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3은‘여섯째날의끝에서악한영들은떠나가고선한영들이그자리를대신한다’고 말합니다.그런데 바로 앞AC.59에서는 악한 영들이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어 그의 욕정을 자극한다고 했습니다.따라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악한영들은사람에게계속관계하는것아닌가?그런데왜여기서는떠난다고하는가?’
먼저AC.63이 실제로 말하는 것을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본문은 분명히‘악한영들은떠나가고선한영들이그자리를대신한다’고 합니다.따라서 처음부터 이것을‘사실떠나는것이아니라그대로주변에있으면서영향력만약해진다’고 바꾸어 번역하듯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스베덴보리가‘떠난다’고 했으면 우선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동시에 이 한 문장을 가지고‘거듭난사람에게는이제어떤악한영도전혀접근할수없으며악의영향가능성자체가영원히사라진다’고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AC.63은 여기서 영들과 인간의 관계 전체를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여섯째 날의 끝에서 일어나는 상태 변화를 요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큰 전환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AC.59에서는 전투 가운데 악한 영들이 사람의 욕정을 자극하고 있었고,AC.63에서는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면서 그 전투가 그칩니다.바로 그 뒤에‘악한영들은떠나가고선한영들이그자리를대신한다’는 말이 나옵니다.따라서 악한 영들의 떠남은 적어도 전투가 그치고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변화와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존 설명처럼 이것을‘악한영들이지배권을잃는다’고 표현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그러나 이것을AC.63의 문장 자체가 정확히 정의한 뜻이라고 단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떠남’이 영계에서 어떤 관계 변화와 정확히 대응하는지,악한 영들이 이후 사람과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는 뜻인지 아닌지는 관련AC들의 설명을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사람에게는언제나선한영과악한영이함께있어균형이유지되어야하는것아닌가?’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지만,그것 역시 인간의 자유와 영적 균형에 관한 더 큰 교리에 속합니다.그 교리를AC.63한 문장 안에 억지로 끌어와‘그러므로떠난다는것은사실밖으로밀려난다는뜻이다’라고 결론 내리면,오히려 본문의 표현을 다른 교리에 맞추어 수정하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두 사실을 함께 붙들면 좋겠습니다.첫째,AC.63은 여섯째 날 끝에 악한 영들이 실제로‘떠난다’고 말합니다.둘째,이 한 문장만으로 인간과 악한 영의 모든 관계가 완전히 끝난다고까지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그 사이의 세부적인 영적 질서는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더 설명하는 내용을 따라가며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무엇보다 본문의 강조점은 악한 영들이 어디로 이동했는가를 추적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더 중요한 것은‘선한영들이그자리를대신한다’는 것입니다.여섯째 날까지 이어진 전투가 그치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면서 사람을 둘러싼 영적 상태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악한영들은떠나가고’라는 말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붙들 것은‘악한영은완전히소멸하는가,몇미터밖으로물러나는가?’같은 공간적인 그림이 아니라,여섯째 날의 전투가 끝나고 다음 상태가 시작된다는 문맥입니다.영들의 세계에서‘떠남’이 정확히 어떤 상태의 변화를 뜻하는지는 충분한 관련 본문을 만나면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되겠습니다.
AC.62는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 여섯 단계로 나뉘며,사람이‘조금씩조금씩’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말합니다.그런데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여섯째 날에서 끝나지 않고 일곱째 날의 안식으로 이어집니다.여기서AC를 처음부터 따라온 독자라면AC.13에서 이미 읽었던 한 문장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스베덴보리는 여섯 번째 상태까지 이르는 이는‘적고’(few),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거의없다’(scarcely)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AC.13이 말한 것보다 더 많이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따라서 이 표현을‘사실은누구나결국일곱째상태에이른다’거나‘모든사람이각자다른방식으로일곱째상태를완성한다’는 뜻으로 바꾸어 읽을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거의없다’를‘아무도갈수없다’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scarcely’는 문자 그대로‘거의없다’, ‘좀처럼없다’는 뜻이지‘절대로없다’는 뜻은 아닙니다.그러므로AC.13이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경우는 존재하지만 매우 드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AC.62가 직접 설명하는 것은‘여섯단계’와‘여섯째날에하나님의형상이됨’입니다.일곱째 상태의 성질을AC.62가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따라서AC.62한 문장만 가지고‘여섯째날은영적천국이고일곱째날은천적천국이다’,또는‘모든사람은여섯째날을거쳐일곱째날의천적인간이되어야한다’는 식의 체계를 만들면 본문보다 앞서가게 됩니다.
AC.13으로 돌아가 보면 첫째 상태에서 일곱째 상태까지의 전체 윤곽이 이미 간단히 제시되어 있습니다.거기에서 일곱째 상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의 상태로 설명됩니다.따라서 일곱째 상태가 매우 높은 거듭남의 상태라는 점은 분명합니다.그러나 그것이 모든 거듭나는 사람에게 반드시 동일한 방식으로 도달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마지막 단계인지,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와 정확히 어떻게 관계되는지는 관련 글들을 더 충분히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일곱째상태에이르는이는거의없다’는 말을 너무 빨리 통계나 운명론으로 바꾸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천적인간으로태어나는사람은극소수인가?’, ‘나는영적유형으로태어났으니애초에일곱째상태에는갈수없는가?’같은 질문이 곧바로 생길 수 있습니다.그러나AC.13과AC.62는 사람들을 출생 때부터 두 종류로 분류하는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두 글만으로‘누가처음부터영적인간형이고누가천적인간형인가’를 판정할 수 없습니다.더구나 온순하고 다정한 성격이면 천적 인간이고,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이면 영적 인간이라는 식으로 사람의 자연적 기질을 스베덴보리의‘영적’과‘천적’에 그대로 대응시켜서도 안 됩니다.그것은AC가 사용하는 용어보다 훨씬 피상적인 구별이 됩니다.
