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

‘그를 만나는 자마다 그를 죽이리라’(everyone finding him would slay him)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부터 따라 나옵니다.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체어리티를 빼앗아 버릴 때 그는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합니다.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분리가 있고, 분리가 있는 곳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own)에 맡겨집니다. 그러면 그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짓이고, 그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든 악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죽이는 것, 곧 그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That “everyone finding him would slay him” signifies that every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follows from what has been said. For the case is this. When a man deprives himself of charity, he separates himself from the Lord, since it is solely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that conjoin man with the Lord. Where there is no charity, there is disjunction, and where there is disjunction, man is left to himself or to his own; and then whatever he thinks is false, and whatever he wills is evil. These are the things that slay man, or cause him to have nothing of life remaining.

 

해설

AC.389는 창4:14의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말이 왜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앞의 AC.385에서 그 의미를 먼저 제시했고, 이제 이번 번호에서 그 이유를 밝힙니다. 그 논리는 매우 분명합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스스로 빼앗아 버리면 주님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고, 주님과 분리되면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에 맡겨지며, 그렇게 자기의 것에 맡겨지면 생각하는 것은 거짓이 되고 의지하는 것은 악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악과 거짓이 사람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합니다. 이것이 속뜻에서 ‘죽임’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사람이 스스로 체어리티를 빼앗아 버릴 때’라는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체어리티를 거두어 가신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배척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저주’,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 등을 해석하면서 계속 확인해 온 원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을 받아들이고 선을 거부함으로써 주님에게서 돌아섭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강한 말을 합니다.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다.’ 이것은 체어리티를 단순히 신앙생활에 추가되는 좋은 행실 정도로 보는 관점과 전혀 다릅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생명의 결속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사랑이나 선행이 주님과의 결합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AC.387에서 바로 확인했듯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를 사람이 받아들여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살아낼 때, 그 체어리티 안에서 사람은 주님과 결합됩니다.

 

따라서 ‘오직 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킨다’는 말은 신앙이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가인 이야기 전체가 보여 준 것처럼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둘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진리는 선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도 결국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부정하는 것은 ‘체어리티 없이도 신앙만으로 주님과 결합될 수 있다’는 가인의 원리입니다.

 

이어지는 ‘분리가 있는 곳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에 맡겨진다’는 문장은 이번 번호의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proprium 이해와 깊이 연결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받아 살아갈 때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지만, 주님과의 결합을 거부하여 자기 자신에게 맡겨지면 인간의 고유한 것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 맡겨진다’는 것은 인간이 참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의 것에 갇히는 상태입니다.

 

바로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짓이고, 그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든 악’이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과 의지가 함께 등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생각은 진리와 거짓의 측면에, 의지는 선과 악의 측면에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의 것만으로 살아가면 이해의 영역에서는 거짓이, 의지의 영역에서는 악이 나타납니다. 인간의 영적 생명 전체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인간의 모든 자연적 사고와 의지를 무차별적으로 정죄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도 자기의 것에서 올라오는 악한 충동과 거짓된 생각이 있는 동시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들과 싸우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것은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의 것에 맡겨진 상태’입니다. 즉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삼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것은 악과 거짓이지만,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의지하고 생각하며 행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AC.379의 ‘의지가 실제 사람이다’라는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선한 것을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악하게 산다면 실제로는 악을 의지하는 것이므로 거기에 신앙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89에서는 그 문제를 한 단계 더 근원적으로 설명합니다. 주님과의 결합을 잃고 자기의 것에 맡겨지면 의지는 악으로, 생각은 거짓으로 기울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변화는 단순히 생각의 내용을 바꾸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의지 안에 받아들이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고 살아가는 질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의 ‘바로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도 중요합니다. 가인을 죽이는 것은 문자적으로 그를 찾아오는 어떤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악과 거짓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죽인다’는 말의 의미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그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죽음은 단순히 어떤 형벌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곧 참된 생명에 속한 것이 사람 안에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대목은 바로 앞 AC.384와 매우 중요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가인이 두려워하는 ‘죽임’은 무엇이겠습니까? 악과 거짓이 계속 지배하여 아직 남아 있는 생명에 속한 것마저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AC.389의 마지막 표현인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한다’는 말은 AC.384의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는 말과 정확히 긴장을 이룹니다.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죽음의 위험이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존이 필요합니다.

