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1 심화

1.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AC.91은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므로 싸움이 그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이것을 속 사람은 좋은 것이고 겉 사람은 나쁜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90-91에서 천적 인간에게도 겉 사람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오히려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 곧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그 겉 사람에서 산출됩니다. 문제는 겉 사람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일 때에는 이 질서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AC.91의 표현 그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앞에서 AC.81은 영적 인간이 싸움 가운데 있으면서도 언제나 승리한다고 했고, AC.84-87에서는 여섯 날의 싸움 뒤에 일곱째 날의 안식이 온다고 했습니다. AC.91은 이제 그 싸움이 인간 안에서는 어떤 관계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아직 저항과 싸움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가 달라집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이것이 어떤 모습인지 조금 더 알 수 있습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며, 그 결과 겉 사람에서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산출됩니다. 즉 겉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독립적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그것을 바깥의 삶 가운데 나타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순종’은 겉 사람을 억압하거나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섬김’ 역시 인간의 몸과 감각, 이성, 기억지식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이성과 기억지식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기능하게 됩니다. 겉 사람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천적 인간의 자유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AC.81에서는 천적 인간이 겉으로 어떤 결박에도 제어되지 않고 자유롭다고 했습니다. AC.85에서는 그가 자기 자신의 바람에 따라 행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하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바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억지로 굴복당하는 상태라기보다, 사람 안의 바람 자체가 새로운 질서 안에 들어가 더 이상 속 사람과 싸우지 않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결국 AC.91의 ‘순종하고 섬긴다’는 표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 안의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아직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것에 따라 활동합니다. 그때 싸움이 그치고 평온이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안식은 겉 사람이 사라져 얻는 안식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 안에 놓임으로써 얻는 안식입니다. (AC.91 심화 1)

 

 

 

AC.91, 창2:5-6,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길 때 싸움이 그친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2 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읽으면 두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도 결국 쇠퇴하고 황폐해져 종말을 맞았는데 어떻게 태고교회 전체를 두고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또 바로 이어 천적 천사들을 언급한다고 해서 태고교회 사람들 모두가 천적 천사가 되었다는 뜻일까요?

 

먼저 첫 번째 질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한 ‘교회’를 그 교회의 고유한 영적 성격에 따라 말하는 경우와, 그 교회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쇠퇴해 가는 과정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AC 전체에서 ‘천적 교회’로 설명됩니다. 그 교회의 고유한 질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중심에 있고, 신앙이 그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말은 태고교회의 역사에 속한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언제나 동일한 사랑의 상태에 있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태고교회 역시 쇠퇴했고, 마침내 그 본래의 천적 상태를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AC.32의 표현은 그 교회를 특징짓는 고유한 영적 질서, 곧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천적 교회의 성격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여기서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진리가 필요 없었다거나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사랑과 신앙이 오늘날 흔히 생각하듯 서로 독립된 두 요소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신앙에 속한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랑에서 분리된 별도의 신앙을 그들은 참된 신앙으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2의 전체 논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사랑은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더 작은 광명체’입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세대의 종말에는 사랑이 거의 없어졌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처럼 사랑과 신앙이 분리된 상태와 대조되는 예로 태고교회를 제시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가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로 이어서 ‘천적 천사들’을 언급할까요? 스베덴보리의 문장을 자세히 보면 ‘태고교회 사람들이 모두 천적 천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태고교회에 관한 진술에 이어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즉 두 집단의 모든 개인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나타나는 같은 천적 질서를 나란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태고교회가 ‘천적 교회’라고 불리는 것과 천국에 ‘천적 천사들’이 있다는 것은 서로 관련되지만, 그렇다고 태고교회의 모든 구성원의 사후 운명이 자동으로 천적 천국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교회의 영적 성격을 말하는 것과 그 교회에 속했던 모든 개인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특히 태고교회가 후대로 가면서 쇠퇴하고 황폐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구별은 더욱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천적 천사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오히려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어서 ‘온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며, 천국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없고, 모든 천국의 행복이 거기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은 그 사랑과 생명과 행복을 자기 자신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얻는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2의 관심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사후 분류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심은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입니다. 태고교회라는 지상의 천적 교회의 고유한 상태에서도, 천적 천사들의 천국적 상태에서도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사랑에 속하며,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말을 태고교회의 쇠퇴와 모순되는 절대적인 역사 진술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태고교회를 그 고유한 천적 성격에 따라 말하고 있으며, 그 성격을 오늘날 천적 천사들의 상태와 나란히 놓아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구별을 줍니다. 어떤 교회를 말할 때 그 교회가 나타내는 고유한 영적 성격과, 그 교회에 속한 모든 개인의 실제 상태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가 천적 교회였다고 해서 그 역사의 모든 사람이 천적 인간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며, 천적 천사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태고교회가 후에 쇠퇴했다는 이유로 그 교회의 본래 천적 성격까지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국 AC.32에서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이 나란히 등장하는 까닭은 둘을 동일한 집단으로 보기 때문이 아니라, 양쪽에서 같은 천적 질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질서는 바로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사랑에 속하며, 그 모든 사랑과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AC.32가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을 함께 언급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AC.32 심화 3)

