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4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천상의 결혼’(heavenly marriage)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이 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천상의 결혼’은 무엇일까요? 천국에 간 남자와 여자가 이루는 결혼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AC.54가 직접 말하는 것부터 구별해야 합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이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들이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결혼을 통해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그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 안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불렀으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54 안에서만 보아도 결혼이라는 말은 자연적인 남녀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 내면의 두 기능이 하나로 작동하는 관계까지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천상의 결혼 =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라고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도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AC 전체에서 ‘천상의 결혼’이라는 개념은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의지의 결합, 진리와 선의 결합, 신앙과 사랑의 결합 등이 서로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모든 참된 결합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을 하나의 평면적인 등식으로 외우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참된 결합이 여러 차원에서 나타나는 질서’라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이 표현 역시 AC.54 자체의 문장을 넘어선 전체 AC의 관점에서 정리한 설명이라는 점은 구별해야 합니다.

 

AC.54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는 이해와 의지의 결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하고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는 이해이고 의지는 의지인 채로, 둘이 하나로 작동합니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상응의 중요한 성질을 보여 줍니다. 참된 결합은 차이를 없애는 동일화가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해와 의지가 결합한다고 해서 이해가 의지가 되거나 의지가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기능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 작동합니다.

 

앞의 AC.53과 연결하면 신앙과 사랑의 관계도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AC.53은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했습니다. 따라서 이해와 의지의 결혼은 자연스럽게 신앙과 사랑의 결합과도 연결됩니다. 이후 AC.475-476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뜻한다고 다시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교리를 많이 알면서 사랑도 조금 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과 사랑이 참으로 결합한다는 것은 사람이 아는 진리와 그가 실제로 사랑하고 원하는 선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와 관계됩니다. 이해가 한 방향을 보고 의지가 정반대 방향을 향한다면 둘이 하나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아는 대로 완벽하게 살아야만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도덕적 완전주의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은 진행되는 과정이며, AC.54는 그 과정의 세부 단계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된 영적 질서가 이해와 의지의 분리에 있지 않고 그 결합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결혼’이라는 말을 선과 진리의 관계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의지는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기능과 깊이 관계되므로 이해와 의지의 결합은 진리와 선의 결합과 분리되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 전체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은 천국과 거듭남을 이해하는 매우 근본적인 원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남자 = 진리’, ‘여자 = 선’이라는 하나의 기계적인 공식으로 모든 성경 구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은 문맥을 따라 보아야 합니다. AC.54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 안에서 ‘남자 = 진리’, ‘여자 = 선’이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관련된 더 넓은 대응은 이후의 AC 설명과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은 이 내적인 결혼과 어떤 관계였을까요? AC.54의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에서 누리는 행복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즉 자연적인 결혼 자체를 행복의 최종 근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결합의 행복 안에서 더 높은 결합의 질서를 보았고, 그 근원을 천적인 것과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연적인 결혼을 단순한 그림자나 중요하지 않은 외피로 취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결혼이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다고 AC.54가 직접 말합니다.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참으로 표상할 때 외적인 것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을 담고 드러내는 귀한 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 사람들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할 수 있으면 결혼에 비유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단순히 사회제도 하나가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행복을 경험하게 하는 매우 깊은 표상이었습니다.

 

또 이 때문에 말씀에서 교회 자체도 ‘딸’, ‘처녀’, ‘아내’라는 결혼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AC.54는 그 이유를 교회의 ‘선에 대한 애정’에서 찾습니다. 이후 말씀에서 주님과 교회의 관계가 혼인과 부부의 언어로 나타날 때에도 이 천상의 결혼이라는 큰 주제가 배경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 천국에서의 실제 남녀 결혼과 ‘천상의 결혼’은 아무 관계가 없을까요? 그렇다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저술에서 천국의 결혼과 결혼애를 별도로 매우 깊게 다룹니다. 다만 AC.54의 ‘천상의 결혼’을 처음부터 사후세계의 부부생활만을 뜻하는 용어로 제한하면 이번 글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여기서는 자연적인 결혼의 행복이 더 내적인 천상의 결합에서 온다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결합의 궁극적인 근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의 생각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에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완전한 조화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앞의 AC.39 이후의 원리는 여기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래서 ‘천상의 결혼’을 가장 안전하게 기억하는 방법은 하나의 단단한 등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 질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서로 구별되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게서 오는 질서 안에서 하나로 결합하여 작동하는 것입니다. AC.54에서는 그 가운데 특별히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것을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실제 결혼의 행복은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내적인 결합을 비추었고, 그 결합은 다시 천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했습니다. 이것이 AC.54에서 ‘남자와 여자’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굳이 태고교회의 결혼의 행복과 천상의 결혼을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 :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결혼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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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 심화

