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존버리즘’ 영상의 제목은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남자들 국제결혼 좀 그만해 - 국제결혼 때문에 분노하는 한국 여자들의 진짜 현실.’ 영상은 40대 중반의 지방 중소기업 직장인 남성이 한국에서 여러 차례 결혼 상대자로 선택받지 못하다가 베트남 파견근무 중 한 여성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결혼을 반대했던 세 여성, 곧 친누나와 결혼정보회사 매니저와 직장 여성 동료가 사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마지막에는 ‘국제결혼을 그만하라고 하기 전에 왜 이 남자들이 한국에서는 한 번도 선택받지 못했는지부터 물어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합니다.

 

영상이 던지는 문제에는 분명 생각할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결혼정보회사에서 ‘지방, 중소기업, 40대’라는 조건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상대 여성들이 그를 거절할 자유가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어느 순간부터 ‘한 사람’을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의 직장, 거주지역, 주택 소유 여부, 연봉, 나이 같은 조건표부터 읽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상에서 그는 자신의 전세보증금이 스스로 모은 돈이라고 설명하지만 상대방에게 돌아오는 말은 ‘그럼 결혼하면 대출부터 시작이네요’였습니다. 그 한마디에는 오늘날 결혼시장이 사람을 바라보는 한 단면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보다 ‘당신은 내 삶에 무엇을 제공할 수 있습니까?’가 먼저 묻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영상의 편을 그대로 들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여성들은 조건만 따지고 베트남 여성들은 사람 자체를 본다’고 결론 내린다면 영상 속 결혼정보회사가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다시 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개인을 ‘한국 여자’, ‘베트남 여자’라는 다른 조건표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영상이 보여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상이 구성한 몇 사람의 사례입니다. 그것을 ‘한국 여자들의 진짜 현실’ 전체로 확대할 근거는 이 자료 안에는 없습니다. 국제결혼에도 진실한 사랑이 있고 이해관계로 맺어진 결혼이 있으며, 국내결혼에도 조건 중심의 결혼과 깊은 인격적 사랑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렌즈가 물어야 할 것은 ‘어느 나라 여자가 더 좋은가?’가 아니라 ‘나는 배우자를 무엇으로 보고 있는가?’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상 속 린이라는 여성이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진 계기는 처음부터 결혼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직장에서 주인공이 잘못 작성한 주문서의 숫자 하나를 그녀가 발견하면서 서로의 능력과 성품을 알기 시작했고, 함께 일하고 식사하고 이야기하면서 관계가 자라났습니다. 더욱 인상적인 장면은 주인공이 한국의 18평 전세집을 영상통화로 보여 주며 ‘이게 지금 내 전부예요’라고 말했을 때입니다. 이전 만남에서 약점처럼 취급되었던 바로 그 집을 보고 린은 ‘둘이 살기에 딱 좋네요. 커튼만 바꾸면 돼요’라고 대답합니다. 이 장면이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는 베트남 여성이어서가 아닙니다. 한쪽은 ‘이것밖에 없습니까?’라고 보았던 것을 다른 한쪽은 ‘여기서 함께 시작할 수 있겠네요’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결혼애의 관점에서 보면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결혼은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획득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거래가 아니라 두 사람의 내면이 서로에게 열리고, 상대의 선을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점차 하나를 이루어 가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조건을 살피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직업, 경제력, 건강, 나이, 가족환경은 실제 결혼생활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조건을 보는 것’과 ‘조건으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지혜의 문제가 될 수 있지만 후자는 인간을 수단으로 바라보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영상에는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린의 아버지가 결혼을 앞둔 한국인 사위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한국에 가면 내 딸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돈을 얼마나 벌며 집이 있는지를 먼저 묻지 않고, 자기 딸이 결혼 후에도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주인공은 ‘린 씨가 원하는 일을 하게 돕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영상의 서술에 따르면 결혼비용도 두 사람이 나누어 부담합니다. 이 대목은 국제결혼을 바라볼 때 특히 중요합니다. 참된 혼인은 ‘한 나라의 남자가 다른 나라의 여자를 데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각자의 자유와 인격을 가진 채 함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상 속 국제결혼을 둘러싼 편견 역시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친누나는 ‘국적 따면 끝이야’라고 말하고, 직장에서는 ‘1,500 주고 데려온다’, ‘국적 받으면 바로 이혼한다’는 소문이 돕니다. 물론 실제 국제결혼에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 경제적 격차, 체류자격 문제 등 국내결혼과 다른 현실적인 위험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살피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직 만나 보지도 않은 한 사람을 국적 하나만으로 ‘돈 받고 온 여자’, ‘국적을 따면 떠날 여자’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분별이 아니라 편견입니다. 한 인간의 내면을 국적으로 대신 판단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친누나가 결혼을 반대한 이유가 뒤늦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영상에 따르면 누나는 베트남 여성 자체가 싫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미혼이던 남동생이 어머니를 주로 돌봐 왔는데, 동생이 결혼하면 그 부담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결국 누나는 ‘국제결혼’이라는 명분 뒤에 자신의 부담과 두려움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인간의 겉으로 드러난 주장과 그 주장을 움직이는 내적 동기가 항상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는 저 사람을 걱정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내 편안함, 내 이익, 내 체면이 위협받는 것이 싫어서 반대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결혼정보회사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매니저는 국제결혼은 문화가 달라 후회한다며 주인공을 말렸지만, 회사 홈페이지에는 ‘베트남 국제결혼 전문 상담’ 상품이 걸려 있었다고 영상은 말합니다. 이것이 영상의 서술대로라면 ‘국제결혼이 위험하다’는 원칙 자체보다 자기 회사를 통한 거래인가 아닌가가 판단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기에서도 문제는 국제결혼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프로프리움(proprium)’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마치 객관적인 원칙인 것처럼 포장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영적 분별에서는 ‘저 말이 옳은가?’뿐 아니라 ‘나는 왜 이 말을 하고 있는가?’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직장 동료 소영의 경우 영상은 더 노골적인 해석을 내놓습니다. 과거에는 지방 중소기업에 다니며 전세에 산다는 이유로 주인공을 배우자로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 몇 년 뒤 ‘괜찮은 사람은 다 베트남, 일본 가서 결혼한다’, ‘남자들이 그렇게 다 외국으로 가 버리면 여기 남은 여자들은 어떡하느냐’고 말합니다. 영상은 이를 ‘우리가 거절한 남자들이 다른 데서 행복해지지 말라’는 심리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렌즈는 한 걸음 멈춰야 합니다. 그 해석은 영상 제작자의 해석이지 모든 국제결혼 비판자나 모든 미혼 여성의 내면을 설명하는 사실은 아닙니다.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은 주님만 아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영상이 제시한 말과 행동의 모순을 살피는 데까지입니다.

