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말씀은그들이‘가인’(Cain)이나타내는신앙을소멸시켰다는뜻입니다.그신앙에폭력을가하는것은신성모독이었습니다.동시에그들은신앙을통해태어나야할체어리티까지소멸시켰는데,이는훨씬더큰신성모독이었습니다.이로인해정죄가있었으며,이것이곧‘일흔일곱배의보복’(seventyandsevenfoldavengement)입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y had extinguished the faith meant by “Cain,” to do violence to which was sacrilege, and at the same time had extinguished the charity which should be born through faith, a far greater sacrilege, and that for this there was condemnation, that is, a “seventyandsevenfoldavengement.”
해설
AC.432는 창4:24의 ‘가인을위하여는벌이칠배일진대라멕을위하여는벌이칠십칠배이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27-431에서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상처’와 ‘타박상’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설명들을 하나로 모아, 라멕의 말에 담긴 신성모독과 정죄의 의미를 밝힙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인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신앙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것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이 파괴되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이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낸 의견이 아니라 교회의 거룩한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라멕의 상태는 신앙의 소멸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신앙을통해태어나야할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고 말합니다. 앞의 AC.429에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한 이유가 여기서 다시 중요해집니다.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는 것은 신앙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훨씬더큰신성모독’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독자가 주의할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단순히 지식과 행동의 두 항목으로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AC.432에서 문제 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신앙에 관한 내용을 조금 잘못 이해했거나 이웃을 충분히 돕지 못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 안의 거룩한 것인 신앙이 소멸되고,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된 상태를 말합니다. 앞의 번호들에서 ‘더이상성한곳이없다’고 설명한 황폐가 이번 번호에서는 신성모독과 정죄라는 표현으로 이어집니다.
‘훨씬더큰신성모독’이라는 말도 이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 자체가 신성모독이지만,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것은 그보다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과 무관한 별개의 덕목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신앙이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할 때,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의 한 문장만으로 모든 종류의 죄와 신성모독에 대한 일반적인 서열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소멸로 인해 ‘정죄’가 있었으며, 그것이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일흔일곱 배를 가인의 일곱 배보다 정확히 열한 배 무거운 형벌로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AC.432가 직접 밝히는 것은 이 표현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데 따른 정죄를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말만으로 주님께서 인간처럼 분노하여 복수하신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번 번호는 그 표현의 속뜻을 정죄라고 밝히지만, 정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한 모든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AC.432는 라멕의 고백에 담긴 황폐의 의미를 한층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들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고,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각각 신성모독과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하며, 그 결과인 정죄를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고 풀이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말은 단순히 더 큰 보복을 요구하는 선언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교회의 상태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AC.432해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31
‘상처’(wound)와‘타박상’(bruise)이더이상성한곳이없음을뜻하고,‘상처’(wound)는신앙이황폐해졌음을,‘타박상’(bruise)은체어리티가황폐해졌음을뜻한다는사실은‘상처’가‘사람’(man)에관해,‘타박상’이‘어린아이’(littleone)에관해쓰였다는점에서분명하게드러납니다. 신앙의황폐와체어리티의황폐는이사야에서도같은표현들로묘사됩니다. That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soundness no longer,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and by a “bruise” that charity was devastat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wound” is predicated of a “man,” and “bruise” of a “littleone.” The desolation of faith and the vastation of charity are described in the same terms in Isaiah:
이말씀에서‘상처’(wound)는황폐해진신앙에관해,‘타박상’(bruise)은황폐해진체어리티에관해,‘종기’(sore)는그둘모두에관해쓰였습니다. In this passage “wound” is predicated of faith desolated, “bruise” of charity devastated, and “sore” of both.
해설
AC.431은 라멕이 ‘내가한사람을죽여내게상처를입혔고,어린아이를죽여내게해를입혔다’고 한 말의 마지막 부분을 설명합니다. 앞의 AC.429에서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한다는 근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두 표현에 각각 연결된 ‘상처’와 ‘타박상’의 의미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표현이 더 이상 성한 곳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며,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어 하나만 떼어 놓고 의미를 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상처’가 ‘사람’에 관해 쓰였고, ‘타박상’이 ‘어린아이’에 관해 쓰였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앞에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으므로, 그들에게 연결된 상처와 타박상도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의 속뜻을 이해할 때 개별 표현뿐 아니라 표현들 사이의 관계도 함께 살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1:6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고 상처와 타박상과 새로 생긴 종기뿐인 모습을 묘사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온몸이 상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가 묘사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인용은 라멕의 말에 나오는 상처와 타박상이 단순한 육체적 부상을 넘어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근거가 됩니다.
여기서 세 표현은 서로 구별됩니다. ‘상처’는 황폐해진 신앙을, ‘타박상’은 황폐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종기’는 신앙과 체어리티 둘 모두에 관해 쓰입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비슷해 보이는 상처의 표현들을 하나의 뜻으로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서로 다른 표현이 사용된 데에는 그에 상응하는 의미의 구별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세 상처가 실제로 어떤 순서로 발생하는지, 각각 어떤 구체적인 악이나 거짓에 대응하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발바닥에서머리까지성한곳이없다’는 이사야의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상처가 한 부분에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에 성한 곳이 없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인용하면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고백을 단순히 신앙의 일부가 손상되었거나 체어리티가 잠시 약해진 상태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427에서도 그는 상처와 타박상이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상처들을 ‘짜내지도,싸매지도,기름으로부드럽게하지도않았다’고 이어집니다. 이러한 표현은 상처가 돌봄을 받지 못한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다만 AC.431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풀이하는 것은 상처와 타박상과 종기의 의미입니다. 짜내는 일이나 싸매는 일, 기름을 바르는 일의 개별 속뜻까지 이 번호에서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표현들을 곧바로 특정한 회복 과정에 일대일로 대응시키기보다, 우선 이사야가 묘사하는 상처의 심각성을 함께 읽는 것이 원문에 충실합니다.
