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에는 ‘오늘날이상태는시험,불행또는슬픔없이존재하는경우가거의없는데,이를통해몸과세상에속한것들,곧사람에게고유한것들이잠잠해지고,마치죽은것처럼되기때문입니다’라는 매우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왜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 있어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는 것일까요? 실제로 주위를 보면 큰 고난을 겪지 않고도 비교적 겸손하고 신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AC.8은 모든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큰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불행,슬픔을많이겪은사람일수록더거듭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원문도 이 상태가 그러한 일들 ‘없이존재하는경우가거의없다’고 말하지, ‘절대로존재할수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핵심은 고난의 필연성 자체가 아니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는것’에 있습니다.
평소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며 자기 힘으로 삶을 이끌어 간다고 느낍니다. 건강, 경제적 안정, 사회적 인정, 자신의 계획과 판단, 익숙한 인간관계와 생활환경 등이 잘 유지될 때에는 이러한 자기 확신이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물론 건강이나 경제적 안정이나 사회적 관계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이 그것들을 자기 삶의 궁극적인 토대로 여기고, 자기 판단과 능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될 때입니다.
시험이나 불행이나 슬픔은 때때로 바로 이러한 자기 확신을 흔듭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나거나, 의지하던 것이 흔들리거나, 자기 판단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면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이전처럼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AC.8에서 그것들이 ‘잠잠해지고마치죽은것처럼된다’는 것은 그것들이 완전히 제거된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것들의 지배력이 약해진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때 이전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것이 나타날 가능성이 생깁니다. AC.8은 속 사람 안에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평소 자기 생각과 욕망과 세상에 대한 관심이 너무 크게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그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겉 사람의 소리가 잠잠해지면 유아기부터 주님께서 보존해 두신 신앙의 지식과 선한 것들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용될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이 리메인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리메인스는 이미 주님께서 저장해 두셨으며, 고난은 경우에 따라 겉 사람의 지배력이 약해지는 계기가 될 뿐입니다.
또한 시험이나 불행이 자동으로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어려움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지고 원망과 자기연민에 빠질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변화의 원인을 고난 자체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거듭남의 주체는 언제나 주님이시며, 시험과 불행과 슬픔은 주님의 섭리 안에서 사용될 수 있는 상황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큰 고난 없이도 비교적 평탄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바로 이 때문에 AC.8의 ‘거의없다’라는 표현을 그대로 존중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거듭남의 과정은 동일한 외적 사건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큰 불행이 없어도 사람 안에서는 자기 뜻과 주님의 뜻 사이의 갈등, 양심의 책망, 자기 사랑을 내려놓는 내적 싸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비교적 조용한 방식으로 자기 확신이 낮아지고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외적 형편만 보고 그의 내적 거듭남의 과정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AC.8을 읽으면서 ‘주님께서사람을거듭나게하시기위해일부러불행을주신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람이 이미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시험과 불행과 슬픔까지도 주님께서는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것들을 통하여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속 사람 안에 보존된 리메인스가 사용될 수 있도록 섭리하실 수 있다는 쪽에 초점을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고난의 크기 자체는 거듭남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지나면서 겉 사람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사람에게 고유한 것과 주님께 속한 것을 조금 더 분명하게 구별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큰 시련이 그 계기가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비교적 조용한 내적 갈등과 깨달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거듭남을 이루시는 분은 고난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AC.8에서 시험, 불행, 슬픔을 강조하는 이유는 고난 자체를 영적으로 높이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것들이 너무 강하게 활동하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이미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신 것들이 드러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지배력이 잠잠해질 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 자신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조금씩 배우고, 주님께 속한 것과 자기에게 속한 것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AC.8이 말하는 두 번째 상태에서 고난이 갖는 의미입니다. (AC.8심화1)
두번째상태는주님께속한것들과사람에게고유한것들이서로구별되는때입니다.주님께속한것들은말씀에서‘리메인스’(remains)라고불리며,여기서는특별히유아기부터배워온신앙의지식들을뜻합니다.이것들은저장되어있다가사람이이상태에이르기전까지는드러나지않습니다.오늘날이상태는시험,불행또는슬픔없이존재하는경우가거의없습니다.이러한것들로말미암아몸과세상에속한것들,곧사람에게고유한것들이잠잠해지고마치죽은것처럼되기때문입니다.이와같이겉사람에속한것들이속사람에속한것들로부터분리됩니다.속사람안에는주님께서이때까지저장해두신리메인스가있으며,바로이러한쓰임을위해보존되어온것입니다. The second state is when a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and those which are proper to man.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and here are especially knowledges of faith,which have been learned from infancy,and which are stored up,and are not manifested until the man comes into this state.At the present day this state seldom exists without temptation,misfortune,or sorrow,by which the things of the body and the world,that is,such as are proper to man,are brought into quiescence,and as it were die.Thus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are separated from those which belong to the internal man.In the internal man are the remains,stored up by the Lord unto this time,and for this use.