그러면AC.13의‘거의없다’는 말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요?가장 먼저 거듭남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겠습니다.창세기1장의 여섯 날과 이어지는 일곱째 상태는 며칠 동안 몇 가지 종교적 체험을 하면 끝나는 과정이 아닙니다.AC.62가 굳이‘조금씩조금씩’이라고 말하는 것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과정이 점진적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낙심의 근거로 삼을 필요도 없습니다.AC.62의 초점은‘너는몇째날까지갈수있느냐’를 묻는 데 있지 않습니다.사람이 처음 상태에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창조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변화된다는 데 있습니다.따라서 우리의 관심도‘나는일곱째상태에들어갈수있을까?’라는 자기 등급 판정보다 지금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두는 편이 좋습니다.
또‘거의없다’는 말을 보고 그 상태에 이른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내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누가 여섯째 상태이고 누가 일곱째 상태인지 외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AC.13이나AC.62는 제공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이런 말씀은 다른 사람을 분류하기보다 거듭남이 얼마나 깊은 주님의 역사인지를 보게 합니다.
무엇보다 창세기 본문의 순서를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말씀은‘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이는여섯째날이니라’입니다.AC.62역시 이 여섯째 날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어떻게‘조금씩조금씩’하나님의 형상이 되는지를 말합니다.일곱째 날은 곧 이어지는 창2:1-3의 말씀에서 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단계에서 가장 안전한 결론은 이것입니다.AC.13은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거의없다’고 실제로 말합니다.그 표현을 약화시킬 필요도, ‘아무도없다’고 강화할 필요도 없습니다.그리고AC.62는 사람이 여섯 창조의 날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말합니다.이 두 진술을 그대로 붙들고,일곱째 상태와 천적 인간의 더 깊은 관계는 관련AC들이 직접 설명할 때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독법은 답을 조금 늦추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AC를 더 정확하게 읽는 방법입니다.스베덴보리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먼저 체계화하기보다,말씀과AC가 열어 주는 순서를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거듭남 자체가‘조금씩조금씩’이루어진다고 하듯,그것을 이해하는 일도 그렇게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AC.62
인간의거듭남에속한시간들과상태들은일반적으로도,그리고개별적으로도여섯단계로나눌수있으며,이것들을그의창조의날들(thedaysofhiscreation)이라고부릅니다.이는사람이전혀인간이라할수없는상태에서출발하여,처음에는겨우인간이라할만한어떤상태가되고,그렇게조금씩조금씩나아가마침내여섯째날에이르러하나님의형상(animageofGod)이되기때문입니다. The times and states of man’s regeneratio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divided into six, and are called the days of his creation; for, by degrees, from being not a man at all, he becomes at first something of one, and so by little and little attains to the sixth day, in which he becomes an image of God.
해설
AC.62는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지금까지 스베덴보리가 왜 인간의 거듭남의 여섯 상태로 읽어 왔는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 주는 글입니다. 말씀에는 ‘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이는여섯째날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AC.62는 이 ‘날들’을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라고 하며, 그것들을 ‘그의창조의날들’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으로 읽어 온 앞의 모든 설명이 여기에서 매우 간결하게 요약되는 셈입니다.
먼저 ‘인간의거듭남에속한시간들과상태들’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날을 단순히 여섯 개의 종교적 지식이나 여섯 가지 덕목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면서 지나가는 ‘상태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첫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는 무엇을 여섯 가지 배운다는 목록이라기보다, 주님께서 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해 가시는 과정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62는 이것을 ‘그의창조의날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이야기이고, AC는 그 말씀의 속뜻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 역시 하나의 창조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고쳐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간다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앞에서 계속 살펴본 것처럼 거듭남의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창조의날들’이라는 말에서도 창조의 주체를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어지는 표현은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에 ‘전혀인간이라할수없는’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육체적으로 사람이 아니라거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거듭남이라는 문맥에서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AC.49에서도 참 사람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는 만큼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전혀인간이라할수없다’는 강한 표현도 그 연장선에서 읽어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살아가는 참된 인간성이라는 관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다른 사람을 낮추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저사람은거듭나지않았으니사람이아니다’라는 식의 판단은 AC.62의 목적과 전혀 다릅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다른 사람의 인간 자격을 판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거듭남이 얼마나 근본적인 새 창조인지를 보여 줍니다. 자연적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AC.62에서 특히 아름다운 표현은 그 다음의 ‘조금씩조금씩’입니다. 사람은 ‘전혀인간이라할수없는’ 상태에서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겨우 인간이라 할 만한 어떤 상태가 되고, 그 뒤 ‘조금씩조금씩’ 나아가 마침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거듭남이 점진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간결하게 보여 주는 표현도 드물 것입니다.
여기서도 원문이 말하는 만큼 정확하게 읽는 것이 좋습니다. ‘조금씩조금씩’이라고 했다고 해서 이번 한 문장만으로 거듭남의 모든 세부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단계에서 무엇이 먼저 일어나고, 얼마나 오래 걸리며, 반드시 어떤 후퇴를 몇 번 겪어야 하는지까지 AC.62가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글이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람이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bydegrees’, 곧 단계적으로, ‘bylittleandlittle’, 곧 조금씩 조금씩 거기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AC를 접하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거듭남의 상태로 읽는다고 해서 ‘나는지금셋째날인가,넷째날인가?’를 판정하는 영적 등급표로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2는 사람에게 자기 단계를 측정하라고 하기보다, 거듭남이 주님의 창조이며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큰 질서를 보여 줍니다.
