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65 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1-365를 따라오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비교가 아니라, ‘둘이 어떤 질서로 결합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는 신앙을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AC.365는 이를 아주 단호하게 정리합니다.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된다.’ 이 말은 스베덴보리의 신앙 이해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명제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지적 동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진리에 속한 것이고,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가 선에서 떨어져 독립하려 하면 그것은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다시 말해 신앙은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신앙의 곁에 붙어 있는 부수적인 덕목이 아니라,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생명입니다.

 

이 점을 AC.365는 불꽃과 빛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불꽃에는 열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열은 사랑에, 빛은 진리에 해당합니다. 불꽃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사랑에서 진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열과 빛이 함께 있을 때 생명이 자랍니다. 봄과 여름의 햇빛이 그러합니다.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함이 함께 있기 때문에 씨앗이 싹트고,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불꽃에서 열을 제거하고 빛만 남기면 어떻게 될까요?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빛’이라고 합니다. 겨울에도 분명 빛은 있습니다. 오히려 맑은 겨울날의 빛은 아주 선명할 수 있습니다. 사물의 윤곽도 또렷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일으키는 열이 없습니다. 그래서 땅은 굳고, 나무는 얼며, 생명 활동은 멈춥니다. 바로 이것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은 있을 수 있고, 교리를 매우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있으며, 논리적으로는 빈틈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참된 신앙’을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다시 묻게 합니다. 흔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지, 교리를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하는지, 성경을 얼마나 바르게 해석하는지를 신앙의 중요한 척도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은 ‘그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선하게 대하며, 자기 사랑을 내려놓고,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의 열을 가진 살아 있는 빛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자기 우월감이 커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기 교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한다면 그 빛은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버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너무 높였습니다. AC.362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본래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를 섬겨야 했지만, 오히려 사랑과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했습니다. 그래서 AC.361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그것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AC.363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한다고 했고, 이제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에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을 ‘사랑이 중요하니 교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거나 ‘착하게 살기만 하면 무엇을 믿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스베덴보리의 뜻과 거리가 멉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이 참된 선인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쉽게 맹목적인 애정이나 자기 방식의 친절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체어리티는 반드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 결합에서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는 분명해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있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선을 사랑하고 행하기 위해 삽니다. 교리는 그 자체로 최종 목적이 아니라 삶을 주님의 질서에 맞추도록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길 때, 신앙은 자기 자리를 찾습니다. 반대로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올라서려 할 때, 수단이 목적을 지배하는 질서의 전도가 일어납니다.

 

이 점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교회는 교리의 정확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성경 해석의 정통성을, 어떤 교회는 특정 신앙고백이나 교단적 전통을, 어떤 교회는 성령의 은사나 종말론이나 예배 형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하나가 전체보다 앞서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입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 진리를 가르치는 목적이 이웃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기는 것이 되면 이미 겨울의 빛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상응을 알고,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고,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설명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정확히 말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지식이 ‘나는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는 자기 사랑과 결합하면, 진리의 빛은 점점 차갑게 변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체어리티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위험이 얼마나 미묘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AC.365는 신앙의 ‘내용’만이 아니라 신앙의 ‘온도’를 묻게 합니다. 빛은 있는데 열이 있는가? 진리는 있는데 사랑이 있는가? 교리는 있는데 체어리티가 있는가? 성경을 많이 아는데 그 지식이 나를 더 온유하게 만드는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커질수록 다른 사람을 더 살리게 되는가, 아니면 더 쉽게 정죄하게 되는가? 이런 질문이 신앙의 생명을 점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합니다. 체어리티가 주도한다고 해서 인간의 자연적 친절이나 감정적 따뜻함이 신앙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받아 그것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는 영적 사랑입니다. 따라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입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선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선이 인간 안에서 받아들여져 이웃을 향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64와 AC.365는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 AC.364에서는 체어리티가 없으면 무자비함과 증오와 악이 들어오고, 그 악을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유일한 수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라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즉 체어리티는 단지 신앙을 따뜻하게 만드는 장식이 아니라, 악을 물리치고 신앙에 생명을 주는 실제적인 영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이 주도하셔야 한다’는 말과도 연결됩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체어리티를 만들어 내서 신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이 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선이 신앙과 진리를 질서 있게 사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체어리티의 주도권은 인간의 선행이 신앙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인간의 진리를 살아 있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질서와도 맞닿습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먼저 진리를 배웁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에서 배웁니다. 이 단계에서는 진리가 앞에서 인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진리는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됩니다. 처음에는 ‘옳기 때문에’ 행하던 것을 나중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게 됩니다. 이때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선 안에서 살아납니다. 마치 빛이 불꽃에서 나오는 것처럼 됩니다. 결국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가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반드시 ‘먼저 사랑하고 나중에 믿는다’는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 신앙의 최종적인 생명과 목적이 체어리티에 있다는 뜻입니다. 자연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진리를 먼저 배우는 경우가 많지만, 그 진리가 결국 선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직 완성된 신앙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향해 가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겨울의 빛’이라는 비유가 더욱 깊어집니다. 겨울의 빛도 빛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보고 ‘나는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위험합니다. 전혀 어둡다면 오히려 자신의 상태를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고 교리적으로 밝다고 생각하면, 그 빛에 열이 없다는 사실을 놓치기 쉽습니다. 가인 역시 자기 신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AC.362에서 보았듯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환상이 자신의 교리를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자기 생각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빛은 점점 강해지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더 추워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리적 확신과 영적 생명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확신이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교리에 매우 확신하면서도 체어리티를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진리를 굳게 붙들면서도 그 진리가 사랑과 선을 향하게 합니다. 참된 빛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 살립니다. 그래서 진리가 참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결국 체어리티와 결합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문제는 가인이 아벨과 함께 있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아벨 위에 서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의 형제가 아니라 주인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둘의 결합이 깨졌습니다. 그리고 이 지배욕이 결국 다음 단계에서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했던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비극은 단순히 ‘사랑이 부족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질서가 뒤집혔다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목적이 되고, 체어리티가 수단이 되었습니다. 진리가 선 위에 올라섰습니다. 교리가 삶보다 앞섰습니다. 그리고 그 질서의 전도가 지속되자, 결국 사랑 없는 신앙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여 체어리티를 파괴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믿는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반드시 ‘그 믿음은 나를 어떤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있는가?’와 함께 ‘그 진리가 내 안에서 선이 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옳은 교리를 가지고 있는가?’와 함께 ‘그 교리가 내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 질문 앞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제자리를 찾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을 주고, 신앙은 체어리티에 빛을 줍니다. 사랑은 진리를 따뜻하게 하고, 진리는 사랑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밝혀 줍니다. 불꽃과 열과 빛이 하나를 이루듯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도 하나입니다. 인간 안에서 그 둘이 다시 하나가 될 때 신앙도 살아 있고, 체어리티도 지혜롭게 됩니다.

