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폐함의 두 종류, 알면서도, 그리고 보면서도 원치 않는 경우, 그리고 무지하여 뭘 알고, 뭘 봐야 하는지를 모르는 경우, 전자는 옛 유대인들과 오늘날 기독교인들, 후자는 고대와 현대의 이방인들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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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함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알고 있으면서 알기를 원치 않거나, 보고 있으면서 보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입니다. 옛 유대인들과 오늘날 기독교인들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는, 무지의 결과, 뭘 알지도 못하고, 볼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고대와 현대의 이방인들처럼 말입니다. 알면서도 아는 걸 원치 않는, 즉 보면서도 보는 걸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황폐함의 마지막 때가 이르면 이때 하나의 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데요, 이들이 아니고, 이들이 이방인이라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일어납니다. 이런 일이 홍수 전 태고교회에 일어났고, 또 홍수 후 고대교회와, 그리고 유대교회에도 일어났습니다. Vastation is of two kinds; first, of those who know and do not wish to know, or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like the Jews of old, and the Christians of the present day; and secondly, of those who, in consequence of their ignorance, neither know nor see anything, like both the ancient and modern gentiles. When the last time of vastation comes upon those who know and do not desire to know, that is,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then a church arises anew, not among them, but with those whom they call gentiles. This occurred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was before the flood, with the ancient church that was after that event, and also with the Jewish church.

 

새 빛이 그때 빛을 발하고, 그전에는 아닌 이유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그때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들이 진리임을 시인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new light shines forth then and not before is, as has been said, that then they can no longer profane the things revealed,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that they are true.

 

※ 그렇다고 주님의 진리를 시인하지 않는 것, 믿지 않는 것이 잘 하는 것, 좋은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비유하자면... 안 믿는데 정직하고 양심적인 사람과, 믿는다고 하면서 속이고, 비양심적인 사람과... 이 둘 중 전자는 그 영이 깨끗한 반면, 후자는 자기 영에 죄를 짓는 사람, 자기 영을 더럽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후 운명은 이 영의 어떠함으로 결정되는데... 이럴 경우, 이 후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사랑의 주님은 ‘신성모독’을 금하신 것입니다. 신성모독으로 사람의 영은 망가지기 때문인데, 신성모독의 사람은 주님도 수습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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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아침’, 새 빛은 왜 교회가 황폐해질 때까지는 발하지 않는가? 안 그러면 신앙과 체어리티에 관한 모독이 일어나기 때문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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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교회가 더이상 그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지면 전과 다르게 새로움이 시작, 즉 새 빛이 발(發)하는데요, 말씀에서는 이걸 ‘아침’이라고 합니다. 이 새 빛,  아침이 왜 교회가 황폐해질 때까지는 발하지 않는지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동안 신앙과 체어리티의 일들은 모독의 일들과 뒤엉킨 상태로 지내왔는데요, 계속 이런 상태에 있는 한, 무슨 빛이나 체어리티의 일이 시작되기란 불가능합니다. ‘잡초들이 모든 좋은 씨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When a church has been so vastated that there is no longer any faith, then and not before, it begins anew, that is, new light shines forth,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morning.” The reason why the new light or “morning” does not shine forth until the church is vastated, is that the things of faith and of charity have been commingled with things profane; and so long as they remain in this state it is impossible for anything of light or charity to be insinuated, since the “tares” destroy all the “good seed.”

 

※ 주님의 비유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13:24-30)

 

그러나 신앙이라는 게 전혀 없으면, 신앙은 더이상 모독(冒瀆, profaned)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선포된 걸 더이상 믿지 않기 때문이며, 시인도 안 하고 믿지도 않는, 대신 알기만 하는 사람들은 위에서 관찰한 것처럼, 모독이라는 걸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가 바로 오늘날 유대인들의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시인하는 주님이 자기들이 그토록 자원하여 기다려 왔고, 지금도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이 사실을 시인하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실을 모독할 수 없습니다. But when there is no faith, faith can no longer be profaned, because men no longer believe what is declared unto them; and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but only know, cannot profane, as was observed above. This is the case with the Jews at the present day, who in consequence of living among Christians must be aware that the Lord is acknowledged by Christians to be the messiah whom they themselves have expected, and still continue to expect, but yet they cannot profane this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it.