1. 왜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 이 책은 처음부터 계속 선과 진리 이야기인가?’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그리고 이제 AC.44에서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까지 비슷한 구도가 계속 나타납니다. 창세기에는 빛과 어둠, 물과 땅, 풀과 나무, 해와 달, 물고기와 새, 짐승이 나오는데,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다시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이야기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질문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질문을 잘 이해하면 앞으로 AC를 읽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수많은 교리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두 주제로 골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생명과 거듭남을 설명할 때 이 둘의 관계가 매우 근본적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인간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람에게는 무엇인가를 알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면이 있고,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원하며 행하는 면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크게 이해와 의지로 구별합니다. 진리는 이해와 특별히 관계되고 선은 의지와 특별히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진리 = 이해, 선 = 의지’라는 기계적인 공식으로만 외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좋아하고 원하여 실제로 행하는 것이 하나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AC.44가 바로 그 문제를 매우 실제적인 언어로 보여 줍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사람은 들으면서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참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신앙을 말하면서도 그 신앙에 따라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문제는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라 ‘내가 아는 진리가 내가 사랑하고 행하는 선과 하나가 되어 있는가?’라는 삶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창세기 1장을 설명하면서 이 문제가 계속 나타날까요? 지금 스베덴보리가 창조 이야기를 한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속뜻으로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비치고, 서로 다른 것들이 구별되고, 지식이 생기고, 그 지식들이 살아나며, 마침내 이해에 속한 것뿐 아니라 의지에 속한 것들도 새롭게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날들이 진행될수록 선과 진리의 관계도 같은 모습으로 단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다른 단계에서 나타납니다.

 

이 점에서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 ‘행함과 들음’을 완전히 같은 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며 사용되는 문맥도 다릅니다. 그러나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진리와 관계되고 사랑은 선과 관계되며,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계되고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그래서 AC를 읽다 보면 서로 다른 용어들이 계속 선과 진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연결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천국을 설명할 때도 선과 진리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생명은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 상태도 아니고, 막연히 좋은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태도 아닙니다. 천사들의 생명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들이 결합된 삶과 관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도 결국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 설명에서 계속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말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다룬다고 봅니다. 따라서 말씀 속의 수많은 자연물과 사건이 속뜻에서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의 여러 상태와 관계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모든 단어를 ‘이것은 선, 저것은 진리’라는 두 칸짜리 표에 넣어 해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응은 훨씬 다양하고 문맥에 따라 세밀하게 달라집니다. 다만 그 다양한 상응들이 결국 사람의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의 상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선과 진리는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경쟁 구도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만 착하면 진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무엇이 선인지 알기 위해 진리가 필요하고, 알게 된 진리는 실제 선한 삶을 향해야 합니다. AC.44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 사람 안에 심겨야 한다고 한 뒤 곧바로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결합을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AC에서 선과 진리가 계속 등장하는 것을 ‘또 같은 이야기’라고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번에는 선과 진리의 관계가 거듭남의 어느 단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라고 물으며 읽으면 좋습니다. 창조 첫째 날의 빛에서 말하는 진리와 여섯째 날의 이해와 의지의 관계는 똑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됨에 따라 같은 근본 문제가 점점 더 깊은 차원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계속 말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람의 영적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과 깊이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를 읽을 때 선과 진리가 또 나왔다고 생각하기보다, ‘이번에는 이 둘이 어떻게 만나고 있으며, 아직 무엇이 분리되어 있고, 거듭남이 그것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어 가는가?’라고 살펴보면 글의 흐름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끝까지 선, 진리 이야기만 한다’는 첫인상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같은 두 단어를 되풀이하는 책이라기보다, 인간의 내면이 주님에 의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지를 선과 진리의 관계를 통해 아주 오랫동안, 여러 각도와 여러 단계에서 추적하는 책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AC.44, 창1:24-25, ‘지식에서 생명으로 : 이해와 의지가 하나 될 때 나타나는 참된 신앙’(AC.44-48)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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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은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합니다. 전자는 인간의 이해(understanding)에 속하고, 후자는 그의 의지(will)에 속합니다. All things relati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re called spiritual, and all that are of 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 are called celestial; the former belong to man’s understanding, and the latter to his will.

 

해설

AC.61은 매우 짧지만 앞으로 AC를 읽는 데 자주 만나게 될 두 용어, 곧 ‘영적’(spiritual)과 ‘천적’(celestial)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영적이라 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을 천적이라 합니다. 그리고 전자는 인간의 ‘이해’에, 후자는 ‘의지’에 속한다고 합니다.

 

바로 앞 AC.60에서는 창1:31의 ‘심히 좋았더라’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고, 그 결과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AC.61은 그 설명에 이어 ‘그러면 영적인 것이 무엇이고 천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아주 간결하게 밝혀 주는 글입니다.

