:20에 ‘생물’과 ‘움직이는 것’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기 때문에 잠깐 언급할 뿐이라고 선을 긋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여기서 영적 몸이나 천사의 사고 구조에 관한 상세한 체계를 미리 만들어 내기보다, AC.41이 밝히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AC.39-41의 흐름도 선명해집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면서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는 과정을 설명했고, AC.40에서는 그렇게 살아나기 시작한 사람 안의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을 물고기와 새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AC.41은 그 모든 것이 왜 ‘살아 있다’고 불릴 수 있는지를 밝힙니다. 생명은 사람 자신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은 가장 작은 생각과 애정에까지 스며듭니다.

 

그러므로 AC.41의 중심은 인간의 개성이나 활동을 없애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생각하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행한다’고 경험하면서도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아 가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붙잡을수록 proprium에 머물지만,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그의 생각과 애정은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창1:20의 ‘생물’은 바로 거듭남이 이처럼 ‘살아 있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심화

1. ‘천사적 영’

 

AC.41, 심화 1, ‘천사적 영’

AC.41.심화1. ‘천사적 영’ AC.41에 ‘천사적 영’(angelic spirit)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 읽으면 조금 낯섭니다. ‘천사’라는 것인지 ‘영’이라는 것인지, 혹은 천사와 영 사이에 또 다른 종

bygrace.kr

 

 

 

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bygrace.kr

 

AC.40, 창1:2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새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뜻하고, ‘새들’(birds)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이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물속에서 돌아다니는 것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곧 ‘물고기들’(fishes)이 기억 지식을 뜻한다는 사실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re signified the memory-knowledge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 That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or “fishes,” signify memory-knowledges is plain from Isaiah: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사50:2, 3) I came and there was no man; at my rebuke I dry up the sea, I make the rivers a wilderness; their fish shall stink because there is no water and shall die for thirst; I clothe the heavens with blackness (Isa. 50:2–3).

 

[2] 그러나 이 의미는 에스겔을 보면 더 분명한데, 거기서 주님은 새 성전, 곧 일반적으로는 새 교회를, 그리고 교회에 속한 사람인 거듭난 사람을 묘사하십니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plainer from Ezekiel, where the Lord describes the new temple, or a new church in general, and the man of the church, or a regenerate person; for everyone who is regenerate is a temple of the Lord: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겔47:8-10) The Lord Jehovih said unto me, These waters that shall issue to the boundary toward the east, and shall come toward the sea, being led into the sea, and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that shall creep for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there shall be exceeding much fish, because those waters shall come thither, and they shall heal, and everything shall live whither the river come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fishers shall stand upon it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hall they be; their fish shall be according to its kind, as the fish of the great sea, exceeding many (Ezek. 47:8–10).

 

여기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의 어부들’(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과 ‘그물 치는 것’(spreading of nets)은 자연적인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을 뜻합니다. “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ignify those who shall instruct the natural man in the truths of faith.

 

[3] ‘새들’(birds)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점도 선지자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이사야에 보면, That “birds” signify things rational and intellectual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Isaiah: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사46:11) Calling a bird from the east, the man of my counsel from a distant land (Isa. 46:11).

 

예레미야에서도 And in Jeremiah: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5)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5).

 

에스겔서에서는 In Ezekiel: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겔17:22, 23) I will plant a shoot of a lofty cedar, and it shall lift up a branch, and shall bear fruit, and be a magnificent cedar; and under it shall dwell every fowl of every wing, in the shadow of the branches thereof shall they dwell (Ezek. 17:22–23).

 

그리고 호세아에서는 새 교회, 곧 거듭난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And in Hosea, speaking of a new church, or of a regenerate man: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And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beast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s of heaven, and with the moving thing of the ground (Hos. 2:18).