 

결국 AC.365가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신앙에는 빛이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 빛에 열이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열은 자기 열심이나 감정적 뜨거움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입니다. 그 열이 함께할 때 신앙의 빛은 생명을 살립니다. 그러나 그 열이 사라지면 아무리 밝은 빛이라도 겨울의 빛이 되어 모든 것을 굳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입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고,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믿는 것이 삶이 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고, 그 체어리티 안에서 진리의 빛이 살아날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겨울의 빛이 아니라 생명을 키우는 따뜻한 빛이 됩니다.

 

 

 

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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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고 하였는데, 이는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지 않고 오히려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sin lying at the door)는 것이 들어올 준비를 하고 들어오기를 원하는 악을 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고, 따라서 온갖 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일반적으로 ‘마귀’(devil)라 불리는데, 마귀, 곧 그의 지옥의 무리는 사람이 체어리티가 결여되어 있을 때 언제나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와 그의 무리를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Secondly, it is sai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which signifies,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ere is no charity present, but evil. Everybody can see that “sin lying at the door” is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 for when there is no charity there are unmercifulness and hatred, consequently all evil. Sin in general is called the “devil,” who, that is, his crew of infernals, is ever at hand when man is destitute of charity; and the only means of driving away the devil and his crew from the door of the mind is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해설

AC.364는 앞의 AC.363과 정확히 대칭을 이룹니다. AC.363에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를 설명하면서,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4에서는 그 반대편을 보여 줍니다.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곧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지 않으며, 그 자리에 악이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 두 글을 함께 놓으면 ‘선한 의도와 체어리티’ 그리고 ‘체어리티의 부재와 악’이라는 선명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가 없다’는 상태를 어떤 중립적인 상태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그저 ‘아직 사랑이 부족하다’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고, 따라서 온갖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체어리티는 단순히 여러 기독교적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 들어와 이웃을 향하여 흘러가는 근본적인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그 자리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자기 사랑과 그에 따른 악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들어올 준비를 하고 들어오기를 원하는 악’(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이라고 풀이합니다. 아직 악이 완전히 안으로 들어와 모든 것을 차지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악은 ‘문에’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가인의 상태와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이 떨어졌지만 아직 아벨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를 향한 적대적인 애정이 생겼지만, 체어리티 자체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다음 행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경계에서 악이 문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문’은 매우 의미심장한 경계입니다. 안과 밖이 만나는 자리이며, 무엇인가가 들어오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다만 AC.364에서는 아직 ‘문’의 상응 자체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여기서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하기보다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한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분명한 것은 악이 인간 안으로 들어오려고 가까이 와 있으며,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가 그 악에게 문을 열어 주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죄’를 일반적으로 ‘마귀’(devil)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것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는 곧이어 ‘마귀, 곧 그의 지옥의 무리(his crew of infernals)’라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초점은 악을 단순한 추상적 개념으로만 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그와 상응하는 지옥의 악한 영향이 가까이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 특유의 영계 이해가 배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귀가 와서 사람에게 악을 집어넣으므로 인간은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유입의 질서에서 인간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으며, 양쪽으로부터 오는 유입 가운데 무엇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느냐와 관련하여 자유를 가집니다. 악한 영들이 가까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자동으로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자기 의지와 결합하여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을 때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표현에는 한편으로 악의 가까움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이 점에서 바로 앞 AC.359-360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지고 체어리티가 떠난 바로 그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즉 주님께서는 악이 행위로 완전히 굳어진 뒤에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이 인간의 마음 문 앞에 와 있을 때 미리 알게 하십니다. 가인이 분노를 느낀 것과 아벨을 죽인 것 사이에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섭리의 모습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강제로 악을 제거하시지는 않지만, 악을 보고 거절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선과 진리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AC.364의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이 글 전체의 결론이면서 매우 강력합니다. ‘마귀와 그의 무리를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악과 싸우려면 의지를 강하게 가져라’거나 ‘올바른 교리를 더 확실히 믿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악을 마음의 문에서 물리치는 수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이야기를 읽어 온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악이 문에 엎드려 있을 때 해결책이 ‘더 강한 신앙’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 다시 사랑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질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사랑에서 체어리티가 나오고, 그 체어리티 안에서 신앙도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함께 말한 것도 중요합니다. 둘은 서로 분리된 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향하여 그 사랑이 흘러가며, 이웃을 향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물리치는 힘이 인간 자신의 선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 주님의 선이 인간 안에서 악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와 그의 무리를 몰아낸다’는 표현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지옥과 싸워 이긴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면, 그 사랑과 함께할 수 없는 악과 거짓이 물러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싸우시고 이기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고 악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63과 AC.364는 한 쌍을 이룹니다. AC.363에서는 ‘선을 의도함 → 체어리티가 함께 있음 → 얼굴이 들림’이라는 길을 보여 주고, AC.364에서는 ‘선을 의도하지 않음 → 체어리티가 없음 → 악이 문에 있음’이라는 반대의 길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에 서 있는 가인에게 주님께서는 아직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무서운 경고만은 아닙니다. ‘아직 문에 있다’는 것은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직 아벨은 살아 있고, 아직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으며, 아직 주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인이 해야 할 일은 문 앞의 악과 자기 힘으로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다시 사랑의 질서 안으로 돌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AC.364가 가르치는 것은 악을 이기는 길 역시 체어리티라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가 없어진 자리에 악이 들어오며, 체어리티가 회복되면 악은 물러납니다. 그래서 창4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점점 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교리 논쟁을 넘어 인간 마음의 생명과 죽음의 문제가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덧붙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악이 마음의 문을 넘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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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3, 창4:6,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이 절에 대한 설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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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 그리고 신앙의 교리(doctrine of faith)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입니다(막12:28-35; 마22:34-39). What avails faith, that is, the memory-knowledge [scientia], the knowledge [cognitio], and the doctrine of faith, but that the man may become such as faith teaches? And the primary thing that it teaches is charity. (Mark 12:28-35; Matt. 22:34-39)