 

먼저 ‘영적’이라는 말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영적이다’라고 하면 세속적이지 않다거나, 신앙심이 깊다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심이 많다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AC.61에서 스베덴보리는 훨씬 구체적인 뜻으로 사용합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영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인간의 ‘이해’에 속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해’는 단순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결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이 참인지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과 관계된 말입니다. 이 점은 연결된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반면 ‘천적’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의지’에 속합니다. 여기서 의지도 단순히 ‘의지가 강하다’, ‘무엇을 해내려는 의욕이 있다’는 일상적인 의미보다 넓게 읽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 하는 내적 생명의 한 능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AC.61의 문장을 가장 단순하게 놓아 보면 이렇습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들은 이해에 관계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하는 것들은 의지에 관계됩니다. 전자를 ‘영적’, 후자를 ‘천적’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것은 지식이고 천적인 것은 사랑이니, 영적인 것은 머리에만 있고 천적인 것만 실제 생명이라는 뜻인가?’ 그러나 AC.61을 그렇게 읽으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두 종류의 것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지, 영적인 것을 무가치한 지식으로 낮추고 천적인 것만 참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60에서도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구별되지만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또 ‘신앙에 관한 지식’을 단순한 성경 상식이나 교리 암기로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아는 것이 포함되겠지만, AC에서 신앙에 관한 지식은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 관계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해’를 단순한 정보 저장소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단순한 따뜻한 감정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의지’에 속한다고 하는 데에는 사람이 무엇을 실제로 원하고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은 단순히 어떤 대상에 좋은 느낌을 갖는 것보다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너무 쉽게 ‘이해 = 머리’, ‘의지 = 가슴’이라고 바꾸는 것도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 설명하기에는 쉬운 비유지만, 이해와 의지는 신체 기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내적 생명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두 근본적인 능력에 관한 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알고 그것이 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에 관한 지식과 이해의 측면을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실제로 이웃의 선을 원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여기에는 의지와 사랑의 측면이 있습니다.

 

이 예는 AC.61의 구별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아는 것은 무조건 영적이고 행동하는 것은 무조건 천적이다’라는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행동의 근원이 어떤 사랑과 의지에 있는지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은 ‘영적’과 ‘천적’을 단순히 신앙의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AC 전체에서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가 매우 중요한 주제로 발전하지만, AC.61 자체는 ‘먼저 영적 인간이 된 다음 더 발전하면 천적 인간이 된다’는 단계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특히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질서에 차이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 천적’이라는 하나의 직선적인 승급 과정으로 이해하면 앞으로의 AC를 읽을 때 오히려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AC.61이 말하는 만큼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이고 이해에 속하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은 천적이고 의지에 속한다.’ 이것이 이 글의 직접적인 정의입니다.

 

그러면 왜 바로 앞 AC.60에서는 이 둘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했을까요? 이해와 의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서로 완전히 무관한 채 따로 존재하는 것이 거듭남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C.60은 그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상태를 말했고, AC.61은 그 결합을 이루는 두 종류의 것이 각각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천적인 것을 설명하면서 막연히 ‘사랑’이라고만 하지 않고 그 사랑의 방향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사랑이나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랑까지 단지 ‘사랑’이라는 이유로 천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1이 천적이라고 부르는 사랑은 구체적으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점은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사랑을 동일하게 선한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바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을 천적이라고 명시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의지에 속한다는 말은 신앙생활에서 사랑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무엇을 실제로 원하고 사랑하는가는 그의 내적 생명과 깊이 관계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를 버리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결론도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앞 말씀의 속뜻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결혼’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서로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60과 AC.61을 함께 읽으면 창1:31의 ‘심히 좋았더라’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AC.60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한다고 했고, AC.61은 그 가운데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들은 영적이며 이해에 속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하는 것들은 천적이며 의지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을 읽으면서 ‘나는 영적 인간인가, 천적 인간인가?’부터 판정하려 하기보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정확히 익히는 것이 좋습니다. 앞으로 AC에서 ‘영적’, ‘천적’, ‘이해’, ‘의지’라는 말이 계속 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설명의 출발점은 여전히 창1:31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AC.61은 말씀을 대신하여 인간에 관한 별도의 철학 체계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 AC.60에 이어 이 말씀의 ‘심히 좋았더라’ 안에 있는 신앙과 사랑,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의 결합을 좀 더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심화

1. ‘understanding’을 왜 ‘이해’라고 번역하는가?

