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2
이새교회가어떠한상태에있었는지는유대교회를통해알수있습니다.유대교회에는내적교회와외적교회가모두있었는데,내적교회는천적인것들과영적인것들로,외적교회는자연적인것들로이루어져있었습니다.라헬은내적교회를,레아는외적교회를표상했습니다. 그러나‘야곱’(Jacob),더정확히말해말씀에서‘야곱’이라는이름으로가리키는그의후손들은오직외적인것들,곧외적인예배만을원했으므로,야곱은라헬보다먼저레아를아내로맞이했습니다.눈이흐릿한레아는유대교회를,라헬은이방인들가운데세워지는새교회를표상했습니다. 이때문에예언서에서‘야곱’은두가지의미로쓰입니다.하나는왜곡된상태의유대교회를,다른하나는이방인들의참된외적교회를가리킵니다.내적교회를의미할때에는그를‘이스라엘’(Israel)이라고부릅니다.그러나이러한문제들은주님의신적자비로나중에더설명하겠습니다. How the case was with this new church may be seen from the Jewish church, which was both internal and external; the internal church consisting of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nd the external church of natural things. The internal church was represented by Rachel, and the external by Leah. But as Jacob, or rather his posterity understood by “Jacob” in the Word, were such as to desire only external things, or worship in externals, therefore Leah was given to Jacob before Rachel; and by blear-eyed Leah was represented the Jewish church, and by Rachel a new church of the gentiles. For this reason “Jacob” is taken in both senses in the prophets, in one denoting the Jewish church in its perverted state, and in the other the true external church of the gentiles. When the internal church is signified, he is called “Israel”; but of these matters,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more will be said hereafter.
해설
AC.422는 앞의 AC.421에서 언급한 ‘새교회’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유대교회를 예로 듭니다. AC.421은 씰라가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두발가인이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나아마가 그 교회 밖에 있는 비슷한 교회 또는 교리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러한 구별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어떻게 서로 다른지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를 레아와 라헬,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말씀의 인물들을 통해 설명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내적 교회와 외적 교회가 모두 있었다고 말합니다. 내적 교회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로, 외적 교회는 자연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내적 교회와 외적 교회는 단순히 서로 다른 두 종교 단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번호는 한 교회의 내적 차원과 외적 차원을 구별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속하는 천적·영적 차원과, 그것들이 외적인 삶과 예배에서 나타나는 자연적 차원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별을 레아와 라헬에 연결합니다. 라헬은 내적 교회를, 레아는 외적 교회를 표상합니다. 창29장의 문자적 이야기에서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여 그를 아내로 맞이하려 했지만, 라반은 먼저 레아를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건을 단순한 혼인 순서로만 읽지 않고,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에 관한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는 기록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레아와 라헬의 구별은 두 여성의 개인적인 가치나 영적 우열에 관한 평가가 아니라, 이들이 말씀 안에서 표상하는 교회의 서로 다른 측면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왜 야곱은 라헬보다 먼저 레아를 아내로 맞이했습니까?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야곱’으로 가리키는 그의 후손들이 오직 외적인 것들, 곧 외적인 예배만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야곱이라는 이름은 창세기의 한 인물만이 아니라, 말씀에서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그의 후손들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외적 예배 자체가 아니라,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만을 원하는 상태입니다. 외적 예배는 내적 교회와 연결될 수 있지만, 외적인 형식만을 추구할 때에는 그 관계가 달라집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눈이흐릿한레아’가 유대교회를, 라헬이 이방인들 가운데 세워지는 새 교회를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창29:17은 레아의 눈에 관해 언급하지만, 이번 번호는 눈의 세부적인 속뜻을 따로 풀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눈이 흐릿하다는 표현을 근거로 유대인 개개인의 이해력이나 신앙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대상은 말씀에 표상된 교회의 상태입니다. 또한 라헬이 이방인들 가운데 세워지는 새 교회를 나타낸다는 설명은 앞에서 라헬이 내적 교회를 표상한다고 한 내용과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 때문에 예언서의 ‘야곱’이라는 이름도 언제나 한 가지 뜻으로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어떤 곳에서는 왜곡된 상태의 유대교회를, 다른 곳에서는 이방인들의 참된 외적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구절의 속뜻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름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었는지, 어떤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는지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같은 이름이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점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중요한 주의사항입니다.
