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14절의 해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놋 땅에 거하는 것’(dwell in the land of Nod)이 진리와 선 밖에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놋’(Nod)이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한데, 그것은 유리하며 피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리하며 피하는 자’(wanderer and fugitive)가 되는 것이 진리와 선을 빼앗긴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이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intellectual mind) 가까이, 그리고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rational mind) 가까이를 의미한다는 것은 ‘에덴 동쪽’의 의미에 관하여 앞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동쪽’(east)은 주님을, ‘에덴’(Eden)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로 이루어진 마음이 하나였습니다. 의지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의지에 속한 사랑과 이해에 속한 신앙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와 같이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에는 더 이상 의지가 지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 의지 대신 이해가, 곧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되었으므로, 그가 ‘에덴 동쪽에 거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신앙이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신앙에 ‘표가 주어져’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되게 하신 것입니다. That to “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may be seen in the explication of verse 14; that to “dwell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Nod,” which is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and that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is to be deprive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That “toward the east of Eden” signifie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had previously reigned, and also near the rational mind, where charity had previously reig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of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of Eden,” namely, that “the east” is the Lord, and “Eden” love.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mind, consisting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was one; for the will was the all in all, so that the understanding was of the will. This was because they made no distinction between love, which is of the will, and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because love was the all in all, and faith was of love. But after faith was separated from love, as was the case with those who were called “Cain,” no will reigned any longer, and as in that mind the understanding reigned instead of the will, or faith instead of love, it is said that he “dwelt toward the east of Eden”; for as was just now observed, faith was distinguished, or “had a mark set upon it,” that it might be preserved for the use of mankind.

 

해설

AC.398은 앞의 AC.397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변화가 인간 마음의 구조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 두 표현은 앞에서 이미 설명된 의미를 다시 확인합니다.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놋 땅에 거하는 것’은 진리와 선 밖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의 중심은 세 번째 표현인 ‘에덴 동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설명한 뒤, 가인에게서 그 주도권이 어떻게 뒤바뀌었는지를 밝힙니다.

 

먼저 ‘놋’이라는 이름 자체가 ‘유리하며 피하는 자’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앞의 AC.380, AC.382, AC.388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놋 땅에 거했다는 것은 단순히 에덴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했다는 지리적 진술에 머물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진리와 선의 살아 있는 질서 밖에 놓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에덴 동쪽’은 그보다 훨씬 미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쪽’은 주님을, ‘에덴’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했다는 것을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이며 동시에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라고 설명합니다. AC.397에서는 이해의 마음만 언급했는데, 이번 번호에서는 합리적 마음까지 덧붙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사랑-신앙’뿐 아니라 ‘의지-이해’라는 인간 마음의 구조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였다’는 것은 두 기능을 개념적으로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서로 대립하거나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의지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이해가 의지에 속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의지가 중심이었고 이해는 그 의지의 질서 안에서 움직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시 사랑과 신앙의 관계에서 설명됩니다. 사랑은 의지에 속하고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그런데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을 서로 독립된 두 가지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393에서 ‘태고교회는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다’고 한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질서는 ‘의지에서 이해로’, 그리고 ‘사랑에서 신앙으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 자신의 의지가 본래 선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사랑과 선의 근원도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의지를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 안에서 이해가 진리를 퍼셉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심은 인간의 의지 자체가 아니라 그 의지를 지배하던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입니다.

 

