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11을 읽으면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은 ‘하나님께서는왜어떤동물은정하다고하고어떤동물은부정하다고하셨을까?’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물 자체에 도덕적인 선악이 있다는 뜻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분명합니다. 동물 자체가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교회가 표상교회였기 때문에 각 동물이 인간 안의 서로 다른 애정을 표상했던 것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719(창7:2)는 정한 짐승이 선한 애정을, 부정한 짐승이 악한 애정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정한 짐승들이 온순하고 선하며 유용한 성질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 부정한 짐승들은 그 반대의 성질을 표상합니다. 중요한 것은 동물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물이 표상하는 인간의 애정입니다.
‘계시록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650(계11:7)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레11의 음식법 자체를 직접 언급합니다. 당시 교회가 표상교회였기 때문에 짐승에 관한 법 하나하나에도 표상적 의미가 있었으며, 먹을 수 있는 짐승은 선을, 먹을 수 없는 짐승은 악을 의미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레11의 정결 규례는 고대의 음식 목록을 넘어 인간 안의 선한 애정과 악한 애정을 분별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먹는다’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음식은 몸 밖에 있을 때는 아직 내 몸이 아니지만 먹으면 내 몸 안으로 들어와 나의 일부가 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애정이나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 ‘나’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기며 의도할 때 점차 자기 것으로 삼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정한 것을 ‘먹으라’고 하고 부정한 것은 ‘먹지말라’고 합니다.
이 원리는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악한 생각이나 욕망이 떠오르지 않는 상태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유혹 속에서는 원하지 않는 생각과 욕망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느냐, 아니면 주님의 진리 앞에서 그것이 악임을 보고 거절하느냐입니다. 우리 앞에 음식이 놓였다고 모두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듯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실패를 들었을 때 은근한 즐거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즐거움을 계속 되새기며 즐긴다면 그것을 ‘먹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누군가를 돕고 싶은 마음, 진실을 알고 싶은 마음, 용서하고 싶은 마음, 주님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런 선한 애정은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삶의 일부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레11의 내적 의미를 살아간다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음식 목록을 그대로 복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루 동안 내 마음에 들어오는 수많은 애정과 생각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것이즐거운가?’가 아니라 ‘이즐거움은어떤사랑에서오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이런 의미에서 영적인 식생활과 같습니다. 무엇이든 마음이 원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무엇이 생명에 속하고 무엇이 죽음에 속하는지를 분별하여 생명에 속한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레11의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오늘도 우리 마음의 식탁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무엇을먹고있는가?어떤애정과생각을내것으로만들고있는가?’ 이것이 음식법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SWC.레11심화1)
레위기 11장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짐승을 먹을 수 있고 어떤 짐승은 먹을 수 없는지, 어떤 물고기와 새와 곤충과 길짐승이 정하고 부정한지, 그 주검을 만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길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장의 마지막에 이 모든 규례의 목적이 밝혀집니다. ‘내가거룩하니너희도몸을구별하여거룩하게하고’, 그리고 다시 ‘내가거룩하니너희도거룩할지어다.’ 따라서 레11의 중심은 음식 자체가 아니라 ‘거룩함’이며, 그 거룩함을 위해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음식법의 기본 원리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계시록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650(계11:7)은 레11의 규례를 직접 언급하면서, 당시 교회가 표상교회였기 때문에 짐승에 관한 법들도 모두 영적인 것을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먹을 수 있는 짐승은 선을, 먹을 수 없는 짐승은 악을 의미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719(창7:2)도 정한 짐승은 선한 애정을, 부정한 짐승은 악한 애정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동물 자체가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악해서가 아니라, 각각의 동물이 가진 성질이 인간 안의 서로 다른 애정과 욕망을 표상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먹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먹은 음식이 몸 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일부가 되듯, 말씀에서 먹는 것은 어떤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삼는 것, 곧 삶에 결합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레11은 단순히 ‘어떤동물을먹어도되는가?’를 가르치는 장이 아닙니다. 거듭남의 관점에서는 ‘나는무엇을내안으로받아들여내삶의일부로만들고있는가?’를 묻는 장입니다. 인간은 날마다 수많은 생각과 지식과 욕망과 즐거움에 접촉하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거절하면서 자기 내면을 형성합니다.