반면 내적 교회를 의미할 때에는 ‘이스라엘’이라고 부른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이 번호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의 구별은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의 구별에 연결됩니다. 다만 이것을 ‘야곱이라는이름은언제나나쁘고이스라엘이라는이름은언제나좋다’는 식의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번 번호에서 야곱도 이방인들의 ‘참된외적교회’를 의미할 수 있다고 밝히기 때문입니다. 외적 교회라는 사실 자체가 곧 왜곡된 교회라는 뜻은 아닙니다.
결국 AC.422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교회의 내적 차원과 외적 차원을 구별합니다. 라헬은 내적 교회를, 레아는 외적 교회를 표상하며, 야곱이라는 이름은 문맥에 따라 왜곡된 상태의 유대교회 또는 이방인들의 참된 외적 교회를 나타냅니다. 내적 교회를 의미할 때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외적인 예배가 있다는 사실과 그 예배가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구별하여 살펴보게 됩니다. (AC.422해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창4:22)
AC.421
앞서말했듯이,‘씰라’(Zillah)는새교회의자연적인것들의어머니를의미합니다.‘놋과쇠로온갖기구를만드는자의스승’(aninstructorofeveryartificerinbrassandiron)인‘두발가인’(Tubal-Cain)은자연적선과진리에관한교리를의미합니다.여기서‘놋’(brass)은자연적선을,‘쇠’(iron)는자연적진리를뜻합니다.‘두발가인의누이’(thesisterofTubal-Cain)인‘나아마’(Naamah)는그와비슷한교회,곧그교회밖에있는자연적선과진리에관한교리를의미합니다. By “Zillah” is signified, as previously stated, the mother of the natural things of the new church; by “Tubal-Cain,aninstructorofeveryartificerinbrassandiron,”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brass” denoting natural good, and “iron” natural truth. By “Naamah,thesisterofTubal-Cain” is signified a similar church, or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outside of that church.
해설
AC.421은 창4:22에 등장하는 씰라와 두발가인, 나아마의 속뜻을 설명합니다. 앞서 야발과 유발을 통해 사랑의 천적인 것들과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자연적인것들’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두발가인을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로 해석하고, 놋과 쇠가 각각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이로써 라멕의 자손들에 관한 기록은 교회의 서로 다른 측면을 설명하는 흐름을 이어갑니다.
먼저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자연적인 것들은 앞서 다룬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에 비해 사람의 외적인 삶과 관련된 차원을 가리킵니다. 다만 자연적이라는 말이 곧 악하거나 영적인 것과 무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자연적인 것들 안에도 선과 진리가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것을 단순히 극복하거나 버려야 할 대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두발가인’은 ‘놋과쇠로온갖기구를만드는자의스승’이라는 설명과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를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발가인을 단순히 금속을 다루는 기술자로 풀이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창세기의 문자적 기록은 그가 놋과 쇠를 다루는 기술과 관련된 인물임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기록의 속뜻에서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읽어 냅니다. ‘스승’이라는 표현 역시 이번 번호의 해석이 단순한 기술이나 물건이 아니라 교리에 관한 것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번 번호는 두 개념의 구체적인 사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놋과 쇠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만 밝힙니다. 따라서 자연적 선을 특정한 선행 하나로, 자연적 진리를 특정한 지식 하나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우선 자연적인 차원에도 선과 진리의 구별이 있으며, 두발가인이 그 둘에 관한 교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놋’은 자연적 선을, ‘쇠’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두 금속은 문자적으로는 기구를 만드는 재료이지만, 속뜻에서는 자연적인 차원의 선과 진리를 구별하여 나타냅니다. 앞의 AC.419에서 수금과 퉁소가 각각 영적 진리와 영적 선을 나타냈던 것처럼, 이번 번호에서는 놋과 쇠가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악기와 금속의 의미를 하나의 기계적인 대응표로 만들기보다는, 각각의 말씀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뜻을 따라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아마’는 두발가인의 누이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나아마가 ‘그와비슷한교회,곧그교회밖에있는자연적선과진리에관한교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교회밖’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두발가인과 나아마가 모두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련되지만, 스베덴보리는 둘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나아마는 앞서 말한 교회 밖에 있는, 그와 비슷한 교회 또는 교리를 나타냅니다. 다만 이번 번호만으로 그 교회가 역사적으로 어떤 집단인지, 왜 교회 밖에 있다고 표현하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교회의 삶이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관한 가르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차원에도 선과 진리가 있으며, 그것들에 관한 교리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이번 번호가 자연적인 선과 진리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라멕의 자손들에 관한 기록이 교회의 어떤 측면을 나타내는지 밝히는 데 초점을 둡니다.