 

그럼에도 이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적 문제는 있습니다. 그것은 ‘소유하지 않았으면서도 소유권을 주장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사람이 다른 곳에서 사랑받고 행복해졌을 때 불편해지는 마음이 실제로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애에 더 가깝습니다. 사랑은 ‘내가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애는 ‘나는 당신을 원하지 않지만 당신이 나 없이 행복해지는 것도 싫다’는 모순된 감정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남녀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 역시 자신이 거절했던 여성이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며 같은 질투와 소유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국 여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프로프리움의 문제입니다.

 

앞서 마태복음 19장을 통해 살펴본 ‘둘이 한 몸’이라는 말씀과 연결하면 이번 영상은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조건 묶음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할 사람을 ‘연봉 얼마’, ‘집 몇 평’, ‘직업 무엇’, ‘나이 몇 살’, ‘국적 어디’로 분해하는 순간 우리는 아직 ‘한 사람’을 보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조건은 필요하지만 조건들의 합계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한 인간은 그런 외적 조건보다 훨씬 깊은 존재입니다.

 

이것은 국제결혼을 생각하는 남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한국 여성은 조건을 따지니 순종적인 동남아 여성을 만나겠다’는 식으로 국제결혼을 선택한다면 그것 역시 참된 결혼애와 거리가 멉니다. 그런 사람은 한국 여성을 조건으로 판단하는 문화를 비판하면서 자신도 외국 여성을 ‘젊음, 순종, 저렴한 결혼비용’ 같은 다른 조건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경제적·연령적 격차가 큰 국제결혼에서는 상대방의 자유가 실제로 존중되고 있는지 더욱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영상 속 린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도 ‘베트남 여자라서 순종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뛰어난 한국어 능력과 전문성을 갖추었으며, 한국에 온 뒤에도 일을 계속하고 싶어 했고, 남편 역시 그것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영상에서 그녀는 수동적으로 ‘데려온 여성’이 아니라 자기 선택을 하는 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국적 취득이나 새 아파트 당첨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집의 보일러가 고장 났을 때 린이 서비스센터에 연락하고 전기장판과 핫팩을 들고 찾아가 밤까지 곁을 지키는 장면, 그리고 가족센터에서 다른 베트남 결혼이민자들의 병원과 관공서 일을 통역해 주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한 사람의 가치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가’가 아니라 ‘어떤 선을 사랑하고 실제 삶에서 행하는가’를 통해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사람의 영적 품질을 드러내는 것은 국적도 학력도 재산도 아닌 그 사람이 사랑하는 선과 그것을 삶으로 행하는 방식입니다.

 