해설
AC.8은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AC.7의 첫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아직 ‘혼돈’, ‘공허’, ‘흑암’가운데 있지만 주님의 자비가 먼저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상태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속한것들’과 ‘사람에게고유한것들’사이에 구별이 생기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사람이 이전보다 종교적이 되거나 도덕적으로 나아지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인지를 점차 구별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리메인스 전체에 대한 완전한 정의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여기서는특별히’라고 한정하면서 유아기부터 배워 온 ‘신앙의지식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AC를 따라가면 리메인스는 신앙의 지식에만 한정되지 않고, 주님께서 인간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그리고 선한 정서와 관련된 훨씬 풍성한 의미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AC.8에서는 우선 ‘사람이스스로만들어낸것이아니라주님께서인간안에저장하고보존해두신것’이라는 핵심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리메인스가 곧바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유아기와 어린 시절부터 많은 선과 진리를 접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모두 즉시 그의 의식적인 신앙과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감추어진 채 저장되어 있다가 거듭남의 과정에서 필요한 때가 되었을 때 주님께서 그것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AC.8은 리메인스가 ‘저장되어있다가사람이이상태에이르기전까지는드러나지않는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안에 무엇이 보존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는 이미 훨씬 오래전부터 그의 거듭남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두 번째 상태가 ‘시험,불행또는슬픔없이존재하는경우가거의없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여기서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기 위해 반드시 불행을 보내신다거나,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이 더 잘 거듭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문도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반드시 고난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거의없다’고 표현합니다. 핵심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일을 통하여 ‘몸과세상에속한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평소 자기의 판단과 능력, 세상에서의 성취와 안정, 몸의 욕구와 외적인 조건을 매우 강하게 붙들고 살아갑니다. 이것들이 인간의 삶에서 모두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몸도 필요하고 세상에서 맡은 일과 관계와 책임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인간 안에서 주도권을 차지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가릴 때입니다. 시험과 불행과 슬픔은 때때로 사람이 의지하던 외적인 것들의 힘을 약하게 하고, 자기 자신만으로 모든 것을 붙들 수 있다는 확신을 잠잠하게 합니다. AC.8에서 ‘마치죽은것처럼된다’는 것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실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지배력이 잠잠해지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여기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이것 역시 인간이 둘로 쪼개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뒤섞여 있어 그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면서 속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해 두신 것들이 드러날 수 있게 되고, 사람은 이전에는 구별하지 못했던 두 근원을 조금씩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분리’는 거듭남에 필요한 영적 구별이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말이 ‘사람에게고유한것들’입니다. Potts의 영어 ‘propertoman’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앞으로 매우 중요해지는 개념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생각과 의지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참된 선과 진리는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AC.8의 두 번째 상태는 바로 이 구별이 처음 분명해지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렇다고 시험이나 불행이 자동으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 완고해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변화의 근원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AC.8의 중심을 ‘고난을받아야거듭난다’로 잡으면 안 됩니다. 