마침내 여섯째 날에 사람은 ‘하나님의형상’이 됩니다. 이 표현은 앞의 AC.26부터 이어져 온 창1:26-27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의형상’이 된다는 것은 외모가 하나님과 비슷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이 주님에게서 신앙과 사랑,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게 되는 것과 관계됩니다. 특히 AC.51-53은 ‘형상’과 신앙, 이해의 관계를 설명했고, AC.60-61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여섯째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AC.62는 그 흐름을 받아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형상’이 된다고 정리합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형상이되었다’는 것을 곧 ‘거듭남의모든것이최종적으로끝났다’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여섯째 날 뒤에 일곱째 날로 이어지고, AC역시 일곱째 상태를 따로 설명합니다. AC.62가 지금 직접 말하는 것은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이 무엇이며 여섯째 날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그 내용을 직접 다루는 글에서 살펴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이 점을 지키면 ‘그러면여섯째날에완성되었는데왜일곱째날이또필요한가?’, ‘모든사람이결국천적인간이되어야하는가?’, ‘영적천국에갈사람과천적천국에갈사람은처음부터정해져있는가?’ 같은 질문을 이번 한 문장에서 억지로 모두 해결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이런 질문들은 AC전체를 읽으면서 충분한 근거가 모였을 때 다루어야 할 큰 주제들입니다. AC.62는 그것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글이 아니라 여섯 날의 의미를 요약하는 글입니다.
또 ‘일반적으로도,그리고개별적으로도’라는 표현도 너무 빨리 하나의 도식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적어도 이 표현을 통해 거듭남의 여섯 상태가 단 한 번의 피상적인 변화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인류전체의역사에도정확히여섯단계가있고,한사람의생애에서도같은여섯단계가계속반복된다’는 완성된 체계를 세우기보다는, 뒤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표현을 어떻게 펼치는지를 계속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AC.62의 핵심은 오히려 아주 단순합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그의창조의날들’이라고 불립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새 창조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마침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이렇게 읽으면 창1:31의 ‘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이는여섯째날이니라’라는 말씀도 지금까지의 모든 흐름을 품고 있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첫째 날의 빛에서 시작하여 여섯째 날의 ‘심히좋았더라’에 이르기까지, AC는 이 창조의 말씀 안에서 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를 밝혀 왔습니다. 그리고 AC.62는 그 긴 흐름을 ‘조금씩조금씩’이라는 말과 ‘하나님의형상’이라는 말로 압축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 가장 오래 기억해 둘 표현을 하나 고른다면 ‘조금씩조금씩’이어도 좋겠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단번에 높은 상태에 뛰어오르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해 가시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의 목적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더욱 크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마침내 ‘하나님의형상’이 되는 데 있습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 25)
AC.48
이로부터사람이거듭남의다섯번째상태에있을때가분명해집니다.이때사람은이해에속한신앙의원리로말하며,그로써진리와선안에서자신을확증합니다.그가이때내놓는것들은생명이있는것들이며,그것들을가리켜‘바다의물고기’(fishesofthesea), ‘하늘의새’(fowloftheheavens)라합니다.사람이여섯번째상태에이르면,이해에속한신앙과,거기에서나온의지에속한사랑으로진리들을말하고선한일들을행합니다.그가이때내놓는것을‘생물’(livingsoul), ‘가축’(beast)이라합니다.그리고이때그는신앙으로뿐만아니라사랑으로도행동하기시작하므로, ‘하나님의형상’(imageofGod)이라하는영적인간이됩니다.이것이지금여기서다루는주제입니다. Hence then it appears that man is in the fifth state of regeneration when he speaks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he true and in the good.The things then brought forth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esofthesea,” and the “fowloftheheavens.”He is in the sixth state, when 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he speaks truths, and does goods; what he then brings forth being called the “livingsoul,” and the “beast.”And as he then begins to act from love, as well as from faith,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ofGod,” which is the subject now treated of.
해설
AC.48은 지금까지 이어진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차이를 짧고 분명하게 정리하는 글입니다. 특히 ‘다섯번째상태와여섯번째상태가실제로무엇이다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합니다. 앞에서는 물고기와 새, 생물과 짐승이라는 각각의 상응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한 사람의 거듭남 과정 안에 놓고 두 상태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먼저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이해에속한신앙의원리로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사람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신앙으로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이미 ‘생명이있는것들’입니다. 그래서 다섯째 날의 ‘바다의물고기’와 ‘하늘의새’로 표현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섯 번째 상태를 아직 영적으로 살아 있지 않은 상태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48은 이때 산출되는 것들을 분명히 ‘animate’, 곧 생명이 있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앞의 AC.39에서도 큰 광명체들이 켜진 뒤 사람이 비로소 살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섯 번째 상태에 와서 처음으로 영적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있지만, 그 생명이 나타나는 중심이 아직 주로 이해에 속한 신앙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무엇이 달라질까요?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이해에속한신앙으로부터,그리고거기에서나온의지에속한사랑으로부터진리를말하고선을행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세밀한 변화가 있습니다. 신앙이 사라지고 사랑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도 신앙은 그대로 있으며, 거기에 그 신앙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함께합니다.
그래서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의 차이를 단순히 ‘아는단계와행하는단계’라고만 나누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상태의 사람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AC.48이 직접 대비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내적인 것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에서 말하며 그로써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처음 읽으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다섯째상태에는사랑이전혀없고여섯째상태에서갑자기사랑이생긴다는뜻인가?’ 그렇게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48은 거듭남 전체에서 사랑이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섯째 상태에서 사람이 ‘사랑으로도행동하기시작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이 글의 초점은 사랑의 최초 존재 여부를 따지는 데 있지 않고, 신앙과 함께 사랑이 실제 의지에 속한 원리로서 행동의 근원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기존 해설에서처럼 이를 ‘처음에는옳으니까해야한다고애쓰다가나중에는좋아서자연스럽게한다’는 예로 설명하면 어느 정도 감을 잡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AC.48의 정확한 정의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상태에 반드시 심한 억지와 갈등이 있고, 여섯째 상태에 이르면 모든 선행이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AC.48이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과 갈등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AC.48에서 우리가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은 ‘행동의근원’에 관한 변화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이 전면에 나타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그 신앙과 더불어,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가이제신앙으로부터뿐아니라사랑으로부터도행동하기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뿐아니라’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신앙을 버리고 사랑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삶의 원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때 산출되는 것들이 창1:24-25의 ‘생물’과 ‘짐승’으로 표현됩니다. 앞의 AC.44-46에서 이미 이 짐승들이 의지에 속한 것들, 특히 애정과 관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다섯째 날의 물고기와 새에서 여섯째 날의 생물과 짐승으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히 피조물의 종류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이해에 속한 신앙의 상태에서 의지에 속한 사랑까지 포함하는 상태로 깊어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영적인간’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형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AC.48의 절정입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형상’을 우리가 임의로 ‘하나님과작동방식이같아지는것’이라고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8자체가 그 이유를 간단히 제시합니다.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부터뿐아니라사랑으로부터도행동하기시작하기’ 때문에 영적 인간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형상’이라고 해서 사람이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앞의 여러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고 반복하여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자기에게서 신적인 생명을 만들어 내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과 사랑이 그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져 삶으로 나타나는 상태와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AC.47과의 연결도 중요합니다. 바로 앞에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마치자기에게서인듯’ 산출하며,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8에서는 그 진행 가운데 여섯째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에 속한 신앙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하게 되고, 사람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용어상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AC.48은 이 사람을 ‘영적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앞으로 AC를 읽다 보면 ‘영적’과 ‘천적’이 서로 구별되는 더 세밀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영적인간’이라는 말을 보고 곧바로 이후의 모든 영적·천적 구별을 이 한 문장에 끌어와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여섯째 상태에 이른 거듭난 사람을 ‘영적인간’, ‘하나님의형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 창1:26이하에서 ‘형상’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이어집니다.