결국 AC.421의 핵심은 두발가인이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놋과 쇠가 각각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하고, 나아마는 그 교회 밖에 있는 비슷한 교회 또는 교리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 짧은 번호를 통해 자연적인 것들 역시 교회의 선과 진리에 관한 설명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AC.421해설)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
말씀에는여러가지악기가언급되며,각악기에는저마다고유한의미가있습니다.이에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적절한곳에서설명하겠습니다.그러나여기서는시편이말한것만을인용하겠습니다. In the Word mention is made of various instruments, each having its own signification, as will be shown, of the Lord’s Divine mercy, in its proper place; here however we shall adduce only what is said in David:
여기서‘장막’(tent)은천적인것을표현하고,‘즐거운외침’(shouting),‘노래함’(singing),‘찬송함’(singingpraises)은거기서나오는영적인것을표현합니다.또다른곳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where by “tent” is expressed what is celestial, and by “shouting,” “singing,” and “singingpraises,” 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Again:
이말씀은신앙의진리들을나타내며,이러한것들이바로그진리들에관하여말해진것입니다. denoting the truths of faith, concerning which these things are said.
[2]영적인것들,곧신앙의진리들과선들은수금과비파,노래와그와비슷한악기들로찬양되었습니다.그러나신앙의거룩한것들,곧천적인것들은나팔과같은관악기들로찬양되었습니다.이때문에성전에서는그렇게많은악기가,또그렇게자주사용되었습니다.이는이주제나저주제를각각특정한악기로찬양하기위한것이었습니다.그결과악기들은그것들로찬양되는대상들을가리키는것으로받아들여지고이해되게되었습니다. Spiritual things, or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the harp and psaltery, with singing and analogous instruments, but the holy or celestial thing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wind instruments, such as trumpets and the like; and this was why so many instruments were used about the temple and so often, in order that this or that subject might be celebrated with certain instruments; and in consequence of this the instruments came to be taken and understood for the subjects that were celebrated with them.
‘감사’(confession)는신앙의천적인것들과관련되므로‘여호와’(Jehovah)가언급됩니다.반면‘수금으로찬송함’(singpraisesupontheharp)은신앙의영적인것들과관련되므로‘하나님’(God)이언급됩니다.또다른곳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confession” has respect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 therefore mention is made of “Jehovah”; and to “singpraisesupontheharp” has reference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wherefore “God” is spoken of. Again:
이악기들은찬양의대상이된신앙의선들과진리들을나타냅니다.각각의악기에고유한의미가없다면,이렇게많은종류의악기가여기에언급되었을것이라고생각해서는안됩니다.또다른곳에서는선과진리의지식들에관하여다음과같이말합니다. These instruments denote the goods and the truths of faith which were the subjects of praise; for let no one believe that so many different instruments would have been here mentioned unless each had a distinct signification. Again, referring to the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한가지언급할만한사실이있습니다.천사들과영들은소리들이선과진리에관련하여어떻게다른지에따라그소리들을구별합니다.노래와악기에서나는소리뿐아니라목소리도그렇게구별합니다.그리고서로일치하는소리만받아들입니다.이는소리들,따라서악기들의소리가선과진리의성질및본질과조화를이루게하기위한것입니다. It is worthy of mention that angels and spirits distinguish sounds according to their differences with respect to good and truth, not only those produced in singing and by instruments, but also those of voices; and they admit none but such as are in accord, so that there may be a concord of the sounds, and consequently of the instruments, with the nature and essence of the good and the true.
해설
AC.420은 앞의 AC.418-419에서 설명한 악기의 속뜻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인합니다. AC.419에서 스베덴보리는 수금이 영적 진리를, 퉁소가 영적 선을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설명을 한 악기에만 한정하지 않고, 말씀에 등장하는 여러 악기가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악기의 뜻을 여기서 밝히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악기와 노래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어떻게 나타내는지 보여 주는 것이 이번 번호의 중심입니다.