 

AC.61 심화 1,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

AC.61 심화1. ‘understanding’을 왜 ‘이해’라고 번역하는가? AC.61에는 앞으로 AC에서 매우 자주 만나게 될 두 단어가 함께 나옵니다. ‘understanding’과 ‘will’입니다. 여기서는 각각 ‘이해’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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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창1:31, 여섯 날의 거듭남 : 조금씩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사람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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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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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에는 매우 짧지만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에 창1:31의 상태가 ‘심히 좋았더라’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이것을 단순히 ‘신앙 = 아는 것’, ‘사랑 = 행동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입니다. 처음 이해하기에는 편리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사랑의 의미를 너무 좁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어떤 성경 구절을 기억하거나 어떤 교리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에는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관계됩니다. 따라서 ‘신앙에 속한 것들’은 진리,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진리에 따라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들과 관계된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외우고 있다는 것은 기억 지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말씀임을 인정하고,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비추는 진리로 받아들이며, 실제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하는 기준이 된다면 신앙에 속한 것과 더 깊이 관계됩니다.

 

‘사랑에 속한 것들’ 역시 단순한 감정이나 행동 하나와 같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며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의지의 생명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실제 삶에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이웃의 선을 원하고, 그 사람에게 무엇이 참으로 유익한지를 생각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그 선을 행하려 한다면 사랑에 속한 것이 삶에 나타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알면 신앙, 행동하면 사랑’이라는 공식은 피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많은 종교적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칭찬을 받기 위해 선행할 수도 있고,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행동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동의 내적 사랑이 무엇인지 곧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신앙 역시 단순히 머리에만 있는 정보가 아닙니다. AC.60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은 결국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신앙을 단순한 지식 저장소처럼 생각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들 = 진리와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데 관계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 선과 그것을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관계된 것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조금 더 안전합니다.

 

바로 다음 AC.61은 이 문제를 한 걸음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영적’이라고 하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하는 모든 것을 ‘천적’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60의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다음 글의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이해하는 준비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영적’과 ‘천적’의 전체 차이를 미리 다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는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다음 글이 말할 몫은 다음 글에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AC.60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선을 사랑하고 원하는 것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전혀 다른 것을 원할 수 있습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거짓을 통해 이익을 얻고 싶어 할 수도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계속 복수하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가 알고 인정하는 진리와 그가 실제로 사랑하고 원하는 것은 아직 하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AC.60이 ‘심히 좋았더라’라고 부르는 상태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사람이 참되다고 인정하는 것과 그가 사랑하고 원하는 것이 서로 결합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알던 것을 이제 실천한다’는 정도로만 이해하면 조금 부족합니다. 실천은 물론 중요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결합은 더 안쪽의 의지와 이해에 관계됩니다. 무엇이 참인지 인정하는 이해와 무엇이 선한지 사랑하는 의지가 서로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AC.60은 이 결합을 단순한 협력이라고 하지 않고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둘 가운데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를 이룹니다.

 

이 대목은 말씀의 ‘심히 좋았더라’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이 사람은 이제 성경을 많이 안다’고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시는 것도 아니고, 단지 ‘좋은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하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AC.60의 설명에 따르면 그 깊은 이유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가 서로 분리된 채 각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결합된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쉽게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매우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없고, 많은 선행을 하는 사람의 가장 깊은 동기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설명은 ‘누가 여섯째 날 인간인가’를 분류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거듭남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의 속뜻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결합을 인간 자신의 작품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창1:31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라고 시작합니다. ‘심히 좋았더라’고 평가받는 상태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의 결과입니다.

 

속뜻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자기 힘으로 생명 있게 만들고 사랑과 결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가운데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을 가장 간단하게 구별한다면, 전자는 진리와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데 관계된 것들이고, 후자는 선과 그것을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관계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60이 정말 강조하는 것은 그 구별 자체보다 그 다음입니다. 이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 됨 때문에 말씀은 앞선 날들의 ‘좋았더라’를 넘어 여섯째 날에 이르러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합니다.

 

 

 

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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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태고교회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이 그들의 후손들 가운데서 사라지자, 이 아르카나 역시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결혼은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안에 담긴 행복을 느끼고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내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내적인 것들, 즉 속의 것들로만 기뻐했습니다. 겉의 것들은 눈으로 보기만 했고, 그것들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겉의 것들은 그것들이 그들의 생각을 속의 것들, 곧 내적인 것들로, 그리고 거기서 천적인 것들로, 결국에는 그들의 모든 것 되신 주님께로 돌이키게 해줄 때에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으며,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누리는 행복이 바로 거기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understanding)를 남자라 불렀고, 의지(will)를 여자라 불렀으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marriage)이라 불렀습니다. 그 교회로부터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방식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로 인해 선에 대한 애정으로 교회를 가리켜 ‘딸’(daughter)과 ‘처녀’(virgin), 곧 ‘시온의 처녀’(virgin of Zion), ‘예루살렘의 처녀’(virgin of Jerusalem)라 하였고, 또한 ‘아내’(wife)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주제들에 대해서는 다음 장 23절과 3장 15절에서 더 보게 될 것입니다. What is meant by “male and female,” in the internal sense, was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 was lost among their posterity, this arcanum also perished. Their marriages were their chief sources of happiness and delight, and whatever admitted of the comparison they likened to marriage, in order that in this way they might perceive its felicity. Being also internal men, they were delighted only with internal things. External things they merely saw with the eyes, but thought of what was represented. So that outward things were nothing to them, save as these could in some measure be the means of causing them to turn their thoughts to internal things, and from these to celestial things, and so to the Lord who was their all, and consequently to the heavenly marriage, from which they perceived the happiness of their marriages to come. The understanding in the spiritual man they therefore called male, and the will female, and when these acted as a one they called it a marriage. From that church came the form of speech which became customary, whereby the church itself, from its affection of good, was called “daughter” and “virgin”—as the “virgin of Zion,” the “virgin of Jerusalem”—and also “wife.” But on these subjects see the following chapter, at verse 23, and chapter 3, verse 15.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