동시에 이 장면은 앞서 살펴본 ‘이혼, 책임, 자유 그리고 주님의 섭리’와도 묘하게 연결됩니다. 참된 혼인은 한쪽이 다른 쪽의 삶을 대신 살아 주는 관계도 아니고, 한쪽이 다른 쪽을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는 관계도 아닙니다. 서로 독립된 자유로운 두 사람이 상대의 선을 기뻐하며 점차 하나를 이루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린의 아버지가 ‘내 딸이 한국에서도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은 것은 단순한 취업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결혼한 뒤에도 내 딸은 한 사람으로 존중받을 것인가?’라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번 ‘존버리즘’ 영상의 제목인 ‘국제결혼 때문에 분노하는 한국 여자들의 진짜 현실’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조금 다른 질문으로 바뀝니다. ‘왜 한국 남자들이 국제결혼을 하는가?’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는 결혼할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한국 여자들은 왜 그러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사람을 조건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주인공에게 ‘지방, 중소기업, 40대’라는 세 개의 조건표가 붙었습니다. 직장 사람들은 린에게 ‘베트남 여자, 돈 받고 온 여자, 국적 따면 떠날 여자’라는 또 다른 조건표를 붙였습니다.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양쪽 모두 한 인간을 만나기 전에 먼저 ‘라벨’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실제로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한 곳에는 그런 라벨이 없었습니다. 주문서에 잘못 붙은 ‘0’ 하나를 발견해 준 사람, 자기의 실수를 고맙게 받아들인 사람, 야근 뒤 함께 쌀국수를 먹은 사람, 작은 전세집을 보여 주며 ‘이게 내 전부’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 그리고 그 집을 보고 ‘둘이 살기에 딱 좋네요. 커튼만 바꾸면 돼요’라고 대답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참된 결혼애는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내 조건에 얼마나 맞습니까?’가 아니라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묻는 데서 말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어떤 선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마지막에 남겨야 할 질문은 ‘한국 여자와 결혼할 것인가, 외국 여자와 결혼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국적을 바꾼다고 자기애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국제결혼을 한다고 참된 결혼애가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는 한국인과 베트남인이라는 구별보다 훨씬 깊은 구별이 있습니다. 상대를 이용하려는 사랑인가, 상대의 선을 기뻐하는 사랑인가. 상대를 내 삶의 조건으로 보는가, 주님 앞에 선 하나의 영혼으로 보는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번 영상에서 발견하는 핵심은 그래서 국제결혼의 승리도, 한국 여성에 대한 비판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조건표’로 바꾸어 버리는 우리의 시선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람을 조건으로 평가하기 시작하면 한국 남성도 상품이 되고 한국 여성도 상품이 되며 베트남 여성도 상품이 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보기 시작하면 결혼은 시장에서 다시 관계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을 향해 가는 가장 첫걸음인지도 모릅니다. 한 몸이 되기 전에 먼저 상대를 ‘한 사람’으로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혼을 둘러싼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다 보면 결국 피하기 어려운 질문 하나와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을 더 이상 붙들어 줄 수 없어 이혼했는데, 그 사람이 그 뒤 무너져 버린다면 떠난 배우자는 어디까지 책임이 있는가?’ 더 극단적으로는 이혼 후 상대방의 인생이 파탄 나고 절망 끝에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까지 생긴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그렇다면 끝까지 혼인의 울타리를 지켜 주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더 어려운 질문이 기다립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의 섭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혼인의 울타리를 지키는 것’과 ‘배우자를 대신 살아 주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존버리즘’ 영상의 첫 사례에서는 결혼 전에는 어머니가 딸의 생활을 대신 책임졌고, 결혼한 뒤에는 남편이 사실상 그 역할을 이어받았습니다. 아내의 어머니 자신도 ‘어릴 때부터 내가 다 해줘 버릇해서 그런 거야’라고 말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해야 할 몫을 계속 대신 감당했고, 심지어 자신이 심하게 아픈 상황에서도 집안일을 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남편이 ‘혼인을 지킨다’는 이유로 평생 아내의 몫까지 대신 감당한다면 외적인 결혼은 유지될지 몰라도, 아내가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사용하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기회는 오히려 줄어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떠나지 않는 것=사랑’, ‘떠나는 것=버림’이라는 단순한 등식부터 다시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유’가 중요해집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지만,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제거하여 선을 강요하시지는 않습니다. 강제로 만들어진 선은 그 사람 자신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전능하신 주님조차 인간이 악을 선택할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한 배우자가 다른 배우자의 자유로운 선택이 낳는 모든 결과를 평생 대신 막아 주어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결과를 대신 치워 주는 사랑’이 오히려 상대의 악이나 무책임을 지속시키는 조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장 아픈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배우자가 더 이상 파괴적인 관계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혼했습니다. 그런데 남겨진 배우자의 삶이 무너지고, 극단적인 경우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이때 시간을 거꾸로 돌려 ‘결국 이렇게 되었으니 이혼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론 내리면 뜻밖의 문제가 생깁니다. 한 사람의 생존에 대한 최종 책임을 다른 한 사람에게 무기한 부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당신이 나를 떠나면 나는 죽겠다’는 말이 성립하는 순간 상대방은 평생 떠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랑에 의한 결합이 아니라 두려움과 죄책감에 의한 결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혼했으니 이제 상대가 어떻게 되든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체어리티’의 문제가 들어옵니다. 체어리티는 혼인관계를 유지하느냐 끝내느냐의 문제보다 더 깊습니다. 이혼했더라도 상대방이 실제로 극단적 선택의 위험에 있다면 그 위험을 외면하지 않고 가족이나 적절한 도움에 연결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생명을 보호하려 노력하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다시 배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 사람의 생명을 염려하는 것’과 ‘그 사람의 배우자로서 다시 결합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전자는 체어리티의 요구가 될 수 있지만, 후자가 언제나 의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19장 8절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주님의 창조 질서를 보여 줍니다. 주님이 뜻하신 혼인은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서로의 선과 영원한 행복을 기뻐하는 결합입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라는 말씀은 인간의 악이 그 창조 질서를 실제로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단지 ‘어떤 일이 있어도 법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하라’는 뜻으로만 읽으면 인간의 ‘완악함’이 만들어 내는 현실을 충분히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세 사례에서도 결정적인 문제는 생활습관의 차이나 성격 차이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나는 변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특히 두 번째 사례에서 아내는 상담자에게 ‘저는 화낸 적 없는데요. 말을 좀 세게 할 뿐이에요’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분노와 모욕적인 언어가 배우자와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지속되면 회개의 출발점 자체가 사라집니다. 