중심은 주님께서 이미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주님께 속한 것과 자기에게 속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8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사실 시험이나 슬픔이 아닙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거듭남을 의식하기 오래전부터 주님께서 이미 그 사람 안에 필요한 것을 저장해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거듭남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보존하신 것을 적절한 때에 사용하시면서 거듭남을 이끌어 가십니다. 리메인스는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구원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주님의 섭리 가운데 준비되어 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7에서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던 사람은 AC.8에 이르러 처음으로 하나의 구별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내가선하다고생각하는것’과 ‘실제로주님으로부터오는선’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며, ‘내생각’과 ‘주님의진리’역시 저절로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별이 생겨야 이후의 회개와 신앙의 삶도 가능해집니다. AC.8의 두 번째 상태는 완성된 거듭남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보존해 두신 것을 사용하시면서 인간 안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시작하시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AC.8해설)
앞장에서말하고보여준것으로부터,이름들이이단과교리를의미한다는것이분명합니다.그러므로이장의이름들이사람을뜻하는것이아니라어떤것들을뜻하며,여기서는교리들또는교회들을뜻한다는것을알수있습니다.이교리들또는교회들은여러변화를겪었음에도불구하고태고교회때부터‘노아’(Noah)에이르기까지보존되었습니다.그러나모든교회는시간이흐르면서쇠퇴하여마침내소수에게만남게됩니다.홍수때그것이남아있던그소수를‘노아’(Noah)라하였습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and shown in the foregoing chapter, it is evident that by names are signified heresies and doctrines. Hence it may be seen that by the names in this chapter are not meant persons, but things, and in the present instance doctrines, or churches, which were preserved, notwithstanding the changes they underwent, from the time of the most ancient church even to “Noah.” But the case with every church is that in course of time it decreases, and at last remains among a few; and the few with whom it remained at the time of the flood were called “Noah.”
[2]참된교회가쇠퇴하여소수에게만남게된다는것은이와같이쇠퇴해온다른교회들에서도분명히알수있습니다.남아있는사람들은말씀에서‘리메인스’(remains)와‘남은자’(remnant)라하며,‘땅의가운데’또는‘중앙에’있다고합니다.전체적인경우가그러한것처럼개별적인경우도그러합니다.즉교회의경우와마찬가지로각사람에게도그러합니다.주님께서모든사람안에리메인스를보존하지않으신다면그는필연적으로영원히멸망할수밖에없습니다.영적생명과천적생명이리메인스안에있기때문입니다.일반적또는보편적인경우도마찬가지입니다.교회또는참된신앙이남아있는사람들이언제나얼마간존재하지않는다면인류는멸망할것입니다.일반적으로알려진것처럼몇사람을위하여한성읍이,때로는한나라전체가구원받기도하기때문입니다.이점에서교회는인체와같습니다.심장이건강한동안에는그주변의내장들도생명을유지할수있지만,심장이쇠약해지면신체의다른부분들이영양을공급받지못하여사람이죽습니다.마지막리메인스가바로‘노아’(Noah)가의미하는것입니다.창6:12과다른여러곳에서알수있듯온땅이부패하였기때문입니다.That the true church decreases and remains with but few, is evident from other churches which have thus decreased. Those who are left are in the Word called “remains,” and a “remnant,” and are said to be “inthemidst,” or “middle,” “oftheland.” And as this is the case in the universal, so also it is in the particular, or as it is with the church, so it is with every individual man; for unless remains were preserved by the Lord in everyone, he must needs perish eternally, since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are in the remains. So also in the general or universal—if there were not always some with whom the church, or true faith, remained, the human race would perish; for, as is generally known, a city, nay, sometimes a whole kingdom, is saved for the sake of a few. It is in this respect with the church as it is with the human body; so long as the heart is sound, life is possible for the neighboring viscera, but when the heart is enfeebled, the other parts of the body cease to be nourished, and the man dies. The last remains are those which are signified by “Noah”;for(as appears from Gen. 6:12, as well as from other places) the whole earth had become corrupt.