 

28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35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막12:28-35)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4-39)

 

이것이 신앙이 지향하는 모든 것의 목적입니다. 이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이나 교리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This is the end of all it has in view, and if this be not attained, what is all knowledge or doctrine but a mere empty nothing?

 

해설

AC.344는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진 가인과 아벨의 문제를 매우 날카로운 질문 하나로 압축합니다.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낮추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하여 주어졌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scientia), 인식 지식(cognitio), 그리고 신앙의 교리(doctrine of faith)를 차례로 언급한 뒤, 그 모든 것의 목적은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진리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사람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있으며, 그 진리를 아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 그리고 교리를 불필요하거나 낮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말씀의 내용을 배우고 기억해야 하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고 인식해야 하고, 서로 관련된 진리들을 질서 있게 연결하여 교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도 올바르게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AC.344는 바로 그 모든 것에 ‘무엇을 위해서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지식과 교리는 그 자체로 종착점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사람이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목적은 사람이 단지 ‘무엇을 믿는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고, 그가 믿는 진리가 가르치는 대로 ‘그러한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가 자기 삶의 성질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는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정확한 교리 체계만을 만들어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의지와 사랑과 삶을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이 가르치는 여러 항목 가운데 조금 더 중요한 한 항목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진리들이 궁극적으로 사람을 이끌어 가야 할 방향과 목적이 체어리티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342에서 르우벤은 신앙을,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한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은 자신에게 머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이루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이 먼저 신앙을 만들고, 그다음 행위를 쌓아 마침내 자기 힘으로 체어리티를 만들어 낸다는 기계적인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도 체어리티도 그 생명과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 하지만,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고 살아 있는 체어리티가 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막12:28-35와 마22:34-39가 여기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두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계명의 중심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두십니다. 특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은 신앙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라고 말할 때, 그는 단순히 교리보다 윤리적 행동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계명과 주님에 관한 모든 참된 진리는 결국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막12장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고까지 말합니다. 따라서 외적인 종교 행위나 신앙고백 역시 그 안에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으면 자기 목적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 두 복음서 인용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함께 제시된 것이므로, 각각 별도의 심화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가 목적이므로 신앙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 없는 막연한 선의나 인간적인 호감이 아닙니다.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 무엇이 주님의 질서에 맞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는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관계가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며, 선은 진리와 결합하고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목적이 수단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단의 참된 가치를 결정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할 때 신앙은 비로소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 맞게 쓰이며, 체어리티 역시 진리를 통하여 바른 방향과 형태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AC.344의 질문은 ‘신앙인가, 체어리티인가?’가 아니라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이것을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놓으면 AC.344가 이 자리에서 등장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을 없애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고 교리로 정리하여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AC.340에서는 그 결과 이전에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어 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4는 그 분리가 왜 치명적인지를 목적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는 것은 단순히 두 요소가 서로 떨어지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이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잃는 것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가인이 아벨에게서 분리된다는 것은 신앙이 자신이 향해야 할 목적에서 분리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무엇인가 한 부분이 조금 부족한 신앙이 아니라 자기 생명과 목적을 잃은 신앙이 됩니다. 바로 앞 AC.341에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두고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단언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AC.344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과 교리는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지식과 교리 그 자체를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과 생명에서 분리된 지식과 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방대하고 정교한 신학 체계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사람을 주님께로 돌이키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선을 행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아직 영적인 목적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람 안에서 악을 드러내고, 회개하게 하고, 삶을 바꾸며, 이웃을 향한 선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진리는 더 이상 머리에만 있는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갑니다.

 

이 점은 AC를 공부하는 우리에게 특히 직접적인 질문이 됩니다. 우리는 신앙, 체어리티, 퍼셉션, 상응, proprium, 리메인스, 속 사람과 겉 사람,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같은 수많은 아르카나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귀하며,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AC.344는 바로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아르카나를 더 많이 알수록 다른 사람의 오류를 더 잘 찾아내는 사람이 되는 데 그치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더 잘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며 이웃의 참된 선을 더 구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아르카나에 대한 지식마저 자기 우월성을 세우는 수단이 된다면, 우리는 가인의 문제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가인의 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배운 진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게 하고, 악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지식은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귀한 수단이 됩니다.