AC.48은 결국 다섯째 상태를 낮추고 여섯째 상태만 참된 것으로 만드는 글이 아닙니다. 다섯째 상태도 이미 살아 있는 거듭남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이해가 진리를 알고 신앙으로 확증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그 신앙에서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나타나고, 사람은 신앙뿐 아니라 사랑에서도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는 ‘영적인간’, 곧 ‘하나님의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이 글의 흐름을 ‘신앙에서사랑으로’라고만 표현하기보다는 ‘신앙과사랑이함께삶이되는데로’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다섯째 날에 살아난 이해에 속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섯째 날에는 의지에 속한 사랑과 함께 하나의 더 온전한 삶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창조의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 사이에서 AC.48이 보여 주는 중요한 전환입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 25)
AC.47
이말씀들안에거듭남에관한아르카나가들어있다는사실은,앞절에서땅이‘생물,가축,땅의짐승’(thelivingsoul, thebeast, andthewildanimaloftheearth)을낼것이라고말한반면,다음절에서는순서가바뀌어하나님께서‘땅의짐승,가축’(thewildanimaloftheearth, thebeast)을만드셨다고말하는데서도분명히드러납니다.이는사람이처음에는,그리고이후천적인간이되기까지는마치자기에게서인듯산출하기때문입니다.그래서거듭남은겉사람에서시작되어속사람으로나아갑니다.이런이유로여기다른순서가나오는것이며,겉에속한것들이먼저언급되는것입니다. That these words contain arcana relating to regeneration, is evident also from its being said in the foregoing verse that the earth should bring forth “thelivingsoul,thebeast,andthewildanimaloftheearth,” whereas in the following verse the order is changed, and it said that God made “thewildanimaloftheearth,” and likewise “thebeast”; for at first, and afterwards until he becomes celestial, man brings forth as of himself; and thus regeneration begins from the external man, and proceeds to the internal; therefore here there is another order, and external things are mentioned first.
해설
AC.47은 아주 짧지만 창1:24-25의 문장을 얼마나 세밀하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흥미로운 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새로운 단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 ‘순서의변화’입니다. 24절에서는 땅이 ‘생물,가축,땅의짐승’을 내라고 하지만, 2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땅의짐승,가축’을 만드셨다고 하여 앞에서와 순서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작은 차이 안에도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이정도의어순차이에정말의미가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AC.47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단순히 자연계 창조의 순서를 기록한 문장으로만 읽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을 담은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대상들이 왜 다른 순서로 언급되는가도 그에게는 설명되어야 할 말씀의 일부입니다.
그가 제시하는 설명의 중심은 ‘사람이처음에는,그리고이후천적인간이되기까지는마치자기에게서인듯산출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마치자기에게서인듯’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실제로 영적 생명과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9-43에서 이미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AC.47을 그 흐름과 분리해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마치자기에게서인듯’이라고 말할까요? AC.47은 그 이유나 작동 방식을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거듭남의 과정에서 그렇게 산출하며, 바로 그 때문에 거듭남이 ‘겉사람에서시작하여속사람으로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이 두 진술을 스베덴보리가 직접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거듭남이겉사람에서시작한다’는 말을 ‘사람이외적인행동을반복하면그것이차츰속사람을변화시킨다’는 하나의 심리적 훈련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실제 삶의 순종과 행함은 거듭남에서 중요합니다. 바로 앞의 AC.44도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AC.47자체는 ‘행동→ 습관→ 애정→ 속사람’이라는 단계나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또 ‘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라는 말을 주님께서 겉 사람에서 일을 시작하여 점차 속 사람으로 들어가신다는 공간적 이동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거듭나는 사람이 경험하고 산출하는 질서를 설명하면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및 주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거듭나게 하시는가는 AC가 진행되면서 훨씬 더 세밀하게 설명되므로, 이 한 문장에 그 모든 메커니즘을 미리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24절과 25절의 순서 변화가 왜 중요할까요? 24절에서는 ‘땅’이 무엇인가를 내는 장면이 먼저 제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이 ‘마치자기에게서인듯’ 산출하는 상태와 연결합니다. 반면 25절에서는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땅의짐승을...만드시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AC.47이 특별히 설명하는 것은 단순히 ‘땅이하다가하나님이하신다’는 주어 변화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언급되는 것들의 순서도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순서에서 ‘겉에속한것들이먼저언급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현재 단계에서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뒤바뀐 순서는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질서를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각각의 ‘땅의짐승’과 ‘가축’을 다시 세분하여 ‘이것은외적행동,이것은습관,이것은길들여진애정’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 세부 대응을 우리가 만들어 넣기보다, 그가 직접 밝힌 ‘외적인것들이먼저언급된다’는 설명을 그대로 중심에 두는 편이 좋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마치자기에게서인듯’과 ‘실제로자기에게서’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는 ‘내가생각하고,내가선택하고,내가행한다’고 경험합니다. 그러나 앞선 AC의 흐름에 따르면 그 안에 참으로 살아 있는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AC.47은 이 둘을 서로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낸다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마치자기에게서인듯’ 산출한다는 표현으로 그 상태를 말합니다.