 

해설

AC.54는 창1:27의 마지막 표현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를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뜻에서는 물론 남성과 여성의 창조를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남자와 여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태고교회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르카나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태고교회 사람들이 결혼과 자연계의 외적인 것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길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가 주의할 것은 AC.54가 자연적인 남녀나 실제 결혼을 부정하고 그것을 단지 인간 심리의 비유로 바꾸려는 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실제 결혼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매우 큰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혼이라는 자연적 현실을 통해 더 내적인 결합을 보았습니다. 자연적인 결혼과 그 속뜻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 안에서 내적인 것을 보았다는 것이 이번 글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결혼이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결혼에 비유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혼의 행복을 지각했습니다. 오늘날 독자에게는 조금 낯선 표현이지만, 이 문장은 태고교회가 ‘결합’을 얼마나 중요하게 보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을 바라보는 방식은 외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AC.54는 그들을 ‘내적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외적인 것들을 눈으로 보았지만, 생각으로는 그것들이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외적인 것 자체가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말은 자연계의 사물이나 삶을 무가치하게 여겼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의 요점은 외적인 것이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을 보면 그들의 생각은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으로 향했고, 내적인 것에서 다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이 흐름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응과 표상이라는 것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좋은 사례입니다. 자연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것만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 안에서 더 내적인 것을 보았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연계는 막다른 곳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생각을 그 자체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실재를 향하게 했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의 결혼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그보다 더 내적인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고, 자기들의 결혼에서 누리는 행복이 바로 그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여기서 ‘천상의 결혼’이라는 말이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천국에 가면 이루어지는 남녀의 결혼’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실제 남녀의 결혼과 아무 관계가 없는 추상적인 심리 현상으로만 이해해서도 곤란합니다. AC.54 자체에서는 이 용어의 전체 교리를 아직 펼치지 않습니다. 다만 태고교회 사람들이 자연적인 결혼의 행복을 더 높은 결합에서 오는 것으로 퍼셉션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개념은 앞으로도 AC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 설명을 거쳐 스베덴보리는 마침내 창1:27의 ‘남자와 여자’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힙니다.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를 남자라 불렀고, 의지를 여자라 불렀으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 불렀다.’ 이것이 AC.54의 핵심 문장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는 대응이 나옵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현실의 모든 남성은 이해를 대표하고 모든 여성은 의지를 대표한다는 심리적 성별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54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와 의지입니다. 한 인간 안에 있는 두 기능을 남자와 여자라는 결혼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남성에게는 이해만 있고 여성에게는 의지만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AC.54의 속뜻에서 한 영적 인간 안에 이해와 의지가 있고, 그 둘의 관계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이 글을 현실 남녀의 지적 능력이나 감정적 성향을 분류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또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는 대응을 지나치게 기계적인 사전처럼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창1:27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태고교회의 결혼에 대한 인식과 영적 인간 안의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연결합니다. 이후 다른 문맥에서 ‘남자’, ‘여자’, ‘남편’, ‘아내’ 등이 등장할 때에는 그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다시 보아야 합니다.

 

AC.54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해와 의지가 각각 따로 있다는 사실보다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해와 의지의 구별은 결합을 위한 구별입니다. 둘이 없어져 하나의 기능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53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AC.53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54에서는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앞에서는 둘의 질서를 구별했다면 이번에는 둘의 결합에 시선이 놓입니다.

 

그렇다고 ‘이해에 들어온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사랑이 되면 그것이 곧 결혼이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거듭남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특히 영적 인간의 진행을 설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표현일 수 있지만, 앞의 AC.52-53에서 천적 인간은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54의 더 근본적인 요점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한다는 데 있지 않고,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은 우리가 앞에서 보아 온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생명은 한쪽 기능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AC.54 자체는 ‘이해 = 진리 = 신앙’, ‘의지 = 선 = 사랑’이라는 모든 대응 관계를 한꺼번에 체계화하는 글은 아닙니다. 지금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만큼을 붙들면 충분합니다. 영적 인간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 했고,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 했습니다.