이번 번호를 읽을 때 ‘황폐’와 일상적인 영적 연약함을 구별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거나 이웃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431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 곧 신앙과 체어리티에 더 이상 성한 곳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 말씀을 자신의 모든 부족함에 즉시 적용하여 회복할 수 없는 상태라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의 설명을 넘어섭니다. 특히 AC.431은 황폐의 의미를 밝히는 번호이지, 어떤 개인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번호가 아닙니다.
결국 AC.431은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상처’와 ‘타박상’이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하는지 설명합니다.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바탕으로 두 상처를 구별하고, 사1:6에서 같은 표현들이 사용된 사실을 통해 그 해석을 확인합니다. 이사야의 ‘성한곳이없다’는 말씀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심각성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신앙과 체어리티가 교회의 영적 온전함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AC.431해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30
말씀에서‘어린것’(alittleone),곧‘어린아이’(littlechild)는순진무구를뜻하며,체어리티도뜻합니다.참된순진무구는체어리티없이존재할수없고,참된체어리티도순진무구없이존재할수없기때문입니다. 순진무구에는세단계가있으며,말씀에서는이를‘젖먹이들’(sucklings),‘유아들’(infants),‘어린아이들’(littlechildren)이라는말로구별합니다.참된사랑과체어리티없이는참된순진무구도없으므로,‘젖먹이들’(sucklings),‘유아들’(infants),‘어린아이들’(littlechildren)은사랑의세단계도뜻합니다.곧젖먹이가어머니나유모를향해품는사랑과같은부드러운사랑,유아가부모를향해품는사랑과같은사랑,그리고어린아이가자신을가르치는사람을향해품는사랑과같은체어리티입니다.그래서이사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A “littleone,” or “littlechild,” in the Word, signifies innocence, and also charity, for true innocence cannot exist without charity, nor true charity without innocence. There are three degrees of innocence, distinguished in the Word by the terms “sucklings,” “infants,” and “littlechildren”; and as there is no true innocence without true love and charity, therefore also by “sucklings,” “infants,” and “littlechildren” are signified the three degrees of love: namely, tender love, like that of a suckling toward its mother or nurse; love like that of an infant toward its parents; and charity, similar to that of a little child toward its instructor. Thus it is said in Isaiah:
여기서‘어린양’(lamb),‘어린염소’(kid),‘송아지’(calf)는순진무구와사랑의세단계를뜻하고,‘이리’(wolf),‘표범’(leopard),‘어린사자’(younglion)는그반대되는것들을뜻하며,‘어린아이’(littlechild)는체어리티를뜻합니다. 예레미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Here a “lamb,” a “kid,” and a “calf” signify the three degrees of innocence and love; a “wolf,” a “leopard,” and a “younglion,” their opposites; and a “littlechild,” charity. In Jeremiah:
‘남자와여자’(manandwife)는이해력과의지에속한것들,곧진리와선을나타내며,‘유아와젖먹이’(infantandsuckling)는사랑의첫단계들을나타냅니다. ‘유아’(infant)와‘어린아이’(littlechild)가순진무구와체어리티를나타낸다는사실은누가복음에나오는주님의말씀에서도매우분명하게드러납니다. “Manandwife” denot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will, or of truth and of good; and “infantandsuckling,” the first degrees of love. That an “infant” and a “littlechild” denote innocence and charity is very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in Luke:
AC.430은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이 왜 체어리티의 소멸을 뜻하는지 설명합니다. 앞의 AC.429에서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뿐 아니라 순진무구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참된순진무구는체어리티없이존재할수없고,참된체어리티도순진무구없이존재할수없다’는 말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중심은 어린 나이 자체가 아니라, 순진무구와 사랑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순진무구’는 단순히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잘못을 저지를 능력이 없는 상태와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순진무구의 완전한 정의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참된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어린아이의 모습이 순진무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모든 어린아이가 언제나 사랑과 체어리티를 완전하게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어린아이는 우리가 살펴야 할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하면서, 말씀의 ‘젖먹이’, ‘유아’, ‘어린아이’를 구별합니다. 젖먹이는 어머니나 유모를 향한 부드러운 사랑과 연결되고, 유아는 부모를 향한 사랑과 연결되며, 어린아이는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이 구별은 사랑이 단 하나의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닌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모든 사람이 실제 나이에 따라 이 세 단계를 반드시 차례로 통과한다는 발달 이론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서 사용된 세 표현의 영적 의미를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사11:6을 인용합니다. 이 구절에는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어린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등장하며, 마지막에는 어린아이가 그들을 인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린양과 어린 염소와 송아지가 순진무구와 사랑의 세 단계를, 이리와 표범과 어린 사자가 그 반대되는 것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그들을인도한다’는 말에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한다고 밝힙니다. 이 인용의 목적은 각 동물에 대해 별도의 상세한 상응표를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렘44:7에서는 ‘남자와여자’에 이어 ‘유아와젖먹이’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이해력과 의지에 속한 것들, 곧 진리와 선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유아와 젖먹이는 사랑의 첫 단계들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의 문자적 문맥은 유다 백성의 악행과 그로 인한 멸절의 경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 안에서 진리와 선뿐 아니라 사랑의 첫 단계들까지 언급되고 있음을 밝힙니다. 특히 원문 끝의 ‘남은것이아무것도없게하려느냐’는 표현은 이러한 상실의 심각성을 드러냅니다. 다만 AC.430은 여기서 리메인스의 교리를 별도로 풀이하지 않으므로, 그 개념을 자세히 설명하려면 관련 번호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눅18:15, 17에서는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어린아이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사실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독자가 주목할 부분은 주님께서 단지 어린아이를 가까이하셨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같이받아들인다’는 표현을 통해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상태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가 천국의 삶과 무관한 부수적 성품이 아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사9:6을 인용하여 주님 자신이 ‘아이’라고 불리신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앞의 구절들에서는 어린양과 어린아이, 젖먹이와 유아를 통해 순진무구와 사랑의 여러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 의미를 주님 자신에게 연결합니다. 여기서 주님을 ‘아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의 능력이나 지혜가 미숙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말씀에서 그분은 기묘자, 모사, 하나님, 용사,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도 불리십니다.
