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81 심화

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처음에는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설령 그의 삶에 사랑이 부족하더라도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는 더 잘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적인 차원에서는 많은 진리를 알고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AC.379-381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앎’은 단순히 교리 내용을 기억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AC.37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하게 하는 ‘결속’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진리가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교리를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랑과 선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그 진리는 사람 안에서 생명을 얻지 못하고 기억과 이해성 안에 머물게 됩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가 자기 삶에서 ‘참인 것을 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베덴보리에게서 진리의 목적은 선입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게 하고, 그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배우면서 실제로 선을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할 때, 그 진리는 점차 그의 의지와 삶에 결합됩니다. 그때 그는 단순히 ‘이것이 옳다고 배웠다’고 말하는 데서 더 나아가 왜 그것이 옳은지를 삶을 통해 알게 됩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배우면서도 그것을 자기 삶의 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리와 그의 실제 애정 사이에 틈이 생깁니다.

 

이것이 AC.380의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가인은 계속 ‘땅’을 갈 수 있습니다. 곧 신앙에 관한 지식을 계속 연구하고 배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가 소멸한 상태에서는 그 땅이 더 이상 결실하지 않습니다. 지식은 늘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선한 삶이라는 열매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결과를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진리를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하나의 살아 있는 중심에서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 점은 ‘체어리티가 있으면 교리를 몰라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살아 있게 합니다. 눈이 있어야 길을 볼 수 있지만 실제로 걸어야 목적지에 이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보는 것과 걷는 것을 서로 경쟁시키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진 것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마침내 그것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게 한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는 말은 교리적 정확성을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묻는 말입니다. 진리를 연구할수록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고,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고 그것을 버리며, 실제 쓰임의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 진리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진리를 연구할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만 많아지고 자기의 지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지식은 증가해도 그 지식이 자라야 할 ‘땅’은 점차 효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에 대한 영적인 분별은 지식의 양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을 행하려는 삶 안에서 진리는 서로 연결되고 질서를 얻습니다. 체어리티는 진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살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 있을 때 사람은 진리를 단지 기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체어리티를 잃은 가인이 마침내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이유이며, 동시에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AC.381 심화 1)

 

 

 

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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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means as before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해설

AC.388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 ‘앞에서와 같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짧게 확인합니다. 여기서 ‘앞에서와 같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이미 AC.380에서 처음 제시되었고, AC.382에서는 예레미야애가,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의 여러 구절을 통해 자세히 확증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같은 설명을 반복하지 않고 그 의미를 창4:14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바로 앞의 AC.386-387과 함께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AC.386에서는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이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라고 했고, AC.387에서는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88에서는 그 결과를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진리에서 분리되고 선에서 분리되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할 방향 자체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지식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신앙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교리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체어리티를 잃으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 무엇이 참된 진리이고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인 ‘유리함’입니다.

 

따라서 ‘피하며 유리한다’는 것은 단순한 방황이 아니라 영적 중심과 방향을 잃은 상태입니다. AC.382에서 물을 찾아 이 성읍에서 저 성읍으로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이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계속 진리를 찾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진리가 지향해야 할 선을 잃었기 때문에 어디에서 참된 만족을 얻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AC.388이 이 설명을 길게 반복하지 않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충분히 확증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결과를 전체 흐름 속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됨’, ‘사랑의 신앙의 선에서 분리됨’,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함’은 서로 별개의 세 가지 형벌이 아닙니다. 하나의 영적 붕괴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는 연속된 상태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결과 신앙이 더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진리 모두를 잃고 방향 없이 유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의 핵심은 짧지만 분명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의 결합 안에서만 선과 진리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형태를 얻습니다. 이 둘의 결합이 깨어지면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영적으로는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유리함은 바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결국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AC.389,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체어리티를 잃으면 왜 악과 거짓에 맡겨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그를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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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7, 창4:14,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신앙의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주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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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2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유리하는 것’(wandering)과 ‘피하여 달아나는 것’(fleeing away)의 의미로부터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That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signifies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andering” and “fleeing away” in the Word. As in Jeremiah:

 

13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14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수 없도다 (애4:13, 14) The prophets and priests wander blind in the streets, they have been polluted in blood; the things they cannot do they touch with garments, (Lam. 4:13–14)

 

여기서 ‘선지자들’(prophets)은 가르치는 자들을, ‘제사장들’(priests)은 그에 따라 사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하는 것’(wander blind in the streets)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where “prophets” are those who teach, and “priests,” those who live accordingly; to “wander blind in the streets” 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2] 아모스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Amos:

