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2:15)

 

AC.122

에덴동산(garden of Eden) 앞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는 (till it and take care of it) 그가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By thegarden of Edenare signified all things of the celestial man, as described; by totill it and take care of itis signified that it is permitted him to enjoy all these things, bu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because they are the Lords.

 

해설

AC.122는 창2:15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말씀의 속뜻을 매우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에덴동산은 단순히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동산을 경작하고 지킨다는 것도 자연적인 농경 행위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 인간이 주님께 받은 모든 것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지를 나타냅니다.

 

앞의 설명들을 생각하면 에덴동산안에는 사랑과 지혜와 지성, 그리고 그로부터 질서 있게 이어지는 이성과 앎까지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AC.121에서는 그 생명의 질서가 동쪽이신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에 속한 앎들에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122에서 말하는 모든 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재산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의 생명과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속한 것이라고 해서 인간이 그것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에게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이 허락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지혜와 지성은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에 주어지고, 인간은 그것을 자기의 생명처럼 느끼며 살아갑니다. 천적 질서는 인간이 아무것도 느끼거나 행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을 충만히 누리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된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AC.122의 중심이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 안에 사랑과 지혜와 지성과 선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들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실제로 누리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따라서 안에 있다는 것과 나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 사람 안에 있으므로 사람은 그것으로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이십니다.

 

이 점에서 경작하며 지킨다는 표현도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듯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실제 삶 가운데 사용합니다. 다만 그렇게 사용하면서 사랑과 지혜와 선을 자신의 독립적인 소유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인간의 활동과 주님의 생명 사이의 질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실제로 경작하고 지키지만, 그가 경작하고 지키는 모든 생명의 것은 주님께 속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121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22는 그렇게 생명을 얻은 모든 것을 사람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받아 누리고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흐름의 출발점을 잊고 지혜는 지혜이고, 선은 선이며, 생명은 나에게서 나온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천적 질서는 생명의 흐름뿐 아니라 그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질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킨다는 말씀에는 천적 인간의 매우 근본적인 삶의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고 자기 것으로 빼앗지도 않습니다. 받아서 누리고, 실제 삶 가운데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소유하려 하지 않고, 주님의 것으로 받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에덴동산 안에서 살아가는 천적 인간의 질서입니다. (AC.122)

 

 

 

AC.123, 창2:15,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3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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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1, 창2:14, ‘천적 질서 -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지식까지’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1천적 질서의 본질, 곧 생명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 강들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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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2:11, 12)

 

AC.112

또한 사랑에서,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으며, 신앙에서, 따라서 역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에서,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선은 없으며, 신앙에서,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진리도 없습니다. 사랑과 신앙에서,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들도 실제로는 이러한 이름들로 불리지만, 그것들은 진정한 것이 아닙니다. Be it known moreover that there is no wisdom which is not from love, thus from the Lord; nor any intelligence except from faith, thus also from the Lord; and that there is no good except from love, thus from the Lord; and no truth except from faith, thus from the Lord. What are not from love and faith, and thus from the Lord, are indeed called by these names, but they are spurious.

 

해설

AC.112는 앞의 AC.111에서 서로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했던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매우 간결하게 정리합니다. 지혜는 사랑에서 나오고, 지성은 신앙에서 나오며, 선은 사랑에서 나오고, 진리는 신앙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이 네 가지의 관계를 분류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각각을 설명할 때마다 결국 따라서 주님으로부터라고 덧붙입니다. 사랑과 신앙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오므로,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과 선과 진리 역시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와 지성의 구별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앞의 AC.107에서는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이고, 그것이 동산을 적시는 것은 지성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AC.111에서는 지혜와 지성이 서로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했으며, 이제 AC.112에서는 지혜를 사랑에, 지성을 신앙에 관계시킵니다. 아직 두 개념의 차이가 모두 설명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베덴보리가 두 말을 단순한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지혜는 사랑과 특별히 관계되고 지성은 신앙과 특별히 관계됩니다.

 