회개는 ‘내 안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주님 앞에서 보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만 찾는다면 사람은 자신의 악을 볼 기회를 잃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먼저 이혼장을 냈느냐’만으로 누가 혼인을 깨뜨렸는지를 판단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혼인의 ‘외적 해체’와 ‘내적 해체’를 구별해야 합니다. 법원에서 이혼 판결이 난 날이 반드시 혼인이 처음 깨진 날은 아닙니다. 상대를 오랫동안 멸시하고 지배하고 이용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계속 떠넘기면서도 돌이키기를 거부한다면 ‘둘이 한 몸’이라는 내적 질서는 법적인 이혼보다 훨씬 전부터 훼손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혼인관계를 계속 유지한다고 해서 내적인 혼인이 반드시 보존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집에서 수십 년을 살아도 서로를 증오하고 이용하고 지배한다면 ‘외적인 혼인의 울타리’와 ‘내적인 혼인의 결합’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섭리’의 문제가 대단히 중요해집니다. 주님의 섭리를 ‘파국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나쁜 일을 미리 막아 주시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이혼 후 한 사람의 삶이 무너지거나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는 경우 섭리는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계셨다면 왜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에게 자연계에서 아무 고통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제거해서라도 당장의 파국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섭리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악을 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악의 가능성과 그 결과가 ‘허용’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혼 뒤 삶이 무너진 사람에게도 섭리는 계속되고 있을까요? 그렇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혼은 그 사람에게 생애 최대의 파국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에게 어떤 영적 의미를 갖게 될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평생 다른 사람 탓만 하던 사람이 더 이상 탓할 사람이 없어졌을 때 처음으로 ‘혹시 내게도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앞의 첫 사례에서도 남편이 떠나자 아내는 며칠 동안 스스로 집을 치웠습니다. 비록 영상에서는 결국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으로 묘사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 해 주지 않는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로 이어질 수도 있고 다시 책임전가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선택까지 배우자가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섭리가 있다면 왜 이혼을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을 조금 다르게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 이혼과 그 이후의 고통 가운데서도 두 사람을 어떻게 각각 이끌고 계시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떠난 사람에게는 원망과 죄책감, 혹은 ‘나는 옳았고 상대방만 잘못했다’는 자기의(自己義)에 빠지지 않는 것이 새로운 거듭남의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배우자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이혼이라는 사건이 두 사람에게 서로 다른 영적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섭리는 사건 하나를 없애 버리는 방식으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건 속에서도 각 사람의 영원한 선을 향하여 계속 역사합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한쪽은 ‘하나님, 제가 이렇게 오래 참았는데 왜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까?’라고 할 수 있고, 다른 쪽은 ‘하나님, 왜 저 사람이 나를 떠나게 두셨습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원망 속에는 공통된 전제가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자유를 움직여 주셔야 한다’는 기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쪽을 강제로 붙들어 놓지도 않으시고 다른 한쪽을 강제로 회개시키지도 않으십니다. 두 사람 모두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대하십니다. 이것이 때로는 섭리를 잔인하게 느끼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자유 때문에 사랑과 회개와 거듭남도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물론 이 논리를 실제 이혼을 너무 쉽게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가 내 성장을 방해한다’, ‘상대가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우리의 내적 결합은 이미 끝났다’는 말은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9장의 출발점은 여전히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입니다. 먼저 화해하고, 참고, 용서하고, 상담하고, 자신부터 돌아보며 가능한 회복의 길을 충분히 찾아야 합니다. 다만 그렇게 했는데도 한쪽이 지속적으로 파괴적인 악을 행하면서 변화 자체를 거부한다면, ‘혼인을 지킨다’는 이름으로 다른 한 사람에게 그 악의 결과를 무기한 떠맡기는 것이 과연 주님이 말씀하신 혼인의 본뜻인가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결국 이 문제는 ‘이혼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보다 훨씬 깊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상대의 모든 결과를 대신 치워 주는 것이 사랑일까요? 아니면 때로는 ‘나는 여전히 당신의 선을 원하지만 이제 당신의 몫을 대신 살아 주지는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사랑일까요? 상대가 넘어지지 않도록 평생 붙잡아 주는 것만이 체어리티일까요? 아니면 때로 손을 놓음으로써 그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두 발로 주님 앞에 서게 하는 것도 체어리티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습니다. ‘놓아주는 것’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당신과 더 이상 부부로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망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두 문장은 동시에 참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여기에서 ‘혼인의 울타리’와 ‘체어리티의 울타리’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혼인의 울타리는 끝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의 울타리까지 반드시 함께 무너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로서는 헤어져도 한 인간의 영원한 선을 바라며 미워하지 않고, 위험에 처했을 때 가능한 도움을 외면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 사람의 자유와 책임까지 빼앗아 대신 살아 주지는 않는 것, 바로 그 좁고 어려운 길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더욱 슬프고 깊게 들립니다. 주님의 뜻은 애초부터 ‘어디까지 견디다가 이혼해도 되는가?’가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서로의 영원한 선을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완악함이 그것을 깨뜨렸을 때에도 주님의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혼인이 실패했다고 해서 섭리가 실패한 것이 아니며, 배우자를 더 이상 대신 살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이 반드시 끝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주님은 두 사람을 각각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 다시 만나시며, 각자가 자기 몫의 악과 책임을 보고 돌이키도록 서로 다른 길에서 계속 이끌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질문은 ‘끝까지 혼인의 울타리를 유지했어야 하는가?’에서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가?’로 바뀝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해야 하므로 그 사람의 모든 선택과 그 결과까지 내가 끝까지 대신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다르게 답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과 같은 말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며, 상대의 책임을 영원히 대신 짊어짐으로써 그 사람의 회개 가능성까지 가려 버리지 않습니다. 혼인의 울타리가 무너진 뒤에도 체어리티는 남을 수 있고, 인간관계가 끝난 자리에서도 주님의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사랑이 할 수 있는 일과 오직 주님께 맡겨야 하는 일이 비로소 구별되기 시작하는지도 모릅니다.