 

7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8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하게 마시지 못하였으나 (암4:7, 8) A part of the field was rained upon, and the part of the field whereupon it rained not withered; so two or three cities shall wander unto one city to drink waters, and shall not be satisfied, (Amos 4:7–8)

 

여기서 ‘비가 내린 밭의 부분’(part of the field on which it rained)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하고, ‘비가 내리지 않은 밭의 부분’(part or piece of the field on which it did not rain)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합니다. ‘물을 마시려고 유리하는 것’(wander to drink the waters) 역시 진리를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by the “part of the field on which it rained” is signified the doctrine of faith from charity; and by the “part” or “piece” “of the field on which it did not rain,” the doctrine of faith without charity. To “wander to drink the waters” likewise denotes to seek after truth.

 

[3] 호세아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Hosea:

 

16에브라임은 매를 맞아 그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17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 (호9:16, 17) Ephraim is smitten, their root is dried up, they shall bear no fruit; my God will cast them away, because they did not hearken unto him; and they shall be wanderers among the nations. (Hos. 9:16, 17)

 

여기서 ‘에브라임’(Ephraim)은 진리에 대한 이해, 곧 신앙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가 요셉의 장자였기 때문입니다. ‘말라 버린 뿌리’(root which was dried up)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떠도는 자들’(wanderers among the nations)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Ephraim” here denotes the understanding of truth, or faith, because he was the firstborn of Joseph; the “root which was dried up” denotes charity that cannot bear fruit; “wanderers among the nations” are those who do not know what is true and good.

 

[4]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Jeremiah:

 

28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공격을 받은 게달과 하솔 나라들에 대한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일어나 게달로 올라가서 동방 자손들을 황폐하게 하라, 30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솔 주민아 도망하라 멀리 가서 깊은 곳에 살라 이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너를 칠 모략과 너를 칠 계책을 세웠음이라 (렘49:28, 30) Go ye up against Arabia, and devastate the sons of the east. Flee, wander ye exceedingly; the inhabitants of Hazor have 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 for a habitation. (Jer. 49:28, 30)

 

‘아라비아’(Arabia)와 ‘동방의 아들들’(sons of the east)은 천적인 부요함, 곧 사랑에 속한 것들을 소유함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이 황폐해질 때 그들은 ‘피하고’(flee) ‘유리한다’(wander)고, 곧 선한 것을 전혀 행하지 않을 때 ‘피하며 유리하는 자들’(fugitives and wanderers)이 된다고 말합니다. ‘하솔 주민들’(inhabitants of Hazor), 곧 영적인 부요함인 신앙에 속한 것들을 소유한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고 하는데, 이는 그들이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Arabia” and the “sons of the east,” signify the possession of celestial riches, or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which, when vastated, are said to “flee,” and “wander,” that is, to be “fugitives and wanderers,” when they do nought of what is good. Of the “inhabitants of Hazor,” or those who possess spiritual riches, which are those of faith, it is said that they “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 that is, they perish.

 

[5]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사22:3) All thy foremost ones wander together, they are bound before the bow, they have fled from far, (Isa. 22:3)

 

이는 ‘환상의 골짜기’(valley of vision), 곧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로부터 뒤의 한 절에서 그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고백하는 자를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곧 선과 진리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라고 말한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speaking of the “valley of vision,” or the fantasy that faith is possible without charity. Hence appears the reason why it is said, in a subsequent verse (Isa. 22:14), that he who professes faith that is apart from charity is a “fugitive and a wanderer,” that is, knows nothing of good and truth.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22:14)

 

해설

AC.382는 AC.380에서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리한다’는 것을 단순히 장소를 옮겨 다니는 것으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레미야애가,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를 차례로 인용하면서 말씀에서 ‘유리함’과 ‘피하여 달아남’이 영적으로 방향을 잃은 상태, 특히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인용은 가인의 문제, 곧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결과와 연결됩니다.