 

※ 이런 유대인들의 특성은 저들의 이런 성정을 잘 아시는 주님의, 저들을 향하신 배려라고 합니다. 저들은 조상들로부터 유전한 그 특성 상, 만일 주님을 시인하고 믿게 되면 반드시 돌이켜 부인, 결국 주님을 모독하게 되고, 그 결과, 그들의 영이 더럽혀져 영원히 멸망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에 대하여 들은 모하메드인들과 이방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 교회가 아무것도 시인도, 믿음도 없을 때까지는 주님이 세상에 오실 수 없으셨던 이유였습니다. And it is the same with the Mohammedans and gentiles who have heard about the Lord. It was for this reason that the Lord did not come into the world until the Jewish church acknowledged and believed no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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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의 속뜻, 심지어 그렇게 분리되었을지라도 신앙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될 것이다!

 

15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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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씀의 의미가 심지어 그렇게 분리되었을지라도 신앙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될 것이다 라는 것이 분명한 것은 ‘가인’이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이라는 의미인 것과, ‘’(7, seven, 일곱)이 신성하다(sacred) 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숫자 은 잘 알려진 대로 아주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육일간의 창조에 이은 일곱 번째 날, 그 자체가 곧 천인(天人, the celestial man)이요, 그 안에 평화와 쉼, 그리고 안식이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숫자는 유대 교회의 예전에서 아주 자주 나오며, 이 숫자가 나오는 곳마다 신성함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 기간이 아주 길든지 짧든지 둘 다 ’(7, seven)로 구별하였으며, 아래 다니엘 본문처럼 메시아의 오심을 가리키는 아주 장구한 시간 간격을 가리켜 이레’(weeks, 일곱 날, 일곱째 날)라 하였습니다. (9:24-25) 라반과 야곱은 칠 년이라는 기간을 칠 일이라 하였습니다. (29:27-28) 같은 이유로 어디서든 이 ’(7)이라는 숫자는 거룩 혹은 신성불가침(inviolable)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시편을 보면  That the words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signify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sacrileg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Cain,” which is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seven,” which is what is sacred. The number “seven” was esteemed holy, as is well known, by reason of the six days of creation, and of the seventh, which is the celestial man, in whom is peace, rest, and the sabbath. Hence this number occurs so frequently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nd is everywhere held sacred, and hence also both greater and less periods of time were distinguished into sevens, and were called “weeks,” such as the great intervals of time to the coming of the messiah; (Dan. 9:24–25) and the time of seven years called a “week” by Laban and Jacob. (Gen. 29:27–28) For the same reason, wherever it occurs, the number seven is accounted holy or inviolable. Thus we read in David: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시119:164) Seven times a day do I praise thee. (Ps. 119:164)

 

이사야에서 In Isaiah: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사30:26) The light of the moon shall be as the light of the sun, and the light of the sun shall be sevenfold, as the light of seven days, (Isa. 30:26)

 

여기 ‘’는 사랑을, ‘’은 사랑으로 말미암은 신앙을 가리키는데, 사랑처럼 될 신앙입니다. 사람의 거듭남의 기간이 일곱 번째 날, 곧 천인이 되기 전, 숫자 ’(6, six)으로 구별되듯, 그가 황폐해지는 기간, 곧 천적인 것이 전혀 남지 않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 또한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의 여러 번 포로 생활과, 마지막 혹은 바벨론 유수(幽囚, captivity), 곧 십 년씩 일곱 번, 혹은 칠십 년간 지속된 기간은 이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땅은 안식년을 가져야 한다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역시 같은 내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where the “sun” denotes love, and the “moon” faith from love, which should be as love. As the periods of man’s regeneration are distinguished into six, before the seventh arrives, that is, the celestial man, so also are the periods of his vastation, up to the time when nothing celestial remains. This was represented by the several captivities of the Jews, and by the last or Babylonish captivity, which lasted seven decades, or seventy years. It is also said several times that the earth should rest on its sabbaths. The same is represented by Nebuchadnezzar, in Daniel:

 

16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23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32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단4:16, 23, 32) His heart shall be changed from man, and a beast’s heart shall be given unto him, and seven times shall pass over him. (Dan. 4:16, 23, 32)

 

그리고 계시록, 마지막 때의 황폐함에 관하여 And in John, concerning the vastation of the last times:

 

1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6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7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8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계15:1, 6-8) I saw another sign in heaven, great and marvelous, seven angels, having the seven last plagues; (Rev. 15:1, 6–8)