3절로 8절에서는 육지 짐승의 두 가지 기준이 제시됩니다.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동시에 새김질해야 합니다. 낙타와 사반과 토끼는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고, 돼지는 굽은 갈라졌지만 새김질하지 않으므로 부정합니다. 여기에서 ‘새김질은정확히무엇이고갈라진굽은정확히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기지만, 스베덴보리가 레11의 이 두 조건을 각각 특정한 영적 의미로 직접 해설한 충분히 강한 원전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새김질은말씀묵상,굽은행함’처럼 그럴듯한 대응을 만들어 내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본문 자체가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어느 한 조건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에서도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분리되어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레11의 두 조건 역시 적어도 ‘한쪽만으로충분하지않은영적질서’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세부 대응은 보류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9절로 19절에서는 물속 생물과 새로 범위가 넓어집니다. 물속 생물 가운데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만 먹을 수 있고, 이어 독수리와 솔개와 까마귀와 올빼미 등 먹지 못할 새들이 열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물고기는 일반적으로 자연적 인간 안의 지식과 기억지식에 연결되고, 새는 생각과 지적인 것들에 연결됩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지식과 생각 역시 분별되어야 한다는 큰 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느러미는이것,비늘은저것’, 또는 레11에 열거된 새 하나하나를 특정한 악이나 거짓에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는 것은 직접 원전이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 상응을 만들어 내는 일이 될 수 있으므로 하지 않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지식이 영적 양식이 되는 것도 아니고,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20절로 23절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예외가 나옵니다. 날개가 있으면서 기어 다니는 곤충은 일반적으로 먹지 못하지만, 발 위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AE.543(계9:3)은 바로 레11:20-22를 인용하면서, ‘다리’는 영적 선과 결합된 자연적 선을, ‘발’은 그 선에서 나오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선에서 나온 진리는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결합되어야 하므로 이런 곤충은 먹도록 허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것이라고 해서 그 자체로 낮거나 악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삶이 영적 선과 연결되어 있을 때 그것 역시 거듭난 인간의 삶에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24절 이후에는 ‘먹음’뿐 아니라 ‘접촉’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부정한 짐승의 주검을 만지거나 옮기면 저녁까지 부정하게 되고, 어떤 경우에는 옷을 빨아야 합니다. AC.994(창9:3)는 레11:27, 29-33의 기는 것들을 직접 언급하면서, ‘기는것’이 좋은 의미에서는 선한 애정에서 나오는 자연적 즐거움을, 반대 의미에서는 proprium과 악한 욕망에서 나오는 더러운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당시 표상교회에서는 그러한 것을 표상하는 부정한 기는 것과 접촉하는 것까지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적 즐거움 자체가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즐거움 안에 어떤 애정이 들어 있는가입니다. 음식과 휴식과 아름다움과 몸의 감각 같은 자연적인 즐거움도 선한 쓰임과 체어리티에 연결되면 좋은 것이지만,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지배되면 인간을 가장 낮은 감각적인 것에 붙잡아 둘 수 있습니다.
32절로 40절에서는 부정한 주검이 그릇이나 의복이나 음식과 물에 접촉했을 때의 규례가 이어집니다. 어떤 것은 물에 담가 씻지만 질그릇은 깨뜨려야 하고, 샘이나 물이 고인 웅덩이는 부정해지지 않으며, 마른 종자와 물 묻은 종자의 경우도 다르게 취급됩니다. 이런 세부 규례 하나하나에도 표상적 의미가 있었겠지만,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해설이 확보되지 않은 부분까지 세밀한 상응으로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전체 계열에서는 한 가지가 분명합니다. 부정한 것이 인간의 삶에 접촉했을 때 그것을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씻고, 분리하고, 때로는 버리는 정결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아는 데서 끝나지 않고 실제로 악과 거짓의 영향을 제거하는 과정까지 포함합니다.