 

여기서 ‘들짐승’(wild beast)이 실제 짐승을 뜻하지 않고, ‘새’(bird)도 실제 새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은, 주님께서 그것들과 ‘새 언약을 맺는다’(make a new covenant)고 하는 것만 봐도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wild beast” does not signify wild beast, nor “bird” bird, must be evident to everyone, for the Lord is said to “make a new covenant” with them.

 

해설

AC.40은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생물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곧 물속에서 돌아다니는 것들과 물고기들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뜻하고,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먼저 ‘기억 지식’이라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외부로부터 배우고 기억 속에 받아들이는 지식들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읽어 알게 된 내용, 교리를 배우면서 얻은 지식, 자연계와 삶을 통해 습득한 여러 사실 등이 모두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옵니다. AC.40은 이러한 기억 지식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섯째 날에는 그것들이 ‘생물’로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바로 앞의 AC.39와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아직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할 때 그에게 있는 것들이 식물처럼 ‘생명이 없는 것들’에 비유되지만, 사랑과 신앙으로 살아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기 시작하면 ‘생물’에 비유된다고 했습니다. AC.40은 이제 그 생물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물고기는 기억 지식에, 새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에 대응합니다.

 

그런데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당연히 ‘왜 물고기가 기억 지식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AC.40은 그 이유를 추상적인 설명으로 풀기보다 말씀의 여러 구절을 제시하여 그 대응을 보여 줍니다. 먼저 사50:2-3에서 바다와 강의 물이 없어지자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목말라 죽는 장면을 인용합니다. 이 구절은 물고기가 단순히 자연계의 물고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인간의 내적·영적 상태와 관계된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에스겔의 새 성전 환상이 이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준다고 합니다. 겔47:8-10에서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바다에 이르자 물이 되살아나고 고기가 심히 많아집니다. 그리고 어부들이 서서 그물을 칩니다. AC.40은 여기서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의 어부들’과 ‘그물 치는 것’이 ‘자연적인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을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이것이 왜 물고기와 기억 지식의 관계를 보여 주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치려면 그 진리들이 자연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AC.40은 바로 이러한 겉 사람의 기억 지식들을 물고기로 나타냅니다. 따라서 겔47장의 풍성한 물고기와 어부들은 단순한 어업의 번성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 교회와 거듭난 사람 안에서 자연적인 사람이 신앙의 진리로 가르침받는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인용됩니다.

 

여기서 ‘새 성전’과 ‘새 교회’와 ‘거듭난 사람’이 함께 언급되는 것도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단지 외적인 종교 조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가 한 사람 안에 받아들여질 때 그 사람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교회의 모습을 갖습니다. 그래서 AC.40은 새 성전을 ‘일반적으로는 새 교회’, 그리고 ‘교회에 속한 사람, 곧 거듭난 사람’과 연결합니다. 이어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성전’이라고 그 이유까지 직접 밝힙니다.

 

AC.40의 두 번째 중심은 ‘새들’입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 역시 자신의 생각만으로 제시하지 않고 선지서의 여러 구절을 인용합니다.

 

사46:11의 ‘동쪽에서 부르는 날짐승’, 렘4:25의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겔17:22-23의 백향목 아래 깃드는 ‘각종 새’가 그 예입니다. AC.40이 이 구절들을 연이어 제시하는 목적은 각 구절의 모든 세부 속뜻을 여기서 설명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번 글의 초점은 ‘새’가 말씀에서 단순히 자연계의 새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렘4:25의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는 표현은 이런 독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사람이 없어지자 새들까지 날아간 광경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선지서의 표현 안에 인간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AC.40에서는 그 가운데 ‘새들’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마지막으로 호2:18을 인용하는 이유도 중요합니다. 거기서는 주님께서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표현을 근거로 ‘들짐승’이 단순히 들짐승을, ‘새’가 단순히 새를 뜻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동물들과 영적인 의미의 언약을 맺으신다는 것이 본문의 궁극적인 뜻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읽는 방법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도 중요합니다. 그는 문자적 의미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에 관한 더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여러 선지서에서 물고기와 새가 어떤 문맥에 놓이는지를 비교하면서 그 영적 의미를 밝혀 갑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도 있습니다. ‘물고기 = 기억 지식’, ‘새 = 이성적·지적인 것들’이라는 대응을 알았다고 해서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물고기와 모든 새를 문맥과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같은 뜻으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0 자체도 여러 말씀을 함께 제시하면서 그 문맥 안에서 대응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상응은 단어를 암호처럼 치환하는 작업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연결 속에서 살펴야 합니다.