 

 

 

AC.32, 창1:14-17,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다 : 마지막 시대에 드러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AC.32 심화 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 심화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가지를 한 문장 안에서 연결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한 이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8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볼 수 있도록 감각적인 것들을 통하여, 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나는 믿지 않겠다.’ 그리고 그는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모순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기 입장을 확증합니다. 이와 같이 그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에 관하여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합니다. 그가 이러한 수단으로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는 더욱 자기 눈을 멀게 하며, 마침내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어 영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조차 믿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그가 전제로 삼은 원리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이며, 누구든지 그것을 더 많이 먹을수록 더욱 죽은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주님을 믿어야 한다고, 곧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신 것들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질서 지웁니다. 그는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을 통하여 자신을 확증하며, 확증하지 않는 것들은 제쳐 둡니다.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says in his heart, If I am not instructed concerning the faith, and everything relating to it,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so that I may see, or by means of those of the memory [scientifica], so that I may understand, I will not believe; and he confirms himself in this by the consideration that natural things cannot be contrary to spiritual. Thus he is desirous of being instructed from things of sense in what is celestial and Divine, which is as impossible as it is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for the more he desires to grow wise by such means, the more he blinds himself, till at length he believes nothing, not even that there is anything spiritual, or that there is eternal life. This comes from the principle which he assumes. And this is to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of which the more anyone eats, the more dead he becomes. But he who would be wise from the Lord, and not from the world, says in his heart that the Lord must be believed, that is, the things which the Lord has spoken in the Word, because they are truths; and according to this principle he regulates his thoughts. He confirms himself by things of reason, of knowledge, of the senses, and of nature [per rationalia, scientifica, sensualia et naturalia], and those which are not confirmatory he casts aside.

 

해설

AC.128은 앞에서 설명한 두 가지 질서를 각각 한 사람의 마음속 말처럼 펼쳐 보여 줍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내가 감각으로 볼 수 있고 기억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신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믿고, 그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질서 지웁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차이는 한쪽은 생각하고 다른 쪽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출발점으로 삼아 생각하느냐가 다릅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출발점은 감각과 기억지식입니다. 그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조차 먼저 자연적인 차원에서 확인되어야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모순될 수 없다’는 생각 자체만 떼어 놓으면 그럴듯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연적인 것을 영적인 것의 심판자로 세운다는 데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고, 자기가 가진 기억지식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원리를 먼저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때 가장 바깥에 있어야 할 것이 가장 위에 올라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불가능하다고 표현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감각적인 것은 자연계에 나타나는 것을 받아들이고, 기억지식은 그렇게 받아들인 것들을 기억에 간직합니다. 그것들은 자기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천적이고 신적인 것의 근원을 발견하여 그 진위를 판정하려 한다면, 아래에 있는 것으로 위에 있는 것의 근원을 만들어 내려는 셈이 됩니다. AC.121에서 제시된 천적 질서는 정반대였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과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받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려는 질서의 전도를 의미합니다. 그런 까닭에 더 많이 먹을수록 더 많은 정보를 얻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죽은 상태’가 됩니다. 사람이 감각과 기억지식을 최종 기준으로 삼을수록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내적인 길이 닫히고, 마침내 영적인 실재와 영원한 생명 자체도 믿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128의 후반부는 이 대목을 반지성주의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 역시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사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통하여 자신을 확증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금지되는 것은 이성적 사고나 지식의 사용이 아니라 그것들을 신앙의 최초 원리로 삼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성과 기억지식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신 것들을 믿는다’는 것도 생각을 중단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그 오해를 막습니다. 그는 ‘이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질서 지웁니다.’ 즉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인 뒤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진리를 중심으로 자신의 사고 전체를 질서 있게 세웁니다. 그리고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 가운데 그 진리를 확증하는 것들을 사용합니다. 신앙과 사고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고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확증하지 않는 것들은 제쳐 둔다’는 표현은 문맥 안에서 신중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자신이 믿고 싶은 것과 맞지 않는 사실은 무조건 무시해도 된다는 일반적인 지적 태도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것은 천적이고 신적인 것을 무엇으로부터 배우며 무엇을 최초 원리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맥에서 핵심은 자연적인 지식이 신적인 진리 위에 서서 그것을 재판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현대적인 의미의 사실 회피나 무비판적인 확증 편향을 정당화하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AC.128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문제를 ‘지식 대 무지’의 대립이 아니라 ‘질서 대 질서의 전도’로 보여 줍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도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을 사용하고,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는 사람도 그것들을 사용합니다. 차이는 그것들이 주인의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섬기는 자리에 있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에까지 내려가는 것이 생명의 질서라면,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시작하여 그것으로 신적인 것을 판단하려는 것은 그 질서를 거꾸로 세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의 핵심입니다. (AC.128)