가인에게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에는 더 이상 의지가 지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변화를 매우 대칭적인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의지 대신 이해가, 곧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분리가 가져온 마음의 구조적 변화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단순히 ‘신앙을 너무 강조했다’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문제는 주도권의 역전입니다. 본래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고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면서 이해가 독립적인 지배 위치에 올라섰습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 선 위에 서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체어리티를 판단하고 지배하려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62-363에서 설명한 가인의 교리와도 정확히 맞닿습니다. 거기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는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398에서는 그 문제가 더 깊은 인간 마음의 차원에서 설명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중 무엇이 먼저인가?’라는 교리적 논쟁의 배후에는 ‘이해와 의지 중 무엇이 지배하는가?’라는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AC.393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AC.398의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말은 서로 다른 차원을 말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온다’는 것은 배우고 거듭나는 순서에 관한 것이며, 신앙이 사랑보다 ‘지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식은 먼저 올 수 있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차이를 놓치면 가인의 신앙과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신앙을 동일하게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이해가 의지 대신 지배하게 만든 상태입니다. 반면 주님께서 섭리하신 영적 교회의 질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더라도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는 질서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먼저 온다’와 ‘신앙이 지배한다’는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 구별 때문에 AC.398 마지막의 ‘가인의 표’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된 잘못된 질서를 승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와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지도 않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구별되었고, 곧 신앙에 표가 주어져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되었다’고 다시 말합니다. 여기서 ‘for the use of mankind’, 곧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라는 표현이 AC.395의 설명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왜 신앙을 보존해야 했습니까? AC.393에서 이미 답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에게는 진리를 먼저 듣고 배우는 길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이해와 신앙에 속한 지식이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서 다시 체어리티를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신앙은 잘못된 분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 안에서 앞으로 인류에게 쓰임이 될 수 있는 것을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이제 ‘에덴 동쪽에 거하였다’는 표현도 훨씬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에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며 신앙이 사랑에 속해 있던 본래의 천적 질서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는 ‘에덴 동쪽’, 곧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과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분리는 일어났지만 이해와 신앙이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까이’라는 표현은 AC.397에 이어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가인의 상태가 선하고 정상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신앙이 앞으로 다시 선과 결합될 수 있는 쓰임을 위해 보존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랑과 신앙의 본래적 하나 됨은 깨어졌지만, 신앙 자체가 제거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은 이제 그 보존된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다른 길로 인도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AC.398은 태고교회에서 가인으로 넘어가는 변화와, 다시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질서가 가능해지는 배경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으며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가인에게서는 그 결합이 깨져 이해가 의지 대신, 신앙이 사랑 대신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없애지 않고 인류의 쓰임을 위해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결국 가인의 문제는 ‘이해가 존재한다’거나 ‘신앙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가 의지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 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는 그 뒤집힌 질서를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이해와 신앙을 보존하여 다시 선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이 진리와 선 밖의 ‘놋 땅’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에덴 동쪽’, 곧 전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마음 가까이에 거한다고 한 깊은 이유입니다. (AC.398 해설)

 

 

 

AC.399, 창4:17, ‘가인이 에녹을 낳고 성을 쌓다 - 분리된 신앙이 새로운 교리 체계를 낳다’ (AC.399-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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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7, 창4:16, ‘가인이 에덴 동쪽 놋 땅에 거하다 -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남은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가인이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Cain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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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 심화

1. 넷째 날 요약, 정리

 

창1:14-19의 넷째 날에 해당하는 AC.30-38을 여기까지 읽고 나면 여러 내용이 한꺼번에 등장해서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순종, 교대와 다양함, 낮과 밤, 빛과 어둠이 연이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넷째 날이 끝나는 이 지점에서 전체 흐름을 한 번 묶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넷째 날은 ‘빛이 처음 생기는 날’이라고 이해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빛은 이미 첫째 날에 등장했습니다. 넷째 날에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광명체들’입니다. 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랑과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빛을 비추고 삶을 이끌게 되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이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AC.31-34를 지나면서 이 점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영적 생명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를 말하면서 사랑을 더 큰 것으로 두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사랑에서 옵니다.

 

