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4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천상의 결혼’(heavenly marriage)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이 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천상의 결혼’은 무엇일까요? 천국에 간 남자와 여자가 이루는 결혼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AC.54가 직접 말하는 것부터 구별해야 합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이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들이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결혼을 통해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그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 안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불렀으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54 안에서만 보아도 결혼이라는 말은 자연적인 남녀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 내면의 두 기능이 하나로 작동하는 관계까지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천상의 결혼 =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라고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도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AC 전체에서 ‘천상의 결혼’이라는 개념은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의지의 결합, 진리와 선의 결합, 신앙과 사랑의 결합 등이 서로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모든 참된 결합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을 하나의 평면적인 등식으로 외우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참된 결합이 여러 차원에서 나타나는 질서’라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이 표현 역시 AC.54 자체의 문장을 넘어선 전체 AC의 관점에서 정리한 설명이라는 점은 구별해야 합니다.

 

AC.54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는 이해와 의지의 결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하고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는 이해이고 의지는 의지인 채로, 둘이 하나로 작동합니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상응의 중요한 성질을 보여 줍니다. 참된 결합은 차이를 없애는 동일화가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해와 의지가 결합한다고 해서 이해가 의지가 되거나 의지가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기능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 작동합니다.

 

앞의 AC.53과 연결하면 신앙과 사랑의 관계도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AC.53은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했습니다. 따라서 이해와 의지의 결혼은 자연스럽게 신앙과 사랑의 결합과도 연결됩니다. 이후 AC.475-476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뜻한다고 다시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교리를 많이 알면서 사랑도 조금 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과 사랑이 참으로 결합한다는 것은 사람이 아는 진리와 그가 실제로 사랑하고 원하는 선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와 관계됩니다. 이해가 한 방향을 보고 의지가 정반대 방향을 향한다면 둘이 하나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아는 대로 완벽하게 살아야만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도덕적 완전주의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은 진행되는 과정이며, AC.54는 그 과정의 세부 단계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된 영적 질서가 이해와 의지의 분리에 있지 않고 그 결합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결혼’이라는 말을 선과 진리의 관계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의지는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기능과 깊이 관계되므로 이해와 의지의 결합은 진리와 선의 결합과 분리되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 전체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은 천국과 거듭남을 이해하는 매우 근본적인 원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남자 = 진리’, ‘여자 = 선’이라는 하나의 기계적인 공식으로 모든 성경 구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은 문맥을 따라 보아야 합니다. AC.54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 안에서 ‘남자 = 진리’, ‘여자 = 선’이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관련된 더 넓은 대응은 이후의 AC 설명과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은 이 내적인 결혼과 어떤 관계였을까요? AC.54의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에서 누리는 행복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즉 자연적인 결혼 자체를 행복의 최종 근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결합의 행복 안에서 더 높은 결합의 질서를 보았고, 그 근원을 천적인 것과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연적인 결혼을 단순한 그림자나 중요하지 않은 외피로 취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결혼이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다고 AC.54가 직접 말합니다.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참으로 표상할 때 외적인 것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을 담고 드러내는 귀한 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 사람들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할 수 있으면 결혼에 비유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단순히 사회제도 하나가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행복을 경험하게 하는 매우 깊은 표상이었습니다.

 

또 이 때문에 말씀에서 교회 자체도 ‘딸’, ‘처녀’, ‘아내’라는 결혼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AC.54는 그 이유를 교회의 ‘선에 대한 애정’에서 찾습니다. 이후 말씀에서 주님과 교회의 관계가 혼인과 부부의 언어로 나타날 때에도 이 천상의 결혼이라는 큰 주제가 배경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 천국에서의 실제 남녀 결혼과 ‘천상의 결혼’은 아무 관계가 없을까요? 그렇다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저술에서 천국의 결혼과 결혼애를 별도로 매우 깊게 다룹니다. 다만 AC.54의 ‘천상의 결혼’을 처음부터 사후세계의 부부생활만을 뜻하는 용어로 제한하면 이번 글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여기서는 자연적인 결혼의 행복이 더 내적인 천상의 결합에서 온다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결합의 궁극적인 근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의 생각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에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완전한 조화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앞의 AC.39 이후의 원리는 여기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래서 ‘천상의 결혼’을 가장 안전하게 기억하는 방법은 하나의 단단한 등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 질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서로 구별되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게서 오는 질서 안에서 하나로 결합하여 작동하는 것입니다. AC.54에서는 그 가운데 특별히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것을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실제 결혼의 행복은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내적인 결합을 비추었고, 그 결합은 다시 천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했습니다. 이것이 AC.54에서 ‘남자와 여자’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굳이 태고교회의 결혼의 행복과 천상의 결혼을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 :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결혼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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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창1:31)

 

AC.60

이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하는 이유는, 앞선 상태들을 단지 ‘좋았더라’(good)라고만 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This state is called “very good,” 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 “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해설

AC.60은 창1:31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 가운데 특히 ‘심히 좋았더라’에 주목합니다. 앞선 창조의 날들에도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섯째 날에는 처음으로 ‘심히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왜 여기에서만 ‘심히’라는 말이 더해지는지를 사람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에서 설명합니다.