선과 진리도 같은 질서 안에서 설명됩니다. 선은 사랑에서 나오고 진리는 신앙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앞의 AC.110에서 사랑의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 사랑의 진리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세밀하게 구별했던 내용과도 이어집니다. 지금 단계에서 그 모든 차이를 하나의 체계로 완성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선과 사랑, 진리와 신앙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천적 인간 안에서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의 질서를 이룬다는 것은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AC.112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 안에서 지혜가 생각되고, 지성이 활동하며, 선을 원하고 행하고, 진리를 알고 말하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앞의 AC.109에서 지혜와 지성이 사람 안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오직 주님의 것이라고 했듯이, 여기서는 그 원리가 선과 진리에까지 확대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것, 지성 있는 것, 선한 것, 참된 것은 모두 사랑과 신앙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원리를 반대편에서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사랑과 신앙에서,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들도 세상에서는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매우 영리한 판단이 지혜처럼 보일 수 있고, 많은 지식을 가진 것이 지성처럼 보일 수 있으며, 외적으로 선해 보이는 행위나 그럴듯한 주장이 선과 진리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무엇이라고 불리는가보다 그것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봅니다. 그 근원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에 있지 않다면, 이름은 같아도 여기서 말하는 참된 지혜와 지성과 선과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AC.111에서 겉 사람들이 기억지식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른다는 설명과도 바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기억지식이나 인간의 지적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모습이나 명칭만으로 영적인 실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합니다. 무엇인가가 지혜처럼 보인다는 것과 실제로 지혜인 것은 같지 않으며, 무엇인가가 선이라고 불린다는 것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인 것도 같지 않습니다. 참된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겉으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그것이 사랑과 신앙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112는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의 차이를 말하면서도 결국 이 모든 것을 하나의 근원으로 모읍니다. 지혜와 선은 사랑에 관계되고, 지성과 진리는 신앙에 관계되지만, 사랑과 신앙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오므로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앞에서 생명나무가 주님의 자비이며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나온다고 한 설명과도 일치합니다. 사람 안에 참된 지혜와 지성과 선과 진리가 있을수록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천적 인간의 질서입니다. (AC.112)

 

 

 

AC.113, 창2:11-12, ‘금은 지혜와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3말씀에서 ‘금’(gold)으로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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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1, 창2:11-12, ‘사랑과 신앙의 차이는 무수하며, 천국은 그 차이에 따라 질서 지어진다’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속뜻에 있는 그대로 설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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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where there is gold.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there is bdellium and the onyx stone. (2:11, 12)

 

AC.110

첫째(first) , 비손(Pishon)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의미합니다. 하윌라 (the land of Havilah) 마음을, (gold) 선을, 베델리엄과 호마노(bdellium and the onyx stone) 진리를 의미합니다. (Gold) 언급되는 것은 사랑의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베델리엄과 호마노(bdellium and the onyx stone) 언급되는 것은 하나는 사랑의 진리를,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천적 인간입니다. Thefirstriver, orPishon,signifies the intelligence of the faith that is from love; “the land of Havilahsignifies the mind; “goldsignifies good; “bdellium and the onyx stone,truth. “Goldis mentioned twice because it signifies the good of love and the good of faith from love; andbdellium and the onyx stoneare mentioned because the one signifies the truth of love, and the other the truth of faith from love. Such is the celestial man.

 

해설

AC.110은 창2:11-12의 첫째 강 비손을 해설합니다. AC.107에서는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의미하고, 그 강이 네 근원으로 갈라지는 것은 네 강을 통하여 지성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 첫째 강인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네 강의 설명은 단순히 네 종류의 지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천적 인간에게서 지성이 어떤 질서를 이루고 있는지를 차례로 보여 주는 설명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비손이 단순히 신앙의 지성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천적 인간을 설명하면서 계속 강조된 질서와 같습니다. AC.102에서는 생명나무가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고, AC.105에서는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강이 나타내는 지성 역시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지성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속한 지성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신앙과 지성도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하윌라 은 마음을 의미하고, 그곳에 있는 은 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금이 두 번 언급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것이 사랑의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도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된 두 생명의 근원으로 놓이지 않습니다. 신앙의 선 역시 사랑에서 나오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하윌라 땅의 금은 천적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선을 보여 주되, 그 선이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관계하여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함께 나타냅니다.

 

이어 베델리엄과 호마노는 진리를 의미하는데, 하나는 사랑의 진리를,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다만 AC.110은 둘 가운데 어느 것이 사랑의 진리이고 어느 것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베델리엄과 호마노에 각각의 의미를 임의로 배정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범위에서는 두 가지가 함께 천적 인간에게 있는 진리를 나타내며, 그 진리 역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관계되어 있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10에서는 선과 진리 모두가 사랑을 중심으로 설명됩니다. 사랑의 선이 있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이 있으며, 사랑의 진리가 있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과 진리가 천적 인간에게서 중요하지 않다는 뜻과 정반대입니다. 천적 인간에게도 신앙과 진리와 지성이 모두 있지만, 그것들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인 근원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신앙과 그에 속한 선과 진리와 지성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마지막의 이와 같은 사람이 천적 인간입니다라는 문장은 앞의 모든 설명을 한 사람의 생명 상태로 모아 줍니다. 비손과 하윌라와 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는 각각 따로 암기해야 할 상응들의 목록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와 지성을 묘사하는 하나의 전체를 이룹니다. 특히 앞의 AC.103에서 배운 것처럼 현재 다루는 주제가 천적 인간이라는 사실이 이 각각의 표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이 표상들을 문맥에서 떼어 고정된 의미로만 읽기보다,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를 묘사하는 하나의 장면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110에서 첫째 강 비손이 보여 주는 핵심은 천적 인간의 지성이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선과 진리와 신앙과 지성이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 어느 것도 사랑과 분리되어 자기 힘으로 서지 않습니다. 앞에서 에덴의 강이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이고 그 지혜가 지성을 준다고 했던 흐름이 이제 첫째 강을 통하여 구체화되기 시작합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신앙에 지성이 있으며, 그 안에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사람, 바로 그러한 사람이 여기서 묘사되는 천적 인간입니다. (AC.110)