 

 

 

AC.129, 창2:17,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한다 - 이성과 학문은 신앙을 확증하는 쓰임 안에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받아들인 원리들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리들

bygrace.kr

 

AC.127, 창2:17,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구할 때 교회가 타락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창2:17)

 

AC.126

이 말씀을 방금 설명한 말씀과 함께 보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아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These words, taken together with those just explained, signify that 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 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 that is, 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for in this case the celestial of faith is destroyed.

 

해설

AC.126은 창2:16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허락과 이어지는 창2:17의 금지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AC.125에서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126은 그 반대편을 밝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아느냐’보다 ‘어디에서 아느냐’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앎의 근원을 주님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 바꾸는 데 있습니다. AC.123-124에서도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며,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26의 금지는 지식을 제한하는 금지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과 질서를 뒤집지 말라는 금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된다’고 표현합니다. 이 문장은 AC.80의 설명을 거의 그대로 다시 불러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는 이제 이것을 감각이나 기억지식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AC.118에서는 기억지식을 천적·영적 인간의 질서에서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했고, AC.120에서는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이 지성과 지혜의 경계를 이룬다고 했으며, AC.121에서는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 것이 천적 질서라고 했습니다. AC.125에서는 태고교회 사람들조차 기억에 간직된 것을 숙고했다고 명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탐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연계에서 보고 듣고 배우며 기억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 삶의 정상적인 부분입니다. 문제는 가장 바깥에 있는 감각과 기억지식을 신앙의 신비를 판정하는 최초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으로부터 안을 거쳐 밖으로 흘러야 할 천적 질서가 거꾸로 되어, 바깥의 것이 안의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할 경우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된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계속 보아 온 천적 질서의 핵심은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 이성과 앎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내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기억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를 먼저 세우고, 그것으로 신앙의 신비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한다면 신앙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질서 안에 있지 않게 됩니다. 파괴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이 아니라 신앙 안에 있어야 할 천적인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AC.126은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맹목적인 신앙을 권하는 말도 아닙니다. AC.121은 이성을 천적 질서 안에 분명히 포함시켰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성이 어디에서 빛을 받느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을 거쳐 생명을 받는 이성은 그 아래의 기억지식까지 살아 있게 하지만,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재판하려는 이성은 질서를 거꾸로 세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출발하는 탐구입니다.

 

따라서 AC.126은 창2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금지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문턱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알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어 자기 것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길은 주님으로부터 받아 알고, 받은 것을 자유롭게 누리고 사용하면서도 그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길입니다. 감각과 기억지식도 그 질서 안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만, 그것들이 주님을 대신하여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출발점이 될 때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됩니다. (AC.126)

 

 

 

AC.127, 창2:17,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구할 때 교회가 타락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bygrace.kr

 

AC.125, 창2:16,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다 -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알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창2:16) AC.125‘모든 나무의 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1