하나님이보신즉땅이부패하였으니이는땅에서모든혈육있는자의행위가부패함이었더라(창6:12)
[3]각사람안에존재하는리메인스뿐아니라교회전체안에존재하는리메인스에관해서도선지서에서많이말씀하고있습니다.이사야에서는, Of remains as existing in each individual as well as in the church in general, much is said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이말씀에서거룩함은리메인스에관하여서술되며,이리메인스는교회의리메인스뿐아니라교회에속한사람의리메인스도의미합니다.시온과예루살렘에‘남아있는자들’(thoseleft)이단지‘남아있다’는이유만으로거룩할수는없기때문입니다.다시이사야에서는, in which passage holiness is predicated of the remains, by which are signified the remains of the church, and also of a man of the church; for “thoseleft” in Zion and Jerusalem could not be holy merely because they were “left.” Again:
[4]사람또는교회의남은것,곧리메인스는또한십분의일로표상되었으며,그것은거룩한것이었습니다.그래서십을포함하는수도거룩하였으며,따라서‘십’(ten)은리메인스에관하여서술됩니다.이사야에서는, The residue or remains of a man, or of the church, were also represented by the tenths, which were holy; hence also a number with ten in it was holy, and “ten” is therefore predicated of remains; as in Isaiah:
이말씀들과다른많은구절에서속뜻으로는지금까지말해온‘리메인스’(remains)가의미됩니다.교회의리메인스로말미암아한성읍이보존된다는것은소돔에관하여아브라함에게하신말씀에서도분명합니다. In these and many other passages, in the internal sense are signified the “remains” of which we have been speaking. That a city is preserved for the sake of the remains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to Abraham concerning Sodom:
AC.468은 창5의 ‘장개요’를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제시된 이름들의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확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장의이름들이사람을뜻하는것이아니라’ 교리 또는 교회를 뜻한다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유보해 두었던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적어도 창5의 속뜻을 해설하는 이 자리에서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는 개인들의 일대기를 설명하기 위한 이름들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며 변화해 온 교리와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창5의 족보 형식은 속뜻으로는 교회의 영적 역사가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교회들이 ‘여러변화를겪었음에도불구하고’ 태고교회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보존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462-467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줍니다. 처음에는 천적인 태고교회가 있었고, 이후 그 상태가 점차 달라졌으며, 라멕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홍수 때까지 참된 교회가 남아 있던 소수가 있었고, 바로 그들을 ‘노아’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노아’는 이 문맥에서 단지 열 번째 교회의 명칭만이 아니라, 이전 교회가 거의 사라진 가운데 주님께서 보존하신 ‘마지막리메인스’를 나타냅니다.
[2]에서 이 ‘리메인스’의 원리는 교회 전체에서 한 사람의 내면으로 확대됩니다. 이것이 AC.468의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교회 전체에 참된 것과 선한 것이 소수에게 남아 있어 인류 전체가 보존되는 것처럼, 한 사람 안에도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과거의 좋은 기억 정도로 말하지 않습니다.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바로 이 리메인스 안에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그의 내면에 보존하신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들이 훗날 거듭남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모든사람안에리메인스를보존하지않으신다면그는필연적으로영원히멸망할수밖에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심장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심장이 건강한 동안에는 주변의 장기들도 생명을 유지하지만, 심장이 쇠약해져 더 이상 영양을 공급하지 못하면 다른 부분들도 함께 죽게 됩니다. 교회 안의 리메인스가 이와 같습니다. 참된 교회가 외적으로 크게 쇠퇴하더라도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소수를 보존하시는 동안에는 인류와 교회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노아’가 바로 홍수 직전 이러한 마지막 리메인스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보존은 단지 몇 사람이 재난에서 살아남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인류 가운데 영적 생명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 ‘교회안에마지막까지남아있는선과진리,곧리메인스’를 보존하시는 섭리를 보여 줍니다.
[3]에서 인용되는 사4:3-4, 사10:20-21, 렘50:20, 미5:7은 바로 이 원리가 말씀 전체에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남아있는자’, ‘남은자’, ‘피한자’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단순히 숫자상 살아남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시온과예루살렘에남아있는자들이단지남아있다는이유만으로거룩할수는없다’고 말하는 까닭도 이것입니다. 이들이 ‘거룩하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남은자’의 주제는 AC의 리메인스 교리와 깊이 연결됩니다.