이렇게 보면 AC.430은 ‘어린아이’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의 관계를 차례로 밝혀 갑니다. 먼저 두 가지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하고, 젖먹이와 유아와 어린아이를 통해 사랑의 세 단계를 구별합니다. 이어 이사야와 예레미야, 누가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 의미를 확인한 다음, 주님께서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라는 사실로 마무리합니다. 따라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단순히 어떤 선한 행동이 줄어들었다는 뜻을 넘어, 교회 안에서 순진무구와 분리될 수 없는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AC.430해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29
‘사람’(man[vir])이신앙을뜻한다는사실은이장의첫절에서분명하게드러납니다.하와가가인을낳았을때‘내가한사람을얻었다,여호와를’(Ihavegottenaman, Jehovah)이라고말했기때문입니다.여기서가인은신앙의교리를뜻했으며,그교리를‘한사람,여호와’(aman, Jehovah)라고불렀습니다.또한앞에서사람또는남자가이해력을뜻한다고밝힌내용에서도이를알수있습니다.이해력은신앙에속하기때문입니다.그가여기서‘어린것’(alittleone),곧‘어린아이’(alittlechild)라고부르는체어리티까지소멸시켰다는사실도여기에서따라나옵니다.신앙을부인하고죽이는사람은동시에신앙에서태어나는체어리티도부인하고죽이기때문입니다. That by a “man” [vir]is signified faith is evident from the first verse of this chapter, in that Eve said, when she bare Cain, “Ihavegottenaman,Jehovah”; by whom wa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aman,Jehovah.” It is evident also from what was shown above concerning a man or male, that he signifies understanding, which is of faith. That he had also extinguished charity, here called a “littleone,” or a “littlechild,” follows, for he who denies and murders faith, at the same time also denies and murders the charity that is born from faith.
해설
AC.429는 앞의 AC.427에서 라멕의 말을 풀이하면서 제시한 두 가지 상응의 근거를 설명합니다. 라멕이 ‘한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고,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것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왜 ‘사람’이 신앙을 나타내는지 밝힌 다음, 신앙의 소멸이 체어리티의 소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합니다.
‘사람’이 신앙을 뜻한다는 첫 번째 근거는 창4:1입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고 ‘내가한사람을얻었다,여호와를’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이 구절의 가인이 신앙의 교리를 뜻한다고 풀이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사람’은 단순히 남성이나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가인에게 적용된 ‘사람’이라는 표현을 앞선 해설과 연결하여, 그것이 신앙을 나타낸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근거는 사람 또는 남자가 ‘이해력’을 나타낸다는 앞선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해력이 신앙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해력을 통해 신앙에 관한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신앙’의 관계는 단순히 한 단어에 임의의 뜻을 붙인 결과가 아니라, 이해력과 신앙의 관계를 통해 설명됩니다. 다만 이해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살아 있는 신앙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해력이 신앙에 속한다는 관계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다면 왜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뜻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를 ‘신앙에서태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사람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동시에 부인하고 죽인다고 말합니다.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고 한 것은, 신앙의 소멸과 체어리티의 소멸이 서로 무관한 두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신앙에서태어나는체어리티’라는 표현은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며,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는 일을 경계합니다. 따라서 이 한 문장만으로 체어리티가 언제나 신앙보다 낮거나 부차적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AC.429의 직접적인 논지는 신앙을 소멸시키면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함께 소멸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 설명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창4장의 앞부분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는 문제를 다루었고, 라멕의 말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가 나타납니다. AC.429는 그 가운데 ‘사람’과 ‘어린아이’라는 표현을 통해 두 소멸의 관계를 밝힙니다. 라멕의 고백을 단순히 두 사람을 죽였다는 문자적 진술로만 읽으면 놓치기 쉬운 부분입니다.
결국 AC.429는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이 왜 신앙을 뜻하는지 창4:1과 이해력에 관한 앞선 설명을 통해 밝힙니다. 또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하는 이유를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신앙을 부인하고 소멸시키는 일은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의 소멸과도 연결됩니다. 이처럼 라멕의 말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사라진 교회의 황폐를 드러냅니다. (AC.429해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28
이절과다음절의내용에서‘라멕’(Lamech)이황폐를뜻한다는사실이매우분명하게드러납니다.그가‘한사람을죽였다’(slainaman)고하고,‘어린아이’(littlechild)를죽였다고하며,가인은일곱배로보복을받겠지만라멕은‘일흔일곱배로’(seventyandsevenfold)보복을받을것이라고말하기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and the following verse, it is very evident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for he says that he had “slainaman,” and a “littlechild,” and that Cain should be avenged sevenfold, and Lamech “seventyandsevenfold.”
해설
AC.428은 앞의 AC.427에서 풀이한 라멕의 고백을 다음 절까지 연결하여, 라멕이 왜 ‘황폐’를 나타내는지 확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새로운 상응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라멕이 직접 한 말들을 근거로, 그가 나타내는 상태가 황폐라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핵심은 창4:23의 ‘죽였다’는 표현과 창4:24의 ‘일흔일곱배’라는 표현을 함께 읽는 데 있습니다.