 

그런 다음 스베덴보리는 이 태고교회에서 하나의 언어 습관이 비롯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교회 자체가 선에 대한 애정 때문에 ‘딸’과 ‘처녀’, 예를 들어 ‘시온의 처녀’, ‘예루살렘의 처녀’라고 불렸으며 또한 ‘아내’라고도 불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교회가 여성적 표현으로 등장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여기서도 ‘교회 = 여자’라는 하나의 고정된 공식만 기억하기보다 왜 그런 표현이 사용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AC.54가 직접 밝히는 이유는 ‘선에 대한 애정’입니다. 교회가 선에 대한 애정과 관련되기 때문에 딸·처녀·아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창2:23과 창3:15에서 더 보게 될 것이라고 직접 예고합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아내로서의 교회’, ‘여자와 여자의 후손’, ‘남편과 아내의 모든 상응’을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AC 자체가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고 하므로 그때까지 남겨 두는 것이 오히려 전체 흐름을 따라가는 좋은 독법입니다.

 

AC.54에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상응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외적인 것을 보면서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을 생각했고, 거기서 천적인 것으로, 마침내 주님께로 생각이 향했습니다. 상응은 그들에게 외워 둔 상징 사전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AC를 읽으며 상응을 공부할 때에도 중요한 주의를 줍니다.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고 외우는 것만으로 태고교회의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의 시선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에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께 향합니다. 상응의 목적은 자연적인 상징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더 내적인 것과 주님을 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서 결혼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들의 실제 결혼은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 행복의 근원을 더 높은 천상의 결혼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것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서로 다른 둘이 각자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채 하나로 작동하는 것이 결혼이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AC.54의 중심을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정적이다’라는 자연적 성별 구분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실제 결혼은 중요하지 않고 인간 내면의 이해와 의지만 중요하다고 읽어서도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자연적인 결혼은 더 내적인 결합을 비추는 귀한 표상이었고,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결국 AC.54는 창1:27의 ‘남자와 여자’를 통해 인간 안의 두 기능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와 의지는 구별되지만 하나로 작동할 때 ‘결혼’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이 결혼의 언어는 인간 개인 안에서 끝나지 않고 교회를 ‘딸’, ‘처녀’, ‘아내’라고 부르는 말씀의 표현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결합의 시선은 더 깊이 들어가면 천적인 것으로, 마침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셨던 주님께 향합니다.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심화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천상의 결혼’(heavenly marriage)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이 이 천상의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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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 창1:28, ‘결혼의 열매 : 신앙과 사랑의 결합에서 생육과 번성이 일어나는 거듭남의 확장'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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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 창1:27,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AC.53-54)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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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형상’(image)이 두 번 언급되는 이유는, 이해에 속한 신앙을 ‘자기 형상’(his image)이라 하며, 의지에 속한 사랑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서 나옵니다. The reason why “image” is here twice mentioned is that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is called “his image”; whereas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and which in the spiritual man comes after, but in the celestial man precedes, is called the “image of God.”

 

해설

AC.53은 매우 짧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 AC.51-52에서 설명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의 관계를 창1:27의 문장 자체와 연결하는 중요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에 주목하는 것은 ‘형상’이라는 말이 한 절 안에서 왜 두 번 반복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창1:27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합니다. 영어로도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이라고 하여 image가 두 번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같은 뜻을 강조하기 위한 단순한 반복으로 읽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두 번의 ‘형상’을 서로 구별하여 읽습니다.

 

첫 번째 ‘형상’, 곧 ‘자기 형상’(His image)은 ‘이해에 속한 신앙’을 가리키고,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의지에 속한 사랑’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것이 AC.53이 직접 말하는 중심입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 ‘자기 형상’이라는 우리말 표현입니다. 한국어만 보면 ‘자기’가 사람 자신을 가리키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형상은 아직 사람이 자기 이해와 판단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어 원문은 ‘His image’이며 여기서 His는 사람(man)이 아니라 하나님(God)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이 사람을 그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문장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자기 형상’을 인간의 자기중심성이나 proprium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키는 표현 안에서 스베덴보리는 첫 번째를 신앙, 두 번째를 사랑과 연결할까요? 바로 앞 AC.51-52의 설명이 배경이 됩니다. AC.51에서는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구별했고, AC.52에서는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고 설명했습니다. AC.53은 그 구별을 창1:27의 두 번 반복되는 ‘형상’에 적용합니다.

 

첫 번째는 ‘이해에 속한 신앙’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보아 온 영적 인간의 질서와 관계됩니다. AC.52에서 영적 인간을 나타내는 창1:26의 순서에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하는 물고기와 새가 먼저 나오고, 의지와 애정에 관계되는 짐승이 뒤에 나왔습니다. 이제 AC.53도 같은 질서를 이어서, 이해에 속한 신앙을 첫 번째 ‘형상’과 연결합니다.