[4]에서는 이 리메인스가 왜 ‘십’이라는 수와 연결되는지가 설명됩니다.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표상하였기 때문에 십을 포함하는 수가 거룩하게 사용되었고, ‘십’은 리메인스에 관하여 서술되었습니다. 그래서 사6:12-13에서는 모든 것이 황폐해진 뒤에도 ‘십분의일’과 ‘거룩한씨’가 남으며, 암5:3에서는 천 명 가운데 백 명, 백 명 가운데 열 명이 남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산술적인 비율 자체가 아니라, 황폐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무엇인가를 남겨 두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거룩한 씨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18:32의 소돔 이야기가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거기서십명을찾으시면’이라는 아브라함의 간구와 ‘내가십명으로말미암아멸하지아니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십’은 단순한 인원수를 넘어 리메인스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몇사람을위하여한성읍이,때로는한나라전체가구원받기도한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외적인 규모가 아니라 그 안에 아직 보존되어 있는 선과 진리입니다.
이렇게 AC.468은 창5의 장 개요 전체를 ‘리메인스’라는 놀라운 원리로 마무리합니다. 태고교회는 쇠퇴했고 퍼셉션도 마침내 사라졌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소멸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까지 보존된 것을 ‘노아’라 하셨고, 바로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고대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이 질서는 교회의 역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의 거듭남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안에서도 때로는 선과 진리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주님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그것을 붙들고 다시 영적 생명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교회의 마지막 남은 자인 동시에, 인간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끝까지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섭리를 보여 주는 이름입니다. (AC.468해설)
‘라멕’(Lamech)은태고교회가누렸던퍼셉션을전혀간직하지못한것으로묘사되며,‘노아’(Noah)는새교회로묘사됩니다.(29절)“Lamech” is described as retaining nothing of the perception which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and “Noah” is described as a new church. (verse 29)
AC.467은 앞의 AC.466에서 노아를 ‘고대교회’라고 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아홉 번째 교회인 ‘라멕’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그다음 ‘노아’는 ‘새교회’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라멕에서 노아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히 아홉 번째 교회 다음에 열 번째 교회가 이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한 질서가 끝나고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시작되는 중요한 전환입니다.
여기서 ‘태고교회가누렸던퍼셉션’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특징은 주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참인지 추론하여 받아들이는 방식과 달랐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AC.467은 라멕에 이르러 그 퍼셉션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462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온 변화가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줍니다. ‘셋’은 처음의 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 않았고, 이후 여러 교회가 계속 이어졌으며, 마침내 ‘라멕’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창5의 여러 이름을 통하여 나타나는 변화는 단순히 교회의 명칭이 바뀌어 온 과정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특징짓던 내적 상태가 점차 달라져 마침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지속될 수 없게 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노아’가 등장합니다. AC.467은 노아를 단순히 라멕 다음의 교회라고 하지 않고 ‘새교회’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라멕에게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면, 다음 교회는 이전의 상태를 그대로 회복하거나 반복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달라진 인간의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필요했고, 그 새 교회를 ‘노아’라고 한 것입니다. 앞의 AC.466에서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전환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에녹에 관한 AC.464도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을 교리로 형성하여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했던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영원히 같은 방식으로 지속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제 라멕에 이르러 그 퍼셉션이 사라지고 노아라는 새 교회가 시작된다는 AC.467의 설명은, 왜 앞선 시대에 그러한 교리의 보존이 필요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다만 그 보존된 교리가 새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이후의 본문 해설을 따라가며 살펴보아야 합니다.
AC.467은 결국 태고교회에서 고대교회로 넘어가는 경계선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한쪽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라멕’이 있고, 다른 쪽에는 ‘새교회’인 ‘노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 교회의 끝이 곧 주님의 역사의 끝은 아닙니다. 한 형태의 교회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에도 주님은 인간의 달라진 상태에 맞추어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라멕과 노아 사이에는 단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의 끝에서도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고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가 함께 나타나 있습니다. (AC.467해설)
열번째교회는홍수후세교회의모체가되었으며,그이름을‘노아’(Noah)라하였습니다.이교회를고대교회라합니다.(28-29절)A tenth, the parent of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 was named “Noah.” This church is to be called the ancient church. (verses 28–29)
AC.466은 AC.460부터 이어져 온 교회들의 계승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으로 이어진 뒤, 열 번째 교회로 ‘노아’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노아를 단순히 그 연속 가운데 하나를 더 추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교회에 새로운 이름을 붙입니다. 바로 ‘고대교회’입니다. 따라서 노아는 태고교회의 이어지는 여러 교회가 끝나 가는 지점인 동시에,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보여 주는 이름입니다.