천적 질서의 본질, 곧 생명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 강들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동쪽’(East)이신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와 같이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질서이며, 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천적 인간을 표상했기 때문에 ‘지혜롭고’(wise), ‘지성 있고’(intelligent), ‘아는’(knowing) 사람들이라 불렸습니다. (신1:13, 15) 그러므로 궤를 만든 브살렐에 관하여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e nature of celestial order, or how the things of life proceed, is evident from these rivers, namely, from the Lord, who is the “East,” and that from him proceeds wisdom, through wisdom intelligence, through intelligence reason, and so by means of reason the knowledges of the memory are vivified. This is the order of life, and such are celestial men; and therefore, since the elders of Israel represented celestial men, they were called “wise, intelligent, and knowing” (Deut. 1:13, 15). Hence it is said of Bezaleel, who constructed the ark, that he was:

 

1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2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출36:1, 2) Filled with the spirit of God, in wisdom, in understanding, and in knowledge [scientia], and in all work. (Exod. 31:3; 35:31; 36:1–2)

 

13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 받는 자들을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수령을 삼으리라 한즉, 15내가 너희 지파의 수령으로 지혜가 있고 인정 받는 자들을 취하여 너희의 수령을 삼되 곧 각 지파를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을 삼고 (신1:13, 15)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출31:3)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출35:31)

 

해설

AC.121은 에덴에서 흘러나와 네 갈래로 나뉜 강들에 관한 설명을 하나의 질서로 종합합니다. 지금까지 각 강을 따라가면서 지혜와 지성, 이성과 기억지식이 차례로 등장했는데,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서로 흩어진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천적 질서’를 이룬다고 명시합니다. 그 질서의 출발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동쪽’이신 주님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나오며,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고, 마침내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이 순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AC.98과 AC.101에서 ‘동쪽’은 주님을 의미한다고 했고, AC.107에서는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AC.112에서는 지혜는 사랑에서, 지성은 신앙에서 나오며, 따라서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21은 그동안 제시된 내용을 하나의 생명의 흐름으로 묶습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앎은 각각 독립적으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가장 안쪽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질서 있게 생명을 받습니다.

 

여기서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온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앞의 AC.111은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 의지와 이해가 서로 구별되며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21의 질서는 이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만드는 설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하나의 생명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지혜와 지성과 이성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아래에 있는 것이 위에 있는 것과 단절되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천적 질서는 아닙니다.

 

특히 마지막 단계인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은 AC.80 이후의 논의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를 제거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AC.118에서는 기억지식이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했고, AC.120에서는 그것이 영적이고 천적인 인간의 지성과 지혜의 경계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21에서는 그 기억에 속한 앎들조차 이성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기억지식의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방향입니다. 기억지식이 스스로 출발점이 되어 위의 것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이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에 속한 앎들에까지 이르는 것이 올바른 질서입니다.

 

신1:13, 15의 이스라엘 장로들이 인용되는 것도 바로 이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지혜롭고’(wise), ‘지성 있고’(intelligent), ‘아는’(knowing) 사람들이라고 불린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히 행정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들이었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천적 인간을 표상했기 때문에, 그들을 묘사하는 세 표현도 천적 인간 안에 질서 있게 존재하는 지혜와 지성과 앎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앞에서 설명한 천적 질서가 말씀의 표현 속에도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브살렐에 관한 출31:3과 병행 구절들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성막과 그 기구들을 만드는 일을 맡은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출발점은 하나님의 영이며, 그로부터 지혜와 이해와 지식이 이어지고 마침내 실제 ‘일’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천적 질서가 단지 인간의 내면에서 끝나는 추상적인 단계가 아니라 가장 바깥의 실제 행위에까지 내려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은 안에서 시작하여 밖으로 진행되고, 마침내 자연적인 삶의 쓰임 가운데 나타납니다.

 

따라서 AC.121은 에덴의 네 강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읽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네 강은 서로 무관한 네 가지 상징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이 인간 안에서 어떻게 질서 있게 진행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장 바깥의 이성과 기억에 속한 앎들도 버려져야 할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천적 인간이란 지식이 없는 사람도,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라, 자신의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앎 전체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도록 질서 지어진 사람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강들을 통하여 보여 주는 ‘생명의 질서’입니다. (AC.121)

 

 

 

AC.122, 창2:15,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다 - 주님의 것을 누리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창2:15) AC.122‘에덴동산’(garden of E

bygrace.kr

 

AC.120, 창2:14, ‘유브라데 -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은 지성과 지혜의 경계다’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0‘애굽’(Egypt)과 마찬가지로 ‘유브라데’(Euphrates)도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또한 이러한 기억지식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