 

또 하나 처음 읽는 독자가 궁금해할 수 있는 것은 ‘이성적인 것’과 ‘지적인 것’이 무엇이 다르기에 스베덴보리가 ‘그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고 따로 말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AC.40은 여기서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 본문만으로 둘을 억지로 명확하게 정의하기보다, 적어도 새가 인간의 단순한 기억 지식보다 높은 이성적·지적 영역을 나타내며 그중 지적인 것이 속 사람에 속한다는 정도를 먼저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문제는 별도로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섯째 날의 첫 장면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앞에서는 사람이 진리와 선을 배우고 행하면서도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겼다면, 이제 사랑과 신앙으로 살아나면서 겉 사람의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도 살아 있는 영적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창조 이야기에서는 물속에 생물들이 번성하고 하늘에는 새들이 날기 시작합니다.

 

AC.40의 핵심은 지식을 버리고 이성을 억누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인간에게 있는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능력들이 어떤 영적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 줍니다. 물고기는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새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다섯째 날에 생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제 이러한 것들도 앞의 AC.39에서 말한 ‘살아나는’ 상태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심화

1.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면 이성적인 것은 겉 사람에 속할까?

 

AC.40, 심화 1,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면 이성적인 것은 겉 사람에 속할까?

AC.40.심화1.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면 이성적인 것은 겉 사람에 속할까? AC.40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걸리는 문장이 있습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bygrace.kr

 

 

 

AC.41, 창1:20, ‘참된 생명의 근원 : 주님에게서 오는 것만이 살아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bygrace.kr

 

AC.39, 창1:20,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창1:20)

 

AC.39

큰 광명체들이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 놓이고, 겉 사람이 그 빛을 받게 되면, 그러면 사람은 비로소 살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까지는 그를 가리켜 거의 살아있다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때는 그가 선을 행해도 그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 걸로 알았고, 진리를 말해도 그 진리 역시 자기에게서 나온 거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사람이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나오는 건 그게 무엇이든 생명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로부터는 그 자체로 선한, 그런 선을 절대로 행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선한 것을 생각하거나, 선한 것을 원하거나, 따라서 선한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로 보아도 누구에게나 분명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또한 선은 오직 하나뿐인 참된 선의 근원에서만 올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실 때, 곧 거듭남으로 생명으로 일으키실 때에는,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십니다. 이때 사람은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그런 방식이 아니고서는 그를 이끌어 나중에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더 나아가 퍼셉션으로 알 수 있도록 인도하실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진리와 선은 ‘풀’(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에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사랑과 신앙으로 생명을 얻게 되고,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자기가 말하는 모든 진리가 사실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임을 믿게 되면, 그는 먼저 ‘물속의 기는 것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과 ‘땅 위를 나는 새들’(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에 비유되고, 또한 ‘짐승들’(beasts)에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이것들을 가리켜 ‘생물’(living souls)이라고 합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 grass,” and also to the “herb yielding seed,” and lastly to the “tree bearing 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and to 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 souls.”

 

해설

AC.39부터 창조의 다섯째 날이 시작됩니다. 앞의 셋째 날에는 연한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나타났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아직 ‘생명이 없는 것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물에서는 기는 생물이 나오고 하늘에는 새가 날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본문의 자연적인 모습에서도 정지해 있던 식물의 세계에서 움직이는 동물의 세계로 넘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변화를 사람의 거듭남에서 처음으로 ‘살기 시작하는’ 중요한 전환으로 읽습니다.