이것은 ‘사랑만 있으면 진리나 신앙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다만 그 질서에서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넷째 날의 해와 달은 바로 이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많이 알고 말하는 것만으로 영적 생명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삶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별들도 등장합니다. 별은 신앙에 속한 여러 지식과 진리들을 나타냅니다. 해와 달과 별을 함께 보면 넷째 날의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사람 안에 단지 하나의 막연한 ‘종교적 느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과 그것에 속한 여러 진리가 서로 관계를 이루면서 영적 삶을 비추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33에서는 이 빛의 근원이 더욱 깊이 설명됩니다. 사람의 생각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 하나가 아니라 인간 생명의 중심과 관계된 것입니다. 넷째 날에 큰 광명체인 사랑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도 이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4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다시 강조됩니다. 사랑 없는 신앙, 곧 삶과 분리된 신앙은 참된 의미의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넷째 날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분명해집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머릿속에 많이 저장하는 과정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AC.35에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인간의 두 능력인 ‘의지’와 ‘이해’가 등장합니다. 사람은 의지하고 이해하는 존재이며, 이 두 능력은 본래 하나의 생명을 이루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의지와 이해의 관계가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주님의 자비로 사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보존되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악한 의지가 원하는 것과 다른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거듭남의 길이 열립니다.

 

이 대목은 넷째 날의 사랑과 신앙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다는 말을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옳다고 믿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처음부터 선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사람을 가르치시고, 사람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며 점차 의지와 삶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참된 결합은 악한 의지와 거짓된 생각의 일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AC.36은 그래서 신앙을 ‘순종’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단순히 무엇을 알고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특별히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중심에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둡니다. 여기서도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신앙한다고 말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어떤 사랑과 삶으로 나타나는가가 중요합니다.

 

AC.37에서는 창1:14의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로부터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이라는 중요한 원리를 설명합니다. 자연계에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이 있고,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있듯이 영적 생명에도 서로 다른 상태들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이 획일적이 되어 생명이 없게 되고, 선과 진리도 분별되거나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것을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침체와 혼란과 악을 경험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7이 말하는 것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와 다양함’입니다. 따라서 모든 영적 후퇴나 악한 상태를 주님께서 성장시키기 위해 주신 필수적인 계절이라고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이 변화 없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을 가진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AC.38에서는 넷째 날을 마무리하면서 네 가지 대응을 매우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낮’은 선, ‘밤’은 악, ‘빛’은 진리, ‘어둠’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들은 ‘낮의 일’, 악한 것들은 ‘밤의 일’이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요3:19, 21을 인용하여 빛과 어둠이 인간이 받아들이는 진리와 거짓, 그리고 그의 삶과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AC.37의 ‘밤’과 AC.38의 ‘밤’을 기계적으로 똑같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37에서는 하루의 변화 전체가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지만, AC.38에서는 낮과 밤의 대조를 통해 선과 악을 나타냅니다. 말씀의 상응은 단어 하나에 언제나 하나의 뜻만 붙여 놓은 고정된 암호표가 아니라, 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이렇게 AC.30-38을 한 흐름으로 놓고 보면 넷째 날의 중심이 보입니다. 앞선 과정에서 사람이 선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였다면, 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광명체처럼 세워지고 영적 삶을 비추며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된 두 생명이 아니라 하나를 이루어야 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고 순종과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을 단순히 ‘해와 달과 별의 창조’라고만 읽으면 그 속뜻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이 날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점차 살아 있는 빛으로 자리 잡고,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더욱 분명히 구별되며, 영적 생명이 그 빛 아래서 질서를 이루어 가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넷째 날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광명체처럼 세워져 영적 삶을 비추고 다스리며,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살아 있는 질서를 이루어 가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AC.38, 창1:18-19, ‘낮과 밤의 분별 : 행위로 드러나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기준’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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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 심화