 

 

 

AC.111, 창2:11-12, ‘사랑과 신앙의 차이는 무수하며, 천국은 그 차이에 따라 질서 지어진다’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속뜻에 있는 그대로 설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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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9, 창2:10, ‘지혜와 지성은 사람 안에 나타나지만 오직 주님의 것이다’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9지혜와 지성이 사람 안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들은 오직 주님의 것이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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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2:10)

 

AC.107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river out of Eden)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에덴(Eden)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동산을 적신다(to water the garden) 것은 지성을 주는 것이며, 거기서 갈라져 근원이 되었다(thence parted into four heads) 것은 다음에 나오는 강을 통하여 지성을 묘사한 것입니다. Ariver out of Edensignifies wisdom from love, forEdenis love; “to water the gardenis to bestow intelligence; to bethence parted into four headsis a description of intelligence by means of the four rivers, as follows.

 

해설

AC.107은 창2:10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근원이 되었으니를 해설하기 시작합니다. 앞에서는 에덴이 사랑을, 동산이 지성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이제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움직임으로 묘사됩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는 것은 사랑에서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지성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에덴과 동산과 강은 서로 떨어진 세 표상이 아니라 천적 인간 안에서 사랑으로부터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 생명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특히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이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지혜의 근원이 사랑에 있다는 것은 앞에서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질서와 이어집니다. AC.99에서는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고, AC.105에서는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07에서는 그 사랑에서 지혜가 나온다고 합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는 자기 자신의 지적 능력만으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지혜입니다.

 

이어 동산을 적신다는 것은 지성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동산은 앞의 AC.98AC.100에서 설명된 지성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강이 동산을 적시는 모습은 지성이 스스로 독립하여 생명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통하여 생명을 공급받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자연의 동산이 물을 공급받아 살아나듯이, 이 구절의 속뜻에서는 지성이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통하여 살아 있게 됩니다. 다만 이러한 자연적 모습 자체에서 상응의 의미를 임의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의미와 문맥을 따라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지성이 함께 등장한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강을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라고 하고, 그 강이 동산을 적시는 것을 지성을 주는 이라고 구별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AC.107은 아직 지혜와 지성의 차이를 별도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단계에서 두 개념의 관계를 지나치게 세밀하게 규정하기보다,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가 지성을 주는 질서가 제시되고 있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어지는 네 강의 설명을 통하여 이 관계가 더 구체적으로 밝혀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거기서 갈라져 근원이 되었다는 부분도 아직 결론을 앞당겨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이 네 강을 통하여 지성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밝히면서 곧바로 다음과 같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107은 네 강 각각의 의미를 미리 설명하는 번호가 아니라 그 설명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줍니다. 네 강이 지성의 어떤 것들을 나타내는지는 뒤따르는 번호들을 읽으면서 하나씩 확인해야 합니다.

 

이러한 흐름에서 보면 AC.107은 앞의 에덴동산 해설을 한 단계 더 전진시킵니다. 에덴은 사랑이고 동산은 지성이라는 의미를 각각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2:10은 사랑에서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지성을 주는 생명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이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퍼셉션으로 지각한다고 했던 것처럼, 여기에서도 사랑과 지혜와 지성은 인간 자신을 근원으로 삼는 독립된 능력들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질서 있게 받아들여지는 모습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107의 핵심은 에덴동산의 표상들이 이제 서로 관계를 맺으며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서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지성을 주며, 이어 그 지성이 네 강을 통하여 더 자세히 묘사될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아직 네 강의 구체적인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으므로 지금은 그보다 앞서 나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107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가 지성을 주는 질서를 먼저 세우고, 다음 설명을 위한 출발점을 마련합니다. (AC.107)

 

 

 

AC.108, 창2:10, ‘동산과 강 - 사람을 자라게 하는 지혜의 물’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8태고인들은 사람을 ‘동산’(garden)에 비유할 때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도 ‘강들’(rivers)에 비유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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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6, 창2:9, ‘퍼셉션과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 - 그 성격은 뒤에서 밝혀진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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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4

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에 관하여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며, 태고교회에는 이것이 매우 알려져 있었습니다. 퍼셉션은 천사들에게는 매우 완전하여, 그들은 그것으로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오는지와 무엇이 자기 자신들로부터 오는지를 알아차리고 알며, 또한 자기들에게 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단지 그가 가까이 오는 것과 그의 생각 가운데 하나의 관념만으로 압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없고 양심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양심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매우 많은 사람은 양심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며, 퍼셉션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At this day it is unknown what perception is. It is a certain internal sensation, from the Lord alone, as to whether a thing is true and good; and it was very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perception is so perfect with the angels, that by it they are aware and have knowledge of what is true and good; of what is from the Lord, and what from themselves; and also of the quality of anyone who comes to them, merely from his approach, and from a single one of his ideas. The spiritual man has no perception, but has conscience. A dead man has not even conscience; and very many do not know what conscience is, and still less what perception is.