앞의 AC.427에서 ‘한사람을죽였다’는 말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었고,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두 표현을 다시 언급합니다. 라멕의 황폐는 단순히 신앙이 약해진 상태나 체어리티가 잠시 부족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앞 번호에서 설명했듯이,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와 관련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음 절의 ‘가인은일곱배,라멕은일흔일곱배’라는 말까지 함께 제시합니다. 창4:24는 가인에게 적용된 ‘일곱배’와 라멕에게 적용된 ‘일흔일곱배’를 대비합니다. 이 대비가 라멕의 황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이 이번 번호의 설명입니다. 다만 AC.428자체는 일곱과 일흔일곱의 속뜻을 아직 풀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흔일곱 배를 황폐의 정도를 나타내는 단순한 수치로 계산하거나, 가인보다 라멕이 정확히 열한 배 더 악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표현을 곧바로 주님께서 분노하여 가인이나 라멕에게 복수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보복의 성격을 설명하기보다,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두 죽음과 두 수치의 대비를 통해 황폐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보복과 숫자의 속뜻은 다음 절에 관한 설명을 살피면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처럼 AC.428은 짧지만 앞뒤 번호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AC.427은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밝히고, AC.428은 그 말과 다음 절의 보복에 관한 선언을 함께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라멕의 황폐에 관한 설명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창4:24의 ‘일곱배’와 ‘일흔일곱배’에 관한 해설로 독자를 이끕니다.
결국 라멕이 황폐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그가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고백하는 말에서 드러나며, 다음 절에서 가인과 라멕의 보복을 대비하는 표현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AC.428은 이 두 절을 하나의 문맥으로 읽게 하면서, 라멕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뿐 아니라 이어지는 ‘일흔일곱배’의 의미도 살펴야 함을 보여 줍니다. (AC.428해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창4:23)
AC.427
‘라멕’(Lamech)은앞에서와같이황폐를뜻합니다.그가‘자기아내들인아다와씰라에게말하기를,너희귀로내말을들으라’(saiduntohiswivesAdahandZillah, Withyourearsperceivemyspeech)고한것은고백을뜻합니다.이러한고백은교회가있는곳에서만이루어질수있는데,앞에서말했듯이그의‘아내들’(wives)은교회를나타냅니다. ‘내가한사람을죽여내게상처를입혔다’(Ihaveslainamantomywounding)는그가신앙을소멸시켰음을뜻합니다.‘사람’(man)은신앙을나타내기때문입니다.‘어린아이를죽여내게해를입혔다’(alittleonetomyhurt)는그가체어리티를소멸시켰음을뜻합니다. ‘상처’(wound)와‘타박상’(bruise)은더이상온전함이남아있지않음을뜻합니다.‘상처’는신앙이황폐해졌음을,‘해’(hurt)는체어리티가황폐해졌음을나타냅니다.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as before; that he “saiduntohiswivesAdahandZillah,Withyourearsperceivemyspeech” signifies confession, which can only be made where there is a church, whic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by his “wives.” “Ihaveslainamantomywounding”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faith, for by a “man” is signified faith; “alittleonetomyhurt”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charity.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no more soundness;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by a “hurt,” that charity was devastated.
해설
AC.427은 창4:23에 나오는 라멕의 말을 풀이합니다. 앞의 AC.421-426에서는 라멕의 아내들과 자녀들을 통해 새 교회의 내적·외적 요소, 그리고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다시 라멕 자신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앞에서와 같이 ‘황폐’를 나타낸다고 밝히며, 그의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에 관한 고백이라고 설명합니다.
라멕은 먼저 자기 아내들인 아다와 씰라에게 말을 듣도록 요청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을 ‘고백’으로 풀이합니다. 그가 아내들에게 말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아내들이 교회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고백이 교회가 있는 곳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고백은 단순히 어떤 사건을 이야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드러내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어 라멕은 자신이 ‘한사람’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사람’이 신앙을 나타내므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창4:23의 살인에 관한 표현을 문자적 사건의 차원에서만 읽지 않고, 교회 안에서 신앙이 소멸된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라멕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신앙을 소멸시켰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은 앞뒤의 황폐에 관한 설명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다른 표현으로 구별됩니다.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두 죽음을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에 연결함으로써, 이 고백이 교회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모두에 관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구별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와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4장의 앞부분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 그리고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를 다루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라멕의 고백을 통해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연결을 근거로 가인과 라멕의 상태가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427이 직접 밝히는 것은 라멕이 황폐를 나타내며, 그의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을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라멕은 이 두 죽음을 말하면서 자신에게 ‘상처’와 ‘해’가 생겼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상처’와 ‘타박상’이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상처는 신앙의 황폐를, 해는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들은 라멕이 입은 육체적 부상의 정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어 교회 안에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황폐’라는 말도 단순히 신앙생활이 잠시 약해지거나 체어리티를 충분히 실천하지 못한 상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말하며,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읽고 자신의 일시적인 연약함을 곧바로 라멕의 황폐와 동일한 상태로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는 라멕이 표상하는 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AC.427에서 라멕의 말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에 관한 고백입니다. 아다와 씰라는 교회를 나타내며, 그들에게 말을 듣도록 요청하는 것은 고백을 뜻합니다.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신앙의 소멸을,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상처와 해는 그 결과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의 황폐가 단순히 외적인 형식의 변화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생명에 관한 문제임을 살펴보게 됩니다. (AC.427해설)
이말씀과같은장의앞뒤에나오는내용에서천적·영적부요함을뜻한다는사실이매우분명하게드러납니다.또한각각의표현은물론언급된이름들까지도저마다고유한의미를지닙니다.주님의말씀은단순히문자적인말이아니라영적인말씀이기때문입니다. From these words, as well as from what is said both previously and subsequently in the same chapter, it is very evident that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are signified; and that every particular expression, and even the names mentioned, have some specific signification,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piritual, and not verbal.