 

두 번째는 ‘의지에 속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사랑이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선다’고 합니다. 이 한 문장은 AC.52의 설명을 거의 압축해서 다시 말한 것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앞섭니다.

 

여기서 ‘뒤따른다’와 ‘앞선다’는 표현을 정확하게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AC.48에서 이미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을 ‘신앙만 있는 사람’, 천적 인간을 ‘사랑만 있는 사람’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둘의 차이는 신앙과 사랑 가운데 하나가 있고 하나가 없다는 데 있지 않고 그 둘의 질서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간단하게 ‘영적 인간 = 신앙 → 사랑’, ‘천적 인간 = 사랑 → 신앙’이라고 적으면 어느 정도 기억에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완전한 정의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AC.53이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랑이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선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사랑의 관계 전체는 이후 AC에서 더욱 세밀하게 설명됩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첫 번째 ‘자기 형상’을 ‘아직 중심이 사람 쪽에 있는 상태’,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을 ‘중심이 하나님 쪽으로 옮겨진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AC.53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첫 번째의 ‘자기’ 역시 하나님을 가리키므로, ‘자기 형상 →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 중심 → 하나님 중심’의 변화로 읽는 것은 본문의 문법과도 맞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번의 ‘형상’을 ‘하나의 형상이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발전하는 두 단계’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53은 ‘형상이 둘인가 하나인가’를 논하려는 글이 아니라, 두 번 반복된 표현이 각각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가리킨다고 설명하는 글입니다. 따라서 이 짧은 문장에서 ‘형상의 완성’이라는 별도의 교리를 만들어 내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구별을 따라가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신앙과 사랑이 서로 무관하게 떨어져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영적 인간은 신앙과 사랑으로 함께 행동하는 사람으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AC.54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이해와 의지의 결합, 곧 일종의 결혼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53은 신앙과 사랑을 둘로 갈라놓기 위한 글이라기보다, 서로 결합될 두 요소의 질서를 구별하여 보여 주는 글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AC.53은 다음 글로 넘어가는 매우 자연스러운 다리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합니다. 이어지는 AC.54에서는 창1:27의 ‘남자와 여자’를 통해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설명합니다. 즉 먼저 둘을 구별하고, 이어 그 둘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지를 보여 주는 흐름입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신앙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인가?’ AC.53만으로 두 가지를 경쟁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어느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와 결합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섭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중요합니다.

 

또 ‘천적 인간은 사랑이 앞서므로 진리를 배우거나 신앙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앞의 AC.52에서도 천적 인간을 나타내는 순서에서 짐승 뒤에 새와 물고기가 계속 존재했습니다. 사랑이 앞선다는 것은 이해와 신앙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 질서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에게 신앙이 먼저라고 해서 그의 신앙이 단순한 지식이나 지적 동의라는 뜻도 아닙니다. AC.48에서 이미 그가 신앙과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는 살아 있는 영적 인간임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거듭남과 분리된 죽은 지식이 아니라 이해에 속하면서 사랑과 결합되어 가는 신앙입니다.

 

AC.53은 이런 점에서 앞의 여러 글을 단 한 문장에 압축합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라는 구별이 창1:27의 두 번 반복되는 ‘형상’ 안에 담겨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첫 번째 ‘형상’은 이해에 속한 신앙과,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은 의지에 속한 사랑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섭니다.

 

따라서 이번 글의 핵심을 ‘자기 형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발전한다’거나 ‘신앙 중심에서 사랑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형상이 완성된다’고 정리하기보다, 원문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이 있으며, 두 번의 ‘형상’은 이 둘과 관계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섭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AC.54에서 이 두 요소는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을 통해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AC.53은 어떤 완성의 종착점이라기보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어떻게 구별되고 다시 결합되는지를 보여 주는 다음 아르카나로 들어가는 짧고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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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창1:26, ‘순서에 깃든 아르카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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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24, 25)

 

AC.44

사람은 땅과 같아서, 신앙의 지식(knowledges)이 먼저 그 안에 뿌려지지 않으면 어떤 선도 산출할 수 없습니다. 그래야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 말씀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믿음에 따라 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게 되고, 그 결과 마음이 나뉘어, 주님께서 다음 말씀에서 ‘어리석은 사람’(foolish)이라 하신 사람들에 속하게 됩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It is the office of the understanding to hear the Word, and of the will to do it. To hear the Word and not to do it, is like saying that we believe when we do not live according to our belief; in which case we separate hearing and doing, and thus have a divided mind, and become of those whom the Lord calls “foolish” in the following passage:

 

24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4, 26) Whosoever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I will liken unto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a rock; but everyone that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not, I liken to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the sand (Matt. 7:24, 26).