 

결국 AC.344의 핵심은 단순히 ‘지식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말보다 훨씬 정교합니다. ‘진리는 삶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신앙의 교리는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중심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입니다. 가인의 오류는 신앙을 귀하게 여긴 데 있지 않고 신앙을 그 목적에서 분리하여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게 한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44가 우리에게 묻는 가장 중요한 질문도 ‘나는 얼마나 정확한 신앙을 알고 있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믿는 이 진리는 주님께서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데 쓰이고 있는가?’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고, 진리가 삶이 되며, 그 모든 것 안에서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실 때 비로소 신앙은 자신의 목적에 이르고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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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에 나오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를 좀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마22:37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생각해 보면 질문이 생깁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단순히 ‘하나님을 아주 많이 사랑하라’는 강조의 반복일까요, 아니면 각각의 말에 서로 다른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일까요?

 

AC.36 자체는 ‘마음’, ‘목숨’, ‘뜻’을 각각 따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들을 곧바로 ‘마음=의지, 목숨=행위, 뜻=이해’라고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 구절에서 AC.36이 직접 붙드는 핵심은 훨씬 분명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며,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으면 신앙 안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가장 평범한 의미에서 이 말씀을 읽어도 충분히 깊습니다. ‘마음을 다하여’는 내 사랑과 애정에서, ‘목숨을 다하여’는 내 생명과 삶에서, ‘뜻을 다하여’는 내 생각과 이해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스베덴보리가 AC.36에서 각각 그렇게 정의했다고 말하기보다,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 본 설명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쉽게 말하면 ‘내 삶의 한 부분만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예배드릴 때의 마음만 주님께 드리고 나머지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며,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 선택과 행동에서는 전혀 다른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과 생각과 삶 전체가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 영역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그것을 마음으로 아끼고, 자주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시간과 힘을 사용하고, 중요한 선택을 할 때도 그것을 고려합니다. 물론 주님 사랑을 인간적인 애착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지만, ‘온 존재를 다하여 사랑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에는 이런 예가 도움이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결국 삶의 여러 영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을 다하여’라는 말씀은 ‘내가 실제로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은 입으로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가장 사랑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무엇을 잃을까 가장 두려워하며, 무엇을 얻기 위해 가장 많은 것을 희생하는지를 보면 자기 사랑의 방향이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주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삶의 중심에 두는 것과 연결됩니다.

 

‘목숨을 다하여’라는 말씀은 그 사랑이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랑은 마음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AC.36이 신앙을 단순한 ‘앎과 인정’에 두지 않고 교리가 가르치는 것에 대한 ‘순종’까지 말하는 것도 이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이 삶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AC.36이 말하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뜻을 다하여’라는 말씀에서는 우리의 생각과 이해도 주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생각하지 않는 맹목적인 열정이 아닙니다. 무엇이 참인지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며,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진리 앞에서 살피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사랑은 감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참이라고 받아들이며 어떤 기준으로 생각하는가와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세 표현을 지나치게 분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막12:30에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AC.36도 바로 이 구절을 함께 인용합니다. 만일 ‘마음, 목숨, 뜻’ 각각을 인간의 세 가지 고정된 기능에 정확히 대응시킨다면 막12의 네 번째 표현인 ‘힘’을 다시 어디에 대응시켜야 하는지 문제가 생깁니다. 오히려 이런 여러 표현이 함께 사용되는 것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부’를 강조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를 가장 쉽게 풀면 ‘너의 존재와 삶 전체로 주님을 사랑하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 생각하는 것, 원하는 것, 선택하는 것, 행하는 것 가운데 어느 한 영역만 따로 떼어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모든 순간에 주님만 생각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일하고, 가족을 돌보고, 쉬고,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며 자연계의 수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일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전체가 어떤 사랑의 지배를 받고 있느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의 정상적인 삶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속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선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려 합니다.

 

그리고 AC.36은 이 주님 사랑을 이웃 사랑과 떼어 놓지 않습니다. 주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향한 사랑이 전혀 없다면, 바로 다음 계명과 분리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장 큰 두 계명으로 함께 말씀하셨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십시오’라는 감정적 권면보다 훨씬 깊습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주님과 무관한 영역을 따로 만들어 놓지 마십시오’라는 요청으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랑도, 생각도, 선택도, 실제 삶도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선과 진리를 향하게 하는 것, 이것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라는 말씀을 우리의 삶 가까이에서 이해하는 한 방법입니다.

 

다만 다시 한 번 구별할 것은, 이러한 설명이 AC.36에서 ‘마음은 이것, 목숨은 이것, 뜻은 이것’이라고 각각 속뜻을 규정한 결과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AC.36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신앙의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중심을 놓치지 않는 범위에서 이 익숙한 말씀을 ‘나의 일부가 아니라 나의 전 존재와 삶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AC.36, 창1:14-17, '신앙은 순종이다 : 사랑 없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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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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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랑’에 대해 어디를 보니 ‘charity’를 쓰던데,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 해도 되는지요? 그리고 왜 ‘주님 사랑’은 전치사 ‘to’를 쓴 반면, ‘이웃 사랑’은 ‘toward’를 쓰나요?