 

이제 ‘가인의 표’가 왜 주어지는지에 대한 배경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잘못된 교리를 옳다고 인정하시기 때문에 그를 보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분명 잘못된 것이며, 그 결과 가인은 선과 진리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아직 생명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다면, 악과 거짓이 그것마저 완전히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보존의 섭리가 필요합니다. ‘가인의 표’는 바로 이 문제와 연결하여 읽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AC.389는 가인 이야기의 핵심 교리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고, 체어리티의 상실은 주님과의 분리를 가져오며, 그 분리는 사람을 자기의 것에 맡겨지게 합니다. 자기의 것만으로는 생각이 거짓으로, 의지가 악으로 향하고, 악과 거짓은 마침내 사람 안에서 생명에 속한 것을 소멸시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체어리티를 충분히 실천하지 않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함으로써 신앙의 생명 자체를 그 근원이신 주님과의 결합에서 떼어 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반대 방향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자기의 것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옵니다. 선도 주님에게서 오고 진리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며,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자기 것처럼 의지하고 생각하고 행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의 것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을 보면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가인의 길이 ‘체어리티의 상실에서 자기의 것, 그리고 악과 거짓과 죽음으로’ 내려가는 길이라면, 거듭남의 길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체어리티와 신앙이 다시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을 이루는 길입니다.

 

 

 

AC.390, 창4:14,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왜 끊임없이 두려워하는가?’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악과 거짓 가

bygrace.kr

 

AC.388, 창4:14, ‘피하며 유리하는 자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땅에서 피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

‘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뜻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That “Abel” signifies charity has been shown before. By charity is meant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for he who loves his neighbor as himself is also compassionate toward him in his sufferings, as toward himself.

 

해설

AC.351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지금까지 계속 ‘아벨’이라고 불러 온 체어리티가 실제로 어떤 사랑인지를 매우 따뜻하고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반복해서 설명했지만, 여기서는 ‘그러면 체어리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합니다.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자비가 무엇인지를 다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긴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체어리티는 추상적인 신학 용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과 선이 나와 무관하지 않게 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체어리티를 단순히 ‘선행’이라고 번역하거나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행은 체어리티가 외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이지만 체어리티 자체는 그보다 더 안쪽에 있습니다. 바로 앞 AC.348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가 나올 수 있으며 그러한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외적으로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내적 성질까지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는 사랑이며,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날 때 살아 있는 열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와 선행은 분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완전히 같은 말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선한 행위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사랑이고, 행위는 그 사랑이 자연계의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AC.351은 여기에 ‘자비’(mercy)를 곧바로 연결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의 중요한 성질을 보여 줍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을 자기와 무관한 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이 다른 사람의 모든 감정과 고통을 문자 그대로 똑같이 느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성격과 감수성은 다르며,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동일하게 체험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의 일이니 나와 상관없다’고 외면하지 않고 그의 어려움과 선을 자신의 관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단순한 감상이나 순간적인 연민과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마음이 아픈 것은 귀한 출발일 수 있지만, 체어리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람에게 실제로 무엇이 선한가?’를 묻게 합니다. 때로는 위로하고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자비이고,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자비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잘못된 길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의 참된 선을 위한 체어리티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는 무조건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사랑도 아니고, 고통을 없애 주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진리는 무엇이 이웃에게 참된 선인지를 분별하도록 하고, 체어리티는 그 선을 실제로 바라며 행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은 여기에서도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AC.348-351의 흐름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가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고, AC.349에서는 외적인 예배가 내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AC.350에서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51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체어리티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것을 ‘체어리티 → 행위 → 예배’라는 기계적인 단계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과 행위와 예배가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대조도 훨씬 실제적으로 보게 합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단지 ‘아벨=선’이라는 추상적인 공식이 아닙니다. 아벨은 이웃을 사랑하고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돌아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속뜻도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소멸시키는 것은 단순히 ‘체어리티’라는 신학 용어 하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며 그의 고통 앞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교회의 생명입니다. 교리가 남고 신앙 고백이 남고 예배까지 남아 있으면서도 이웃의 고통과 선에는 무관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 가인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위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감정을 많이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체어리티가 없다고 할 수 없고, 눈물을 잘 흘리거나 공감을 잘 표현한다고 해서 반드시 더 깊은 체어리티 안에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성격과 표현 방식이 다릅니다. AC.351의 핵심은 감정 표현의 정도가 아니라 이웃의 고통과 선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랑입니다. 조용히 필요한 일을 해 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으로 더 큰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단호하게 돕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외적인 모습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이웃의 참된 유익을 원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앞 AC.350에서 ‘양 떼의 처음 난 것’이 의미하는 거룩한 것도, ‘기름진 것’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도 오직 주님께 속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도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마음을 짜내어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물리치는 거듭남의 과정을 통하여 조금씩 이웃의 선을 자기 일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선한 일을 했을 때에도 ‘나는 원래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자기에게 공로를 돌리기보다 그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신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 체어리티의 질서와도 맞습니다.

 

AC.351은 목회와 교회의 삶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실제적인 기준을 줍니다. 교회는 진리를 가르쳐야 하고 바른 교리를 보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람을 이웃의 고통에 더 무감각하게 만들고, 교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쉽게 멸시하게 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형편보다 자기 입장의 옳음을 증명하는 데 더 몰두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말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중요하지 않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참된 사랑은 이웃에게 실제로 무엇이 선한지를 알아야 하며, 그 분별에는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체어리티를 인도하고 체어리티는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특히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가까운 사람에게만 적용하기 쉽습니다. 가족이나 친한 사람의 아픔에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이지만,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의 고통에는 훨씬 쉽게 무관심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는 단순한 자연적 호감과 같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뜻도 아니지만, 적어도 상대방을 하나의 영혼을 가진 이웃으로 보고 그의 참된 선을 바라는 데까지 우리를 이끕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체어리티는 자연적인 인정이나 친밀감을 넘어 영적인 사랑이 됩니다.