 

 

 

SY.111, 존버리즘, ‘5년 안에 100% 이혼하는 최악의 여자 유형 3가지’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68 심화

‘리메인스가 없으면 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

 

AC.468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리메인스가 무엇이기에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이처럼 직접 연결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리메인스를 단순히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이나 과거에 배운 종교적 지식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저장하고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과 연결된 순진함, 사랑, 자비, 체어리티 등의 상태입니다. 특히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히기 전, 부모를 신뢰하고 이웃에게 호의를 품으며 주님과 천국에 관한 선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주님은 그러한 상태들을 사람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람은 나중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주님은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리메인스는 사람이 스스로 쌓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영적 저축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내면에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사람이 성장하면서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 자신의 것에 깊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으로는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과 거짓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만일 사람 안에 이것과 다른 근원에서 온 것이 전혀 없다면, 주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실 접점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 안에는 사람이 한때 받아들였던 선과 진리, 순진함과 체어리티의 상태가 있습니다. 주님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바로 이것들을 사용하여 사람을 자기중심적인 생명에서 돌이키고 선과 진리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리메인스가 구원한다는 말은 리메인스 자체가 주님과 별도로 어떤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리메인스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주님께서 친히 사람 안에 보존하신 것이며, 훗날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사용하시는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의 교리는 결국 인간의 공로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주님의 선행하시는 자비와 섭리에 관한 교리입니다. 사람이 아직 자신의 거듭남을 생각하지도 못하던 때부터 주님은 이미 훗날 그를 살리실 것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주님은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의지와 이성으로 받아들여 마치 자기 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리메인스는 이러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도록 사람의 내면에 보존된 천국적인 기반이 됩니다. 악과 거짓의 영향만 있고 그 반대편에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상태가 전혀 없다면 참된 영적 선택과 거듭남의 가능성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AC.468이 개인의 리메인스와 교회 전체의 리메인스를 나란히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것처럼, 인류 전체 안에서도 주님은 참된 교회와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언제나 어떤 사람들을 남겨 두십니다. 홍수 직전의 ‘노아’가 바로 그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온 땅이 부패했다고 표현될 만큼 교회가 황폐해졌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마지막 리메인스가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고대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개인의 거듭남과 인류 가운데 교회가 다시 일어나는 일이 같은 영적 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 ‘남은 자’가 반복해서 등장하고, ‘십’과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표상합니다. 사6:13의 모든 것이 베임을 당한 뒤에도 남아 있는 ‘거룩한 씨’, 암5:3의 백 명 가운데 남은 열 명, 창18:32의 소돔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말씀은 모두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것’이라는 원리를 보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의 크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남겨 두신 선과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가 없으면 영원히 멸망한다’는 AC.468의 말씀은 사람을 두렵게 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얼마나 철저하게 주님의 선행하시는 역사에 의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언제 어떤 선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이 자신의 내면 어디에 보존되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고 계시며, 사람이 훗날 거듭남의 길에 들어설 때 그것을 불러내어 사용하십니다.

 

이 점에서 ‘노아’는 우리 각 사람의 거듭남을 비추는 매우 깊은 표상이 됩니다. 우리 안의 상태가 아무리 황폐해지고 선과 진리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은 인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지키시고 때가 되었을 때 사용하시며,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영적 생명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는 단순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시 주님께 돌아가고 거듭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그의 내면에 준비하고 보존해 두신 생명의 씨앗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AC.468은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AC.468 심화)

 

 

 

AC.468, 창5, ‘노아는 교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리메인스를 가리킨다’

속뜻 AC.468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05 심화

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에서 가장 강하게 들리는 문장은 아마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인간에게는 의지 자체가 없으며, 우리가 무엇인가를 원하고 선택하고 결심하는 것은 모두 탐욕일 뿐이라는 뜻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또한 거듭난 사람이 선을 원하고 행하는 것조차 실제로는 그의 의지가 아니라는 뜻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AC.105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주제는 인간에게 선택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생명나무’가 왜 동산 ‘가운데’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동산 가운데’를 속 사람의 의지라고 설명하고, 말씀에서는 이 의지를 ‘마음’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말해지기는 하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으로서 사람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단순히 일상적인 선택이나 결심의 능력만을 가리키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맥의 초점은 선을 사랑하고 원하는 생명의 중심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선한 의지의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반대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자기 의지라고 부를 때, AC.105는 그것을 ‘탐욕’이라고 부릅니다.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그 목적은 선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두 가지 반대 방향의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지도 없으므로 인간은 아무것도 선택하거나 행하지 않는다’는 식의 수동적인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선을 원했으므로 그 선은 나에게서 나왔다’는 자기 공로의 이해입니다. AC.105의 논지는 어느 쪽도 아닙니다. 이 번호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생명나무’가 중요해집니다. AC.105는 생명나무를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한 뒤, 마지막에는 그것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다’는 강한 표현만 따로 떼어 놓으면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선언처럼 보이지만, 전체 문맥에서 보면 강조점은 인간의 무가치함보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05가 보여 주는 주님의 모습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네 안에서 선한 의지를 만들어 내어 그것으로 내게 오라’고 요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믿고 선을 원할 수 있게 하는 생명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이 생명을 만들어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인간이 사랑하고 믿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중심에 있는 ‘생명나무’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일까요? AC.105 하나만으로 인간의 자유와 의지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을 완성해서는 안 됩니다. 이 번호가 직접 다루는 범위에서는 인간의 모든 선택과 책임의 구조를 설명하기보다, 참된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적어도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고백과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결국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다’는 말을 이해하는 열쇠는 그 바로 뒤에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주님의 자비이며,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온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서 선의 독립적인 근원을 거두어 가는 까닭은 인간을 생명 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생명의 참된 근원을 주님께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에덴동산 한가운데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생명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자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105 심화 1)