 

그 전환은 언제 일어날까요? AC.39의 첫 문장이 그 답을 줍니다. 큰 광명체들이 밝혀져 속 사람 안에 놓이고 겉 사람이 그 빛을 받게 될 때입니다. 앞의 넷째 날에서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는 사랑과 신앙을 나타냈습니다. 이제 그것들이 단지 사람이 알고 있는 교리나 개념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생명을 비추고, 겉 사람도 그 빛을 받게 됩니다. 그때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비로소 살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이 표현이 상당히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전에도 사람은 선을 행했고 진리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스베덴보리는 그때까지 그를 ‘거의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일까요? 문제는 그 선과 진리가 겉으로 존재했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사람이 그것들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었느냐가 핵심입니다. 그는 자기가 선을 행하고 자기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AC.39의 매우 강한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모욕적인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사람은 생명을 자기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생명의 원천이 아니며,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도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선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AC.39은 ‘사람이 자기로부터는 그 자체로 선한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그 자체로 선한’입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친절한 행동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일을 전혀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AC.39의 관심은 그 선의 궁극적인 근원이 어디인가에 있습니다. 사람이 참으로 선한 것을 생각하고 원하고 행할 수 있다면,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마13:37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와 눅18:19의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를 인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두 구절은 이번 글에서 서로 다른 복잡한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다기보다, 선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중심 명제를 뒷받침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처음부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주님께서 하신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요? AC.39은 놀랍게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시고 거듭나게 하실 때, 처음에는 사람이 ‘내가 선을 행하고 내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도 분명히 밝힙니다. 그 단계의 사람은 달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는 나중에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마침내 퍼셉션하도록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거듭남을 이끄시는 주님의 질서가 잘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를 사람에게 처음부터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서부터 그를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말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9의 사람은 실제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합니다. 다만 처음에는 그것을 자기에게서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자신이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의 참된 근원이 주님임을 먼저 믿고, 나중에는 퍼셉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인간의 행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의 근원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셋째 날의 식물과 다섯째 날의 생물을 비교하면 AC.39의 뜻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사람이 아직 선과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동안 그의 선과 진리는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생명이 없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사랑과 신앙으로 살아나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자기가 말하는 모든 진리를 주님께서 이루신다고 믿게 되면, 물의 기는 것들과 하늘을 나는 새들과 짐승들에 비유됩니다. 이것들은 ‘생물’입니다.

 

여기서 ‘생명이 없다’와 ‘생명이 있다’는 표현을 자연계의 생물학적 생명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앞 단계의 사람에게 생각이나 감정이나 활동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듭남의 속뜻에서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받아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물에서 동물로 넘어가는 창조의 변화가 거듭남의 내적 변화와 대응합니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모든 선을 주님께서 행하신다’는 사실을 입으로 인정하는 것만으로 곧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AC.39은 단순한 문구 암기를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것을 ‘믿고’, 나중에는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내가 선하다’는 자기 공로의 의식에서 벗어나 선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을 실제 삶 안에서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9은 인간을 무능하게 만들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실제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소유로 주장하지 않는 생명으로 인도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내가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서도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 상태를 허락하시면서 한 단계씩 이끌어 마침내 선과 진리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다섯째 날에 처음으로 ‘생물’이 등장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과 진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사랑과 신앙으로 생명을 얻고, 사람이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거듭남의 새로운 단계가 열립니다. AC.39에서 ‘살기 시작한다’는 것은 바로 이 전환을 가리킵니다.

 

심화

1. 왜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실까?

 

AC.39, 심화 1, 왜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실까?