 

해설

AC.104는 지금까지 창2의 천적 인간을 설명하면서 여러 차례 등장했던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직접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하면서, 그것을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에 관하여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퍼셉션은 사람이 자신의 경험이나 추론만으로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는 능력도 아니고, 막연한 느낌이나 직감도 아닙니다. 그 근원이 오직 주님으로부터온다는 것이 퍼셉션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이 설명은 앞에서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를 다룬 내용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AC.99에서는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그는 그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04에서는 그 지각이 무엇을 향하는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적 인간은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를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감각으로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천적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진리와 선의 근원으로 삼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살아가는 생명의 질서와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퍼셉션이 태고교회에는 매우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사람이 당시 사람들이 경험한 퍼셉션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첫 문장에서 오늘날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현대의 직관이나 감정, 양심의 느낌을 그대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단계에서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내용, 곧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며 선과 진리에 관한 내적 감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천사들에게서는 이 퍼셉션이 매우 완전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 뿐 아니라,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오고 무엇이 자기 자신들로부터 오는지도 알아차립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천사들이 선하고 참된 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천사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이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지각한다고 한 내용이 여기서는 천사들의 퍼셉션을 통하여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천사들은 자기들에게 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그의 접근과 그의 생각 가운데 단 하나의 관념만으로 안다고 합니다. 이 대목은 놀랍지만, AC.104는 아직 그 과정이나 원리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천사들이 사람의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 읽는지까지 미리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이 사례가 보여 주려는 핵심은 천사들의 퍼셉션이 단순히 어떤 명제를 참이라고 판단하는 지적 능력보다 훨씬 깊고 완전하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사람의 내적 상태의 질까지 지각할 수 있을 정도로 퍼셉션이 완전하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없고 양심이 있다는 문장은 AC.81에서 제시했던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 줍니다. 영적 인간도 주님의 인도를 받지만 천적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퍼셉션으로 지각하는 것은 아니며, 그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AC.104는 아직 양심이 정확히 어떻게 형성되고 퍼셉션과 어떻게 다른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천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있고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다는 스베덴보리의 구별을 그대로 받아 두고, 이어지는 설명을 더 지켜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에게는 양심조차 없다고 하는데, 여기서 죽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앞의 AC.81에서 설명한 것처럼 아직 영적 생명이 없는 상태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AC.104는 퍼셉션과 양심을 통하여 앞에서 제시한 세 상태를 다시 보여 줍니다.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에게는 양심조차 없고,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으며, 천적 인간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단순한 등급표로 읽기보다, 거듭남 가운데 주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서로 다른 생명의 상태로 이해해야 합니다. (AC.104)

 

 

 

AC.105, 창2:9, ‘동산 중앙의 생명나무 -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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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3, 창2:9,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하는 것은 천적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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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3

여기서 나무들(trees) 퍼셉션을 의미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을 다룰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어의 성격에 따라 술어의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treeshere signify perceptions is that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but it is otherwise when the subject is the spiritual man, for on the nature of the subject depends that of the predicate.

 

해설

AC.103은 바로 앞 AC.102에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한 것을 모든 말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고정된 상응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것은 지금 창2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곧바로 덧붙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말씀에 같은 자연적 대상이나 같은 단어가 나온다고 해서 언제나 똑같은 속뜻을 가진다고 기계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상이 누구에게 또는 무엇에 관하여 서술되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주어의 성격에 따라 술어의 성격이 달라진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합니다.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지가 달라지면 그것에 관하여 서술되는 것의 의미도 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02에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까닭은 나무라는 자연물이 말씀 어디에서나 오직 퍼셉션만을 의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창2에서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고,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이 그치며,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지성이 흘러드는 상태를 설명해 왔습니다. 특히 AC.99에서는 천적 인간이 자신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주님께서 흘러드신다는 것을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천적 인간의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들이므로 여기서는 퍼셉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상응을 자연물의 특징만으로 추론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일깨워 줍니다. 어떤 자연적 대상의 성질을 관찰한 뒤 그것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 것이라고 임의로 정해서는 안 되며, 앞의 어느 구절에서 특정한 의미로 해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후의 모든 구절에 그 의미를 그대로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현재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그 표현이 어떤 문맥 안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주변의 다른 표현들과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특히 AC.103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가 같은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지금 다루는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오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퍼셉션으로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천적 인간을 다루는 현재 문맥에서는 동산의 나무들이 퍼셉션에 관계됩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을 다루는 문맥에서는 그 사람의 생명과 질서가 다르므로, 나무라는 동일한 표현도 그 주제에 맞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를 읽으면서 각각의 상응을 발견하더라도 그것을 문맥에서 떼어 내어 고정된 대응표처럼 축적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어떤 곳에서 동산이 지성을 의미했다고 해서 모든 동산이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고 단정하거나, 여기서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해서 말씀에 나오는 모든 나무를 곧바로 퍼셉션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에는 일관된 질서가 있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현재 다루는 주제와 문맥 안에서 밝혀져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AC.102에서 나무들의 의미를 제시한 직후 AC.103에서 곧바로 덧붙이는 중요한 주의사항입니다.