41절로 43절에서는 다시 ‘기는것’이 강조됩니다.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 또는 여러 발로 기어 다니는 것을 먹지 말라고 하시며, ‘그것때문에자기를가증하게되게하지말며또한그것때문에스스로더럽혀부정하게되게하지말라’고 하십니다. AC.994가 설명하듯 악한 의미의 기는 것은 proprium에서 나오는 더러운 감각적 즐거움과 욕망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문제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감각적 즐거움이 삶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선과 진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거듭남은 자연적인 것을 파괴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의 질서 아래 놓이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44절과 45절에서 이 모든 규례의 이유가 마침내 밝혀집니다. ‘나는여호와너희의하나님이라내가거룩하니너희도몸을구별하여거룩하게하고’, ‘내가거룩하니너희도거룩할지어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거룩함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거룩함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거룩해진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선과 진리에 반대되는 악과 거짓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함으로써 주님의 것이 자기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11의 ‘먹으라’와 ‘먹지말라’는 결국 거룩함의 두 방향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받아들이고, 그분에게 반대되는 것은 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45절은 이 거룩함을 출애굽과 연결합니다. ‘나는너희의하나님이되려고너희를애굽땅에서인도하여낸여호와라.’ 이스라엘이 정결 규례를 완벽하게 지켰기 때문에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여호와께서 그들을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셨고, 그 후 구원받은 백성에게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정결해져 주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인간을 악과 거짓의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 후 선과 악을 분별하며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도록 계속 인도하십니다.
마지막 47절은 그래서 레11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부정하고정한것과먹을생물과먹지못할생물을분별한것이니라.’ 이것은 바로 앞 레10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레10에서 제사장에게 요구된 것은 ‘거룩하고속된것을분별하며부정하고정한것을분별하는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레11에서는 그 분별이 제사장과 성소를 넘어 백성의 식탁과 손과 그릇과 일상생활 전체로 내려옵니다. 거룩함은 제단 앞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레11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가장 깊은 질문은 ‘어떤음식을먹어도되는가?’가 아니라 ‘나는무엇을내안으로받아들이고있는가?’입니다. 어떤 애정을 즐기고, 어떤 생각을 반복하며, 어떤 지식을 자기 것으로 삼고, 어떤 감각적 즐거움을 사랑하는지가 결국 우리의 내면을 형성합니다. 거듭남은 모든 것을 무차별하게 받아들이는 삶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는 받아들이고 악과 거짓은 거절하는 분별의 삶입니다. ‘내가거룩하니너희도거룩할지어다.’ 레11의 길고 세밀한 음식법은 결국 이 한 말씀을 인간의 가장 평범한 일상까지 내려보낸 것입니다. (SWC.레11해설)
레10을 끝까지 읽으면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장의 처음에서는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했다가 죽습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서도 명령대로 행하지 않은 일이 발생합니다. 속죄제 염소를 제사장이 먹어야 했는데 이미 불살라 버린 것입니다. 모세는 크게 노하지만 아론의 설명을 듣고 ‘좋게여겼습니다.’ 왜 앞의 일은 죽음으로 끝나고 뒤의 일은 받아들여졌을까요?
먼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레10:19-20의 아론의 행동을 직접 상세하게 해설하여 두 사건의 차이를 항목별로 설명한 강한 원전은 이번 검토에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장면에 세밀한 상응을 임의로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가 보여 주는 차이는 분명합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명령하시지아니하신다른불’을 적극적으로 가져와 예배에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에게서가 아닌 다른, 사랑과 말씀 이외의 다른 근원에서 나온 예배로 직접 해설합니다.
반면 아론의 경우에는 다른 불을 가져오거나 자기 방식의 예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을 잃은 바로 그날, 자신에게 닥친 비극 가운데서 속죄제물을 먹는 것이 과연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실 일인지 묻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설명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이 두 사건은 ‘하나님의규칙을한번어기면죽는다’는 동일한 범주로 묶이지 않습니다. 나답과 아비후 사건의 중심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한 대로 예배의 ‘근원’이 바뀐 데 있습니다. 주님의 불 대신 다른 불, 말씀에서 나온 교리 대신 다른 근원에서 나온 것이 거룩한 예배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마지막 사건은 오히려 외적 규례와 그 규례가 섬기는 내적 목적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론은 규례를 무시하여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라 ‘오늘이런일이내게임하였는데이것을먹는것이여호와보시기에과연옳겠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에는 영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보다 위에 놓고 거룩한 것을 자기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뜻을 진실하게 따르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상황에서그뜻은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기계적 복종과 같지 않습니다. 참된 순종에는 분별이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자기 편의대로 말씀을 고치는 것을 ‘분별’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문자만 지켰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내적인 순종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점에서 레10마지막은 10절의 ‘거룩하고속된것을분별하며부정하고정한것을분별하라’는 말씀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 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순한 규칙 준수보다 더 깊은 분별을 요구합니다. 다른 불과 주님의 불을 분별하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며,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실제로 무엇을 기쁘게 여기시는지를 묻습니다.