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위 AC.35본문,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 우리를 지으신 신(神)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AC.35 마지막의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는 말은 짧지만 참으로 큰 위로를 줍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이해는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는 지옥을 향할 수 있으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하는 쪽은 의지이므로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사람 전체가 지옥으로 곤두박질할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절망적인 문장의 끝에 ‘주님의 자비’가 등장합니다. 인간의 상태에 대한 마지막 말이 인간의 악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비’라고 하면 죄를 지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시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자비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AC.35의 문맥에서 자비는 조금 더 근본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람이 자기 악한 의지에 따라 끝까지 떨어지도록 버려 두지 않으시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엄중한 진단과 주님에 대한 그의 신뢰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인간의 악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조금 노력하면 자기 힘으로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깊이 자기 사랑과 악으로 기울 수 있는지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자비가 더욱 크게 드러납니다. 사람이 여전히 돌이킬 수 있고, 진리를 들을 수 있고, 선을 향하여 움직일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붙들어 주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여기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5은 그 작동 방식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 어떤 일이 뜻밖에 막히는 것, 고통이나 시험을 겪는 것 등을 하나하나 가리켜 ‘이것이 바로 그때 주님께서 붙드신 것이다’라고 AC.35만을 근거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와 거듭남에 관한 다른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면 주님의 인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우선 ‘인간이 자기 악에 완전히 내맡겨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비로 붙드신다고 해서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여전히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으며, 악과 싸울 수도 있고 그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 안에서 선과 진리를 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길을 열어 주시는 자비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점에서 주님의 자비를 ‘공의라면 벌해야 하지만 자비가 그것을 눈감아 주는 것’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신적 질서와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거나 거짓을 진리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 자비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 가운데 있는 사람을 그대로 버리지 않고, 그가 악에서 돌이켜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구원을 향해 이끄시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비는 인간의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악에서 건져 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AC.35의 이 한마디는 거듭남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다 보면 ‘나는 왜 아직도 이렇지?’, ‘왜 알고 있는 것과 실제 삶이 이렇게 다르지?’ 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35처럼 이해는 하늘을 향하면서 의지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말씀을 읽으면 자기 안의 모순이 더욱 크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 문장의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끝내지 않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말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주님의 자비로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의지가 이미 완전해졌다는 데 있지 않고,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어차피 주님께서 붙드시니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자비를 알수록 우리는 그 자비에 응답하여 악에서 돌아서고,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으로 옮기며, 주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을 자유롭게 선택해야 합니다. 자비는 거듭남을 대신해 주는 면허가 아니라 거듭남이 가능하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으신 신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고백은 AC.35을 읽고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주님의 자비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AC.35은 그 자비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든 방식으로 역사하는지를 설명하는 글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만큼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악한 의지의 무게만을 따라 끝없이 떨어지도록 버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짧은 한마디 때문에,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그렇게 엄중하게 말한 AC.35도 결국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바라보며 끝납니다.

 

 

 

AC.35, 창1:14-17, ‘의지와 이해 : 하나의 생명이냐, 둘로 갈라진 마음이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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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 심화

1. ‘두 영과 두 천사’는 누구이며, 왜 둘씩 있는가?

 

AC.50을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 가운데 하나가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두 영은 악한 영을 말하는가?’, ‘두 천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수호천사인가?’, ‘거듭난 사람에게는 악한 영들이 없어지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왜 하필 둘씩인가?’

 

AC.50 자체에서는 이 모든 질문을 상세히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뒤쪽으로 가면 스베덴보리가 같은 문제를 다시 다루며 훨씬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따라서 이번 심화에서는 AC.50이 직접 말하는 것과 뒤의 AC에서 보충되는 내용을 구별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AC.50은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소통하며, 천사들을 통해 천국과 소통한다고 합니다. 이어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이 그와 함께 있다’고 하고, 거듭난 상태에서는 천사들이 다스린다고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AC.50의 ‘영들’은 천사들과 대비되어 영들의 세계와 사람을 연결하는 존재들이며, 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는 영들은 악한 영들로 묘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AC.5848-5849에서 훨씬 명시적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천사들과 영들이 있으며, ‘천사들은 천국에서, 영들은 지옥에서’ 온다고 말하고, 모든 사람에게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다시 설명합니다. 그리고 두 영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옥과 소통하게 하고, 두 천사는 천국과 소통하게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50의 ‘두 영’을 단순히 선악이 정해지지 않은 일반적인 영 둘이라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뒤의 설명까지 함께 볼 때 지옥 쪽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영들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고 ‘사람 옆에 지옥에서 올라온 악한 영 둘과 천국의 천사 둘이 몸으로 서서 늘 따라다닌다’는 식으로 자연계의 공간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함께 있음’은 영적 결합과 소통의 문제입니다. 그가 실제 영계의 공간과 가까움에 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별도의 큰 주제이므로, AC.50의 ‘함께 있다’를 자연계의 몇 미터 거리처럼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에게는 악한 영들이 완전히 없어지고 천사들만 남는가?’ AC.50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2]에서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은 그 지배를 막는다고 하며, [3]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면 천사들이 다스린다고 합니다. 즉 AC.50이 직접 대비하는 것은 ‘천사와 악한 영의 존재 여부’라기보다 어느 쪽의 작용이 지배적인가 하는 상태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만으로 ‘거듭난 뒤에도 정확히 같은 영들이 같은 방식으로 계속 머문다’거나 ‘악한 영들은 일정 거리 밖으로 물러난다’는 세부까지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왜 둘인가?’라는 질문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것은 AC.50에는 답이 없지만, 뒤의 AC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설명합니다. AC.5977-5978에서는 인간에게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이 있으며, 천국에는 이에 대응하는 두 종류의 천사들이 있고 지옥에도 이에 반대되는 두 종류의 영들이 있기 때문에 둘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천사 가운데 한 종류는 사람의 의지에 속한 것들에 작용하고, 다른 종류는 이해에 속한 것들에 작용합니다. 의지에 작용하는 천사들은 사람의 사랑과 목적, 따라서 선에 속한 것들과 관계되고, 이해에 작용하는 천사들은 신앙과 원리, 따라서 진리에 속한 것들과 관계됩니다. 그는 앞의 천사들을 천적 천사, 뒤의 천사들을 영적 천사라고 부릅니다.