 

AC.60의 대답은 매우 간결합니다.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것은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 자체입니다. AC는 이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왜 말씀에서 앞선 상태들은 ‘좋았더라’라고 하고 이 상태에서는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는지 그 속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설의 중심도 언제나 창1:31의 이 말씀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좋았더라’와 ‘심히 좋았더라’의 차이는 단순히 앞의 것들도 좋았지만 마지막 것은 조금 더 좋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AC.60은 그 차이를 신앙과 사랑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앞선 상태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아직 이렇게 ‘하나’를 이루는 상태로 설명되지 않았지만, 이제 여섯째 상태에서는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그렇다고 앞선 상태의 신앙이나 선과 진리가 살아 있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AC들에서도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선과 진리를 말했습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 이전의 상태를 ‘아직 죽어 있는 상태’, 여섯째 날을 ‘비로소 생명이 처음 생긴 상태’라고 구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0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하나가 됨’입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이 따로 있고 사랑에 속한 것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것들이 하나를 이룹니다. 이것이 ‘심히 좋았더라’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일까요?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이 표현이 조금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메인에서는 신앙과 사랑을 단순히 ‘머리와 가슴’, 또는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정도로만 축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다음 AC.61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영적’이라 하고,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천적’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60은 그 다음 설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을 열어 줍니다. 여기서는 우선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며, 이것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결혼’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붙들면 충분합니다.

 

‘결혼’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다’고 하지 않고,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하나 됨은 어느 한쪽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결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다만 이번 한 문장만 가지고 ‘결혼’의 전체 교리를 펼칠 필요는 없습니다. 선과 진리의 결혼, 천상의 결혼, 의지와 이해의 결합 등은 AC 전체에서 계속 깊어지는 주제입니다. AC.60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결혼이다’라는 직접적인 설명까지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또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곧바로 서로 경쟁하는 높고 낮은 두 단계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문장에서는 둘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즉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둘의 분리가 아니라 결합입니다.

 

그렇다고 ‘영적’과 ‘천적’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혼이라는 표현 자체가 둘의 구별을 전제로 합니다. 서로 다른 것이면서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영적이고 무엇이 천적인지는 바로 다음 AC.61이 설명하므로, 여기에서 미리 지나치게 세분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실제로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도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실제로는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그가 아는 것과 그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그가 참된 것을 알고 그것을 사랑하며,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룬다’는 말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AC.60의 문장을 독자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예이지, 이 한 가지 예가 ‘결혼’의 전체 뜻을 정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사랑’을 단순한 감정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랑에 속한 것들이 신앙에 속한 것들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믿는 내용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느낀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의지와 삶에 깊이 관계됩니다. 다만 이 부분 역시 이어지는 AC들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을 단순히 교리 내용을 많이 아는 것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은 진리와 이해에 관계하지만, AC.60에서 말하는 상태는 그것들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을 서로 독립된 두 종교적 능력처럼 생각하기보다, 하나의 생명 안에서 결합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창1:31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라는 말씀도 해설의 중심을 다시 주님께 돌려놓습니다. 이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고 ‘이제 나는 충분히 거듭났고 심히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심히 좋았더라’를 인간의 영적 자기평가 기준으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나는 여섯째 날 인간인가?’라고 자신의 영적 등급을 판정하는 것이 이 말씀의 목적은 아닙니다. AC는 창조의 날들을 통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지, 사람에게 자기 영적 수준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또 현재의 여섯째 상태를 ‘거듭남의 최종 완성’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창1의 여섯째 날이 매우 높은 상태이고 ‘심히 좋았더라’고 불리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창2에는 일곱째 날이 이어지고, AC.62부터는 일곱째 날과 천적 인간의 상태가 설명됩니다.

 

따라서 AC.60의 ‘심히 좋았더라’를 가볍게 낮출 필요도 없지만, 뒤에 이어지는 일곱째 날의 몫까지 여기에 미리 가져와 ‘모든 거듭남의 최종 완성’이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글이 말하는 만큼만 충분히 말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왜 앞선 상태들은 ‘좋았더라’이고 이번에는 ‘심히 좋았더라’일까요? AC.60의 답은 끝까지 단순합니다.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거듭남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사람에게 진리가 있고 신앙이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룹니다.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를 이루는 상태를 말씀은 ‘심히 좋았더라’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창1:31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라고 합니다. 창조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처럼, 속뜻에서 진행되는 거듭남 역시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새로운 창조가 아닙니다.