 

첫 번째 인용인 애4:13-14에서는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을 가르치는 자들로, ‘제사장들’을 그 가르침에 따라 사는 자들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가르침과 삶을 대표하는 두 부류가 모두 맹인처럼 거리를 방황한다는 것은 단순히 길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거리’는 사람들이 오가는 길인데, 영적으로 방향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그 거리에서 방황한다는 이미지는 진리와 선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이것이 가인이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두 번째 암4:7-8은 이번 번호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한 밭에는 비가 내리고 다른 밭에는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비가 내린 밭을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신앙의 교리’로, 비가 내리지 않은 밭을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교리’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신앙이 아주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후자는 비를 받지 못한 밭처럼 말라 버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물을 마시려고 이 성읍 저 성읍으로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합니다. 물은 여기서 그들이 찾고 있는 진리와 연결됩니다. 즉 체어리티를 잃은 신앙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계속 진리를 찾아 헤매며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은 AC.379-381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 줍니다. AC.379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라고 했고, AC.380에서는 그런 신앙이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고 했으며, AC.381에서는 그 땅이 결실하지 못하는 이유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암4장의 ‘물을 마시려고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상태를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은 신앙은 지식을 계속 더할 수는 있어도 그 지식이 생명으로 이어지지 않으므로 참된 영적 만족에 이르지 못합니다.

 

세 번째 호9:16-17에서는 ‘에브라임’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브라임을 ‘진리에 대한 이해, 곧 신앙’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이것은 앞의 ‘땅이 그 효력을 내지 않는다’는 설명과 거의 같은 구조입니다. 뿌리가 마르면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서 체어리티라는 생명이 사라지면 신앙도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떠도는 자’가 됩니다. 다시 말해 신앙은 남아 있다고 주장하지만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렘49장의 ‘아라비아’와 ‘동방의 아들들’은 조금 더 깊은 층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을 ‘천적인 부요함’, 곧 사랑에 속한 것들을 소유한 상태와 연결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황폐해지면 ‘피하고 유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선한 것을 전혀 행하지 않는 것’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상태가 단순한 지적 혼란이 아니라 삶의 선이 사라진 상태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선을 행하는 삶과 분리된 신앙은 결국 무엇이 선인지도 제대로 알 수 없게 됩니다. ‘하솔 주민들’이 가진 영적인 부요함, 곧 신앙에 속한 것들 역시 결국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즉 멸망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영적 지식은 스스로 생명을 보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사22장의 ‘환상의 골짜기’는 이 모든 설명을 가인의 핵심 문제에 직접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가능하다는 환상’이라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fantasy’라는 말이 매우 강합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떼어 놓고도 그것이 여전히 살아 있는 신앙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영적인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교리가 걸어온 길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는 데서 시작하여 둘을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 위에 놓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신앙이 더 순수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피하며 유리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역설이 드러납니다. 가인은 신앙을 지키려다가 신앙의 방향을 잃었습니다. 체어리티를 제거하면 진리만 더욱 순수하게 남을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분별할 능력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선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은 선이며, 신앙에 생명을 주는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목적을 잃은 진리는 지식으로는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살아 있는 진리로 기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물을 찾아 이리저리 다니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길을 걷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가 있으면 교리적 진리를 몰라도 된다’는 반대 극단으로 가서도 안 됩니다. AC.382의 결론은 진리를 버리고 선만 붙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 분별하려면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진리는 체어리티를 필요로 합니다. 진리가 무엇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체어리티가 그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이 둘을 구별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한 데 있었습니다.

 

이번 번호의 여러 성경 인용을 하나씩 별개의 교리로 떼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다섯 인용을 가져온 목적은 하나입니다. 말씀에서 ‘방황하고’, ‘유리하고’, ‘피하여 달아나는’ 이미지들이 영적인 방향 상실과 연결되며, 그 방향 상실은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애가에서는 맹인처럼 방황하고, 아모스에서는 물을 찾아 유리하며, 호세아에서는 열매 없는 에브라임이 여러 나라 가운데 떠돌고, 예레미야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부요함을 잃은 자들이 피하고 유리하며, 이사야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라는 ‘환상’ 속에서 사람들이 도망합니다. 서로 다른 장면이지만 모두 하나의 영적 상태를 비춥니다.

 

따라서 창4:12의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은 단순히 가인에게 내려진 외적인 유랑 형벌이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이 결국 자기 안에서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게 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교리가 맞이한 가장 깊은 비극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앙만을 높이려 했는데 결국 신앙 자체가 무엇이 참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버릴 때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으며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올바른 방향을 얻게 됩니다.

 

 

 

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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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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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

‘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방금 설명한 ‘땅’(ground)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그리고 ‘땅이 그 효력을 내지 아니하는 것’(not yielding its strength)이 그 결실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땅에 관하여 앞에서 말한 것과 그 말 자체에서도 분명하며, 또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아무런 신앙도 고백하지 않는 것이라는, 앞에서 말한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That to “till the ground” means to cultivate this schism or heresy appears from the signification of “ground,” of which we have just now spoken; and that its “not yielding its strength” denotes its barrenness, is evident both from what was said concerning ground, and from the words themselves, as well as from this consideration, that those who profess faith without charity, profess no faith, as was said above.