 

지옥 쪽에도 이에 반대되는 두 종류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한 종류는 의지에 속한 것들에 작용하고, 다른 종류는 이해에 속한 것들에 작용합니다. 따라서 ‘두 영과 두 천사’라는 숫자는 단순히 네 명이라는 기이한 숫자 정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본 기능에 대응하는 영적 소통의 질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 안의 모든 생각 하나에는 ‘이해 담당 천사 한 명’, 모든 애정 하나에는 ‘의지 담당 천사 한 명’이 기계적으로 붙어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것은 인간의 두 기본 기능과 천국·지옥의 두 종류 사이의 상응 관계입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조직도나 신경회로처럼 지나치게 세밀한 기계 구조로 바꾸면 오히려 그의 설명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또 ‘두 천사와 두 영이 있으므로 내 마음속에서 좋은 생각 하나와 나쁜 생각 하나가 항상 동시에 들려온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AC.50과 뒤의 관련 글들은 인간이 천국과 지옥 양쪽과 소통한다는 큰 구조를 설명하지만, 개별적인 생각과 느낌 하나하나를 우리가 어느 영의 직접 발언으로 판별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식의 영적 존재 판별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 점은 인간의 책임 문제에서도 중요합니다. ‘악한 생각은 악한 영에게서 왔으니 내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악을 남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유입되는가만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AC.50에서는 그 자유의 전체 메커니즘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더 자세히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영들이 영향을 주므로 인간에게 책임이 없다’는 결론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면 두 천사와 두 영은 각각 독립적으로 자기 힘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존재일까요? 이것 역시 AC.50이 단호하게 막습니다. 천사들은 ‘사역자들’일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입니다. 천사들도 자기들에게 어떤 능력도 없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일한다고 고백한다고 합니다. 지옥 쪽의 영들이 작용하는 경우에도 인간의 존재와 생명 전체가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AC.50의 ‘두 영과 두 천사’를 읽는 중심은 신비한 호위 존재 넷에 대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이라는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 역시 그 영적 질서 안에서 작용하며, 그 모든 것 위에서 주님 한 분이 섭리 가운데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고 거듭남을 이루신다는 것이 더 중요한 핵심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AC.50은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말하며, 뒤의 AC.5848-5849는 두 영을 지옥과의 소통, 두 천사를 천국과의 소통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AC.5977-5978은 그들이 왜 둘씩인지에 대해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에 각각 대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두 영과 두 천사’는 임의적인 숫자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 그리고 천국과 지옥과의 영적 소통이라는 더 큰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50, 창1:26, ‘우리의 형상대로’ : 천사와 영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는 주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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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5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역량(faculties), 곧 의지와 이해(will and understanding)가 있습니다. 이해가 의지의 지배를 받을 때, 이 둘은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이 됩니다. 이때에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고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의지와 어긋날 때에는, 그러니까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경우인데요, 이때는 하나의 마음이 둘로 나뉘는데, 하나, 곧 이해는 스스로를 하늘로 높이려 하고, 다른 하나, 곧 의지는 지옥을 향해 기울어지지요. 그런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동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 전체는 곧장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Man has two faculties: will and understanding. When the understanding is governed by the will they together constitute one mind, and thus one life, for then what the man wills and does he also thinks and intends. But when the understanding is at variance with the will (as with those who say they have faith, and yet live in contradiction to faith), then the one mind is divided into two, one of which desires to exalt itself into heaven, while the other tends toward hell; and since the will is the doer in every act, the whole man would plunge headlong into hell 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