먼저 시27:6에서 ‘장막’은 천적인 것을, ‘즐거운외침’과 ‘노래함’과 ‘찬송함’은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을 표현합니다. 앞서 야발의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관련되고, 유발의 악기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된다고 설명한 내용이 이 시편 안에서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과 노래가 단순히 예배 장소와 예배 행위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인 것과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봅니다. 이어 인용한 시33:1-4에서는 수금과 열 줄 비파, 새 노래가 등장한 뒤 ‘여호와의말씀은정직하며그가행하시는모든일은진실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말씀이라고 밝힙니다. 악기와 노래가 언급되는 문맥 자체가 말씀의 정직함과 주님이 행하시는 일의 진실함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표상적 예배에서 악기들이 구별되어 사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은 수금과 비파, 노래와 그와 비슷한 악기들로 찬양되었고, 신앙의 거룩한 것들, 곧 천적인 것들은 나팔과 같은 관악기들로 찬양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많은 악기가 사용된 것은 단순히 음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찬양하는 대상에 따라 특정한 악기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그 결과 악기 자체가 그것으로 찬양되는 영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악기가 같은 뜻을 지닌다는 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악기들이 서로 다른 것을 표상한다는 뜻입니다.
시71:22-23은 이러한 설명을 다시 확인합니다. 비파와 수금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말씀 안에 ‘주의진리’가 직접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시147:7에서는 한층 세밀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감사’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여호와’가 언급되고, ‘수금으로찬송함’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하나님’이 언급된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구절 안에서도 감사와 수금 찬양,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시149:3에서는 ‘소고’가 선을, ‘수금’이 진리를 의미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기들의 소리를 감상하여 의미를 추측하는 일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해당 말씀에서 구별하여 밝힌 선과 진리의 의미를 살피는 일입니다.
시150:3-5에는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기, 퉁소, 제금 등 여러 악기가 연이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에 고유한 의미가 없다면 이렇게 많은 종류의 악기가 말씀에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이 모든 악기의 개별 의미를 하나씩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앞에서 밝혀진 의미들을 바탕으로 이 시편이 신앙의 여러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이해하되, 아직 설명되지 않은 악기의 뜻까지 임의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시43:3-4는 ‘주의빛과주의진리’로 시작하여 거룩한 산과 처소, 하나님의 제단과 수금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선과 진리의 지식들에 관한 구절로 인용합니다. 여기서는 수금이 등장하는 찬양이 주님의 빛과 진리에 의한 인도라는 문맥 안에 놓여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23:16은 앞의 찬양 시편들과 성격이 다릅니다. 이사야 23장은 두로에 관한 예언이며, 인용된 구절은 잊힌 음녀에게 수금을 가지고 성읍을 돌아다니며 노래하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도 신앙에 속하는 것들과 그 지식들에 관한 말씀으로 인용합니다. 따라서 수금과 노래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장면을 곧바로 선한 예배나 진리의 회복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이 여기서 사용된 이유는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과 관련된 표현이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해당 예언 전체의 속뜻을 설명하려면 두로와 음녀에 관한 문맥을 별도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인용에서는 진리와 선의 구별이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계5:8에서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가진 ‘거문고’는 신앙의 진리들을, ‘향이가득한금대접’은 신앙의 선들을 의미한다고 스베덴보리는 밝힙니다. 같은 예배 장면 안에 진리와 선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어 시42:5와 시69:31을 통해 다윗이 악기 연주를 ‘찬송’과 ‘감사’라고 부르는 용례를 제시합니다. 계14:2-3에서는 하늘의 거문고 소리와 새 노래를, 계15:2에서는 유리 바닷가에 선 이들이 가진 하나님의 거문고를 인용합니다. 이 구절들은 앞서 설명한 현악기와 신앙의 진리 사이의 관계를 뒷받침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새 노래나 유리 바다의 세부적인 속뜻까지 풀어 주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천사들과 영들이 소리를 선과 진리의 차이에 따라 구별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노래와 악기 소리뿐 아니라 목소리도 구별하며, 서로 일치하는 소리만 받아들입니다. 소리와 악기가 선과 진리의 성질 및 본질에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은 앞서 제시한 악기의 상응이 단순한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이해한 영계의 질서와도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 번호는 어떤 음높이나 악기 소리가 어떤 선과 진리에 해당하는지 구체적인 목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음악을 듣고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결국 AC.420은 말씀의 악기들이 단순한 음악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각각 신앙의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여러 구절로 설명합니다. 시편의 장막과 노래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관계를, 소고와 수금은 선과 진리의 구별을,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은 신앙의 진리와 선이 함께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천사와 영들에 관한 설명은 소리의 조화가 선과 진리의 성질과 관련된다는 점을 밝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찬양의 외적 소리만이 아니라, 그 찬양이 표현하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20해설)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9
천적인것들이사랑의거룩한것들과거기서나오는선들인것처럼,영적인것들은신앙의진리들과선들입니다.신앙에는무엇이참된것인지만이아니라무엇이선한것인지도이해하는일이속하기때문입니다.신앙에관한지식들은이둘을모두포함합니다.그러나신앙이가르치는대로살아가는것은천적인것입니다.신앙에는이두가지가모두포함되므로,그것들은수금과퉁소라는두악기로의미됩니다.수금은누구나알듯이현악기이므로영적진리를의미합니다.그러나퉁소는현악기와관악기의중간에해당하므로영적선을의미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so spiritual things are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for it belongs to faith to understand not only what is true, but also what is good. The knowledges of faith involve both. But to be such as faith teaches is celestial. As faith involves both of these, they are signified by two instruments, the harp and the organ. The harp, as everyone knows, is a stringed instrument, and therefore signifies spiritual truth; but the organ, being intermediate between a stringed instrument and a wind instrument, signifies spiritual good.