그래서 레10은 엄격함으로 시작하지만 율법주의로 끝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외적 형식을 기계적으로 실행하는 데서 자동으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함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그분의 뜻을 진실하게 분별하고 따르는 데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불’을 가져왔고, 아론은 ‘여호와께서어찌좋게여기셨으리요?’라고 물었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는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거룩한 곳으로 가져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통한 상황에서도 무엇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규칙을 많이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점점 더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SWC.레10심화5)
나답과 아비후 사건 직후 여호와께서는 아론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이것 때문에 ‘나답과아비후가술에취해다른불을드렸던것이아닌가?’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성경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음주 여부를 사실처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포도주 금지 규례가 이 자리에 놓인 영적 이유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적인 단서를 줍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71(창9:21)은 레10:8-10을 직접 인용하면서 ‘술취함’이 신앙의 진리에 관한 오류와 혼란을 표상했기 때문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포도주 자체가 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6377은 포도주가 좋은 의미에서는 영적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을 의미하며,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성찬에서도 포도주가 거룩하게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주에는 반대 의미도 있습니다. 진리가 악과 섞여 왜곡되면 포도주는 거짓을 나타내며, ‘술취함’은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류 속에서 비틀거리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레10의 핵심은 술이라는 물질보다 ‘분별력을잃는상태’입니다.
실제로 본문 자체가 이유를 말합니다. ‘그리하여야너희가거룩하고속된것을분별하며부정하고정한것을분별하고’ 백성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적 흥분이 아니라 맑은 영적 분별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다른불’과 연결됩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문제는 거룩해 보이는 것과 실제로 거룩한 것을 분별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향로와 향과 성소와 제사장이라는 외적 요소만 보면 모두 거룩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의 불은 다른 불이었습니다. 외적 거룩함과 내적 거룩함을 구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위험이 있습니다. 감동적이라고 해서 모두 신적이지 않고, 열정적이라고 해서 모두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성경 구절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든 교리가 말씀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내가강하게느낀다’는 사실과 ‘이것이주님의진리다’라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영적 생활은 단순한 흥분보다 분별을 향합니다. 무엇이 선처럼 보이는가보다 그 선의 근원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리처럼 들리는가보다 그것이 실제 말씀과 주님의 사랑에 일치하는지를 살핍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이 분별은 더욱 중요합니다. 레10:11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포도주 금지 규례는 레10의 중심 주제와 정확히 맞닿습니다. 다른 불과 주님의 불을 분별하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며,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별하는 것, 이것이 주님의 쓰임을 맡은 사람에게 필요한 영적 맑음입니다. (SWC.레10심화3)
레위기 10장은 바로 앞 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레9:24에서 ‘불이여호와앞에서나와제단위의번제물과기름을’ 살랐습니다. 그리고 레10:2에서도 다시 ‘불이여호와앞에서나와’ 나답과 아비후를 삼킵니다.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인데 하나는 제물을 받아들이는 불이고 다른 하나는 제사장을 삼키는 불입니다. 이 충격적인 대비가 레10전체를 여는 열쇠입니다. 문제는 불이라는 외적 현상 자체가 아니라 ‘어떤사랑에서예배가나오는가’입니다.