 

그래서 AC.60을 읽을 때 가장 마지막에 남아야 할 말도 인간의 성취보다 말씀의 선언이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AC.60은 바로 이 말씀의 ‘심히 좋았더라’ 안에,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고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밝힙니다.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에는 매우 짧지만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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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1, 창1:31, '영적과 천적 : 이해의 신앙과 의지의 사랑이라는 인간 구조의 두 축'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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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창1:30, ‘모든 푸른 풀’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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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태고교회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이 그들의 후손들 가운데서 사라지자, 이 아르카나 역시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결혼은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안에 담긴 행복을 느끼고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내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내적인 것들, 즉 속의 것들로만 기뻐했습니다. 겉의 것들은 눈으로 보기만 했고, 그것들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겉의 것들은 그것들이 그들의 생각을 속의 것들, 곧 내적인 것들로, 그리고 거기서 천적인 것들로, 결국에는 그들의 모든 것 되신 주님께로 돌이키게 해줄 때에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으며,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누리는 행복이 바로 거기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understanding)를 남자라 불렀고, 의지(will)를 여자라 불렀으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marriage)이라 불렀습니다. 그 교회로부터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방식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로 인해 선에 대한 애정으로 교회를 가리켜 ‘딸’(daughter)과 ‘처녀’(virgin), 곧 ‘시온의 처녀’(virgin of Zion), ‘예루살렘의 처녀’(virgin of Jerusalem)라 하였고, 또한 ‘아내’(wife)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주제들에 대해서는 다음 장 23절과 3장 15절에서 더 보게 될 것입니다. What is meant by “male and female,” in the internal sense, was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 was lost among their posterity, this arcanum also perished. Their marriages were their chief sources of happiness and delight, and whatever admitted of the comparison they likened to marriage, in order that in this way they might perceive its felicity. Being also internal men, they were delighted only with internal things. External things they merely saw with the eyes, but thought of what was represented. So that outward things were nothing to them, save as these could in some measure be the means of causing them to turn their thoughts to internal things, and from these to celestial things, and so to the Lord who was their all, and consequently to the heavenly marriage, from which they perceived the happiness of their marriages to come. The understanding in the spiritual man they therefore called male, and the will female, and when these acted as a one they called it a marriage. From that church came the form of speech which became customary, whereby the church itself, from its affection of good, was called “daughter” and “virgin”—as the “virgin of Zion,” the “virgin of Jerusalem”—and also “wife.” But on these subjects see the following chapter, at verse 23, and chapter 3, verse 15.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

 

해설

AC.54는 창1:27의 마지막 표현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를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뜻에서는 물론 남성과 여성의 창조를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남자와 여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태고교회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르카나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태고교회 사람들이 결혼과 자연계의 외적인 것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길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가 주의할 것은 AC.54가 자연적인 남녀나 실제 결혼을 부정하고 그것을 단지 인간 심리의 비유로 바꾸려는 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실제 결혼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매우 큰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혼이라는 자연적 현실을 통해 더 내적인 결합을 보았습니다. 자연적인 결혼과 그 속뜻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 안에서 내적인 것을 보았다는 것이 이번 글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결혼이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결혼에 비유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혼의 행복을 지각했습니다. 오늘날 독자에게는 조금 낯선 표현이지만, 이 문장은 태고교회가 ‘결합’을 얼마나 중요하게 보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을 바라보는 방식은 외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AC.54는 그들을 ‘내적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외적인 것들을 눈으로 보았지만, 생각으로는 그것들이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외적인 것 자체가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말은 자연계의 사물이나 삶을 무가치하게 여겼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의 요점은 외적인 것이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을 보면 그들의 생각은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으로 향했고, 내적인 것에서 다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이 흐름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응과 표상이라는 것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좋은 사례입니다. 자연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것만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 안에서 더 내적인 것을 보았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연계는 막다른 곳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생각을 그 자체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실재를 향하게 했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의 결혼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그보다 더 내적인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고, 자기들의 결혼에서 누리는 행복이 바로 그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여기서 ‘천상의 결혼’이라는 말이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천국에 가면 이루어지는 남녀의 결혼’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실제 남녀의 결혼과 아무 관계가 없는 추상적인 심리 현상으로만 이해해서도 곤란합니다. AC.54 자체에서는 이 용어의 전체 교리를 아직 펼치지 않습니다. 다만 태고교회 사람들이 자연적인 결혼의 행복을 더 높은 결합에서 오는 것으로 퍼셉션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개념은 앞으로도 AC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 설명을 거쳐 스베덴보리는 마침내 창1:27의 ‘남자와 여자’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힙니다.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를 남자라 불렀고, 의지를 여자라 불렀으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 불렀다.’ 이것이 AC.54의 핵심 문장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는 대응이 나옵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현실의 모든 남성은 이해를 대표하고 모든 여성은 의지를 대표한다는 심리적 성별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54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와 의지입니다. 한 인간 안에 있는 두 기능을 남자와 여자라는 결혼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남성에게는 이해만 있고 여성에게는 의지만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AC.54의 속뜻에서 한 영적 인간 안에 이해와 의지가 있고, 그 둘의 관계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이 글을 현실 남녀의 지적 능력이나 감정적 성향을 분류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또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는 대응을 지나치게 기계적인 사전처럼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창1:27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태고교회의 결혼에 대한 인식과 영적 인간 안의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연결합니다. 이후 다른 문맥에서 ‘남자’, ‘여자’, ‘남편’, ‘아내’ 등이 등장할 때에는 그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다시 보아야 합니다.