해설
AC.419는 앞의 AC.417-418에서 밝힌 유발의 속뜻을 한층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유발이 ‘수금과퉁소를잡는모든자의조상’이라고 불리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악기를 함께 언급한 이유를 밝히고, 수금과 퉁소가 각각 무엇을 나타내는지 구별합니다. 수금은 영적 진리를, 퉁소는 영적 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유발의 기록은 신앙을 단순히 참된 것을 아는 일로만 이해하지 않도록 이끕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구별합니다. 천적인 것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이며, 영적인 것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입니다. 이는 앞서 야발과 유발을 구별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유발은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두 형제의 기록을 함께 읽으면 사랑에 관한 교리와 신앙에 관한 교리가 각각 어떤 내용을 다루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문장은 ‘신앙에는무엇이참된것인지만이아니라무엇이선한것인지도이해하는일이속한다’는 설명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이라고 하면 흔히 교리의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일부터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참된 것과 선한 것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만이 아니라 무엇이 선한지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내용을 이해하는 일에서 선에 관한 지식을 제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곧이어 ‘신앙이가르치는대로살아가는것은천적인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신앙의 선을 이해하는 일과 실제로 선하게 살아가는 일을 구별합니다. 무엇이 선한지 알고 그것을 이해하는 일은 신앙에 속하지만,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선을 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 선을 삶에서 실현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앎과 삶을 구별하면서도, 신앙이 가르치는 선이 실제 삶과 무관한 지식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제 수금과 퉁소라는 두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두 악기로 의미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수금이 현악기이므로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퉁소는 현악기와 관악기의 중간에 해당하므로 영적 선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 악기 구분은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현대 악기 분류에 맞추어 퉁소를 특정 악기로 확정하거나, 그 악기의 구조에서 새로운 상응을 만들어 내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앞의 AC.418에서는 마음의 애정이 천적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노래가 영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설명을 이어받아 영적인 것 안에도 진리와 선이 함께 있음을 밝힙니다. 노래와 악기가 영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설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금과 퉁소가 각각 영적 진리와 영적 선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유발에 관한 짧은 기록은 신앙의 내용을 더욱 세밀하게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에는 ‘나는무엇이참된지알고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나는무엇이선한지도이해하고있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천적인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와 선을 이해하는 일은 그 가르침을 삶에서 받아들이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앎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전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지식과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을 구별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결국 AC.419의 핵심은 신앙에 진리와 선이 모두 포함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진리와 선을 아는 일과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일이 구별된다는 사실입니다. 수금과 퉁소는 신앙의 두 측면을 나타내며, 유발은 이러한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을 참된 것을 아는 데에만 한정하지 않고, 선을 이해하며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까지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19해설)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8