여기서‘쇠’(iron)와‘놋’(brass)은자연적진리와선을뜻합니다.그것들이‘북방’(north)에서왔다고한것은감각적이고자연적인것을나타냅니다.자연적인것은영적·천적인것에비하면짙은어둠이빛에비하는것과같기때문입니다.곧‘북방’이‘남방’(south)에비하는것과같습니다.또는그늘이빛에비하는것과도같은데,여기서는‘어머니’(mother)인‘씰라’(Zillah)도이러한그늘을나타냅니다.‘재산’(substance)과‘보물’(treasures)이천적·영적부요함을뜻한다는사실도매우분명합니다. where “iron” and “brass” signify natural truth and good; that it came from the “north” 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natural; for what is natural, relatively to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is like thick darkness (that is, the “north”)relatively to light or the “south”; or like shade, which is also signified here by “Zillah,” who is the “mother.” That the “substance” and “treasures” are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is also very evident.
여기서도‘쇠’가진리를뜻한다는사실이분명하게드러납니다.진리에는아무도저항할수없는힘이있으므로,힘은진리에속한다고말합니다.이러한이유로진리,곧신앙의진리를뜻하는쇠에관해‘산산이부순다’(breaksinpieces),‘짓부순다’(crushes)고말합니다.다니엘서에서도그러하며(단2:34, 40),계시록에서도다음과같이말합니다. where also it is evident that “iron” signifies truth. Strength is attributed to truth, because it cannot be resisted, and for this reason it is said of iron—by which is signified truth, or the truth of faith—that it “breaksinpieces” and “crushes”; asin Daniel (2:34, 40), and in John:
AC.426은 앞의 AC.425에서 밝힌 금속의 속뜻 가운데 특별히 ‘쇠’에 집중합니다. 앞 번호에서 놋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했다면, 이번 번호에서는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을 살펴봅니다. 스베덴보리는 에스겔과 예레미야, 다니엘과 계시록을 차례로 인용하면서 쇠가 나타내는 진리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자연적 진리와 영적·천적 부요함의 관계,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차이, 그리고 진리가 지닌 힘입니다.
먼저 겔27:12, 19는 두로의 무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다시스는 은과 쇠와 주석과 납을 가져오고, 단과 야완과 므우살은 빛나는 쇠와 향료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뿐 아니라 같은 장의 앞뒤 내용을 함께 살펴보면, 이 모든 것이 천적·영적 부요함에 관한 말씀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앞의 AC.425에서도 두로는 영적·천적 부요함을 지닌 사람들을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두로의 무역품 가운데 등장하는 쇠 역시 단순한 금속을 넘어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주석과 납, 향료, 각각의 지명에 대한 구체적인 속뜻까지 밝히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각각의 표현뿐 아니라 이름들까지도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말씀은영적이며,단순히문자적인말이아니기때문’입니다. 이는 말씀의 문자적 기록이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로의 무역에 관한 기록은 문자적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 천적·영적 부요함에 관한 속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을 때 특정한 단어나 이름 하나만 떼어 내어 의미를 정하기보다, 앞뒤 문맥과 함께 살피는 일이 중요합니다.
렘15:12-13에서는 쇠와 놋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쇠가 자연적 진리를, 놋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북방의쇠’라는 표현에 주목하여, 북방이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자연적인 것은 영적·천적인 것에 비하면 짙은 어둠이 빛에 비하는 것과 같으며, 북방이 남방에 비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둠은 자연적 진리가 곧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천적인 것의 관계를 밝음의 차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창4장의 씰라와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머니’인 씰라가 그늘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앞의 AC.421에서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씰라의 의미를 북방과 그늘의 이미지에 연결하여, 자연적인 것이 영적·천적인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적인 차원에 있음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씰라가 그늘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근거로 씰라 자체가 악이나 거짓을 뜻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재산’과 ‘보물’은 천적·영적 부요함을 뜻합니다. 예레미야의 문자적 말씀에서는 죄로 인해 재산과 보물이 노략물로 넘어간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 재산과 보물이 단순한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천적·영적 부요함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그 부요함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상실되는지까지 상세히 풀이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쇠와 놋, 북방, 재산과 보물의 의미를 함께 살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겔4:3에서는 에스겔이 쇠판을 가져다가 자신과 성읍 사이에 쇠벽으로 세우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도 쇠가 진리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으므로 힘은 진리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은 이번 번호의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쇠가 어떤 차원의 진리를 나타내는지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왜 쇠가 진리를 나타내는지, 특히 진리의 힘이 말씀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단2:34, 40을 언급합니다. 다니엘의 신상 환상에서 쇠는 부수고 깨뜨리는 힘을 지닌 것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표현을 진리의 힘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는 다니엘의 네 나라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손대지 않은 돌과 쇠와 진흙이 섞인 발이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인용의 직접적인 목적은 다니엘의 환상 전체를 풀이하는 데 있지 않고, 쇠에 ‘부수고깨뜨리는’ 힘이 부여되는 이유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계2:26-27과 계12:5에서는 ‘쇠지팡이’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들을 진리가 지닌 힘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인용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인용한 영어 본문이 ‘다스린다’는 표현을 ‘목양한다’(pasture)고 옮긴다는 사실입니다. 쇠 지팡이는 문자적으로 강한 통치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지만, 스베덴보리가 이 번호에서 밝히는 속뜻은 진리의 힘에 관한 것입니다. 