이 점은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매우 중요해질 주제입니다. 다만 AC.47하나만으로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 섭리, 공로 없음의 관계를 모두 완성된 교리로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것은 그보다 작지만 분명한 단서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에게는 ‘마치자기에게서인듯’ 행하는 상태가 있으며, 그 과정은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현재 제목처럼 이것을 곧바로 ‘자기에서주님으로옮겨가는방향’이라고 요약하는 것도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모든 생명과 선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분명해졌지만, AC.47이 설명하는 순서 변화 자체의 직접적인 의미는 ‘자기에서주님으로주체가이동한다’기보다 ‘거듭남이겉사람에서시작하여속사람으로나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 차이를 지켜 주어야 이 짧은 글이 말하는 아르카나가 오히려 더 선명해집니다.
AC.47은 동시에 말씀을 읽는 스베덴보리의 방식을 잘 보여 줍니다. 우리 눈에는 같은 것을 조금 다른 순서로 쓴 문체상의 변화처럼 보이는 것도, 그는 거듭남의 질서와 연결하여 읽습니다. 물론 여기서 곧바로 ‘성경의모든어순변화에는반드시별개의속뜻이있다’고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7이 직접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창1:24-25의 순서 변화에 거듭남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글의 핵심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선의 근원을 온전히 지각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마치자기에게서인듯’ 산출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가며, 창1:24와 25의 미묘한 순서 변화가 바로 그 질서를 표현합니다. AC.47은 단어 하나뿐 아니라 배열의 변화까지도 거듭남의 관점에서 읽어 내면서, 창세기 창조 이야기가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를 얼마나 세밀하게 담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 25)
AC.46
‘짐승’(beasts)이사람의애정(affections)을뜻한다는사실,곧악한사람에게서는악한애정을,선한사람에게서는선한애정을뜻한다는사실은말씀의많은구절을보면분명한데요,에스겔입니다. That “beasts” signify man’s affections—evil affections with the evil, and good affections with the good—is evident from numer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Ezekiel:
이렇게여기서전반적으로‘용들’(whales),‘과수’(fruittree),‘짐승’(wildanimal),‘가축’(beast),‘기는것’(creepingthing),‘나는새’(fowl)가함께언급되는데,이것들이사람안의살아있는원리들을뜻하지않는다면,여호와를찬양하라는부름을받을수없었을것입니다. Here mention is made of the same things—as “whales,” the “fruittree,” “wildanimal,” the “beast,” “creepingthing,” and “fowl,” which, unless they had signified living principles in man, could never have been called upon to glorify Jehovah.
[3] 선지자들은‘가축’(beasts)과‘땅의짐승’(wildanimalsoftheearth),또‘가축’(beasts)과‘들의짐승’(wildanimalsofthefield)을조심스럽게구별합니다.그럼에도사람안의선한것들은‘가축’(beasts)이라합니다.마찬가지로,하늘에서주님과가장가까운이들도‘생물’(animals)이라하는데,에스겔서와요한계시록에서모두그렇게말합니다. The prophets carefully distinguish between “beasts” and “wildanimalsoftheearth,” and “beasts” and “wildanimalsofthefield.”Nevertheless goods in man are called “beasts,” just as those who are nearest the Lord in heaven are called “animals,” both in Ezekiel and in John:
또한복음이전파되는이들도‘피조물’(creatures)이라하는데,이는그들이새롭게창조되어야하기때문입니다. Those also who have the gospel preached to them are called “creatures,” because they are to be created anew:
주3. 여기이단어는‘비스트’(beasts, 짐승, 야수)가아닌, 흠정역(theauthorizedversion)에서처럼‘애니멀’(animals, 짐승, 동물)로정확하게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의‘준’(ζοόν, z¯oon)과, 라틴과영어의‘애니멀’은서로정확히대응하며, ‘생물’(alivingcreature)이라는의미에맞기때문입니다. 원전(theoriginal)해당구절들에서사용된단어는준이며, 만일‘비스트’ 사용을의도했다면썼을법한테르(θήρ, th¯er)나테리온(θηρίον, th¯erion)이아닙니다. This word is here correctly translated “animals” and not “beasts,” as in the authorized version, for z¯oon in Greek, and animal in Latin and English, precisely correspond to each other, and properly signify “alivingcreature.” Z¯oon is the word used in these passages in the original, and not th¯er or th¯erion, as would be the case if “beast” had been intended.