 

이해에 속한 것들은 앞서 보인 것처럼 ‘물들이 내는 기는 것들’(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과 ‘땅 위의 새들’(the fowl upon the earth),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 있는 새들’(upon the faces of the expanse)로, 그리고 의지에 속한 것들은 여기 ‘땅이 내는 생물’(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과 ‘가축’(the beast)과 ‘기는 것’(the creeping thing), 그리고 ‘땅의 짐승’(the wild animal of that earth)으로 각각 가리키고 있습니다.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re signified—as before shown—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nd also by the “fowl upon the earth,” and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but those which are of the will are signified here by 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 and by the “beast” and “creeping thing,” and also by the “wild animal of that earth.”

 

해설

AC.44부터 창조의 여섯째 날이 시작됩니다. 앞의 다섯째 날에는 물고기와 새가 등장했고,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주로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했습니다. 이제 땅에서 생물과 가축과 짐승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초점이 의지에 속한 것들로 옮겨갑니다. 따라서 AC.44는 단순히 ‘아는 것에서 행하는 것으로 가야 한다’는 일반적인 교훈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해에 속한 것과 의지에 속한 것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람을 ‘땅’에 비유합니다. 땅에 씨가 먼저 뿌려져야 무엇인가를 낼 수 있듯이, 사람 안에도 먼저 ‘신앙의 지식’이 심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식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AC.44는 ‘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중요하니 지식은 별로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을 행하기 위해서도 먼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아야 하므로 신앙의 지식이 필요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들어오는 것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의지의 역할을 아주 간단하게 구별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쪽을 가리킵니다. 반면 ‘행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의지되고 삶으로 나타나는 쪽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AC.44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와 의지가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교리를 설명하고, 자신이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은 전혀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상태를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나뉜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때문에 마7:24,26이 인용됩니다. 여기서 AC.44의 목적은 ‘반석’과 ‘모래’ 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풀이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두 종류의 사람을 분명하게 대조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다른 사람은 똑같이 말씀을 ‘듣지만 행하지 않습니다.’ AC.44가 주목하는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함께 있느냐, 서로 분리되어 있느냐입니다.

 

따라서 ‘믿는다고 말하면서 믿는 대로 살지 않는 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실천력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에서는 어떤 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면서 의지에서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사람 안의 두 중요한 기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AC.44가 말하는 ‘나뉜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신 것을 스베덴보리가 바로 이 문맥에서 가져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창1:24에서 왜 갑자기 ‘땅은 생물을 내라’고 하는지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AC.44는 앞에서 설명했던 ‘물들이 내는 기는 것들’과 새들을 이해에 속한 것들이라고 하고, 이제 땅이 내는 ‘생물’, ‘가축’, ‘기는 것’, ‘땅의 짐승’을 의지에 속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즉 창조의 순서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이해에 속한 것들이 먼저 준비되고, 이제 의지에 속한 것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과정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해에 속한 것’과 ‘의지에 속한 것’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고 그것이 주님의 말씀임을 알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이해 쪽의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미워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보복하려는 마음을 억제하고 그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며 가능한 선을 행하려고 하는 것은 의지와 삶의 문제입니다. 앞의 이해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 것이 의지와 삶에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는 AC.44의 직접적인 예가 아니라,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설명입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을 단순히 ‘배운 것을 열심히 실천하면 된다’는 도덕 훈련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까지의 AC.39-43이 계속 강조했듯이 참된 생명의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통해 무엇을 믿고 행해야 하는지 배우고 실제로 그것을 행하지만, 그 안의 선과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 것이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 지금 설명되고 있는 과정입니다.

 

AC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여기쯤에서 ‘왜 이 책은 계속 선과 진리, 이해와 의지, 사랑과 신앙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사람이 무엇을 참이라고 이해하는가와 무엇을 선이라고 사랑하고 원하는가가 주님 안에서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창세기의 서로 다른 날과 서로 다른 피조물을 설명하면서도 이 관계가 계속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AC 전체를 읽는 데 중요한 질문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AC.44의 중심을 ‘지식보다 행함이 중요하다’라는 한 문장으로만 줄이면 부족합니다. 지식은 필요합니다. 이해도 필요합니다. 먼저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이해하는 데서 멈추면 이해와 의지가 분리됩니다. 말씀을 듣는 이해와 그것을 행하는 의지가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되어야 합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에서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단계, 곧 거듭남이 이해에 속한 것에서 의지와 삶에 속한 것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심화

1. 왜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가?

 

AC.44, 심화 1, 왜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가?

AC.44.심화1. 왜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 이 책은 처음부터 계속 선과 진리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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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 창1:24-25, ‘짐승’(beasts),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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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 창1:22-23,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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