AC.39.심화1. 왜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실까? AC.39에서 특히 마음에 오래 남는 문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bygrace.kr

 

 

 

AC.40, 창1:2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새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bygrace.kr

 

AC.38, 창1:18-19, ‘이는 넷째 날이니라’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창1:18, 19)

 

AC.38

‘낮’(day)은 선을, ‘밤’(night)은 악을 뜻하며, 그래서 선(goods)을 가리켜서는 ‘낮의 일’(works of the day)이라 하고, 악(evils)을 가리켜서는 ‘밤의 일’(works of the night)이라 합니다. 또한 ‘빛’(light)은 진리를, ‘어둠’(darkness)은 거짓을 뜻합니다.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By the “day” is meant good, by the “night,” evil; and therefore goods are called works of the day, but evils works of the night; by the “light” is meant truth, and by the “darkness” falsity, as the Lord says: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3:19, 21)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John 3:19, 21).

 

해설

 

AC.38은 매우 짧지만, 창세기 1장의 속뜻을 읽는 데 중요한 네 가지 대응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낮’은 선, ‘밤’은 악, ‘빛’은 진리, ‘어둠’은 거짓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비유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언어가 지닌 영적 의미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선한 것들은 ‘낮의 일’, 악한 것들은 ‘밤의 일’이라고 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먼저 ‘왜 낮은 선이고 밤은 악인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AC.38은 그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고 대응 자체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낮에는 빛이 있어 사물들이 드러나고 활동할 수 있으며, 밤에는 어둠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자연적 모습이 그 영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빛’은 진리에, ‘어둠’은 거짓에 대응합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볼 수 있게 하지만, 거짓은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앞의 AC.37에서는 아침·낮·저녁·밤의 교대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에 비유했는데, 이번 AC.38에서는 곧바로 ‘밤은 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의 ‘밤’과 여기의 ‘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말씀의 상응을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사전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자연적 대상이나 상태도 문맥에 따라 강조되는 영적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AC.37에서는 하루와 한 해의 변화가 ‘교대와 다양함’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고, AC.38에서는 ‘낮과 밤’,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구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7의 모든 ‘밤’을 곧 악이라고 읽거나, 반대로 AC.38의 밤을 단순한 상태 변화 정도로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각각 그 글이 말하는 문맥을 따라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요3:19, 21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고 말씀하시고, 반대로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빛과 어둠이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고 행하는 인간의 삶과 관계된다는 것이 잘 드러납니다.

 

특히 요3장의 말씀에는 ‘행위’가 함께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어둠을 사랑하는 이유는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이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오는데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입니다. 그러므로 AC.38이 선을 ‘낮의 일’, 악을 ‘밤의 일’이라고 표현한 것은 선과 악이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개념이 아님을 이해하게 해 줍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이는지는 결국 삶과 행위에도 관계됩니다.

 

그렇다고 ‘행위만 보면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모두 알 수 있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8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주려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에서 왜 선과 악을 낮과 밤으로, 진리와 거짓을 빛과 어둠으로 표현하는지를 밝히는 글입니다. 따라서 이 대응은 먼저 다른 사람을 분류하는 도구가 아니라 말씀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빛=진리’라는 대응도 중요합니다. 진리를 단지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를 받아들여 사는 것은 구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진리가 삶에서 행해질 때에야 비로소 빛이 된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8에서 빛은 진리 자체를 뜻합니다. 다만 요3장의 인용이 보여 주듯 사람은 그 빛을 사랑하여 그쪽으로 나올 수도 있고, 자기의 악한 행위 때문에 빛보다 어둠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빛이 빛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사람이 그 빛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1:18의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라는 표현도 단순히 자연계의 밝음과 어둠을 나누는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서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거짓인지 분별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어느 쪽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AC.38은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네 가지 대응만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낮은 선, 밤은 악, 빛은 진리, 어둠은 거짓.’ 그러나 이 짧은 대응을 붙들고 창세기 1장을 다시 읽으면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셨다’는 말씀이 인간 안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분명히 구별되어 가는 거듭남의 이야기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심화