 

따라서 AC.103은 짧은 한 문장이지만 앞으로 AC 전체를 읽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말씀의 어떤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을 때에는 그 단어만 따로 떼어 보지 않고, ‘지금 말씀은 누구에 관하여, 어떤 상태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를 함께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것은 천적 인간과 그의 에덴동산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을 기억하면 앞으로 같은 표상이 다른 문맥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설명되더라도 그것을 모순으로 보지 않고, ‘주어의 성격에 따라 술어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말씀의 속뜻의 질서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103)

 

 

 

AC.104, 창2:9, ‘퍼셉션은 무엇인가 -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내적 감각’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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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2, 창2:9,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 신앙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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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2:8)

 

AC.99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지만, 그의 사람이 사람과 싸우기 때문에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것이 아니라 기억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생명,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싸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지각합니다. 이처럼 지금까지 영적 인간에게서 뒤집혀 있던 질서가 이제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된 것으로 묘사되며, 질서, 사람을 동쪽 에덴의 동산(garden in Eden in the east)이라 합니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동쪽 에덴에 창설하신 동산(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 주님 자신이십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주님의 나라와,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들어가게 되는 천국을 뜻합니다. 그때 사람의 상태는 천국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세상에 사는 동안 동시에 천국에도 있을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으며, 안에 천적이고 영적인 것이 들어 있습니다. 모든 각각의 안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으며, 생명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퍼셉션을 가질 있습니다. Life, or the order of life, with the spiritual man, is such that although the Lord flows in, through faith,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in ejus intellectualia, rationalia, et scientifica], yet as his external man fights against his internal man, it appears as if intelligence did not flow in from the Lord, but from the man himself, through the things of memory and reason [per scientifica et rationalia]. But the life, or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is such that the Lord flows in through love and the faith of love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and as there is no combat between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he perceives that this is really so. Thus the order which up to this point had been inverted with the spiritual man is now described as restored with the celestial man, and this order, or man, is called a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the supreme sense, the 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 is the Lord himself. In the inmost sense, which is also the universal sense, it is the Lords kingdom, and the heaven in which man is placed when he has become celestial. His state then is such that he is with the angels in heaven, and is as it were one among them; for man has been so created that while living in this world he may at the same time be in heaven. In this state all his thoughts and ideas of thoughts, and even his words and actions, are open, even from the Lord, and contain within the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for each one [of these] has the Lords life within it, which enables him to have perception.

 

해설

AC.99AC.98에서 동쪽 에덴의 동산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의미한다고 한 설명을 더욱 깊이 풀어 줍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게 생명이 어떻게 흘러드는지를 비교합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 인간에게는 주님이 유입하시지 않고 천적 인간에게만 유입하신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두 경우 모두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차이는 그 유입이 인간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어떻게 지각되는가에 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십니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지성이 흘러들어오는데도 사람에게는 기억지식과 이성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이 지성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기억지식이나 이성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사람이 아직 온전히 지각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유입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 때문에 그 질서가 인간의 의식에서는 뒤집혀 나타나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이 질서가 회복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십니다. 그리고 이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없으므로 그는 이 모든 것이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지각합니다. 여기서 AC.95의 설명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생명이 사람을 준비시키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신앙도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지성과 이성과 기억지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는 본래의 질서 안에 놓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을 뒤집혀 있던 질서가 회복된다고 표현합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의 상태를 거짓된 상태라거나 주님과 단절된 상태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인간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거듭남 가운데 있습니다. 다만 그에게는 여전히 싸움이 있고,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며 그것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성과 기억지식이 앞에 나타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조화를 이루면서 그 모든 능력의 생명과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내적으로 지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AC.98에서 말한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지성의 구체적인 의미입니다.