 

해설

AC.35는 인간에게 있는 두 가지 기본 역량, 곧 ‘의지’와 ‘이해’를 다룹니다. 얼핏 보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원하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두 역량의 관계를 통해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사랑과 신앙의 문제를 인간 마음의 구조 안으로 가져옵니다.

 

먼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해가 의지의 지배를 받을 때’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생명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반대로 생각합니다. ‘욕망대로 행동하지 말고 이성으로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의지’는 단순히 순간적인 욕망이나 충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와 연결된 마음의 근본적인 역량입니다. ‘이해’ 역시 단순한 지능이 아니라 무엇이 참인지 알고 생각하는 역량입니다.

 

그러므로 AC.35의 핵심은 ‘생각하지 말고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실제로 원하는 것과 그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또한 생각하고 의도할 때 의지와 이해는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을 이룹니다. 안에서 원하는 것과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주의가 필요합니다. 의지와 이해가 일치하기만 하면 무조건 좋은 사람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악을 원하면서 그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는 생각과 욕구가 일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35가 지금 다루는 문맥은 앞선 AC.34의 ‘사랑과 신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을 이해로는 인정하면서 실제 의지는 그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원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예로 드는 사람이 바로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진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로는 하늘을 향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신앙을 말하고, 교리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원하는 것과 살아가는 방향은 그것과 반대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하나의 마음이 둘로 나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당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머릿속에서 어떤 교리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하늘을 향한다고 해서 사람 전체가 하늘을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원하는가, 그리고 그 의지가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함께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AC.35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해는 자신을 하늘로 높이려 하지만 의지는 지옥을 향하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사람 전체가 곧장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지가 행위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으로 그의 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원하며 그 원하는 바가 행위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5 자체도 이해가 ‘하늘로 높아지려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고, 자기 삶과 다른 더 높은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의지와 분리된 채 머리에만 머물 때입니다. ‘나는 이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와 ‘나는 이것을 원하고 행한다’ 사이에 깊은 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AC.35의 마지막 말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이런 분열을 설명하고 끝내지 않고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덧붙입니다. 인간에게 이해와 의지의 모순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주님의 자비라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가 없다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 상태를 유지하거나 구원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AC.35은 여기서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 사람을 붙드시고 의지와 이해를 회복시키시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해를 이용하여 의지를 이렇게 교정하신다’는 식으로 작동 방식을 미리 확정하기보다, 우선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데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만 내버려져 있지 않고 주님의 자비 아래 붙들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AC.35는 단순한 인간 심리 분석을 넘어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 묻지 않고 ‘나는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가?’까지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믿고, 이해로는 선과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실제 의지가 전혀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분열입니다.

 

그러므로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 하나의 생명’을 이룬다는 말은 단순히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라는 도덕적 충고보다 깊습니다. 사람이 이해로 받아들인 신앙과 실제로 원하는 삶이 서로 갈라지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그 둘이 갈라져 있는 우리를 절망 가운데 버려두지 않고 붙드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AC.35의 마지막에 ‘자비’가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심화

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AC.35, 심화 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AC.35.심화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위 AC.35본문,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 우리를 지으신 신(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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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이란 무엇인가?'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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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은 하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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