1절에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불을 담고 향을 놓아 여호와 앞에서 분향합니다. 겉모습만 보면 모든 것이 종교적입니다. 그들은 이방 제사장도 아니고 아론의 아들들이며, 향로를 들고 성소에서 향을 피웁니다. 문제는 단 하나, 그것이 ‘여호와께서명령하시지아니하신다른불’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375(출24:1)는 이 사건을 직접 해설하면서 나답과 아비후가 말씀에서 나오는 교리를 표상했으며, 그들이 ‘다른불’을 사용한 것은 말씀에서 나온 것이 아닌 다른 근원에서 예배와 교리를 세우는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불은 사랑의 선을, 향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AC.9965(출28:43)는 이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제단의불’은 신적 사랑, 곧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표상하지만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불’은 지옥에서 나오는 사랑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AC.10244(출30:20)도 레10:1-2를 직접 인용하면서 그들의 행동은 ‘주님을향한사랑이아닌다른사랑에서나오는예배’를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레10의 ‘다른불’은 단순히 불을 잘못 가져온 제의상의 실수가 아닙니다. 예배의 겉모습은 거룩하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내적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 아닌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면 레9와 레10의 연결이 매우 깊어집니다. 레9에서 인간은 제물을 준비하고 제단에 올렸지만 마지막 불은 ‘여호와앞에서’ 나왔습니다. 참된 예배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그 불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들의 ‘다른불’을 가져옵니다. 레9의 불은 주님에게서 인간에게 내려오는 사랑이고, 레10의 다른 불은 인간의 proprium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께 올리려는 사랑입니다. 겉으로는 둘 다 불이고 둘 다 예배에 사용되지만 근원은 정반대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예배하고있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나를예배하게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설교도 다른 불로 할 수 있고, 기도도 다른 불로 할 수 있으며, 봉사와 선교와 성경 연구까지 다른 불로 할 수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 영향력을 갖고 싶은 욕망, 자기 교리를 지키려는 집착이 거룩한 행위의 연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향은 같아 보여도 그 향을 태우는 불이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2절에서 여호와 앞에서 나온 불이 나답과 아비후를 삼킨 것은 하나님께서 순간적인 실수에 격분하여 두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죽음’을 표상적 예배의 소멸과 천국과의 결합이 끊어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AC.10244는 당시 이스라엘 교회에서 외적 의식이 내적인 천국의 실재를 정확히 표상할 때 그 표상을 통해 천국과의 결합이 있었으며, 규정된 표상을 깨뜨리면 그 결합을 더 이상 나타낼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은 ‘다른사랑에서나오는예배에는천국과의결합이없다’는 영적 사실을 극적으로 표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3절의 ‘나는나를가까이하는자중에서내거룩함을나타내겠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까이 갈수록 무엇이 주님의 것이고 무엇이 proprium의 것인지 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것을 다루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자기 지혜를 거룩한 것에 섞으면 그것은 더 위험한 혼합이 됩니다. 목회와 말씀 연구와 예배 인도처럼 거룩한 것에 가까운 쓰임일수록 ‘내불인가,주님의불인가?’라는 자기 점검이 더 필요합니다.
4절로 7절에서는 나답과 아비후의 시신이 진영 밖으로 옮겨지고 아론과 남은 아들들은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어 애도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계시록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은 나답과 아비후가 진영 밖으로 옮겨진 것을 직접 언급하면서 그들의 예배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천국에서 나온 예배가 아니었음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진영이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가족의 슬픔을 부정하라는 일반 명령이 아니라 표상교회 안에서 천국에 속하지 않은 예배가 밖으로 제거되는 장면입니다. 아론의 ‘잠잠함’ 역시 그의 내면 상태를 우리가 함부로 심리적으로 추측하기보다는 본문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8절부터 장면은 갑자기 포도주와 독주 문제로 넘어갑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이어집니다. ‘거룩하고속된것을분별하며부정하고정한것을분별하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나답과 아비후 사건 뒤에 우연히 붙은 별개의 음주 규정이 아닙니다. 레10의 두 번째 핵심인 ‘분별’의 문제입니다.