 

 

AC.36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두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큰 두 계명으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스베덴보리도 신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자주 등장하는 ‘체어리티’(charity)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먼저 ‘주님 사랑’은 단순히 주님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느끼거나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애정과 고백을 무가치하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결국 사람이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살아가는가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가장 높이 여기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살고자 하는 데서 실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점은 AC.36의 문맥에서도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 있다고 말한 직후, 그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에 그 사랑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거나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친절한 감정을 가지라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 선을 위해 행동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 언제나 이웃 사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웃’의 범위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보다 넓습니다. 가까이 있는 한 사람에서 시작하여 여러 사람의 공동체, 사회와 국가, 교회, 더 나아가 주님의 나라까지 ‘이웃’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집니다. 다만 AC.36에서는 이웃의 단계와 질서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우선 ‘이웃 사랑은 이웃의 참된 선을 원하고 그 선을 행하는 사랑’이라고 이해하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는 어떤 관계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 둘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charity`는 흔히 이웃을 향한 사랑과 그것이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는 핵심 용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영어의 `charity`를 보고 단순히 ‘자선’, ‘기부’, ‘구제’라고 생각하면 스베덴보리의 뜻보다 지나치게 좁아집니다. 그에게 체어리티는 훨씬 넓은 영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 번역에서는 `charity`를 문맥마다 곧바로 ‘이웃 사랑’으로 바꾸기보다 ‘체어리티’라고 살려 두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은 말 그대로 사랑의 대상을 이웃에 두는 표현이고, ‘체어리티’는 그러한 이웃 사랑이 선을 원하고 행하는 삶의 원리로 나타나는 것을 폭넓게 가리키는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교리적 용어로 계속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을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 나눌 필요도 없지만, 언제나 완전히 같은 단어처럼 바꾸어 써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고 표현해도 될까요? 영어 표현 자체로는 가능하며,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도 charity와 neighbor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원문이 `love toward the neighbor`라고 하면 ‘이웃 사랑’으로, `charity`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도 독자가 구별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love to the Lord`라고 하면서 `love toward the neighbor`라고 했을까요? `to`와 `toward`가 다르니 여기에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AC.36은 이 전치사의 차이에 별도의 교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to`는 주님과의 직접적인 결합을, `toward`는 주님에게서 나온 사랑이 밖으로 흘러가는 것을 뜻한다고까지 확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것은 영어 표현의 미묘한 차이에서 본문이 직접 말하지 않은 신학적 의미를 끌어내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전치사의 차이보다 두 사랑의 관계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선은 이웃을 향한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납니다. 반대로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 역시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고 주님께 둡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을 ‘뿌리’, 이웃 사랑을 ‘열매’라고 비유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됩니다. 다만 이것도 AC.36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기보다 관계를 쉽게 이해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핵심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AC.36이 신앙을 설명하다가 결국 이 두 사랑으로 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머리로 무엇을 알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이 실제 삶의 선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 ‘이웃 사랑’, ‘체어리티’는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계속 만나게 될 서로 깊이 연결된 핵심 개념들입니다.

 

 

 

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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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은 순종이다 : 사랑 없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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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6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을 단지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주님을 향한 생각이라고 여기며, 또 어떤 이들은 신앙의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신앙 교리에 포함된 모든 것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교리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 곧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 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love to the Lord)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 주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가르치셔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입니다.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 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 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 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 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12:29-31) The foremost of all the commandments 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therefore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this is the foremos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namely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there is none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Mark 12:29–31).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앞의 계명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first and great commandment)이라 하시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라고 하십니다 (마22:37-40).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law and the prophets)는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합니다. In Matthew, the Lord calls the former of these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says that “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Matt. 22:37–41) The “law and the prophets” are the universal doctrine of faith, and the whole Word.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해설

AC.36은 매우 직접적인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상당히 강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신앙’이라고 부르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어떤 교리를 머리로 알고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신앙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여러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종교적인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올바른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문은 신앙이 신앙 교리에 포함된 것들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라고 말합니다. 즉 ‘앎’과 ‘인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스베덴보리는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순종’은 AC.36을 이해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신앙은 머릿속에 있는 교리로 끝나지 않고, 그 교리가 가르치는 것을 실제 삶에서 따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 신앙이란 결국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인가?’ AC.36은 곧바로 그 오해를 막아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순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수많은 규칙을 외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며 사람이 순종해야 할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순종이다’라는 말을 ‘명령을 잘 따르는 것이 신앙이다’라는 뜻으로만 이해하면 부족합니다. 어떤 순종인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독립적인 영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6의 논점은 신앙의 고백이나 교리의 인정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신 사랑을 삶에서 완전히 떼어 놓는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온전한 신앙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AC.36은 스베덴보리 자신의 철학이나 신학 체계를 먼저 제시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막12:29-31에서 주님은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로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을, 둘째로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시며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이어 마22에서도 같은 두 계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더욱 중요한 말씀이 덧붙습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가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성경의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 두 항목을 골라 중요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가 달려 있는 중심 원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말과도 다릅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는 무엇이 참인지 가르치고,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교리를 아무리 정확하게 알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6의 기준에서는 신앙의 본래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진리를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36 자체가 ‘신앙의 교리’와 그것이 ‘가르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에 순종할지를 알려면 먼저 무엇이 참인지 배워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대립시키는 것은 ‘교리냐 사랑이냐’가 아니라 ‘삶과 분리된 교리적 신앙’과 ‘사랑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AC.35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5에서는 이해가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가 그 반대 방향을 향할 수 있는 인간의 분열을 다루었습니다. AC.36에서는 그 문제가 신앙의 언어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해로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그 교리가 가르치는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은 우리에게 단순히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만 묻지 않습니다. ‘당신이 믿는다고 하는 것이 당신의 사랑과 삶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라고도 묻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진 신앙은 아무리 많은 지식과 올바른 고백을 가지고 있어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는 아직 이르지 못합니다.