 

 

 

AC.105, 창2:9, ‘동산 가운데의 생명나무, 의지의 중심에 있는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AC.30 [3]의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라는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중요한 원리를 아주 압축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그것들’은 바로 앞에서 말한 사랑과 신앙이며, 특히 중요한 표현은 ‘in its recipient objects’, 곧 ‘빛을 받아들이는 대상 안에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체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연적인 태양빛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태양빛이 물이나 나뭇잎, 창문이나 돌에 비치면 빛은 각각의 대상 안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빛 자체의 근원은 아닙니다. 빛의 근원은 태양이고, 대상은 그 빛을 받아 그것이 나타나게 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의지와 이해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비유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사람 안에서 사랑은 의지에,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은 ‘내가 사랑한다’, ‘내가 진리를 이해한다’, ‘내가 이것을 믿는다’고 느낍니다. 실제로 그것들은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서 일어나며, 사람은 자유 가운데 그것을 받아들이고 행합니다. 그러나 AC.30이 강조하는 것은 그 생명의 최초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라고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인다’는 말은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용체는 실제로 받아들이며, 사람은 자유 가운데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에서도 사람은 생각하고 선택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만 그 모든 과정에서 참된 사랑과 참된 신앙의 생명 자체를 자기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핀 AC.29의 ‘생명 없는’ 상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사람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면서도 처음에는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행하고 선택하면서도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 자신의 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근원을 올바르게 구별하게 합니다.

 

실제 삶에서도 이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기로 결정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는 실제로 상황을 판단하고, 도울 것을 선택하며, 자신의 손과 시간과 재물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참된 선, 곧 이웃을 위하는 사랑의 생명까지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냈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태양빛이 물체 안에 실제로 나타나면서도 그 빛의 근원이 그 물체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AC.30 [3]의 이 비유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가짜이고 주님만 모든 것을 하신다’는 식의 인간 부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가르칩니다. 의지와 이해는 사랑과 신앙을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수용체이며,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그 수용체 안에 사랑을 일으키시고 진리로 비추십니다. 이것이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라는 비유의 핵심입니다. (AC.30 심화 1)

 

 

 

AC.30, 창1:14-17(AC.30-37), ‘사랑과 신앙의 광명체 : 사랑으로 생명을 얻는 신앙의 넷째 날’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50

인간이 자신의 proprium 안에 있을 때, 곧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길 때의 상태는 ‘깊은 잠’(deep sleep)에 비유되며, 실제로 고대인들은 그것을 깊은 잠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에서도 그러한 사람들에 관하여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셨다’(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고 하며(사29:10), 또 그들이 잠을 잔다고 합니다. (렘51:57) The state of man when in his own, or when he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compared to “deep sleep,” and indeed by the ancients was called deep sleep; and in the Word it is said of such that they have “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 (Isa. 29:10), and that they sleep a sleep (Jer. 51:57).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사29:10)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렘51:57)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 누구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영계에서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자기들의 proprium 외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자기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완고하게 주장하던 악한 영들도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고, 마침내 자기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의 proprium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알도록 허락되었으며, 제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분명하게 퍼셉션하도록 허락되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흘러드는지도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짓된 것 안에 있으며,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음으로써 모든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킵니다. 만일 그의 믿음이 사물의 실제 진상과 일치한다면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That man’s own is in itself dead, and that no one has any life from himself, has been shown so clearly in the world of spirits, that evil spirits who love nothing but their own, and obstinately insist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were convinced by sensible experience, and were forced to confess that they do not live from themselves. For a number of years I have been permitted in an especial manner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and it has been granted to me to perceive clearly that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 but that every idea of thought flows in, and sometimes I could perceive how and whence it flowed in. 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therefore in what is false, and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belief were 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

 

해설

AC.150은 AC.147에서 ‘깊은 잠’(deep sleep)으로 설명했던 상태를 다시 받아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밝힙니다. 인간이 proprium 안에 있으면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상태가 바로 깊은 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자신이 새롭게 만들어 낸 비유만이 아니라 고대인들도 그렇게 표현했으며, 말씀에도 깊은 잠이라는 표현이 같은 의미를 담아 사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2:21에서 아담에게 깊은 잠이 임한 것은 속뜻에서 단순한 육체적 수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설명은 AC.147보다 한층 분명합니다. AC.147에서는 사람이 깊은 잠과 같은 상태에 있을 때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0에서는 그 상태를 ‘거짓된 것 안에 있는’ 상태라고 명시합니다. 인간이 실제로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경험 자체가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거짓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의 AC.149에서 인간 안에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온다고 했기 때문에 이 의미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 사실이 영계에서 감각적인 경험을 통하여 확인되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자기들의 proprium만을 사랑하고 자기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완고하게 주장하던 악한 영들조차 경험을 통하여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한 철학적 추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영계에서 관찰하고 경험한 것으로 이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자신의 증언이라는 사실과, 그 증언을 바탕으로 그가 제시하는 교리적 설명을 구별하면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경험을 직접 말합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인간의 proprium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특별한 방식으로 알도록 허락되었고,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으며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분명하게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그 생각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흘러드는지도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조심스럽게 기다려 온 ‘생명과 생각의 근원’ 문제에 대해 AC 본문 자체가 처음부터 상당히 강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생각의 독립적인 원천이 아니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주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러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모든 생각과 행동에 책임도 없는가?’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AC.150의 마지막 문장이 오히려 반대 방향을 보여 줍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사람은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킨다고 합니다. 따라서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의 책임을 없애기 위한 가르침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무엇을 자기에게 귀속시키는가 하는 문제가 함께 등장합니다. 다만 자유와 책임, 유입과 귀속의 관계가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현재 번호 하나만으로 모두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문장은 매우 강하기 때문에 현재 독자가 지나치게 확대해서 읽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AC.150이 직접 말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으며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곧바로 ‘그러므로 인간에게 사고 능력도 없고 판단도 없으며 모든 생각은 외부 존재가 강제로 집어넣는 것이다’라고 바꾸어 말하면 본문보다 나아갑니다. 앞의 AC.149에서도 인간은 ‘생명의 기관’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그 기관의 성질에 따라 생명의 애정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생명의 근원은 아니지만,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와 성질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특별히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으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키지만, 자신의 믿음이 ‘사물의 실제 진상’과 일치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거듭남의 중요한 방향 하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깨어난다는 것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는 존재라고 느끼며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실제 질서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147에서 ‘이것이 거짓임을 알기 시작할 때’ 잠에서 깨어난다고 했던 말이 AC.150에서 한층 구체적인 내용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AC.147-150은 하나의 매우 긴밀한 흐름을 이룹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있고, 그 상태에서는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제 AC.150은 생각 역시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흘러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실제 질서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키게 됩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의 실제 질서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150)