AC.1071(창9:21)은 레10:8-9를 직접 인용하면서 술 취함이 신앙의 진리에 관한 오류와 정신적 혼란을 표상하기 때문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포도주와 독주가 금지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포도주 자체는 좋은 의미에서 신앙의 진리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할 수 있지만, 술 취함은 진리가 거짓과 뒤섞여 올바른 판단을 잃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AC.6377도 포도주가 좋은 의미에서는 영적 사랑과 신앙의 선을, 반대 의미에서는 악에서 나온 거짓을 나타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에 고정된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문맥과 계열 안에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따라서 10절과 11절의 핵심은 금주 자체보다 ‘분별’입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고 그것을 백성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불의 근본 문제도 바로 분별의 실패였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기에게서 나오는 사랑을 구별하지 못하고, 말씀에서 나오는 교리와 다른 근원에서 나오는 교리를 구별하지 못하면 외적으로 아무리 거룩한 예배를 드려도 내적으로는 다른 불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단순히 ‘선한가악한가’를 넘어 ‘이선처럼보이는것이어디에서오는가’를 분별하게 됩니다.
12절로 15절에서 모세는 남은 제사장들에게 소제와 화목제의 몫을 규례대로 먹으라고 다시 명합니다. 두 형제가 죽은 직후에도 거룩한 제사의 질서는 계속됩니다. 이것은 냉혹함을 의미하기보다 주님의 질서가 인간의 충격과 혼란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레6과 레7에서 보았듯 거룩한 것을 먹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자기 삶으로 삼는 것과 연결됩니다. 다른 불이 제거된 뒤 필요한 것은 빈자리로 남는 것이 아니라 다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16절로 20절에서 뜻밖의 갈등이 생깁니다. 모세가 속죄제 염소를 찾았는데 이미 불살라져 있었습니다. 규례대로라면 피를 성소 안으로 가져가지 않은 이 속죄제물은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했습니다. 모세는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합니다. 그런데 아론은 ‘오늘이런일이내게임하였는데내가속죄제물을먹었더라면여호와께서좋게여기셨겠느냐’고 답합니다. 놀랍게도 20절은 ‘모세가그말을듣고좋게여겼더라’고 끝납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레10전체를 균형 있게 잡아 줍니다. 앞부분만 읽으면 이 장은 ‘규칙에서조금이라도벗어나면죽는다’는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실제 규례에서 벗어난 일이 있었음에도 모세가 아론의 설명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나답과 아비후의 핵심 문제는 단순한 절차상의 사소한 실수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직접 해설처럼 문제의 중심은 ‘다른불’, 곧 다른 사랑과 다른 근원에서 나온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론은 비극 가운데서 거룩한 것을 형식적으로 먹는 것이 과연 주님 앞에 합당한지를 묻고 있습니다.
다만 이 마지막 사건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레10:19-20을 직접 상세하게 해설한 강한 원전을 이번 검토에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론의슬픔은정확히이것을상응한다’거나 ‘모세가받아들인것은정확히이런영적상태를뜻한다’고 세부 상응을 만들어 내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서 확실히 볼 수 있는 것은 ‘문자적절차의기계적실행’과 ‘그규례가섬기는거룩한목적’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순종은 자기 뜻대로 규례를 바꾸는 것도 아니지만, 외적 형식만 수행하면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레10은 결국 ‘거룩함을어떻게분별할것인가?’라는 장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향을 피웠지만 다른 불을 사용했습니다. 제사장들은 포도주와 독주를 피하여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규례를 아는 모세와 비극을 겪은 아론 사이에서 ‘무엇이여호와께서좋게여기시는것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됩니다. 이 모든 장면의 중심에는 분별이 있습니다.