 

해설

AC.381은 바로 앞 AC.380의 설명 가운데 처음 두 부분을 확증합니다. ‘땅을 가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이며, 그 땅이 ‘그 효력을 내지 아니한다’는 것은 그 분열이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새로운 상응을 길게 전개하지 않습니다. 대신 앞에서 이미 밝혀진 ‘땅’의 의미와 창4:12의 표현 자체, 그리고 AC.379에서 제시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는 원리를 함께 가져와 AC.380의 해석이 왜 성립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땅을 가는 것’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이라는 해석은 ‘땅’의 의미에서 나옵니다. AC.377에서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이라고 했고,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심어지느냐에 따라 그의 영적 성질이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문맥에서 그 땅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교리적 분열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 땅을 계속 간다는 것은 그 분열을 계속 연구하고 확증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짓된 원리를 한 번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계속 생각하고 논증하고 가르치면서 더욱 견고한 체계로 만들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배양’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경작하더라도 그 땅은 ‘그 효력’을 내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결실 없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은 ‘땅이 그 효력을 내지 않는다’는 표현 자체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땅의 힘은 씨를 받아 싹을 틔우고 열매를 내는 데 나타나는데, 이제 그 힘이 가인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속뜻에서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교리를 아무리 발전시켜도 거기에서는 참된 영적 생명의 열매가 나올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결실 없음’의 이유를 다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서 찾는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아무런 신앙도 고백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AC.379의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다’라는 설명을 압축하여 되풀이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땅이 결실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서 임의로 그 땅의 생산력을 빼앗아 벌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신앙의 생명 자체를 이루는 체어리티를 신앙에서 떼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제거한 뒤에는 아무리 그 신앙을 경작해도 살아 있는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을 고백한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입으로 ‘나는 신앙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문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profess’에는 어떤 교리를 자기의 신앙 원리로 인정하고 주장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체어리티를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에서 떼어 내면서도 그것을 참된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것을 부정합니다. 체어리티가 빠진 신앙은 신앙의 한 종류가 아니라, 앞에서 말했듯이 신앙에 관한 지식만 남은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행위가 있어야 신앙의 부족분을 채워 완전해진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신앙에 외적으로 덧붙이는 공로적 행위가 아닙니다. AC.379에서 체어리티를 ‘사랑과 자비’라고 했고, 그것이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킨다고 했습니다. 또한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생각 안에 있을 때 그 생각 안에 ‘신앙의 본질인 체어리티’가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의 열매는 머리로 알고 있는 진리에 외적인 선행 몇 가지를 더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선을 의도하는 의지와 결합되어 실제 삶으로 나타날 때 생깁니다.

 

이렇게 보면 ‘땅을 열심히 가는데도 열매가 없다’는 이미지는 상당히 강력합니다. 사람은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자기 신앙의 논리를 세우고, 성경 구절을 모으고, 교리 체계를 정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매우 열심히 땅을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작업의 중심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가 제거되어 있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경작 자체가 생명의 열매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분리를 더 깊이 ‘배양’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많이 경작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땅을 경작하고 있으며 무엇을 열매 맺으려 하느냐입니다.

 

이 점은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에게도 특별히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올바른 교리를 찾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말씀의 진리와 참된 교리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리의 목적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지식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가르치고 선으로 인도하며, 마침내 선과 결합되어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진리를 연구할수록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보다 정죄하게 되고, 자기의 지적 우월성을 확인하며, 선한 쓰임보다 교리적 승리를 더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가 갈고 있는 ‘땅’이 어떤 땅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AC.381은 그래서 AC.379-380을 매우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AC.379에서는 체어리티가 소멸되면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지며,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단지 지식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AC.380에서는 그런 분열을 계속 배양해도 그 땅은 결실하지 못하고,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여 피하며 유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81은 그 결실 없음의 이유를 다시 한 번 명시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외적인 형벌이 아니라 신앙에서 그 생명을 제거한 데 있습니다.

 

결국 AC.381의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날카롭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땅은 아무리 갈아도 참된 영적 결실을 내지 못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에 있으며,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가 인간의 의지와 삶 안에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은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진리가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삶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가인의 비극은 신앙을 지키려다가 체어리티를 제거한 데 있었고, 그 결과 남은 것은 더 순수한 신앙이 아니라 열매 맺지 못하는 땅이었습니다.  

 

심화

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가?

 

AC.381 심화 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가?’