 

 

 

AC.151, 창2:22, ‘여자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AC.151-15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bygrace.kr

 

AC.149, 창2:21, ‘죽어 있는 인간의 proprium과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9말씀에서도 인간의 proprium은 ‘뼈들’(bones)로 의미되며, 실제로는 주님에 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7 심화

1.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에는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것들은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천적인 것이든 모두 그곳에 ‘기억 지식’(scientifica)으로 머물며,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표현은 짧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배우고 기억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단지 기억 속에 쌓여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거듭남의 과정에서 주님에 의해 사용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거기에서’라는 말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장의 흐름상 ‘거기’는 속 사람 안에 있는 어떤 별도의 영적 저장소가 아니라 바로 앞에서 말한 ‘겉 사람의 기억’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뿐 아니라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라도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가면 그곳에서는 기억 지식으로 머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어린 시절에 들었던 말씀이나 부모와 교사에게 배운 선한 가르침, 훗날 읽고 배운 성경의 진리들이 오랫동안 기억 속에 머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했거나 실제 삶과 연결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훗날 삶의 어떤 상황에서 그 말씀이 다시 떠오르고, 이전에는 단순한 지식이었던 것이 자신의 삶을 비추는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AC.27의 표현을 실제 삶에 적용해 본다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특정한 기억이 떠오르는 모든 현상을 곧바로 ‘주님께서 불러내셨다’고 판정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억 지식’ 자체가 곧 영적 생명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많이 기억하며, 선과 진리에 관한 말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사람이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AC.27은 오히려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조차 겉 사람의 기억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그곳에서 기억 지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기억 속에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와 그것이 실제로 사람의 의지와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가는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억 지식이 하찮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외적으로 배우고 기억해 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이후 거듭남 가운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읽고 배우고 기억하는 일, 선과 진리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들이 기억 속에 들어갈 당시에는 단순한 지식처럼 보일 수 있지만, AC.27은 그것들이 그곳에 머물다가 나중에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기억은 거듭남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 안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은 주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데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이 표현을 리메인스(remains)와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및 그와 관련된 상태들을 가리키며, 인간의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AC.27에서 직접 말하는 것은 ‘속 사람의 리메인스 저장소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의 기억에 저장되어 기억 지식이 된 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는’ 것입니다. 두 주제 사이에 더 넓은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AC.27 한 문장만으로 둘을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이것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불러내시는 것일까요? 천사나 선한 영들을 통해서인지, 퍼셉션이나 양심을 통해서인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인간이 영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천사와 영들의 매개가 있다는 사실, 또한 퍼셉션과 양심의 서로 다른 상태들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러나 AC.27은 여기서 그 작동 방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 문장을 근거로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기억 지식을 꺼내신다’거나 ‘양심을 통하여 리메인스를 활성화하신다’는 식의 일정한 메커니즘을 확정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설명이 됩니다.

 

오히려 AC.27에서 확실하게 붙들어야 할 것은 더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사실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은 그곳에 기억 지식으로 머물며, 그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기억과 생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거듭남의 생명과 질서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과 진리를 배우고 기억하는 일은 그 자체가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일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받아들여 기억 속에 간직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라는 표현의 중심은 기억의 세부적인 작동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27의 중심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기억 지식으로 모여 ‘바다’를 이루고, 그곳에 머물러 있던 것들이 이후 주님에 의해 사용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사람이 배운 지식 자체를 영적 생명으로 착각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주님께서 그 지식들을 거듭남 가운데 쓰실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기억 지식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며,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AC.27 심화 1)

 

 

 

AC.27, 창1:9, ‘물이 모이고 땅이 드러남 : 기억 속에 모인 진리와 겉 사람의 준비’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5 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사42:3)

 