 

결국 AC.36에서 신앙은 머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알고 인정한 진리가 사랑과 만나고, 그 사랑이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순간 신앙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중심에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두 큰 계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심화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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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심화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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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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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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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사랑한다면 덜 사랑해야... (2025/7/9)

 

이건 정말 중요한 말입니다. 아내도, 남편도, 부모, 자식, 심지어는 손주들 등 핏줄과, 그리고 혈육까지도, 정말 사랑한다면 덜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보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마10:37)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지옥은 평소 눈여겨봐 뒀다가 기회가 포착되면 아주 집중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공격, 그들을 통해 결국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더 하며, 애정이 진할수록 더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입술로 주님, 사랑해요 고백해도 우리의 겉과 속이 다르면, 그 고백은 소용없습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아무 생각 없이 애지중지, 그냥 자식 일이라고, 그냥 손주 일이라고 부주의하게 눈 돌아갔다가는 큰일납니다. 내가 꾹 참고 시치미 뗐더라면, 그 순간 주님을 먼저 생각했더라면, 지옥의 공격 대상에서 비껴갈 수 있었던 자녀가, 손주가, 부모님이, 나의 부주의로 내가 사실은 주님보다 이들을 더 사랑한다는 게 들통나는 바람에 발각, 지옥의 공격 대상이 되어 시달림을 받게 되니 말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가장 안전하게 이들을 사랑하는 방법은, 이들을 모두 이들 모습으로 내 곁에 계신 주님으로 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응으로 사랑하는 것인데, 그러면 그 사랑은 안전하며, 보호받습니다. 즉 그때는 지옥이 이들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적어도 본인들이 자초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핏줄을 비롯, 모든 걸 상응으로 사랑해야 안전하다는 것은, 그래야 우리가 선을 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인데,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은, 그저 우리는 우리 할 도리만 다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들이, 설령 악령들의 부추김을 받아 우리에게 못되게 굴어도 우리는 주님 앞에 자기 할 도리만 다하고 물러나면 되기 때문에, 지옥 입장에선 도무지 무슨 엿볼 틈이 생기질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상응(相應, correspondence)은, 천국과 지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천국에,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아르카나(arcana, 秘義, secret)인데요, 여기엔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능력이 깃들어 있어, 말씀에 나오는 모든 기적 또한 이 상응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저는 상응으로 살기 원합니다 하는 기도를 늘 하면서 사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기도에는 정말 많은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얘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부모님을, 내가 남편을, 내가 아내를, 내가 그동안 교회를 어떻게 섬겼는데, 내가, 내가, 내가... 이런 생각이 들면, 언제든 화들짝,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나시기 바랍니다. 지옥에서 오는, 악한 영들의 부추김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이런 부추김에 넘어가면 그때부터 우리는 그 모든 공을 자기에게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중간에 돌이키지 않으면, 물거품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기울인 모든 사랑과 헌신, 정성과 힘의 공로를 모두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공로로 돌릴수록 그는 천국이며 천사이지만, 모든 것을 자기 공로로 돌릴수록 그는 지옥이며, 악령입니다.

 

핏줄이, 혈육이 저 정도니 돈, 건강, 성취와 보람, 자랑, 명예, 권세 같은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삶의 가장 첫 자리, 그리고 삶의 영 순위에 주님을 모시는 사람은 지옥이 학을 떼고 물러납니다. 이런 사람은 삶의 저런 여러 영역을 아무리 찔러봐야 끄떡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1:22)

 

그 결과는 나는 물론이요, 내 주변도 평안합니다. 공격 대상을 찾는 지옥의 스캐닝에 포착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적어도 나랑 관련된 일에 관해서는 말이지요. 이것이 내 모든 핏줄을 사랑하는 진정한 방법이며, 그들을 주님의 보호 아래 들어가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다음 계명에 들어있습니다.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7, 38)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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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사랑하되 주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는 건 좀... (2025/4/16)

 
이런 제목이 좀 터무니없거나 자극적이십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자주, 아니 거의 만연하다시피 한 걸 볼 수 있습니다. 제 주변, 나라 사랑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그 어떤 분들보다도 나라를 사랑하여 나라의 장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몸이 마르실 지경입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말씀 중에도 주님이 어떤 분이시고, 천국은 어떤 곳인지에 대한 말씀은 거의 안 하십니다. 이상하지요? 또 가령 지방회 같은 델 참석해 보면, 분명 수십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모이셨음에도 주님은 어떤 분이시고, 천국은 어떤 곳이고 하는 얘긴 요만큼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냥 기본으로 깔고 가는 건가요? 아니면, 그런 걸 꼭 말을 해야 아나 인가요? 지방회뿐이 아닙니다. 무슨 이만한, 그러니까 전국 규모의 무슨 집회나 세미나에 가봐도 이런저런 방법이나 간증, 그러니까 뭘 어떻게 했더니 어떻게 부흥하고 성장했다는 등이 주된 내용이지,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천국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무슨 언급이 없습니다. 새삼 뭘 그런 걸 다... 인가요? 오히려 좀 뻘쭘해지나요? 참 이상합니다... 천국은 그렇지 않은데 말입니다. 천국은 주님을 빼면 모든 것이 멈추는 것은 물론, 존재 자체도 못하는데 말입니다.
 