AC.381 심화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처음에는 다소 이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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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2,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란 누구인가?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된 신앙’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2‘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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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0,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신앙’ (AC.38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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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창4:12)

 

AC.380

‘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은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이 다시는 네게 그 효력을 내지 아니할 것이요’(it shall not yield unto thee its strength)는 그것이 결실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till the ground” signifies to cultivate this schism or heresy; “it shall not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signifies that it is barren.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is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해설

AC.380은 창4:12의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의 속뜻을 세 부분으로 압축하여 제시합니다. 바로 앞 AC.377-379에서 ‘땅’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고, 그 분열로 말미암아 사람이 선에서 돌아서며, 체어리티가 소멸될 때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80에서는 그러한 분열을 계속 붙들고 발전시킬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보여 줍니다. 아무리 그 땅을 갈아도 결실이 없으며, 마침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한 채 피하며 유리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먼저 ‘땅을 간다’는 것은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땅을 간다는 것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얻기 위해 토지를 경작하는 긍정적인 이미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의 의미는 언제나 문맥 안에서 결정됩니다. 여기서 ‘땅’은 이미 AC.377에서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땅을 간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배양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그 분열된 교리를 더욱 발전시키고 확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원리도 사람이 계속 생각하고 논증하고 뒷받침하면 점점 더 정교한 하나의 체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계가 정교해졌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참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가인의 진행 과정과도 잘 맞습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가 되었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AC.378에서는 그 분열이 ‘입을 벌려’, 곧 하나의 이단적 교리로 가르쳐졌다고 했습니다. 이제 ‘땅을 간다’는 것은 그렇게 형성된 교리를 계속 배양하는 단계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의 중요한 경고가 있습니다. 거짓은 반드시 조잡한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출발점을 붙들고 오랫동안 연구하고 논증하면 매우 정교하고 일관성 있어 보이는 교리 체계도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살아 있는 결합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많이 경작해도 그 땅은 참된 영적 열매를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곧이어 ‘땅이 다시는 네게 그 효력을 내지 아니할 것이요’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간단히 ‘그것이 결실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strength’는 땅이 가지고 있는 생산력, 곧 열매를 내는 힘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교리를 아무리 발전시키고 확증해도 거기에서는 살아 있는 신앙의 열매가 나오지 않습니다. 앞의 AC.379에서 그 이유가 이미 설명되었습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며, 우리를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체어리티, 곧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신앙에 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경작해도 그 지식 자체에서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나오는 생명이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결실이 없다’는 것을 외적인 활동이나 종교적 성과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37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 없는 사람도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경건한 열심처럼 보이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외적으로는 설교도 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많은 종교 활동을 하며, 상당한 성과를 이루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그러한 외적 성과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되어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는 영적 결실입니다. 바로 그 결실을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스스로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AC.380에서 가장 중요한 결론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더 순수하게 보존하려고 체어리티와 구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완전히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배척하면 역설적으로 신앙 자체도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잃게 됩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선과 결합할 때 살아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라는 목적을 잃어버린 신앙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지식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 무엇이 실제로 선이며 무엇이 실제로 진리인지에 관하여 방향을 잃고 ‘피하며 유리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 점은 앞의 AC.379와 매우 깊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지옥의 무리들조차 신앙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진리에 관한 문장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이 참된 교리다’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악한 목적에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진리를 생명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선과 결합되지 않은 진리는 사람 안에서 방향을 잃습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를 제거하고 나면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한다’는 상태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부족이라기보다 영적 분별의 상실에 가깝습니다.

 

‘피하는 자’와 ‘유리하는 자’라는 두 표현 역시 지금 번호에서는 하나하나 별도의 상응으로 세분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전체 의미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AC.380은 둘을 합쳐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피하는 자는 이것, 유리하는 자는 저것’이라고 미리 나누어 의미를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뒤의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두 표현을 더 구체적으로 구별한다면 그때 따라가면 됩니다. 현재로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방향을 잃고 안정된 영적 토대를 갖지 못하는 상태 전체를 나타낸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매우 실제적인 경고가 됩니다. 신학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과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영적으로 분별하는 것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신앙의 정확성을 매우 강조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들을 자기 사랑이나 정죄나 지배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진리를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그 진리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땅을 열심히 갈고 있지만 그 땅이 ‘그 효력’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방향을 얻습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 보여 주고, 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듭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보호하며,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이 둘이 주님 안에서 결합될 때 사람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점점 더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 자신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함께 받아들일 때 생기는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유리함’과 반대되는 상태는 단순히 교리적 확신이 강한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삶의 방향이 분명해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380은 가인의 분열이 어디에 도달하는지를 세 단계로 보여 줍니다. 먼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을 계속 ‘경작’합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는 영적인 열매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여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를 버리고 신앙만을 지키려 했던 교리가 결국 신앙 자체의 방향까지 잃어버리는 역설입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제거함으로써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향하여 올바른 방향을 갖게 됩니다.