해설
AC.46은 바로 앞의 AC.45에서 제시한 중요한 원리, 곧 말씀에서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는 것을 수많은 성경 구절을 통해 확인하는 글입니다. 첫 문장부터 그 목적이 분명합니다. 짐승은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하며, 이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 성경 인용이 유난히 많은 이유도 새로운 주제를 계속 추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짐승=애정’이라는 해석이 창1:24-25에만 임의로 적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겔36:9,11과 렘31:27-28은 ‘거듭남’이라는 문맥에서 인용됩니다. 겔36에서는 황폐했던 땅이 다시 갈리고 심어지며 그 위에 ‘사람과짐승’이 많아지고 번성합니다. 렘31에서도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에 ‘사람의씨와짐승의씨’를 뿌리고, 이어서 세우고 심으시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가져오는 핵심 이유는 문자 그대로 사람과 동물의 개체 수가 늘어나는 것만으로는 거듭남에 관한 이 말씀의 속뜻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며, 여기의 짐승이 사람 안에서 살아나는 내적인 것, 특히 애정과 관련된 것을 뜻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AC.46은 여기서 ‘사람의씨는정확히무엇이고짐승의씨는정확히무엇이다’라는 세부 대응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욜2:22의 ‘들짐승들아두려워하지말지어다’도 같은 방향에서 사용됩니다. 들의 풀이 돋고 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회복의 장면에서 들짐승 역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반면 시73:22에서는 시편 기자가 자신의 우매함을 고백하며 ‘주앞에짐승’과 같았다고 합니다. 이 두 구절만 보아도 ‘짐승’이라는 말 자체에 언제나 선한 뜻이나 언제나 악한 뜻 하나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AC.46의 첫 문장이 이미 말했듯이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호2:18, 욥5:22-23, 겔34:25에서는 ‘들짐승’이 언약과 평화라는 문맥에 등장합니다. 호세아에서는 들짐승과 새와 땅의 곤충과 언약을 맺고, 욥기에서는 들짐승이 사람과 화목하게 되며, 에스겔에서는 화평의 언약과 함께 ‘악한짐승’이 땅에서 그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함께 제시하는 것은 말씀에서 짐승과 들짐승이 단순한 동물 이야기를 넘어 사람의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겔34:25가 굳이 ‘악한짐승’이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짐승’이라는 말 자체가 곧 악이라는 뜻이라면 ‘악한’이라는 구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43:20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들짐승이 여호와를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광야에 물이 생기고 사막에 강이 생겨 하나님의 백성이 마시게 되는 장면에서 승냥이와 타조 같은 들짐승도 하나님을 존경합니다. 문자적 자연물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의 속뜻에서 인간의 내적 상태와 연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겔31:6에서는 앗수르가 큰 나무로 묘사되고 그 가지에는 새들이 깃들이며 그 아래에서는 들짐승들이 새끼를 낳습니다. AC.46은 여기서 앗수르가 ‘영적인간’을 뜻하고 에덴동산에 비유된다고 짧게 설명합니다. 이 구절 역시 새와 짐승이 단순히 배경을 꾸미는 자연물이 아니라 영적 인간에게 속한 것들을 표현하는 말씀의 언어로 사용된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됩니다. 다만 이번 글은 앗수르나 나무, 가지, 새 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해설하려는 곳은 아닙니다. 인용의 목적은 계속 ‘짐승이인간안의살아있는것들을표현한다’는 중심 주장에 있습니다.
시148은 이 논증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천사들뿐 아니라 바다의 큰 생물들, 과수, 짐승, 가축, 기는 것과 나는 새까지 모두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개역개정의 ‘용들’에 해당하는 부분을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영어에서는 ‘whales’라고 표현합니다. AC.46은 바로 이 점을 붙들어, 이러한 것들이 사람 안의 ‘살아있는원리들’을 뜻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이 이번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해석 원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중요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그렇다면짐승은선한애정입니까,악한애정입니까?’ AC.46의 대답은 ‘문맥과그짐승의성질에따라다르다’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단순한 암기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짐승=애정’이라는 기본 관계가 있다고 해서 모든 짐승이 동일한 애정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하고 온순한 동물과 해로운 동물이 다르고, 같은 ‘짐승’이라는 표현도 어떤 사람과 어떤 상태를 다루느냐에 따라 선한 애정 또는 악한 애정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말씀의 상응을 읽는 데 계속 필요한 원리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AC.46후반부에서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구별이 나옵니다. 선지자들이 ‘가축’과 ‘땅의짐승’, 또는 ‘가축’과 ‘들의짐승’을 조심스럽게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가 실제로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 각각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축은질서잡힌높은애정이고들짐승은본능적인낮은애정’이라는 식으로 우리가 빈칸을 채우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AC.46이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사람 안의 ‘선한것들’도 짐승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매우 놀라운 예를 하나 더 듭니다. 주님께 가장 가까운 하늘의 존재들도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에서 ‘생물’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계7:11과 계19:4의 ‘네생물’이 그 예입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것은 영어 단어입니다. 각주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곳의 말이 ‘beasts’가 아니라 ‘animals’로 번역되는 것이 정확하다고 설명합니다. 헬라어 ζῷον(zōon)은‘살아있는생물’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대목의 요점은 천사들을 야수에 비유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존재’라는표현이 얼마나 높은 영적 문맥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본문에 덧붙여 놓은 AE.462의 설명, 곧 ‘모든천사’를 가장 낮은 천국, ‘장로들’을 중간 천국, ‘네생물’을 가장 높은 천국과 연결하는 설명은 AC.46자체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훗날 스베덴보리의 ‘계시록해설’에서 가져온 보충 자료입니다. 참고할 수는 있지만, AC.46의 논증 자체와 구별하여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글에서 직접 필요한 것은 ‘주님께가까운하늘의존재들조차생물이라고불린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막16:15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너희는온천하에다니며만민에게복음을전파하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표현은 영어의 ‘everycreature’, 곧 ‘모든피조물’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해 받는 이들이 ‘피조물’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새롭게창조되어야하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창세기 1장의 창조와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AC전체의 큰 주제가 다시 만납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기존의 사람에게 종교 지식 몇 가지가 더해지는 일이 아니라 ‘새롭게창조되는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6에 왜 이렇게 많은 성경 구절이 한꺼번에 등장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의 구절을 완전히 해설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요엘, 시편, 예레미야, 호세아, 욥기, 이사야, 요한계시록, 마가복음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말씀에서 ‘짐승’, ‘들짐승’, ‘생물’, ‘피조물’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인간의 내적 생명과 연결되는지를 한꺼번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인용 구절을 따로 떼어 열세 편의 해설로 읽기보다, 이 인용들이 함께 무엇을 증언하는지를 보는 것이 AC.46을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합니다.