원문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홍수후세교회의모체’(theparentofthreechurchesaftertheflood)입니다. 노아라 하는 교회로부터 홍수 후에 다시 세 교회가 이어져 나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AC.466은 아직 그 세 교회가 무엇이며 각각 어떠한 상태인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노아가 이전 교회의 마지막에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홍수 이후에 이어질 교회들의 출발점이 된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이 점에서 ‘노아’를 열 번째 교회라고 하는 것과 ‘고대교회’라고 하는 것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노아는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순서로는 열 번째이지만, 그 성격에서는 새로운 교회의 시작입니다. 즉 교회의 역사가 완전히 끊어진 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앞선 시대에서 보존된 것을 통하여 다음 시대의 교회가 준비됩니다. 창5의 교회 계승이 노아에 이르면서 하나의 큰 전환점을 맞는 것입니다.
‘이교회를고대교회라한다’는 말은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태고교회’와도 분명히 구별됩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는 단순히 시대가 앞서고 뒤선다는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회의 상태와 방식에도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AC.466은 아직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는 곳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노아와 함께 ‘고대교회’라는 새로운 교회가 시작된다는 점을 붙들어 두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구체적인 차이는 이후의 해설에서 차례로 밝혀집니다.
또한 AC.466은 앞에서 에녹에 관하여 살펴본 내용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에서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이 교리로 형성되어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이제 노아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와는 다른 상태의 교회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앞선 교회에서 보존된 것이 후대에 쓰이도록 준비되었다는 AC.464의 설명은, 교회의 상태가 달라져도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를 준비하신다는 큰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66은 그래서 창5전체의 방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이 장은 태고교회에서 출발하여 여러 교회를 거쳐 단순히 쇠퇴와 종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노아’라는 열 번째 교회에 이르러 다음 시대를 준비합니다. 태고교회의 한 시대가 저물어 가는 가운데서도 주님은 다음 교회를 위한 것을 보존하시고, 홍수 이후 다시 교회가 이어질 길을 마련하십니다. ‘노아’는 바로 그 연속과 전환의 자리에 놓인 교회이며, 그 교회를 가리켜 스베덴보리는 ‘고대교회’라고 합니다. (AC.466해설)
‘에녹’(Enoch)이라하는교회는태고교회에계시되고그교회가퍼셉션한것들로부터교리를형성한것으로묘사됩니다.이교리는당시에는쓸모가없었지만후대의쓰임을위해보존되었습니다.이것을가리켜‘에녹이더이상있지아니하였으니,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기때문이라’(Enochwasnomore, becauseGodtookhim)고한것입니다.(22-24절)The church called “Enoch” is described as framing doctrine from what was revealed to and perceived by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doctrine, although of no use at that time, was preserved for the use of posterity.This is signified by its being said that “Enochwasnomore, becauseGodtookhim.” (verses 22–24)
AC.464는 앞의 AC.463에서 일곱 번째 교회로 제시된 ‘에녹’이 다른 교회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줍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을 모아 ‘교리’로 형성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녹이 새로운 진리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태고교회가 주님으로부터 계시받고 퍼셉션을 통해 알았던 것들을 일정한 교리 형태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이후 교회의 상태가 달라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태고교회는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교리로 배워서 아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안에서 그것을 퍼셉션하던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퍼셉션이 살아 있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이미 내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따로 교리 형태로 정리하여 배우는 일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AC.464가 에녹이 형성한 교리가 ‘당시에는쓸모가없었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리는 ‘후대의쓰임을위해’ 보존되었습니다. 이 짧은 표현 안에는 교회의 상태가 앞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이 계속 유지된다면 별도의 교리가 필요하지 않았겠지만, 그것이 사라져 갈 때에는 이전에 퍼셉션으로 알았던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보존하고 전달할 필요가 생깁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한 일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퍼셉션으로 받아들였던 것들을 교리 형태로 남김으로써 후대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교리’는 퍼셉션을 대신하여 에녹이 만들어 낸 인간적인 사상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입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교회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이전에는 내적으로 직접 퍼셉션하던 것이 이제는 가르치고 배우며 보존할 수 있는 형태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이후 교회가 사용할 교리 사이에 놓인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 줍니다.