 

 

 

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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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9, 창4:1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 의지가 실제 사람입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1) AC.379이러한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저주를 받는 것’(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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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1)

 

AC.379

이러한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저주를 받는 것’(cursed)이 선에서 돌아서는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밝혔습니다(AC.245). 불의와 가증한 것들, 곧 미움이 사람을 돌아서게 하여 오직 아래쪽만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즉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만 바라보게 하며, 그리하여 지옥에 속한 것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추방되고 소멸될 때 일어납니다. 그때에는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곧 사랑과 자비이며,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결코 우리를 주님과 결합시키지 못합니다. 그러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에 불과하며, 지옥의 무리들조차도 그러한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선한 사람들을 교활하게 속이며 자신을 빛의 천사들인 것처럼 가장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장 악한 설교자들이 때때로 경건과 같은 열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곤 하지만,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보다 그들의 마음에서 더 먼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억 속에만 있는 신앙이나 거기에서 나온 생각만으로 어떤 유익이 있을 수 있다고 믿을 만큼 판단력이 약한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누구나 자신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의 말이나 동의가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그것이 의지나 의도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기쁘게 하고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은 바로 의지입니다. 의지가 실제 사람이며, 사람이 의지하지 않는 생각이나 말은 실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의지로부터 자신의 성질과 성향을 얻습니다. 의지가 그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선한 것을 생각한다면, 그 생각 안에는 신앙의 본질인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그 생각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선한 것을 생각한다고 말하면서도 악하게 산다면, 그는 악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거기에는 신앙이 없습니다. That these things are signified is evident from what has gone before; and that to be “cursed” is to be averse to good, has been already shown (n. 245). For iniquities and abominations, or hatreds, are what avert man, so that he looks downward only, that is,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thus to those which are of hell. This takes place when charity is banished and extinguished, for then the bond which connects the Lord with man is severed, since only charity, or love and mercy, are what conjoin us with him, and never faith without charity, for this is no faith, being mere knowledge, such as the infernal crew themselves may possess, and by which they can craftily deceive the good, and feign themselves angels of light; and as the most wicked preachers are sometimes wont to do, with a zeal like that of piety, although nothing is further from their hearts than that which proceeds from their lips. Can anyone be of judgment so weak as to believe that faith alone in the memory, or the thought thence derived, can be of any avail, when everybody knows from his own experience that no one esteems the words or assenting of another, no matter of what nature, when they do not come from the will or intention? It is this that makes them pleasing, and that conjoins one man with another. The will is the real man, and not the thought or speech which he does not will. A man acquires his nature and disposition from the will, because this affects him. But if anyone thinks what is good, the essence of faith, which is charity, is in the thought, because the will to do what is good is in it. But if he says that he thinks what is good, and yet lives wickedly, he cannot possibly will anything but what is evil, and there is therefore no faith.

 

해설

AC.379는 앞의 AC.378에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가 그 분열로 말미암아 가인이 돌아서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AC.245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선에서 돌아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저주’를 주님께서 가인에게 악을 내려 보내시는 행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돌아서게 하는 것은 ‘불의와 가증한 것들, 곧 미움’입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선에서 돌아서고, 마침내 아래쪽, 곧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만 바라보게 되며 지옥에 속한 것들을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 때문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등지는 상태가 바로 여기서 말하는 저주의 내적 상태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언제 일어나는지를 곧바로 밝힙니다. ‘체어리티가 추방되고 소멸될 때’입니다. 이 한 문장이 가인 이야기 전체를 다시 묶어 줍니다.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어떤 교리 하나를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 소멸시켰습니다. 그 결과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집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 우리를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곧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오직’이라는 표현은 신앙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어야 하며,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더 이상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mere knowledge’, 곧 단지 지식일 뿐입니다. 사람이 주님에 관한 많은 교리를 알고, 말씀을 정확하게 인용하며, 신학적 논리를 능숙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심지어 지옥의 무리들조차 그러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사랑하고 의지하여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기억과 이해에 있을 수 있지만, 그 지식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사람의 생명을 변화시키는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선한 사람들을 교활하게 속이고 자신을 빛의 천사들인 것처럼 가장할 수 있다’는 대목도 바로 이 차이를 강조합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 자체는 악한 의지에 의해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돕기 위해 진리를 말할 수도 있지만, 사람을 지배하거나 속이거나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해 같은 진리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들리는 말만 보면 둘을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장 악한 설교자들’도 때때로 경건해 보이는 열심을 가지고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입술에서 나오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특정 설교자들을 의심하고 판단하라는 권고가 아니라, 외적인 종교 언어와 내적인 의지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경고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AC.379의 논증은 ‘기억 속에만 있는 신앙’으로 옮겨갑니다. 사람이 교리를 기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 구원에 어떤 효력이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느냐고 스베덴보리는 반문합니다. 그리고 아주 일상적인 인간관계를 예로 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이 그의 진정한 의지나 의도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말을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상대를 이용하려 한다면 그 말은 두 사람을 결합시키지 못합니다. 반대로 말이 서툴더라도 실제로 상대의 선을 원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것이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일상적인 원리를 사람과 주님의 관계에도 적용합니다.