AC.45가 ‘짐승은인간의애정을뜻한다’는 원리를 소개했다면, AC.46은 말씀 전체를 펼쳐 그 원리가 고립된 해석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중요한 균형도 가르쳐 줍니다. 짐승이라고 해서 모두 악한 것도 아니고, 모두 선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애정에도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듯이 말씀의 짐승도 그 성질과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애정을 표현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짐승이라는단어를보았으니뜻은이것이다’라고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문맥 속에서 어떤 생명과 어떤 애정이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 25)
AC.45
태고시대를살았던사람들은이해와의지에속한것들을이렇게상징으로표현했습니다.그래서선지서들,그리고구약말씀전체에서보면늘서로다른동물들을가지고같은걸표현하는데요,짐승에는두종류가있습니다.해롭기때문에악하다하는짐승들이있고,해를끼치지않기때문에선하다하는짐승들이있지요.이때사람안의악들은곰이나늑대,개같은해로운짐승들로,그리고반대로선하고온순한것들은암송아지나양,어린양같은짐승들을가지고표현하는것이지요.여기이본문에서말하는‘짐승’(beasts)은선하고온순한짐승들이며,따라서애정들을뜻합니다.이는이본문이거듭나고있는사람들에대해다루고있기때문입니다.사람안에서몸과더가까이연결된더낮은것들은‘땅의짐승’(wildanimalsofthatearth)이라고하는데,이것들은욕정(cupidities)과쾌락(pleasures)을뜻합니다. Those who lived in the most ancient times thus signified the things relating to the understanding and to the will;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and constantly in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the like things are represented by different kinds of animals.Beasts are of two kinds; the evil, so called because they are hurtful; and the good, which are harmless.Evils in man are signified by evil beasts, as by bears, wolves, dogs; and the things which are good and gentle, by beasts of a like nature, as by heifers, sheep, and lambs.The “beasts” here referred to are good and gentle ones, and thus signify affections, because it here treats of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The lower things in man, which have more connection with the body, are called “wildanimalsofthatearth,” and are cupidities and pleasures.
해설
AC.45는 창1:24-25에 등장하는 여러 짐승이 왜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뜻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바로 앞의 AC.44에서 스베덴보리는 다섯째 날의 물고기와 새를 주로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하고, 이제 여섯째 날 땅에서 나오는 생물들을 의지에 속한 것들과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AC.45는 그 가운데 특히 ‘짐승’이라는 표현에 초점을 맞춥니다.
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태고시대’ 사람들의 표현 방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을 동물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했고, 이러한 표현 방식이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 전체에도 계속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단순한 문학적 비유라고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AC.45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동물의 성질이 인간 안의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태고시대’라는 말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말을 들으면 흔히 석기 시대나 원시 인류를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관심을 두는 것은 고고학적인 시대 구분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관련된 인간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태고시대사람들이이렇게표현했다’는 말을 곧바로 ‘동굴에서살던원시인들이동물그림으로생각을표현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AC초반뿐 아니라 앞으로 태고교회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AC.45는 짐승을 크게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해를 끼치기 때문에 악하다고 하는 짐승과,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선하다고 하는 짐승입니다. 그리고 사람 안의 악들은 곰, 늑대, 개와 같은 해로운 짐승들로,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암송아지, 양, 어린양과 같은 짐승들로 표현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짐승’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동물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문맥에 놓이는가에 따라 표현되는 내적 상태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주의점이기도 합니다. ‘짐승=악’, 또는 반대로 ‘짐승=애정’이라는 하나의 고정된 대응표만 만들어 모든 구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45자체가 짐승에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같은 동물 이미지라도 그것의 성질과 문맥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앞의 AC.42에서 큰 바다짐승이 창조의 좋은 질서 안에서도 등장하고 선지서의 부정적인 문맥에서도 사용되었던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그러면 창1:24-25에 나오는 짐승들은 어느 쪽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다루는 짐승들은 ‘선하고온순한것들’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유도 직접 밝혀 줍니다. 지금 본문이 ‘거듭나고있는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맥의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이것은 여섯째 날의 거듭남이 단지 사람이 무엇이 참인지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의 의지와 애정까지 새로워지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애정’이라는 말을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과 같다고 생각하면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애정은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며 마음이 어디로 기울어지는가와 관계됩니다. 그래서 의지에 속한 것을 설명할 때 동물의 이미지가 사용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AC.45자체는 여기서 ‘동물이움직이므로애정도인간을움직인다’는 식의 상세한 이유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선 이 글이 직접 밝히는 것, 곧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이 거듭나는 사람 안의 애정들을 뜻한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 이르면 조금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안에서몸과더가까이연결된더낮은것들’을 ‘그땅의들짐승’이라고 부르며, 이것들이 ‘욕정과쾌락’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이 본문의 짐승들이 선하고 온순하며 애정을 뜻한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욕정과 쾌락이 등장하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의지에 속한 것들 안에서도 차이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의지적인 것이 같은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는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도 있습니다. AC.45는 바로 그것들을 ‘욕정과쾌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만으로 ‘욕정은본래중립적이므로없앨필요가없고방향만바꾸면된다’거나, 반대로 ‘몸과관련된모든쾌락은악하므로제거해야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둘 다 지나갑니다. AC.45는 여기서 그러한 거듭남의 구체적인 처리 방법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욕정’과 ‘쾌락’을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욕구’나 ‘즐거움’과 그대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먹고 쉬고 아름다운 것을 즐기는 모든 자연적 욕구와 즐거움을 이 한 문장 때문에 악한 것으로 볼 필요도 없고,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욕정’을 단순히 선하게 전환할 수 있는 중립적인 에너지라고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앞으로 AC가 인간의 자연적인 것과 악한 욕망, 그리고 거듭남의 질서를 더 자세히 다룰 때 그 차이를 문맥에 따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5의 중심은 오히려 더 단순합니다. 말씀의 동물들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표현할 수 있으며, 해로운 동물들은 악한 것들을, 선하고 온순한 동물들은 선한 것들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지금 창조의 여섯째 날은 거듭나는 사람을 다루기 때문에 여기 등장하는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은 그의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동시에 사람 안에는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도 있으며, AC.45는 그것들을 욕정과 쾌락이라고 구별하여 언급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AC.44와 AC.45의 연결도 선명해집니다. AC.44에서는 말씀을 ‘듣는’ 이해와 그것을 ‘행하는’ 의지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5에서는 그 의지 쪽에 속한 것들이 구체적으로 ‘애정’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거듭남은 무엇이 참인지 아는 이해만 새로워지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며 사랑하는가 하는 의지와 애정의 영역까지 새로워지는 일입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 위의 생물들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창1:24, 25)