다만 ‘토기장이의그릇’이나 계12장의 ‘남자아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번 번호에서 따로 풀이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계19:11, 13, 15는 앞의 철장 구절들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백마를 타신 분은 ‘충신과진실’이라 불리고,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말씀’이라고 명시됩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예리한 검이 나오며, 그분은 쇠 지팡이로 민족들을 목양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통해 ‘쇠지팡이’가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라는 사실이 설명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마지막 인용은 단순히 쇠가 강하다는 사실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이 주님의 말씀의 진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결국 AC.426의 핵심은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하며,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로의 무역은 자연적 진리가 천적·영적 부요함에 관한 말씀 안에 등장한다는 점을 보여 주고, 북방의 쇠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천적인 것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쇠벽과 다니엘의 쇠는 진리의 힘을 드러내며, 계시록의 쇠 지팡이는 그 힘이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두발가인이 다루는 쇠가 단순한 금속이 아니라, 자연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AC.426해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5
오늘날세상사람들은‘놋’(brass)이자연적선을뜻한다는사실을알지못합니다.또한말씀에등장하는모든금속이속뜻으로는각각고유한의미를지닌다는사실도알지못합니다.이를테면‘금’(gold)은천적선을,‘은’(silver)은영적진리를,‘놋’(brass)은자연적선을,‘쇠’(iron)는자연적진리를뜻합니다.다른금속들도마찬가지이며,‘나무’(wood)와‘돌’(stone)역시저마다고유한의미를지닙니다. 궤와성막과성전을만드는데사용한‘금’,‘은’,‘놋’,‘나무’도이러한것들을나타냅니다.이에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나중에설명하겠습니다.이러한의미는예언서에서도분명하게드러납니다.이사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It is unknown to the world at the present day that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and also that every metal mentioned in the Word has a specific signification in the internal sense—as “gold,” celestial good; “silver,” spiritual truth; “brass,” natural good; “iron,” natural truth; and so on with the other metals, and in like manner “wood” and “stone.” Such things were signified by the “gold,” “silver,” “brass,” and “wood,”used in the ark and in the tabernacle and in the temple,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That such is their signification is manifest from the prophets, as from Isaiah:
이말씀은주님의오심과그분의나라,그리고천적교회에관한것입니다.‘놋대신금’(forbrassgold)은자연적선대신천적선을,‘쇠대신은’(forironsilver)은자연적진리대신영적진리를뜻합니다.‘나무대신놋’(forwoodbrass)은육체적선대신자연적선을,‘돌대신쇠’(forstonesiron)는감각적진리대신자연적진리를뜻합니다. 에스겔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treating of the Lord’s advent, of his kingdom, and of the celestial church. “Forbrassgold,” signifies for natural good celestial good; “forironsilver,” signifies for natural truth spiritual truth; “forwoodbrass,” signifies for corporeal good natural good; “forstonesiron,” signifies for sensuous truth natural truth. In Ezekiel:
이말씀은두로에관한것입니다.두로는영적·천적부요함을지닌사람들을뜻하며,‘놋그릇’(vesselsofbrass)은자연적선을가리킵니다. speaking of Tyre, by which are signified those who possess spiritual and celestial riches; “vesselsofbrass” are natural goods.
여기서도‘돌’(stones)은감각적진리를,‘쇠’(iron)는자연적진리,곧이성적진리를,‘놋’(brass)은자연적선을뜻합니다. 에스겔은다음과같은모습을보았습니다. where also “stones” denote sensuous truth; “iron,” natural, that is, rational truth; and “brass,” natural good. Ezekiel saw:
여기서도‘놋’은자연적선을뜻합니다.사람의‘발’(foot)이자연적인것을표상하기때문입니다.이와비슷하게다니엘에게도다음과같은모습이나타났습니다. where again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for the “foot” of man represents what is natural. In like manner there appeared to Daniel,
‘놋뱀’(brazenserpent, 민21:9)이주님의감각적·자연적선을표상했다는사실은앞에서살펴보았습니다. That the “brazenserpent” (Num. 21:9) represented the sensuous and natural good of the Lord may be seen above.
모세가놋뱀을만들어장대위에다니뱀에게물린자가놋뱀을쳐다본즉모두살더라(민21:9)
해설
AC.425는 두발가인이 다루는 ‘놋과쇠’의 속뜻을 더 넓은 말씀의 문맥에서 확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등장하는 금속들이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각각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금은 천적 선, 은은 영적 진리, 놋은 자연적 선, 쇠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이 구별은 금속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나무와 돌에도 각각 고유한 의미가 있으며, 궤와 성막과 성전을 만드는 데 사용한 재료들 역시 그러한 의미를 지닙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모든 재료의 속뜻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두발가인과 직접 관련된 놋과 쇠의 의미를 밝히는 데 집중합니다.
먼저 사60:16-17은 금속과 재료들의 의미를 서로 비교하여 보여 줍니다. ‘놋대신금’은 자연적 선 대신 천적 선을, ‘쇠대신은’은 자연적 진리 대신 영적 진리를 뜻합니다. 이어 ‘나무대신놋’은 육체적 선 대신 자연적 선을, ‘돌대신쇠’는 감각적 진리 대신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이 주님의 오심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천적 교회에 관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재료 교체는 단순히 값싼 물건을 값비싼 물건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의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구절을 인간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거듭남의 단계표로 곧바로 바꾸어 읽지 않는 것입니다. AC.425는 각각의 재료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밝히지만, 사람이 육체적 선에서 자연적 선으로, 다시 천적 선으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과정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자연적 선을 단순한 도덕적 의무감으로, 천적 선을 특정한 감정 상태로 정의하지도 않습니다. 우선 말씀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다른 차원으로 구별되어 표현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겔27:13에서는 ‘놋그릇’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두로의 무역에 관한 기록이며, 스베덴보리는 두로가 영적·천적 부요함을 지닌 사람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 문맥에서 ‘놋그릇’은 자연적 선을 나타냅니다. 앞의 AC.424에서 세공업자가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그 기억지식과 관련되었다면, 이번 번호에서는 두로의 상품 가운데 등장하는 놋그릇을 통해 자연적 선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다만 ‘그릇’이라는 말에 별도의 의미를 더하여 인간의 마음이나 교리의 그릇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이번 번호가 직접 제시한 설명은 아닙니다.