 

그리고 계속해서 and that: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계11:2) The gentiles should tread the holy city under foot forty and two months, or six times seven. (Rev. 11:2)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계5:1) I saw a book written within and on the back, sealed with seven seals. (Rev. 5:1)

 

같은 이유로 징벌의 가혹함과 더함을 모세의 책에서처럼 숫자 ‘’(7)로 표현했습니다. For the same reason the severities and augmentations of punishment were expressed by the number seven; as in Moses:

 

18또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21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24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 28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레26:18, 21, 24, 28) If ye will not yet for all this obey me, then I will chastise you sevenfold for your sins. (Lev. 26:18, 21, 24, 28)

 

그리고 시편에서 And in David: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시79:12) Render unto our neighbors sevenfold into their bosom. (Ps. 79:12)

 

자, 정리하자면, 신앙을 범하는 것, 신앙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sacrilege)이었기 때문에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십니다. 그동안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은 예배에 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Now as it was a sacrilege to do violence to faith—since as has been said it was to be of service—it is said that “whosoever should slay Cain, vengeance should be taken on him sevenfold.”

 

 

24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단9:24-25)

 

27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28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창29: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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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의 속뜻

 

15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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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심지어 그렇게 분리되었을지라도 신앙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a sacrilege)이 될 것임을,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는 주님은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셔서 신앙이 보존될 수 있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By “vengeance being taken sevenfold on anyone who slays Cain” is signified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a sacrilege;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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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34, 창4:23-24, '창4 개요'(AC.324-337) - 가장 지독한 수준의 신성모독(sacrilegious)이 있었던 교회

 

창4 개요

 

334

신앙과 체어리티의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일어난 이 교회, 그리고 이 교회에 행해졌던 폭행, 가장 지독한 수준의 신성모독(sacrilegious)이 있었던 교회 이야기입니다. (23-24절) That this church arose when everything of faith and charity was extinguished, and had violence done to it, which was in the highest degree sacrilegious, is described. (verses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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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02, 창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AC.298-304) - 유대인들에게는 신앙의 신비들이 절대로 계시되지 않은 이유

 

22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302

이것이 왜 유대인들에게는 신앙의 신비들이 절대로 계시되지 않았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사후에도 삶이 있다는 것과 주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러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말씀들조차 전혀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말 대단할 정도로 무지하고 어리석더니, 그때도 고집스럽게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속 사람의 존재나 내적인 것들에 관해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만일 그걸 인정하고자 전부터 그걸 알았었거나 지금 알게 된다면, 그들은 기어코 그걸 신성모독, 기어코 저세상에서 자기들 몫의 어떤 구원도 남겨 놓지 않을 그런 캐릭터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요한복음에서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This is the reason why the mysteries of faith were never revealed to the Jews. They were not even plainly told that they were to live after death, nor that the Lord would come into the world to save them. So great were the ignorance and stupidity in which they were kept, and still are kept, that they did not and do not know of the existence of the internal man, or of anything internal, for if they had known of it, or if they now knew of it, so as to acknowledge it, such is their character that they would profane it, and there would be no hope of any salvation for them in the other life.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Lord in John: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요12:40) He hath blinded their eyes, and stopped up their heart, that they should not see with their eyes, nor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convert themselves, and I should heal them. (John 12:40)

 

그리고 주께서 그들에게 풀이 없이 비유로만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안 그러면 그들이 보며 들으며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And by the Lord speaking to them in parables without explaining to them their meaning, lest (as he himself says),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13:13) Seeing they should see, and hearing they should hear, and should understand. (Matt. 13:13)

 

같은 이유로, 신앙의 모든 신비가 그들에게는 숨겨졌고, 그들의 교회의 표상들 속으로 봉인되었으며, 같은 이유로, 예언적 스타일 또한 그 캐릭터가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는 것이 있고, 인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알고는 있는데 인정하지는 않는 사람은 마치 그걸 몰랐던 사람인 것처럼 있습니다. 그런데 인정해놓고, 나중에 신성모독 및 불경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하신 이 말씀들의 의미입니다. For the same reason all the mysteries of faith were hidden from them, and were concealed under the representatives of their church, and for the same reason the prophetic style is of the same character. It is however one thing to know, and another to acknowledge. He who knows and does not acknowledge is as if he knew not; but it is he who acknowledges and afterwards blasphemes and profanes, that is meant by these words of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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