 

이렇게 회복된 질서, 곧 이러한 사람을 동쪽 에덴의 동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의미의 범위를 더욱 넓힙니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이 동산이 주님 자신을 뜻하고, 가장 내적인 의미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주님의 나라와 천국을 뜻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면 바로 그 천국 안에 놓이게 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단지 한 개인의 아름다운 내적 상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상태의 근원은 주님 자신에게 있고, 그와 같은 질서가 온전히 이루어진 곳이 주님의 나라와 천국이며, 천적 인간은 그 질서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사람은 세상에 사는 동안 동시에 천국에도 있을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죽은 뒤에야 처음 관계를 맺는 전혀 낯선 세계가 아닙니다. 천적 인간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육체를 떠나 실제로 천국에 가 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AC.99의 문맥에서 핵심은 생명의 질서입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생명을 받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에 놓일 때, 그는 지상에서 살면서도 내적으로 천국의 질서와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서는 생각과 생각의 관념뿐 아니라 말과 행동에 이르기까지 주님으로부터 열린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의 내적인 것만 천적이고 외적인 삶은 별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생각에서 말과 행동에 이르기까지 흘러나갑니다. 그리고 각각의 것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는 퍼셉션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결국 AC.99에서 퍼셉션은 인간이 자기 안에 독립적으로 가진 특별한 직관 능력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질서가 회복되고, 그 생명이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뿐 아니라 말과 행동에까지 흘러들 때 인간은 그 근원이 주님이심을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동쪽 에덴의 동산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그 생명이 자기 안의 모든 것을 살리고 있음을 지각하는 천적 인간의 질서를 나타냅니다. (AC.99)

 

 

 

AC.100, 창2:8, '에덴과 동산, 사랑과 이해의 이중 질서'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0 ‘동산’(garden)이 지성(intelligence)을 의미하고, ‘에덴’(Eden)이 사랑(love)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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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 창2:8, ‘에덴동산 -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 (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동산’(garden)은 지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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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2:8)

 

AC.98

동산(garden) 지성을, 에덴(Eden) 사랑을, 동쪽(east) 주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동쪽 에덴의 동산(garden of Eden eastward)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의미합니다. By a garden is signified intelligence; by Eden, love; by the east, the Lord; consequently by the garden of Eden eastward is signified the intelligence of the celestial man, which flows in from the Lord through love.

 

해설

AC.98은 창2: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라는 말씀을 본격적으로 해설하기 시작하면서, 먼저 동산’, ‘에덴’, ‘동쪽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힙니다. ‘동산은 지성을, ‘에덴은 사랑을, ‘동쪽은 주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의미를 서로 떨어진 상응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번호에서 말하려는 핵심은 마지막 문장에 있습니다. ‘동쪽 에덴의 동산전체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동산이 지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에덴동산을 단순히 아름답고 풍요로운 장소로만 읽지 않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성은 많은 지식을 축적하거나 뛰어난 사고 능력을 소유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동산은 천적 인간의 동산이므로, 그 지성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질서 있게 자라나는 지성입니다. 앞의 AC.91에서도 천적 인간에게 이성과 기억지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것으로 새롭게 질서 잡힌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지성은 인간의 지적 능력이 제거된 상태가 아니라 그 능력이 올바른 근원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상태입니다.

 

에덴이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 지성이 어떠한 생명에서 나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95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시키지만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98에서는 그 사랑이 천적 인간의 지성이 형성되는 통로로 나타납니다. 천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지적으로 파악한 뒤 그것을 근거로 사랑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지각하고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에덴이 사랑이고 그 안에 동산이 있다는 것은 천적 인간에게서 지성이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동쪽이 주님을 의미한다는 설명은 이 모든 것의 근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천적 인간의 사랑도 지성도 인간 자신의 proprium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AC.88에서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이라고 했고, AC.94-97에서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 자체가 주님께서 불어넣으시는 생명임을 계속 설명했습니다. 이제 AC.98은 에덴동산의 방향인 동쪽을 통하여 다시 한번 그 근원이 주님이심을 밝힙니다. 따라서 동쪽의 의미를 단순히 방위에 관한 상응으로 기억하기보다, 천적 인간에게 있는 모든 참된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마지막의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이라는 표현은 천적 인간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지성이 먼저 독립적으로 형성된 다음 사랑이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사랑을 통하여 지성 안으로 흘러듭니다. 이것은 AC.83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한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신앙이나 지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그 사랑을 통하여 지성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지성은 자기 지성을 신뢰하여 선과 진리를 찾아내는 지성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지각하는 지성입니다.

 

이 점은 앞의 AC.77에서 에덴동산을 천적 인간의 지성과 퍼셉션이라고 개요적으로 설명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당시에는 창2:8-9 전체의 의미를 먼저 요약했지만, 이제 상세 해설에서는 그 구조가 하나씩 풀리기 시작합니다. AC.96에서는 퍼셉션이 생명의 숨과 연결되었고, AC.98에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고 합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지성은 인간이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여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능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 그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지각하고 이해하는 것이 천적 인간의 지성입니다.