1. 넷째 날 요약, 정리

 

AC.38, 심화 1, 넷째 날 요약, 정리

AC.38.심화1. 넷째 날 요약, 정리 창1:14-19의 넷째 날에 해당하는 AC.30-38을 여기까지 읽고 나면 여러 내용이 한꺼번에 등장해서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 사랑과 신앙, 의지

bygrace.kr

 

 

 

AC.39, 창1:20,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bygrace.kr

 

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7

광명체들로 하여금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고 합니다. 이 말 속에는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 문자적 의미만 보면 그런 깊은 뜻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다만 이것만 말씀드리는 걸로 충분한데요, 곧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일반적으로도, 또 개별적으로도 교대(alternations)라는 게 있으며, 이것이 날과 해의 변화(changes)에 비유된다는 점입니다. 날의 변화는 아침에서 정오로, 다시 저녁으로, 그리고 밤을 거쳐 다시 아침으로 진행합니다. 해의 변화도 이와 같아서, 봄에서 여름으로, 다시 가을로, 그리고 겨울을 지나 다시 봄으로 진행합니다. 여기서 열과 빛의 변화가 생기고, 또한 땅의 산물들도 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 역시 이러한 변화에 비유됩니다. 이런 교대와 다양함(varieties)이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수 없고, 더 나아가 퍼셉션, 곧 지각될 수도 없습니다. 이런 교대를 선지자들은 ‘규례’(ordinances, [statuta])라 하는데, 예레미야에 보면 나옵니다. It is said that the luminaries shall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 although in the literal sense nothing of the kind appears. Suffice it here to observe that there ar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which are compared to the changes of days and of years. The changes of days are from morning to midday, thence to evening, and through night to morning; and the changes of years are similar, being from spring to summer, thence to autumn, and through winter to spring. Hence come the alternations of heat and light, and also of the productions of the earth. To these changes are compared th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 These alternations are in the prophets called “ordinances” [statuta], as in Jeremiah:

 

3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36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35, 36) Said Jehovah, who giveth the sun for a light by day, and the ordinances of the moon and of the stars for a light by night, . . . these statutes shall not recede from before me (Jer. 31:35–3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렘33:25) Said Jehovah, If my covenant of day and night stand not, and if I have not appointed the ordinances of heaven and earth (Jer. 33:25).

 

이러한 것들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창세기 8장 22절에서 더 말씀드릴 것입니다. But concerning these things, of the Lord’s Divine mercy, at Genesis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8:22)

 

해설

AC.37은 창1:14의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설명하면서 뜻밖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몇 단어 안에 지금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고 한 가지 원리만 먼저 알려 줍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교대’(alternations)가 있으며, 그것이 자연계에서 날과 해가 변하는 모습에 비유된다는 것입니다.

 

‘교대’라는 말이 처음에는 조금 낯설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언제나 똑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상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연의 하루를 보면 아침에서 정오로, 정오에서 저녁으로, 밤을 거쳐 다시 아침으로 갑니다. 한 해도 봄에서 여름으로,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가고 다시 봄을 맞습니다. 그에 따라 빛과 열이 달라지고 땅에서 나는 것들도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천적인 것들에도 이와 비교할 수 있는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인생에도 좋은 날과 나쁜 날이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대와 함께 ‘다양함’(varieties)을 말하면서,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은 획일적이 되어 결국 생명이라 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더 나아가 선과 진리도 분별되고 구별될 수 없으며, 더욱이 퍼셉션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영적 생명 자체에 상태의 차이와 다양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여기서 ‘왜 변화가 없으면 생명이 없다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AC.37은 그 원리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연계의 모습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하루가 한 시각에 멈추고 계절도 하나뿐이라면 자연의 생명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빛과 열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땅의 산물도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자연의 질서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를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영적 삶에서도 신앙이 강해졌다 약해졌다 하고 사랑이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하는 것이 모두 정상이며 좋은 것이라는 뜻일까요? 여기서는 조심해야 합니다. AC.37은 모든 영적 침체와 후퇴, 모든 악과 거짓의 상태를 ‘필요한 겨울’이라고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영적·천적인 것들에 교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악이나 신앙의 후퇴를 보고 ‘지금은 겨울이니 괜찮다’고 합리화하는 것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바를 넘어섭니다.