 

AC.54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해와 의지가 각각 따로 있다는 사실보다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해와 의지의 구별은 결합을 위한 구별입니다. 둘이 없어져 하나의 기능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53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AC.53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54에서는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앞에서는 둘의 질서를 구별했다면 이번에는 둘의 결합에 시선이 놓입니다.

 

그렇다고 ‘이해에 들어온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사랑이 되면 그것이 곧 결혼이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거듭남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특히 영적 인간의 진행을 설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표현일 수 있지만, 앞의 AC.52-53에서 천적 인간은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54의 더 근본적인 요점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한다는 데 있지 않고,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은 우리가 앞에서 보아 온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생명은 한쪽 기능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AC.54 자체는 ‘이해 = 진리 = 신앙’, ‘의지 = 선 = 사랑’이라는 모든 대응 관계를 한꺼번에 체계화하는 글은 아닙니다. 지금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만큼을 붙들면 충분합니다. 영적 인간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 했고,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 했습니다.

 

그런 다음 스베덴보리는 이 태고교회에서 하나의 언어 습관이 비롯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교회 자체가 선에 대한 애정 때문에 ‘딸’과 ‘처녀’, 예를 들어 ‘시온의 처녀’, ‘예루살렘의 처녀’라고 불렸으며 또한 ‘아내’라고도 불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교회가 여성적 표현으로 등장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여기서도 ‘교회 = 여자’라는 하나의 고정된 공식만 기억하기보다 왜 그런 표현이 사용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AC.54가 직접 밝히는 이유는 ‘선에 대한 애정’입니다. 교회가 선에 대한 애정과 관련되기 때문에 딸·처녀·아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창2:23과 창3:15에서 더 보게 될 것이라고 직접 예고합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아내로서의 교회’, ‘여자와 여자의 후손’, ‘남편과 아내의 모든 상응’을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AC 자체가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고 하므로 그때까지 남겨 두는 것이 오히려 전체 흐름을 따라가는 좋은 독법입니다.

 

AC.54에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상응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외적인 것을 보면서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을 생각했고, 거기서 천적인 것으로, 마침내 주님께로 생각이 향했습니다. 상응은 그들에게 외워 둔 상징 사전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AC를 읽으며 상응을 공부할 때에도 중요한 주의를 줍니다.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고 외우는 것만으로 태고교회의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의 시선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에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께 향합니다. 상응의 목적은 자연적인 상징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더 내적인 것과 주님을 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서 결혼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들의 실제 결혼은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 행복의 근원을 더 높은 천상의 결혼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것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서로 다른 둘이 각자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채 하나로 작동하는 것이 결혼이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AC.54의 중심을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정적이다’라는 자연적 성별 구분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실제 결혼은 중요하지 않고 인간 내면의 이해와 의지만 중요하다고 읽어서도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자연적인 결혼은 더 내적인 결합을 비추는 귀한 표상이었고,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결국 AC.54는 창1:27의 ‘남자와 여자’를 통해 인간 안의 두 기능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와 의지는 구별되지만 하나로 작동할 때 ‘결혼’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이 결혼의 언어는 인간 개인 안에서 끝나지 않고 교회를 ‘딸’, ‘처녀’, ‘아내’라고 부르는 말씀의 표현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결합의 시선은 더 깊이 들어가면 천적인 것으로, 마침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셨던 주님께 향합니다.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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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 창1:28, ‘결혼의 열매 : 신앙과 사랑의 결합에서 생육과 번성이 일어나는 거듭남의 확장'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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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 창1:27,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AC.53-54)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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