앞절은사랑에속하는천적인것들을다루었지만,이절은신앙에속하는영적인것들을다루며,이것들은‘수금과퉁소’(harpandorgan)로표현됩니다.수금과그와비슷한현악기들이신앙의영적인것들을의미한다는사실은여러가지점에서분명합니다.표상교회의예배에서이와비슷한악기들과노래는다른어떤것도아닌바로이러한것들을표상했습니다.이때문에노래하는사람들과악기를연주하는사람들이그렇게많았던것입니다.이러한표상의이유는천국의모든기쁨이마음의즐거움을낳고,이즐거움이노래로표현되며,그다음에는노래를본뜨고더욱고양하는현악기들로표현되기때문입니다.마음의모든애정에는노래를낳고,따라서노래와관련된것들을낳는성질이따릅니다.마음의애정은천적이지만,그결과로나오는노래는영적입니다.노래와그와비슷한것들이영적인것을나타낸다는사실은천사들의합창을통해제게분명해졌습니다.천사들의합창에는천적인것과영적인것,두종류가있습니다.영적천사들의합창은현악기의소리에비길만한,울림이있고노래하듯흐르는음색(sonocanoroalato)으로천적천사들의합창과쉽게구별됩니다.이에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나중에말씀드리겠습니다.태고인들은천적인것을심장의영역에,영적인것을폐의영역에관련지었습니다.따라서노래하는목소리와그와비슷한것들처럼폐에속하는모든것,그리고그러한악기들의목소리나소리도폐의영역에관련지었습니다.그근거는심장과폐가사랑과신앙의결합과같은일종의결합을표상한다는데에만있지않았습니다.천적천사들은심장의영역에속하고,영적천사들은폐의영역에속하기때문이기도했습니다.이와같은것들이지금다루는구절에의미되어있다는사실은,이말씀이주님의말씀이라는점에서도알수있습니다.유발이수금과퉁소를연주하는사람들의조상이었다는것외에아무것도암시하지않는다면,이말씀에는생명이없을것이기때문입니다.또한그러한사실을아는것은누구에게도아무런유익이없습니다. The former verse treated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of love, but this verse treats of spiritual things which are of faith, and these are expressed by the “harpandorgan.” That by stringed instruments, such as harps and the like, are signified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many considerations. Similar instruments, and also the singing, in the worship of the representative church, represented nothing else, and it was on this account that there were so many singers and musicians, the cause of this representation being that all heavenly joy produces gladness of heart, which was expressed by singing, and in the next place by stringed instruments that emulated and exalted the singing. Every affection of the heart is attended with this: that it produces singing, and consequently what is connected with singing. The affection of the heart is celestial, but the consequent singing is spiritual. That singing and that which resembles it denote what is spiritual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angelic choirs, which are of two kinds, celestial and spiritual. The spiritual choirs are easily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by their vibrant singing tone [sono canoro alato], comparable to the sound of stringed instruments, of which,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we shall speak hereafter. The most ancient people referred what was celestial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what was spiritual to that of the lungs, and consequently to whatever pertains to the lungs, as do the singing voice and things like it, and therefore the voices or sounds of such instruments. The ground of this was not merely that the heart and lungs represent a kind of marriage, like that of love and faith, but also because the celestial angels belong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the spiritual angels to that of the lungs. That such things are meant in the passage before us, may also be known from the fact that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and that it would be destitute of life if nothing more were implied than that Jubal was the father of such as play upon the harp and the organ; nor is it of any use to anyone to know this.
해설
AC.418은 앞의 AC.417에서 제시한 유발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야발에 관한 앞 절이 사랑에 속하는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다면, 유발에 관한 이 절은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다룹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가 ‘수금과퉁소’(harpandorgan)라는 표현에 담겨 있다고 밝힙니다. 이 번호의 핵심은 악기의 종류를 분류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애정이 어떻게 노래와 소리로 표현되며, 그 관계가 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표상교회의 예배를 언급합니다. 그 예배에서 노래와 악기는 단순히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영적인 것들을 표상했습니다. 그는 천국의 모든 기쁨이 마음의 즐거움을 낳고, 그 즐거움이 노래로 표현되며, 이어서 현악기가 그 노래를 본뜨고 더욱 고양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에서 중요한 것은 소리가 만들어지는 순서보다 그 소리의 근원입니다. 노래는 마음의 애정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에서 비롯된 즐거움이 밖으로 표현되는 한 방식입니다.