 

결국 AC.98의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를 아름답게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동산은 지성이지만 그 동산은 에덴, 곧 사랑 안에 있으며, 그 모든 것의 근원은 동쪽이 의미하는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지성은 사랑과 분리된 지성이 아니며, 인간 자신의 힘으로 획득한 독립적인 지성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랑을 통하여 지성 안으로 흘러드시고, 그 유입을 받아 지성이 살아 있을 때 인간 안에 참된 에덴동산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동쪽 에덴의 동산이 천적 인간의 지성을 의미한다고 하면서도, 스베덴보리가 굳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지성이라고 덧붙인 이유입니다. (AC.98)

 

 

 

AC.99, 창2:8, ‘뒤집힌 질서가 회복될 때,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옴을 지각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영적 인간에게서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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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7, 창2:7, '생명이 숨과 호흡으로 묘사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생명이 ‘호흡’(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태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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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2:7)

 

AC.94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form man, dust from the ground) 것은 그의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5절에서 땅을 사람이 없었다(no man to till the ground)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breathe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것은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셨다는 뜻이며,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man became a living soul) 것은 그의 사람도 살아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form man, dust from the ground is to form his external man, which before was not man; for it is said (verse 5) 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To breathe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is to give him the life of faith and love; and by man became a living soul is signified that his external man also was made alive.

 

해설

AC.94는 창2:7의 세 표현을 차례로 해석하면서 천적 인간의 형성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줍니다. 첫째는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둘째는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 셋째는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을 각각 겉 사람의 형성,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받음, 그리고 마침내 겉 사람까지 살아 있게 됨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히 육체를 만들고 거기에 생물학적 생명을 불어넣는 장면의 속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인간의 겉 사람에까지 이르는 천적 인간의 형성을 묘사합니다.

 

먼저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겉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지면은 앞의 AC.90과 직접 연결됩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있는 동안에는 그의 겉 사람이 이라 불리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지면또는 이라 불린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이 형성된다는 것은 이미 천적 인간의 문맥 안에서 겉 사람이 새롭게 형성되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앞 AC.89에서도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 하늘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으므로, 이것은 겉 사람이 자기 힘으로 새로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질서에 따라 겉 사람이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겉 사람이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상당히 강하게 말합니다. 그 근거가 창2:5땅을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전에 육체를 가진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속뜻에서 아직 겉 사람이 천적 질서 안에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참된 의미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 인간을 넘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 안에 있는 인간이라는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도록 형성되어 갈 때 비로소 그것도 사람이 됩니다.

 

다음으로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의 AC.76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AC.76에서도 천적 인간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고 했는데, AC.94는 이제 그 생명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생명의 은 단순히 호흡이나 육체적 생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입니다. 앞서 AC.83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면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된다고 했던 흐름도 여기와 연결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사람도 살아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가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되지만 그 생명이 속 사람에만 머물러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AC.91에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며,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마치 비와 안개처럼 겉 사람을 적신다고 했습니다. AC.92에서는 그것을 내적인 평화로부터 나오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94에서는 그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이르러 겉 사람 또한살아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내려와 전체 인간을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살아 있음도 자연적 생존과 구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살아 있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며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의미에서는 아직 참된 생명을 받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참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AC.94에서는 그것을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 생명이 겉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까지 흘러들 때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삶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생명을 받아 그 생명을 표현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AC.94AC.89 이후의 흐름을 매우 선명하게 완성합니다.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되고(AC.89), 겉 사람은 지면이 되어 속 사람의 질서 아래 놓이며(AC.90),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AC.91),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을 받아 선과 진리를 산출합니다(AC.92-93). 그리고 이제 생명의 ’, 곧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이르러 그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천적 인간의 겉 사람까지 형성하시고 살리시는 거듭남의 완성을 묘사합니다. (AC.94)

 

 

 

AC.95, 창2:7, ‘신앙의 생명은 준비시키고, 사랑의 생명은 사람 되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이 다루어집니다. 앞의 두 절에서는 그의 신앙 또는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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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창2:5-6, ‘평화의 언약과 복된 비 - 악과 거짓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천적 인간’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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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2:5, 6)

 

AC.93

이처럼 평화의 평온을 선물로 받고, 비로 새롭게 되며, 악하고 거짓된 것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천적 인간의 상태는 에스겔에서 주님에 의해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thus gifted with the tranquility of peacerefreshed by the rainand delivered from the slavery of what is evil and false,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in Ezekiel:

 

25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26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27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 31 초장의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34:25-27, 31) I will make with them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beast to cease out of the land, and they shall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and sleep in the woods; and I will make them and the places round about my hill a blessing; and I will cause the rain to come down in his season; rains of blessing shall they be. And the tree of the field shall yield its fruit, and the earth shall yield its increase, and they shall be upon their ground in confidence, and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when I have broken the reins of their yoke, and delivered them out of the hand of those that make them to serve them; and ye my flock, the flock of my pasture, ye are a man, and I am your God (Ezek. 34:2527, 31).

 

그리고 이것이 말씀에서 일곱째 (seventh) 같은 것을 의미하는 셋째 (third day) 이루어진다는 것은 호세아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됩니다. And that this is effected on the third day, which in the Word signifies the same as the seventh, is thus declared in Hosea: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6:2, 3) After two days will he vivify us; i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 and we shall live before him and we shall know, and shall follow on to know Jehovah: his going forth is prepared as the dawn, and he shall come unto us as the rain, as the late rain watering the earth (Hos. 6:23).