혹시 우리 안에 이런 거, 그러니까 가령, 나는 전도 몇 명 했고, 선교지 몇 번 나갔고, 어디를 얼만큼 몇 교회를 후원하거나 교회 몇 개를 세웠고, 지금까지 몇 교회 주의 종들을 섬겼고, 무슨 헌신과 헌금을 얼마나 했고... 등등 많은 공을 세웠으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이미 오래전에 영접기도한 사람이므로, 그러므로 나같은 사람은 당연히 천국 프리패스지... 같은 이런 생각, 이런 오해와 착각이 있는 거 아닐까요? 천국은 예수 영접기도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속 사람의 상태로 가는 나라이며, 특히 그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여야 갈 수 있는 나라인데, 그렇다면 이런 분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라 사랑, 교회 사랑 등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아니,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더욱 그래야 합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이런 분들이십니다. 그러나 나라 사랑하다 보면, 교회 사랑하다 보면 주님이 알아서 그걸 주님 사랑한 걸로 쳐주셔서 하늘 상급 많아지겠지 하시는 의식과 태도, 동기로 하신다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위들이 고스란히 하늘 상급이 되려면, 이런 행위들은 주님을 더욱 사랑한 결과로 당연히 뒤따르는 행위일 때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다만 주님을 놓치시지 말기 바랍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천사들한테는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뜻 가운데 주님 주신 쓰임새의 삶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습니다. 그때 그들은 주님 주시는 지고한(inmost) 행복 가운데 들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1장, ‘천국 천사들의 순진한 상태’(276-283) 중 278번 글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순진함은 지혜를 거처로 삼는다고 하고, 천사는 그 순진한 정도만큼만 지혜롭다고 한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순진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선한 것도 제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것을 받은 것으로 여기고, 그 근원을 주께 돌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받기 원한다. 또 모든 선한 것을 사랑하고, 모든 진리에서 기쁨을 얻는다. 선을 사랑하는 것, 즉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것이야말로 주를 사랑하는 것이고,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그들이 알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 그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그들은 내일 염려라 부르고, 그것은 삶에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잃거나, 못 받을까 봐 근심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대인관계에서 그들은 절대 악한 의도로 행동하지 않으며, 오직 선하고 공정하고 정직한 의도로 행동한다. 악한 의도로 행동하는 것을 그들은 교활함이라 부르며, 뱀의 독처럼 기피한다. 그것이 순진함에 완전히 대립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받는 모든 것의 근원을 주께 돌리기 때문에, 자기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그들이 자기 본성에서 떨어져 있는 정도만큼 주께서 그들에게 들어가신다. 그 결과 성경 말씀이나 설교를 통해 주의 말씀을 들으면, 그들은 기억에 저장하지 않고 즉시 순종한다. 즉 말씀대로 의도하고 실천한다. 그들에게는 의지 자체가 기억인 것이다. 이들은 겉으로는 대체로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아주 지혜롭고 분별력 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은 이들을 가리킨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10:16) Be ye prudent as serpents and simple as doves (Matt. 10:16).
 
이것이 ‘지혜로운 순진함’이라 부르는 그 순진함이다.
 
[3] 순진함이란, 어떤 선함도 그 근원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모두 주께 돌리는 것이다. 따라서 순진함이란, 주의 인도를 받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것은 지혜를 이루는 모든 선과 진리를 받는 근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어린 시절에는 외적 순진성, 나이 들어서는 내적 순진성을 지니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전자를 통해 후자에 이르고, 다시 후자에서 전자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은 늙으면 몸도 줄어들고, 다시 아이가 되는 것인데, 그러나 이번엔 지혜로운 아이, 즉 천사가 되는 것이다. ‘지혜로운 아이’란 높은 의미로는 천사를 뜻한다. 성서에서 ‘어린아이’는 순진한 사람을 뜻하고, ‘노인’은 순진한 상태에 있는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한다.주192
 
 
주192. 말씀에서 ‘어린아이들’은 이노센스를 의미한다 (AC.5608). ‘젖먹이들’도 마찬가지다 (AC.3183). ‘노인’은 지혜로운 사람을, 그리고 추상적으로는 지혜를 의미한다 (AC.3183, 6524).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어린아이가 되며, 그때 그의 지혜 안에 이노센스가 있어, 그 상태로 천국에 들어가 천사가 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3183, 5608). //
 
 
천사들은 금식기도, 산기도, 안수기도, 방언기도, 예언기도, 무슨 무슨 작정기도 같은 거 안 합니다.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늘 주님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저런 거 한다면 너무 이상하잖아요? 기도든 뭐든 주님을 움직여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한 동기로는 하지 마세요. 설령, 40일 금식기도 했더니 전에 없던 신령한 은사가 마침내 생겼다 해도 사실은 별로 안 좋은 겁니다. 그게 나중에 자기 계급장이 된다면 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이웃을 열심히 사랑했더니 생각지도 않은 이런 은혜를 주셨어요 한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다가 영생을 얻는 사람이 되어야지 영생을 얻기 위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안 된다기보다는 뭐랄까, 주님 보시기에 좀 아쉬운 사람이 되는 것이죠.
 
육으로는 세상과, 영으로는 천국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 역시 천사들처럼 천국과, 그리고 주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천국과 천사 공부 많이 하시고, 지상에서 천국을 사시기 바랍니다. 거듭 당부드립니다.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으로 가득 찬 나라이며, 주님의 신성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마치 해에서 열과 빛이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건, 주님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것이고요,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건 이웃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걸 좀 확장하면, 지상에서 원수를 사랑한다는 건, 원수를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원수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형상을 사랑하는, 그러니까 그의 안에 깃드신 주님 신성에 대해 예의를 잃지 않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가령, 이재명 같은 사람한테도 말이죠. 비록 그와 같은 사람들한테 예의 바르게 대했다가 해를 입더라도 말입니다. 아래 유다서를 보면,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유1:9)
 
비록 천사장 미가엘일지라도 비방하는 판결을 삼가지 않습니까? 심지어 그 상대가 마귀인데도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 심지어 지옥도 사랑하셔서 여전히 돌보시는 분임을 미가엘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집회, 평화적 시위에서도 우리는 만에 하나 적의, 증오, 복수 같은, 지옥에서 올라오는 기운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그러면 주님은 더 이상 우리를 보호하실 수 없게 되며, 우리를 향한 천국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좌우가 서로 먹느냐, 먹히느냐의 긴박한 상황인데 이 무슨 한가한 소리인가 싶으셔도 우리는 주님의 자녀! 끝까지 주님의 전능, 전지, 편재, 그리고 사랑과 섭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붙들어 보시면 압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시야에 다른 건 안 들어옵니다. 제발 두리번거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heaven_and_hell, 58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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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out...