이어지는 ‘마음의애정은천적이지만,그결과로나오는노래는영적입니다’라는 문장은 이번 번호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서로 경쟁하는 두 상태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애정과 그 애정에서 나오는 노래의 관계를 통해,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사랑의 애정이 그 근원에 있고, 그 애정이 표현되는 데에는 영적인 것이 관련됩니다. 따라서 유발이 신앙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앞서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는 설명과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관계를 천사들의 합창에 관한 자신의 경험으로도 설명합니다. 그는 천적 천사들의 합창과 영적 천사들의 합창이 있으며, 영적 천사들의 합창은 현악기의 소리에 비길 만한 특유의 음색으로 구별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가 전하는 것은 모든 천사의 노래가 같은 방식으로 들린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별이 합창의 소리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는 그 합창에 관해 나중에 더 말하겠다고 예고하므로, 이번 번호만으로 두 합창의 모든 차이를 상세히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심장과 폐에 관한 설명은 이러한 관계를 한층 깊게 보여 줍니다. 태고인들은 천적인 것을 심장의 영역에, 영적인 것을 폐의 영역에 관련지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심장과 폐가 사랑과 신앙의 결합과 같은 일종의 결합을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천적 천사들은 심장의 영역에, 영적 천사들은 폐의 영역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노래하는 목소리와 악기의 소리가 폐의 영역에 관련된다는 설명은 단순한 신체 비유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인간의 심장과 폐라는 표상, 그리고 천사들의 구별과 함께 제시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장을 사랑, 폐를 신앙이라고 단순히 외우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두 기관이 이루는 결합입니다. 심장과 폐는 서로 구별되지만 살아 있는 몸 안에서 함께 작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과 신앙도 구별되지만, 그 관계를 끊어 놓은 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번 번호가 심장과 폐의 모든 생리적 기능을 세부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 이상의 대응 관계를 임의로 확장하기보다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사랑과 신앙의 결합에 주목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 문단에서 스베덴보리는 왜 유발의 기록에 속뜻이 있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유발이 악기 연주자들의 조상이었다는 역사적 정보만 남는다면, 그 사실을 아는 것이 누구에게 어떤 영적 유익을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문자적 기록을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문자적 기록을 통해 전해지는 더 깊은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유발에 관한 짧은 기록도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밝히는 말씀으로 읽을 때, 단순한 문화사의 한 장면을 넘어 우리의 영적 삶과 연결됩니다.
결국 AC.418은 유발의 수금과 퉁소를 통해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설명하면서, 그 영적인 것들이 사랑의 애정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마음의 애정이 노래로 표현되듯,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서로 구별되면서도 관계를 맺습니다. 성도들은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을 사랑과 떨어진 지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랑에서 비롯되는 영적인 삶의 표현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18해설)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창4:21)
AC.417
‘그의아우의이름은유발이니’(hisbrother’snamewasJubal)는같은교회의영적인것들에관한교리를의미합니다.‘수금과퉁소를잡는모든자의조상’(fatherofeveryonethatplayethupontheharpandorgan)은신앙의진리들과선들을의미합니다. By “hisbrother’snamewasJubal” is signified the doctrine of the spiritual things of the same church; by the “fatherofeveryonethatplayethupontheharpandorgan”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해설
AC.417은 야발에 이어 그의 아우 유발의 속뜻을 밝힙니다. 앞의 AC.412-416에서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했습니다. 이제 유발은 ‘같은교회의영적인것들에관한교리’를 의미합니다. 두 형제는 서로 무관한 두 교회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교회 안에서 구별되는 두 종류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같은교회’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야발과 유발은 모두 가인의 계보에 속하며, 스베덴보리는 두 사람을 설명하면서 사랑에 관한 교리와 신앙에 관한 교리를 구별합니다. 야발에게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이 강조되고, 유발에게서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이 강조됩니다. 따라서 이 구별은 사랑과 신앙을 서로 대립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같은 교회에 속한 교리들이 각각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유발에 관한 문자적 기록은 그가 ‘수금과퉁소를잡는모든자의조상’이었다고 말합니다(창4:21). 앞의 야발이 장막과 가축에 관한 표현으로 소개되었다면, 유발은 악기에 관한 표현으로 소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단순한 직업이나 기술의 차이로만 읽지 않습니다. 야발의 장막과 가축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나타내듯이, 유발의 수금과 퉁소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나타냅니다.