레9에서 주님에게서 나온 불은 제물을 사르고 백성을 경배하게 했습니다. 레10에서 인간이 가져온 다른 불은 예배 자체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 안에 ‘불이있는가없는가’가 아닙니다. 뜨거운 열심 자체도 기준이 아닙니다. 그 불이 어디에서 오는지가 기준입니다. 자기애에서 오는 열심인지, 세상 사랑에서 오는 열심인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참된 예배는 인간이 자기 불을 만들어 주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다시 주님을 예배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레10의 두 불은 겉으로는 닮아 있지만 그 근원이 전혀 다릅니다.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바로 그 두 불을 점점 더 분명하게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SWC.레10해설)
AC.21의 ‘빛처럼보였던것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현실적인 인간 경험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거듭남 이전에 악을 언제나 악처럼 느끼고 거짓을 언제나 거짓처럼 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에게서 나오는 어떤 생각과 행동을 선하고 옳은 것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악이 선처럼 보이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실제 삶에서 ‘빛처럼보였던어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다음 사례들은 AC.21의 상태를 판정하는 공식이 아니라, 그 표현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먼저 ‘자기의로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성실하게 살고 교회생활도 충실히 하며 큰 잘못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삶을 근거로 ‘나는저사람보다낫다’, ‘나는적어도저런사람과는다르다’는 마음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본인에게는 이것이 바른 삶에 대한 확신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빛 가운데 자신을 보기 시작하면서, 선하게 살았다는 자기평가 안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빛처럼 보였던 것이 더 큰 빛 가운데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섞인 선행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봉사하고 헌신하며 다른 사람을 실제로 돕습니다. 그 행동의 외적 쓰임 자체를 무조건 악하다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 또한 인간의 동기는 거듭남 과정에서 여러 요소가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인정과 칭찬을 얻는 것이 점점 그 행동의 지배적인 목적이 되는 경우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선행 자체를 후회하거나, 다른 사람이 칭찬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면 ‘나는이웃을위해서했다’고 생각했던 일 안에 자기 사랑이 얼마나 깊이 섞여 있었는지를 보게 될 수 있습니다. AC.21의 빛은 바로 이런 분별을 가능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신앙적인 열심입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교리를 소중히 여기며 진리를 전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는진리를알고있고저사람들은모른다’, ‘내신앙이더높다’는 마음이 중심을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진리 자체보다 ‘진리를가진나’가 중요해집니다. 이런 상태는 당사자에게 오히려 매우 밝은 신앙의 열심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빛이 비칠 때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 진리를 이용하여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 같은 것이 아님을 조금씩 보게 됩니다.
네 번째는 이른바 ‘의로운분노’입니다. 불의한 일을 보고 분노하는 것 자체를 모두 자기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악과 불의를 보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거나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일어난 분노를 ‘나는진리를위해화내는것이다’라고 포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자기 상처와 진리에 대한 열심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이후 더 밝은 빛 가운데 들어가면서 ‘내가정말진리를위해분노한것인가,아니면내proprium이상처받았기때문인가?’라고 묻게 됩니다. 바로 이런 질문 자체가 이전에는 하나로 보였던 빛과 어둠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섯 번째로 목회나 신앙적 봉사에서도 같은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세우고 말씀을 전하려는 열망은 선한 목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이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지나친 분노와 좌절이 일어난다면, ‘주님의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안에 ‘내가이루어야할일’이라는 자기 소유의 마음이 섞여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역 자체가 어둠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proprium에서 나오는지를 구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사례들을 이해할 때 ‘proprium’을 인간의 개성이나 인격 전체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의 문제는 사람이 가진 고유한 성격이나 재능 자체가 아니라,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매우 종교적이고 도덕적으로 보이는 일 안에서도 proprium은 작용할 수 있고, 반대로 자연적인 재능과 개성은 주님의 질서 아래에서 좋은 쓰임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 안에서 혼합된 동기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러면내가지금까지한모든선은가짜였다’고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AC.21은 사람에게서 나온 모든 행동을 분석하여 자기혐오에 빠지게 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신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전에는 서로 뒤섞여 하나처럼 보였던 것을 이제 구별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구별이 가능해져야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붙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처럼보였던어둠’을 발견하는 것은 단순히 ‘내가생각보다나쁜사람이구나’를 깨닫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주님에게서왔고무엇이아직내proprium에서나오는가’를 분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20에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했다면, AC.21에서는 그 첫 빛 안에서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것과 참된 빛이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빛과 어둠의 분별입니다. (AC.21심화1)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창1:4, 5)
AC.21
‘빛’(light)은주님에게서나오기때문에‘선’(good)이라고합니다.주님은선자체이시기때문입니다.‘어둠’(darkness)은사람이새로잉태되고다시태어나기이전에빛처럼보였던모든것들을의미하는데,이는악이선처럼보였고거짓이진리처럼보였기때문입니다.그러나그것들은여전히어둠이며,단지사람자신에게고유한것들,곧proprium에속한것들로이루어져있고,아직남아있는것들입니다.주님께속한모든것은빛에속하므로‘낮’(day)에비유되고,사람자신의모든것은어둠에속하므로‘밤’(night)에비유됩니다.이러한비유들은말씀에자주나옵니다. 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who is good itself,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have appeared like light,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and the false like the true;yet they are darkness,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which still remain.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해설