황교안 무소속 후보밖에는 길이 없네요

 

이토록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없다니...

 

윤 대통령님도 창당 안 하고, 헌재 결과 받아들인다라고 윤상현 의원 통해 언급하셔서, 윤 대통령님 역할도 계엄까지로 막을 내린다고 하네요

 

이재명 관련 재판들은 법원에서 출석 통보 포기하고, 김만배는 오늘 무죄판결 나고... 대 놓고 법이 없는 상태가 되었어요

 

마치 모압-암몬-마온이 유다에 쳐들어왔을 때 여호사밧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심정이랑 비슷하네요

 

중국이 깊게 쳐들어와서 무정부 상태를 만들어놓았는데 국민들은 정신 못 차리고 있고... //

 

 

이상은 어젯밤 받은 어느 우국충정 지사의 카톡입니다. 아래는 제가 보낸 답신입니다.

 

 

주님 복음서 시절, 자기 지상 조국 유다의 운명에 대해 취하셨던 태도가 생각납니다. 우리는 나라를 사랑할 때에도, 의롭고 올바름을 사랑할 때에도,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 안에서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상황, 밖으로는 로마의 식민 통치, 안으로는 나라의 독립을 꾀하는 끊임없는 움직임 가운데서도 주님은 한가로이(?) 천국 이야기만 하시고, 사람들을 치료하고 다니실 뿐이셨습니다. 그 덕에 나라 안팎 권력 잡은 자들, 정치인들의 시선을 피하실 수 있었지만... 아마 대제사장들을 비롯, 당대 종교 리더십들의 시기, 질투만 아니었어도 주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할 일은 없으셨을 뻔할 정도였습니다.

 

만일 주님이 지금 이 대한민국 상황에 오셔서 저 복음서 시절처럼 동일한 사역에 힘쓰고 계시면... 지금은 뭐 좀 달라질까요? 아마 똑같은 상황이 전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위 종교 리더십이라는 사람들의 수많은 지적질 때문에 말입니다. 나라 사랑이라든지, 정의와 공정을 사랑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잘, 그러니까 주님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처럼 사람들을 모아 집회를 열어 로마에 아부하는 종교,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타도를 외치시지도, 그렇다고 로마에 부역해야 우리는 살 수 있다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아예 그런 현실 정치에 관여하시지 않았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22:21)라고 하신 주님이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는 겉을 보지만, 주님은 속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다의 정치적 상황이 겉이라면, 유다를 비롯, 온 세상에 만연한 지옥의 기운, 곧 속을 주님은 상대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민주주의든, 공산, 전체주의, 사회주의든 사실 무슨 무슨 주의 같은 것 때문에 주님의 일과 계획, 영원하신 섭리가 차질을 빚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갈 사람이 천국 못 가고, 천국 못 갈 사람이 천국 가고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지상 어떤 정치 제도나 체제에 의해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재명 같은 사람 하나 때문에 주님이 곤란을 겪으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묻는 빌라도에게 '네 말이 옳도다'(마27:11) 하신 주님이십니다. 지금도입니다. 지금도 그때처럼 겉과 속 상황이 전개되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께 주목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어떠하심을 위해 굳이 사람들의 예배와 영광, 찬송을 필요로 하는 분도 아니시고. 그런 걸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신도 아니십니다. 사람들의 예배, 영광, 찬송 없이도 주님은 이미 모든 것이 충분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비유하자면, 저 하늘의 해와 같은 분이셔서 우리의 무슨 찬송과 영광 돌림은 그저 성냥개비 하나 켜서 그 빛에 보태는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더러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며, 주님을 섬기라 하시는 건 뭐가 부족하셔서가 아니라 순전히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서 지낼 수 있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주님은 정말 크신 분이십니다. 천국보다 크셔서 천국 밖에 계신 분입니다. 천국을 비롯한 모든 영계와 이 세상 자연계, 온 우주 만물 등, 이 피조 세계 전체도 주님을 모시기에는 부족한, 그런 신이십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아주 가까이 모시는 삼층천 한 가운데 천사들조차도 주님이 얇은 보호막을 입혀주시지 않으면 주님의 영광의 그 기운에 해를 입으며, 주님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신 채 그대로 천국이나 지옥을 방문하시면, 그곳은 주님의 그 날 것 그대로의 신성(the Divine)을 감당할 수 없어 그대로 소멸되고 맙니다. 그 속 사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그 겉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 이신, 그리고 신적 진리(Divine Truth)이신 성령이 해처럼 방사되시는, 신적 삼위일체(Divine Trinity)이신 주님은 참으로 크고 두려우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비록 지금은 분명 엄중한 상황이지만, 우리는 이런 신, 이런 주님을 믿고, 주님 안에서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51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마26:51-54)

 

그 능력의 천사들조차 주님 뒤에서 잠자코 수종 들었음을 생각합시다. 그 정말 기가 막힌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주님이 행하실 일을 사모하며 오직 주님의 선(Divine Good)과 진리(Divine Truth), 그 아름다우신 신성(the Divine)에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늘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상의 조국 유다의 엄중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나를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 역시 중심을 잡고, 주님처럼 우리도 속에 주목하고 집중, 우리 신앙의 기본으로, 첫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하겠고, 철저히 주님 사랑, 이웃 사랑 가운데 모든 걸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주님 사랑, 나라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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