AC.44
사람은땅과같아서,신앙의지식(knowledges)이먼저그안에뿌려지지않으면어떤선도산출할수없습니다.그래야무엇을믿어야하고,무엇을행해야하는지를알수있기때문입니다.말씀을듣는것은이해의역할이고,그말씀을행하는것은의지의역할입니다.말씀을듣고도행하지않는것은,믿는다고말하면서도그믿음에따라살지않는것과같습니다.이런경우에는듣는것과행하는것을분리하게되고,그결과마음이나뉘어,주님께서다음말씀에서‘어리석은사람’(foolish)이라하신사람들에속하게됩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It is the office of the understanding to hear the Word, and of the will to do it.To hear the Word and not to do it, is like saying that we believe when we do not live according to our belief; in which case we separate hearing and doing, and thus have a divided mind, and become of those whom the Lord calls “foolish” in the following passage:
이해에속한것들은앞서보인것처럼‘물들이내는기는것들’(thecreepingthingswhichthewatersbringforth)과‘땅위의새들’(thefowlupontheearth),그리고‘하늘의궁창에있는새들’(uponthefacesoftheexpanse)로,그리고의지에속한것들은여기‘땅이내는생물’(thelivingsoulwhichtheearthproduces)과‘가축’(thebeast)과‘기는것’(thecreepingthing),그리고‘땅의짐승’(thewildanimalofthatearth)으로각각가리키고있습니다.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re signified—as before shown—by the “creepingthingswhichthewatersbringforth,” and also by the “fowlupontheearth,” and “uponthefacesoftheexpanse”; but those which are of the will are signified here by the “livingsoulwhichtheearthproduces,” and by the “beast” and “creepingthing,” and also by the “wildanimalofthatearth.”
해설
AC.44부터 창조의 여섯째 날이 시작됩니다. 앞의 다섯째 날에는 물고기와 새가 등장했고,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주로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했습니다. 이제 땅에서 생물과 가축과 짐승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초점이 의지에 속한 것들로 옮겨갑니다. 따라서 AC.44는 단순히 ‘아는것에서행하는것으로가야한다’는 일반적인 교훈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해에 속한 것과 의지에 속한 것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람을 ‘땅’에 비유합니다. 땅에 씨가 먼저 뿌려져야 무엇인가를 낼 수 있듯이, 사람 안에도 먼저 ‘신앙의지식’이 심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식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AC.44는 ‘아는것보다행하는것이중요하니지식은별로필요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을 행하기 위해서도 먼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아야 하므로 신앙의 지식이 필요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들어오는 것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의지의 역할을 아주 간단하게 구별합니다. ‘말씀을듣는것은이해의역할이고,그것을행하는것은의지의역할’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쪽을 가리킵니다. 반면 ‘행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의지되고 삶으로 나타나는 쪽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AC.44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와 의지가 ‘구별되지만분리되어서는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교리를 설명하고, 자신이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은 전혀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상태를 ‘듣는것과행하는것을분리하는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나뉜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때문에 마7:24,26이 인용됩니다. 여기서 AC.44의 목적은 ‘반석’과 ‘모래’ 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풀이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두 종류의 사람을 분명하게 대조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행하고’, 다른 사람은 똑같이 말씀을 ‘듣지만행하지않습니다.’ AC.44가 주목하는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함께 있느냐, 서로 분리되어 있느냐입니다.
따라서 ‘믿는다고말하면서믿는대로살지않는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실천력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에서는 어떤 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면서 의지에서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사람 안의 두 중요한 기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AC.44가 말하는 ‘나뉜마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신 것을 스베덴보리가 바로 이 문맥에서 가져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창1:24에서 왜 갑자기 ‘땅은생물을내라’고 하는지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AC.44는 앞에서 설명했던 ‘물들이내는기는것들’과 새들을 이해에 속한 것들이라고 하고, 이제 땅이 내는 ‘생물’, ‘가축’, ‘기는것’, ‘땅의짐승’을 의지에 속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즉 창조의 순서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이해에 속한 것들이 먼저 준비되고, 이제 의지에 속한 것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과정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해에속한것’과 ‘의지에속한것’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원수를사랑하라’는 말씀을 읽고 그것이 주님의 말씀임을 알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이해 쪽의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미워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보복하려는 마음을 억제하고 그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며 가능한 선을 행하려고 하는 것은 의지와 삶의 문제입니다. 앞의 이해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 것이 의지와 삶에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는 AC.44의 직접적인 예가 아니라, ‘듣는것과행하는것’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설명입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을 단순히 ‘배운것을열심히실천하면된다’는 도덕 훈련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까지의 AC.39-43이 계속 강조했듯이 참된 생명의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통해 무엇을 믿고 행해야 하는지 배우고 실제로 그것을 행하지만, 그 안의 선과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 것이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 지금 설명되고 있는 과정입니다.
AC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여기쯤에서 ‘왜이책은계속선과진리,이해와의지,사랑과신앙같은이야기를반복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사람이 무엇을 참이라고 이해하는가와 무엇을 선이라고 사랑하고 원하는가가 주님 안에서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창세기의 서로 다른 날과 서로 다른 피조물을 설명하면서도 이 관계가 계속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AC전체를 읽는 데 중요한 질문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AC.44의 중심을 ‘지식보다행함이중요하다’라는 한 문장으로만 줄이면 부족합니다. 지식은 필요합니다. 이해도 필요합니다. 먼저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이해하는 데서 멈추면 이해와 의지가 분리됩니다. 말씀을 듣는 이해와 그것을 행하는 의지가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되어야 합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에서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단계, 곧 거듭남이 이해에 속한 것에서 의지와 삶에 속한 것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