 

반대로 영적 상태가 늘 똑같지 않다고 해서 곧 거듭남이 실패했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AC.37에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받을 수 있는 중요한 도움입니다. 사람은 한 번 진리를 깨달았다고 언제나 똑같은 정도로 밝게 느끼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주님 사랑을 경험했다고 언제나 같은 정서 상태에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AC.37은 영적 생명을 정지된 한 상태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이 있는 생명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교대’를 선과 악의 단순한 반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아침은 무조건 선, 밤은 무조건 악이라는 식으로 이 글을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자연의 날과 계절은 영적 상태의 변화를 보여 주는 비교이며, 각각의 구체적인 의미는 문맥에 따라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선과 진리가 분별되거나 구별될 수 없고, 더욱이 퍼셉션될 수도 없다’는 말은 흥미롭습니다.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이 단순히 지루함을 막아 주는 장치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경험하고 분별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AC.37은 여기서 그 과정이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둠을 경험해야만 빛을 알 수 있다’, ‘악을 겪어야 선을 배운다’는 식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악 자체가 선을 가르치는 필수 교사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러한 교대를 선지자들이 ‘규례’(ordinances)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렘31:35-36과 렘33:25을 인용합니다. 해가 낮을 비추고 달과 별이 밤을 비추는 규례, 주야의 언약과 천지의 규례가 말씀에 등장합니다. 자연계의 일정한 변화가 무질서한 우연이 아니라 정해진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듯, 스베덴보리는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도 ‘규례’라는 말과 연결하여 보여 줍니다.

 

여기서도 한 걸음 이상 앞서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구절들이 AC.37에서 인용되었다고 해서 ‘어떤 영적 겨울이 와도 반드시 곧 봄이 온다는 약속’이라고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AC.37이 이 구절들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이유는 ‘교대’를 선지자들이 ‘규례’라고 부른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에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를 창8:22에서 다시 다루겠다고 예고합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지금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AC를 읽을 때 이런 대목도 중요합니다. 어떤 표현의 의미를 한 글에서 완전히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다시 돌아와 더 깊이 펼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7에서 지금 붙들어야 할 중심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영적 생명은 언제나 똑같은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교대와 다양함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아침·낮·저녁·밤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변화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생명에 속하며 선과 진리를 분별하고 퍼셉션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자신의 영적 상태가 어제와 오늘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지나치게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냉각과 후퇴를 ‘영적 계절의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AC.37은 우리에게 영적 생명이 ‘변화 없는 고정 상태’가 아니라는 중요한 원리를 먼저 가르치고, 그 교대의 더 깊은 아르카나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고 남겨 둡니다.

 

심화

1. ‘징조’(signs), ‘계절’(seasons), ‘날’(days), ‘해’(years)

 

AC.37, 심화 1, ‘징조’(signs), ‘계절’(seasons), ‘날’(days), ‘해’(years)

AC.37.심화1. ‘징조’(signs), ‘계절’(seasons), ‘날’(days), ‘해’(years) 위 AC.37 본문에 ‘이 말 속에는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In these words are contained

bygrace.kr

 

2. 왜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는가?

 

AC.37, 심화 2, 왜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는가?

AC.37.심화2. 왜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는가? 위 AC.37 본문에 ‘이런 교대와 다양함(varieties)이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bygrace.kr

 

 

 

AC.38, 창1:18-19, ‘이는 넷째 날이니라’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bygrace.kr

 

AC.36, 창1:14-17, '신앙이란 무엇인가?'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