 

그리고 상태가 들의 성장(growth of the field) 비유된다는 것은 고대교회에 관하여 말하는 에스겔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됩니다. And that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growth of the field is declared by Ezekiel, when speaking of the ancient church: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16:7) I have caused thee to multiply as the growth of the field, and thou hast increased and hast grown up, and hast come to excellent ornaments (Ezek. 16:7).

 

또한 다음과 같은 것에도 비유됩니다. And it is also compared to: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60:21) A shoot of the Lords planting, and a work of the hands of Jehovah God (Isa. 60:21).

 

해설

AC.93AC.90-92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의 평화의 평온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AC.90에서는 비와 안개가 싸움이 그친 뒤의 평화의 평온이라고 했고, AC.91에서는 그 평온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 AC.92에서는 그것이 단순히 싸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내적인 평화로부터 나오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93에서는 그러한 상태가 에스겔과 호세아와 이사야에서 어떻게 묘사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여러 성경 인용은 서로 떨어진 증거 구절들의 나열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하나의 천적 상태를 서로 다른 이미지로 보여 주는 말씀들입니다.

 

가장 긴 겔34의 인용은 그 전체 흐름을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먼저 평화의 언약이 세워지고 악한 짐승이 땅에서 그치며, 사람이 광야와 수풀에서도 평안히 거합니다. 이어 복된 가 내리고 들의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냅니다. 마침내 멍에가 꺾이고 종으로 삼던 자들의 손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이것은 AC.93이 처음에 요약한 평화의 평온을 선물로 받고, 비로 새롭게 되며, 악하고 거짓된 것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천적 인간의 상태와 대응합니다. 여기서 평화는 단순한 감정적 안정이 아니라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의 질서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상태이며, 그 평화 가운데 비가 내리고 열매와 소산이 생깁니다.

 

이것은 앞의 AC.91-92와 특히 잘 연결됩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탐욕과 거짓으로 인한 싸움과 불안이 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그 싸움이 그치고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으로 평온과 생명이 흘러듭니다. 34악한 짐승이 그침멍에가 꺾임은 그러한 악과 거짓의 지배가 끝나는 상태와 연결되고, ‘복된 들의 나무가 열매를 맺음은 평화로부터 생명이 흘러들어 겉 사람 안에서 선하고 참된 것들이 산출되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AC.90’, AC.91들의 관목과 초목’, AC.92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겔34의 예언적 이미지 안에서 하나의 장면처럼 펼쳐집니다.

 

6:2-3의 인용은 여기에 셋째 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째 이 말씀에서 일곱째 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호세아에서는 이틀 후에 살리고 셋째 날에 일으켜 주님 앞에서 살게 하며, 이어 여호와께서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임하신다고 합니다. 2의 일곱째 날도 싸움이 끝난 뒤의 안식과 생명의 상태이고, 호세아의 셋째 날도 다시 살아 주님 앞에서 사는 상태이므로 두 숫자는 여기서 완전히 같은 숫자적 값을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 완성과 새로운 생명이라는 같은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특히 호세아에서도 새벽과 비가 함께 등장한다는 점은 앞의 AC.86에서 천적 인간을 아침이라고 한 것과 AC.90-92에서 비를 평화의 평온으로 설명한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이어 겔16들의 성장은 같은 상태를 성장의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고대교회에 관하여 말한다고 하면서, 평화 가운데 새 생명을 받은 상태가 들에서 자라나는 것에 비유된다고 봅니다. 이것은 앞에서 들의 관목들의 초목이 천적 인간의 겉 사람에서 산출되는 것들을 뜻한다고 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평화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지가 아니라 생명을 낳고 성장시키는 상태입니다. 싸움이 그친 뒤 속 사람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들면서 겉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이 새 질서 가운데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마지막 사60:21여호와께서 심으신 가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AC.88과 다시 연결됩니다. 거기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가 하나님의 이라 불리는 것은 주님 홀로 그를 위하여 싸우시고 그를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AC.93에서도 천적 인간의 평화와 성장과 결실의 마지막 근원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심으신 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입니다. 비를 내리시는 분도 주님이고, 생명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며, 자라게 하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따라서 AC.90-93의 식물과 비의 이미지는 결국 AC.88새로운 창조, 거듭남은 주님 홀로 하시는 이라는 원리 안에서 하나로 모입니다.

 

결국 AC.93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평화-해방--생명-성장-결실이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보여 줍니다. 악과 거짓의 종살이가 끝나고 평화의 언약 아래 들어오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비가 겉 사람을 적시고 그 안에서 선과 진리가 자라며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의 안식은 정적인 휴식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방해받지 않고 흘러들어 결실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주체는 끝까지 주님이십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심고 자라게 한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심으신 가지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입니다. (AC.93)

 

 

 

AC.94, 창2:7,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 -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다’ (AC.94-9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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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창2:5-6, '평화의 평온은 싸움의 부재가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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