AC.25에서 스베덴보리는 사42:3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를 인용하면서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원리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 각각에 별도의 세밀한 상응을 붙이는 것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의 오류를 ‘꺾지’ 않으시고 욕정을 ‘끄지’ 않으시며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굽히신다’는 AC.25 자체의 설명입니다. 이 표현은 주님께서 아직 불완전한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거듭나게 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거듭남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순수한 선과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면서도 자기 생각을 고집할 수 있고, 선을 행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을 수 있으며, 주님을 찾으면서도 자기에게 돌아올 유익을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생각과 의도에는 감각에서 오는 착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정, 이미 굳어진 습관과 잘못된 판단들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그런 것들이 있다는 이유로 사람의 현재 상태 전체를 한꺼번에 부수고 전혀 다른 상태를 강제로 만들어 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AC.25가 말하는 ‘굽히심’은 바로 여기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그를 이끄십니다. 아직 낮은 동기가 섞여 있는 상태에서도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시며, 그 과정에서 점차 무엇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고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인지를 분별하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자기 유익 때문에 선을 행하던 사람이 차츰 이웃의 유익을 생각하게 되고, 처음에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진리를 말하던 사람이 차츰 진리 자체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말하게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사람의 현재 상태에서 시작하시되 그 상태에 그대로 머물게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굽힌다’는 말을 ‘오류 자체가 점차 진리가 되고 욕정 자체가 점차 선한 사랑으로 변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을 잘 다듬으면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사랑을 정화하면 그대로 천국적 사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오류와 욕정의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도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자유와 수용 능력에 따라 점차 거짓에서 진리로, 악한 사랑의 지배에서 선한 사랑의 질서로 방향을 바꾸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굽힘’은 악을 선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을 선과 진리 쪽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섭리적 역사입니다.

 

이 점에서 AC.24와 AC.25는 매우 긴밀하게 이어집니다. AC.24에서는 사람이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과 같은 자기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아르카나가 제시되었습니다. AC.25에서는 사42:3을 통하여 바로 그 원리가 말씀 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이미 완전해진 뒤에야 그를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자기 자신의 것들 속에 있는 바로 그 상태에서부터 그를 붙드시고 거듭남을 진행하십니다.

 

따라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는 말씀을 단순히 ‘주님은 온유하시다’는 위로의 말씀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AC.25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실제 거듭남의 방식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시며, 아직 혼합되고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질서 안에서 이끄십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현재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는 데 있지 않고, 마침내 사람 자신의 것에서 나온 것으로 여겼던 삶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질서 아래 놓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AC.25에서 말하는 ‘꺾고 끄는 대신 굽히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입니다. (AC.25 심화 1)

 

 

 

AC.25, 창1:6-7, ‘하늘과 땅을 펴심 : 파괴가 아니라 굽힘으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땅을 펼치고 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7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의 ‘혼돈’, ‘공허’, ‘흑암’을 자신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속 사람이나 거듭남,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한 채 지낼 수 있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을 생각하면 ‘그 사람의 속 사람을 비출 빛을 조금이라도 일찍 켜 줄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적 생명을 염려하는 데서 나오는 매우 실제적인 질문입니다.

 

먼저 AC.17의 표현을 정확히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혼돈’은 선이 없는 상태이고, ‘공허’는 진리가 없는 상태이며, ‘흑암’은 주님 신앙과 영적, 천적 삶에 대한 어리석음과 무지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어떤 사람이 교회 용어나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모르기 때문에 곧 영적으로 완전히 버려진 상태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주님께서 그 사람의 내면에서 보존하고 준비하시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후 AC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리메인스’가 바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경험하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그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랑받고 사랑했던 경험, 순진함,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진실을 기뻐했던 순간처럼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것들이 사람 자신도 모르는 깊은 곳에 간직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존하십니다. 훗날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 들어갈 때 주님께서는 이러한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여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신앙 지식의 정도만으로 그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지금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빛을 앞당겨 켜 줄’ 수 있을까요? 엄밀히 말하면 빛 자체를 켜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영적 빛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 사람을 직접 열 수도 없고, 어떤 진리를 강제로 이해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진리는 자유 가운데 받아들여져야 그 사람의 삶에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뜻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상태를 무시한 채 영적 진리를 밀어 넣으려는 것은 주님의 방법과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의 진리를 전할 수 있고, 상대방이 질문할 때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그 사람이 선을 사랑하고 악을 악으로 인식하도록 돕는 삶의 본을 보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한마디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한 번 경험한 진실한 사랑이 훗날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중요한 준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 어떤 씨앗이 어디까지 들어갔는지 알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아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특정한 신학 용어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고, 악을 피하며, 자신의 종교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선을 추구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영적 진리를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사후에도 사람은 자신의 내적 상태에 따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일 기회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와 영원한 운명을 성급하게 판단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이것을 ‘결국 모든 사람은 때가 되면 반드시 빛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시고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공급하시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가 있습니다. 리메인스가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도 인간의 자유를 없애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면서도 사람의 선택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빛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그 빛을 향해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빛을 앞당겨 켜고 싶다’는 마음은 결국 우리의 역할과 주님의 역할을 구별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람의 내면을 억지로 열어 빛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진리와 사랑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가족에게도, 교우에게도, 교회 밖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지금 당장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조급해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언젠가 저절로 다 잘될 것이라고 안심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고 선을 행하며, 그 진리가 언제 어떻게 생명이 될지는 주님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

 

어쩌면 ‘빛을 조금 일찍 켜 주고 싶다’는 목회자의 마음 자체도 주님께서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의 도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중심은 ‘내가 그 사람을 깨우겠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 사람에게 필요한 때에 필요한 빛을 주실 때, 제가 그 일을 방해하지 않고 쓰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AC.17의 흑암 다음에는 곧 주님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흑암 속에 있는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지막 시선은 그 사람의 어둠이 아니라, 그 어둠 위에서도 이미 일하고 계시는 주님께 향해야 합니다. (AC.17 심화 1)

 

 

 

AC.17, 창1:2(AC.17-19),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 : 거듭남 이전 인간의 실상’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