겔27:13에 등장하는 ‘두발’이라는 이름도 창4장의 ‘두발가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AC.425는 이 두 이름의 관계를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름이 비슷하고 놋이 함께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두 인물이 동일한 속뜻을 지닌다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히는 것은 두로의 의미와 ‘놋그릇’이 자연적 선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신8:9에서는 ‘돌’, ‘쇠’, ‘놋’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돌을 감각적 진리로, 쇠를 자연적 진리, 곧 이성적 진리로, 놋을 자연적 선으로 풀이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자연적 진리를 ‘이성적진리’라고도 표현합니다. 앞에서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고 설명한 내용을 이 구절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돌은쇠’라는 표현을 감각적 진리가 실제로 이성적 진리로 변화하는 과정에 관한 상세한 설명으로 확대하기보다는, 본문이 밝힌 두 진리의 구별에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겔1:7은 놋의 의미를 ‘발’과 연결하여 보여 줍니다. 에스겔이 본 네 생물, 곧 그룹들의 발은 광낸 놋처럼 빛났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발이 자연적인 것을 표상하므로, 그 발에 나타난 놋 역시 자연적 선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놋이 자연적 선이라는 설명과 발이 자연적인 것을 표상한다는 설명이 서로 맞물립니다. 그러나 ‘광낸놋’이 정결하게 된 자연적 선의 특정한 상태를 뜻한다거나, 이 환상의 모든 신체 부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이번 번호에서 밝히지는 않습니다.
단10:5-6도 비슷한 방식으로 인용합니다. 다니엘이 본 사람은 세마포 옷을 입고 우바스의 금띠를 띠었으며, 팔과 발은 광낸 놋과 같았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금과 놋이 한 형상 안에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금이 천적 선을, 놋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의 환상은 놋이 자연적 선을 나타낸다는 설명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됩니다. 다만 이 번호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팔과 허리와 몸의 각 부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까지 풀이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민21:9의 ‘놋뱀’을 언급합니다. 그는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했다는 사실을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고 말합니다. 앞의 인용들이 놋의 의미를 여러 말씀에서 확인하는 사례였다면, 놋뱀은 그 의미가 주님과 직접 관련되는 사례입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설명을 반복하지 않고 앞선 해설을 가리키므로, 놋뱀의 의미는 별도의 심화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결국 AC.425는 금속과 재료의 속뜻을 통해 선과 진리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특히 이사야와 에스겔, 신명기와 다니엘의 말씀은 ‘놋은자연적선,쇠는자연적진리’라는 앞선 설명을 뒷받침합니다. 그리고 놋뱀에 관한 마지막 언급은 자연적 선의 의미가 궁극적으로 주님과도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창4장의 두발가인이 다루는 놋과 쇠가 단순한 금속이 아니라 자연적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AC.425해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4
말씀에서‘세공업자’(artificer)는지혜롭고총명하며지식을갖춘사람을뜻합니다.여기서‘놋과쇠를다루는모든세공업자’(everyartificerinbrassandiron)는자연적선과진리를아는사람들을가리킵니다.계시록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By an “artificer” in the Word is signified a wise, intelligent, and well-informed [sciens] man, and here by “everyartificerinbrassandiron” are signified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natural good and truth. As in John:
여기서‘거문고타는자들’(harpers)은앞에서와같이진리들을,‘나팔부는자들’(trumpeters)은신앙의선들을뜻합니다.‘어떠한종류의세공업자’(artificerofanycraft)는선과진리를아는사람,또는선과진리에관한기억지식을가리킵니다.이사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Harpers” here as above signify truths; “trumpeters,” the goods of faith; an “artificerofanycraft,” one who knows, or the memory-knowledge of truth and good. In Isaiah:
이말씀은자기상상으로거짓,곧‘새긴우상’(gravenimage)을만들어내고,그것을진리처럼보이도록가르치는사람들에관한것입니다.예레미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speaking of those who from fantasy forge for themselves what is false—a “gravenimage”—andteach it so that it appears true. In Jeremiah:
이는거짓을가르치면서자기생각으로만들어낸것을꾸미기위해말씀에서여러내용을모아들이는사람을뜻합니다.그래서이말씀은그것을‘헛된것들의교훈’(doctrineofvanities)이자‘지혜로운자들의작품’(workofthewise)이라고부릅니다. 고대에는이러한사람들을우상을만드는세공업자들로표상했습니다.그들은우상,곧거짓을만들어놓고금으로장식하여선처럼보이게하며,은으로장식하여진리처럼보이게합니다.또한청색실과옷으로꾸미는데,이는겉으로보기에그거짓과일치하는듯한자연적인것들을나타냅니다. signifying one who teaches falsities, and collects from the Word things with which to forge his invention, wherefore it is called a “doctrineofvanities,” and the “workofthewise.” Such persons were represented in ancient times by artificers who forge idols, that is, falsities, which they adorn with gold, that is, with a semblance of good; and with silver, or an appearance of truth; and with blue and with raiment, or such natural things as are in apparent agreement.
해설
AC.424는 앞의 AC.421-423에서 설명한 두발가인의 의미를 ‘세공업자’라는 말에 집중하여 밝힙니다.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나타내며, ‘놋’은 자연적 선을, ‘쇠’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세공업자’가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놋과쇠를다루는모든세공업자’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세공업자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계시록과 이사야, 예레미야의 말씀을 차례로 인용합니다.