이때 ‘영적인것들’과 ‘신앙의진리들과선들’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히 어떤 내용을 알고 있거나 그것이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에는 진리뿐 아니라 선도 함께 언급됩니다. AC.417이 유발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신앙의진리들’이라고만 하지 않고 ‘신앙의진리들과선들’이라고 한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 번호는 그 진리들과 선들이 각각 어떤 세부적인 내용을 가리키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 구체적인 근거는 이어지는 번호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수금과퉁소를잡는모든자의조상’이라는 표현을 유발이 인류 최초의 악기 연주자였다는 역사적 주장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앞의 AC.416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최초의 목축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들어, ‘조상’이라는 표현의 속뜻에 주목하도록 했습니다. 유발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이 표현이 어떤 교리를 나타내는지를 살피는 것이 이번 해설의 중심입니다. 그렇다고 악기의 구조나 소리의 성질에 관한 세부적인 상응을 이 번호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야발과 유발을 함께 읽으면 두 형제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유발은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이 구별을 통해 우리는 말씀에서 사랑에 관한 것과 신앙에 관한 것이 각각 다른 표현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유발에게도 신앙의 ‘선들’이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은, 신앙을 선과 무관한 지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AC.417은 유발의 이름과 악기에 관한 기록을 통해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밝힙니다. 야발의 장막과 가축에 이어 유발의 수금과 퉁소를 읽는 우리는, 말씀의 서로 다른 표현들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신앙의 진리들 및 선들을 어떻게 구별하여 나타내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이 번호에서는 그 기본적인 구별을 분명히 붙들고, 수금과 퉁소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어지는 설명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417해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6
사랑의거룩한것들과거기서나오는선들이의미된다는사실은,야발이‘장막과가축의우리에거주한’(dweltintentsandinfoldsofcattle)사람들가운데최초가아니었다는점에서분명합니다.아담과하와의둘째아들아벨에대해서도그가‘양떼의목자’(ashepherdoftheflock)였다고말하기때문입니다.더욱이야발은가인의계보에서일곱번째에해당합니다. That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are signifi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abal was not the first of those who “dweltintentsandinfoldsofcattle,” for it is said likewise of Abel, the second son of Adam and Eve, that he was “ashepherdoftheflock,” and Jabal was the seventh in the order of descent from Cain.
해설
AC.416은 앞의 AC.412-415에서 밝힌 야발의 속뜻을 짧지만 중요한 논거로 뒷받침합니다. 야발이 ‘장막에거주하며가축을치는자의조상’으로 불린다고 해서, 그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장막을 짓거나 가축을 길렀다는 뜻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자체에 이미 기록된 아벨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창4:2에 따르면 아벨은 ‘양치는자’였습니다. 그런데 창4:20에 이르러 야발을 ‘장막에거주하며가축을치는자의조상’이라고 부릅니다. 두 기록을 단순한 직업의 발생 순서로만 읽으면 의문이 생깁니다. 아벨이 이미 양을 쳤는데, 어떻게 훨씬 뒤에 등장하는 야발이 가축을 치는 자들의 조상일 수 있겠습니까? AC.416은 바로 이 의문을 통해 독자가 문자적 기록에 담긴 속뜻을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가인의 계보에서 일곱 번째에 해당한다는 사실도 덧붙입니다. 아벨보다 뒤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계보의 순서로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에 별도의 상응을 부여하는 것이 이번 번호의 논점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야발을 최초의 목축인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조상’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앞의 AC.412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AC.414에서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AC.415에서는 ‘가축’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낸다는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야발에 관한 기록을 단순한 생업의 기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벨과의 비교를 통해 확인합니다.
아벨과 야발이 모두 목축과 관련된다고 해서 두 사람의 속뜻까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앞서 아벨은 체어리티의 선과 관련하여 설명되었고,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와 관련하여 설명되었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을 비교할 때에는 ‘누가먼저가축을쳤는가?’라는 질문에 머물지 않고,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기록에서 무엇을 밝히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 번호는 말씀의 속뜻을 읽는 한 가지 중요한 방법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문자적 기록을 무시한 채 임의로 새로운 의미를 붙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4:2의 아벨과 창4:20의 야발을 함께 읽고, 계보의 순서까지 확인하면서 문자적 기록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말씀의 한 구절을 다른 구절과 대조하여 읽는 일이 속뜻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AC.416의 핵심은 야발이 실제로 어떤 목축 기술을 처음 개발했는지를 밝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벨이 이미 양을 쳤다는 사실은 야발의 ‘조상’이라는 표현을 단순한 직업의 최초 창시자로만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의 번호들에서 밝혀진 장막과 가축의 속뜻을 따라,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낸다는 설명을 이해하게 됩니다. (AC.416해설)
※오늘(2026/09/2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4, ‘주 우리 하나님’, 찬94,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오늘은창4절별 주석 그 다섯 번째, 16절로 18절, AC 글 번호로는 397번에서 404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창4:16-18)
제목은
보존된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가인의 성읍 에녹
이며, 다음은 ‘3분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2026/09/13)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3, ‘영원한하늘나라’, 찬93, ‘예수는나의힘이요’입니다.
오늘은창4절별 주석 그 네 번째, 9절로 15절, AC글 번호로는 370번에서 396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창4:9-15)
제목은
가인의표,인간의실패보다더깊은주님의섭리
이며, 다음은 지난주부터 시작한 ‘3분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