 

그래서 이번 번호에서 가장 강한 문장 가운데 하나가 나옵니다. ‘의지가 실제 사람입니다.’ 이것은 생각과 이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의지와 이해는 인간 마음의 두 중요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원하는지가 그의 생명의 중심을 드러냅니다. 사람이 의지하지 않는 것을 입으로 말하고 머리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사회적 체면 때문에 선한 말을 할 수도 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앙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의지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그 말과 생각은 아직 그 사람의 실제 생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의지로부터 자신의 성질과 성향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 대목을 ‘사람에게 순간적으로 어떤 악한 의지가 느껴지면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영원한 본질이다’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거듭남 중인 인간 안에는 서로 충돌하는 여러 애정과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악한 충동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거부하며 선을 의도하고 행하려 한다면, 그 싸움 자체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의지가 실제 사람’이라는 말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모든 충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자기 것으로 삼는 지배적인 의지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듭남의 싸움 자체를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더욱 세심하게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사람이 선한 것을 생각한다면, 그 생각 안에는 신앙의 본질인 체어리티가 있다’고 합니다. 얼핏 읽으면 앞에서 ‘생각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해놓고 이제는 선한 생각 안에 체어리티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유를 덧붙입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그 생각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선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선에 관한 명제를 떠올리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생각 안에 실제로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들어 있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은 의지와 분리된 지식이 아니라 의지에서 생명을 받은 생각이며, 따라서 그 안에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이것은 AC.363에서 우리가 주목했던 ‘willing what is good’, 곧 ‘선을 의도하는 것’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신앙의 생명은 단순히 무엇이 참인지 아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를 따라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을 만들어 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유롭게 의도하며 행합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신앙의 생각 안에 있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나는 선한 것을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실제 삶은 악하다면 문제가 전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사람은 실제로 악한 것 외에는 의지할 수 없으며, 따라서 거기에는 신앙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여기서도 한두 번의 실패나 거듭남 가운데 넘어지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선을 진심으로 의도하면서도 연약함 때문에 실패할 수 있고, 다시 회개하여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번 문맥에서 문제 되는 것은 입과 생각으로는 선과 진리를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악을 사랑하고 악한 삶을 지속적으로 선택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경우 입술의 신앙은 그의 생명이 아니며,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 ‘신앙이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79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단순히 ‘신앙보다 선행이 중요하다’는 도덕적 교훈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인간이 자기 공로를 쌓기 위해 행하는 외적인 선행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가 인간의 의지 안에 받아들여지고, 진리와 결합하여 실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바로 그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는 ‘믿을 것인가, 행할 것인가?’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진리가 의지와 삶 안에서 사랑과 결합되어 살아 있는 신앙이 되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결국 AC.379에서 가인의 ‘저주’가 왜 그렇게 심각한지가 드러납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는 것은 단지 기독교적 덕목 하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주님을 결합시키는 결속을 끊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기억 속의 지식으로 남을 수 있고, 심지어 매우 정교한 신학과 경건한 말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을 의도하는 의지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의지가 실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입술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고백되는가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의도하며 살아가게 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AC.380,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신앙’ (AC.38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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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8, 창4:11,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 분열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선 가인’ (AC.378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AC.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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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하고,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하며,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an offering to Jehovah)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By the “end of days” is meant in process of time; by the “fruit of the ground,”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nd by “an offering to Jehovah,” worship thence derived.