먼저 계18:21-22는 바벨론이 무너진 뒤 거문고와 퉁소와 나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세공업자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 ‘거문고타는자들’을 진리들로, ‘나팔부는자들’을 신앙의 선들로 풀이합니다. 이어 ‘어떠한종류의세공업자’는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지식을 뜻한다고 밝힙니다. 앞의 AC.420에서 악기들이 선과 진리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과 세공업자가 함께 등장하는 말씀을 통해 ‘세공업자’의 의미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예언 전체를 해설하지 않으므로, 이 인용만으로 그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지식이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서 사40:19-20은 세공업자가 ‘새긴우상’을 만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앞의 계시록 인용에서 세공업자는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그 기억지식을 나타냈지만, 이사야에서는 세공업자가 거짓을 만들어 내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우상을 사람이 자기 상상으로 만들어 낸 거짓이라고 설명합니다. 세공업자는 그렇게 만든 것을 진리처럼 보이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핵심은 세공 기술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만든 거짓을 지식과 이해를 동원하여 그럴듯하게 꾸미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로운장인’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참된 지혜에 대한 칭찬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의 장인은 흔들리지 않을 우상을 만들기 위해 불려 온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거짓을 만들어 진리처럼 보이게 하는 사람들에 관한 말씀으로 풀이합니다. 이는 사람이 지식을 갖추고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가르치는 내용의 참됨까지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흔들리지않는우상’이 어떤 특정한 교리 체계나 논증 방식을 뜻한다고까지 이번 번호가 세부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렘10:1, 8-9는 이 문제를 한층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말씀에는 ‘헛된것들의교훈’, ‘나무토막’,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 세공업자와 금을 다루는 자, 청색 실과 옷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을 꾸미기 위해 말씀에서 여러 내용을 모아들이는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말씀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내용들을 가져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거짓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모습을 고대의 우상 제작에 연결합니다. 세공업자들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금으로 장식하여 선처럼 보이게 하며, 은으로 장식하여 진리처럼 보이게 합니다. 청색 실과 옷은 그 거짓과 겉으로 일치하는 듯한 자연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금과 은은 거짓 자체를 뜻한다기보다, 거짓에 선과 진리의 외관을 입히는 데 사용됩니다. 특히 청색 실과 옷에 관해서는 이번 번호가 ‘겉으로보기에일치하는듯한자연적인것들’이라고 설명하는 데 그치므로, 이를 근거 없이 특정한 영적 상태나 교리로 더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 인용을 함께 읽으면 ‘세공업자’라는 표현이 왜 중요한지 분명해집니다. 세공업자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과 이해를 나타내지만, 그 지식을 사용하는 사람이 언제나 참된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계시록의 인용은 세공업자가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지식과 관련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인용은 사람이 그러한 지식과 이해를 동원하여 거짓을 만들어 내거나 꾸밀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세공업자’라는 단어 하나에 고정된 도덕적 평가를 붙이기보다, 그가 무엇을 만들고 가르치는지에 따라 문맥을 살피게 합니다.
이 설명은 두발가인을 이해하는 데도 필요합니다. AC.421에서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나타냈고, AC.423에서는 이전부터 있던 자연적인 것들이 이제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기 때문에 그를 ‘아버지’가 아닌 ‘스승’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스승’이 가르치는 대상인 세공업자들이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이와 동시에 말씀에 관한 지식이 있다는 사실과 그 지식을 참되게 사용한다는 사실을 구별하게 합니다. 말씀의 내용을 모아 설명하더라도, 그것이 이미 정해 놓은 거짓을 꾸미는 데 사용된다면 ‘헛된것들의교훈’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424의 중심은 ‘세공업자’가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갖춘 사람을 뜻하며, 두발가인과 관련해서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우상 제작 장면은 지식이 거짓을 진리처럼 보이게 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지식을 많이 갖추었는가뿐 아니라, 그 지식으로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가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24해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3
두발가인은야발과유발의경우처럼‘아버지’(father)가아니라‘온갖기구를만드는자의스승’(instructorofeveryartificer)이라고불립니다.그이유는이전에는천적인것들과영적인것들,곧내적인것들이존재하지않았기때문입니다.야발과유발에게‘아버지’라는표현을사용한것은그러한내적인것들이그때처음생겨났음을나타내기위해서입니다.반면자연적인것들,곧외적인것들은이전에도존재했지만,이제내적인것들에적용되었으므로두발가인을‘아버지’가아니라‘온갖기구를만드는자의스승’이라고부릅니다. Tubal-Cain is called the “instructorofeveryartificer,” and not the “father,” as was the case with Jabal and Jubal; and the reason is that before there were no celestial and spiritual or internal things. And the term “father” is applied to Jabal and Jubal, to denote that such internal things then first began to exist; whereas natural or external things did exist before, but were now applied to internal things, so that Tubal-Cain is not called the “father,” but the “instructor,ofeveryartificer.”
해설
AC.423은 창4:20-22에서 야발과 유발에게는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두발가인에게는 ‘스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21에서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교리가 왜 새로운 것의 ‘아버지’가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표현되는지 밝힙니다. 핵심은 내적인 것들이 처음 생겨나는 일과, 이전부터 있던 외적인 것들이 그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는 일의 차이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야발과 유발에게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들이 나타내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 곧 내적인 것들이 그때 처음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처음’이라는 말은 인류 역사상 사랑과 신앙이 그때 비로소 생겨났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23은 앞에서 설명해 온 ‘이새교회’의 상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그 교회에 내적인 것들이 생겨나는 과정을 가리킨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반면 자연적인 것들, 곧 외적인 것들은 그전에도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두발가인이 나타내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는 내적인 것들과 똑같은 의미에서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외적인 것들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 때문에 두발가인을 ‘아버지’가 아닌 ‘스승’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적용되었다’는 표현을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AC.423은 자연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다고 말하지만, 그 적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앞의 AC.422에서 내적 교회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로, 외적 교회는 자연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밝힌 내용을 함께 읽으면, 이번 번호가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계속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외적인 것들이 이전부터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들이 이제 내적인 것들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자연적인 것들을 무조건 낮게 보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해석도 경계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들이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번 번호에서는 그 자연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다고 말합니다. 다만 자연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회의 모든 외적인 것이 이미 온전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가 직접 설명하는 범위는 두발가인에게 ‘스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입니다.
결국 AC.423에서 ‘아버지’와 ‘스승’의 차이는 단순한 호칭의 차이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이 새 교회에서 천적·영적인 내적 요소들이 처음 생겨났음을 나타내고, ‘스승’은 이전부터 존재하던 자연적·외적 요소들이 이제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두발가인이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는 앞 번호의 설명도 이 구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23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