이와 연결되는 말씀이 ‘하나님이그를데려가시므로세상에있지아니하였더라’입니다. 장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에녹이라는 교회가 형성한 교리가 ‘후대의쓰임을위해보존되었다’는 뜻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다’는 말씀은 장 개요의 속뜻으로는 에녹이라는 교회의 역할과 그 교리가 보존된 일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의 보다 구체적인 의미는 뒤의 본문 해설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AC.464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주님께서 한 교회의 상태가 변해 가는 가운데서도 다음 시대에 필요한 것을 미리 보존하신다는 점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계속 같은 방식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이 함께 사라지도록 두지 않으셨습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를 통하여 그것을 교리 형태로 보존하여 후대의 쓰임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교회의 상태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가 달라질 때에도 진리가 다음 세대에 전달될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함께 보여 줍니다. (AC.464해설)
이장은특별히태고교회가이어지는여러세대를거쳐홍수에거의이르기까지계속되어간과정을다룹니다. This chapter treats specifically of the propag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rough successive generations, almost to the flood.
해설
AC.460은 창5의 ‘장개요’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보여 주는 짧지만 중요한 문장입니다. 창5의 본문은 여러 이름과 출생, 나이와 죽음이 반복되는 족보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에서 특별히 다루는 것이 ‘태고교회가이어지는여러세대를거쳐홍수에거의이르기까지계속되어간과정’이라고 먼저 밝힙니다. 따라서 창5를 읽을 때에는 문자에 나타나는 족보의 형식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태고교회가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해 가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이어지는여러세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시간이 흘러 한 세대 다음에 또 한 세대가 왔다는 정도의 말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본문 해설에서 더욱 분명해지겠지만, 창5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차례로 이어진 여러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관심은 각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일대기를 들려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하나의 교회가 다음 교회로 이어지면서 그 상태가 어떻게 달라져 갔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창5의 족보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문자상으로는 이름들이 세대별로 이어지는 족보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에 속한 여러 교회가 차례로 이어지면서 나타낸 서로 다른 상태들의 연속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등장하는 이름들을 먼저 역사적 개인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 곧 내적 의미로는 그 이름들이 무엇을 나타내며, 그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교회의 어떠한 상태와 변화를 보여 주시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과정의 끝을 AC.460이 ‘홍수에거의이르기까지’라고 정한다는 점입니다. 창5는 아직 홍수 자체를 다루지 않지만, 이 장에서 전개되는 태고교회의 역사는 홍수 직전까지 이어집니다. 따라서 창5는 여러 세대와 교회의 상태를 각각 따로 떼어 보여 주는 장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흐름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까지 이르는지를 AC.460이 먼저 밝혀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반복해서 등장할 ‘낳고’, ‘살고’, ‘죽었더라’라는 표현과 여러 숫자를 읽는 데에도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아직 AC.460에서는 그 각각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모든 기록이 태고교회의 이어지는 세대들을 다루는 하나의 전체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개별 이름이나 숫자의 속뜻을 살필 때에도 언제나 ‘지금태고교회의어떠한상태와그이어짐을말하고있는가?’라는 전체 문맥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AC.460은 창5를 단순히 오래된 족보로 지나치지 않게 합니다. 말씀의 문자 안에는 태고교회가 세대를 거쳐 이어지고 마침내 홍수 직전까지 이르는 긴 영적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앞으로의 ‘장개요’와 본문 해설은 바로 그 역사를 하나씩 펼쳐 보여 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을 따라가면서 교회의 상태가 어떻게 이어지고 달라지는지, 그리고 그러한 변화 속에서도 주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를 차츰 보게 될 것입니다. (AC.460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