 

해설

AC.346부터 창4:3의 속뜻으로 들어갑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라는 짧은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날들의 끝에’는 시간이 흐른 뒤를,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AC.346의 가장 중요한 점은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고 ‘예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서 반드시 아무런 종교적 행위도 하지 않거나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으로는 신앙에 속한 많은 행위와 예배가 그대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디에서 나오며 무엇이 그 안에 생명을 주고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먼저 ‘날들의 끝에’는 이 번호에서는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합니다. 앞의 AC.338-345에서 가인이 의미하는 신앙의 성질이 차례로 밝혀졌습니다. 본래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사랑 안에 있었고 퍼셉션으로 알려졌지만,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신앙에 관한 지식과 교리로 따로 인식되었으며,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참된 신앙의 생명을 잃는다는 사실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창4:3에서는 그 신앙으로부터 무엇이 나오는지를 다룹니다. 다만 ‘날들의 끝에’라는 표현 자체가 어떤 영적 과정의 완성이나 특정 단계를 직접 의미한다고 여기기보다는,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의 설명 그대로 ‘시간이 흐른 뒤’라는 뜻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바로 다음 AC.347에서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그다음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합니다. 여기서 ‘땅의 소산’이라는 표현 자체를 언제나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 AC.343에서 인용된 사30:23의 ‘땅의 소산의 양식’은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말씀의 상응을 하나의 고정된 암호표처럼 사용하여 ‘땅의 소산=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그것을 가져오는 사람이 ‘가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고, AC.345에서는 ‘농사하는 자’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경작한 땅에서 나온 소산은 그와 같은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의미합니다. 같은 표현도 그것이 놓인 문맥과 연결된 영적 상태에 따라 의미를 살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는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소산을 거두었으며 그것을 여호와께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문제를 단순히 ‘선행을 하는 사람과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의 대비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외적으로 선해 보이는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내적 성질이 자동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단지 어떤 종류의 외적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행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종교적 봉사나 헌신처럼 보여도 그것이 자기 의와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행하는 것인지에 따라 그 내적인 성질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면을 쉽게 판단할 수 없으므로, 이 원리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행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살피는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AC.346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지점은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을 ‘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풀이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거기에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예배가 앞에서 말한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예배와 그의 내적 생명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인도 여호와께 제물을 드립니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 때문에 가인의 이야기는 더 깊은 경고가 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도 종교적인 형태를 갖출 수 있고,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심지어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의 형태까지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의 설명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교리가 사람을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고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면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46에서는 문제가 단지 머릿속의 지식과 교리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자기 나름의 삶과 종교적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활동의 양만 가지고 신앙의 생명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종교 활동을 하고 있는가보다 그 신앙과 행위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가 더 근본적인 질문이 됩니다.

 

이것은 이어질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면 두 사람 모두 여호와께 제물을 드립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가져오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가져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식물 제사는 나쁘고 동물 제사는 좋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적인 제물의 종류가 주님의 반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AC.346이 이미 가인의 제물을 설명하면서 그 배후에 있는 신앙과 행위의 성질을 먼저 밝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인의 제물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예배이고, 뒤에서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로 설명됩니다. 두 예배의 차이는 외적인 물건의 차이보다 그것을 낳은 내적 상태의 차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46은 예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 자체에 큰 의미를 둡니다. 물론 예배는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주님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신앙생활의 소중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AC.346은 ‘예배를 드렸는가?’와 함께 ‘그 예배는 어떤 신앙과 사랑에서 나오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이것은 예배 중에 감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형식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드렸는지를 평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가 우리를 주님 앞에서 낮추고, 자기 안의 악을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지를 살피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예배와 삶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아니라 같은 내적 생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특히 가인의 제물이 무거운 이유는 그가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도 교리는 남을 수 있고, 종교적 행위도 남을 수 있으며, 예배도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종교생활이 활발하다는 사실만으로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되어 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이것을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의 예배를 의심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의 내적 사랑을 완전히 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AC.346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나는 예배하고 있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내 예배와 신앙은 나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묻게 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AC.346의 흐름은 매우 간결합니다. ‘시간이 흐른 뒤 →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 → 거기에서 나온 예배’입니다. 앞의 AC.338-345가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는 상태의 성질을 설명했다면, 이제 AC.346-349는 그 상태에서 나온 행위와 예배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벌써 중요한 사실 하나가 분명해집니다. ‘행위가 있다’는 것과 ‘체어리티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같은 말이 아니며, ‘예배가 있다’는 것과 ‘예배의 내적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도 언제나 같은 말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하고, 참된 행위는 그 체어리티의 선을 나타내며, 참된 예배 역시 그 생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6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는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입니다.

 

 

 

AC.347,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때’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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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5, 창4:2,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농사하는 자’ 가인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5‘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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