 

결국 AC.351은 ‘아벨’이라는 이름에 담긴 체어리티를 아주 실제적인 언어로 풀어 줍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고통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감정적 연민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며, 진리의 인도를 받아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며, 실제 삶에서 그 선을 위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은 두 신학 개념을 올바르게 배열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가 마침내 다른 사람의 선과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과 삶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AC.351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내게 이웃의 고통은 여전히 남의 일인가, 아니면 그의 참된 선이 나에게도 중요해지고 있는가?’입니다.

 

 

 

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양 떼의 처음 난 것’(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첫 새끼’)이 오직 주님께만 속한

bygrace.kr

 

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9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이 훨씬 익숙하기 때문에,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반복해서 ‘자비’라는 말을 만나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한국어의 ‘자비’가 일상적으로 불교와도 자주 연결되어 사용되기 때문에, 차라리 ‘은혜’라고 번역하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두 말을 임의로 하나로 합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사용한 말을 구별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에서 영어 ‘mercy’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말은 ‘misericordia’입니다. 이것은 긍휼, 자비, 불쌍히 여김과 관련된 말입니다. 따라서 Potts가 이를 ‘mercy’로 옮겼을 때 한국어로 ‘자비’라고 번역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자비’가 반드시 불교적 용어인 것도 아닙니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mercy’를 ‘자비’라고 하는 것은 다른 종교의 개념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는 기독교적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반면 ‘grace’는 일반적으로 ‘은혜’라고 번역합니다. 두 말은 서로 매우 가까우며 실제 신앙 언어에서는 겹치는 영역도 많기 때문에 ‘자비는 이것, 은혜는 저것’이라고 완전히 분리된 두 개념처럼 정의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일반적인 뉘앙스에서 ‘mercy’는 비참하고 연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향한 긍휼과 자비의 측면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grace’는 값없이 베풀어지는 호의와 은혜의 측면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를 돕는 구별이지 두 단어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교리적 경계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19에서는 특히 왜 ‘자비’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지가 본문의 흐름에서 드러납니다. 사람은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고, ‘깊음’으로 표현되는 욕정과 거짓에 잠겨 있습니다. 아직 빛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사람이 먼저 선해져서 주님의 관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직 그런 어두운 상태에 있을 때부터 주님께서 그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감추어 보존하시고 그 위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런 문맥에서는 ‘자비’라는 말이 AC.19의 장면을 매우 잘 전달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작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도 같은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보고 이해하며 인간의 구원과 거듭남에 관한 것을 알게 되는 근원을 자기 지성이나 공로에 돌리지 않고 주님께 돌리는 표현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mercy’를 사용하는 모든 곳을 하나의 간단한 공식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각의 문맥에서 그 말이 무엇을 강조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더 깊이 보면 주님의 자비는 주님의 사랑과 떨어진 별개의 속성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타락하고 연약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그 사랑이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향할 때 우리는 그것을 자비와 긍휼의 언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비’를 단순히 불쌍해서 봐주는 감정 정도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AC.19에서 주님의 자비는 실제로 사람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보존하고, 그것들 위에서 운행하며, 장차 거듭남에 사용하시는 적극적인 신적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어 번역에서는 ‘mercy’를 ‘은혜’로 바꾸어 익숙하게 만들기보다 ‘자비’로 구별하여 두는 편이 좋습니다. 독자에게 처음에는 조금 낯설더라도 AC를 계속 읽으면서 ‘주님의 자비’가 어떤 문맥에서 반복되는지를 경험하면 그 말의 깊이가 점차 드러납니다. ‘grace’가 나오면 ‘은혜’, ‘mercy’가 나오면 ‘자비’라는 기본적인 구별을 유지하되, 둘을 서로 경쟁하는 신학 개념으로 만들지는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19에서 이 차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그림은 결국 ‘품으심’입니다. 아직 빛이 나타나기도 전에 주님의 자비는 이미 수면 위를 운행하며, 사람 안에 감추어 보존하신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새 생명을 만들어 내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그를 떠나지 않고 거듭남을 준비하십니다. 이 장면에서 ‘자비’는 단순한 번역어 하나가 아니라 거듭남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임을 보여 주는 중요한 말입니다. (AC.19 심화 1)

 

 

 

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심화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의 Potts 영어에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그 자비가 ‘move’, 또는 암탉이 알을 품듯 ‘brood’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bygrace.kr

 

AC.19, 창1:2, ‘수면 위를 품으시는 자비 : 리메인스 위에서 시작되는 거듭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