AC.21은 바로 앞 AC.20에서 처음 나타난 ‘빛’이 무엇이며, 그 빛이 이전의 ‘어둠’과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설명합니다. AC.20에서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고,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AC.21에서는 그 첫 빛이 비침으로써 이전에는 구별할 수 없었던 두 근원이 드러납니다. 하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1:4의 ‘하나님이빛과어둠을나누사’는 거듭남 가운데 일어나는 매우 중요한 분별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빛’이 선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이 ‘주님에게서나오기때문’이며, 주님은 ‘선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21에서 선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사람이 그것을 얼마나 선하게 느끼는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칭찬받는가, 심지어 종교적으로 얼마나 경건해 보이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AC.20에서 ‘주님이선자체요진리자체’라고 한 설명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빛이 나타났다는 것은 단지 사람이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참으로 주님에게서 오는지를 분별할 가능성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에 비해 ‘어둠’은 흥미롭게도 처음부터 어둠처럼 보였던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되고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악이 선처럼 보이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어둠인 것들이 ‘빛처럼보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AC.21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영적인 어둠의 위험은 사람이 언제나 ‘나는지금어둠속에있다’고 느끼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선이라고 여기고 거짓을 진리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빛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AC.20의 첫 빛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빛이 비치기 전에는 어둠을 어둠으로 분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 ‘사람자신에게고유한것들’, 곧 proprium에 속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proprium을 단순히 인간의 개성, 재능, 성격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문맥에서 말하는 proprium은 사람이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자기에게서 생각하고 의도하며 행하는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상태와 깊이 관련됩니다. 따라서 ‘사람자신의것’이 어둠이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자연적 능력이나 개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는 것이 영적으로는 빛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표현은 이러한 것들이 ‘아직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첫 빛을 받았다고 해서 이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AC.20에서도 사람은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AC.21에서도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어둠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달라진 것은 이제 그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빛 사이에 구별이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첫 단계는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한순간에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이전에는 하나처럼 보였던 것을 주님의 빛 가운데 서로 다른 것으로 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창1:4의 ‘하나님이빛과어둠을나누사’에서 분별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빛으로 자기 어둠을 완전하게 밝혀내는 것이 아닙니다. AC.20에서 빛 자체가 주님에게서 왔듯이,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를 참으로 분별하게 하는 기준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느낌과 판단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빛 안에서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전에는 선처럼 보였던 악과 진리처럼 보였던 거짓이 무엇이었는지 점차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어 창1:5의 ‘하나님이빛을낮이라부르시고어둠을밤이라부르시니라’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낮’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은 어둠에 속하므로 ‘밤’에 비유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도 기준은 근원입니다. ‘낮’은 단순히 기분이 밝거나 신앙생활이 잘되는 때를 뜻하고 ‘밤’은 낙심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때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속한 것은 낮이며,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것은 밤입니다. 이 비유가 말씀에 자주 나온다고 스베덴보리가 덧붙이는 것도 빛과 어둠, 낮과 밤의 이러한 구별이 말씀 전체에서 반복되는 영적 언어임을 보여 줍니다.
다만 AC.21에서는 아직 ‘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의 의미까지 앞당겨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 AC.22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다룹니다. AC.21의 초점은 먼저 빛과 어둠이 ‘나뉘고’, 그것들이 낮과 밤으로 불린다는 데 있습니다. 첫 빛이 비친 뒤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 구별이 없으면 사람은 여전히 자기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어둠을 빛으로 오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21은 거듭남에서 ‘분별’이 얼마나 근본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전에는 악이 선처럼,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지만 주님의 빛이 비치면서 그 둘이 나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람 자신의 것이 즉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한 번 빛을 보았다는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에게서 오는 것과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을 구별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AC.20이 ‘빛의첫인식’을 말했다면 AC.21은 그 빛으로 비로소 시작되는 ‘빛과어둠의분별’을 보여 줍니다. (AC.21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